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만치 혼자서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

- 작가의 말에서, 253

 


이 소설집 전편에 흐르는 시선은 삶의 신산함과 생명에 대한 서글픈 연민과 애도로 다가온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한 무력한 소시민의 생의 박탈(명태와 고래)로도 출현하고, 소위 타자와 함께라는 공동체의 연대를 부르짖는 사회이지만 물질이 매개되지 않는 관계는 결코 타자를 품지 못하는 존재들의 세상임(대장내시경 검사)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어쩌지 못하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숙연함, 삶의 해체와 소멸의 필연성에 대한 겸허한 기도이기도 하다.

 


이젠 점점 사라지는 인간 노동의 일자리는 고작 공무원이라는 한정된 정기적 채용의 입구 밖에 없을 정도로 청년들의 삶의 미래를 옥죈다. 권력을 움켜쥐자 자신의 인맥들을 국가 공무원에 버젓이 밀어넣고는 고작 9급인데 뭐가 문제냐며 오히려 국민을 향해 악다구니를 부리는 무지와 무감각의 파렴치한 망언이 나오기까지 한다. 단편 영자구준생(9급 준비생의 약어)’으로 불리는 노량진 고시텔에서 오매불망 9급이든 10급이든 붙으려 모여든 자기착취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비애어린 삶을 묘사하고 있다.

 


지방대학을 싸잡아 비하하는, 혹은 자조하는 지잡대(地雜大)’생의 고달픈 일상을 쫓아가는 것은 이 사회가 어떤 구조로 유지되는가의 한 단면일 것이다. 식당 아르바이트로 고시텔의 관리비를 조달하며 싸구려 컵 밥에 주린 배를 채워가는 9급 재수, 삼수생들의 삶을 이 정권, 이 사회체제,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이 알고 있기나 한지 모를 일이다.

 


소설집을 시작하는 단편 명태와 고래에서부터 , 저녁 내기 장기, 영자, 48 GOP는 등장인물들에서 어떤 연결고리같은 것이 느껴진다. 남과 북의 전쟁이라는 국가 폭력 사태의 오롯한 피해자인 소시민이 겪는 권력의 희생양 찾기의 제물이 되어 가족과 재산의 파괴와 분열은 물론 14년의 옥사를 겪어내야 했던, 한 인간의 삶을 앗아간 공권력의 무참함이 시리도록 그려진다. 수감되기 전의 어둠과 바람에 몰려 조업 중 군사분계선 북쪽으로 불가항력으로 흘러들어간 것이 그의 죄다. 빨갱이 낙인찍기의 무지한 사회에서 아내와 딸은 대체 어떻게 살았을까? 어쩌면 단편 의 주인공 여성이 그의 딸인 것만 같다.

 


물론 의 주인공은 남해안 작은 항구 도시 출신이니 동해안 포구와는 인연이 없다. 다만, 여자는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고향 선후배 사이의 남편과 사이에 10살 남자아이를 두었을 때 이혼했다. 어느 날 경찰서로부터 아이의 범죄 판결에 따른 참고인 호출을 받는다. 성폭행, 특수강간 죄목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진 자신의 아이.

 


참고인 진술 과정 중 피해자의 아버지와 우연히 자리를 같이하게 되고. 남자의 투박한 손을 본다. 남자는 자살한 딸아이가 죽기 전 구조대원의 손을 잡았음을, 그 간절한 생의 의지를 증거하며 결코 자살한 것이 아님을 항변한다. 자살이든 타살이든 범죄 입증의 효력과는 무관한 이 진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잔혹하고 난폭한 스무 살 여자아이의 강간을 떠올리며 여자는 10년 후 출소할 아이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소심한 이사를 한다.

 


타인의 생에 대한 무관심과 잔인성, 그리고 욕망 충족을 위한 폭력의 사용은 마치 9급 공무원 입시를 위해 분투하는 누군가의 자리를 강탈하고는 뭐가 문제냐고 주절거리는 정치배의 추악한 욕망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는가?


 



작품 저녁 내기 장기에는 초로(初老)의 두 인물 이춘갑과 오개남이 등장한다. 국가 폭력의 전형적 피해자인 명태와 고래의 주인공은 이춘개. 사실 소설 속 인물 명으로 두 작품의 상관성을 말한다는 것은 터무니없기까지 하지만 사회체제라는 거대한 제도와 권력의 희생자들이라는 점에서 이춘갑은 이춘개를 승계, 세대를 대물림하는 인물상이라 해도 그리 그릇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이춘갑은 국가 경제 부도여파로 사업을 접어야 했던 인물이다. 부도로 인해 채무부담에서 헤어나 정상적 경제 거래를 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까지 오랜 고통을 겪는다. 2000년 전후를 통과했던 이 땅의 사람들이 정경유착을 통한 당대의 기득권자들이 유린한 사회의 고통을 보통의 서민들이 모두 뒤집어써야 했던 시절이다. 한편 오개남이란 인물은 단 한명을 뽑는 구청 청소과 임시직 채용에 무지막지하게 몰려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너무 가팔라 차량이 올라가지 못하는 산동네 쓰레기 수거를 제동장치도 없는 수레를 끌고 담당한다.

