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 1 열린책들 세계문학 136
앙투안 갈랑 엮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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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작은 혼란부터 매듭짓는 것이 옳겠다. 나는 『천일야화(千一夜話)』와 『아라비안 나이트』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는데, 전자인‘앙투안 갈랑’의 번안 작품과 후자인 ‘리처드 버턴’의 번안 작품을 비로소 분별하게 되었다. 아랍의 원작 제목은 <1001의 밤>으로 알려졌으며, ‘1001’이라는 숫자를 설명하자면‘끝없는’ 혹은 ‘무한한’ 이라는 의미를 아랍문화권에서는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원작을 최초로 서구세계에 알린 작품이 바로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千一夜話)』이며, 이후 리처드 버턴이 다시금 각색 번안한 작품이 『아라비안 나이트』이고 보면 그 본류가 같은 것이지만, 번안자의 해석의지가 반영되어 구성과 이야기에서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이야기의 구성은 1001일 동안 계속되고 있는데, 그런고로 이 상징적 숫자는 아마 영원하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작품의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말하는 새삼스러움은 지양(止揚)하여야겠지만, 이야기들마다 무수한 허구의 상상력으로 넘쳐나는 데에는 감히 격찬을 자제할 수 없게 한다. 특히 수많은 매일의 이야기들이 완벽한 하나의 통합된 작품으로 엮이는 솜씨는 정말 기막히다고 할 밖에 없다. 전혀 다른 이야기 구조와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매일의 이야기들이 어떤 단절이나 거북함 없이 연결되는 것에는 무엇인가에 홀린 것만 같으니 말이다.


화자(話者)는 그 유명한‘셰에라자드’이다. 피겨 스케이트장에 울려 퍼지던 김연아 선수의 배경곡인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관현악곡에 모티브가 된 바로 그 인물이다. 작품의 시대 배경은 12~3세기의 페르시아 제국 사산 왕조다. 셰에라자드가 왜 제국의 칼리프인‘샤리아’에게 매일 밤 이야기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의 이유가 흥미롭다.

우애가 깊은 샤리아와 동생‘샤즈난’이 자신들의 왕비가 그들이 부재중에 벌이는 부정(不貞)을 목격함으로부터 야기된 일종의 여성의 정조(貞操)대한 복수가 발단이라 할 수 있다.


시종들과 벌이는 왕비의 난교 장면을 목격한 칼리프의 서슬 시퍼런 여성에 대한 불신이 그것이다. 왕비를 처형한 샤리아는 이후 매일 밤 자신과 동침하는 처녀를 다음날 처형하는 방식으로 부정에 대한 복수 행위를 지속한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신음과 원망의 목소리가 높아지지만 어느 누구도 제국의 절대지존인 칼리프, 샤리아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이러한 참혹한 현실에 대해 연민과 슬픔을 가진 재상의 여식인 셰에라자드는 칼리프의 왕비가 될 것을 자청하고, 샤리아의 침소에 든다. 그리고 다음날 죽게 될지도 모를 운명의 여인으로서 샤리아에게 자신의 여동생‘디나르자드’와 함께 마지막 밤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 받는다.


결국 살아있는 순간의 마지막에 들려주는 것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동생에게 들려주는 것이고, 이 이야기를 같이 듣던 칼리프 샤리아 역시 그 이야기에 매혹되어 셰에라자드의 처형을 하루씩 미루게 되는 구조를 지니게 된다. 셰에라자드의 처형이 미루어지는 것은 곧 제국의 처녀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즉 셰에라자드의 이야기 자체가 이미 생명의 구원이 되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이야기들이 내재하고 있는 온갖 삶의 교훈과 지혜들이 발산하는 그 풍요로운 아름다움과 덕성은 구원 이상의 가치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진 신바드나 알라딘, 알리바바 등이 1001일간 펼쳐지는 방대한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진정 무한히 이어지는 이야기들의 연속인데, 이들 유명세를 탄 이야기들 이상의 즐거움과 탄탄한 구성의 이야기들이 즐비하다. 질투와 배신과 탐욕이 어우러져 정의의 세계를 더욱 극대화시키는「세 탁발승과 다섯 아가씨 이야기」, 호리병 속에 갇힌 거인정령의 이기심이 다시 자신을 가두게 된다는 우주적 진리의「어부 이야기」, 협력과 화해와 용서, 그리고 배려, 사랑의 모습들이 수놓인「상인과 정령」과 같은 커다란 범주의 이야기 속에 다시 작은 범주의 이야기들이 놓여있고, 바로 매일 지속되는 이 이야기들이 마치 드라마 연속극이 감질나게 다음회로 미루어지듯이 이야기의 다음을 보지 않을 수 없게 할 만큼 기대와 호기심을 연속적으로 자극하며 끝이 없을 듯 계속되는 구조이다.


