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저자가 줄 곧 수행하는 낯선 것의 드러냄과 그래서 익숙해 진 것들의 다시 낯선 것으로의 되돌리기 작업이다. 보지 못하던 것, 생각지 못하던 것, 알지 못하던 것의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어 그 존재성을 부각하고 그것에 잠재된 진실의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들이 상실하거나 잃어버린 감각을 깨우는 기획이다.
하찮고, 비루하며, 보잘것없어 그 존재마저 지워버리려 하는 것들, 그럼에도 그 정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낯섦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 이들‘불온한’것들의‘있음’에 대한, 그 실재함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존재론’인 까닭은 “존재하는가와 무관하게 표상되는 명사적 실체”인 존재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산엔 곰이 한 마리도 없어” 라는 말이 곰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지만 이 경우에도 곰은 곰이라는 존재자임이 분명하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설혹 우리들이 보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으려하며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인하더라도 존재하는 존재자들, 바로 이 알 수 없어 불온한 존재자들을 새롭게 보아야 하는 이유의 이야기다. 이들 표상으로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oncomouse)’,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등 여섯의 불온한 것들을 통해 우리들의 감각적 타성을 벗어버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불온하다고 느끼는 것은 눈앞에 있지만 무엇 때문에 저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정체를 알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을 때 발생한다. 또한 불온성은 그 부정의 대상이 나를 덮쳐올 것 같은 불안, 즉 내가 선 자리와 내가 가진 것을 잠식하리라는 예감에서 오는 불안과 당혹의 감정이다. 이 불편한 감정,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그것을 억압하고 급기야는 폭력을 휘둘러 공격한다. 자본가에게 비정규직 노동자가 불온하게 인식되어 공권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 최근의 한진중공업 사태와 같은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불온한 것은 무엇일까? 이처럼 이 책은 우리의 통념적 감각을 바꾸는 작업, 인간의 혁명을 말하고 있다.
불온한 것의 처음을 장식하는 대상은‘장애자’이다. 정상인들은 왜 장애자를 불온하게 여길까? 비하와 동정의 양가감정을 수반하는 거부의 시선, 이 시선 속에서 장애자는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었고 그래서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대상이 되었다. 여기엔 인간의 위대함과 탁월성을 기초로하는 존재의 사유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고 이는 곧 장애자는 인간의 위대함을 훼손하고 잠식하는‘결함’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자랑스런 통념 속으로 밀고 들어와 인간을 그 비루하고 소소한 세계로 끌어들이기에 불온한 것이 된다. 인간이란 것이 과연 이처럼 위대하고 탁월한 것일까? 이 터무니없는 토대는 덜 위대한 것, 덜 탁월한 것인 2류, 3류를 만들어내고, 다시금 배제시키고 지워버리는 작업을 출현시킨다. 이 존재론적 서열화는 우리가 갈라서고 대결하여 끊어버려야 할 사슬일 것이다.
장애자만이 누군가에 의지하여 생존하는 존재일까?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자로서의 장애자는 ‘폐를 끼치는 자’이다. 버스에 장애자가 타고 내리는 것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정상인들은 이런 불편함과 불화로 자신들을 끌어내리는 장애자를 비난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재벌이나 권력자는 아마 남에게 가장 커다란 폐를 끼치는 자들일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가 과로하며 생산을 해주지 않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내주는 세금에 기대어 그 세금으로 관료들이나 졸개들을 거느릴 수 없다면 그들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귀찮은 일을 기꺼이 감수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 나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주는 누군가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가 조금이라도 노동을 줄이면 호통하는 자본가의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기에는 폐를 끼치는 것을 지우는 것으로 돈에 대한 환상이 있다. 돈을 주는 순간 폐를 끼쳤다는 사실을 잊는다. 또한 돈을 주기 이전부터 줄 생각으로 자신이 끼치는 폐를 지워버린다. 자신이 지은 신세를 교환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자신이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일을 시키면서도(이득이 없다면 고용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미래의 지불 가능성으로 현재의 모든 폐를 지우는 것이다. 이것은 돈이 많은 자들은 항상 타인에 기대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장애자다. 모든 인간은 장애자인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수많은 다른 존재자에 기대어 폐를 끼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우린 운명적으로 장애자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린 동등하다. 기대어 있음을 보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오인이자 환상인 장애자에 대한 몰이해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장애자’가 이처럼 의타적 존재로서의 인간 보편의 운명을 통해 존재자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고 있다면, ‘박테리아’는 생성과 면역이라는 매개어를 통해 ‘공생과 공존의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깨운다.
