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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으로 산다는 것, 더구나 가진 것에 의해 삶의 질이 결정되는 생태계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항력적 고역이다. 또한 사회적 동물이라느니 공동체의 연대니 하며 타자에 대한 배려와 연민을 긍정적으로 말하지만 실상 그것이 인간의 일상적 삶에서 실천된다든가 이타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며, 단지 외형상 그렇게 보일뿐이며, 자기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만 그렇다는 것이 현실임을 훨씬 많이 경험한다.
이 소설집을 구성하는 일곱 편의 단편소설은 이러한 일상의 현실적 삶의 부조리하고 부당하며 불온함으로 점철된 세상과 인간들을 투시하고 있다.
‘구병모’의 작품들이 일관되게 뿜어내는 응집된 무참한 분노의 양상들을 혹자는 “일상적 무감각에 치명적 독을 주입”하고 있다고 과장되게 너스레를 떨어대고 있지만, 결코 무감각한 것도 아니며, 새삼스레 인간의 일상에 독이 주입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인간들은 자기 이외에 진정한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가 없으며, 그 무관심이 유익하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득한 개체들이다. 따라서 소외니 불통이니 이기적이니 하는 언어의 독성이 마치 외부로부터 주입되어 비로소 깨달았다거나 발견하였다, 창조하였다는 말은 객쩍은 소리에 불과한 것이라 할 것이다.
「타자의 탄생」이란 수록 작품도 있지만 오늘의 인간들, 그리고 현대사회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장치들에 의해 우리는 타자 읽기에 무심하거나 실패하고 있으며, 달리 표현하면 타자이기도 한 자기 역시 읽기에 실패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한 이해라고 하고 싶다. 이처럼 자기반성도 없고 타자에 대한 이해도 없는 현실 속 일상을 투영해서 그것들이 잉태하고 출현하여 휘젓는 악의적 현상들과 참담하고 잔혹한 현실 세상의 수치스러운 속살을 치욕스럽게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타자 읽기에 무심하거나 실패하는 현대인
눈물이 많다는 이유로 담임선생에게 무참한 폭력을 당하는 아이가 그 불이익을 면키 위해 자신의 감정(感情)선을 꿰매어 버린다는 「재봉틀 여인」이란 작품처럼 인간의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획일화되고 이기적인 인식능력은 거의 정신질환에 가깝다. 이 행위는 성인이 되어 무표정하며 감정을 나타내지 못하는 기이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교육현실과 사회적 장치라는 것은 이처럼 지속적으로 타자에 대한 이해를 차단한다.
「타자의 탄생」은 제목 그대로 공동체나 인간개체로부터의 분리된 경계외적 인간을 탄생시킨 현대의 인간들과 인간사회의 잔인한 몰지각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주물에 하반신이 박힌 채 구조를 요청하는 남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란 것의 속성을 파헤치고 있다. 떠들썩한 언론과 방송매체의 관음증적 호들갑, 관련 행정기관의 정치적 행동, 전문가들의 고답적인 탁상론, 시민들의 호기심어린 연민이 휩쓸고 지난 뒤의 무관심과 냉담함, 그리곤 외면을 넘어 자신들의 삶의 경계 밖으로 추방하고자 한다. 사실 이 사회의 공동체라는 것은 거듭 확인하게 되지만 바람에 날리는 모래알갱이만도 못하다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 무력함 속에 간절한 구원을 기대하는 남자를 향해 이혼서류를 날리는 아내의 행위야말로 이 시대의 표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조장기(鳥葬記)」란 작품에 이르면 그 난감함은 더더욱 곤혹스럽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위해 휴학한 유아교육과 여대생의 생존을 위한 분투 속에 어쩔 수 없이 이해하고 수긍해야하는 또 다른 생존의 분투에 대한 목격이기 때문이다. 자기 연민에 헐떡이지만 그 비루한 연민조차 타자에게 사용해야하는 현실에 처하게 되는 것인데, 이 불가항력적이고 불가피한 타자 읽기는 타자 읽기를 배우지 못한 현대인에게는 당혹 그자체가 아닐까?
