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맡의 사유 - 초심자도 알기 쉬운 현상학 개념 읽기
심귀연 지음 / 경상국립대학교출판부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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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늦게 객체지향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인간의 주체 독점적 권리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지금은 존재론적 실재론과 객체지향의 사고에 깊숙이 빠져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평평한 관계가 이 우주의 진실이며 본질이라고 말이다. 때문에 이들의 사유를 읽다보면 그 뿌리인 현상학이 빈번하게 언급되고, 특히, 메를로-퐁티의 몸지각과 몸틀을 토대로 한 세계 내 관계에 대한 이해의 아쉬움이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인데, 물론 지극히 입문적 개괄서이기에 마음에 남아있는 과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그래서 내 읽기의 연속성을 위해 심귀연 교수의 두 책을 선택했다. 내 머리맡의 사유는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몸과 살의 철학자 메를로-퐁티이다. 지각의 현상학을 읽기에서 배제한 이유는 학문적 접근의 야망같은 것은 애초에 없기 때문이고, 심귀연 교수의 두 책의 안내면 미진한 궁금증 해소에 족하리라는 생각에서이다.

 

레비 R. 브라이언트와 그레이엄 하먼, 그리고 티모시 모턴이 바로 이 책으로 이끈 객체이론과 존재론 또는 사변적 실재론의 나만의 주인공들이다. 아마도 주체 없는 객체를 향한브라이언트의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2011는 내게 그 직접적 영향을 끼친 사유일 것이다. 레비 교수가 제기했듯, 인간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은 것에 관한 주장을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에 관한 주장으로 전환하는 특이한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적처럼 존재에 대한 데카르트의 근대철학 이래 현대인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존재자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들에 위계를 부여하려는 이 끈질기고 혐오스러운 망상은 이제 더는 이 세계를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위기에 처해있는 것 같다.

 

무수하게 인간과 사물, 동물의 관계를 재배치하고, 대상화 한 결과 기후온난화에서부터 심각한 경제적 문화적 양극화의 극단적 가속현상, 재화에 대한 헤게모니 쟁탈로 인한 적대화와 핵 전쟁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주체의 자리를 차지한 이성과 합리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 인식은 그 신뢰의 근거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세계 우주에 대한 인식에 있어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대철학은 인간 보편적 특성인 이성적 능력으로 대상의 객관성을 파악하고 타자 문제를 증명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러나 이 근대적 기획은 스스로를 합리적 이성이라는 지식의 원천인 주관성의 영역에 가둠으로써 철저하게 실패한 것 같다.

 


1. 현상학자들과 현상의 정의

 

나는 후설의 의식현상학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만 근대철학이 인식론에 빠져 이분법적 주체와 객체 구도에 의해 지각활동의 객관성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음을 지적하고, 기존의 모든 인식론적 편견이나 관념에서 벗어나 사물 자체를 직관하기 위한 현상 자체의 집중으로 전환적 사고의 틀을 마련했다는 측면의 이해로 족할 것이다. (내 머리맡의 사유)은 주요 현상학 학자인 후설과 하이데거, 샤르트르, 메를로-퐁티, 네 철학자의 각기 다른 현상학의 차이를 소개하고, 현상학의 기술에 등장하는 개념어 스물아홉가지를 의미의 관계성을 가지며 설명하고 있다. 우선 내 입장은 존재론적 실재론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오늘의 우리들을 사로잡는 것은 인식론 우위의 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은 존재론적 철학의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인식론자들은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파악하기 위해 인식이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여기에는 인간중심적 오만이 깃들어있다고 여겨진다. 인간인 자신들의 인식 판단에 의해 대상이 존재한다고 말하니 말이다. 그러나 돌, 나무, 이산화탄소는 인간의 인식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미 거기 있다. 즉 돌은 돌대로, 나무는 나무 그자체로 있다. 현상학은 있음 그 자체인 현상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존재론적 차원에서 사물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기 시현(示現),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는 바로 그것이 곧 실재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그런데, 하이데거 또한 알리는 것 자체이지만 근원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이 현상이라 정의하며, 마치 실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현상의 결여적 변양(變樣)’이라고 말한다. 즉 현상이란 자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존재자의 존재, 혹은 존재의 모든 변양이나 파생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현상의 배후나 이면에 어떤 다른 본질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샤르트르는 이러한 주장을 거부한다. 나타남(현상)이란 수많은 나타남의 모든 연쇄를 가리키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의 전 존재를 독차지하는 그런 숨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샤르트르의 비판에 동조하며, 배후의 어떤 존재를 상정하지 않은 현상(나타남) 그 자체로 확실성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은 바로 이 나타나는 것, 바로 그것일 뿐이며, 나타남의 무한 연쇄에 의해 발견된다고. 아마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가장 명료한 선언의 문장이 되리라.