 


기온이 내려가는 겨울이면 쓰레기의 무게를 버티며 빙판의 경사진 언덕을 내려오는 일은 사고를 각오한 혈투에 가깝다. 여당 대표여, 들으시오! 고작 청소 임시직에도 삶의 모두를 걸어야 하는 인간들이 이 땅에는 수두룩하답니다. 오개남은 아이를 안고 내려가는 여인을 피하려다 사고를 당하고, 구청은 나이가 들어 정신이 산만해져 발생한 부주의라며 해고하고 만다. 이 사회 많은 사람들의 삶이 본질이 은폐된 권력의 착취와 불가분임을 외면할 수 없다. 오개남과 함께했던 누군가에게 버려졌던 개의 목에서 차마터지지 못하고 우 우~’하는 소리는 어쩌면 이들의 눈물을 머금은 탄식의 한 숨 같기만 하다.

 


이 소설집의 작품들에는 몇 가지 중첩되는 배경으로 바다와 포구가 등장하고. 깨진 얼음 위에 실려 먼 바다로 정처없이 끌려가며 구조를 요청하는 우우거리는 개, 쓰레기 수레 옆을 동행하며 우우하는 개 등이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소설의 배경들이 바다 연안의 작은 포구이다. 영자의 고향 마을도, 48 GOP임하사의 고향도, 명태와 고래의 향일포도 의 화자(話者)도 표제작인 저만치 혼자서도 바다와 멀지 않은 풍수상 버려진 장소이다.

 


개는 아마 소설 속 주인공들인 권력과 제도의 피해자이며 희생자들, 권력에 의해 발가벗겨진 이들의 또 다른 자아일 것이다. 또한 농업에도 어업에도 생활을 의탁할 수 없는 척박과 빈곤이 상시적인 곳을 에둘러 반농반어의 지역이라 표현하는 작은 포구 마을들도 우리네 체제와 제도 위선의 구역질나는 반감의 언어일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인간 간의 차이를 표시하는 기호들에 대해 둔감하고 그것이 은폐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곤 한다.

 


작가는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낯설고 거북해서 발음이 되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 이 땅의 사람들이 대체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 어떻게 사유하여야 하는지를, 그래서 변화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타자 감응의 시간이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소설 48 GOP를 읽다보면 전쟁 중 부대원 전체가 궤멸된 전투에서 전사한 임하사의 할아버지 임종석 이등중사의 마지막 편지를 되뇌는 할머니의 신음에 가까운 탄식이 들려온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나간다. 오늘밤에도 죽는다. 상치쌈이 먹고 싶다.


상치쌈이 먹고 싶다네. 아이고.“

 


오늘도 여전히 최전방 전선에 서서 북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자식들, 형제들이 있다. 그리고 70년 전에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탐욕스런 권력욕이 야기한 동족 전쟁에 내몰려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우리들의 부모, 조부모가 있다. 그들의 생을 과연 누가 처분할 권리를 지녔다는 것일까? 할머니가 70년 전 남편이 먹고 싶다던 보잘 것 없는 상치쌈을 잊지 못하고 거듭 반복하여 되뇌는 이 문장은 내 전신을 고통으로 훑는다.

 


소설집의 마지막에 표제작 저만치 혼자서의 제목은 고등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는 김소월 시인(詩人)산유화한 구절에 있는 표현이다. 입시를 위해 기계적으로 기술된 정형화된 해설 탓에 많은 이들이 피상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시()이기도 하다. 저만치는 인간과 자연의 거리이며, ‘혼자서는 고독하고 순수한 존재라는 암기된 해석이 따라 붙는다. 문학은 이렇게 기계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음미와 사유를 요구한다. 이 소설은 아마 이 작품집 전편에 흐르는 생의 쓸쓸하고 고독한 해체와 자연 순환에 대한 경건한 기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음을 맞는 수녀들의 사목을 맡아 이를 지켜보며 신의 섭리 혹은 자연에 순응 할 수 없는 그 고통의 죄업을 끊임없이 기도하는 젊은 신부의 모습은 어쩌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 아니 인간 모두를 위한 대속의 행보만 같아 아린 슬픔이 몰려온다.

 


나는 분명하고 간결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독특한 문체의 감각을 느끼게 하는 김훈 작가만이 발산하는 기사 보도형식의 분위기를 늘 즐거워한다. 그 명쾌한 문장들이 모여 은근하고 사색적이며 다채로운 의식들이 발하는 풍성한 작품으로 어느새 변화하여 묵직한 감응으로 마음 깊은 곳에 내려 앉아 찌든 정신을 새롭게 갱신하게 해준다. 작가는 한 이웃으로 이글을 썼다.” 고 밝히고 있다. 이 작품집은 우리 이웃, 바로 너와 나, ‘우리들의 이야기다. 우리를 연민할 이들이 누구이겠는가? 바로 우리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의 지혜 모리스 마테를링크 선집 1
모리스 마테를링크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장하면서 어느 순간 이 세계가 거대하게 짓누르는 힘을 어렴풋하게 느끼기 시작하며, 그 힘은 마치 어떤 불가항력의 숙명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속박!,  이 갇힌 듯 답답함과 곤혹스런 압박감에 시달릴 때, 시인의 시선은 인간보다 더한 장애를 지닌,   "자신을 흙에 묶어 놓은 자연의 법칙이라는 막대한 난관을 헤쳐나가야 할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꽃, , 나무 등 식물의 위대하고 집요한 저항의 경이로움으로 향합니다.

 

"식물은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 20

 

과학자의 정밀한 관찰이 시인의 정신에 깃들어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질 때 그것은 아름다운 생의 지혜가 되어 가슴 뭉클한 공감의 언어로 인간이라는 고독한 존재를 위로합니다. 시인 '모리스 마테를링크'는 식물이 얼마나 풍부한 상상력과 재능으로  '절대적 부동성의 끔찍한 법칙'에서 벗어나는지, 또한 미 결정의 상태로부터 미래를 위해 최선책을 찾아내려 하는지 찬란한 침묵의 드라마를 펼쳐 보여줍니다.

