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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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우리에겐 결코 낯선 용어가 아니다. 또한 마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선명하지는 않지만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이며, 민주주의라는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에 그리 저항감이 들지도 않는다. 게다가 민주주의는 선(善)한 것이지, 악(惡)한 것과는 결코 친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으며,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통치권력은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통치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권리를 위임받아 수행하는 대표자들일 뿐이라는 점에 의문을 달지 않는다. 대체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이해와 신념이 이런 환상을 갖게 한 것일까? 더구나 정말 우리사회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사회임에는 분명한 것인가?

만일 민주주의가 선한 것이라는 우리들의 믿음이 옳은 것이라면‘자크 랑시에르’는 왜 ‘민주주의는 증오의 대상인가?’하고 묻는 것일까? 누군가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일 것이며, 증오할만한 명백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 누군가란 누구이며, 민주주의가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어떤 양상을 타나내고 있기에 그렇게 혐오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논의와 주장은 정당하고 타당한 것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을 에워싼 환경을 이해하고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데 중대한 양식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민주주의에 내재되 있는 그 이중적 모습과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정착되고 운용되고 있는지, 나아가 민주적 삶이란 것이 오늘날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세계의 실상을 성찰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진정 범죄적인가?

민주주의란 인민의, 인민의 대표의 통치 체제이다. 또한 누구도 타자에 대한 우월성이 존재하지 않는 원칙이며, 따라서 통치를 위한 모든 자격을 배제하는 무정부적 체제이다. 그러하다보니 개인 저마다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혀 무질서를 창조한다. 개인과 공통의 이익을 지닌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기위해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각종의 요구로 혼란을 증식시킨다. 그런가하면 공동체를 위한 공공선에는 무관심한 인민이 양산 된다. 민주적 삶이란 이런 것이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인간들마다의 욕망에 기초한 혼란과 무질서를 속성으로 한다. 우리 사회를 조금만 응시해보면 공동체의 이타성이나 중심을 결여한 채 분산되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는 민주주의적 인간이 만들어내는 실상을 볼 수 있다. 즉 개인들의 무제한적 욕구가 지배하는 사회체제, 이기적 소비자인 민주주의적 인간들의 탈정치화된 삶의 모습,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 문화산업, 줄기세포 등에 무관심한 부(負)의 과잉을 목격하게 된다. 악(惡)으로서의 민주주의이다. 한편으론 사회에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분출하는 욕구의 과잉, 다른 한편으론 공공선에 무관심한 이중적 과잉으로 치닫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 속에는 이기적 개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소비지향적 인간들의 경박함을 비난하면서 이것을 이유로 인민의 권력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가 비록 통치력에 압력을 가하는 요구들의 불가피한 증가를 의미하지만 이것이 없다면 폭정, 독재, 전체주의와 같은 적이 발생한다. 또한 소비주체로서의 개인화에는 민주주의 부재와 평등의 결여를 은폐하려는 거짓된 평등의 개념과 자본주의 경제의 무제한 성장추구를 대중적 개인주의 탓으로 돌리려는 음험한 책략도 숨어있다. 이것은 자신들의 거친 파렴치에 기초하는 이기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측들의 편협한 주장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통치되어야 할 사회도 아니며, 한 사회의 통치체제도 아니다. 그것은 통치불가능 자체이며, 이러한 통치불가능성에서 모든 통치행위가 그 기초를 찾아야 한다.”는 말처럼 정치적 장(場)에 집결된 과도한 에너지를 개인적 행복, 사회적 유대관계 등을 추구하며, 이중적 과잉을 제어 할 수 있는 조화의 장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스캔들