 

드러난 자신이 곧 본질 자체다. 중요한 것은 나타남의 존재는 존재의 

나타남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실존 자체다.’”

 - Jean-Paul Sartre, 존재와 무

 

메를로-퐁티는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파고든다. 후설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라는 자유로운 변경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본질을 파악하려 했으며, 하이데거는 본질은 현상의 이면에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현상은 현상의 장에서 드러난다고, 중요한 것은 상황이며, 상황 속에 드러나는 것은 사물 자체이며, 이것이 곧 현상이다. 라고 말했다. 배후에 이면이란 것은 애초에 없으며, 현상은 상황 속에 드러날 뿐이라는 것이다. 현상적 장()’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비록 존재론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레비 R. 브라이언트의 비판처럼 하이데거의 존재론 부활의 시도는 그 의미를 철저히 변화시킴으로써 이루어졌을 따름이며, 존재에 대한 현존재, 인간의 접근에 관한 심문으로서 현존재에-대한-존재에 대한 탐구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의 존재 자체 탐구는 인간에-대한-존재탐구가 되어버림으로써 인간 비인간 구분도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읽을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존재론적 실재론에 가장 근접한 현상에 대한 접근은 단연 메를로-퐁티의 것이다. 이 책의 독서 동기가 현상학과 현상의 거친 개념 및 메를로-퐁티의 일차적 이해였으므로 2개 장으로 구성된 책의 1, 현상학자들의 현상학적 관점이라는 차이를 통한 성찰의 과정에서 이만큼의 수확으로 만족하리라. 2장은 현상학의 스물아홉 가지의 개념설명인데, 이 개념어의 설명 자체가 진행됨에 따라 현상학 이해의 단계적, 상호 연결적 이해의 심화를 돕도록 구성되어 있을뿐더러, 더욱이 해결코자한 내 물음의 개념어들을 중점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지적 해소의 과정이 되기에 충분했다.

 

2. 현상학의 개념어들

 

이 개념어들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과 사물 등 비인간과 서로 얽혀 나타나는 이 세계를 직시하는 데 많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이 세계우주에서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변환해야 하는가를 성찰토록 안내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세계를 마주하고 있는가? 인간이 오만하게 주체의 자리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만물과 현상을 대상화함으로써 질서지우고 통제하려 한 결과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읽어나가면 이들 개념들이 단순한 철학의 전문 용어만으로서의 소용이 아님을 깨우치게 된다. (부분적 감상의 진술로 몇 개의 개념으로만 정리하련다.)

 

2-1. 본질

 

데카르트를 출발로하여 흄과 칸트, 헤겔에 이르는 전통적 철학은 사실의 가능 근거를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설은 구체적이면서 사실적인 주체의 주관성에서 본질은 획득된다고 주장하면서 본질은 체험하는 의식 내용까지 실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질은 판단중지를 통해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냄으로써 획득된다는 것이다. 메를포-퐁티는 존재란 사실 자체임으로 본질이 따로 있지 않다.”, 존재는 인식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미 그 자체로 있는 것을 인식대상으로 삼는 순간 수많은 왜곡이 담기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을테니 말이다. 설명되는 순간 존재는 사실성에 벗어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일 테다.

 

2-2. 지향성, ~에 대한 의식

 

의식은 경험을 통해 순간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고 종합한다.”, 이 말은 대상은 인식 밖에 있지 않고 인식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며, 의식 체험으로 드러나고, 인식과 인식 대상은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을 사유한다가 아니라 ’~을 할 수 있다라며, 전체적 통일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연속체를 이루어 의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몸은 사물의 부름에 표상없이 대응하는 방식이라고 몸이야말로 지각하는 몸이며, 주체-의식의 상관자로서가 아니라 행위하는 몸이며, 지향성이야말로 몸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사고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는 사물 혹은 타인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저자 심귀연 교수는 사랑을 예로 제시하는데, 사랑은 계획도 생각도 아니며,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행위는 느낌을 수반하고 사랑을 함으로써 알려지게 되는 것이라고. 사랑은 관계에 있는 존재들을 사랑이라는 특별한 세계로 이끌어내는 것인데, 몸 없이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겠느냐고, 몸 없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만큼 명료한 묘사는 없으리라.