당대의 이슬람과 이교(異敎)를 비롯해 풍부한 관습과 풍속을 볼 수 있는데, 근친혼에 대한 터부, 여성의 재혼에 대한 의외의 관대함, 그러나 여성의 부정에 대한 엄격함, 신의와 배신에 대한 강경함, 시샘과 질투, 투기에 대한 처벌, 종교적 권위에 대한 지고함, 형제애, 우애, 가족애, 연인의 사랑 등이 마술과 초현실의 세계를 오가며 풍자와 비극, 숨겨진 삶의 긍정성과 진실들을 풀어 헤친다. “당신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났었으니...”와 같은 단순한 문장이 품고 있는 삶의 원리를 자각하는 것, 역으로 그 단순동일의 인간 삶의 범주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금기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 그 욕망의 무절제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수백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지펴내고 있다. 이제 69일째 밤의 이야기인 1권을 마치면서 도저히 2권, 3권...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지펴진 읽기의 욕망을 끊을 수가 없을 것 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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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시
아모스 오즈 지음, 김한영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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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제목에 달라붙은 ‘~시(詩)’에 현혹되면 작품을 읽어나가는 데 혼란이 있게 된다. 작가의 감수에 의해 영역(英譯)된 제목을 보면 ‘Rhyming Life and Death’, 즉 이치 혹은 까닭이 있는 삶과 죽음, 또는 운율이 있는 삶과 죽음 정도로 직역 될 수 있다. ‘삶과 죽음’의 이치(理致)를 말하는 것이다. 작품은 바로 그 조화의 질서를 탐색하는 것이지 시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렇게 이해하고나면 소설을 읽어나가는데 저항감이 사라진다.

 

소설의 주인공은 익명의‘저자’이다. 그는 왜 글을 쓰는가? 왜 그런 글을 쓰는가?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노력하는가? 당신의 책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고 끊임없이 자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작가의 치열한 글쓰기에 대한 자기 검열과 세상을 향한 겸허한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래서 주인공 저자는 소설 속에서 소설을 씀으로서 인간의 모든 것, 바로 삶과 죽음의 얘기를 들려준다. 글 쓰는 것의 실천 양상(樣相)을, 글이 궁극에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만들어 보이는 작업을 통해 인생의 본질을 들려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신작에 대해 독자들과 대화하는 문학의 밤에 가는 길이다. 시작 시간이 남아 카페에 들르고 웨이트리스의 스커트에 밀착되어 드러난 속옷의 비대칭 윤곽에 가벼운 흥분을 느낀다. 이내 그녀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상상의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풋볼 선수와 사귀고 이내 헤어지고 남자는 또 다른 여자와 동일한 휴양지 호텔에서 사랑을 나눈다. 소설은 이처럼 보잘 것 없고 빈약하기 그지없는 인물들과 소재들이 상상 속에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 이야기가 되어 현실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직조해내는 되돌이표 있는 악보이다.

 

문학의 밤 주체자인 문학부장, 작품 낭독자인 여성, 문학 평론가인 남자, 비아냥대는 듯한 어느 남자 청중, 문학에 관심이라곤 없는 길거리에서 마주친 소년과 아이의 엄마, 그들로 인해 관계를 맺게 되는 가공의 인물들이 생성되면서 어느덧 삶과 죽음의 모습들이 하나의 완결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소설에는 하나의 중심 플롯이 있는데, ‘체파니아 베이트할라크미’란 시인의 『삶과 죽음의 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인 조차도 저자의 짧은 현실의 시공에서 마주한 인물들, 그가 상상의 공간에서 만들어 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에 합류시켜버린다.

 

그런데 이 상상의 얘기가 문학의 밤을 마치고 어둠이 내린 쓸쓸한 도시의 늦은 밤과 새벽을 거니는 저자의 현실세계와 수없이 교차하여 그 경계가 흐릿해져 버린다. 현실이 곧 허구로 연결되고, 허구는 어느덧 현실에 와 닿는다. 자신의 작품을 낭독한 여성과의 산책, 그녀와의 하룻밤 기묘한 정사, 그러나 남성의 실패와 여인의 자격지심이 교묘히 얽히는 장면들, 복권에 당첨되어 잘나가던 한 남자가 죽음을 앞에 둔 채 병원에 누워있고, 어머니의 용변을 받아내야 하는 임시직을 전전긍긍하는 남자 등등 끊임없이 관계들이 만들어지고 전개된다.

