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걷어차기
장하준 지음, 형성백 옮김 / 부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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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 책을 읽는 시점에 우리사회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국론이 분열되고 급기야는 사법부내까지 에서도‘불평등 조약’이다. 아니다. 로 시끌벅적하다. 세계는 선진 개발국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기조 하에 개발도상국 및 후진국을 대상으로 자유무역과 자유방임주의 정책과 제도를‘국제기준’이라 하여 강요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이 장점을 선전하며 개발도상국 및 후진국들에 권유하는 자유무역주의는 이들 나라의 경제발전에 진정 도움이 되는 것일까? 실제로 이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자신들은 자국의 경제발전 단계에서 보호주의 정책을 펼쳤던 역사가 없었다는 것일까? 저자는 오늘의 선진국인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국가들의 경제발전 역사를 추적하여 이들이 말하는 '좋은 정책(Good Policy)', '좋은 통치제도(Good Governance)'의 실상을 탐사하여 그 위선을 고발한다.

1. 현 선진국들의 경제발전의 역사

현재 선진국들이라 하는 영국, 독일, 프랑스 및 스웨덴 등 서구 국가들과 미국 및 일본이 오늘의 부국에 이르기까지의 경제발전의 여정을 쫓는다. 그들이 가장 산업화된 선진부국에 이르는 과정에 어떤 정책과 제도들을 통해 자국의 경제를 부흥시켰는가 하는 것이다.
이들 국가 중 특히 영국과 미국은 마치 자신들의 경제발전 단계에서 보호주의 정책은 채택한 적이 없으며, 자유무역주의만을 수호한 것처럼 경제역사를 왜곡하고 있지만, 그들처럼 자국의 유치산업 보호를 위해 개입주의적 산업, 무역 기술정책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고율의 관세 정책을 펼치는 등 보호주의를 강력하게 고수한 나라도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영국은 17세기 자신들의 모직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지금의 벨기에인 플랑드르지역 모직물에 고율의 수입관세를 적용하는가하면, 식민지인 인도의 섬유산업을 고사시키기 위하여 금수물품화하거나 고관세 정책을 펼치는 등 적극적인 국가 개입정책을 사용하였다. 18~9세기 미국의 경우에도 영국에 대항하여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을 운영하였으며, 스웨덴이나 독일 역시 유치산업 보호정책의 방법이나 정도는 달리하였으나 보호주의를 통해 자국의 경제발전을 도모한 것에는 차이가 없다.

15세기 영국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럽 내 가장 산업화가 늦었던 독일이나 기타 군소국가의 산업 발전과정을 보면 이러한 양상을 더욱 극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는데, 보호주의 정책을 통해 산업화와 경쟁력을 먼저 갖춘 18세기의 영국이 자신들보다 늦은 프랑스나 독일 등 유럽 여타 국가들이나 세계 식민지에 보호주의를 철폐하고 자유무역주의를 실행 할 것을 요구하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경제를 위해서는 고율의 수입관세를 적용하거나 수출원자재의 수입관세는 수출시 환급하여 주는 등 유치산업 보호정책을 펼치다가 자신들의 산업우위가 확보되자 보호정책의 폐지를 요구하며, 자유무역주의의 장점을 호소하는 기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결국 프랑스는 영국과 관세를 철폐하는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고 그만큼 경제발전에 곤혹을 치르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먼저 산업화에 도달한 나라들이 후발국들에게 강요하는 전형적인 패턴을 보인다. 결국 자유무역주의가 그네들의 경제를 선진국으로 올려놓은 것이 아니며, 다양한 자국의 유치산업 보호정책이란 보호주의를 통해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자유무역주의는 허상이고 거짓이다. 먼저 사다리를 올라간 자가 후발 주자가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차버리는 것과 같다. 이익을 독점하고 항구화하겠다는 야만적 이기심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은 완전 무장을 하고 상대에게는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는 부당함인 것이다.

