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하는 악마
테오 R.파익 지음, 박미화 옮김 / 수북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표제 탓에 마치 스릴러 문학작품처럼 보이는 이 책은 인간의 주요 역사를 장식한‘악(惡)’의 실체를 규명해 보려 한 당찬 인문서이다. 단순해 보이고 또한 늘 자신의 도덕적 잣대를 벗어나면 통칭하여 싸잡아 부르는 악이란 단어는 실상 그리 간단하게 정의할 수 없기조차 하다. 악덕, 죄악, 악령, 악마, 사악, 악의와 같이 도덕적 규범을 벗어나거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부정적 의미를 더해 포괄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떤 것은 악에 해당하는 것인지 분류가 모호하고, 분명 악의 본질임에도 이 사회가 칭송하거나 합리화하기까지 하는 것을 볼 때면 더욱 그 정의를 내린다는 것이 가능키나 한 것인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악은 선(善)의 반대급부이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것의 대명사임은 분명하다. 고대 자연 신앙에서는 악은 금기를 깨는 것, 즉 나쁜 기질이나 성품으로 이해하였으며, 스토아학파는 도덕적 이성과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악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외부적 영향과의 교섭에 의해서 발흥하는 것인가하는 인간의 보편적 본능에 대해 묻기도 하였으며, 악의 요소에 대한 규명도 꾸준하게 논의되었다. 인간은 왜 이렇게 악에 대해 안절부절, 애처롭게 매달렸을까?

악이란 인간 자신이 만들어 낸 산물이란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바로 인간 자신이라는 진실을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역겨운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마치 자기와는 다른 존재인 악을 탄생시키고 그 악의 탓으로 돌려 면죄부를 받으려 한 것일 게다. 또한 자신들의 이해 불가능하고 불가항력적 무능을 감추기 위해 불가사의하고 초자연적 힘이 있는 악을 핑계 삼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찌보면 이 행위자체가 이미 교활하고 사악하기조차 한 인간 본성의 표현 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인간 본성에 내재한 악, 스스로 규율할 수 있는가?

‘칸트’는 악을 근본적인 인간의 본성이라 하였다. 그러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기에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과연 이 말은 옳은 주장일까?
설혹 인간이 보편적 도덕본능을 가졌다는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더라도 악을 누르고 도덕성이 승리 할 것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실 인간의 역사 어느 한 페이지를 보더라도 악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지 않은가!

악의 기원을 보면 오히려 인간은 꾸준히 악을 연마하고 학습해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자기 생존, 종족보호를 위해 이웃을 공격했으며, 소박한 원시무기부터 시작해서 인류를 한꺼번에 사라지게 할 정도의 가공할 첨단 무기까지 약탈문화를 발전시켜온 것이 그 증거이다. 더구나 <구약성서 출애굽기> 32장에 묘사된 수송아지로 만든 우상 숭배를 하였다는 이유로 3천명을 처형한 모세의 행위는 아마 종교라는 미명하에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최초의 사례일 것이다.

사실 종교만큼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을 것이다. 사탄을 만들어내고, 마녀를 조작해대며 선천적 공격본능을 교묘하게 은폐시키려 한 역사의 거대한 주체이니 말이다. 이 본질을 보면 권위에 대한 탐욕과 지배욕, 맹목적 이데올로기의 강요, 급기야는 종교에 몸을 감춘 지배자들의 경제적 욕망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억압된 성적 망상과 욕구의 강박적 관념에 기인한 마녀사냥, 지배욕과 교만을 숨기고 감찰관으로 재직한 23년 동안 무자비한 박해와 처형을 서슴지 않았던‘칼뱅’의 종교적 광신, 14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의 창궐을 기회로 이단자라는 황당한 명분하에 2억5천만 명을 살해한 종교는 인간의 악을 설명하는데 빠질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종교는 늘 그랬듯이 피에 든 독이다”라는 ‘살만 루시디’의 말이나,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라고 한 ‘리처드 도킨스’의 악의 기원, 악의 근원에 대한 규명은 이러한 현상을 명료하게 전달하고 있다.

더구나 20세기에 이르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기독교전통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형용할 수 없는 인류의 악을 보게 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정치권력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 2천만 명을 학살한‘스탈린’, 국가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라는 이름하에 5천만 명을, 그리고 문화혁명을 통해 7천만 명을 살해한 ‘마오쩌둥’, 그리고 ‘폴포트’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잔혹한 대학살이 그치질 않았다. 단지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에 반하는 계층이나 민족, 단체를 말살하려는 정신 이상적 잔혹행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다.