 

이들 얘기는 살아있음에 대한 실제의 비루함으로 그득하다. 이 지리멸렬한 삶을 증거 하는 것으로 관능이 세밀하게 묘사되는 것도 아마 이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피부로 그녀의 호흡에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들과 그녀의 살갗에 이는 잔물결들을 감지하고,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을 ....(이하 생략)”처럼 그 능숙하고 기막힌 관능의 포착은 작가의 소설적 기교가 어디에까지 이르러있는지에 대한 목격이 되기도 하다. 그리고 이 성의 이해는 “유성 생식이 출현했을 때 비로소 노쇠와 죽음이 출현했다.”고 말하면서, 이 세상에 함께 태어난 것은 ‘삶과 죽음’이 아니라 “성과 죽음일 것이다.”에서 정점에 이른다.

 

삶이 있었고 죽음과 성은 나중에 생긴 것이니 죽음의 불가피성은 제거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그러기 위해서 성을 제거하면 영생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흥미로운 주장에 이르기도 한다. 이것은 몇 차례 모습을 바꾸어 반복 등장하는데,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몸을 애무하는 듯한 젊은 여자의 손길을 느끼는 환상으로 내비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죽음의 파트너는 성이란 것이니, 일견 낭만적이고 희극(喜劇)적이라고 까지 할만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내일도 무덥고 축축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내일은 오늘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삶의 보잘 것 없음에 더욱 쓸쓸함을 더한다. 그저 이따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불을 켜는 것 말고는 별로 기대할 것 없는 것이 삶이란 말일 게다. 그러고 보면 결국 남는 것이 없다. 바로 무(無)! 그것의 깨달음 말고는..., 아니면 유성 생식과 죽음이란 그 영원한 반복, 영생의 이치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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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렌 키에르케고르’의『이것이냐 저것이냐』中 「유혹자의 일기」을 읽고...


이 작품은‘키에르케고르’의 처녀작인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수록된 자전적 소설이다. 아니 문학과 미학의 경계를 오가는‘소설철학’이라 해야 할까?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후일 발표된 『불안의 개념』에서 언급되던 아담의 원죄 이전의 그 불안에 대한 정의가 되살아나는데, 이미 젊은 철학가의 마음에 심미안과 윤리적 양심, 종교적 교의 사이에서 처절한 갈등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것은 일종의 경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골격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의 현실의 삶 속에서 유일한 연인이었던‘레기네 올센’을 모델로 하여 순진무구한, 말 그대로 이성과 연애, 세상에 대한 어떤 인식을 가지지 않은 여인(작중 이름;코델리아)이 이것들을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적 위치로 올려놓아 삶의 역사를 비로소 시작하게 하는 유혹의 기술과정이다. 따라서 세상과 단절한 듯 살아가는 한 소녀를 탐미적으로 바라보며 그녀가‘여성’으로서의 선택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치밀한 작업의 이야기만으로 이미 소설적 흥미를 달성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게만 읽어서는 작품의 본질을 거의 이해 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불안’에 대한 개념의 사전적 이해가 요구되는데, 그것은‘원죄’, 인류 최초의 죄의식의 주입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저지른 죄가 바로 원죄이다. 그런데 원죄라면 그 이전에는 죄가 없었다는 얘기이고 당연히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던 죄에 대해 알지 못한다. 즉 선악의 구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얘기이다. 어떤 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계시를 듣게 된다. 순진무구한, 그야말로 무지(無知)의 아담은 행위의 이행에 따른 막연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바로 불안을 낳는 것은 무(無), 순진무구, 알지 못함으로 인해 출현하는 것이란 말이 된다. 그리고 주어진 행위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선택하는 것, 다시 말해 가능성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 오직 나의 자유의지에 주어졌을 때 그 알지 못하는 저 쪽의 무엇에 대한 감정이 불안인 것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이해만을 가지고 읽더라도 이 작품의 의미는 자못 심오하게 다가온다. ‘유혹자’의 일기와 편지에 기록된 내용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된‘불안’으로 이끄는 작업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달콤한 불안, 정체모를 불안, 소심한 불안...

