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공놀이 노래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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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작품을 읽지 않으신 분은 참조바랍니다.]

민간에 오랜 세월 전승되는 노래 말에는 시대의 불온함이나 부조리, 또는 은폐된 진실을 은연히 표현하려는 완곡함이 담겨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한 ‘악마의 공놀이 노래’라는 이 민간전승의 노래는 그래서 이미 그 자체에 진실을 담고 있기에 소설의 시작부인 프롤로그에 소개되고 있는 <귀수촌 공놀이 노래>에 대한 유래와 가사는 사건의 전개를 강력하게 암시한다.

이 정도의 암시라면 독자를 너무 쉽게 보는 것 아닌가? 아니면 사건의 흐름을 이렇게 미리 예상하게 해도 추리의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을 자신만만한 또 다른 장치들이 있다는 것인가? 이런 반감과 기대가 교차하는 애매함에 이끌려 전설적인 탐정‘긴다이시 코스케’의 정양지인 오카야마현 한 시골마을인 귀수촌(鬼首村; 오니코우베 마을)에 이르는 여정에 동원 가능한 지력을 집결시키게 된다. 혹여 작가가 배치해 놓은 사소한 장치를 놓쳐 이 오만한 암시를 인정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는 국면이 일찌감치 찾아오고, 최초의 사건에서 조차 완벽하게 장벽에 막히고 오리무중에 빠져들고 만다. 긴다이시 코스케 시리즈 작중 왜 최고의 작품으로 지칭되는지, 수많은 오마주들이 만들어질 정도로 일본 탐정 추리물들의 원형적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지 확인케 된다.

긴다이시 코스케는 요양지로 머물게 된 온천여관 거북탕, 그리고 20여 년 전 남편‘겐 지로’의 피살이라는 여주인 ‘리카’에 얽힌 사연을 오카야마 현 경찰‘이소카와’ 경부로부터 듣게 된다. 마을의 양대 지주인‘유라’와‘니레’ 두 가문의 경쟁에서 뒤진 유라 가문의 욕망을 비집고‘온다’란 외지인이 새로운 사업을 들여왔으나 이를 시기한 리카의 남편인 겐지로가 항의를 위해 찾아갔다가 얼굴을 알아 볼 수 없는 사체로 발견되었으며, 온다란 인물은 홀연히 사라졌다는 미제 사건의 이야기다. 이소카와가 오래된 이 이야기를 긴다이시에게 들려주는 이유는 사건에 대한 막연한 석연찮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넌지시 당대 최고 탐정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진실에 도달하고픈 기대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두 대지주 집안의 인물들 면면과 여색에 취해 몰락한 토호집안으로 마을의 어른 격인 촌장‘호안’노인, 거북탕의 사람들, 사라진 온다와 정을 통했던 여인들의 비밀, 유명 가수가 되어 귀향하는 사생아 ‘유카리’등 얽히고설킨 가문들의 은밀한 부정(不貞)의 소문이 쌓이면서 그야말로 추리력의 혼탁함으로 내몰린다.
이윽고 미모의 유카리가 귀향하는 날, 흔적도 없이 촌장 호안이 사라진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피살로 위장된 것 같기도 한 사건이 발생하고, 촌장의 집 앞 늪을 수색하지만 찾지 못한다. 어딘지 20여 년 전의 미제 사건과 관련이 된 듯한 실종 사건, 현장수사본부가 거북탕에 차려지지지만, 유라가의 미모의 여식이 살해된 채 다시금 발견된다. 프롤로그를 꼼꼼히 읽었다면 이 연쇄 살인의 순서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탐정 긴다이시나 이소카와 경부는 사건의 방향을 알려주는‘귀수촌 공놀이 노래’를 알지 못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소설 속 인물이 알지 못하는 것을 독자에게 먼저 알려줌으로써 우월적 지위를 독자에게 선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알려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살인의 동기도, 살인자도 오리무중이다. 등장한 수십 명의 인물들을 모두 용의자로 지목 할 수도 있지만 이렇다 할 동기를 발견할 수 도 없으니, 피살될 자가 누구인지 예측한들 이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지식에 불과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작가가 제시한 암시에 현혹되어 거미줄처럼 얽힌 복선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그리곤 양대 가문의 동년배 처녀들이 연이어 살해되면서 발산되는 공통의 무엇이, 어렴풋이 20 여 년 전 사건의 흐릿함, 그 실체를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사건의 윤곽이 모두 드러나고서야 문득 허를 찌르는 반전의 아이디어에 감탄한다. 1인 다역(多役)이란 과감하고 혁신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후 많은 문학 및 영상 작품들의 기원이 되었을 법하다. 살인의 순서까지 알려주었음에도 소설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작가의 역량, 전근대적 신분의 차별의식이 낳은 뒤틀린 위선, 그리고 탐욕적인 성의 추구, 모욕된 성의 분노 등 인간의 심성을 자극하는 본원적인 소재와 스토리의 정교한 구성, 기발한 전환 장치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화음은 가히 완벽한 합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민간전승이라는 토속성에 깃든 인간의 비원과 욕망을 배경으로 하여 불세출의 탐정‘긴다이시 코스케’가 탐색해내는 악의 근원조차 연민으로 승화되는 것은 이 작품이 기교와 장치의 픽션으로서 만이 아니라 문학작품으로서의 성취까지 달성한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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