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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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빈번히 주절거리곤 한다. ‘자기만은 저 높은 고지에 올라 권력과 부(富)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자기 욕망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좇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아마 이것이 중산계층을 지배하는 정신일 것이다. 그리고 키냐르가 지적했듯이 이 정신을 구성하는 쾌활하고 한심한 덕목들의 본질 - ‘돈, 기업, 이윤, 풍요, 건강, 승리, 생산력, 성공...’이라는 숭배신조 - 에 내재된 무한경쟁의 순환하는 욕망, 이미지라는 환상과 마비의 모욕에 붙들린 도취된 소비의 세계가 타자와 감동의 기억을 사라지게 하고 있음을.

 

작가, 아니 작중인물‘케이(한국명 한경희)’는 이러한 욕망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에 도취되어 있는 여대생이다. 그녀가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세계, 안주하고 있던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세계의 외곽을 깨는 것, 인식의 무능력 지대를 횡단하며 비로소 닫힌 세계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개안(開眼)을 갖게 되는 일련의 역사가 이 작품의 줄거리라 해도 크게 빗나간 이해는 아닐 것이다.

 

어학연수를 위한 뉴욕에서의 짧은 유학생활, 부유한 백인 여자친구 써머를 통한 화려한 소비와 물질, 사교의 세계는 케이의 욕망을, 쾌락을 자극하고 고양(高揚)시킨다. 귀국 후에도 뉴욕의 세련된 감각의 세계는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서울의 누추(陋醜)와 비교되고, 만나는 사람들조차 그녀의 감각적 이상의 잣대에 턱없이 미흡하다. 그리곤 뉴욕에서 출생했다는 유한계급의‘재현’이란 남자에 매혹된다. 그녀의 허영을 충족시키는, 같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지녔으리라는 공감의 신념에 의해서.

 

그러나 그녀는 불안하다. 도시의 현란함, 다종다양의 특성이 들끓는 세계, 자신의 경제적 지위와 정신적 지위의 간극, 불투명한 가능성의 세계는 무한한 선택의 세계를 위장한 차별화된 세계, 구분된 세계임을 어렴풋이 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자각은 스스로 정신을 다듬는 고독의 시간을 통한 깨달음이 아니라 외부, 타인의 체험의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그래서 진정한 각성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이러한 미국명 케이가 한국명 한경희로 불리는 것은 그녀가 숨기고 싶어 했던 가난한 시절이었던 초등학교 동창생 지원과 우연한 마주침에서 비롯되는데, 수족관의 물속을 평온히 유영하는 중산층의 백수인 연인 재현과의 이별과 공장 노동자로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지원과의 시작은 차원으로서의 인식의 전환적 상징이라 할 것이다.

 

그녀는 지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번도 자신의 것을 가져보거나 계급적 욕망에 시달린 적 없는 하층민의 체념과 피해의 트라우마를. 그래서 젊은 청춘 연인이 그저 쾌락을 함께하며, 넘쳐나는 세상의 욕망에 휩싸이는 것과 주류적 질서와의 상관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 또한 몰락의, 경제적 고통의 시간을 경험했다는 인식에서 자신과 다른 세계로서의 지원의 삶을 보지 못한다. 잔업수당이 곧 삶의 형편을 결정하는 세계에 속한 지원에게 삼청동, 홍대, 압구정의 카페, 록밴드의 공연과 영화 관람은 이질적인 문화의 세계이고, 불편함과 불안감을, 괴리와 열등감을 심화시킬 뿐이다. 경희는 그에게 감당할 수 있는 세계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 재현과 그의 친구였던 록밴드의 공연을 위해 내려갔다 경유한 생맥주집 주인의 언어에서 얻어진다.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인 경희와 야생의 바다에 있는 지원의 그 다른 세계의 비유할 수 없는 차별화된 삶의 공간을. 수족관에서 느끼는 물결의 흔들림이 바다의 물결과 같은 것일 수 없듯이 중산층이라는 경계 내에서의 삶에 있는 자가 한시도 생존의 치열함을 벗어날 수 없는 자의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이것은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한 복판에서 발생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검은 회색연기에 휩싸인 압도적인 재난의 풍경에도 무심한 한 때를 보내는 젊은이들의 대조적인 장면의 사진으로 확장되고 본질에 접근한다.

