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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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 우리세계에 대한 확고한 전제(前提)악의 시대라는 표현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된 계기라 해야겠다. ()이 만연한 세상이라는 점에 무언의 공감이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또한 인류의 그 어느 시대보다 번성하는 악의 지배적 힘을 체감하고 고뇌와 고통, 분노 그리고 무력감을 돌파해내기 위한 지혜에 대한 갈구 탓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압박감으로 인한 삶의 혐오와 냉소를 떨쳐내기 위한 희구 그것이었을 것이다.

 

1. ()은 인간 내면의 본질이다

 

더구나 는 악(), ‘는 선()이라는 경계를 간단히 그어버리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그 편협성과 무지(無知), 이기심에 대한 두려움도 내겐 중요한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안의 악은 한 번도 주시하지 않은 채 타인만을 판단하려하고, ‘나만큼은 선인이고 정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몽매함의 그 무섭고 집요한 인물에 대한 충격이 온 나라를 휩쓸어 댔으니 이 시의적절한 저작이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필연이지 않았을까?

 

저자는 말한다. “악을 자기 바깥의 세계로 몰아내는 상식에는 인간이란 이런 거다. 라는 착각이 지배하고 있다고. 인간의 심연에는 무수한 악이 존재한다. 탐욕, 증오, 시기심, 성적갈망, 거짓, 분노, 폭력...심지어 죽음충동에 이르기까지 등등의 어둡기만 한 그것이 철저하게 거부되고 억압되어 침잠해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린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자아가 되기 위해 통제하고 조절하며 억압하고 있을 뿐이다. 악은 우리의 바깥에 있지 않다. 악인(惡人)이란 별개의 종자가 아니다. 자기 내면의 악에 압도된 인간일 뿐이다. 이것의 외형적 발현은 소설가 정유정[종의 기원]에 그려진 연쇄살인범이기도 하며, ‘한나 아렌트가 묘사한 나치 독일의 아이히만과 같은 무사고(無思考)적 인물이며, ‘윌리엄 골딩의 소설 [핀처 마틴]의 에고이스트(egoist)처럼 무수한 형태의 우리들일 뿐이다.

 

2. 왜 오늘 악이 번성하고 만연하나

 

이해타산이 만연한 세계가 일반화되면 에고이스트들이 득세하는 것은 당연하다.” -P129

 

강상중자본주의의 개화는 악의 거래를 통하여 선을 낳는다. 라는 허구위에 축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악에 의해 부정적인 형태로 이어져 있는 사회의 연쇄가 긍정적인 형태로 전환될 수 있다는 확신을 송두리째 도려내버렸기 때문에 자본축적에만 골몰하는 개인화의 가속화를 재촉하는 오늘 세계는 필연적으로 악이 번성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들의 세계는 인간 연대(連帶)의 단절, 인간의 소외와 파편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대라는 점이다. ‘인색하기 그지없는 욕망의 경쟁은 이제 생존조건이고, ‘만 믿어야 된다는 신념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에고이스트만이 살아 갈 수 있는 끔찍한 세계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상대주의, 즉 이런 해석도 가능하고 저런 해석도 가능하며, “사회를 지지하던 객관적 가치기준이 흔들리는 가운데 무엇이든 괜찮다는 식으로 변모하다 보니, 점점 의미가 자기증식하고 이 의미증식은 바로 의미의 공동화(空洞化)로 이어진다. 무엇이든 믿어도 좋다는 것은 실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이 공허함, 텅 빔이 악의 실체이기도 하다.

 

이런 세계 속의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주위의 모든 것에서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되고, 타자는 그저 자신의 생존을 위한 도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타자는 그저 물질인 것이다. 살아있는 구체적 실감이 없는 인간, 그 텅 빈 인간, 신체성(身體性)을 결여한 인간, 바로 악인이 양산된다. 자본주의는 악의 배양기가 된다.

 

3. 악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책 속에는 몇몇의 문학 작품 속 악인을 인용한 다양한 악의 실체를 보여주기도 하는데(실은 테리 이글턴[()]이란 저술과 패턴이 지나치게 유사하여 내겐 진부한 사례였다), 그 중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브라이턴 록]의 주인공인 악인 핑키의 연인이었던 로즈와 사제의 대화는 악의 내재성과 인식에 대한 의미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는 지옥에 떨어졌어요.” 라는 로즈의 말에 사제는 가장 선한 자의 타락은 가장 악한 타락이 되리니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톨릭 신자는 누구보다도 악을 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의 존재를 믿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악마와 접촉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들의 의식적인 인격이 확실히 도덕적인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결코, 내면의 악을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인식함으로써 우린 그것을 절제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자기 안의 악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악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무인식성, 무사고성으로 인해 가증스러운 인간이 된 인물을 최근에 우린 보지 않았던가? 자기 악으로부터 침식된 자아를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한 인간,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자기변명 같은 것만 되풀이하는 구치소의 인간을 말이다.