 

지구라는 행성에 가장 늦게 합류한 인간은 자신이 우주 대자연의 통제자인 듯 행동합니다. 그럼에도 이 존재가 실제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초라하고 협소한 것인지 모릅니다. 식물은 시간으로 가늠할 수 없는 훨씬 오랜 영겁의 시간동안 자기만의 독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운명을 개척해 온 존재입니다. 식물은 부동(不動)이라는 엄혹한 법칙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하고 비좁은 세계를 벗어나 숙명적으로 닫힌 공간을 극복할 줄 압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이처럼 운명적으로 부여된 시간을 벗어나고 감당키 어려워 보이는 속박의 법칙에서 해방된 우주로 진입하는 놀라운 지혜를 지닌 식물을 지켜보게 해주고, 그로부터 우리들에게 아주 다른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저절로 스며들도록 해줍니다.  수직으로 깍아지른 듯한 해안가 암벽의 작은 틈새에 내려앉은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중력에 저항하기 위해 나무 줄기에서 손처럼 뻗어 나온 뿌리가 바위를 붙잡고 있는 비틀린 몸체로 천공을 향해 풍성한 가지를 형성하고 있는 월계수 한 그루의 형상은 독특한 비행으로 날아가 바위 틈에 안착한 한 알 씨앗의 감동적인 사연을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자리에 붙박히도록 한 대자연의 법칙에 저항해 회복불능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창안된 다채로운 씨앗의 비행술, 그 비행을 위해 분출하는 정교한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부단하고도 가공할 노력을 기울였을 겁니다. '가시 도꼬마리'의 갈고리를 갖춘 씨앗 캡슐, '뚜껑 벚꽃'의 씨앗 냄비, '제라늄'의 다섯 캡슐 등 공간 극복을 향한 헤아릴 수 없는 씨앗들의 기발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삶을 연결해주던 끈마저 단호히 잘라내고 수면을 유영하는 '나사말' 수꽃의 행복에 이르기 위한 미래 상상력의 기막힌 노력의 모습은 초자연적 신비로움의 경지를 느끼게까지 합니다. 자가수분이 종()퇴화로 이어진다는 자연 만물의 이치를 일찌감치 깨우친 식물들의 타가 수분, 까마득한 세월동안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생존의 항구성 확보 전략임을 터득한 것이죠. 게다가 수분을 위해 제 때에 여닫는 '송이풀'의 정교한 꽃가루 주머니, 꿀벌의 정확한 동작과 다른 꽃으로의 이동시간까지 고려된 '깨꽃'의 타가수분 방식은 마치  "이성과 의지를 겸비한 듯" 보이기까지 합니다.

 

'에스파냐 금작화'가 꽃가루를 뿜어내는 그 발작적인 탄력의 힘은 어쩌면 탄도학자들을 매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가장 완벽하고 조화로운 지혜의 증거(76)"를 지닌 식물로서 '난초'를 꼽고 있습니다. 과연 더없이 복잡하고 독창적인 꽃의 양태, 이를테면 난초의 해부학적 시스템이라 할까요?   "꽃의 영혼이 보여주는 지극히 영웅적인 분투에 대한 놀라운 기록이라 할 정도로 기능과 모양이 가히 천재적으로 갖추어져 작동하지요.

 

계산, 조작, 치장, 발명, 추론 등이라 인간의 언어로 명명할만한 것들을, 이들 식물들은 이처럼 자신들의 타고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세밀함과 분석적 시각을 투영해 인간의 욕망과 지혜의 비유를 동원하여 삶의 근원적 이해로 뻗고 있는 이 시적 상상력 넘치는 문장을 읽게 된 것은 제겐 행운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식물들의  "장엄한 저항의 몸짓과 짐짓 평화로워 보이는 용기, 그리고 예기치 못한 도약과 중력(105)"에 대해 끊임없는 반항의 기제를 다져 온 그 역동적 에너지를 보게 되면서 작은 억압의 힘에도 고통스러워하는 취약한 존재자임을 반성케 됩니다. 보잘것없는 잡초에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금작화에 이르기까지 이들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들이 발산하는 색과 향기와 모양이 지닌 힘겨운 투쟁 속에서 오늘 우리네 치열한 생존 경쟁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이 지혜로운 문장들에 겸허와 용기를, 그 분투의 정신을 배웁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8-10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7월 동안 쓰신 글 중 어떤 것으로도 당선될만 하신데, 이 리뷰로 받으셨군요

필리아 2022-08-10 17:50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축하댓글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
 
대중지성, 홍루몽과 만나다 - 무한한 정과 무상한 생의 이야기 감성(감이당 대중지성) 시리즈 2
김희진 지음 / 북드라망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국 사대명저중 하나인 홍루몽(紅樓夢)은 그 양적 방대함이 독자에게 부담스런 장벽이기도 하지만 책장을 줄기차게 넘겨도 어떤 변화를 체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세밀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의 반복이 주는 지루함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결국 손에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지만 이내 책장에 다시 밀어넣고 존재를 잊기 일쑤다.  그럼에도 많은 인문학 저술들과 에세이 이곳저곳에서 홍루몽의 한 구절이나 등장인물의 인용을 발견하면 다시금 아쉬움이 마음을 어지럽히곤 했다.