이 불안의 심리 끝에 결정케 되는, 그러나 완전히 자기 주체적인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하게 되는 선택의 결과는 이른바‘죄성(죄의 성질)’의 비로소의 입장이다. 이것은 케에르케고르의 주장에 의하면 욕망을 일깨우고 성의 분별을 가져오며, 죽음을 알게 한다. 무에서 가능성에 대한 인지(認知), 그리고 불안, 혼돈 뒤에 욕망과 성과 죽음이란 죄성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혹자의 일기는 무지의 소녀, 중성적(中性的)이기조차 한 여인, 코델리아가 완전히 자유로움의 경지에 놓일 수 있도록, 자신의 결정이 오직 자신의 의사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다는 상황에 도달하게 하는 작업계획서라 할 수 있다. 코델리아의 환심을 사기위해 애를 태우는 친구‘에드바르’와, 그녀의 고모를 대화상대자로 활용하여 무심한 듯 상대의 관심을 서서히 자극하는 전술을 벌이는데, 짐짓 “나의 높은 긍지, 나의 고집, 나의 냉담한 비웃음, 나의 비꼬인 냉소, 이것들이 그녀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다.”는 것은 하나의 일례가 될 것이다.


즉, 유혹이란 어떤 부담이 가해지지 않으면서 완전히 자유의지로 매혹되는 것, 자유 속에만 사랑이 있고, 자유 속에만 즐거움과 영혼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위치로 교묘하게 다가가게 하는 수법이다. 그래서 결정적 일격을 가하기 위한 체계적인 유혹의 절차를 이행한다. 이 작업 공정의 탐미적 의지에서 우리는 감정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겪게 된다. 아마 그것은 불안의 당혹이며, 두려움이자 어떤 떨림 같은 것일 것이다. 여기서 미학의 세계, 우리들을 달짝지근한 미열의 환영에 황홀하게 하는 그런 시간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처녀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것을 창조하는 것은 이미 하나의 예술적 재능이며, 창조적으로 처녀의 마음에서 빠져나오는 것 또한 고도의 기술이다.”라고 유혹자가 쓴 것처럼 한 탐미가의 사랑의 본질과 요체에 대한 해부라 할 수 있다. 코델리아가 여성으로서 자신을 이해하고 유혹자의 여자가 되는 순간 유혹자는 그녀를 떼어버리는 작업에 돌입한다. 이 역시 고도의 기교를 통해서.

