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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침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8월
평점 :
이 작품은 인간의 소망, 억제되었던 삶의 궁극적 욕망의 세계, 키냐르 식 시간인 ‘옛날’, 그리고 ‘최초의 왕국’이라는 순수의 세계에 대한 애절한 희구에 다시금 공감하는 시간이 된다. 이 옛날이 삶의 열정과 회한, 본질과 허영, 기만의 세계와 갈등하며 “언어가 버린 자들이 물 마시는 곳”, 운명을 완성하는 세계로 이끈다.
파리 교외, 나룻배가 외로이 떠있고,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비에브로 강변, 소박한 자연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당대 최고의 비올라(다 감바) 연주자인 ‘생트 콜롱브’의 죽은 아내를 향한 비장한 선율이 흐른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지우지 못하는 남자와 두 딸의 비올라 삼중주는 영주들, 음악가들에게 깊은 영감과 감동을 안기고,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을 받는다.
명성은 국왕의 부름을 부르지만 남자는 영광을 쫓는 이들이 비난하는 오만한 고뇌의 세계를 결코 떠나지 않는다. 그에게는 얼굴을 파묻고, “아주 오래전 머물렀던, 어두컴컴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가질 수 있는 비에브로 강이 있기에. 이것은 어머니의 뱃속, 태아로서의 평온, 아득함의 기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며, 사랑과 보살핌이 충만한 원초의 세계이자,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죽음의 세계이다. 또한 그의 음악은 바로 이 흐릿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염원이자 억제된 금기가 해제된 순수한 욕망의 실현이다. 음악과 삶의 궁극이 맞닿아 있는 세계, 그의 음악은 곧 『떠도는 그림자들』에서 말하는‘옛날의 냄새’에 가 닿는다.
소설은 음악, 예술의 지향에 훼방을 놓으려는 듯, 음악은 하지만(play) 음악가는 될 수 없는 청년“마랭 마레”를 등장 시킨다. 진정한 음악은 기교와 광대놀음이 아님을 바람, 눈, 오열의 소리를 통해 말하지만 “우리 정신은 휴식을 모르오, 삶은 맹렬할수록, 굶주릴수록 아름답소.”와 같은 주장을 지닌 이에게는 명예와 영광, 재화와 위세가 더욱 중요한 덕목이니 공허한 울림일 밖에 없다. 더구나 청년 마랭 마레는 스승 생트 콜롱브의 장녀인‘마들렌’과 정념을 불사르지만, 그녀의 자유분방한 여동생‘투아네트’의 탐스런 육체를 소유하게 되자 마들렌을 저버리고, 그녀로부터 내밀하게 익힌 스승의 연주기법을 가지고 궁정 수석 연주자가 된다. 아마 음악은 과연 무엇인가? 음악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와 같은 물음일 것이다. 아니 삶을 사는 우리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답변은 생트 콜롱브가 죽은 아내의 환영을 만나 연주를 들려주고, 와인을 대접하는 장면, 그 자체일 것이다. 생과 사의 만남, 시간성이 없는 원초의 세계로의 편입일 것이다. 이것은 스승의 연주를 듣기위해 오두막에 숨어들었다가 인기척에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화에 담겨있기도 하다. 밖에 누구냐고 묻는 스승의 물음에 “궁을 도망쳐 음악을 찾는 이”라는 답변과, 다시금 “음악에서 회한과 눈물”을 찾는다는 제자의 답이다. 그리곤 마침내 음악은 신(神)을 위한 것도, 귀도, 황금도, 침묵도, 사랑도, 단념도,...아니며, “아이들의 그림자, 갖바치의 망치질, 유아기 이전의 상태, 호흡 없이 있었을 때, 빛이 없었을 때”라는 ‘최초의 왕국’이라는 무의식의 기원을 발설함으로써 시초의 본질에 이른다.
“선생님, 마지막 수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첫 수업을 해도 되겠소?”
세상의 이치(理致)란 낮과 밤,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사랑과 증오....처럼 대립적인 것 같지만 그것은 이면이자, 동일 한 것의 다른 언어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래서 키냐르의 인물들은 원초의 세계, 혹은 ‘옛날’로 회귀한다. 무(無), 없음의 세계로. 그것이 시작이었고, 끝이 아닌가.
이런 키냐르의 언어를 보고 ‘퇴행적’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옛날, 흐릿한 기억의 시간으로 퇴행하는 것이라고. 심한 오독이고 존재의 몰이해라 할 것이다. 삶의 궁극적 욕망은 프로이트의 확신처럼 유아기의 억눌린 기억의 실현이라는 점에 있으며, 이것은 퇴행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정신 조건이다. 억제된, 금기시된 욕망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 그것은 곧 가공되고 조작된 세계가 아니라 순수의 세계를 되찾는 것이다. 더구나 키냐르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작위적 개념이 아니기에 더더욱 과거로 가는 역행이 아니다. 어머니의 젖을 물고 있던 옛날의 은폐된 기억의 세계로. 그곳에 무슨 언어가 있으며, 불행이 있고, 모욕이 있겠는가. 기만과 위선, 허영이 무용한 곳, “욕망과 추억을 참을 수 없어 이따금 바지를 아래로 내리”는 생트 콜롱브의 와인이 놓여있는 그 오두막의 세계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목 놓아 부를 수 있는 세계로. 시인 로르카의 ‘머리를 더듬는 손’처럼 죽은 아내의 시선에 놓여있는 생트 콜롱브의 늙은 손이 켜는 비올라의 선율이 하염없이 가든한 눈물을 흐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