 

궁여지책 끝에 이 작품이 대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 어떻게 읽어내야 할 지에 대한 일종의 조언을 우선 참고하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전업주부인 저자 김희진의 3년여에 걸친 지난한 공부 결실인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읽기를 포기하게 했던 그 지나치게 반복적이어서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하였던 일상의 묘사들이 그려내는 10 여년의 시간, 그 축적된 세월을 감지하는 것이 곧 이 작품의 읽기라는 지적에 내 어두운 인지능력이 깨어났다고 해야겠다.

 

홍루몽(紅樓夢)의 원저자인 조설근(趙雪芹)’은 증조부 부터 3대에 걸쳐 청()조 강남의 경제를 주름잡는 관직(강녕직조)을 세습하던 명문가의 자손이다.  달이 차면 이울 듯이 가문의 몰락과 함께 조설근은 빈한한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설은 다분히 자전적 작품이라는 추정을 빗겨갈 수 없다. 그러나 조설근은 이 작품은 가짜(假語) 이야기, 즉 허구라 말했다. 저자 김희진이 설명하듯 조설근의 진심은 가짜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달 될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납득할만한 서사를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으로서의 글쓰기였다고 독해한다. 허구의 의미에 대한 현학적인 썰까지 푸는 것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대중지성, 홍루몽과 만나다120회 차에 걸친 장편소설 홍루몽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어떻게 읽어야 할 지에 대한 충분한 동기를 유발할 만큼 원작에 포진한 무진장한 의미들의 세계를 발굴해내어 생각의 길을 보여준다. 아마 이 책을 읽다 보면 절로 홍루몽원작 독서의 욕망이 부푸는 설렘을 물리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단언하게 된다.  사랑, 무상성, 시작과 끝을 가진 삶의 필연성, 부귀영화와 몰락, 일상에 드리워진 삶의 그림자, 그리고 세상의 이해를 향한 새로운 삶의 형태의 모색, 인연과 우정에 이르기까지 소설에 박혀있는 그 다채로운 주제들을 꼼꼼하게 읽어내어 안내해주는 까닭이다.

 

소설은 보옥(寶玉)이라는 10대 소년의 성장기를 축으로 그의 성년기까지 10 여년의 시간으로 펼쳐진 일상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의 섬세한 기억의 기술이며, 원저자 조설근 자신의 경험처럼 '가부'라는 명문거족(名門巨族)의 흥망성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가부 집안에는 하나의 마을이라 할 만큼 거대한 정원인 대관원이 있으며, 이 정원은 평등한 자매의 공간이며, 남성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오직 여자들만이 어울리는,  그 어떠한 가부의 위계질서도 미치지 않는 독립된 장소라는 것이다.  아마 원작자의 여성에 대한 연민, 그 고통에 대한 공감의 정밀성을 위한 필수적인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유일한 청일점인 이 가문의 장손인 보옥이 있다.  보옥이란 아이는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맛보고 싶어 조르고 졸라 이 세상에 태어난 신선계를 노닐던 신영지사라는 존재다. 그러하니 이 아이에게 매일의 어떤 일상도 똑같게 느껴질 수 없다.  모든 하루가 그에게는 선물이다.  그런데 주인공인 보옥이는 대관원을 비롯한 무수히 등장하는 여인들의 중심이 결코 아니다.  소녀들 사이를 유영하며 그녀들의 면면을 관찰하는 움직이는 관찰자라는 점이다.


 



그가 바라보는  매일의 작은 차이가 쌓이며 삶의 숫한 굴곡들과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만들어낸다.”  그 미세한 시간의 흐름 속에 수많은 사건들이 교차하며 모순같은 삶의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급작스레 현재로 드러나는 모습에 독자들은 현기증나는 삶의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그 지루한 반복의 시간 속에서 문득 새로운 안목이 선사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고전 중에서 가장 여성성이 넘치는 텍스트라고 한다. 하여, 보옥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여인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등장한다. 보옥을 따라 이생에 환생한 대옥의 사랑에서부터 기울어가는 가문의 틀을 다시 새우려는 보옥의 아내가 된 보차, 주종(主從)의 위계가 존재치 않는 보옥과 시녀들의 천진난만한 사랑의 이야기 등이 규중 여성들의 일상적 리듬과 함께 그 동선과 시선을 따라가며 섬세한 시간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한다.  그리곤 독자들에게 그 리듬 속에서 하나의 선명한 사건이 뚜렷이 솟아 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시간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끝난 다음 돌아보니 그것은 한 가문의 흥망성쇠이고, 생명 존재의 무상성이기도하며, 우주와 연결된 생명의 기운에 대한 알아차림이고,  터럭 한 올의 인연이 맺어 준 우정이라는 값진 보배이다. 또한 움직이는 관찰자의 시선에 포착되는 것들은 닫힌 경계의 삶에서는 알아보지 못하던 것들이 바깥에서는 얼마나 쉬운 해결이 존재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새로운 삶의 탈주라는 단순한 진리의 깨우침이며, 삶이란 어떻게 인식되고 살아야 하는 것인 지에 대한 각성이기도 하다.