이것으로 이 유혹자의 일기는 그 자체로 탐미적인 것이 된다. 바로 미학의 교본이 되는 것이다. 돈 후안(Don Juan)이 아가씨들을 유혹하고 차버리지만 그는 아가씨들을 차 버리는 것을 즐긴 것이 아니라 유혹하는 것 자체를 즐겼다는 변론에서 거듭 확인된다. 유혹자는 이처럼 인생을 향락하는 것으로서의 미적 생활의 실천을 보여준다. 흥미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둔해지려는 감각 및 감정과 의지를 자극해서 따분함과 권태로움을 밀어내는 작업, 인생을 시처럼 살아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인생이 코델리아로 분(扮)한 현실의 레기네 올센과의 관계를 보면 유혹자의 실천처럼 미학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1년 남짓의 약혼 생활 중 돌연 파혼을 선언한 것 까지는 젊은 키에르케고르로서는 더없이 시적인 삶의 실체화였겠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을 잊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에게 무한한 고뇌와 고난의 원인이 되었고, 화해와 자신의 진실을 알리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나, 그녀와의 연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많은 작품들과 자신의 저작 전체를 그녀에게 유산으로 바친 것에서 미적 삶과 윤리적 삶의 번민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발견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삶의 즐거움, 욕망의 추구인가, 아니면 윤리적 겸허와 신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에 대한 답변인 그의 저서 『반복』과 저것에 대한 답변서인 『두려움과 떨림』으로 독서의 행보가 계속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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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전쟁 - 군사적 폭력의 탈국가화
헤어프리트 뮌클러 지음, 공진성 옮김 / 책세상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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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의 종식, 그리고 첨예한 냉전시대가 종말을 고하면서 민주주의의 확산과 아울러 국가 간의 전쟁은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평화의 세상이 오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래 21세기는 지구촌 곳곳이 총성이 울리는 분쟁지역으로 가득하고, 그 전쟁의 양상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잔혹하며 지속적이다. 산업화와 근대화로 불리는 19세기와 20세기에 전개된 영토 국가 간의 대칭적 전쟁은 더 이상 발견하기 힘든 고전적 전쟁의 모습으로 사라지고, 전장의 경계도, 전후방도 없으며 어떤 결전도 없는‘탈 국가적’ 전쟁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국가 간의 전쟁, 즉 선전포고가 있고 제한된 지역에서 군사적 전투를 수행하여 승패를 가려 상대의 정치적 의지를 조속하게 굴복시키고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전쟁과는 달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승자도 패자도 불분명하고,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의 구분도 모호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지구전의 양태를 보이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현대의 전쟁을‘새로운 전쟁’이라고 명명하고, 이 전쟁의 속성 들을 분석, 통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쟁, 낯설어 보이는 전쟁은 사실 인류 전쟁의 역사들을 보면 새로운 것은 아니며, 오히려 2세기 남짓 근대에 인류가 겪었던 국가 간의 표준화된 대칭적 전쟁이 예외적 현상이고 대개는 현재 진행형인 서아시아, 아프리카, 동유럽에서의 낯설어 보이는 전쟁의 모습들이었음을 중세유럽의 30년 전쟁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그 동질성을 규명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오늘날의 민주화되고 영토의 경계가 명료하며 중앙 집중의 통치권이 완벽하게 전 지역에 미치는 그러한 국가의 성립이라는 것은 18세기 이후에나 시작된 것이고, 이전의 시기에는 대개 각 영주나 지방 토호 세력의 상황에 따라 국왕의 그 지배적 권력의 영역이 변동하는 시대였기에 국가 간의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30년’이란 장기간의 표현처럼 당시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영주와 영주, 국왕과 이웃의 국왕, 교황과 국왕 등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서 확전되고 그리곤 그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쉽사리 중단 할 수 없는 전쟁이 되고, 전쟁의 자원 역시 민간으로부터 차출하는 양식이었기에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이 무익하다보니 민간인을 전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결국 당대의 전쟁은 특정한 전쟁터에서 전투요원이 맞붙어 싸우는 형태가 아니라 아예 마을과 도시, 노인과 부녀자를 불문하고 초토화시켜버리는 그야말로 잔인한 것이었다.

 

이것이 근대 국가 간의 전쟁 양식으로 이전 된 것은 사거리의 연장, 발사율의 증진, 정확도의 제고와 같은 무기의 발전, 포병이란 존재의 등장과 함께하는 전투 대열의 변화가 병사의 오랜 훈련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전쟁 규모의 대형화로 군비, 전쟁비용의 비약적인 증가를 가져왔음을 들고 있다. 따라서 용병에 의존하던 전쟁은 상비군 조직으로, 세수의 안정적 조달기반의 확립과 같은 현대국가 조직의 성립으로 정착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전쟁 당사국의 대칭성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었으나 전쟁 수행자본의 비대칭성이 심화되는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고전적인 국가 간의 전쟁이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선명한 대결국면에서 더 이상 유용한 방식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음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의 적절한 사례인데, 이미 두 국가 간의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에서 엄청난 비대칭성을 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규군을 통한 전쟁은 승리 한듯하지만, 전쟁이 종료되었다고 할 수 있지 못하다.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의 구별이 불가능한 양상으로 전통적인 적의 표시가 없으며, 게릴라전, 테러의 형태로 끊임없이 전장의 특정함 없이 저항이 지속된다. 이는 공격군의 피로를 급격하게 상승시키며, 장기화됨에 따라 막대한 인명 및 물자의 손실과 군비의 증가를 초래한다. 결국 약자가 채택하는 비대칭성에 의거한 전쟁 수행방식으로 인해 전쟁의 목적인 적의 정치적 의지를 자신의 의지에 복속시키는데 요구되는 비용이 이익을 초과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국 군사의 희생이 국민들의 정신적 지지를 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비대칭 전략에 의한 전쟁은 대부분의 분쟁 지역에서 발견 할 수 있는 형태이다. 아마 이 비대칭 전략의 성공적 모델이 된 것은 1993년 10월 3일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악질적인 군벌 ‘무하마드 파라 아이디드’의 체포에 미국이 실패한 사건인 모양이다. 미군 18명이 살해당하고 80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더구나 미군의 시체를 토막 내고 훼손하여 길거리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CNN에 보도됨으로써 미군은 즉시 철수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으니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 저개발국의 군벌들, 전쟁 사업자들, 테러 조직들이 미국을 상대하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이를 숙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 게다.