 

4.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악이란 바로 이처럼 인간과 세계가 단절되어 있을 때 생기는 꺼림칙한 공허감의 연쇄이기도 하다. 그가 얼마나 폐쇄적이었던가? 구중궁궐에 들어앉아 귀를 닫고, 관계를 폐쇄한 인간, 이러한 연쇄가 없는 전능감(全能感)은 필연적으로 파탄을 낳지 않는가? 아마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공허하고 불안한 상태에 끊임없이 놓여 있었을 것이다. 이해 불가능한 악이란 이처럼 철저한 결여란 감정에 기생한다. 이 공허함을 품은 존재가 결여한 것은 바로 신체성이다. 신체의 결여는 곧 악이다. 악인이란 오늘 개인화와 물질적 욕망의 경쟁에 내몰린 우리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그 공허감, 공동화에서 비롯된다. 용기 있게 내 안의 악과 마주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타협해야 한다.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자기 인격을 덮어씌운 선한 페르조나(가면)는 내가 아니다. 나를 알아야 악을 제압할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사는 법을 체득한 사람만이 선을 행할 수 있다.”라고. 사는 법이란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죽음의 충동()을 조금씩 길들여 제어하고 조절하는 작업이라고. 이것은 결코 외로운 작업이어선 안 된다. 바로 내가 세상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때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대의 단절이 아니라 연대의 연쇄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세상의 일부이며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할 만 한 가치있는 세상이라는 인식, 관계성의 회복, 이것이 악의 골짜기, 악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힘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강상중은 악이란 관계를 결여한 병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곤 관계를 회복하기위한 단초는 용서 할 수 없다는 악까지 살려두는 연대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부정의 연대가 결국에는 긍정의 연대로 변화하는 기회가 된다면 우린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이어져 있다는 실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제시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사회는 분열되고, 개인화가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지점에서 이 책은 오늘 우리사회에 다시금 나와 우리들의 내면적 본질과 체제 시스템의 속성을 재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열어나가야 하는 절박한 시점에 귀중한 교사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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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책, 모비 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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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속으로 사라졌다가 적당한 때에 수면 위로 튕겨 오르는 책

             - 모비 딕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책이었다.”   P 129에서

 

내게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 대한 기억이란 증기압력 솥에 가두어진 듯 내면의 고통과 분노로 가득 채워진 인물, ‘에이해브와 무시무시하고 신비스러운 가능성으로 가득한 흰 고래를 떠 올리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리고 읽어나가기가 꽤나 지루해서 이야기의 장면에 직접적이지 않은 부분은 건너뛰며 대결 국면의 화려한 장면으로 급하게 나아갔던 것 같다. 결국 스토리에 집착한 읽기였기에 작품에 대한 감동이나 이해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 너세니얼 필브릭모비 딕에 바치는 이 경외(敬畏)의 찬가는 내심 부럽고 독서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이 때문인지 멜빌사고(思考)는 냉정함과 차분함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기에 우리 딱한 심장은 쿵쾅거리고 모자란 뇌는 너무 심하게 고동친다.”라고 호손’(일곱 박공의 집著者)에게 작품 창조에 대해 자조(自照)처럼 한 말이 마치 내게 한 말처럼 다가온다.

 

또한 필브릭에게 모비 딕회의와 희망을 뒤섞는 데서 오는 구원, 짧고 터무니없고 부조리한 삶 앞의 온화한 극기심을 가져다주는 생애(生涯)의 책이다. 나는 이런 책을 아직 가져보지 못했다. 아마 멜빌의 자조와 같은 이유와 무지가 겹친 탓일 것이다. 어쩌면 은폐된 오만 때문일지도. 그래서인지 내겐 멜빌의 책에 보내는 이 애정 그득한 저작이 진정성과 사랑으로 읽혀졌던 것 같다.

 

모비 딕이 노예제에 대한 갈등, 노동 착취, 야심가들의 위선, 길 잃은 젊은이들의 방황, 권력을 잡기위한 선동적 언어 등 19세기 미국 사회의 불안한 시대상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은 비로소 알게 된 행간의 의미이다. 소설 속 화자인 이슈메일(이스마엘)’의 그 많은 독백의 문장들이 21세기 오늘에 이식해도 전혀 의미를 잃지 않는 삶의 정곡들이었음을 듣게 되는 것도 또 다른 깨달음이요 즐거움이 된다.