마지막에 수록된「곤충도감」은 비로소 타자에 대한 연민의 실천, 타자 읽기의 깨우침을 알려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성추행을 당한 소녀와 성범죄자가 된 남자의 이야기다. 성범죄 예방을 위한 발찌의 효력이 무력해지자 성호르몬에 반응하는 생체기계를 주입하여 예방한다는 발칙한 소재를 가지고 있다. 성적충동의 실행에 이르러 관련 호르몬의 수치가 상승하면 생체기계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숙주의 몸을 뚫고 나오게 되는 극단적 장치이다. 인간 본능을 차단하는 이 무분별한 조치에 제물이 된 남자에 대한 피해 소녀의 연민이 흐르고 있다.
우리들의 이해는 어느덧 자기본위, 이기심에만 호소하고 있다. 도덕적 양심을 형성하게 하는 가정과 학교교육은 물론 거의 모든 사회적 제도와 창치, 주류의 담론들이 타자 읽기를 방해하고 무관심을 종용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타자를, 자기를, 서로를 상처내고 고통으로 내몰고, 분열을 조장하며 증오와 분노 그득한 적대감을 증식시킨다. 타자가 혐오스럽다면 자기 역시 혐오스런 개체임을 피할 수 없음이다. 타자의 탄생은 그를 올바르게 읽어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음으로서만 긍정을 가질 것이다.
구별하고 구분 짓는 사회
소설집의 표제작인「고의는 아니지만」에는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구분되어 절로 형성되는 원생인 아이들의 양태로 인해 난감해하는 유치원 선생이 있다. 치열하게 살아가도 허덕이는 부모의 아이들과 유한 집안의 아이들은 의도되지 않았음에도 구별되고 만다. 아이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선생의 배려와 노력은 양면성을 지니고 선의가 악의로 변색되기도 한다.
가진 자는 못 가진 자에 대해 인색하다. 못 가진 자에 대한 배려는 가진 자에 대한 차별이고 분별없음이라고 항변한다. 갖지 못한 자는 무심함이란 부성실과 부당함으로 대처한다. 희생자는 이들 두 분별없는 계층에 세심한 배려를 하려는 자가 되고 만다. 무엇이 이러한 사회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도 타자의 무관심과 읽기의 실패가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소유와 경쟁의 이익추구라는 자본주의 미덕만을 칭송하는 체제의 불편한 진실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무심히 뱉어내는 작은 모욕에도 인간들은 몸서리치고 분노한다. 오늘의 인간들에게 관용과 이해, 나눔과 연민의 실천이란 미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비유의 언어가 금지된 도시를 배경으로 한「마치.....같은 이야기」란 작품은 바로 이러한 인색하고 외곬의 획일화된 불통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경제적 효율의 추구라는 미명하에 한 단어에는 하나의 의미만을 지닐 뿐 은유나 상징적 표현을 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명확한 의사전달을 위해 의미를 복잡하게 하는 비유는 낭비이기에 금지한다는 것인데, 모든 것을 손익계산과 이익의 추구라는 경제 가치를 최고의 미덕이라 하는 지금의 우리 사회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도덕적 양심과 감성이 효율성에 추방당한 사회. 이러한 사회가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이라고 말하는‘미무르’같은 괴물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 것인지 두렵기조차 하다.
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하는 의식은 일견 평온하고 정상적으로 유지되는 듯이 보이는 우리들의 사회, 그 평범한 일상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자행되는 무분별과 냉혹함, 무관심, 비열함, 이기심, 비정함이 야기하는 잔혹하고 무참한 현실의 각성이다. 도처에서 맹독의 세례를 받아야하는 오늘의 인간들이 건조하고 삭막하며, 증오와 분노로 들끓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개개인들이 스스로 자초한 자가당착이기도 하다. 일상의, 삶의 고통의 실체, 그 근원이 무엇인지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이 따갑다. 구병모식의 환상적이고 기이하기조차 한 소재와 괴이할 정도로 척척 이가 들어맞는 이야기의 흐름이 현실의 잔혹한 삶에 와 닿으면서 일으키는 그 충돌의 굉음과 파편들에 화들짝 놀라게 된다. 그 진실의 섬세한 관찰에. 속이 후련해지면서도 한편 그늘처럼 우울한 작품으로 마음에 남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