우린 진정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통치하고 있는 것인가? 실상은 대다수의 인민이 소수의 권력 행사에 좌우된다. 공공영역을 담당할 권한을 가진 소수가 전체를 대표하는 대의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구의 엄청난 증가에 대처하기 위한 민주주의 실현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대의제란 민주적으로 보이게 하기위한 하나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마치 민(民)의 동의를 구했다는 엘리트들의 권력 유지와 행사를 위한 교활한 수단으로 출발한 것이다. 대의제는 민주주의의 정반대의 것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인민은 엘리트들의 기대와는 달리 권력을 행사할 때마다 통치원칙에 훼손을 가하곤 했으니 대의제는 매우 불안정한 타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모순관계를 잇는‘선거’는 대표성을 통해 엘리트인 소수 지배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지극히 효과적 수단이었으며, 더구나 사회적 동의까지 얻는 것이었으니 일거양득의 기막힌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실제 ‘대의제+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어느 곳이든 선거는 정권교체라는 형태 하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지배층의 재생산을 보장해주고 있으며, 자신들의 생명의 위협 없이 권력을 유지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통치논리와 민의 정치적 분열을 연결하는 위선적 논리로서‘국민주권’이 얼마나 허구의 산물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들 통치집단은 거짓된 민주주의인 개인주의적 민주주의의 논리를 통해 민주적 개인들의 게걸스런 욕구는 인류를 자멸로 이끄는 대재앙이라 하면서 평등에 증오를 내뿜는다. 한국사회의 지배권력이 툭하면 복지포퓰리즘이라 매도하면서 인민을 향해 위협적 언사를 서슴없이 내뱉는 것은 대표적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공공영역을 끊임없이 축소하려고 하며, 자기들의 내부로 흡수하여 사유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곤 국가차원의 과두체제와 경제차원의 과두체의 결탁에 의해 공공영역을 장악하려 든다. 공공영역이란 엘리트 지배계층에 의한 통치와 민(民)의 통치라는 서로 반대되는 두 논리의 만남과 갈등이 충돌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이자 공공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할 것이다.

인민은 공공영역에 대해 하나의 원칙을 구현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거부하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 보호망을 마치 국가의 선물처럼 호도하는 통치권력의 간교함은 배척되어야만 한다. 이는 이들 지배계층과 지난한 노동 및 민주투쟁의 결과물이며, 인민인 자기 산물의 정당한 배분일 뿐이다. 대의제가 올바른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권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우린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지 않다. 과두제적 법치국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지배계층이 지적하는 거짓된 민주주의인 민주적 삶이라 부르는 악을 퇴치하는 그런 통치를 위한 각성이 필요하다.

결 어

지배 권력이 자신들의 민주주의 부재와 평등의 결여를 은폐하기 위해 인민을 내몰고 있는 민주적 인간의 삶이라는 환상, 얼빠진 소비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주의를 마치 사회의 한 형태로 간주하면서 국가 과두체제의 지배를 은폐하려하고 불평등의 심화현상을 조건 평등 정책 만연의 탓으로 돌려 자신들의 이념을 정당화하려는 행태 또한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이중성은 본래 그러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오늘의 사회처럼 이들 지배권력에 휘둘려 무형의 시끌벅적한 군중의 혼란에 갇힐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민에 의한 엄격한 정부형태이어야 하고 민의 타협에 의한 사회형태이어야만 한다. 끊임없이 국가권력은 금권과 연합하여 민의 정치공간을 축소하려 하는데 열중한다. “공공영역에서 과두(寡頭)적 정부의 독점을 위한 탐욕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며, 민의 생활전반에 대한 유산계급의 강력한 영향력을 끈질기게 뿌리 뽑는 것”이 민주주의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물론 악이고 범죄적이 될 수 있다. 그 이중적 모습에서 이기적이며, 소비적인 욕망에 기초한 무질서에 안주한다면 지배계층의 교활한 탐욕의 영속을 고착화시켜주는 비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정당성의 근거를 불평등적 우연성 상태를 인정하는‘평등적 우연성’에 두고 있는 통치할 자격을 가지지 못한 인민의 고유한 권력이다. 누구와도 공평하게 권력을 나눠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기쁨을 선사해주는 아직은 유일한 덕목이기에 우리에겐 포기할 수 없는 선(善)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이중적 모습을 상반되는 정치철학 논의들과 프랑스혁명, 68 학생운동 등 역사적 사건들에 내재된 민주주의의 양상들을 통해 냉철하게 통찰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지구촌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왜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는지, 그 이면의 사실들을 한 꺼풀씩 벗겨내어 범죄적 민주주의라는 오명을 씻어내기 위한 인민의 자성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난과 고발이 지니는 성격의 특수성을 파헤침으로써 실질적 민주주의와 평등의 의미를 감각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규명한 21세기 민주주의가 처한 현상에 대한 탁월한 분석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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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 : 와이 더 라스트 맨 디럭스 에디션 01 시공그래픽노블
브라이언 K. 본 지음, 박재용 옮김, 피아 구에라 그림 / 시공사(만화)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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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 전멸한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unmanned world)"

Gender-cide(성별 말살), 지구상에 공존하던 두 개의 성(性), 여성과 남성 중 하나의 성이 한날한시에 모조리 사라진다면? 그리고 그 사라진 성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바로 ‘나’라면 어떤 일을 하여야하며,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과연 생존을 유지할 수는 있는 것일까? 이처럼 황당하고 쓸데없어 보이기조차 하지만 유전자조작, 인간복제로 치닫는 오만한 인간에 대한 적절한 물음이 이 그래픽노블의 소재이다.