 

가부의 딸인 보옥의 누이가 황제의 첩이되어 원춘 귀비라는 귀인으로 친가 방문이 예정되자 꾸며진 것이 대관원이다.  그 화려함과 크기는 황족의 일원을 맞이하기 위한 가부의 기쁨이다.  그런데 저자는 부귀영화가 극대화된 가부의 영예의 장면에서 역전을 읽는다.  밤에 도착한 귀비의 행차를 밝히는 드넓은 대관원 조명의 화려함과 밤이라는 어둠의 대비이다.  화려함은 어둠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번영하는 것은 언제나 폭력을 수반하고 그 사이에서 불만이 싹트며, 그 순간에 균열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고.  성대해질 때 쇠락을 염려하여 가득 차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마음을 우리들은 항상 잊어버린다. 그리곤 결코 역전이란 자신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듯 거들먹거리는 우매한 교만이 세상을 고통에 빠뜨리곤 한다.

 

저자가 알려주는 이 소설의 구조가 지닌 치밀성은 원저자 조설근이 이 작품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즉 총 120회 차로 구성된 소설은 어느 기점부터 접혀서 되돌아오는 대칭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5회 차에 미망(迷妄)이 서술되면 115회 차에는 깨달음의 이야기가 나오고,  101~102회 차에 귀신 쫓는 굿이 등장하면,  17~18회 차에 환희에 찬 대관원 낙성의 성대함이 나오는 것처럼 흥과 망, 모임과 흩어짐, 생과 멸이 순환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소설은 서사의 내용 뿐 아니라 구조적 배치까지, 그리고 현실과 그 경계를 오가며 한낱 꿈같기만 한 인생을 되살피게 한다.

 

소설 한 편에 세상을 다 담을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어쩌면 조설근은 한 줌 먼지에 불과한 세계를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모두 담아내려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 세계의 모순과 다양성을 무수히 그려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엄청난 인간들이 등장하고 저마다의 인간을 연기한다. 이 책을 읽고나면, 끝이라는 것, 무상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삶의 소중함과 즐거움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침잠하게 한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끝과 함께 시작된다는 소설이 관통하는 역설적 통찰,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그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조설근이 살려낸 그녀들의 세계로, 소설 홍루몽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등대지기 2022-07-16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홍루몽! 고등학교 때 공부하기 싫어서 읽었었는데 ㅋㅋㅋ 반갑네요
홍루몽 리뷰도 기대하겠습니다 :)

필리아 2022-07-16 23:30   좋아요 1 | URL
천천히 저자의 독해를 음미하면서 원작을 읽어 나가야겠어요. 지루함을 견디는 도움이 되어줄 것 같네요. 댓글 고맙습니다.~~

꼬마요정 2022-07-16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옥은 사실 물의 성질이라 여성성의 구현으로 보고 읽어야 한다고 들었어요. 필리아님 글 읽으니 과연 그렇군요. 저는 완역본은 못 읽고 축약본만 봤는데 무척이나 허무했어요. 지금 읽으면 또 다를 수도 있겠네요. 리뷰 기대할게요^^

필리아 2022-07-17 10:05   좋아요 1 | URL
네, 보옥에게는 권위주의적 남성적 신체가 없다고 합니다. 보옥은 권위와 폭력의 세계를 싫어하지요. 그래서 그는 깊은 사랑을 하지만 소유와 지배를 알지 못합니다. 당대의 여성성에 코드가 맞추어진 존재랍니다. 이제 1권을 펼치려고 합니다. 전권을 모두 읽게 될지는 알 수가 없네요. 꼬마요정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휴일 되십시요~~
 
관광객의 철학
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 / 리시올 / 202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오늘의 시대를 표현하는 말이 무수히 생산되고 있다. 기계화 시대라는 표현처럼 생명력을 상실한 인간을 말하는가하면,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가 서로 질서를 지배하는 패권을 가지려고 다투는 시대이기도 하며, 압도적 불평등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갈등과 충돌을 상징하는 언어들이다. 결국 세계는 혐오와 적대의 발화가 만연한 곳이 되고, 사랑, 연민, 동정심, 배려 등의 말을 쏟아내며, 타자를 소중히 하라는 이젠 지겹기 짝이 없는 도덕의 가면을 쓴 공허한 문장만이 울려대고 있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은 이처럼 타자와 함께 하는데 지쳤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타자라는 말 또한 시비꺼리가 된다. 타자관()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저마다의 이데올로기를 발하며 갈등 촉발의 언어가 될 지경이다. 이 책의 제목에 있는 관광객이란 바로 이 타자라는 이념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채택된 궁여지책의 언어이다. 그러니 이 저술은 이방의 지역을 놀러 다니며 일회적 시선을 즐기는 사람들을 분석 통찰하는 것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논고이며 비평서라 할 수 있다.

 

저자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는 게이오, 와세다등지에서 문화비평, 과학철학 교수를 지낸 젊은 학자이다. 그가 개념어까지 바꾸면서 철학을 논하려는 까닭은 오늘의 인간들에게 내면화된 인간관이 새로운 세계를 사는 인간관이나 사회관과는 동떨어진 낡은 것, 많은 한계를 지닌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출발된 것이다. 인간관을 새롭게 갱신하여 연대, 공존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겠다는 것이다.

 

관광객이란 누구인가?