 

이 삶에서 사랑하고 일하고 행복해 한다는 것은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에서의 쇠락과 죽음 말이다. - 이 깨달음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의 저주다. 이 진실을 인지하고 직접적으로 내면화한다면 에이해브처럼 미치게 된다.” P 64에서

 

멜빌이 소설에서 이슈메일의 입을 통해, 자신의 현실적 삶 내내 지배해 온 의문의 발설이기도 한 이 문장은 죽음으로 자신이 전적으로 소멸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천국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를 온통 태워버려야 했던 작품이었음을 상상하게 된다. “지상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영원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확신을 보이는 이슈메일의 믿음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한편 멜빌의 이 작품이 셰익스피어와 호손의 영향이 반영된 작품임을 알게 되기도 하는데, 에이해브의 가면 뒤에 있는 실재의 고통과 같이 호손의 불가해한 본질이 사방에 존재하며, “‘어둠의 위대한 힘에 사로잡힌 인정받지 못한 천재처럼 셰익스피어의 캐릭터에서 비롯된 차용 같은 것들이다.

 

이 밖에도 그저 스치듯 지나갔던 장면들의 그 현실감 넘치는 묘사들을 새롭게 보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작살잡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노잡이들이 부들부들 떨며 숨을 헐떡인다....”와 같이 포경보트에 탄 선원들이 모비 딕이 일으킨 거대한 너울을 헤쳐 나가는 모습의 사실감이다. “무엇보다 여러분이 모비 딕을 읽게 만드는 것이 관심사라고 말하는 저자 필브릭의 희망은 결코 헛된 욕심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책 장 저 밑에 꽂혀있던 700여 쪽의 책을 다시금 꺼내 들었으니까.

 

필브릭의 저술인 이 책의 미덕을 말한다면, “원조 황무지인 드넓은 대양(大洋)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멜빌의 책은 그야말로 거대하고 통 큰 주제들의 향연임을 보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말처럼 우리도 그만한 크기로 팽창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부풀게 한다. 구명부표가 된 퀴퀘그의 관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다시 떠오를 수 있는 문학으로 유혹하는 이 책에 겸허하게 갈채를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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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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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것의 형상”, 얼굴 없는 남자가 화자인 에게 약속했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지극히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장면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첫 장인 프롤로그가 소설 속 실체로 등장하는 데에는 무려 일천 쪽 가까이 읽어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새로 인식 될 만큼 이야기의 흡입력은 폭력적이며 압도적이다.

 

이야기의 전체 구조는 초상화 전문화가인 일인칭 화자(話者)의 아홉 달 남짓한 기억의 술회(述懷)이지만, 그 경험의 세계가 너무 격렬해서 발을 디딘 현실을 잠시 벗어난 느낌조차 갖게 된다. 또한 소설의 표제이자 핵심 소재인 노()화가의 숨겨졌던 그림인 기사단장 죽이기는 뫼르케가 쓴 프라하로 떠나는 모차르트라는 노벨레에서 정신없이 돈 조반니의 피날레인 저녁 성찬부분을 읊어대는 모차르트의 망아(忘我)적 장면과 겹쳐지면서 차갑게 파고드는 어떤 파멸과 죽음의 공포로 전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죽음에 주목하게 되는데, 심장판막 증세를 지닌 누이동생의 죽음을 안은 ’, 독일의 오스트리아 강제 합병에 저항하다 처형된 연인과 난징 대학살에 참전했다 귀국 후 자살한 남동생을 지닌 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 그리고 엄마를 잃은 열세 살 소녀 아키가와 마리에가 동시에 직면해야 했으리라는 세계에 대한 분노, 무력감, 그리움 등의 어렴풋한 공감을 갖게 된다. 삶의 시간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멈춰버린 세계, 발설할 수 없는, 은폐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들 내면의 저 밑바닥에 침잠해 있는 어둠이 비밀처럼 이야기 속에 내려앉아 있다.

 

아내로부터의 이혼 통보를 받은 의 무력(無力)과 무념(無念)의 여정, 방랑을 끝내고 거처가 된 오랜 친구인 미대(美大) 동창생의 아버지인 유명화가의 교외 산 속 외딴 저택, 생업이었던 상업적 초상화 그리기를 멈추려 하는 에게 제안된 고액을 대가로 한 의문의 인물로부터의 초상화 의뢰, 그리고 새벽이면 들려오는 방울 소리, 우연히 발견된 아스카 시대를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는 의 정사(情事) 장면과 함께 거대한 서사를 이룬다.

