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전쟁 - 군사적 폭력의 탈국가화
헤어프리트 뮌클러 지음, 공진성 옮김 / 책세상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세계대전의 종식, 그리고 첨예한 냉전시대가 종말을 고하면서 민주주의의 확산과 아울러 국가 간의 전쟁은 점진적으로 줄어들고 평화의 세상이 오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래 21세기는 지구촌 곳곳이 총성이 울리는 분쟁지역으로 가득하고, 그 전쟁의 양상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잔혹하며 지속적이다. 산업화와 근대화로 불리는 19세기와 20세기에 전개된 영토 국가 간의 대칭적 전쟁은 더 이상 발견하기 힘든 고전적 전쟁의 모습으로 사라지고, 전장의 경계도, 전후방도 없으며 어떤 결전도 없는‘탈 국가적’ 전쟁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국가 간의 전쟁, 즉 선전포고가 있고 제한된 지역에서 군사적 전투를 수행하여 승패를 가려 상대의 정치적 의지를 조속하게 굴복시키고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전쟁과는 달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승자도 패자도 불분명하고,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의 구분도 모호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지구전의 양태를 보이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현대의 전쟁을‘새로운 전쟁’이라고 명명하고, 이 전쟁의 속성 들을 분석, 통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쟁, 낯설어 보이는 전쟁은 사실 인류 전쟁의 역사들을 보면 새로운 것은 아니며, 오히려 2세기 남짓 근대에 인류가 겪었던 국가 간의 표준화된 대칭적 전쟁이 예외적 현상이고 대개는 현재 진행형인 서아시아, 아프리카, 동유럽에서의 낯설어 보이는 전쟁의 모습들이었음을 중세유럽의 30년 전쟁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그 동질성을 규명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오늘날의 민주화되고 영토의 경계가 명료하며 중앙 집중의 통치권이 완벽하게 전 지역에 미치는 그러한 국가의 성립이라는 것은 18세기 이후에나 시작된 것이고, 이전의 시기에는 대개 각 영주나 지방 토호 세력의 상황에 따라 국왕의 그 지배적 권력의 영역이 변동하는 시대였기에 국가 간의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30년’이란 장기간의 표현처럼 당시의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영주와 영주, 국왕과 이웃의 국왕, 교황과 국왕 등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서 확전되고 그리곤 그 복잡한 이해관계로 인해 쉽사리 중단 할 수 없는 전쟁이 되고, 전쟁의 자원 역시 민간으로부터 차출하는 양식이었기에 군인과 민간인의 구분이 무익하다보니 민간인을 전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결국 당대의 전쟁은 특정한 전쟁터에서 전투요원이 맞붙어 싸우는 형태가 아니라 아예 마을과 도시, 노인과 부녀자를 불문하고 초토화시켜버리는 그야말로 잔인한 것이었다.

 

이것이 근대 국가 간의 전쟁 양식으로 이전 된 것은 사거리의 연장, 발사율의 증진, 정확도의 제고와 같은 무기의 발전, 포병이란 존재의 등장과 함께하는 전투 대열의 변화가 병사의 오랜 훈련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전쟁 규모의 대형화로 군비, 전쟁비용의 비약적인 증가를 가져왔음을 들고 있다. 따라서 용병에 의존하던 전쟁은 상비군 조직으로, 세수의 안정적 조달기반의 확립과 같은 현대국가 조직의 성립으로 정착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전쟁 당사국의 대칭성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었으나 전쟁 수행자본의 비대칭성이 심화되는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고전적인 국가 간의 전쟁이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선명한 대결국면에서 더 이상 유용한 방식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음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이의 적절한 사례인데, 이미 두 국가 간의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에서 엄청난 비대칭성을 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규군을 통한 전쟁은 승리 한듯하지만, 전쟁이 종료되었다고 할 수 있지 못하다.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의 구별이 불가능한 양상으로 전통적인 적의 표시가 없으며, 게릴라전, 테러의 형태로 끊임없이 전장의 특정함 없이 저항이 지속된다. 이는 공격군의 피로를 급격하게 상승시키며, 장기화됨에 따라 막대한 인명 및 물자의 손실과 군비의 증가를 초래한다. 결국 약자가 채택하는 비대칭성에 의거한 전쟁 수행방식으로 인해 전쟁의 목적인 적의 정치적 의지를 자신의 의지에 복속시키는데 요구되는 비용이 이익을 초과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국 군사의 희생이 국민들의 정신적 지지를 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비대칭 전략에 의한 전쟁은 대부분의 분쟁 지역에서 발견 할 수 있는 형태이다. 아마 이 비대칭 전략의 성공적 모델이 된 것은 1993년 10월 3일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악질적인 군벌 ‘무하마드 파라 아이디드’의 체포에 미국이 실패한 사건인 모양이다. 미군 18명이 살해당하고 80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더구나 미군의 시체를 토막 내고 훼손하여 길거리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CNN에 보도됨으로써 미군은 즉시 철수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으니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 저개발국의 군벌들, 전쟁 사업자들, 테러 조직들이 미국을 상대하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이를 숙지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을 게다.

