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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질주 ㅣ 안전가옥 쇼-트 17
강민영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2월
평점 :
이 작품은 분명 재난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그럼에도 재난을 마주한 사람의 다급함이나 위기의식이 흔한 호들갑스러움이나 산만한 목소리로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지극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나지막하게 진정된 음성을 듣는 것 같아 내 마음상태에 맞춘 독서가 될 수 있었다. 내분비선 교란으로 인해 수술과 입원 등 한 달간에 걸친 치료로 연말과 새 해를 병원에서 비몽사몽 보낸 후 퇴원한 지 며칠 만의 첫 독서로 선택한 작품이었기에 아마 교감이 더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배경은 기후온난화의 영향으로 장기간 지속되는 호우로 사람들의 옥외 활동이 중단된 음울한 시절이 계속되는 세계다. 바다 수영에서 타고났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인 ‘허 진’이란 인물은 비(雨)로 인해 불가능하게 된 수영의 욕구를 위해 해수를 끌어들여 만든 옥내 최대 규모의 스포츠 센터인 송도 트라이센터를 찾는다. 한편 달리기 분야의 아마추어 스타인 ‘김 설’ 또한 거대한 육상 트랙을 갖춘 트라이센터에서 호우로 중단된 욕구를 해소한다.
두 사람은 저마다 성장기에 마주했던 아픈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바닷가의 삶이 싫어 바다를 등지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달리던 소녀는 SNS에서 유명 아마추어 스포츠 인이 되고, 병약한 체질과 달리기에 재능이 없던 한 소녀는 수영을 배우며 바다 수영 분야의 독보적인 스포츠 인이 된다. ‘진’은 달리기 유명인사인 ‘설’의 화려한 삶의 면모에 까닭없는 불신과 시기심을 거두지 못한다.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가 그네들의 발길을 동일한 장소로 이끈다.
국제 규모의 50미터 레인을 방해없이 유영하던 ‘진’은 지하 5층 수영장의 모든 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흙물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수영장 아래로 고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이미 모두 사라지고, 이상을 감지한 진은 지하 4층으로 올라가는 이미 작동이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발견하고 이를 오른다. 지하4층 육상 트랙을 달리던 ‘설’은 무언가가 부서져 내리는 듯한 엄청난 소리를 듣고 사위를 살피다 에스컬레이터를 경황없이 맨 발로 오르는 진을 발견한다.
마주하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사람들의 만남이 주는 경계와 몰이해의 기운이 맴돈다. 그러나 감지된 위기의식은 두 사람의 동행을 불가피하게 한다. 지하 5층에 고이던 흙탕물이 지하 4층 트랙에도 고이기 시작한다. 차오르는 물을 본 설은 주저앉아 꼼짝하지 못한다.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물의 두려움이 덮친 것이다. 점점 차오르는 물, 다급한 상황을 일깨우며 진은 설을 채근하고 이윽고 설은 자신의 걸음을 내딛는다. 지하 3층으로 오른 이들은 널브러진 자전거들과 집기로 온통 흐트러진 장애물로 가득한 공간에 맞닥뜨린다.
달리기에 젬병인 진은 쓰러진 자전거를 피해 달리다 그만 넘어지고 만다. 설은 진이 비상계단 입구에 도달하기 쉽게 하기위해 자전거들을 치우며 진의 이동을 돕는다. 작은 순간들로 이루어진 사람에 대한 이해, 이 순간들의 경험이 쌓이며 두 사람은 재난을 돌파하는 연대(連帶)자가 된다. 그것은 그네들이 마주하는 사태에서 보이는 가치관의 차이들이며, 이것들과 갈등하는 가운데 그 이해의 관용이 확장된다.
동물이 긁는 소리, 혼란의 와중에 그 소리를 찾아 긴박한 탈출의 순간에 사라져 버린 설, 핸드폰을 지니고 있지 않아 모든 전기불이 사라진 어둠의 공간으로 향한 설에 대한 걱정으로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 잔량에도 불구하고 핸드폰 불빛을 비추며 설을 돕는 진은 한 마리의 개를 구출한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위기의 순간에, 개를 데리고 가겠다는 설의 주장에 진은 당혹감을 느낀다.
소설은 이처럼 거대한 스포츠센터의 지하층에 차오르는 흙탕물과 붕괴의 위험을 피해 지상층으로 탈출하는 두 사람의 연대의 순간들을 축으로 하고 있지만, 이들이 각자 달리기와 수영의 아마추어 유명인이 되도록 한 성장기의 일화와 위기에 봉착한 인간들의 모습을 오가며 인간들의 이기심과 무례함, 그 몰이해를 엿보게도 한다.
목 줄 풀린 개의 자유로운 뛰어 놈과 자신의 발걸음에만 관심이 있을 뿐, 개를 피하다 넘어져 다친 사람에게 죄송하다는 말은커녕 심드렁한 눈빛을 보내는 개 보호자의 그 무례함과 무관심의 무지, 매번 시민을 볼모로 하는 반복되는 공공시설의 하수시설 부재, 부실공사 및 필수 설비 미비라는 그치지 않는 권력의 무책임과 오만방자함 등 타자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의 지대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그 몰지각을 인간 세상의 배경처럼 들춰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개인들은 그나마 서로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 갈 줄 안다. 지상으로 탈출에 성공하고 일상에 돌아 온 두 사람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자기 말을 한다. “전달하기 힘든 기억들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서로뿐임을 깨달았다.”고. 아마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이해가 가능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순간”을 말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 그것일 것이다. 눈살 찌푸리게 하는 인재(人災)가 빚어내는 현장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따뜻한 시선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해의 순간순간들을 지켜보는 즐거움, 그 이해하려는 관용의 앎을 알아가는 기쁨이 주는 마법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