2.' Good Policy', 'Good Governance'의 기만

이처럼 ‘좋은 정책’이라고 패키지화하여 후발국에게 강요하는 현 선진국들의 자유무역주의와 자유방임주의 정책은 자신들의 경제발전 단계에서는 사용한 적이 없는 것들이다. 오직 철저한 보호정책만 있었을 뿐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자신이 고지위에 섰을 때 마음껏 후발자를 유린하기 위한 것이 자유주의 이다. 19세기 중반에 서구에 문호를 개방한 일본의 경우를 보더라도 관세자주권이 없는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하여 1911년이 되어서야 관세권을 돌려받았으며, 이후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할 수 있었던 예처럼 정상에 선 자가 사다리를 걷어참으로써 자신들의 우월적 경쟁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또 하나 웃지못할 사례로서 18~20세기에 이르는 동안 선진국들은 후발국들의 기술적 도전이나 기술유출을 차단하기 위해 특허 등 지적재산권을 도입하는데, 스위스의 경우에는 영국이나 독일 등의 선진 기술을 도용하기 위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100여년이나 늦은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부분적으로 제도화 한 나라이다. 그런 나라가 자국 제약회사들의 지적재산권을 개발도상국들이 강력하게 보호하지 않는다고 반감을 표하는 것이다. 자신의 산업 경쟁력이 확보되기까지는 어떠한 나라보다 폐쇄적이고 보호주의 정책을 고수하다가 정상에 서면 바로 그 보호주의 정책을 차버리고 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상대를 윽박지르는 해괴한 일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개발도상국 및 후진국들이 현 선진국들이 그들의 발전단계를 거칠 때 사용했던 보호주의의 수위보다 높은 것일까? 생산성의 차이를 감안하여 현 선진국들의 보호주의 역사와 비교하면 결코 오늘의 후발국의 보호주의 수위는 현저히 낮다는 것이다. 선진국들의 근래의 상황이 아닌 역사의 단계에서 동등한 수준으로 비교되어야 하는 것이지, 자신들이 선진국에 이르러 그 결과물로서 드러난 현상을 후발국들에 강요하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이고 부당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정책적 기만과 병행하여 최근에는 민주주의, 관료제도, 사법권, 지적 재산권, 유한책임제도, 회계 및 공시제도, 금융제도, 공공재정 제도, 아동 근로제도 등을 패키지화하여‘좋은 통치제도’를 후진국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더구나 5~10년 만에 그들이 말하는 이 같은‘국제적 기준’에 맞는 제도를 수립하도록 요구하는 것인데,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제도적 기준을 세워 일종의 보호주의를 목적으로 은밀하게 불공정한 형태로 남용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의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한 예로 프랑스의 경우, 남성 보통 선거권으로부터 완전한 보통 선거권으로 전환되는데 100년이 걸렸다고 한다. 또한 유럽 각국들이 근대적 전문 관료사회의 필요성인식으로부터 실제 제도 수립까지 3세기 남짓한 시간이 걸렸으며, 중앙은행 제도는 17세기 초의 필요성 제기에서 화폐발행 등 진정한 중앙은행의 설립까지 150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들 현 선진국들의 역사를 보더라도 어떤 혁신적인 제도가 등장한 이후 과반수의 선진국들이 채택하기까지 제도마다 짧게는 20년에서 150년의 기간이 걸렸다는 사실에서 그 과정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를 볼 수 있다. 게다가 발전된 세무 관료제도도 없이 공공재정 제도를 발전시키기 어려운 것처럼, 제도들은 상호의존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 획일적으로 제도를 이식하여 정착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선진국들의 후발국에 대한 소위‘좋은 제도’의 일괄적 강요에 부당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 결 어

이 책은 이와 같이 현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이 처한 발전 단계를 그네들의 유사한 역사적 묘사와 견주어 정책과 제도의 다양한 도입과 정착의 양상을 비교하고 있다.
현 선진국들이 그들의 경제개발 초기에 실제로 이용했던 정책과 제도들은 오늘날 후발국에 강요하는 패키지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대적인 기술의 후진성이나 국제환경, 인적자원의 부존량에 따라 자신들의 목적에 맞는 정책 수단을 다양하게 사용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제도마다의 도입 시기, 다채로운 방식의 보호정책 등 자국에 적합하게 바꾸어 나간 것이다. 결국 자신들이 선진국에 도달함으로써 획득된 제반 결과물을 후발국들에게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역사적 경험과도 모순되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라는 자유무역의 수용 압력은 구미 선진국들이 그들의 경제발전 초기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행하던 관세권의 박탈과 같은 불평등조약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다. 세계무역기구의 합의에 따라 신자유주의 패키지를 거부하지 못하고 수용한 아프리카와 남미 국가들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경기침체와 후퇴를 겪었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에는 정상적인 경제 발전을 성취했다는 점이다. 중국은 소위 좋은 통치제도를 지닌 나라가 아니다. 민주주의나 관료제도, 각종 공공재정이나 금융시스템 등에서 국제기준과는 한참이나 이격되어 있다. 그러나 국제 투자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중국에 달려들고 있다. 어떤 정책이나 제도의 잠재적 가치란 실제 중요한 경제적 조건이지만 이것만이 정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얘기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 역시 19세기 말 일본에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했고 수탈경제 하에 신음하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해방과 동족전쟁을 치르고 나서 1960년에서나 비로소 산업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불과 50년 남짓한 시간에 현 선진국들이 수세기에 걸쳐 획득한 정책과 제도들을 압축적으로 수용했다. 산업화과정에서 취약한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각종 보조금과 세제 특혜, 수입관세의 환급 등 유치산업 보호 를 위한 강력한 국가개입 정책을 적절히 구사한 것은 우리만의 차별화 된 보호주의 정책의 사용이었으며, 이것이 우리의 경제를 오늘의 위치에 설 수 있게 하는 반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현 선진국 체제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물살에 휩쓸리는 것이 마치 선진국이라도 되는 것인 양 착각하고 그들을 그대로 따라하려는 기운이 팽배하다. 자신들이 정상에 오르자 사다리를 걷어차는 현 선진국들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 불평등조약이란 지적은 이러한 관점에서 지극히 당연한 지적이라 할 것이다.