 

2-3. 지각장(知覺場)

 

근대인식론은 경험에 의존한 지각을 정당화한다. 경험을 객관화하기 위해 대상을 적정 거리에 두고 고정시켜 변화를 제거한 채 인식한다. 이때 대상은 수동적 존재로 격하되고, 그럼으로써 타자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게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것이 인식론의 근본문제이다. 경험할 수 없는 타자를 안다고 하지만 그것의 타당성을 확증할 길이 없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객관성을 담보하는 이러한 순수 인상이란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단지 있다면 지각의 상황, 지각장(知覺場)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각이란 개별적이고 순수한 감각들의 연합이 아니라 온몸 지각이기에 공감각적이며,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모든 상황 속에 드러남으로써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각은 이성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고, 몸인 지각이 세계에 감정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라고 한다. 만지고 더듬고 살펴보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지, 결단코 이성 판단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지각은 교접 작용이자 짝짓기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2-4. 몸주체

 

메를로-퐁티에게 몸은 대상도 객체도 아니다. 생리적 기계도 아니며, 인과율에 지배받는 물리적 몸도 아니다. 더구나 이성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되는 몸도 아니다. 몸은 지각하기도 하며 지각되기도 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대상이다. 몸은 주체의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두 손을 맞잡아보라) 이로써 그 오랜 세월 배제되었던 존재 권리를 회복한다. 여기에 오늘의 신유물론적 사고의 토대인 객체지향 철학의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몸들은 관계 속에서 세계를 열어간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몸을 객관화하고 밀어내는 순간 우리 몸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완전한 인간이 자신들의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애라는 정상과 비정상 구분의 말처럼 망상이 출현한다.

 

몸틀(신체도식) 151쪽에서


2-5. 몸틀 (1)

 

어떤 몸들이건 그 자체로 고유성을 가진다. 몸의 상태가 어떻게 달라진다 해도 나는 몸인 나이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의 달라진 나는 동일한 대상으로서의 영속성을 가진다. 설혹 팔이나 다리가 잘려나가도 나의 동일성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습관에 의해 형성된 몸틀때문이라고 한다. 환지통, 시각장애인 등의 예시를 통해 역동적으로 변화가 가능한 몸틀을 확인하게 된다. 개조되고 확장되는 몸틀과 반복에 의해 습관이 됨으로써 드러나는, 스스로 공간성을 확보해가는 몸틀의 변신을 쫓는 우리의 눈길은 세계를 새로운 차원에서 인지하게 될 것이다. 김초엽이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에 대한 바로 그 출발 사유이다.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만나 어색해 할 때 우리는 낯선 세계라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식론의 세계에 고착된 사고는 그 낯선 세계의 이질감으로 곧 배제하고 장벽을 쌓아 올린다. 익숙한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면 진정 관계 맺음을 통해 새로운 몸틀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내면의 시간을 참지 못한다. 줄곧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라는 근대 인식론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명의 예로 소개되는 지팡이 이야기를 짧게 옮겨 읽어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시각 장애인의 지팡이는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부딪치고 넘어지기 일쑤다. 그렇다고 지팡이를 내팽겨쳐 버리면 영영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러나 계속 사용하다보면 어느 순간 땅과 지팡이 끝의 위치가 가늠되고 자연스레 지팡이는 팔의 감각을 이어받는다. 물론 지팡이에 인간 몸이라는 다른 몸이 생긴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몸틀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인간 비인간이 서로 얽혀들며 새로운 공간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세계는 지성에 이해 판단되는 그런 세계가 아닌 것이다.”

 

2-6. 몸틀 (2) - 장애와 결핍

 

인간은 몸의 존재이기에 결코 완전하지 못한 결핍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완전을 희구한다. 그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다. 인간에게 몸이 없다면 장애란 애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완벽한 몸을 꿈꾸며 정상적 몸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바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도식으로 장애를 만들어 정상이 아닌 존재를 장애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존재론적 결핍을 전가하면서 결핍의 상태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결국 장애란 관계에서 겪는 트러블이라는 말이다. 장애는 몸의 속성이지 결핍이 아닌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들이 정치사회 곳곳에서 차별의 시선을 던지며, 배제를 당연시하려 한다. 우리 모두는 몸의 존재자들이다. 그 몸은 다양하고 고유한 것이다. 본디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인 것이다. 장애란 이 세계에 없다는 진술이 진실이란 말이다.