 

이것은 열등한 군사력과 저비용으로 거대한 상대를 무너뜨리는 효과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분쟁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양상은 바로 이 저비용의 전쟁이 가능하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전쟁 비용이 너무 저렴해져서 누구든지 전쟁의 주체가 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이나 보스니아에서 벌어지고 있거나 있었던 전쟁,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속적인 내전들은 이러한 양상을 잘 설명하게 해준다. 이제 용병회사, 지역 군벌, 파르티잔, 테러 조직망, 유사 국가행위자, 사적 행위자, 누구든지 의지만 있으면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전쟁 이익과 권력까지 획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전쟁 재정의 조달 방식까지 변해서 난민촌에 주어지는 국제 원조자금과 물자는 이들의 병참(보급)기지이자 예비군 부대의 역할로 포함되어 있으며, 민간의 물자를 착취하고 이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저비용 전쟁 모델은 돈과 권력을 노리는 무수한 군벌들을 만들어 내고, 이들로 인해 국가 조직망 및 경제는 완전히 붕괴된다. 자유경제 체제는 약탈적 전쟁 경제체제로 바뀌며, 사회 안전망이 해체된 곳에서 소년들과 청년들은 생존수단을 위해 이들 군벌이나 전쟁사업자의 휘하로 들어가고 지급받은 AK소총(경량무기)은 생존 수단화되며 남성의 권위와 자존감을 획득하게 해준다. 언론에 자주 소개되는 소년병들의 잔혹성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 의해 조성되고 강화된다. 특히 이들의 전쟁 수행 방식은 소위 초토화 방식으로 점령한 지역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인데, 여기에 더욱 주목할 것은 부녀자에 대한 강간 등 성 폭력을 들 수 있다. 일종의 유전적 말살, 정신적, 도덕적 규범의 파괴를 통해 한 사회내의 내적 결합을 완전히 해체시키는 것이다. 성의 강력한 전쟁 무기화라 할 수 있다. 즉 저비용 전략에 부합하며, 점령지에서 적을 완전히 몰아내는 목적 달성에 완벽하게 기여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국가로서의 무늬를 띄고는 있지만 대다수의 아프리카지역은 이러한 국가붕괴전쟁의 지속으로 국가적 체계의 구성에 실패 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비용이 들지 않는 전쟁, 높은 수익과, 권력까지 향유 할 수 있는 수단이므로 수많은 군벌들과 전쟁사업자들로 내전은 항구화 된다. 이는 사회구조를 완전히 파괴하여 국가 존립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전쟁 당사자들, - 지역 군벌, 테러 조직망, 전쟁 사업자, 민간 군사회사 등 - 평화가 중요치 않은 이익집단들은 종족적, 종교적 대결을 마치 갈등의 원인이라 치장하지만 단지 자신들의 개인적 권력추구, 탐욕과 부패의 치장 이상이 아님을 발견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이처럼 새로운 전쟁은 일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범죄와 암시장은 동맹관계가 되며, 교환과 폭력사용이 하나로 결합하는 그림자 경제로 인해 더욱 견고해진다.

 

비대칭성에 의한 전쟁 전략이 더욱 효과적인 수단이 되게 한 것으로 현대 방송 미디어를 빼 놓을 수 없다. 높은 미디어 밀도, 개방적 미디어 접근성과 결합하여 테러가 자립하고, 적은 비용과 무력으로 최대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 점이다. 대표적 사례가 9.11 테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협상도 없고 어떤 텍스트화 된 메시지도 없다. 그저 강력한 이미지, 무한 공포를 야기하고 대상이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상대를 모르니 타협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항구적 위협에 대한 상존만이 부각된다. 폭력의 이미지와 모호함이 결합하여 위협과 공포를 생산하고 이는 더없는 전쟁 도구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전쟁’의 대표적 속성인‘비대칭성’을 중심으로 이 책이 이와 같이 들려주는 더 잔혹하고 끔찍하며 훨씬 오래 지속되어 사회와 국가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오늘의 전쟁 양상 탐사는 이미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지구촌 그 어느 지역보다 군사력이 집중되어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로 인해 다량의 참조점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전쟁이 과거나 후진적 전쟁 양상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 전쟁 양식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전쟁을 하게 되면 맞이하게 될 바로 그 전쟁의 무참한 모습을 짐작케 한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서 언급된 민주주의가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얘기나 ,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경쟁할 다른 수단(경제적, 정치적)을 갖지 못한 측에서는 전쟁에 의존 할 수밖에 없다는 한반도에 대한 진단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자못 지대하다.