선진국들이 말하는 좋은 정책, 좋은 통치제도와 같은 아전인수식‘자기정의(自己正義)는 이기심보다 훨씬 완고하다’고 했다. 우리는 보다 현명해져야 할 것 같다. 원조 국가 되었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며, 설혹 선진국의 대열에 끼었다고 해도 엄연히 기술적, 경제적, 제도적 우열이 존재한다. 우리가 오르는 사다리는 항상 먼저 도달한 자에게 걷어차일 수 있다. 도둑질 하던 자들이 파수꾼이 되었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이제 우린 저들과는 다른 우리에게 적합한 고유의 정책 발굴과 제도 수립이 더욱 요구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 또한 후진국, 개발도상국으로서의 경험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저자의 말처럼 대승적 민족주의의 차원에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유력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선진국들의 자유무역주의를 기조로 하는 신자유주의 패키지를 다양성과 융통성을 갖춘 새로운 패키지의 기획자로서 나설 수 있다는 위치이자 기회를 가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은 선진국에게는 후발국을 포함한 세계경제를 자신들의 과거 경험을 통해 되돌아보게 하고, 후발국들에게는 앞에 놓인 경제발전을 위한 정책과 제도의 수용에 있어 선택의 적절한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진정 공존하는 세계경제체제를 위한 사유의 틀을 제공해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취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분명한 분기점에 놓여 있는 것 같다. 비정상적지만 비준이 된 한미자유무역협정에는 많은 이들이 저적하듯이 불평등한 조항들이 산재하고 있다. 정책자는 이러한 지적들을 책임을 다하여 해소하여야 한다. 경제적 평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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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항구 매그레 시리즈 16
조르주 심농 지음, 최애리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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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농의 ‘매그레 시리즈’중 작은 항구도시인‘지베’를 배경으로 한 <플랑드르인의 집>에 이어 우연히도 짙은 안개에 싸인 소도시‘위스트르앙’항구로 이어졌는데, 왠지 무표정한 피로가 묻어난 듯한 느낌, 만남과 이별조차 무심해야 할 것만 같은 절제되고 동떨어진 무엇에 이끌렸기 때문일까?
치열함을 비켜간 정적 분위기에 대한 나의 기대는 옳았다. 감정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작품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인데, 말이나 행동, 내면의 요란함이 없는‘매그레’란 인물이 그래서 더욱 마음에 닿는다.

작중 인물들 역시 장황하거나 번잡스러움 없이 정제되어있어 거추장스러운 너절함 없이 깔끔하다. 그리고 사람에 대한 관찰, 인간 개성에 대한 탐사는 이 시리즈의 일관된 지향점을 확인하게 한다. 사건 추리의 트릭이나 논리추구와 같은 기교적 재미가 아니라 사건의 내재적 본성을 이루는 사람들의 면모에 애정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선과 악이라는 극명한 인위적 잣대로 단정하는 오만의 짜증남이 없기에 평온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머리에는 총상을 치료하고 꿰맨 상처를 지닌 채 파리 한복판을 방황하는 중년의 남자가 발견된다. 프랑스북부 인구 1천명 남짓의 자그마한 항구도시‘위스트르앙’의 실종된 항만관리소장으로 신분이 확인되고, 매그레는 기억과 언어능력을 상실한 남자를 위스트르앙 그의 거처로 데리고 간다. 그러나 다음날 독살된 주검으로 발견된다. 스토리는 이와 같이‘조리스’라는 남자의 머리에 난 상처와 독살의 의문을 쫓는 일면 단순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특징은 단선적으로 용의자를 추적하는 데 있지 않다. 항구 도시의 구성원인 마을 인물들, 그 개인들, 인간들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 그 본성을 쫓기에 풍성한 무엇이 된다.

