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오늘 우리세계에 대한 확고한 전제(前提)악의 시대라는 표현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된 계기라 해야겠다. ()이 만연한 세상이라는 점에 무언의 공감이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또한 인류의 그 어느 시대보다 번성하는 악의 지배적 힘을 체감하고 고뇌와 고통, 분노 그리고 무력감을 돌파해내기 위한 지혜에 대한 갈구 탓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압박감으로 인한 삶의 혐오와 냉소를 떨쳐내기 위한 희구 그것이었을 것이다.

 

1. ()은 인간 내면의 본질이다

 

더구나 는 악(), ‘는 선()이라는 경계를 간단히 그어버리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그 편협성과 무지(無知), 이기심에 대한 두려움도 내겐 중요한 동기였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안의 악은 한 번도 주시하지 않은 채 타인만을 판단하려하고, ‘나만큼은 선인이고 정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몽매함의 그 무섭고 집요한 인물에 대한 충격이 온 나라를 휩쓸어 댔으니 이 시의적절한 저작이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필연이지 않았을까?

 

저자는 말한다. “악을 자기 바깥의 세계로 몰아내는 상식에는 인간이란 이런 거다. 라는 착각이 지배하고 있다고. 인간의 심연에는 무수한 악이 존재한다. 탐욕, 증오, 시기심, 성적갈망, 거짓, 분노, 폭력...심지어 죽음충동에 이르기까지 등등의 어둡기만 한 그것이 철저하게 거부되고 억압되어 침잠해 있을 뿐이다. 다만 우린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자아가 되기 위해 통제하고 조절하며 억압하고 있을 뿐이다. 악은 우리의 바깥에 있지 않다. 악인(惡人)이란 별개의 종자가 아니다. 자기 내면의 악에 압도된 인간일 뿐이다. 이것의 외형적 발현은 소설가 정유정[종의 기원]에 그려진 연쇄살인범이기도 하며, ‘한나 아렌트가 묘사한 나치 독일의 아이히만과 같은 무사고(無思考)적 인물이며, ‘윌리엄 골딩의 소설 [핀처 마틴]의 에고이스트(egoist)처럼 무수한 형태의 우리들일 뿐이다.

 

2. 왜 오늘 악이 번성하고 만연하나

 

이해타산이 만연한 세계가 일반화되면 에고이스트들이 득세하는 것은 당연하다.” -P129

 

강상중자본주의의 개화는 악의 거래를 통하여 선을 낳는다. 라는 허구위에 축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악에 의해 부정적인 형태로 이어져 있는 사회의 연쇄가 긍정적인 형태로 전환될 수 있다는 확신을 송두리째 도려내버렸기 때문에 자본축적에만 골몰하는 개인화의 가속화를 재촉하는 오늘 세계는 필연적으로 악이 번성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오늘 우리들의 세계는 인간 연대(連帶)의 단절, 인간의 소외와 파편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대라는 점이다. ‘인색하기 그지없는 욕망의 경쟁은 이제 생존조건이고, ‘만 믿어야 된다는 신념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에고이스트만이 살아 갈 수 있는 끔찍한 세계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상대주의, 즉 이런 해석도 가능하고 저런 해석도 가능하며, “사회를 지지하던 객관적 가치기준이 흔들리는 가운데 무엇이든 괜찮다는 식으로 변모하다 보니, 점점 의미가 자기증식하고 이 의미증식은 바로 의미의 공동화(空洞化)로 이어진다. 무엇이든 믿어도 좋다는 것은 실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이 공허함, 텅 빔이 악의 실체이기도 하다.

 

이런 세계 속의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주위의 모든 것에서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하게 되고, 타자는 그저 자신의 생존을 위한 도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타자는 그저 물질인 것이다. 살아있는 구체적 실감이 없는 인간, 그 텅 빈 인간, 신체성(身體性)을 결여한 인간, 바로 악인이 양산된다. 자본주의는 악의 배양기가 된다.

 

3. 악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나

 

책 속에는 몇몇의 문학 작품 속 악인을 인용한 다양한 악의 실체를 보여주기도 하는데(실은 테리 이글턴[()]이란 저술과 패턴이 지나치게 유사하여 내겐 진부한 사례였다), 그 중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브라이턴 록]의 주인공인 악인 핑키의 연인이었던 로즈와 사제의 대화는 악의 내재성과 인식에 대한 의미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는 지옥에 떨어졌어요.” 라는 로즈의 말에 사제는 가장 선한 자의 타락은 가장 악한 타락이 되리니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톨릭 신자는 누구보다도 악을 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의 존재를 믿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악마와 접촉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우리 인간들의 의식적인 인격이 확실히 도덕적인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결코, 내면의 악을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인식함으로써 우린 그것을 절제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자기 안의 악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이 어떻게 악인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무인식성, 무사고성으로 인해 가증스러운 인간이 된 인물을 최근에 우린 보지 않았던가? 자기 악으로부터 침식된 자아를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한 인간,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자기변명 같은 것만 되풀이하는 구치소의 인간을 말이다.

 

4.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악이란 바로 이처럼 인간과 세계가 단절되어 있을 때 생기는 꺼림칙한 공허감의 연쇄이기도 하다. 그가 얼마나 폐쇄적이었던가? 구중궁궐에 들어앉아 귀를 닫고, 관계를 폐쇄한 인간, 이러한 연쇄가 없는 전능감(全能感)은 필연적으로 파탄을 낳지 않는가? 아마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공허하고 불안한 상태에 끊임없이 놓여 있었을 것이다. 이해 불가능한 악이란 이처럼 철저한 결여란 감정에 기생한다. 이 공허함을 품은 존재가 결여한 것은 바로 신체성이다. 신체의 결여는 곧 악이다. 악인이란 오늘 개인화와 물질적 욕망의 경쟁에 내몰린 우리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그 공허감, 공동화에서 비롯된다. 용기 있게 내 안의 악과 마주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타협해야 한다. 균형을 잡아야 한다. 자기 인격을 덮어씌운 선한 페르조나(가면)는 내가 아니다. 나를 알아야 악을 제압할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사는 법을 체득한 사람만이 선을 행할 수 있다.”라고. 사는 법이란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죽음의 충동()을 조금씩 길들여 제어하고 조절하는 작업이라고. 이것은 결코 외로운 작업이어선 안 된다. 바로 내가 세상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때에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연대의 단절이 아니라 연대의 연쇄로,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세상의 일부이며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할 만 한 가치있는 세상이라는 인식, 관계성의 회복, 이것이 악의 골짜기, 악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힘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강상중은 악이란 관계를 결여한 병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곤 관계를 회복하기위한 단초는 용서 할 수 없다는 악까지 살려두는 연대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부정의 연대가 결국에는 긍정의 연대로 변화하는 기회가 된다면 우린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이어져 있다는 실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제시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사회는 분열되고, 개인화가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지점에서 이 책은 오늘 우리사회에 다시금 나와 우리들의 내면적 본질과 체제 시스템의 속성을 재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열어나가야 하는 절박한 시점에 귀중한 교사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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