 

관광객을 정의하기 전에 관광이란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할 터이다. UN세계관광기구는 일상 생활권 밖에서 여행을 하거하거나 체류하는 사람의 활동으로, 방문지에서 보수를 받는 활동을 하는 것과는 무관한 모든 활동이라 정의하고 있다. 한편 관광학 교과서들은 즐기기 위한 여행이라고 어떠한 사유도 자극하지 못하는 문장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대다수의 사회학자들이 행락같은 쓸데없는 현상이라는 인식처럼 관광에 대한 지적 경시를 암시한다. 이렇듯 관광이란 말에 대한 경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불필요성의 관점이 내재되어 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관점이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

 

관광은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에 기분에 따라,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행위다.” -36

 

발터 벤야민이 주목한 19세기 파리의 파사주를 거니는 산책자의 시선이나, 18세기 영국 런던 만국박람회의 유리와 철골로 만들어진 수정궁을 들뜬(우연성) 마음으로 산책하는 관광객의 역사를 반복하지는 않겠다. 다만, 관광객이란 이처럼 산업과 기술 지원을 받은 새로운 계급이 모이는 새로운 소비공간을 산책하는 들뜬 기분의 사람들이라는 점에 착안하면 바로 이점에 그 한계와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진지함과 경박함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의 첨예한 구분선을 불식시키는 그러한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이의 대척점으로 테러리스트를 예시하고 있는데, 마치 이들은 진지함을 대표하는 존재들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의 테러리스트가 어떤 명료한 정치적 분파의 이데올로기를 지녔는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선뜻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오늘의 테러리스트라는 존재는 조직적 배경 없이 고독하게 범죄를 준비하는 외로운 늑대((lone wolf), 혹은 홈그로운 테러리스트(homegrown terrorist)’에 가깝다. 사실 이들의 동기를 진지하게고찰하면 헛돌 수밖에 없다는 지적처럼, 동기를 파고들면 그 천박함과 진지함 없음에 당혹케 될 것이라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는 어쩌면 관광객에 가까워진 것이라는 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소비하고 가는 무책임함, 방문 장소의 모든 사물이 단지 상품이고 전시물이며, 중립적이고 무위적인, 즉 우연히 시선에 들어 온 대상일 뿐이다. 즉 관광객은 벤야민의 산책자와 많이 닮아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들어오는 하나의 요소가 있다. 관광지(공간, 장소).

 

관광객은 관광지의 실재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미지만을 오려 담는다. 관광지의 주인인 본래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관광객의 무책임성에 화를 내고 미워하지만 어느 새 그들이 없으면 삶의 영위가 곤란해지는 경우에 처해지게 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관광객과 주민들은 본래 교류하려는 의지도 없으며,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도 없었지만 두 영역은 상호교호하는 관계에 이미 빠져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경박함이 진지함과 그 경계도 없이 이루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전례없는 메커니즘을 보이는 SNS의 특정 피드에 좋아요가 폭증하는 현상과 유사하다. 이제 개발되는 모든 장소는 SNS의 피드처럼 관광객의 시선을 내면화한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타자가 있는 사회를 생각해 보자.

 

근대적(20세기) 인간관

 

설혹 고통과 슬픔이 있더라도 모두 의미가 있다며, 삶의 현실 그자체야말로 최선(가장 좋은 것)이라 주장했던 라이프니츠를 비판하기 위해 집필된, , 인간, 이성, 문명에 대한 유럽의 상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최초의 상상적 여행을 통해 사고(思考) 실험을 감행한 볼테르의 캉디드로부터 시작하여,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경유하여 헤겔과 코제브, 칼 슈미트,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근대의 인간관을 성찰한다.

 

여기서 대립되는 두 유형의 인간을 만나게 되는데, 하나는 인간의 동물화를 지적한 코제브의 성찰이다. 그는 1970년대 이후, 소위 포스트 역사의 시대라는 오늘의 세계를 사는 현대인에 내재된 인간관으로 정크 푸드와 오락에 둘러싸여 정치도 예술도 필요로 하지 않고 쉼 없이 제공되는 신상품이 주는 쾌락에 자족하는 소비자라는 인간의 동물화를 설명한다. 이와 대척으로 인간의 당위를 설명하는 인물들로 슈미트와 아렌트가 각각 내세운 인간의 조건을 살펴본다. 슈미트는 정치적 인간을 친구와 적으로 이항 대립관계로 바라보았으며, 이는 헤겔의 인간관을 계승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사람은 국가에 속해 국민이 되었을 때 비로소 특수성과 보편성을 통합하는 정신사적 존재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 성숙은 공동체에 속할 때 타자와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성숙과 미성숙이라는 구별이 있고, 곧 배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칸트의 영구평화론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또한 타자에 대한 관용은 중요하나 그 관용의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태도도 성숙해야 한다는 타자론을 주장했기에 나와 너라는 포함과 배제의 명료한 구별짓기와 다른 것이 아니다. 아렌트 역시 인간의 조건에서 행위자의 고유성이 사라진 노동으로 인간의 활동이 대체됨으로써 활동의 본질인 공공의식, 타자를 상실한 인간으로 현대인을 바라본다. 우익의 슈미트나 좌익의 아렌트 모두 대립의 이데올로기를 말한 듯했지만 이 둘이 궁극에는 놀랍게도 같은 인간관을 말했음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이것이 20세기의 인문학, 오늘의 우리들에 내재한 인간관이다. 문제는 이들의 인간관은 항상 내부와 외부로 분할하는 이항 대립이 해체되지 못했고, 여전히 인간의 삶과 의식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새로운 인간관에 대해서

 

칸트와 헤겔은 정치적 의식이 경제적 의식을 억제하며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 인류의 삶에 옳은 모습이라 했다. 다시 말해 글로벌리즘, 경제적 교류와 욕망의 이동은 억압되어야 하는 것(물론 조건적으로 관용을 내세우긴 했지만 말이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시민의 욕망이 국경을 넘어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저자는 이 지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동물적 욕망이 들끓는 탈정치화된 지구화의 욕망과 사유의 장소, 성숙한 인간의 공동체인 국가로서의 내셔널리즘이 반목하는 두 이질적인 원리가 공존하는 갈등의 세계로 이해하고 있다.

