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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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허구, 소설 속 인물들이 구상하는 연작소설의 결과물이 바로 독자가 읽는 소설이라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 영원히 반복될 밖에 없는 인간의 생래적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일까? 소설은 이것을 사랑과 섹스, 그리고 살인이라는 압축적 언어로 반영하고 있다.

 

문득 이 언어들은 하나의 의미의 다른 표현, 사랑과 섹스를 하나로의 결합이라는 본래로의 귀환에 대한 아득한 희구이며, 내재된 그 폭력성은 죽음, 곧 살인의 시원적 경계를 오간다고 했던 ‘조르주 바타이유’의 문장을 떠 올리게 한다. 결국 원천, 원초지대로 회귀하려는 본성의 다른 가치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설에서 사랑과 섹스를 그리는 작가 윤도하와 사람을 수없이 죽이는 작가 서영재가 함께 연작을 쓰기로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글이 “서로 밀고 들어가” 한편의 작품으로 승화되는 것과 같다.

 

한편의 작품이 되기 위해 서로 밀고 들어간다는 이 관능적이고 폭력적인 문장처럼, 어떤 결합 또는 합일은 사랑과 폭력성을 전제로 한다. 소설의 제목인 『너를 봤다』는 것은 내 시선에 너를 가두었다는 의미이다. 즉 소유에 대한 갈망의 의사일 것이다. 아마 인간사의 모든 것은 이처럼 대상의 소유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대상이 사람자체가 되었든, 명예, 재화, 권력이 되었든 말이다. 차지하면 사랑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분노와 혐오의 대상이 되고 갈등과 고통을 야기한다. 이런 시선에서 보면 소설 속 중견작가인 ‘정수현’이나 역시 유명작가인 그의 아내와의 관계가 영원한 고립, 소멸의 길로 급하게 다가서는 것은 어쩜 불가피한 귀결일 것이다.

 

한편 소설은 또 다른 압축적 언어를 말하고 있는데, 하찮음의 상징이랄 수 있는‘개천’과 처녀성 혹은 성스러움을 의미하는‘수태고지(受胎告知)’이다. 이것은 삶의 출현근거랄 수 있는데, 이 두 언어를 대표하는 수현과 영재의 사랑, 두 사람의 결합에서 상극의 조화로움, 다른 것들의 어울림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의 지향을 본다면 지나친 오독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개천이라는 탁류의 어둠과 천상의 밝고 투명한 빛의 대비는 꾸준히 소설의 극적 요소로 작동한다. 무심함, 혐오, 분노, 수치심, 죄의식의 연원으로서, 존경, 사랑, 헌신으로서.

 

‘내 모든 것을 너에게 줄게, 그리고 나는 네 모든 것을 차지하고 싶다’라는 말처럼, 영재를 향한 수현의 사랑은 완전한 소유, 완벽한 합일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 온전한 하나로의 결합은 필연적으로 폭력과 소멸을 내재한다. 완벽한 사랑의 결합은 그래서 태생적으로 죽음을 전제로 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지극히 역설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합, 소유를 거부하여야 한다는 말이 된다. 진정한 사랑은 그래서 비극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술에 만취하여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개천에 밀어 넣었던 어린 날의 기억, 무위도식과 폭력을 그치지 않는 형을 살해한 수현, 그의 사랑은 분열 될 수밖에 없다. 안고 싶은 여자, 그러나 지켜주어야 할 여자. 그런 그를 안기를 거부했던 어느 날 영재에게 무차별하게 폭력을 가하는 수현의 모습은 비극적 종말로 성큼 다가선다.

 

이 소설을 재미있게 읽게 되는 것은 “대책 없이 몸과 마음이 막 달려가는 미친 현상”으로서의 사랑이 있고, 바로 이러한 사랑과 섹스, 폭력과 죽음의 지속적인 교차일 것이다. 끝없이 경계를 오가는, 서로 뒤엉켜 밀고 들어가는 소유와 갈망의 세계를 관음증적으로 지켜 보는것 말이다. 사랑을 품은 연인에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수만 있다면, 살인자로서, 또한 완벽한 결합이라는 종말의 회피를 위해 사랑을 지켜야 한다. “ 그 무서운 눈 속에 나를 걱정하는 눈이 하나 더 있어. 도망가, 도망가, 그러는 것 같더라고.”처럼. 작가가 자신을 죽이고서야 비로소 써낸 ‘사랑’, 뜨겁다. 진하다. 그리고 지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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