북한은 물론이고 인접국인 중국 역시 일당 독재의 비민주화된 전체주의 국가이다. 이들은 군비 증강과 과시에 호전적인 지구에서 몇 안 되는 국가들이다. 더구나 21세기 분쟁지역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개입 능력을 가진 강대국의 수가 매우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군사비용으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계산이 명령하지 않으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전쟁의 민영화가 가속화되는 새로운 전쟁의 시대에서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의 기대는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쟁의 속성과 군사개입 전략의 세계적 변화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전쟁 전술에 대해 깊숙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군사적으로는 비대칭 전략에 입각한 전술부대의 육성, 역으로 비대칭성 공격에 대한 방어 전술전략을, 정치경제적 측면에서는 북한의 경제력 제고와 인권을 비롯한 민주주의의 전파를 위한 다각적인 지원과 모색을 통해 그들이 전쟁이 아닌 다른 경쟁수단을 선택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할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경제적 계산이 항시 균형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편협하지 않은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의 세계를‘전쟁’이란 언어를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국제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를 이해하고, 우리의 현실을 조명 할 수 있는 유익한 기회가 되게 해준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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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메랑 - 새로운 몰락의 시작, 금융위기와 부채의 복수
마이클 루이스 지음, 김정수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금융 시스템 붕괴와 국가 부도 위기에 내몰린 유럽 발 형국은 안방 수신기를 지켜보는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경제위협의 파국적 우려로 전달된다. 그리스 경제의 침몰이 몰고 올 유럽전역의 위기감은 유럽중앙은행, IMF의 국제자금 긴급 투입을 결정케 하고, 임시적 진정 국면에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대한 자금이 그리스 경제의 궁극적인 회생으로 연결될지, 이미 부실해진 경제 체제로 흔들거리는 나머지 유럽 국가들이 정상을 찾을지 의문이다. 사실 믿을만한 구석이 없다. 거품이 만들어 낸 가짜 자본으로 흥청망청 대던 도덕적 해이가 일시에 사라질지도 만무하지만 그네들의 민간 금융기관의 천문학적 대출 부실과 국가 부채는 폭발직전의 화산처럼 예측 불허이다.


이 책은 이렇듯 경제체제의 붕괴로 치닫는 유럽 국가들의 경제실체를 민간금융기관을 중심으로 각국의 중앙은행, 재무 부처등 정부, 사회 전반의 도덕성 등 국민의 의식수준과 실태 등을 통해 전(全)방위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특히, 유럽최초의 경제시스템 붕괴국가가 된 아일랜드나, 국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헤지펀드로 불렸던 아이슬란드의 국가 부도 사태,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한 그리스 사회의 총체적 분석, 미국 지방정부들의 신용위기, 독일정부의 이기적 금융 행동 양태들을 통한 문제의 본질에 대한 성찰은 우리 한국사회, 한국경제의 실상에서 시사하는 바가 자못 거대하다.


그 첫째로 신자유주의 시장 만능주의 경제기조를 신봉하는 한국 사회의 맹신적 논리가 여지없이 허무맹랑한 거짓이거나 기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공직자등 공공부문의 부패가 항상 문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이러한 도덕적 해이와 물질적 탐욕이 사회전반에 만연하여 공익을 희생해 개인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익숙해져 사회가 “원자화된 입자들의 집합”처럼 탈규범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시장 만능주의자들이 항상 대단한 철칙처럼 떠들어대는 말이 있다. ‘민간의 실패보다 정부의 실패가 크다’ 그러니 시장에 맡겨두라 라는 기만인데, 자본주의 역사 이래 이러한 양상이 드러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는 것이며, 오히려 민간의 실패가 국가 체계를 붕괴시키고 국민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는 것이 비일비재한 실상이다. 아일랜드의 경우만도 ‘아이리시 뱅크’ 단 하나의 은행 손실만으로도 국가 조세수입 4년 치를 깡그리 집어삼켰으며, 이로인해 부도덕한 금융자금으로 돈을 번 자들의 부실을 국민들이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떠안고 허덕이는 현실이 증명한다. 또한 아이슬란드는 민간 금융기관이 저지른 부실을 재무부와 중앙은행이 떠안았으며, 정부의 시장 불개입의 목소리를 높이던 신자유주의자들의 나라인 미국 역시 금융시장의 붕괴로 막대한 정부 재정자금의 투입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봉쇄한 것은 이젠 얘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손의 신화는 시장 만능주의자들의 기만적 망상일 뿐이며, 몰염치한 탐욕의 위장 논리에 불과하다.