 

이를 ‘2층 구조의 시대라 부른다. 인간의 층과 인간 아닌 것의 층, 두 층이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세계로서. 인간으로서 독립성을 잃고 하나로 연결된 신체위에 다른 얼굴만 있는 기이한 신체를 지닌 존재로서, 욕망은 연결되어 있으나 사고는 분리된 시대로 말이다. 자유지상주의는 헤겔과 슈미트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이는 대단히 모순적인 것이 하나의 신체 속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이라는 내 편과 네 편을 갈라치기하며, 동물적 욕망의 소비자가 하나의 몸체를 이룬 괴물로서 자유지상주의를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모순적 기형아들의 평행적 갈등과 적대를 통합하려는 사유를 아즈마 히로키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안토니오 네그리제국을 통해 다중이라는 새로운 인간관을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네그리가 다중의 활동을 직접 주권과 접목시킬 메커니즘을 고작 에테르라는 신비로운 요인에 맡겨버렸다고 비판한다. 아름답지만 아무런 전략도 없는 낭만주의적 타령에 불과하다고. 그러면서 비판 계승한다. 우편적 다중!’, 우편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다중이다. 배달의 실패라는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함축한 어떤 물건의 지정한 곳을 향한 배달시스템으로서의 의미를 통해 연대없이 소통하고 사적인 욕망에서 공적인 공간을 연결,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상정하는 것이다.

 

오늘, 현대인을 통찰하는 저자의 시선은 신선하고 다각적이다. 정보산업이라는 새로운 프론티어로서 자본주의 플랫폼을 바라보는데,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의 정치적 함의를 읽어내고, 이것이 인간 주체를 분열시키는 현대 사회의 본질임을 지적한다. 인간이 가상공간으로 분신(分身; 아바타)이 되어 들어가서 가상의 공간에 독을 쏟아낸다. 그리곤 섬뜩한 존재가 되어 본인에게 달라붙고 소통의 본질까지 변질 시켜 혐오와 가짜가 일상의 경험이 되는 것을 통제하지 못한다. 오늘의 정보사회의 주체는 이처럼 섬뜩함에 둘러싸인 주체라는 것이다. 새롭게 이중화된 현대적 주체인 오늘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하겠는가?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 개인과 사회의 연결 - 상상적 가족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에 대한 역설적 독해는 왜 관광객을 사유해야 하는지를 발견케 한다. 인간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현실에서 사회를 만든다. 달리 말해 누구도 공공성 따위를 갖고 싶지 않지만 누구나 공공성을 갖는다.” 루소의 이 역설은 모든 인문학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식이다. 이는 관광객은 사회 따위를 만들 생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만들고 마는 존재라는 저자의 이해를 관통한다.

 

항상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갈등이, 오가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관계의 악화가 억제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성숙과도 무관하며 외교적 의지와도 무관하게 단지 관광객 자신의 이기심과 여행업자의 상업정신에 이끌려 오가는 것, 이것이 당사자들의 평화조건이 되는 것이다. 관광객의 일반의지, 우편적 연대라는 우연적 소통이 빚어내는 평화와 약한 연결의 모습이다.

 

아마 저자가 인유(引喩)하는 도스토엡스키의 작품을 통한 상상적 가족, 일종의 의사(擬似)가족(결사)을 새로운 인간관과 인간사회로 그리고 있는 것은 이 분열된 인간 정신을 연결하고 연대를 사고하는 출발지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 어떤 사회를 꿈꾸는지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상상력, 반성적 사유(성찰)를 하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사회를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없을 것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속 화자는 세계의 위선을 끊임없이 지적하며 자기 학대의 쾌락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마조히스트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악령의 지시를 내리지만 정작 혁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사람들의 욕망을 조정하는 테러리스트 스타브로긴은 자기가 없는 전형적인 사디스트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기를 뛰어넘는 세계의 필연밖에 없는 텅 빈 자아의 존재들이다. 그들에겐 타자가 없다.

 