일순간에 지구상의 모든 수컷들이 죽어버렸을 때 세상은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수많은 사회 기간시스템은 제대로 작동될 수 있을지, 본래의 기능으로 복귀하는 것은 가능한지, 종(種)의 번식은 어떻게 될지, 결국 남은 성도 멸종하게 될 것인지, 지구표면의 유일한 남성 생존자를 여성들은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 등 끊임없는 의문이 떠오른다.
종의 번식을 위해 생존 남성을 살려둘까? 아니면 복제기술을 통해 무성생식이란 방법을 선택할까?

이러한 의문들에 인간의 답변들이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얄궂은 사건들과 마주하면서 성(Gender)이 내재하고, 또한 야기하는 인간사회의 문제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하고 고찰하게 한다. 여기에 젠더사이드가 일어난 미지의 음모(?), 혹은 배경이었을 듯한 암시와 또다른 변수의 예고들이 펼쳐지면서 인간의 본성, 은밀한 인간사회의 파멸적 징후들을 탐색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Y 염색체를 가진 두 개체(個體)인 살아남은 스물두 살의 청년‘요릭’과 수컷 원숭이‘앰퍼샌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멸종과 구원의 각축전은 인류 문명의 기로(岐路)라는 위험천만한 외길을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남성 전멸의 세계, 그 후의 세상이 현실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하나 남은 남성의 존재마저 제거하려는 여성 단체‘아마존’, 그리고 생명의 복원을 위해 유일한 남성을 보호하려는 여성들, 게다가 젠더사이드를 조정했을 듯한 미지의 집단까지, 우리들의 지성을 한껏 자극한다. 기발한 소재만큼 그 서사에 도취될 정도로 흡입력이 강한 작품이다.
    
디럭스(Deluxe)판으로 접한 그래픽의 생동감 넘치는 시각적 느낌이 스토리 고유의 감성을 더욱 고조시켜주고, 원본의 초기 이미지들을 알려주는 스케치와 상징적 그림들의 선정적 장면은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드높인다. 작품성 못지않게 매혹적인 도판과 양장된 이 판본은 소장품으로서의 가치까지 배려한 것 같다. 탁월한 상상력과 의미심장한 주제의식으로 쏟아진 세간의 격찬이 빈 소리가 아님을 확인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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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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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산다는 것, 더구나 가진 것에 의해 삶의 질이 결정되는 생태계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항력적 고역이다. 또한 사회적 동물이라느니 공동체의 연대니 하며 타자에 대한 배려와 연민을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실상 그것이 인간의 일상적 삶에서 실천된다든가 이타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며, 단지 외형상 그렇게 보일뿐이며, 자기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만 그렇다는 것이 현실임을 훨씬 많이 경험한다.
이 소설집을 구성하는 일곱 편의 단편소설은 이러한 일상의 현실적 삶의 부조리하고 부당하며 불온함으로 점철된 세상과 인간들을 투시하고 있다.

‘구병모’의 작품들이 일관되게 뿜어내는 응집된 무참한 분노의 양상들을 혹자는 “일상적 무감각에 치명적 독을 주입”하고 있다고 과장되게 너스레를 떨어대고 있지만, 결코 무감각한 것도 아니며, 새삼스레 인간의 일상에 독이 주입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인간들은 자기 이외에 진정한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으며, 그 무관심이 유익하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득한 개체들이다. 따라서 소외니 불통이니 이기적이니 하는 언어의 독성이 마치 외부로부터 주입되어 비로소 깨달았다거나 발견하였다, 창조하였다는 말은 객쩍은 소리에 불과한 것이라 할 것이다.