죽은 자의 계좌에 입금된 거금이나, 전과자인 하녀의 오라비, 토끼 사냥을 다니는 시장, 갑문을 관리하는 항만관리소의 동료선장 등 사건의 복선처럼 작용하는 조치들이 형식미를 더하고는 있지만 이는 역으로 이 소설이 추구하는 인간탐사의 하부구조로 작동할 뿐이다. 많은 선박의 소유주로서 권세를 과시하는 몸짓이 밴 작은 마을의 시장, 그리고 친절함에도 정숙한 위엄이 묻어나는 시장의 아내, 손상되지 않은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하녀의 순박함, 선원들의 투박함과 자신들만의 무언의 집단의식과 동료애, 경계를 세우는 이러한 집단의 세계에 다가가는 열린 마음과 그 뒤섞임의 의미 등 인간사와 인간개체에 대한 응시가 매력적 상부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소설이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는데, 지배적 질서이자 사회의 엄격한 규범을 획일적인 잣대로 들이대지 않는 매그레의 관점이다. 사건의 발단이자 원인이 된 진실로 접근함에 따라 여동생과 오빠의, 잃어버린 연인과 그 결실에 대한 떼어놓을 수 없는 천륜지정, 그리고 이를 막아서는 소유욕과 질투의 덧없음, 끈끈하게 얽힌 동료의식 등 인간이 최후까지 지켜내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 전체를 장악한다.

“살인범을 공개할 필요가 있을까? ....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묵은 원한이 있다고 해둡시다! 외지에서 온 뱃사람이 선장을 죽이고 사라졌다고....”

타인들의 치정다툼에 터무니없이 희생된 주검에 대해서 다분히 비도덕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지만 산 자들의 평화와 사랑을 위한 정의라는 측면에서 이런 이해와 관용은 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김 서린 기차 창문을 통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선원들과 항구를 바라보는 수사관의 시선처럼 인간사란 그리 선명하게 재단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게다. 온 사위가 적막한 어느 산막의 눈 내리는 겨울날 읽기에 그만인 소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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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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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줄 곧 수행하는 낯선 것의 드러냄과 그래서 익숙해 진 것들의 다시 낯선 것으로의 되돌리기 작업이다. 보지 못하던 것, 생각지 못하던 것, 알지 못하던 것의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어 그 존재성을 부각하고 그것에 잠재된 진실의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들이 상실하거나 잃어버린 감각을 깨우는 기획이다.
하찮고, 비루하며, 보잘것없어 그 존재마저 지워버리려 하는 것들, 그럼에도 그 정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낯섦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 이들‘불온한’것들의‘있음’에 대한, 그 실재함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존재론’인 까닭은 “존재하는가와 무관하게 표상되는 명사적 실체”인 존재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산엔 곰이 한 마리도 없어” 라는 말이 곰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지만 이 경우에도 곰은 곰이라는 존재자임이 분명하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설혹 우리들이 보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으려하며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인하더라도 존재하는 존재자들, 바로 이 알 수 없어 불온한 존재자들을 새롭게 보아야 하는 이유의 이야기다. 이들 표상으로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oncomouse)’,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등 여섯의 불온한 것들을 통해 우리들의 감각적 타성을 벗어버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불온하다고 느끼는 것은 눈앞에 있지만 무엇 때문에 저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정체를 알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을 때 발생한다. 또한 불온성은 그 부정의 대상이 나를 덮쳐올 것 같은 불안, 즉 내가 선 자리와 내가 가진 것을 잠식하리라는 예감에서 오는 불안과 당혹의 감정이다. 이 불편한 감정,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그것을 억압하고 급기야는 폭력을 휘둘러 공격한다. 자본가에게 비정규직 노동자가 불온하게 인식되어 공권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 최근의 한진중공업 사태와 같은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불온한 것은 무엇일까? 이처럼 이 책은 우리의 통념적 감각을 바꾸는 작업, 인간의 혁명을 말하고 있다.

불온한 것의 처음을 장식하는 대상은‘장애자’이다. 정상인들은 왜 장애자를 불온하게 여길까? 비하와 동정의 양가감정을 수반하는 거부의 시선, 이 시선 속에서 장애자는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었고 그래서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대상이 되었다. 여기엔 인간의 위대함과 탁월성을 기초로하는 존재의 사유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고 이는 곧 장애자는 인간의 위대함을 훼손하고 잠식하는‘결함’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자랑스런 통념 속으로 밀고 들어와 인간을 그 비루하고 소소한 세계로 끌어들이기에 불온한 것이 된다. 인간이란 것이 과연 이처럼 위대하고 탁월한 것일까? 이 터무니없는 토대는 덜 위대한 것, 덜 탁월한 것인 2류, 3류를 만들어내고, 다시금 배제시키고 지워버리는 작업을 출현시킨다. 이 존재론적 서열화는 우리가 갈라서고 대결하여 끊어버려야 할 사슬일 것이다.