 

2-7. 조건 지어진 자유

 

자유란 구속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몸인 인간에게 구속없는 자유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불가피한 대자존재(對者存在)이기도 하다. 다만 이때 누구와 어떻게 관계 맺는가는 절대적 주체의 선택의지에 달려있다. 따라서 몸인 인간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구속되는 존재이다.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말한다면 그것은 조건 지어진 자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신과 영혼을 말하는 자들은 정신의 자유, 영혼의 자유를 말하지만, 몸적 존재인 인간에게 그런 자유로운 영혼 따위는 없다.

 

몸인 나는 상황 속의 나이다. 몸인 수많은 존재들이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 상황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는 상황 속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말이며, 이 참여의 힘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건 없이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얼빠진 한 인물은 자신만의 자유에 빠져 말마다 자유 타령을 한다. 그 자유는 국민이 요구하는 책임의 조건을 못견뎌한다.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자유란 조건 지어진 자유임을 알지 못하는 우매함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들을 변신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자유이며 이 자유를 조건 지어진 자유라 말한다. 상황과 책임을 부정하는 자유를 외치는 것은 망상이외의 것이 아니다.

 

3. 맺는 말

 

이 책은 현상학 공부를 시작하는 입문자를 위한 개념 안내서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책은 현상학의 의미와 윤곽을 잡는 디딤돌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꼭 필요한 현상학과 존재론에 대한 개념들을 마음에 각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오늘의 현대철학들은 주체를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인간중심적 사고인 인식론적 틀에 근거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너무 많은 공허와 왜곡을 가져온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객체지향의 철학, 존재론적 실재론과 같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동등한 존재로 파악함으로써만 이 세계가 가능하리라는 사유가 그 토대의 철학으로 길을 이끌었다. 아마 이것도 이 책 스스로 그 자체를 드러낸 현상일 것이다. 내 몸지각과 서로 얽혀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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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처럼 생각하기 (아트 힐링 에디션) - 소진되고 지친 삶을 위한 고요함의 기술
제이 셰티 지음, 이지연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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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있는 자는 쾌락이 아닌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712)에서 말했다. 아마도 고통은 침해받는 의지를 억제해야 하는 적극성의 상태이기에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쾌락이나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재앙에서 멀리 피하는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것이다. 볼테르 또한 행복은 꿈에 불과하지만, 고통은 현실이다.”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삶의 결실이란 재앙을 무사히 넘긴 것에 따라 작성되는 것이긴 한 모양이다. 이러한 선배 사상가들의 얘기는 인생이란 향락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고 처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니 어쨌든 우리는 세상을 헤쳐 나갈 방도를 모색하고 견뎌내야 하는 것일 게다.

 

이처럼 세상 속에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님을 철저하게 알게 된 것은 아마 갓 스물 무렵 대학생활이 시작되던 즈음이었던 것 같다. 물론 세상의 혹독함에 대한 뼈저린 각성의 시기는 사람에 따라 매우 이르기도 하고 늦기도 할 것이다. 유혹을 참고, 비난을 삼가야 하고, 고통과 불안을 견디며, 자존심을 잠재운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우쳤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의지와는 달리 세상은 흘러간다는 소심한 좌절감과 불안의 심리였을 것이다. 이제 반백년 이상을 살며 나름대로 나와 세상의 타협에 대한 마음이나 관계의 기술에 작은 지혜를 지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사물과 타인, 세상에 초연해지기 어려워하며, 나도 모르게 불필요한 자존심을 자제하지 못하기도 하고, 수시로 목적을 잃고 방황하며, 마음의 평화를 놓치기도 한다.

 

또한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에 시간을 빼앗기고는 정작 해야 할 일이나 하고자 하는 일은 등한시하고는 무언가 삶의 도달해야 할 목표로 나아가지 못하는 데 전전긍긍하며 근심으로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런데 살아가는 지혜에서 무언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즉 고통을 이겨내고 처리하는 기술에 있어서 무언가 놓치고 있거나 알지 못해 주변부만 빙빙 돌고 있다는 생각이 밀려들었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에 도달하는 길의 지혜를 들려주겠다는 저자의 들어가는 말은 분명 내게 맞춤의 필요처럼 다가왔다.