 

사진 속의 젊은이들이 특별히 냉소적이거나, 퇴폐적이고,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인생의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인간의 무심함, 삶의 본질적인 끔찍함의 형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바로 사진 속의 젊은이들이 우리의 초상이라는 것을. 이것을 지각한 정신은 수족관을 나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야생의 대양을 향해 용기있는 자세로.

 

여기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장이 떠오른다. 그가 지향한 문장의 목적은 다르지만 “사람이 앉지 못하도록 비탈공간을 만들고, 가시밭 공간을 조성하며, 순찰 경비원을 세워 접근을 방어하기 위해 공간을 분리하는”, 즉 이질적인 집단에 대한 공포를 회피하려는 주류의 탐욕적 인식의 세계, 오늘 우리들의 무감각하고 무심한 세계에 대한 진술을. 그리고 “지금의 세상이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지옥인가”하고 묻는 그 처연한 물음의 진의를. 이것은 케이 아니, 경희가 자신이 사는 세계가 천국인가, 지옥인가를 자문하는 것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안전망을 상실한 개인으로 야기되는 불안과 안전위협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한 분리의 형상이 공존하는 이곳.

 

그래서 제목인 ‘천국에서’는 지금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기를 바라는 불가능에 대한 패러독스일 것이다. 결국 작가는 주인공 경희(케이)를 통해서 지옥 아닌 길을 찾기위해 분투, 수족관을 열어젖히고 강으로 대양으로 헤엄쳐 나아가는 희망의 빛을 비추지만 그 가능성의 미래는 왠지 묵시록(默示錄)적이기만 하다. 이기심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환상을 언제나 저버릴 수 있을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사회철학자 이진경이 말했듯이 “지배적인 척도에 반하여 척도적인 것과 대결하며 새로운 것을 창안”하려는 시도가 천국을 향한 더 현실적인 모색이 아닐까?

 

김사과의 발표된 지금까지의 소설들 - 단편집『02 영이』나, 장편『테러의 시』,『풀이 눕는다』 - 과는 서사의 감성 저변을 이루던 증오와 분노가 넘실대고, 핏물이 배어나올 정도의 냉소적 통렬함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꿈과 환상으로 지탱되는 이 도시, 서울의 세계, 매순간 타인들에게 증명되고 갱신되기 위해 사는 삶, 단지 살기위해서 사는 삶에 초점 잃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 초라함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정말 함께하는 것이 싫은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겠다는 혐오의 치열함을, 또한 진짜 인간이 된다는 게 뭔지 알지 못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도시. 값싼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휴머니스트가 된 듯 위선과 가식, 가면에 도취된 인간들을 묘사했던『테러의 시』속 사유가 도도히 연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가치판단적 주장과 같은 서술의 개입이 허구적 즐거움을 부분적으로 손상시킨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음을 숨길 수 없지만, 인간과 인간 사회의 기본적 딜레마에 대한 심원한 그녀의 탐색은 언제나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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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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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인간의 소망, 억제되었던 삶의 궁극적 욕망의 세계, 키냐르 식 시간인 ‘옛날’, 그리고 ‘최초의 왕국’이라는 순수의 세계에 대한 애절한 희구에 다시금 공감하는 시간이 된다. 이 옛날이 삶의 열정과 회한, 본질과 허영, 기만의 세계와 갈등하며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운명을 완성하는 세계로 이끈다.

파리 교외, 나룻배가 외로이 떠있고,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비에브로 강변, 소박한 자연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당대 최고의 비올라(다 감바) 연주자인 ‘생트 콜롱브’의 죽은 아내를 향한 비장한 선율이 흐른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지우지 못하는 남자와 두 딸의 비올라 삼중주는 영주들, 음악가들에게 깊은 영감과 감동을 안기고,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을 받는다.

 

명성은 국왕의 부름을 부르지만 남자는 영광을 쫓는 이들이 비난하는 오만한 고뇌의 세계를 결코 떠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얼굴을 파묻고, “아주 오래전 머물렀던, 어두컴컴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가질 수 있는 비에브로 강이 있기에. 이것은 어머니의 뱃속, 태아로서의 평온, 아득함의 기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사랑과 보살핌이 충만한 원초의 세계이자,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죽음의 세계이다. 또한 그의 음악은 바로 이 흐릿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염원이자 억제된 금기가 해제된 순수한 욕망의 실현이다. 음악과 삶의 궁극이 맞닿아 있는 세계, 그의 음악은 곧 『떠도는 그림자들』에서 말하는‘옛날의 냄새’에 가 닿는다.