장애자만이 누군가에 의지하여 생존하는 존재일까?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자로서의 장애자는 ‘폐를 끼치는 자’이다. 버스에 장애자가 타고 내리는 것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정상인들은 이런 불편함과 불화로 자신들을 끌어내리는 장애자를 비난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재벌이나 권력자는 아마 남에게 가장 커다란 폐를 끼치는 자들일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가 과로하며 생산을 해주지 않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내주는 세금에 기대어 그 세금으로 관료들이나 졸개들을 거느릴 수 없다면 그들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귀찮은 일을 기꺼이 감수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 나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주는 누군가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가 조금이라도 노동을 줄이면 호통하는 자본가의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기에는 폐를 끼치는 것을 지우는 것으로 돈에 대한 환상이 있다. 돈을 주는 순간 폐를 끼쳤다는 사실을 잊는다. 또한 돈을 주기 이전부터 줄 생각으로 자신이 끼치는 폐를 지워버린다. 자신이 지은 신세를 교환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자신이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일을 시키면서도(이득이 없다면 고용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미래의 지불 가능성으로 현재의 모든 폐를 지우는 것이다. 이것은 돈이 많은 자들은 항상 타인에 기대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장애자다. 모든 인간은 장애자인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수많은 다른 존재자에 기대어 폐를 끼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우린 운명적으로 장애자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린 동등하다. 기대어 있음을 보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오인이자 환상인 장애자에 대한 몰이해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장애자’가 이처럼 의타적 존재로서의 인간 보편의 운명을 통해 존재자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고 있다면, ‘박테리아’는 생성과 면역이라는 매개어를 통해 ‘공생과 공존의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깨운다.
‘미토콘드리아’처럼 잡아먹힌 것에 잠식됨으로써 변성된, 잡아먹은 것의 새로운 신체가 출현하는 탄생지점을 포착하는 것이다. 생성이란 이렇듯 “어떤 만남이나 충돌에 의해 하나의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한편 나의 내부에 속하는 것과 외부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면역이 항상 외부를 구별하고 배제하는 메커니즘만 작동한다면 우린 아마 먹이를 먹는다는 것이 불가능 할 것이다. 질병이 숙주와 기생체가 서로 적응하는 과정이라면 치유란 서로의 공생 내지 공존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것과 같이 외부적인 것과 공생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될 것이다. 배제하고 추방하는 비위생적 치안이란 호소는 생물학적으로도 비이성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이보그’에서는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 인간의 외연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계를 부수어 버리는 자기 소멸의 존재자를 얘기한다. 이것은 확장되어 오늘의 무선통신의 세계와 결합한 인간, 접속과 변환에 의해 자기가 소멸하는 능력에 의해 규정되는 네트의 바다, 실제적인 소통은 없으며 오직 오염과 감염, 변형과 변조만 있는 신체를 말하며, ‘온코마우스’에서는 목적론적 사유로 인해 수단이 되어버린 새로운 신체의 존재자가 된, 즉 상품으로서 만들어지는 신체, 생명복제시대의 윤리, 타자를 수단화하는 비정한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비판한다.
이것은 생물학적 성이 남녀라는 인간의 형상을 모델로 하는 함수의 이항성에 매몰된 이성의 눈가림으로 인해‘페티시스트’라는 사물에의 사랑을 왜곡하는 ‘화폐에 대한 페티시즘’으로 연결되어 사물성은 사라지고 화폐에 대한 미친 욕망에 휘둘리는 화폐가치라는 과시성 상품에 의존하는 천박한 남근주의적 욕망의 비판이 된다.