이것은 지금의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에 타자 원리가 없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오늘의 세계에는 타자에게 관용을 지탱할 철학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문자그대로의 관광객이 되자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의 본질을 우리의 인식적 주체로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미완의 작품으로 남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엡스키가 완결로서 속편를 말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제시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알료샤 만세를 외치는 어린 콜랴의 외침이 상징하는 것이다. 이들의 가족으로서의 결합, 그 우연성과 확장성을 내재한 우편적 연대, 관광객인 가족, 아이들로 둘러싸인 불능적 주체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신들의 정체성을 돌아보아야 한다. 가족의 이념성과 그 가능성을 철학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저자의 제언은 기나긴 근대의 인간관을 해체하고 새로운 인간과 사회는 어떠해야 할지를 숙고하게 한다. 물론 이 저작의 주장에 모두 동의 할 수 없는 지점도 있을 것이다. 아렌트, 네그리의 비판이나, 헤겔 철학에 대한 시선은 많은 반박 가능한 여지를 지니고 있다. 또한 주체에 대한 이원화를 통합하려는 철학적 야망이 저자가 처음 시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즈마 히로키의 인류 연대와 평화를 향한 사상적 연결의 시도는 탁월한 지적 성찰과 탐구의 노력이 배어있는 역작임을 폄하할 수 없다. 인간사회는 어쩌면 들뢰즈의 지적처럼 두 개의 상이한 권력체제를 항시적으로 생성하는 불평등의 체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불평등의 체계를 당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저 방치한다면 극단적 불평등의 세계로 이행되고 말 것이며, 그것은 곧 인류 자멸의 길일지도 모른다. 난삽한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며, 익히 잘 알려진 문학 작품들을 통해 독자 대중에게 함께 사유할 것을 제안하듯이 친근한 글로 쓰인 노작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사람들의 생각에는 명령이란 것에 대해 어떤 숙명적인 굴종의 정신이 보입니다.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수행하는 행위자는 그 명령의 선악과 관련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떠한 관련성도 없는 별개의 사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수행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러한 텅 빈 자아, 진정한 사유가 불가능한 이들의 개념 없음과 망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한국사회에는 이와 관련한 아주 뚜렷한 오래되지 않은 사례가 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그의 심복인 장세동은 이를테면 명령자와 수행자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수없는 증인들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행을 결코 자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한나 아렌트가 전범 재판에서 나치의 유태인 처형 운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태도로부터 발견한 것, 즉 명령 수행자가 지니는 인간 실존성을 결여한 사유의 전적인 부재, 즉 사유의 진정한 불가능성의 지대인 악의 평범성과 동일한 선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어떠한 죄책감도 없으며, 단지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나는 유태인을 저주하는 사악하고 악의 가득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이죠. 자신은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명령과 명령 수행자의 관계에서 그 책임에 대한 짧지만 위대한 기술(記述)이 있습니다. 불가리아 태생의 스페인계 유대인인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인 엘리아스 카네티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이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그랬을 리 없다.’며 자신들이 한 짓의 흔적을 마음속에서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명령 수행자가 자신들의 행동으로부터 이처럼 놀라울 정도로 영향을 받지 않으며, 심지어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후회도 마음속에 새김도 없는 이유입니다. 왜 인간의 마음에 이런 양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명령의 본질 때문이랍니다. 명령은 그 명령을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하는 사람에게 가시를 남깁니다. 이 낯선 이물질인 가시가 마음속에 새겨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낯선 것, 가시로부터 벗어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가시에게 명령이 지닌 죄책감을 떠맡깁니다. 즉 자신이 아니라 가시에게 명령이 지닌 불의나 부당함을 넘기는 것이지요, 결국 가시야말로 진짜 범죄 행위자가 되는 것입니다. 카네티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낯설고 이질적인 명령일수록 죄책감은 자아와 분리, 더욱 독자적인 된 가시의 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이죠. 이렇게 죄의식과 자아가 분리되어 있기에 악으로서의 명령을 수행한 자들은 한결같이 행위와 자신을 일체화 시키지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명령에 따라 행동했던 사람들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공동생활을 하는 인간들에게 심히 위험한 요소입니다.

 

인간에게는 진정 부당하거나 불의한 명령과 대결하고 그 횡포를 뿌리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일까요? 단지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것일까요? 아마 어느 누구도 이처럼 명령의 무조건적 수행만 하게 된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공포와 죽음만이 휩쓰는 독재 권력이 지배하는 지옥 아니겠어요?

 

한국 작가 천운영생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문경관 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요. 이 자는 권력의 시녀가 되어 대공수사기관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고문기술을 발휘하여 민주투쟁을 하는 학생들, 노동자들을 짐승처럼 다루는 독보적인 백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 자는 대통령과 국가의 안위를 위한 충성스런 명령 수행자였을 뿐이라며 자신은 정의를 수호한 일꾼이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무고한 청년, 시민들을 무심하고 죄의식 없이 고문, 살해하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위에 대해서는 끔찍한 인간인 것이죠.  고문기술자 이라는 인간은 카네티가 말하는 가시에 죄의식을 저당 잡힌 것이죠. 아마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인간의 무의식적 처분이었을 거예요.

 

그들은 모두 똑같은 목소리로 항변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조직에서 시키는 일, 권력이 명령한 일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설혹 불의이고 위법이며 반인륜적일지언정 그런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알려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아니 그러한 구분에 대한 인식조차 이 사회는 요구치 않았고, 권력을 향해 달려가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이 사회 아니었느냐고 말입니다.

 

아이히만도, 고문기술자 안도, 장세동도, 이들 모두 그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친절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명령권자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수행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핍박하며 심지어 죽음에 내몰기까지 했습니다.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범죄행위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천운영의 소설에서 명령의 맹목적 수행자는 천박하기는 하지만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닙니다. 아이히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사유하는 인간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타인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오히려 두 번째일 만큼 사유의 진정한 불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명령은 결코 숙명이 아닙니다. 결코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인간을 명령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저항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령이 주어졌으니 안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더구나 자신의 삶의 지속성을 위해 이행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는 이 세상을 결코 지탱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지금의 한국사회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처럼 인식될지 모르겠지만 당대의 많은 젊은이들과 노동자 시민들의 피와 죽음이라는 명령의 거부, 저항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굴종을 요구하는 명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시는 한 번 슬쩍 치면 떨어져 나가는 그러한 것이 되는 명령이 되어야 합니다. ‘()과 사고(思考)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결코 반박될 수 없는 진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맹목적 추종은 모든 것을 퇴행시키는 전조가 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22-07-06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중과 권력이 새단장해서 나왔군요!

필리아 2022-07-06 09:48   좋아요 0 | URL
지금 판매되는 책이 2010.10 개정판이네요. 훌륭한 저작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