「타자의 탄생」이란 수록 작품도 있지만 오늘의 인간들, 그리고 현대사회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장치들에 의해 우리는 타자 읽기에 무심하거나 실패하고 있으며, 달리 표현하면 타자이기도 한 자기 역시 읽기에 실패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한 이해라고 하고 싶다. 이처럼 자기반성도 없고 타자에 대한 이해도 없는 현실 속 일상을 투영해서 그것들이 잉태하고 출현하여 휘젓는 악의적 현상들과 참담하고 잔혹한 현실 세상의 수치스러운 속살을 치욕스럽게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타자 읽기에 무심하거나 실패하는 현대인

눈물이 많다는 이유로 담임선생에게 무참한 폭력을 당하는 아이가 그 불이익을 면키 위해 자신의 감정(感情)선을 꿰매어 버린다는 「재봉틀 여인」이란 작품처럼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획일화되고 이기적인 인식능력은 거의 정신질환에 가깝다. 이 행위는 성인이 되어 무표정하며 감정을 나타내지 못하는 기이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교육현실과 사회적 장치라는 것은 이처럼 지속적으로 타자에 대한 이해를 차단한다.

「타자의 탄생」은 제목 그대로 공동체나 인간개체로부터의 분리된 경계외적 인간을 탄생시킨 현대의 인간들과 인간사회의 잔인한 몰지각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주물에 하반신이 박힌 채 구조를 요청하는 남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란 것의 속성을 파헤치고 있다. 떠들썩한 언론과 방송매체의 관음증적 호들갑, 관련 행정기관의 정치적 행동, 전문가들의 고답적인 탁상론, 시민들의 호기심어린 연민이 휩쓸고 지난 뒤의 무관심과 냉담함, 그리곤 외면을 넘어 자신들의 삶의 경계 밖으로 추방하고자 한다. 사실 이 사회의 공동체라는 것은 거듭 확인하게 되지만 바람에 날리는 모래알갱이만도 못하다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 무력함 속에 간절한 구원을 기대하는 남자를 향해 이혼서류를 날리는 아내의 행위야말로 이 시대의 표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조장기(鳥葬記)」란 작품에 이르면 그 난감함은 더더욱 곤혹스럽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휴학한 유아교육과 여대생의 생존을 위한 분투 속에 어쩔 수 없이 이해하고 수긍해야하는 또 다른 생존의 분투에 대한 목격이기 때문이다. 자기 연민에 헐떡이지만 그 비루한 연민조차 타자에게 사용해야하는 현실에 처하게 되는 것인데, 이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피한 타자 읽기는 타자 읽기를 배우지 못한 현대인에게는 당혹 그자체가 아닐까?

마지막에 수록된「곤충도감」은 비로소 타자에 대한 연민의 실천, 타자 읽기의 깨우침을 알려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성추행을 당한 소녀와 성범죄자가 된 남자의 이야기다. 성범죄 예방을 위한 발찌의 효력이 무력해지자 성호르몬에 반응하는 생체기계를 주입하여 예방한다는 발칙한 소재를 가지고 있다. 성적충동의 실행에 이르러 관련 호르몬의 수치가 상승하면 생체기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숙주의 몸을 뚫고 나오게 되는 극단적 장치이다. 인간 본능을 차단하는 이 무분별한 조치에 제물이 된 남자에 대한 피해 소녀의 연민이 흐르고 있다.

우리들의 이해는 어느덧 자기본위, 이기심에만 호소하고 있다. 도덕적 양심을 형성하게 하는 가정과 학교교육은 물론 거의 모든 사회적 제도와 창치, 주류의 담론들이 타자 읽기를 방해하고 무관심을 종용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타자를, 자기를, 서로를 상처내고 고통으로 내몰고, 분열을 조장하며 증오와 분노 그득한 적대감을 증식시킨다. 타자가 혐오스럽다면 자기 역시 혐오스런 개체임을 피할 수 없음이다. 타자의 탄생은 그를 올바르게 읽어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음으로서만 긍정을 가질 것이다.