끝으로 불안정을 의미하는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의 합성어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계약직 노동자, 파견직 노동자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신체와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정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범람하는 노동자, 이들을 양산하여 값싼 노동력을 상시적으로 착취하려는 시장자본주의는 오히려 이 불명하고 애매모호한 계급의 불온성에 역습을 당 할 수도 있다. 이성이나 정신이 다가설 수 없는 무능력의 지대, 목적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 저항의 지대인 오이코스의 반란은 지속될 것이다. 아니 지속되어야만 한다. “익숙한 것을 다시 낯선 것으로 만드는‘미친 감각’”, 그래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하여 새로운 개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작업, 공생과 공존의 화합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된다. 불온한 것들이라 밀어내는 것들, 그 거북함으로 보지 않고 외면하려는 것들을 통해서 우린 보다 완전한 종족이 되어 가지 않겠는가? 낯설고 불편한 것들과의 만남을 기꺼이 새로운 삶의 기회로 긍정하고 그것들의 존재 자체를 평온한 삶의 전제조건으로 긍정하는 곳으로 안내하는 이 책은 제거와 추방을 행하는 지배질서의 오인을 멋지게 규명하고 있다. 우리의 통념을 기막히게 전복시키며 잃어버린 보편적 진실에 대한 감각을 살려내는 이 존재론적 사유는 적대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친구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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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Thirty - 젊은 작가 7인의 상상 이상의 서른 이야기
김언수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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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나이 삼십, 내겐 이 시절이 어떤 것이었나를 기억해보게 된다. 그리곤 젊은 작가들이 그려내고 있는 서른처럼 경계에선 고통의 치열함이 있었는지를 비교해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30’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인식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처럼 온통 흑색의 혼돈일지는 예상치 못했다. 한 없이 허방을 딛고 공허하며 죽음의 그늘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암흑을 말하니 빛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장난 같은 것을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른 살, 삼십대의 나이가 이렇게 서툴고 강렬한 삶의 통증에 휘청거려야만 하는 것인지 낯설기만 하다.

강물에 몸을 던지고, 몇 푼의 돈 때문에 살인에 휘말리고, 순회 살인에, 유령이 된 불륜녀의 죽음이 떠돌며, 생의 기억을 팔아 쾌락과 죽음을 사고, 자살을 위해 심산의 고시원을 찾아들기도 하며, 자살이 상품이 된 공간을 떠도는 그야말로 서른의 삶이 온통 죽음의 세계로 도배 되어있다.
이들이 회피하는 것이 삶 자체인가? 아니면 삶의 배경이 되는 것들, 인간이 만들어 낸 무수한 질서들, 다가가야 할 세계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것인가? 세뇌된 욕망의 충족될 수 없는 허기를 알아차린 것 때문일까?

오늘의 서른은 지금 이렇게 혹독하고도 잔인한 시공에 놓여있는 것인가?! 안락과 지배와 권위와 부와 물질만을 선이라고 가르쳐 온 이 사회의 반작용이 아닐까? 망국적 교육열, 타자는 경쟁해서 물리칠 대상이거나 복속시켜야 할 존재라는 기이한 개인주의에 몰입해왔던 시대의 몽매함에 세뇌된 이 사회의 정신 때문이 아닐까? 먼저 손을 내밀지 모르는 사람들, 사랑도 단지 몸이 따라가는 감각적 쾌락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 돈은 도덕성위에 존재하는 신앙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 인간도 역시 다른 모든 사물과 자연처럼 상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이긴 하다. 이것이 거대한 질서를 형성하고 시스템화 되어 스스로들을 숨 막히는 경주의 대열로 몰아세우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린 반성할 줄 알고, 끊임없이 저항 할 수 있으며, 자신의 내적 평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견고하게 짜인 무수한 사회의 네트워크들, 자신들의 영역을 항구화하려는 누적된 질서들이 삼십이란 나이에겐 더없이 버거운 장벽이지만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영구적이던가?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고 정체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찰나의 멈춤도 없이 변화하지 않는가?
무한히 계속 될 것만 같은 생의 공포? 이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욱 깊어진다.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정의에 따라 이 공포는 다른 것들로 대체 될 수 있다. 어떤 세상의 질서에 편입되기만 하려는 삼십은 공포만 느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부모 세대들이 숭배하라고 가르친 것들의 많은 허상들을 내 던지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일곱 작가의 글 중, 유독 하나의 작품만이 내 시선을 오래 머물게 했는데, ‘정용준’의 『그들과 여기까지』이다. 아마 유일하게 닫혔던 마음이 열리고, 타인이 내미는 손의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자살을 결심한 청년의 생존 연장의 이유가 하찮을 정도로 당연하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사소한 것으로 지탱되는 것일 게다. 그리고 ‘김성중’의 『국경의 시장』이나, ‘박화영’의 『자살 관광 특구』에서 공히 느껴지는 거래할 수 없는 것을 거래하는 환상의 공간인 오늘, 이 위태로운 세계에 대한 그 시니컬한 관조가 마음 깊은 곳에 파문을 일으킨다.