 

소설은 음악, 예술의 지향에 훼방을 놓으려는 듯, 음악은 하지만(play) 음악가는 될 수 없는 청년“마랭 마레”를 등장 시킨다. 진정한 음악은 기교와 광대놀음이 아님을 바람, 눈, 오열의 소리를 통해 말하지만 “우리 정신은 휴식을 모르오, 삶은 맹렬할수록, 굶주릴수록 아름답소.”와 같은 주장을 지닌 이에게는 명예와 영광, 재화와 위세가 더욱 중요한 덕목이니 공허한 울림일 밖에 없다. 더구나 청년 마랭 마레는 스승 생트 콜롱브의 장녀인‘마들렌’과 정념을 불사르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여동생‘투아네트’의 탐스런 육체를 소유하게 되자 마들렌을 저버리고, 그녀로부터 내밀하게 익힌 스승의 연주기법을 가지고 궁정 수석 연주자가 된다. 아마 음악은 과연 무엇인가? 음악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와 같은 물음일 것이다. 아니 삶을 사는 우리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답변은 생트 콜롱브가 죽은 아내의 환영을 만나 연주를 들려주고, 와인을 대접하는 장면, 그 자체일 것이다. 생과 사의 만남, 시간성이 없는 원초의 세계로의 편입일 것이다. 이것은 스승의 연주를 듣기위해 오두막에 숨어들었다가 인기척에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에 담겨있기도 하다. 밖에 누구냐고 묻는 스승의 물음에 “궁을 도망쳐 음악을 찾는 이”라는 답변과, 다시금 “음악에서 회한과 눈물”을 찾는다는 제자의 답이다. 그리곤 마침내 음악은 신(神)을 위한 것도, 귀도, 황금도, 침묵도, 사랑도, 단념도,...아니며,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라는 ‘최초의 왕국’이라는 무의식의 기원을 발설함으로써 시초의 본질에 이른다.

 

“선생님, 마지막 수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첫 수업을 해도 되겠소?”

 

세상의 이치(理致)란 낮과 밤,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사랑과 증오....처럼 대립적인 것 같지만 그것은 이면이자, 동일 한 것의 다른 언어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래서 키냐르의 인물들은 원초의 세계, 혹은 ‘옛날’로 회귀한다. 무(無), 없음의 세계로. 그것이 시작이었고, 끝이 아닌가.

 

이런 키냐르의 언어를 보고 ‘퇴행적’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옛날, 흐릿한 기억의 시간으로 퇴행하는 것이라고. 심한 오독이고 존재의 몰이해라 할 것이다. 삶의 궁극적 욕망은 프로이트의 확신처럼 유아기의 억눌린 기억의 실현이라는 점에 있으며, 이것은 퇴행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정신 조건이다. 억제된, 금기시된 욕망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 그것은 곧 가공되고 조작된 세계가 아니라 순수의 세계를 되찾는 것이다. 더구나 키냐르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작위적 개념이 아니기에 더더욱 과거로 가는 역행이 아니다.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있던 옛날의 은폐된 기억의 세계로. 그곳에 무슨 언어가 있으며, 불행이 있고, 모욕이 있겠는가. 기만과 위선, 허영이 무용한 곳, “욕망과 추억을 참을 수 없어 이따금 바지를 아래로 내리”는 생트 콜롱브의 와인이 놓여있는 그 오두막의 세계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목 놓아 부를 수 있는 세계로. 시인 로르카의 ‘머리를 더듬는 손’처럼 죽은 아내의 시선에 놓여있는 생트 콜롱브의 늙은 손이 켜는 비올라의 선율이 하염없이 가든한 눈물을 흐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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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죽기로 결심하다 - 어느 날 문득 삶이 막막해진 남자들을 위한 심리 치유서
콘스탄체 뢰플러 외 지음, 유영미 옮김 / 시공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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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우울증, 왠지 조화로운 단어의 결합 같지가 않다. 이 낯선 느낌은? 남자가 자기감정에 연약하게 휘둘려서야 되겠느냐는 얼토당토않은 남성성이라는 덧에 씌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은 줄곧 여성의 전유물로만 인식되어 남성의 우울증에 대한 이해는 그야말로 취약한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자의 4분의 3이 남성이고, 그 최대의 직접 원인이 우울증이고보면 뭔가 잘못된 사회, 문화, 의료적 인식이 사실을 방해하고 있다는 암시를 받게 된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이러한 현실의 오해로 인해 무시되거나 무관심의 영역이 되어버린 ‘남성 우울증’의 심각성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개별 인간(남성)을 위한 질병으로서의 예방과 치유책이기도 하지만 사회문화적 반영으로서의 병리적 결과에 대한 환기이기도 하다는 의미에서 단순한 심리치유의 범주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남성은 여성과 달리 자신의 감정을 터놓고 이야기하는데 미숙하며, ‘남성성’이라는 과묵함과 책임감과 같은 독특한 환경에 지배되어 왔다. 따라서 남성 자신의 정신적, 감정적 취약성을 호소한다는 것은 남성의 사회적 역할을 의심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더구나 이들이 외적으로 노출되어있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불이익에 대한 압박은 남성이 우울증을 인정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개별적 인식에 더해 극한의 경쟁을 비롯한 성역할의 붕괴 등, 직업적 스트레스와 경제적 부담의 가중, 가족 갈등의 점증(漸增)은 우울증 유발사회라 할 만큼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처럼 여성 우울증과는 달리 잘 드러나지도 않고, 당사자가 인정하려 들지도 않는 질병이기에 그 존재는 더욱 고독하고 위험하며 극단적인 상황을 겪게 된다.