구별하고 구분 짓는 사회

소설집의 표제작인「고의는 아니지만」에는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구분되어 절로 형성되는 원생인 아이들의 양태로 인해 난감해하는 유치원 선생이 있다. 치열하게 살아가도 허덕이는 부모의 아이들과 유한 집안의 아이들은 의도되지 않았음에도 구별되고 만다. 아이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선생의 배려와 노력은 양면성을 지니고 선의가 악의로 변색되기도 한다.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에 대해 인색하다. 못 가진 자에 대한 배려는 가진 자에 대한 차별이고 분별없음이라고 항변한다. 갖지 못한 자는 무심함이란 부성실과 부당함으로 대처한다. 희생자는 이들 두 분별없는 계층에 세심한 배려를 하려는 자가 되고 만다. 무엇이 이러한 사회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도 타자의 무관심과 읽기의 실패가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소유와 경쟁의 이익추구라는 자본주의 미덕만을 칭송하는 체제의 불편한 진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무심히 뱉어내는 작은 모욕에도 인간들은 몸서리치고 분노한다. 오늘의 인간들에게 관용과 이해, 나눔과 연민의 실천이란 미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유의 언어가 금지된 도시를 배경으로 한「마치.....같은 이야기」란 작품은 바로 이러한 인색하고 외곬의 획일화된 불통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경제적 효율의 추구라는 미명하에 한 단어에는 하나의 의미만을 지닐 뿐 은유나 상징적 표현을 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명확한 의사전달을 위해 의미를 복잡하게 하는 비유는 낭비이기에 금지한다는 것인데, 모든 것을 손익계산과 이익의 추구라는 경제 가치를 최고의 미덕이라 하는 지금의 우리 사회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도덕적 양심과 감성이 효율성에 추방당한 사회. 이러한 사회가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이라고 말하는‘미무르’같은 괴물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 것인지 두렵기조차 하다.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의식은 일견 평온하고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듯이 보이는 우리들의 사회, 그 평범한 일상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자행되는 무분별과 냉혹함, 무관심, 비열함, 이기심, 비정함이 야기하는 잔혹하고 무참한 현실의 각성이다. 도처에서 맹독의 세례를 받아야하는 오늘의 인간들이 건조하고 삭막하며, 증오와 분노로 들끓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개개인들이 스스로 자초한 자가당착이기도 하다. 일상의, 삶의 고통의 실체, 그 근원이 무엇인지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이 따갑다. 구병모식의 환상적이고 기이하기조차 한 소재와 괴이할 정도로 척척 이가 들어맞는 이야기의 흐름이 현실의 잔혹한 삶에 와 닿으면서 일으키는 그 충돌의 굉음과 파편들에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 진실의 섬세한 관찰에. 속이 후련해지면서도 한편 그늘처럼 우울한 작품으로 마음에 남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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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하는 악마
테오 R.파익 지음, 박미화 옮김 / 수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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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 탓에 마치 스릴러 문학작품처럼 보이는 이 책은 인간의 주요 역사를 장식한‘악(惡)’의 실체를 규명해 보려 한 당찬 인문서이다. 단순해 보이고 또한 늘 자신의 도덕적 잣대를 벗어나면 통칭하여 싸잡아 부르는 악이란 단어는 실상 그리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기조차 하다. 악덕, 죄악, 악령, 악마, 사악, 악의와 같이 도덕적 규범을 벗어나거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부정적 의미를 더해 포괄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떤 것은 악에 해당하는 것인지 분류가 모호하고, 분명 악의 본질임에도 이 사회가 칭송하거나 합리화하기까지 하는 것을 볼 때면 더욱 그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것인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악은 선(善)의 반대급부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의 대명사임은 분명하다. 고대 자연 신앙에서는 악은 금기를 깨는 것, 즉 나쁜 기질이나 성품으로 이해하였으며, 스토아학파는 도덕적 이성과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악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부적 영향과의 교섭에 의해서 발흥하는 것인가하는 인간의 보편적 본능에 대해 묻기도 하였으며, 악의 요소에 대한 규명도 꾸준하게 논의되었다. 인간은 왜 이렇게 악에 대해 안절부절, 애처롭게 매달렸을까?

악이란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낸 산물이란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바로 인간 자신이라는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역겨운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치 자기와는 다른 존재인 악을 탄생시키고 그 악의 탓으로 돌려 면죄부를 받으려 한 것일 게다. 또한 자신들의 이해 불가능하고 불가항력적 무능을 감추기 위해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 힘이 있는 악을 핑계 삼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찌보면 이 행위자체가 이미 교활하고 사악하기조차 한 인간 본성의 표현 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악, 스스로 규율할 수 있는가?

‘칸트’는 악을 근본적인 인간의 본성이라 하였다. 그러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기에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과연 이 말은 옳은 주장일까?
설혹 인간이 보편적 도덕본능을 가졌다는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악을 누르고 도덕성이 승리 할 것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실 인간의 역사 어느 한 페이지를 보더라도 악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지 않은가!