 

이 책은 수도자의 금욕과 묵언, 초연함과 무소유 등 세속적 삶과 격리된 삶을 위한 생각이 아니다. 'like a monk'라는 표현처럼 처럼에 방점인 찍힌, 수도승들의 의식적 행위에 깃든 의미들을 통해 온갖 미심쩍은 것들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행복의 허상을 쫓는 데 정신이 팔려 정작 자신을 잃고 좌절과 불만족, 불행의 고통으로 이지러진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찾아내는 길을 안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책은 우선 라고 인식하는 내가 누구인지, 그 실체를 깨닫는 길로 안내하고, 그러한 나의 마음이 수시로 오염되는 부정적 생각, 두려움이 대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이렇게 알지 못하던 내적, 외적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들로 초대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와 볼테르의 깨우침처럼 고통을 어떻게 인식하고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고, 그를 통해 궁극에 도달할 삶의 지평으로서 봉사와 사랑하는 마음에 이른 자아의 평온과 초연함, 충만한 만족감에 이르는 길이다.

 

이러한 와 나를 둘러싼 이 세계 실체의 직시를 토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발견하고 타고난 성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에 이르는 길과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어떻게 의식적인 내 마음에 열정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겸손과 자존감의 존재로 거듭 출발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곤 나와 공동체의 가치 있는 삶의 행위로서 봉사의 마음가짐, 사랑과 신뢰를 가르쳐 준다. 이렇게 책의 구성을 내 미련한 글로 쓰고 보니 그야말로 평이하고 새로울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 세부의 가르침들은 새로운 인식경험들로 가득해서, 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그 앎을 삶의 행위로 옮겨오지 못했던 그 공백의 지혜를 메워준다. 내 인식을 깨어냈던 문장들의 페이지에 붙인 스티키 북마크들로 책이 가득 채워졌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정말 나인 것인가? 이 물음이 이젠 더 이상 낯설지 않을 만큼 나는 소위 거울 자아(Looking-Glass Self)'라는 “’남들이 생각하는 나라고 내가 생각하는 존재를 실제의 나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이러한 두 번 반사된 이미지를 나로 인식하지 않으리라는 지성의 존재라 자부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행위 했던가? 자신이 없다. 어쩌면 인식하지 못하고 이 반사된 이미지를 이용해 내 인생의 여러 선택을 해왔던 것은 아닌가라는 물음에 나는 그만 혼란스러워졌다. 진짜 나를 잃어버리고 다른 누군가의 이미지에 등장하는 왜곡된 이미지를 쫓았다면 애초에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조차 몰랐다는 말이 된다. 아마 지각의 지각 속에서 정작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세상이 정해놓은 의미의 정의를 쫓으며 그것이 내가 추구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말일 게다.

 

사실 우리들은 사회가 제시하는 온갖 성공의 모형에 휘둘리며, 그렇게 사회가 정의한 행복한 삶을, 삶의 진실한 목적인양 따른다. 결국 내 타고난 성향과 고유한 재능은 오간데 없고, 오직 문화와 미디어가, 부모와 타인의 시선이 성공과 업적의 모범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에 현혹되어 저런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저런 일을 행해야 한다고 쫓아대다 보니 그 간극으로 좌절과 불만족, 불행의 고통으로 우울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테다. 수도자처럼 생각하기는 이 지점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찾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기존의 익숙한 사회 문화적 체제에 도전하고, 초연해지고, 나를 재발견하고,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절도를 가지고 봉사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붙들고 있는 외부의 영향력과 내적 장애물, 여러 두려움을 벗어던지려면 수도자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텐데, 어떻게 가져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찾아내고, 그런 나의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삶을 재편할 수 있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사물의 뿌리를 찾고 저 깊숙한 곳까지 자신을 점검하기 위해 호기심과 사색, 노력, 깨달음에 이르는 세세한 방법론이 그 길을 환히 비추어준다. 상황과 장소마다 연기했던 나의 수많은 페르소나들, 이 많은 배역들이 진짜 나를 보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결국 덕지덕지 쌓인 층을 제아무리 잘 소화해도 불만족과 우울, 불안감, 불행으로 나를 일그러뜨렸을 것이다. 자각이 시작이다. 먼지 낀 거울에서 먼지를 걷어내 가려진 진실, 진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직시하는 것이다.

