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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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빈번히 주절거리곤 한다. ‘자기만은 저 높은 고지에 올라 권력과 부(富)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자기 욕망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좇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아마 이것이 중산계층을 지배하는 정신일 것이다. 그리고 키냐르가 지적했듯이 이 정신을 구성하는 쾌활하고 한심한 덕목들의 본질 - ‘돈, 기업, 이윤, 풍요, 건강, 승리, 생산력, 성공...’이라는 숭배신조 - 에 내재된 무한경쟁의 순환하는 욕망, 이미지라는 환상과 마비의 모욕에 붙들린 도취된 소비의 세계가 타자와 감동의 기억을 사라지게 하고 있음을.

 

작가, 아니 작중인물‘케이(한국명 한경희)’는 이러한 욕망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에 도취되어 있는 여대생이다. 그녀가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세계, 안주하고 있던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세계의 외곽을 깨는 것, 인식의 무능력 지대를 횡단하며 비로소 닫힌 세계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개안(開眼)을 갖게 되는 일련의 역사가 이 작품의 줄거리라 해도 크게 빗나간 이해는 아닐 것이다.

 

어학연수를 위한 뉴욕에서의 짧은 유학생활, 부유한 백인 여자친구 써머를 통한 화려한 소비와 물질, 사교의 세계는 케이의 욕망을, 쾌락을 자극하고 고양(高揚)시킨다. 귀국 후에도 뉴욕의 세련된 감각의 세계는 산만하고 혼란스러운 서울의 누추(陋醜)와 비교되고, 만나는 사람들조차 그녀의 감각적 이상의 잣대에 턱없이 미흡하다. 그리곤 뉴욕에서 출생했다는 유한계급의‘재현’이란 남자에 매혹된다. 그녀의 허영을 충족시키는, 같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지녔으리라는 공감의 신념에 의해서.

 

그러나 그녀는 불안하다. 도시의 현란함, 다종다양의 특성이 들끓는 세계, 자신의 경제적 지위와 정신적 지위의 간극, 불투명한 가능성의 세계는 무한한 선택의 세계를 위장한 차별화된 세계, 구분된 세계임을 어렴풋이 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자각은 스스로 정신을 다듬는 고독의 시간을 통한 깨달음이 아니라 외부, 타인의 체험의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 그래서 진정한 각성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이러한 미국명 케이가 한국명 한경희로 불리는 것은 그녀가 숨기고 싶어 했던 가난한 시절이었던 초등학교 동창생 지원과 우연한 마주침에서 비롯되는데, 수족관의 물속을 평온히 유영하는 중산층의 백수인 연인 재현과의 이별과 공장 노동자로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지원과의 시작은 차원으로서의 인식의 전환적 상징이라 할 것이다.

 

그녀는 지원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 번도 자신의 것을 가져보거나 계급적 욕망에 시달린 적 없는 하층민의 체념과 피해의 트라우마를. 그래서 젊은 청춘 연인이 그저 쾌락을 함께하며, 넘쳐나는 세상의 욕망에 휩싸이는 것과 주류적 질서와의 상관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 또한 몰락의, 경제적 고통의 시간을 경험했다는 인식에서 자신과 다른 세계로서의 지원의 삶을 보지 못한다. 잔업수당이 곧 삶의 형편을 결정하는 세계에 속한 지원에게 삼청동, 홍대, 압구정의 카페, 록밴드의 공연과 영화 관람은 이질적인 문화의 세계이고, 불편함과 불안감을, 괴리와 열등감을 심화시킬 뿐이다. 경희는 그에게 감당할 수 있는 세계에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 재현과 그의 친구였던 록밴드의 공연을 위해 내려갔다 경유한 생맥주집 주인의 언어에서 얻어진다.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인 경희와 야생의 바다에 있는 지원의 그 다른 세계의 비유할 수 없는 차별화된 삶의 공간을. 수족관에서 느끼는 물결의 흔들림이 바다의 물결과 같은 것일 수 없듯이 중산층이라는 경계 내에서의 삶에 있는 자가 한시도 생존의 치열함을 벗어날 수 없는 자의 그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이것은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한 복판에서 발생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검은 회색연기에 휩싸인 압도적인 재난의 풍경에도 무심한 한 때를 보내는 젊은이들의 대조적인 장면의 사진으로 확장되고 본질에 접근한다.

 

사진 속의 젊은이들이 특별히 냉소적이거나, 퇴폐적이고, 악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인생의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인간의 무심함, 삶의 본질적인 끔찍함의 형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바로 사진 속의 젊은이들이 우리의 초상이라는 것을. 이것을 지각한 정신은 수족관을 나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야생의 대양을 향해 용기있는 자세로.

 

여기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장이 떠오른다. 그가 지향한 문장의 목적은 다르지만 “사람이 앉지 못하도록 비탈공간을 만들고, 가시밭 공간을 조성하며, 순찰 경비원을 세워 접근을 방어하기 위해 공간을 분리하는”, 즉 이질적인 집단에 대한 공포를 회피하려는 주류의 탐욕적 인식의 세계, 오늘 우리들의 무감각하고 무심한 세계에 대한 진술을. 그리고 “지금의 세상이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지옥인가”하고 묻는 그 처연한 물음의 진의를. 이것은 케이 아니, 경희가 자신이 사는 세계가 천국인가, 지옥인가를 자문하는 것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안전망을 상실한 개인으로 야기되는 불안과 안전위협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한 분리의 형상이 공존하는 이곳.

 

그래서 제목인 ‘천국에서’는 지금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기를 바라는 불가능에 대한 패러독스일 것이다. 결국 작가는 주인공 경희(케이)를 통해서 지옥 아닌 길을 찾기위해 분투, 수족관을 열어젖히고 강으로 대양으로 헤엄쳐 나아가는 희망의 빛을 비추지만 그 가능성의 미래는 왠지 묵시록(默示錄)적이기만 하다. 이기심이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환상을 언제나 저버릴 수 있을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사회철학자 이진경이 말했듯이 “지배적인 척도에 반하여 척도적인 것과 대결하며 새로운 것을 창안”하려는 시도가 천국을 향한 더 현실적인 모색이 아닐까?

 

김사과의 발표된 지금까지의 소설들 - 단편집『02 영이』나, 장편『테러의 시』,『풀이 눕는다』 - 과는 서사의 감성 저변을 이루던 증오와 분노가 넘실대고, 핏물이 배어나올 정도의 냉소적 통렬함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꿈과 환상으로 지탱되는 이 도시, 서울의 세계, 매순간 타인들에게 증명되고 갱신되기 위해 사는 삶, 단지 살기위해서 사는 삶에 초점 잃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 초라함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는 정말 함께하는 것이 싫은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하겠다는 혐오의 치열함을, 또한 진짜 인간이 된다는 게 뭔지 알지 못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도시. 값싼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휴머니스트가 된 듯 위선과 가식, 가면에 도취된 인간들을 묘사했던『테러의 시』속 사유가 도도히 연속해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가치판단적 주장과 같은 서술의 개입이 허구적 즐거움을 부분적으로 손상시킨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음을 숨길 수 없지만, 인간과 인간 사회의 기본적 딜레마에 대한 심원한 그녀의 탐색은 언제나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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