악의 기원을 보면 오히려 인간은 꾸준히 악을 연마하고 학습해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자기 생존, 종족보호를 위해 이웃을 공격했으며, 소박한 원시무기부터 시작해서 인류를 한꺼번에 사라지게 할 정도의 가공할 첨단 무기까지 약탈문화를 발전시켜온 것이 그 증거이다. 더구나 <구약성서 출애굽기> 32장에 묘사된 수송아지로 만든 우상 숭배를 하였다는 이유로 3천명을 처형한 모세의 행위는 아마 종교라는 미명하에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사실 종교만큼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탄을 만들어내고, 마녀를 조작해대며 선천적 공격본능을 교묘하게 은폐시키려 한 역사의 거대한 주체이니 말이다. 이 본질을 보면 권위에 대한 탐욕과 지배욕, 맹목적 이데올로기의 강요, 급기야는 종교에 몸을 감춘 지배자들의 경제적 욕망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억압된 성적 망상과 욕구의 강박적 관념에 기인한 마녀사냥, 지배욕과 교만을 숨기고 감찰관으로 재직한 23년 동안 무자비한 박해와 처형을 서슴지 않았던‘칼뱅’의 종교적 광신, 14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의 창궐을 기회로 이단자라는 황당한 명분하에 2억5천만 명을 살해한 종교는 인간의 악을 설명하는데 빠질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종교는 늘 그랬듯이 피에 든 독이다”라는 ‘살만 루시디’의 말이나,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라고 한 ‘리처드 도킨스’의 악의 기원, 악의 근원에 대한 규명은 이러한 현상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다.

더구나 20세기에 이르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기독교전통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형용할 수 없는 인류의 악을 보게 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정치권력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 2천만 명을 학살한‘스탈린’, 국가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라는 이름하에 5천만 명을, 그리고 문화혁명을 통해 7천만 명을 살해한 ‘마오쩌둥’, 그리고 ‘폴포트’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잔혹한 대학살이 그치질 않았다. 단지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에 반하는 계층이나 민족, 단체를 말살하려는 정신 이상적 잔혹행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다.

온갖 악을 축약해 놓은 듯한 각종 고문이 ‘국가는 피를 부르는 원천과 같다’는 말을 입증이라고 하려는 듯이 2006년 국제사면위원회 발표와 같이 100여개 국가에서 은밀하게 실행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힘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말살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정신분석학자‘프로이트’의 말처럼 인간에 내재한 악의 본성을 완벽하게 압축하기도 힘들 것이다. 결국 악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은 인간의 존속을 위해서 절대적이고 최우선적 과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이 악을 넘어서는 우위를 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악이 지배원리로 작동하는 현대사회

오늘의 우리는 사악한가? 그렇지 않은가? 우린 양심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개개인의 양심이란 것이 같은 정도의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 엄청난 정도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오늘의 인간들은 양심을 기초로해서 사회규범을 배운다. 그리고 그 양심이라 것의 대부분은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면화함으로서 자신들의 도덕적 규범의 원칙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그 부모들의 소소한 생활양식에서부터 이웃에 대한 인식, 사회와 정치현상의 이해 정도, 경제관념 등과 같이 오늘의 한국사회의 중추적 담론 세계란 어떤 것인지는 지극히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양심을 형성하는 세계는 어둡다. 나만 잘되면 되는 것이고, 동료를 눌러버리고 이겨야만 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이익이 도덕에 우선한다는 자본주의 원리가 작동하고, 폭력이 선을 위한 정당한 도구라고까지 설명하고 있다. 자기 자식만은 지배계층에 속하여야한다고 지배욕의 환상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으며, 반사회적이기까지 한 자만심과 교만을 미덕으로 부채질 한다. 그리고 진실함보다는 그럴듯한 과대포장과 환상, 즉 사기와 위선, 범죄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을정도의 교묘한 속임수를 쓰는 것이 능력이라고 큰소리친다. 이기주의와 방종, 음모와 거짓말, 차별과 따돌림을 합리화함으로써 타자를 이해하고 존중할 줄 모르는 괴물들, 악인들, 사악한 인간들을 칭송하며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아첨도 잘하고 다른 사람을 교묘히 활용, 철저한 계산에 따라 겉으로는 상냥함하고 매력적 사람으로 변하지만, 차갑고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눈물로 호소하며, 실패와 좌절은 남의 탓, 불행한 환경이라 변명」하는 파렴치한 ‘공공의 적’들이 세상을 누빈다. 그러하다보니 고위관료의 후보청문회가 부패와 부정의 더러운 죄악에도 아무런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의 전시장으로 변질된 것이다.
일반적 강도, 집단 살인범, 연쇄살인범과 이들 정치권력자, 고위관료, 부도덕한 경제인들과의 차이란 어떤 것일까? 살인범이나 강도와 이들과는 무슨 도덕적 차이가 있는 것일까? 살상욕구를 수반한 정신착란에 의한 살인범이나 억압받고 착취당하여 사회로부터의 냉대와 부당함의 반작용인 강도범들보다 이들이 덜 악한 것일까?