이것은 사회전반에 만연한 자기중심적 이익추구를 취해 공익을 희생시키는 황금지상의 무절제한 탐욕으로 연결된다. 그리스의 국가 부도 위기는 “나라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 이 책의 지적에서 이러한 현상을 상세하게 목격할 수 있다. 의사, 변호사 등 개인 전문직 사업자들의 탈세는 세무공무원과 사회의 기득권적 우월이 연계하여 일상적이 되고, 금융은 미래수입을 증권화하여 자금조달을 일삼으며, 라디오 아나운서, 음악인이 중노동으로 분류되어 50세면 연금수령을 받기 시작하는 그야말로 국가 전체가 거짓과 탈세의 부패로 부글거리는 사회라는 것이다. ‘죄의 용서’외에는 아무것도 팔 게 없는 수도원조차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불려나가며, 공립학교 교사 수는 복지국가 핀란드의 4배에 이르는 등 국가전반의 도덕적 해이가 갈 때까지 갔음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무절제한 탐욕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무한적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어 4000억 달러의 미상환 대외부채, 정부연금 부채가 8000억 달러에 이르러 국가도산 상태에 이르고, “도둑질로 살아가는 나라”라고 세계가 혐오와 증오의 시선을 보내고 있음에도 그리스인들은 여전히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이들과 다를까? 심화된 정도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거의 닮은꼴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교회들은 저마다 엄청난 부동산 재산에 열을 올리고, 전문직종의 개인 사업자들의 세금 탈루는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저마다 지역과 집단 이기주의로 공익과 대결하는 것이 바로 한국의 현주소 아니던가?


여기에 더해 금융시장의 부도덕이 국가를 파국으로 몬 대표적인 나라, 아이슬란드의 상징적인 일례는 일명 자해(自害)상품이라 불리는 신용부도스와프(CDS), 즉 금융시장 살상무기로 자기 목을 따버린 집단적인 자기 파괴의 교훈을 보여준다. 빌려온 대외자금으로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고, 그래서 경쟁적으로 가격은 급등한다. 그러나 정작 실수요도 없이 자기들끼리 만들어 낸 거품에 흥청대다가 하루  아침에 휴지가 되고 폐허가 되어 그 손실과 빚더미에 스스로 몰락하는 자가당착, 바로 ‘부메랑’에 제대로 얻어맞은 것이다. 이러한 도덕성 상실은 한결같이 지배층과 공직자들의 자세와 연결되는데, 특히 그리스나 미국 지방정부의 공무원들이 보여주는 실질임금 및 연금에 대한 집단 이기주의이다.  늘어만 가는 공공부문의 지출에 국민과 주민 스스로가 볼모가 되고, 이는 악질적 부채가 되어 서로를, 사회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저마다 자기 것만을 최대한 많이 챙기려다 공멸하는 사례이다.


대출자와 대출기관을 연결시켜주기 위해 존재하던 금융시스템이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자해상품까지 만들어내며 미래수입까지 끌어다 뻥튀기하는 부도덕성이 마치 기발한 금융기법이나 되는 양 까불대다가 국가와 국민 경제 전체를 말아먹는 것, 게다가 공직사회의 부패가 어울리고, 절제를 상실한 사회전반의 자기중심주의의 이익이추구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이처럼 확인케 된다. 국가부도나 경제시스템 붕괴는 결과적으로 재정적인 것이 본질적 원인이 아니라 사회문화 전반에 퍼진 정신의 몰락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 모든 측면에서 스스로 절제하는 기능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파충류의 뇌처럼 보상경로를 억제하지 못하고 침을 질질 흘려대는 동물적 본능만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본질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내면의 성찰, 인간 정신의 복구는 이제 뒤로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인류의 과제라 할 것이다. 세계금융 및 경제시스템의 문제를 마치 여행 에세이처럼 자연스런 일상의 언어로 풀어낸 이 책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이처럼 분명하다. “변화의 대상은 사람이다!”, “질병은 문화에 있다!” 현재를 충족시키기 위해 미래를, 도덕성을 착취하는 경제는 결국 자기가 던진 부메랑에 맞아 죽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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