 

방울 소리의 근원지를 파헤치고, 발견 된 방울과 삼 미터 깊이의 구덩이는 내겐 은폐된 음험한 무의식의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이자 산도(産道)로 여겨졌는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어떤 존재에 일치되지 않아 거부하고 억압한 어두운 무엇의 실체가 도사리고 있는 곳에 이르는 곳, 혹은 그곳에서 나오는 곳으로서 이것은 구덩이를 개방한 이후 에게 발현하는 기사단장의 형상을 한 이데아로 인해 더욱 구체적 심상(心想)이 되었다.

 

결국 구덩이는 의 정사와 함께 이데아의 통찰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의 에로스를 말한 플라톤의 동굴을 지속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의 섹스는 인식의 확장을 추동하는 힘으로서의 에로스이기도 하며, 어두운 현상의 세계를 벗어나 이데아에 이르게 하는 추동력이기도 하다. 또한 은폐된 것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으로 가는 출입구, 그래서 마주하기를 피했던 두려움의 그것들과 마주하고 삶의 균형을 비로소 만들어 낼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붙들렸다고 해야겠다.

 

이러한 맥락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별 통보를 받은 이후 한 달 남짓한 화자(話者)의 방랑 여정 중 미야기현 해안 작은 마을에서의 일화가 꽤나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한 연인과의 격렬한 정사, 그리고 화자에게 깊이 각인되어 훗날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초상화의 인물인 가죽점퍼 차림의 남자는 다름 아닌 의 투사(投射)였으리라는 점이다. ‘아마다 도모히코, ‘의 그림은 그네들의 숨겨진 실체이다. 그네들에게 삶의 평온은 이것들과 마주할 용기를 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리라.

 

바닥에서 칼에 찔리는 기사단장을 바라보는 은유적 인물인 얼굴 긴 남자의 굴(어둠)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드는 의 행동은 삶의 복원을 향한, 멈췄던 삶의 시간을 다시금 흐르게 하는 비로소의 용기이다. 때문에 아내 유즈와의 재회와 딸을 얻는 엔딩, 그리고 마침내 소실되는 두 개의 그림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랄 수 있다. 나는 괜스레 화자 에게 시기(猜忌)를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처절한 자기 내면의 응시를 지닐 수 있었던 그이기에,

 

이 소설의 묘미를 이처럼 몇 문장에 모두 설파해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작게는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에 등장하는 메타포로서의 인물들과 소설 속 인물들과의 매치, 정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천박하지 않은 이야기의 곳곳에 펼쳐지는 정사의 장면들, 자기희생이라는 이데아의 행위 속에 깃든 의지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 역사적 사건으로 등장하는 1938년 독일 오스트리아의 합병으로 이어진 안슐루스와 193712월에 저질러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에 감춰진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사색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가히 생명력 넘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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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거대한 서사를 단숨에 읽어나갈수 있는 것은 ‘이야기‘로서의 소설의 참맛이 아니었을까? 안개에 덮여있는 듯한 환상과 경계의 혼돈, 그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사랑의 간절한 울림이 떠나지 않으며, 신비와 스릴과 무수한 복선들의 얼킴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여운을 가져다 준 작품이랍니다.

 

1Q84년, 아오마메, 덴고, 공기번데기, 리틀피플...시간이 지나도 소설 속 단상들이 여전히 제 기억에 간직되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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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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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결정화된 고독들...

 

시간의 풍파를 많이 쐰다는 것, ‘의 존재를 구성케 하는 사람들을 잃는다는 것, 내가 말한다는 것, 그리고 무지와 탐욕과 비겁함으로 무장된 패거리들과 공존한다는 것, 터무니없는 범주화와 규정화로 반지성이 압도하는 기만의 세계에 산다는 것 등등....., 아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의 시간 속에 있다. 어떤 것은 내가 살아낸 것이어서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많은 것들에서 나는 무지하다. 그래서 이 무지의 자기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결코 타자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작가의 전작(前作)비행운에 수록된 단편,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는 비로소 타인의 아픔을 깨닫는 인물이 등장한다. “내가 살아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는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 존재함에 대한 이 겸허함이 곧 자기이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깥은 여름을 읽었다고 해야겠다. 이것은 풍경의 쓸모에서 화자인 시간강사 이정우가 말하는 유리 볼 속의 하얀 눈과 구 바깥의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時差)’, 그것이 아닐까?