 

OECD회원국 자살률 1위를 놓치지 않는 한국사회를 생각할 때, 특히 여성의 3배를 넘는 남성 자살자를 볼 때, 가부장적 남성성에 대한 오랜 문화적 압박으로 노출되지 않았던 남성 우울증에 대해 의학, 심리학 분야는 물론 관계당국과 사회적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하에서 남성 우울증이 외면당했으며 인정조차 받기 어려운 질병이었음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책은 독일 분데스리가의 명문 축구팀 유명선수의 자살이 오랜 우울증이었다는 보고로 시작된다. “마음은 공허하고, 냉랭했지만 들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은 죽음으로 도피한 우울증의 전형적 사례이다. 남성의 우울증은 본인 자신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주변의 시선 또한 남성은 스스로 털고 일어나야 한다는 확고한 인식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남성의 우울증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해되고, 설혹 그 존재의 인식에도 이렇다 할 심화된 연구조차 미흡한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1. 남성 우울증 유발 요인들

 

무엇보다 직업적 문제, 즉 직업 안정성의 부족, 열악한 임금, 삶의 핵심적 영역에서의 통제권 상실이 제 1요인이며, 여기에 인간관계의 해체가 더해지면 거의 결정적으로 피할 수 없는 질병으로 남성의 내면에 깊게 자리한다. 그런데 이같은 상황이 요즈음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20~30년간 가족 부양의 책임자로 에너지를 쏟다가 어느 날 실직하여 무력감에 시달릴 때, 여자(아내)들은 그런 남자에게 등을 돌린다. 경제력을 상실(失職)한 남자는 더 이상 여성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직업과 인간관계가 동시에 파괴되는 것이다. 남성의 삶을 지탱하던 요소가 이렇게 동시에 사라지는 현상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죽기로 결심한 남성이 증가하는 것은 자명해 보이기만 한다.

 

실직은 남성성의 전형을 파괴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지난 세월 많은 에너지를 들였던 가치가 급작스럽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는 자괴감, 공허감을 낳는다. 또한 스마트폰과 같은 변화된 디지털 환경은 언제 어디서나 연락이 닿는 인간이기를 요구하는 노동환경으로 인해 끊임없는 긴장과 스트레스로 정신을 압박한다. 뿐만 아니라 남성의 산후우울증은 여성의 산후우울증에 버금가는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가져오며, 제2의 사춘기로 치부되고 마는 40~50대의 남성들이 겪고 있는 ‘미들 라이프 크라이시스(Middle Life Crisis : 중년의 위기)’는 삶의 역사에 대한 혼란으로 현실감을 박탈하고 관계 맺기를 저어케 한다.