이십의 삶, 삼십의 삶, 사십의 삶, 오십의 삶, 육십 그리고 노년의 삶, 그 본질이 무엇이 다를까? 그 허망함과 어처구니없음, 욕망의 좌절, 엉뚱한 곳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모두 같은 일이지 않을까? 삼십, 삶을 이렇게 치열하게, 강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지 않을까. 죽음이 있음으로서 삶이란 말이 가능하듯이 모든 것에는 다른 세계가 있기 마련이다. 서른을 말하는 이 소설집을 읽게 되면서 내 아이들이 부대끼는 세상에 대한 인식이 이 정도였구나 하는 시린 통증을 느낀다. 그들이 경계에 서서 위태로운 걸음을 더 이상 걷지 않는 세상을 기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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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의 성립 - 서구어가 일본 근대를 만나 새로운 언어가 되기까지
야나부 아키라 지음, 김옥희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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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는 구체성을 띤 것이던 어떤 관념적인 추상성을 함축하는 것이던 그것을 통해 우린 그것에 해당하는 개념이나 이미지를 떠 올린다.
형체가 있는 사물일지라도 보지 못한 것을 지칭하는 단어를 들으면 우린 단어와 사물을 선뜻 연결하지 못한다. 연상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인데, 하물며 경험하지도 느낄 수도 없는 추상적 관념어야말로 그 의미 그대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서구의 문명이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동아시아에 본격적으로 밀려들어 온 것을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을 기점으로 보면 150년 가까운 시간이 된다. 우리의 경우는 이러한 일본의 근대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식되었으니 일본과는 다소 다른 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 낯선 세계의 사물들과 관념의 이해를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했는데,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고, 느낀 적도 없는, 아니 생각해 본적도 없는 관념의 세계와 사물이니 당연히 자국의 언어에 그런 의미를 그대로 대체할 단어가 있을 리 없다. 당대의 번역어는 이처럼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는 과정일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시대상, 문화적 배경, 사람들의 정신적 구조 등을 반영하는 산물이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 이질적인 서구문명을 표상하는 언어를 어떻게 일본의, 동아시아의 언어로 반영하는 가의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 반영과 성립의 과정을 통해서 번역어에 침윤된 문화적 욕망의 재생산의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일례로 18세기 일본에는‘society’라는 특정의 목적을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광의의 공동체라는 개념이 있지 않았으며, ‘Individual'처럼 인간 개체에 대한 자율적 존재로서의 개인이란 인식이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 단어를 동일한 의미를 가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실로 난감한 일이었으며, 결국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했는데, 바로 이 신조어의 제작과 자국의 언어적 습관에 정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여러 문화적 정신구조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단어로 사회, 개인을 비롯해 「존재, 미, 연애, 근대, 권리, 자연, 자유, 그(그녀)」등 열 개의 단어를 통해 이들 단어가 어떻게 번역어로 조성되고 살아남아 오늘에 기계적으로 치환되는 언어가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어떤 단어가 이질적인 사회에 지식으로 들어올지라도 그 구체적인 용례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에서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 ‘교제’나 ‘세상’과 같은 이미 사용하던 단어를 society 의 초기번역어로 사용하지만 이들 기존의 단어로 소사이어티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던‘사(社)’와‘회(會)’의 합성을 통해 사회(社會)라는 신조어가 번역어로 정착되는 것처럼 두 글자의 고유의 의미는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단어를 만드는 것이다. 이 신조어는 이처럼 의미를 대응시키지 않음으로써 원어와의 의미의 어긋남을 회피하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대 일본인들의 한자어에 대한 일종의‘카세트 효과’가 반영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왠지 어감이 좀 더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것과 같은 막연한 느낌, 사실은 텅 빈 보석함(카세트)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괜찮은 것이 들어 있을 것 같다는 매혹과 같은 현혹이라는 것이다. 이것에는 아주 중대한 시사점이 있다. 교제나 세상과 같은 말을 제치고 본래의 사의 어감도 회의 어감도 없는 사회라는 번역어가 살아남은 것에는 막연히 관련 있을 것이라는 믿음, 의미 반영의 미흡함이 오히려 본래의 의미를 채워 넣을 수 있다는 빈 공간의 역설이라는 발견이다.

또한 기존에 사용하던 일상 속 단어의 의미를 확장하여 바꾸고 그것을 통해 현실 자체를 바꾸고자 하는 것은 이미 현실의 무게를 짊어진 단어로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히려 의미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유행하고 남용되어 다의(多意)적이 되고, 이 다의적이라는 의미 없음으로 인해 그것에 표면적 의미를 부여하여 이면적 의미와 결합하여 번역어로서의 의미를 완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태로 형성된 대표적 번역어로‘근대(近代)’를 설명하고 있는데, modern이 지니고 있던 “시대의 구분중 하나”라는 표면적 의미 외에 가치로서의 시대적 개념인 이면적 의미를 떠맡게 된 것은 하나의 본보기다.