 

작품집 수록 첫 작품인 입동에는 이십사 년 만에 마련한 집 단장에 소박한 열성을 보이는 여자와 그를 바라보는 남자가 있다. 부유(浮遊)하다 비로소 정착 한 곳, 그곳에서 부부는 아이를 여윈다. 상실의 처절함으로 자기 삶을 잃어버리고 공허감에 온통 뒤틀린 내면의 음울함에 고통 받는 이들에게 보내는 뭇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 역시 시차일 것이다. 아이의 죽음에 보험금으로 책임을 다했다는 듯한 어린이집 원장, 마침내 삶의 시간을 회복하려는 듯이 부부는 보험금을 대출금 상환에 쓰려 하지만 한파가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온 몸이 떨리기만 한다. 끝없이 자문케 하는 이 고통스러운 의식을 감히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수록작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또한 시차, 어렴풋한 자기이해, ‘라는 물음에 비로소 답하게 되는 명지를 발견하게 된다. 물에 빠진 중학생을 구하고 자신은 나오지 못한 남편인 도경으로 침잠한 내면, 어두운 공동에서 나오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나는 어떤 시간이 내 안에 통째로 들어온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걸 매일매일 구체적으로 고통스럽게 감각해야 한다는 것도. 피부 위 허물이 새살처럼 돋아날 수 있다는데 놀랐다.” -P 238

시간이 멈춘, 삶이 멈추는 고통이리라. 그것은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도는 것이며, 스마트 폰 음성인식 프로그램에 진부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이렇게 읽힌다. 타자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누군가의 상상을 상상하는 상상 안에 계산돼있는 프로그램이상 일 수 없다는 것으로.

 

그리고 소설에는 또 하나의 시차가 있다. 죽은 학생의 누이가 보낸 편지, 동생은 살았으나 세상을 등진 선생의 아내인 명지의 아픔을 조심스럽게 보살피는 순수한 그것, 이것을 통해 명지는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중략)....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라는 자기이해에 도달하는 것 같다. 비로소 멈추었던 삶이 다시 움직인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라고.

 

또 다른 수록작, 풍경의 쓸모에서 시간강사 이정우가 교수 임용에서 탈락한 후, “풍경이 더 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라고 자기이해를 말하는 순간이다.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 혜택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이것은 사진을 찍기 위해 풍경을 배경으로 여기에 서 정우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소리가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것이었다는 자각, 즉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의 이야기와 교호하면서 과거가 될 만한 자세였다고 말하는 시차 바로 그것일 것이다. “영원한 무지!” , “더블 폴트!” 타자 읽기에 연속적으로 실패하는 것. 삶의 지혜란 것이 진정 있다면 겸허한 자기 이해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버려진 늙은 개와 할머니의 손에 자라는 아이의 용서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노찬성과 에반, 혼혈아를 키우는 요양병원 영양사인 여자의 믿음과 의혹의 이야기인 가리는 손또한 시차의 다른 의미일 것이다.

- 있잖아, 에반, 나는 늘 궁금했어.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

- .....

- 에반, 많이 아프니? 내가 잘 몰라서 미안해.

- .....

 

무지에 대한 이해만큼 진실한 것이 있을까? 비로소 타자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고 사랑이 스며든다. 반면, 동남아계 남편과 이별한 후 혼혈아인 재이를 키우는 여자는 무리에서 부정당한 느낌”, “시간이 매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기분을 지닐 아이의 배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아이들의 무리가 폐지를 수거하는 노인에게 폭력을 가할 때 재이가 먼발치에서 목격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동영상에 찍힌 자기 아이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을 가리는 손이라는 의혹도 깃든다. 죽은 사람에게 절 할 때 외람되지 않게 가리는 그 밥 먹는 손은 이렇게 이중적이다. 사악함을 가리는 손, 겸허와 예를 갖추는 손,..... ‘틀딱이라고 노인세대를 범주화하여 경멸하는 터무니없이 파렴치한 언어를 가진 도덕이, 가져 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라고 그저 치부할 수만 있는 것인가? 이 사회적 자기의 몰이해, 이 기만의 언어가 우리들 자신을 오염시키고 인간성을 저만큼 후퇴케 한다.

 

상실, 공허감, 멈추어버린 시간, 왜곡되어버리기만 한 삶의 뒤틀림과 그리고 고독이라는 삶의 개별성이 발산하는 무기력의 쓸쓸함이 침묵의 미래속 소수언어박물관에서 하얗게 결정화 된 고독...”으로 자기 삶을 온통 말을 그리워하는 데 썼던 화자의 마지막 화자의 고통처럼 내게 스며든다. 이 소설집은 그렇게 내 무지에 더욱 겸허할 것을, 감히 연민이란 말을 함부로 뱉어내지 말 것을, 고요하게, 그러나 그 무엇보다 진실하게 울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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