 

결국 삶의 무의미와 무기력이 내습한 정신은 삶의 단절을 재촉한다. 남성의 우울증은 바로 남성성이라는 속성으로 인해 공허와 좌절의 분노로 인한 폭력을 자신에게 돌리는 자살로 직결되곤 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가족을 붕괴시키고, 사회적 손실을 야기한다. 그만큼 남성의 우울증은 사회적 인식과 현상의 직접적 반영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무관심은 실로 당혹스러움이라고 까지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2. 남성 우울증의 인식

 

남성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힘들다. 이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통적인 남성적 역할상을 깊이 내면화한 사람일수록 우울증의 깊이는 더 혹독하게 심화된다.

한편 오늘날과 같은 성과지상주의 사회에서는 우울증이라는 질병적인 취약함의 드러냄은 곧 실패자이고 루저(looser)라는 낙인을 찍어버린다. 그래서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 : 탈진 증후군)과 같은 품위있는 심리학 언어로 조탁되고, 최상으로 활동적이었다는 이미지를 덧씌워 마치 우울증과는 무관한 일종의 열정적 직업인으로서 일시적으로 겪는 후유증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번아웃증후군은 이제 우울증의 한 유형으로 인정되고 있다. 남성 우울증은 이만큼 좀체 인정되지 않거나 은폐되고 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정상적 기분저하와 우울증의 모호한 경계로 인해 남성의 우울증은 쉽게 숨겨지고 잠복한다.

 

2020년이 되면 우울장해는 조기사망과 질병 1호가 될 것이라 예측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향해 치닫는 노동세계는 인간적 유대와 결속을 급속하게 파괴하고, 현실과 환상을 흐릿하게 하며, 만성적 불안과 무기력을 확산시키고 있다. 직업 환경을 비롯한 사회문화적 현실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남성성의 부담이 여전히 부여된 상태에서 남성의 우울증은 당사자 1인의 인식과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이의 치료와 대책은 공동체 모두의 중대한 인식이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우울증의 치료와 대책

 

많은 남성들이 운동에 열중한다.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운동은 적절한 천연 치료제로 권장된다. 그러나 오히려 해가되는 운동이 있다. 외적 이미지, 즉 물신적 광기로 인해 전(全)미디어 매체가 남성의 조각처럼 단련된 몸을 드러내고, 저열한 여성 연예인 따위들은 광적인 환성을 내지른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몸만들기에 열중인 남성이 증가하고 있다. 사실 자신의 외부, 외적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어떠한 관계성도 배제된 채 자기 혼자만 하고, 과시를 통한 자신감 회복이라는 명분이 이를 부추긴다. 이것은 내가 내 자신의 주인이라는 환상만 강화할 뿐 현대사회의 병리적 현상으로서의 우울증의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정신과전문의의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울증은 관계성 회복에 중심이 있다. 외부에 열려야 하는 것이다. 가족들과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열린 질문을 하며, 서로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믿음을 공유해야 한다. 남성이 깜깜한 거실에 홀로 앉아 있다면 인정하건 아니건 그는 우울증 환자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종종 대화에서 자살의지가 피력된다면 그것은 도와달라는 외침이다. 주변이 시들해지고 완고함과 냉정함이 심성을 지배하고 있다면, 심장 조임 증세나 복부 불편감이 있다면, 식욕과 성욕이 흐릿해지면, 우울증의 신호일 수 있다.

 

항우울제, 운동 등 의료적 행동적 처방과 대책이 그 원인과 대응하여 소개되고, 우울증의 신경의학적 현상들까지 더해져 이를 이해하고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기위한 노력들이 촘촘히 적시되고 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삶의 무의미를 외치고 있다면, 내면의 음성을 가만히 들어보자. 홀로 고독하게 세상과 안간힘을 써대며 분투하는 이 땅의 남성들이여, 남성성이라는 굴레를 훌훌 벗어던지고 우울증을 넘어서자, 우울증은 치매와도 닮았고, 탈진 증후군이기도 하며, 정상적인 기분저하와도 구별이 안 된다. 삶의 의미로 가득한 세계임을 되찾기 위해.