‘미토콘드리아’처럼 잡아먹힌 것에 잠식됨으로써 변성된, 잡아먹은 것의 새로운 신체가 출현하는 탄생지점을 포착하는 것이다. 생성이란 이렇듯 “어떤 만남이나 충돌에 의해 하나의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한편 나의 내부에 속하는 것과 외부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면역이 항상 외부를 구별하고 배제하는 메커니즘만 작동한다면 우린 아마 먹이를 먹는다는 것이 불가능 할 것이다. 질병이 숙주와 기생체가 서로 적응하는 과정이라면 치유란 서로의 공생 내지 공존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것과 같이 외부적인 것과 공생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될 것이다. 배제하고 추방하는 비위생적 치안이란 호소는 생물학적으로도 비이성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이보그’에서는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 인간의 외연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계를 부수어 버리는 자기 소멸의 존재자를 얘기한다. 이것은 확장되어 오늘의 무선통신의 세계와 결합한 인간, 접속과 변환에 의해 자기가 소멸하는 능력에 의해 규정되는 네트의 바다, 실제적인 소통은 없으며 오직 오염과 감염, 변형과 변조만 있는 신체를 말하며, ‘온코마우스’에서는 목적론적 사유로 인해 수단이 되어버린 새로운 신체의 존재자가 된, 즉 상품으로서 만들어지는 신체, 생명복제시대의 윤리, 타자를 수단화하는 비정한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비판한다.
이것은 생물학적 성이 남녀라는 인간의 형상을 모델로 하는 함수의 이항성에 매몰된 이성의 눈가림으로 인해‘페티시스트’라는 사물에의 사랑을 왜곡하는 ‘화폐에 대한 페티시즘’으로 연결되어 사물성은 사라지고 화폐에 대한 미친 욕망에 휘둘리는 화폐가치라는 과시성 상품에 의존하는 천박한 남근주의적 욕망의 비판이 된다.
끝으로 불안정을 의미하는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의 합성어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계약직 노동자, 파견직 노동자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신체와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정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범람하는 노동자, 이들을 양산하여 값싼 노동력을 상시적으로 착취하려는 시장자본주의는 오히려 이 불명하고 애매모호한 계급의 불온성에 역습을 당 할 수도 있다. 이성이나 정신이 다가설 수 없는 무능력의 지대, 목적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 저항의 지대인 오이코스의 반란은 지속될 것이다. 아니 지속되어야만 한다. “익숙한 것을 다시 낯선 것으로 만드는‘미친 감각’”, 그래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하여 새로운 개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작업, 공생과 공존의 화합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된다. 불온한 것들이라 밀어내는 것들, 그 거북함으로 보지 않고 외면하려는 것들을 통해서 우린 보다 완전한 종족이 되어 가지 않겠는가? 낯설고 불편한 것들과의 만남을 기꺼이 새로운 삶의 기회로 긍정하고 그것들의 존재 자체를 평온한 삶의 전제조건으로 긍정하는 곳으로 안내하는 이 책은 제거와 추방을 행하는 지배질서의 오인을 멋지게 규명하고 있다. 우리의 통념을 기막히게 전복시키며 잃어버린 보편적 진실에 대한 감각을 살려내는 이 존재론적 사유는 적대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친구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