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렌 키에르케고르’의『이것이냐 저것이냐』中 「유혹자의 일기」을 읽고...


이 작품은‘키에르케고르’의 처녀작인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수록된 자전적 소설이다. 아니 문학과 미학의 경계를 오가는‘소설철학’이라 해야 할까?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후일 발표된 『불안의 개념』에서 언급되던 아담의 원죄 이전의 그 불안에 대한 정의가 되살아나는데, 이미 젊은 철학가의 마음에 심미안과 윤리적 양심, 종교적 교의 사이에서 처절한 갈등이 있었음을 발견하는 것은 일종의 경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골격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의 현실의 삶 속에서 유일한 연인이었던‘레기네 올센’을 모델로 하여 순진무구한, 말 그대로 이성과 연애, 세상에 대한 어떤 인식을 가지지 않은 여인(작중 이름;코델리아)이 이것들을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적 위치로 올려놓아 삶의 역사를 비로소 시작하게 하는 유혹의 기술과정이다. 따라서 세상과 단절한 듯 살아가는 한 소녀를 탐미적으로 바라보며 그녀가‘여성’으로서의 선택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치밀한 작업의 이야기만으로 이미 소설적 흥미를 달성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게만 읽어서는 작품의 본질을 거의 이해 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불안’에 대한 개념의 사전적 이해가 요구되는데, 그것은‘원죄’, 인류 최초의 죄의식의 주입에 대한 고찰로 이어진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저지른 죄가 바로 원죄이다. 그런데 원죄라면 그 이전에는 죄가 없었다는 얘기이고 당연히 아담은 존재하지 않았던 죄에 대해 알지 못한다. 즉 선악의 구별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얘기이다. 어떤 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계시를 듣게 된다. 순진무구한, 그야말로 무지(無知)의 아담은 행위의 이행에 따른 막연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바로 불안을 낳는 것은 무(無), 순진무구, 알지 못함으로 인해 출현하는 것이란 말이 된다. 그리고 주어진 행위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선택하는 것, 다시 말해 가능성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이 오직 나의 자유의지에 주어졌을 때 그 알지 못하는 저 쪽의 무엇에 대한 감정이 불안인 것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이해만을 가지고 읽더라도 이 작품의 의미는 자못 심오하게 다가온다. ‘유혹자’의 일기와 편지에 기록된 내용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된‘불안’으로 이끄는 작업인가를 발견하게 된다. 달콤한 불안, 정체모를 불안, 소심한 불안...

이 불안의 심리 끝에 결정케 되는, 그러나 완전히 자기 주체적인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하게 되는 선택의 결과는 이른바‘죄성(죄의 성질)’의 비로소의 입장이다. 이것은 케에르케고르의 주장에 의하면 욕망을 일깨우고 성의 분별을 가져오며, 죽음을 알게 한다. 무에서 가능성에 대한 인지(認知), 그리고 불안, 혼돈 뒤에 욕망과 성과 죽음이란 죄성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혹자의 일기는 무지의 소녀, 중성적(中性的)이기조차 한 여인, 코델리아가 완전히 자유로움의 경지에 놓일 수 있도록, 자신의 결정이 오직 자신의 의사에 기초해서 이루어졌다는 상황에 도달하게 하는 작업계획서라 할 수 있다. 코델리아의 환심을 사기위해 애를 태우는 친구‘에드바르’와, 그녀의 고모를 대화상대자로 활용하여 무심한 듯 상대의 관심을 서서히 자극하는 전술을 벌이는데, 짐짓 “나의 높은 긍지, 나의 고집, 나의 냉담한 비웃음, 나의 비꼬인 냉소, 이것들이 그녀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다.”는 것은 하나의 일례가 될 것이다.


즉, 유혹이란 어떤 부담이 가해지지 않으면서 완전히 자유의지로 매혹되는 것, 자유 속에만 사랑이 있고, 자유 속에만 즐거움과 영혼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위치로 교묘하게 다가가게 하는 수법이다. 그래서 결정적 일격을 가하기 위한 체계적인 유혹의 절차를 이행한다. 이 작업 공정의 탐미적 의지에서 우리는 감정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겪게 된다. 아마 그것은 불안의 당혹이며, 두려움이자 어떤 떨림 같은 것일 것이다. 여기서 미학의 세계, 우리들을 달짝지근한 미열의 환영에 황홀하게 하는 그런 시간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처녀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것을 창조하는 것은 이미 하나의 예술적 재능이며, 창조적으로 처녀의 마음에서 빠져나오는 것 또한 고도의 기술이다.”라고 유혹자가 쓴 것처럼 한 탐미가의 사랑의 본질과 요체에 대한 해부라 할 수 있다. 코델리아가 여성으로서 자신을 이해하고 유혹자의 여자가 되는 순간 유혹자는 그녀를 떼어버리는 작업에 돌입한다. 이 역시 고도의 기교를 통해서.

이것으로 이 유혹자의 일기는 그 자체로 탐미적인 것이 된다. 바로 미학의 교본이 되는 것이다. 돈 후안(Don Juan)이 아가씨들을 유혹하고 차버리지만 그는 아가씨들을 차 버리는 것을 즐긴 것이 아니라 유혹하는 것 자체를 즐겼다는 변론에서 거듭 확인된다. 유혹자는 이처럼 인생을 향락하는 것으로서의 미적 생활의 실천을 보여준다. 흥미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둔해지려는 감각 및 감정과 의지를 자극해서 따분함과 권태로움을 밀어내는 작업, 인생을 시처럼 살아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인생이 코델리아로 분(扮)한 현실의 레기네 올센과의 관계를 보면 유혹자의 실천처럼 미학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1년 남짓의 약혼 생활 중 돌연 파혼을 선언한 것 까지는 젊은 키에르케고르로서는 더없이 시적인 삶의 실체화였겠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을 잊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에게 무한한 고뇌와 고난의 원인이 되었고, 화해와 자신의 진실을 알리려는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나, 그녀와의 연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많은 작품들과 자신의 저작 전체를 그녀에게 유산으로 바친 것에서 미적 삶과 윤리적 삶의 번민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발견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삶의 즐거움, 욕망의 추구인가, 아니면 윤리적 겸허와 신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에 대한 답변인 그의 저서 『반복』과 저것에 대한 답변서인 『두려움과 떨림』으로 독서의 행보가 계속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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