 

이것은 열등한 군사력과 저비용으로 거대한 상대를 무너뜨리는 효과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분쟁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양상은 바로 이 저비용의 전쟁이 가능하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전쟁 비용이 너무 저렴해져서 누구든지 전쟁의 주체가 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이나 보스니아에서 벌어지고 있거나 있었던 전쟁,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속적인 내전들은 이러한 양상을 잘 설명하게 해준다. 이제 용병회사, 지역 군벌, 파르티잔, 테러 조직망, 유사 국가행위자, 사적 행위자, 누구든지 의지만 있으면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전쟁 이익과 권력까지 획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전쟁 재정의 조달 방식까지 변해서 난민촌에 주어지는 국제 원조자금과 물자는 이들의 병참(보급)기지이자 예비군 부대의 역할로 포함되어 있으며, 민간의 물자를 착취하고 이용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저비용 전쟁 모델은 돈과 권력을 노리는 무수한 군벌들을 만들어 내고, 이들로 인해 국가 조직망 및 경제는 완전히 붕괴된다. 자유경제 체제는 약탈적 전쟁 경제체제로 바뀌며, 사회 안전망이 해체된 곳에서 소년들과 청년들은 생존수단을 위해 이들 군벌이나 전쟁사업자의 휘하로 들어가고 지급받은 AK소총(경량무기)은 생존 수단화되며 남성의 권위와 자존감을 획득하게 해준다. 언론에 자주 소개되는 소년병들의 잔혹성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 의해 조성되고 강화된다. 특히 이들의 전쟁 수행 방식은 소위 초토화 방식으로 점령한 지역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인데, 여기에 더욱 주목할 것은 부녀자에 대한 강간 등 성 폭력을 들 수 있다. 일종의 유전적 말살, 정신적, 도덕적 규범의 파괴를 통해 한 사회내의 내적 결합을 완전히 해체시키는 것이다. 성의 강력한 전쟁 무기화라 할 수 있다. 즉 저비용 전략에 부합하며, 점령지에서 적을 완전히 몰아내는 목적 달성에 완벽하게 기여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국가로서의 무늬를 띄고는 있지만 대다수의 아프리카지역은 이러한 국가붕괴전쟁의 지속으로 국가적 체계의 구성에 실패 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비용이 들지 않는 전쟁, 높은 수익과, 권력까지 향유 할 수 있는 수단이므로 수많은 군벌들과 전쟁사업자들로 내전은 항구화 된다. 이는 사회구조를 완전히 파괴하여 국가 존립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전쟁 당사자들, - 지역 군벌, 테러 조직망, 전쟁 사업자, 민간 군사회사 등 - 평화가 중요치 않은 이익집단들은 종족적, 종교적 대결을 마치 갈등의 원인이라 치장하지만 단지 자신들의 개인적 권력추구, 탐욕과 부패의 치장 이상이 아님을 발견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이처럼 새로운 전쟁은 일과 폭력을 사용하는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범죄와 암시장은 동맹관계가 되며, 교환과 폭력사용이 하나로 결합하는 그림자 경제로 인해 더욱 견고해진다.

 

비대칭성에 의한 전쟁 전략이 더욱 효과적인 수단이 되게 한 것으로 현대 방송 미디어를 빼 놓을 수 없다. 높은 미디어 밀도, 개방적 미디어 접근성과 결합하여 테러가 자립하고, 적은 비용과 무력으로 최대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 점이다. 대표적 사례가 9.11 테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협상도 없고 어떤 텍스트화 된 메시지도 없다. 그저 강력한 이미지, 무한 공포를 야기하고 대상이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상대를 모르니 타협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항구적 위협에 대한 상존만이 부각된다. 폭력의 이미지와 모호함이 결합하여 위협과 공포를 생산하고 이는 더없는 전쟁 도구가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전쟁’의 대표적 속성인‘비대칭성’을 중심으로 이 책이 이와 같이 들려주는 더 잔혹하고 끔찍하며 훨씬 오래 지속되어 사회와 국가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키는 오늘의 전쟁 양상 탐사는 이미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지구촌 그 어느 지역보다 군사력이 집중되어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로 인해 다량의 참조점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새로운 전쟁이 과거나 후진적 전쟁 양상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 전쟁 양식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전쟁을 하게 되면 맞이하게 될 바로 그 전쟁의 무참한 모습을 짐작케 한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에서 언급된 민주주의가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얘기나 ,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경쟁할 다른 수단(경제적, 정치적)을 갖지 못한 측에서는 전쟁에 의존 할 수밖에 없다는 한반도에 대한 진단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자못 지대하다.

북한은 물론이고 인접국인 중국 역시 일당 독재의 비민주화된 전체주의 국가이다. 이들은 군비 증강과 과시에 호전적인 지구에서 몇 안 되는 국가들이다. 더구나 21세기 분쟁지역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개입 능력을 가진 강대국의 수가 매우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엄청난 군사비용으로 인해 정치적, 경제적 계산이 명령하지 않으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전쟁의 민영화가 가속화되는 새로운 전쟁의 시대에서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의 기대는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쟁의 속성과 군사개입 전략의 세계적 변화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전쟁 전술에 대해 깊숙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군사적으로는 비대칭 전략에 입각한 전술부대의 육성, 역으로 비대칭성 공격에 대한 방어 전술전략을, 정치경제적 측면에서는 북한의 경제력 제고와 인권을 비롯한 민주주의의 전파를 위한 다각적인 지원과 모색을 통해 그들이 전쟁이 아닌 다른 경쟁수단을 선택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할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경제적 계산이 항시 균형을 유지 할 수 있도록 편협하지 않은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오늘의 세계를‘전쟁’이란 언어를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국제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를 이해하고, 우리의 현실을 조명 할 수 있는 유익한 기회가 되게 해준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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