책은 친절하게 남성들의 우울증을 자가 체크할 수 있는 간이 진단표를 제시하여주고 있다. 건강한 삶을 위해 이제 자각하여야 할 만큼 위험이 증대되어 있음이다. 얘기되지 않는 남성우울증에 대한 관심이자 처방전이기도 한 이 책은 실의와 좌절, 의기소침과 허무, 그리고 무기력으로부터 현실을 눈뜨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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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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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허구, 소설 속 인물들이 구상하는 연작소설의 결과물이 바로 독자가 읽는 소설이라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 영원히 반복될 밖에 없는 인간의 생래적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일까? 소설은 이것을 사랑과 섹스, 그리고 살인이라는 압축적 언어로 반영하고 있다.

 

문득 이 언어들은 하나의 의미의 다른 표현, 사랑과 섹스를 하나로의 결합이라는 본래로의 귀환에 대한 아득한 희구이며, 내재된 그 폭력성은 죽음, 곧 살인의 시원적 경계를 오간다고 했던 ‘조르주 바타이유’의 문장을 떠 올리게 한다. 결국 원천, 원초지대로 회귀하려는 본성의 다른 가치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에서 사랑과 섹스를 그리는 작가 윤도하와 사람을 수없이 죽이는 작가 서영재가 함께 연작을 쓰기로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글이 “서로 밀고 들어가” 한편의 작품으로 승화되는 것과 같다.

 

한편의 작품이 되기 위해 서로 밀고 들어간다는 이 관능적이고 폭력적인 문장처럼, 어떤 결합 또는 합일은 사랑과 폭력성을 전제로 한다. 소설의 제목인 『너를 봤다』는 것은 내 시선에 너를 가두었다는 의미이다. 즉 소유에 대한 갈망의 의사일 것이다. 아마 인간사의 모든 것은 이처럼 대상의 소유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대상이 사람자체가 되었든, 명예, 재화, 권력이 되었든 말이다. 차지하면 사랑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분노와 혐오의 대상이 되고 갈등과 고통을 야기한다. 이런 시선에서 보면 소설 속 중견작가인 ‘정수현’이나 역시 유명작가인 그의 아내와의 관계가 영원한 고립, 소멸의 길로 급하게 다가서는 것은 어쩜 불가피한 귀결일 것이다.

 

한편 소설은 또 다른 압축적 언어를 말하고 있는데, 하찮음의 상징이랄 수 있는‘개천’과 처녀성 혹은 성스러움을 의미하는‘수태고지(受胎告知)’이다. 이것은 삶의 출현근거랄 수 있는데, 이 두 언어를 대표하는 수현과 영재의 사랑, 두 사람의 결합에서 상극의 조화로움, 다른 것들의 어울림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의 지향을 본다면 지나친 오독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개천이라는 탁류의 어둠과 천상의 밝고 투명한 빛의 대비는 꾸준히 소설의 극적 요소로 작동한다. 무심함, 혐오, 분노, 수치심, 죄의식의 연원으로서, 존경, 사랑, 헌신으로서.

 

‘내 모든 것을 너에게 줄게, 그리고 나는 네 모든 것을 차지하고 싶다’라는 말처럼, 영재를 향한 수현의 사랑은 완전한 소유, 완벽한 합일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 온전한 하나로의 결합은 필연적으로 폭력과 소멸을 내재한다. 완벽한 사랑의 결합은 그래서 태생적으로 죽음을 전제로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지극히 역설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합, 소유를 거부하여야 한다는 말이 된다. 진정한 사랑은 그래서 비극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술에 만취하여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개천에 밀어 넣었던 어린 날의 기억, 무위도식과 폭력을 그치지 않는 형을 살해한 수현, 그의 사랑은 분열 될 수밖에 없다. 안고 싶은 여자, 그러나 지켜주어야 할 여자. 그런 그를 안기를 거부했던 어느 날 영재에게 무차별하게 폭력을 가하는 수현의 모습은 비극적 종말로 성큼 다가선다.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게 되는 것은 “대책 없이 몸과 마음이 막 달려가는 미친 현상”으로서의 사랑이 있고, 바로 이러한 사랑과 섹스, 폭력과 죽음의 지속적인 교차일 것이다. 끝없이 경계를 오가는, 서로 뒤엉켜 밀고 들어가는 소유와 갈망의 세계를 관음증적으로 지켜 보는것 말이다. 사랑을 품은 연인에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수만 있다면, 살인자로서, 또한 완벽한 결합이라는 종말의 회피를 위해 사랑을 지켜야 한다. “ 그 무서운 눈 속에 나를 걱정하는 눈이 하나 더 있어. 도망가, 도망가, 그러는 것 같더라고.”처럼. 작가가 자신을 죽이고서야 비로소 써낸 ‘사랑’, 뜨겁다. 진하다. 그리고 지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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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과 풍경 펭귄클래식 40
페데리코 가르시아로르카 지음, 엄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오후의 쾌락에 젖은 낭만적 영혼 일기