온갖 악을 축약해 놓은 듯한 각종 고문이 ‘국가는 피를 부르는 원천과 같다’는 말을 입증이라고 하려는 듯이 2006년 국제사면위원회 발표와 같이 100여개 국가에서 은밀하게 실행되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힘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말살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정신분석학자‘프로이트’의 말처럼 인간에 내재한 악의 본성을 완벽하게 압축하기도 힘들 것이다. 결국 악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은 인간의 존속을 위해서 절대적이고 최우선적 과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이 악을 넘어서는 우위를 점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악이 지배원리로 작동하는 현대사회

오늘의 우리는 사악한가? 그렇지 않은가? 우린 양심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개개인의 양심이란 것이 같은 정도의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 엄청난 정도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옳은 판단일 것이다. 오늘의 인간들은 양심을 기초로해서 사회규범을 배운다. 그리고 그 양심이라 것의 대부분은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면화함으로서 자신들의 도덕적 규범의 원칙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그 부모들의 소소한 생활양식에서부터 이웃에 대한 인식, 사회와 정치현상의 이해 정도, 경제관념 등과 같이 오늘의 한국사회의 중추적 담론 세계란 어떤 것인지는 지극히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양심을 형성하는 세계는 어둡다. 나만 잘되면 되는 것이고, 동료를 눌러버리고 이겨야만 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이익이 도덕에 우선한다는 자본주의 원리가 작동하고, 폭력이 선을 위한 정당한 도구라고까지 설명하고 있다. 자기 자식만은 지배계층에 속하여야한다고 지배욕의 환상을 끊임없이 주입하고 있으며, 반사회적이기까지 한 자만심과 교만을 미덕으로 부채질 한다. 그리고 진실함보다는 그럴듯한 과대포장과 환상, 즉 사기와 위선, 범죄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을정도의 교묘한 속임수를 쓰는 것이 능력이라고 큰소리친다. 이기주의와 방종, 음모와 거짓말, 차별과 따돌림을 합리화함으로써 타자를 이해하고 존중할 줄 모르는 괴물들, 악인들, 사악한 인간들을 칭송하며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을 양산하고 있다.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아첨도 잘하고 다른 사람을 교묘히 활용, 철저한 계산에 따라 겉으로는 상냥함하고 매력적 사람으로 변하지만, 차갑고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면서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관대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눈물로 호소하며, 실패와 좌절은 남의 탓, 불행한 환경이라 변명」하는 파렴치한 ‘공공의 적’들이 세상을 누빈다. 그러하다보니 고위관료의 후보청문회가 부패와 부정의 더러운 죄악에도 아무런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의 전시장으로 변질된 것이다.
일반적 강도, 집단 살인범, 연쇄살인범과 이들 정치권력자, 고위관료, 부도덕한 경제인들과의 차이란 어떤 것일까? 살인범이나 강도와 이들과는 무슨 도덕적 차이가 있는 것일까? 살상욕구를 수반한 정신착란에 의한 살인범이나 억압받고 착취당하여 사회로부터의 냉대와 부당함의 반작용인 강도범들보다 이들이 덜 악한 것일까?

이들은 훨씬 교활하다. 이들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악을 행한다. 따돌림, 차별, 부당한 대우, 억압, 사기, 비관용, 동점심 결여, 교만과 같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심리적 폭력을 행사하고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계획 하에 은밀하게 실행한다. 이처럼 사악한 의도와 동기에 의해 저질러지는 악행은 사회를 훨씬 불행하게 만든다. 사실 이들의 반사회적 행위가 저질러대는 악은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고 좌절하게 한다. 더욱 악질적인 것이다. 오늘의 한국사회는 이처럼 악이 지배원리로 작동하는 사회라 할 것이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들로 들끓는 사회, 모두 광인이 되어 악이 내뿜는 마력에 심취하여 그 사악함에 환호하는 그런 사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묶여있던 악의 사슬이 풀려나 마구 휘젓기 시작한 형국에 돌입하고 있는 양상이다. 악이란 본질적으로 평화로운 것이 아닐 게다. 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악의 맹렬한 잔혹성이 설쳐대면 그것의 귀결은 공멸이 되고야 말 것이다. 또한 우리 개별 인간들 역시 자신들 속에 맹수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달램이 필요 할 것이다. 그 달램, 도덕적 성숙을 위한 자양분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이다. 인간의 선천적 공격성을 여하하게 자제하는 가는 질서유지와 평화로운 미래의 삶을 위해 필수적일 것이다. 지나치게 악해져 있다. 본성 탓만 할 것도, 그렇다고 악(마)의 탓이라 핑계만 댈 일도 아니다. 결코 인간의 결함 때문이라 해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클로징

악의 기원에서부터 인류의 역사를 장식했던 악의 화신들과 그 면모들, 악의 유형으로서 살인을 비롯한 범죄의 동기와 행태들, 그리고 악을 야기하는 생물학적, 심리학적 성찰들과 인간의 욕망, 본성에 깃든 악의 유혹까지 악의 근원과 계보, 인식에 대한 다채로운 성찰을 통해 인간의 역사에 악이 어떠한 영향을 끼쳐왔으며, 사회 시스템, 장치, 인간 내면에 작동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굳이 인간은 악하다느니, 선하다느니 하는 순환론적 헛소리는 차치하더라도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악의 현현이 인간과 인간사회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현실이다. 타자를 상실한, 도덕성이 경제 가치에 밀려난 오늘의 사회가 그 규범성을 회복하는 것은 낭만적이고 학문적인 악의 타령이 아니다. ‘노크하는 악마’를 떨쳐낼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악의 사회학적 성찰 등 부분적으로 미흡하기는 하지만 총합적으로 인간 본성으로서의 악(惡)을, 사회시스템 속에서의 악을 이해하는 데 충분히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는 책이다. 행동생물학, 정신병리학, 심리학, 철학, 신학을 망라한 고찰이 매력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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