한편 또 다른 카세트효과의 일종으로 beauty의 번역어인‘미(美)’에 대한 소개는 흥미롭다. 『금각사』와 『가면의 고백』으로 잘 알려진‘미시마 유키오’의 미의 트릭을 예로 들고 있는데, 대외적 대화나 평론에서는 미의 개념을 한없이 폄하하고 비난하다가 정작 자신의 소설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이중 행위를 함으로써 모호함과 알 수 없음이라는 인위적인 카세트효과를 불러 미에 대한 우월감을 과시하여 고상한 언어로 고착화시킨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구태여 허영과 유사한 의식으로 간단히 정의하고 있지만 ‘사카이 나오키’가 그의 저술『번역과 주체』에서 말한 일종의 ‘문화적 본질주의’라는 전체주의적 요소를 발견할 수 도 있다. 이것은 감정이 무매개적으로 공유됨으로써 공감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전체성으로의 합일의 사례처럼 보이며, 공유된 심미적 정서로 통합된 공동체와 국가의 통합체로서의 관점으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이 책의 한계로 보인다. 비평적 관점을 가지고 있으나 표피적인 판단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카세트효과를 야기한 그 근원의 심층에는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책의 주제로 돌아가서 번역어의 문자 그대로 성립과정의 유형을 통해 정신문화적 현상을 탐색할 수 도 있다. 자국 언어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한 한계에서 비롯된‘존재(存在:being)’와 같은 단어들이나, 기존의 단어가 지닌 의미와의 모순을 일으키는‘자연(自然: nature)’이나 부정이 오히려 자체의 의미를 덮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 '자유(自由;liberty)'와 같은 단어가 그 예이다. 추상적 의미를 지닌 기본적 동사는 명사화하기 힘들다는 언어적 한계로 인해, be동사의 진행형인 being의 직역인 ‘있음’을 기초로하여 ‘있음론’의 활용이 아니라 ‘존재론’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있음’이 아니라 ‘존재’가 번역어로 살아남는 것이다. 자유의 경우는 ‘제멋대로 구는’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었었으나 liberty의 번역어로 자유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부정적 카세트효과가 이용되는 양상도 발견된다.

특히 자연은 “저절로 그렇게 된 모습”이라는 ‘자연스럽다. ’의 의미는 지니고 있었으나 nature가 지닌 “정신적이 아닌 외적 경험 대상의 총체, 즉 물체계 및 물체계의 여러 현상”이란 뜻은 없었다.
이것은 자연이 nature의 번역어가 되었다고 곧바로 nature의 의미를 제대로 갖게 된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결국 일본문학이 이러한 몰이해(기존의 자연에 대한 인식)로 인하여 소재의 이상화를 배격한다는 구실 하에 ‘자연을 그대로 쓴다’라는 왜곡된 도입으로 이어진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일본 자연주의 문학을 발흥하게 했으며 이것을 곧 극사실주의 문학인 사소설로 이어지게 한‘다야마 가타이’로부터 번역어 성립과정에서 발견되는 왜곡, 오해, 허영이라는 의식의 총체를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들이 무심코 별다른 저항 없이 사용하는 이들 단어들이 이러한 번역어로서의 성립과정을 겪고 살아남은 언어라는 이해는 우리가 놓치고 있던 관점을 일깨운다. 가장 의미적 접근이 잘 된 적절한 단어가 번역어로 성립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나, 빈약한 의미의 비대칭의 언어가 의미를 채워감으로써 완성되어간다는 것, 한자어 중심의 표현으로 자국 고유의 표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 등의 지적은 우리의 언어 사용에 반성과 귀중한 참조점이 되어 준다. 근대화가 이들 서구문명의 번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번역된 근대’라 불리듯이 서구에 대한 무분별한 동일화의 욕망과 상실한 주체성의 반영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번역된 단어 하나하나가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담아내는 것으로서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가 반성해야 할 언어 습관이 떠오른다. 한자어의 조합을 통해 신조어로서 번역어를 만들어 낸 일본인들과 달리 최근의 우리는 영어를 그대로 우리의 언어로 이식하고 있다. 이것은 역시 일본의 서구에 대한 동일화의 욕망, 주체의 상실을 반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을 서구의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그것이 될 수 있다는 문화국민주의적 퇴보라 할 수 있다. 언어란 하루 아침에 자기의 것으로 정착되지 않는다. 어쩌면 속 빈 카세트에 의미를 채워 넣어 완성적인 진짜 보석함으로 만들어가는 일본인들의 일견 허영심 속에 진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어는 자국의 정신이다. 이 책이 비록 문화적 본질과 주체의 탐구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문화로서의 외국어를 자국의 언어로 해석하려는 과정의 치열함을 통해 어떻게 정신으로서의 문화가 변화해나가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일본, 동아시아의 근대를 언어와 문화라는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귀한 계기가 되어주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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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7 13: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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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9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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