 

햇빛 내음을 맡아본 적이 있는가? 풍경의 화음과 전원의 향음(香音)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나른하게 기지개켜는 교회의 종탑은? 창고에 둥지를 틀고 있는 메아리는?

달밤에 빠진 시골 마을, 오후의 신비로움이 무지개 밭길로 출렁이는 들판과 밤의 그림자가 나뭇잎 사이로 어슬렁거리는 숲, 그리고 퉁명스런 금속성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비에 젖은 도시와 희미해진 옛 사랑의 그림자를 꿈꾸는 정원의 풍경이 시인의 마음과 눈을 통해 인상적인 모습으로 흐른다.

 

새벽, 달빛, 작열하는 태양, 황금들녘, 그늘진 정원, 안개, 그리고 노을, 풀잎과 정오와 비...당아욱, 도금양 나무, 금작화, 아칸더스 나뭇잎... 이것들을 너그럽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서러운 감정에 눈물이 터져나올지도 모른다.

한순간뿐일 세상의 모든 것, 저 넓은 들판으로 뛰쳐나가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검은 소나무 숲속에서 영원히 잠들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침묵의 음악 속으로.

 

시인 ‘로르카’의 예술적 영혼이 담아낸 이 세상의 풍경을 그의 인상과 함께 그려나가다 보면 풍경의 화음에 세상의 소리가 담겨있고, 들판을 돌아다니던 메아리가 허물어진 길모퉁이와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진 창고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수도원 안에 은밀하게 스며든 달빛이 만들어내는 온갖 기괴한 그림자의 형상과 죽음 이후에 존재할 한없이 평화로운 세계, 뜻밖의 이미지가 마음속에 깊게 내려앉는다.

 

시인이 거니는 그라나다, 알바이신의 마을과 수도원, 금빛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들녘, 폐허가 되어 흐릿해진 옛날의 전설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들의 온갖 향기와 달콤함, 낙조(落潮)의 쾌락에 젖은 낭만에 휩싸이기도 하며, 어둠에 쫓겨 어디론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노을이 되고, 삶의 고통과 슬픔을 아름답게 겪어낼 희미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이렇듯 시인의 인상이 담아낸 풍경에는 어둠의 소리, 알 수 없는 신비롭고 원초적인 힘이 흐른다. 아마 “웅장한 리듬이 노을빛을 휘감으며 풍경에 흐른다”고 말하는 시인의 느낌과 같을 것이다.

 

너무도 평범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들, 그것들에 내재된 쇠락(衰落)과 활기를 읽어내는 시인의 마음은 고요하고 슬픔 가득한가하면 화려하고 관능적이다. 그것은 “찬란히 빛나는 들판속으로 흐르는 고독”이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내 살결을 스치고 지나갈 때의 그 이름모를 관능과 슬픔 같은. 그리고 달콤한 혼란 같은. 풀밭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서글픈 탄식 같은. 삶이란 오후의 쾌락에 젖은 낭만적 영혼이 느끼는 그런 한낱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나이든 수도사가 고개를 숙이고 평안한 모습으로 기도를 드리는 모습에서, 먼 옛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풍경이 땅 속으로 가라앉아 전설이 사라지듯이 그런 침묵일 것이다.

 

“시인은 손을 들어 머리를 더듬어 본다. 그 많던 머리숱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슬픈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있다.”

삶이란 이런 것일 게다. 태양을 그리워하다, 달빛의 흐느낌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싶어하기도 하고, 빗방울의 부드럽고 정겨운 소리에 귀 기울이는가 하면, 화사한 아침을 만끽하고, 열정과 관능의 쾌락에 젖어들다 그렇게 주름진 낯선 얼굴을 발견하는 것, 그것일 것이다. 이제 알지 못하는 영원의 대상에게 조용히 기도할 줄 알게 된다. 어느 오후의 쾌락 같았던 삶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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