이들은 훨씬 교활하다. 이들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악을 행한다. 따돌림, 차별, 부당한 대우, 억압, 사기, 비관용, 동점심 결여, 교만과 같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계획 하에 은밀하게 실행한다. 이처럼 사악한 의도와 동기에 의해 저질러지는 악행은 사회를 훨씬 불행하게 만든다. 사실 이들의 반사회적 행위가 저질러대는 악은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고 좌절하게 한다. 더욱 악질적인 것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이처럼 악이 지배원리로 작동하는 사회라 할 것이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들로 들끓는 사회, 모두 광인이 되어 악이 내뿜는 마력에 심취하여 그 사악함에 환호하는 그런 사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묶여있던 악의 사슬이 풀려나 마구 휘젓기 시작한 형국에 돌입하고 있는 양상이다. 악이란 본질적으로 평화로운 것이 아닐 게다. 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악의 맹렬한 잔혹성이 설쳐대면 그것의 귀결은 공멸이 되고야 말 것이다. 또한 우리 개별 인간들 역시 자신들 속에 맹수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달램이 필요 할 것이다. 그 달램, 도덕적 성숙을 위한 자양분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이다. 인간의 선천적 공격성을 여하하게 자제하는 가는 질서유지와 평화로운 미래의 삶을 위해 필수적일 것이다. 지나치게 악해져 있다. 본성 탓만 할 것도, 그렇다고 악(마)의 탓이라 핑계만 댈 일도 아니다. 결코 인간의 결함 때문이라 해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클로징

악의 기원에서부터 인류의 역사를 장식했던 악의 화신들과 그 면모들, 악의 유형으로서 살인을 비롯한 범죄의 동기와 행태들, 그리고 악을 야기하는 생물학적, 심리학적 성찰들과 인간의 욕망, 본성에 깃든 악의 유혹까지 악의 근원과 계보, 인식에 대한 다채로운 성찰을 통해 인간의 역사에 악이 어떠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사회 시스템, 장치, 인간 내면에 작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굳이 인간은 악하다느니, 선하다느니 하는 순환론적 헛소리는 차치하더라도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악의 현현이 인간과 인간사회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현실이다. 타자를 상실한, 도덕성이 경제 가치에 밀려난 오늘의 사회가 그 규범성을 회복하는 것은 낭만적이고 학문적인 악의 타령이 아니다. ‘노크하는 악마’를 떨쳐낼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악의 사회학적 성찰 등 부분적으로 미흡하기는 하지만 총합적으로 인간 본성으로서의 악(惡)을, 사회시스템 속에서의 악을 이해하는 데 충분히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는 책이다. 행동생물학, 정신병리학, 심리학, 철학, 신학을 망라한 고찰이 매력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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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놀이 노래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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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작품을 읽지 않으신 분은 참조바랍니다.]

민간에 오랜 세월 전승되는 노래 말에는 시대의 불온함이나 부조리, 또는 은폐된 진실을 은연히 표현하려는 완곡함이 담겨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한 ‘악마의 공놀이 노래’라는 이 민간전승의 노래는 그래서 이미 그 자체에 진실을 담고 있기에 소설의 시작부인 프롤로그에 소개되고 있는 <귀수촌 공놀이 노래>에 대한 유래와 가사는 사건의 전개를 강력하게 암시한다.

