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과 풍경 펭귄클래식 40
페데리코 가르시아로르카 지음, 엄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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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쾌락에 젖은 낭만적 영혼 일기

 

햇빛 내음을 맡아본 적이 있는가? 풍경의 화음과 전원의 향음(香音)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나른하게 기지개켜는 교회의 종탑은? 창고에 둥지를 틀고 있는 메아리는?

달밤에 빠진 시골 마을, 오후의 신비로움이 무지개 밭길로 출렁이는 들판과 밤의 그림자가 나뭇잎 사이로 어슬렁거리는 숲, 그리고 퉁명스런 금속성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비에 젖은 도시와 희미해진 옛 사랑의 그림자를 꿈꾸는 정원의 풍경이 시인의 마음과 눈을 통해 인상적인 모습으로 흐른다.

 

새벽, 달빛, 작열하는 태양, 황금들녘, 그늘진 정원, 안개, 그리고 노을, 풀잎과 정오와 비...당아욱, 도금양 나무, 금작화, 아칸더스 나뭇잎... 이것들을 너그럽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서러운 감정에 눈물이 터져나올지도 모른다.

한순간뿐일 세상의 모든 것, 저 넓은 들판으로 뛰쳐나가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검은 소나무 숲속에서 영원히 잠들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침묵의 음악 속으로.

 

시인 ‘로르카’의 예술적 영혼이 담아낸 이 세상의 풍경을 그의 인상과 함께 그려나가다 보면 풍경의 화음에 세상의 소리가 담겨있고, 들판을 돌아다니던 메아리가 허물어진 길모퉁이와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진 창고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수도원 안에 은밀하게 스며든 달빛이 만들어내는 온갖 기괴한 그림자의 형상과 죽음 이후에 존재할 한없이 평화로운 세계, 뜻밖의 이미지가 마음속에 깊게 내려앉는다.

 

시인이 거니는 그라나다, 알바이신의 마을과 수도원, 금빛과 초록색이 어우러진 들녘, 폐허가 되어 흐릿해진 옛날의 전설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잎들의 온갖 향기와 달콤함, 낙조(落潮)의 쾌락에 젖은 낭만에 휩싸이기도 하며, 어둠에 쫓겨 어디론가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노을이 되고, 삶의 고통과 슬픔을 아름답게 겪어낼 희미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이렇듯 시인의 인상이 담아낸 풍경에는 어둠의 소리, 알 수 없는 신비롭고 원초적인 힘이 흐른다. 아마 “웅장한 리듬이 노을빛을 휘감으며 풍경에 흐른다”고 말하는 시인의 느낌과 같을 것이다.

 

너무도 평범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들, 그것들에 내재된 쇠락(衰落)과 활기를 읽어내는 시인의 마음은 고요하고 슬픔 가득한가하면 화려하고 관능적이다. 그것은 “찬란히 빛나는 들판속으로 흐르는 고독”이다. 스산한 가을바람이 내 살결을 스치고 지나갈 때의 그 이름모를 관능과 슬픔 같은. 그리고 달콤한 혼란 같은. 풀밭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서글픈 탄식 같은. 삶이란 오후의 쾌락에 젖은 낭만적 영혼이 느끼는 그런 한낱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나이든 수도사가 고개를 숙이고 평안한 모습으로 기도를 드리는 모습에서, 먼 옛날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풍경이 땅 속으로 가라앉아 전설이 사라지듯이 그런 침묵일 것이다.

 

“시인은 손을 들어 머리를 더듬어 본다. 그 많던 머리숱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슬픈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있다.”

삶이란 이런 것일 게다. 태양을 그리워하다, 달빛의 흐느낌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고 싶어하기도 하고, 빗방울의 부드럽고 정겨운 소리에 귀 기울이는가 하면, 화사한 아침을 만끽하고, 열정과 관능의 쾌락에 젖어들다 그렇게 주름진 낯선 얼굴을 발견하는 것, 그것일 것이다. 이제 알지 못하는 영원의 대상에게 조용히 기도할 줄 알게 된다. 어느 오후의 쾌락 같았던 삶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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