이 정도의 암시라면 독자를 너무 쉽게 보는 것 아닌가? 아니면 사건의 흐름을 이렇게 미리 예상하게 해도 추리의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을 자신만만한 또 다른 장치들이 있다는 것인가? 이런 반감과 기대가 교차하는 애매함에 이끌려 전설적인 탐정‘긴다이시 코스케’의 정양지인 오카야마현 한 시골마을인 귀수촌(鬼首村; 오니코우베 마을)에 이르는 여정에 동원 가능한 지력을 집결시키게 된다. 혹여 작가가 배치해 놓은 사소한 장치를 놓쳐 이 오만한 암시를 인정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국면이 일찌감치 찾아오고, 최초의 사건에서 조차 완벽하게 장벽에 막히고 오리무중에 빠져들고 만다. 긴다이시 코스케 시리즈 작중 왜 최고의 작품으로 지칭되는지, 수많은 오마주들이 만들어질 정도로 일본 탐정 추리물들의 원형적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지 확인케 된다.

긴다이시 코스케는 요양지로 머물게 된 온천여관 거북탕, 그리고 20여 년 전 남편‘겐 지로’의 피살이라는 여주인 ‘리카’에 얽힌 사연을 오카야마 현 경찰‘이소카와’ 경부로부터 듣게 된다. 마을의 양대 지주인‘유라’와‘니레’ 두 가문의 경쟁에서 뒤진 유라 가문의 욕망을 비집고‘온다’란 외지인이 새로운 사업을 들여왔으나 이를 시기한 리카의 남편인 겐지로가 항의를 위해 찾아갔다가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사체로 발견되었으며, 온다란 인물은 홀연히 사라졌다는 미제 사건의 이야기다. 이소카와가 오래된 이 이야기를 긴다이시에게 들려주는 이유는 사건에 대한 막연한 석연찮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넌지시 당대 최고 탐정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진실에 도달하고픈 기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두 대지주 집안의 인물들 면면과 여색에 취해 몰락한 토호집안으로 마을의 어른 격인 촌장‘호안’노인, 거북탕의 사람들, 사라진 온다와 정을 통했던 여인들의 비밀, 유명 가수가 되어 귀향하는 사생아 ‘유카리’등 얽히고설킨 가문들의 은밀한 부정(不貞)의 소문이 쌓이면서 그야말로 추리력의 혼탁함으로 내몰린다.
이윽고 미모의 유카리가 귀향하는 날, 흔적도 없이 촌장 호안이 사라진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피살로 위장된 것 같기도 한 사건이 발생하고, 촌장의 집 앞 늪을 수색하지만 찾지 못한다. 어딘지 20여 년 전의 미제 사건과 관련이 된 듯한 실종 사건, 현장수사본부가 거북탕에 차려지지지만, 유라가의 미모의 여식이 살해된 채 다시금 발견된다. 프롤로그를 꼼꼼히 읽었다면 이 연쇄 살인의 순서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탐정 긴다이시나 이소카와 경부는 사건의 방향을 알려주는‘귀수촌 공놀이 노래’를 알지 못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소설 속 인물이 알지 못하는 것을 독자에게 먼저 알려줌으로써 우월적 지위를 독자에게 선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알려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살인의 동기도, 살인자도 오리무중이다. 등장한 수십 명의 인물들을 모두 용의자로 지목 할 수도 있지만 이렇다 할 동기를 발견할 수 도 없으니, 피살될 자가 누구인지 예측한들 이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지식에 불과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작가가 제시한 암시에 현혹되어 거미줄처럼 얽힌 복선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리곤 양대 가문의 동년배 처녀들이 연이어 살해되면서 발산되는 공통의 무엇이, 어렴풋이 20 여 년 전 사건의 흐릿함, 그 실체를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사건의 윤곽이 모두 드러나고서야 문득 허를 찌르는 반전의 아이디어에 감탄한다. 1인 다역(多役)이란 과감하고 혁신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후 많은 문학 및 영상 작품들의 기원이 되었을 법하다. 살인의 순서까지 알려주었음에도 소설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작가의 역량, 전근대적 신분의 차별의식이 낳은 뒤틀린 위선, 그리고 탐욕적인 성의 추구, 모욕된 성의 분노 등 인간의 심성을 자극하는 본원적인 소재와 스토리의 정교한 구성, 기발한 전환 장치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화음은 가히 완벽한 합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민간전승이라는 토속성에 깃든 인간의 비원과 욕망을 배경으로 하여 불세출의 탐정‘긴다이시 코스케’가 탐색해내는 악의 근원조차 연민으로 승화되는 것은 이 작품이 기교와 장치의 픽션으로서 만이 아니라 문학작품으로서의 성취까지 달성한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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