 

정신 이상이란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면서 결과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책은 보석 같은 나의 직시와 자각에 이르는 길에 빛을 비추어주는 문장들이 빼곡하다. 그리고 삶의 장애와 근심 등 고통을 주는 온갖 두려움에 마주하고 그 두려움의 뿌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삶의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방법들도 상황과 장소에 따라 세심하게 안내되고 있다.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이란 적극적으로 자신을 새롭게 프로그래밍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생각이란 마음속에서 되풀이되면서 믿음을 강화하기에 편집해야 할 의식은 결코 깨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변화의 노력을 시도하지 않은 채 다른 결과를 맞이하기를 바란다. 아마 부풀려진 자존심, 타인으로부터의 존경을 욕망하는 비대해진 자아 탓일 것이다. 늘 이런 식으로 해왔어”, “이미 알고 있어.”와 같은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으로 그 무엇도 자기 안으로 넘어들어 올 수 없는 장벽으로 막아놓았으니 잠재된 배움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나는 이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전혀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저자 제이 셰티는 이 진부해 보이기조차한 진리를 신체 깊숙이 각성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사색의 경로 곳곳에 이정표를 세워놓고 벗어나지 않도록 이끌어준.

 

특히 목적을 잃고 방황하며 곧잘 삶의 곤혹스러움에 좌절하곤 하는 내가 두려움이라는 생의 모든 범주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감정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 것은 최고의 수확이라 하겠다. 두려움이란 버겁고, 불안하고, 상처받고, 경쟁하고, 끊임없이 확인받기를 원하는 감정으로, 온갖 감정의 발원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부정적 감정을 회피하기 일쑤다, 아마 이것이 내겐 익숙한 두려움의 처리 방법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더구나 두려움의 고통은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훨씬 크게 느껴지고, 증폭되어 그것에 발목이 잡히기 일쑤다. 상상 속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도망치면 칠수록 그것은 당신 곁에 더 오래 머물 뿐이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을 찾아내어 거기에 가서 살아라.”라고 말한다. 그래야 내면의 풍경이 오염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그 뿌리에 있는 상황이나 욕망을 명확히 파악하고 진단할 수 있으며,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되어 그것의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비로소 열린다는 것이다.

 

또 하나, 과연 나는 내가 믿는 어떤 목적을 위해 기꺼이 앞으로 나아간 적이 있었던가 라는 자문에 멈칫거렸는데, 어쩌면 내 의도에 맞춰 살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의 마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거나 명확한 인식을 지닌 목적을 가졌던 적이 진정 내게 있었던가에 대해 회의적인 기분이었다. 정말 당연한 말인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 추진력이 생기지 않았을터이다. 이 책은 분명 내면으로의 여행을 위한 안내 가이드다. 정작 내게 호기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듯하다. 온통 타인의 세계, 외부의 시선에 맞추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나하고 생각게 된다. 마음을 열고 호기심을 유지한다면 나의 타고난 성향과 능력인 다르마(Dharma)’가 스스로 나타날 것이라 조언한다. 나는 나의 다르마를 진정 살펴보았는가에 정직하게 답변할 수가 없다.

 

아무도 나를 완성해 줄 수 없다는 말 또한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그럼에도 실제 나는 이 사회의 온갖 소음에 의존해 살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초연해지기, 있는 그대로의 나를 확인하기 위해 노력해본다. 비록 완벽한 사람이 될 수는 없겠지만, 다른 사람의 진을 빼 놓거나, 평가절하하고, 다름을 이유로 구별하는 존재가 아니라 에너지를 채워주는 겸손하고 베푸는 인간으로서의 자질을 생각한다. 삶은 물론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길을 가면서 그 길에 삶을 데려 갈 수는 있다. 그 길에 도착하기 위해서 나만의 속도로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삶에서 원하는 것에 반응하고 대처하고 헌신하기 위한 맞춤의 조언과 방법들로 가득한 이 저술을 만나게 된 것은 내게 너무도 소중하고 귀한 기회였다고 말 할 수 있겠다. 이 마음과 자기 삶의 설계를 위한 가르침의 책은 한 번 읽고 감동하는 그런 저술이 아니다. 내 삶의 장애와 고통을 마주할 때나, 길을 잃고 헤맬 때면 언제나 그것의 실체를 헤아리고 새롭게 난 길 또한 있음을 알려주는 그런 삶의 반려서(伴侶書)라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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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8-27 11: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려서!
제목으로 봐서는 그럴만해 보입니다.
저도 반려서를 생각해봐야겠네요

필리아 2024-08-27 12:06   좋아요 3 | URL
안다는 생각을 싹 걷어내고 몰입해 읽었답니다.
많은 문장들이 새롭게 다가왔어요. 아마 제가 조금은 더 제 자신을 각성하는
계기가 되어 준 책이라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유고 산문 박경리 산문선
박경리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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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일 병탄에 이르는 조선의 역사,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일제 부역에 나섰던 족속들의 매국의 행보를 다시금 열거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숨어있던 그것들의 종자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 양 기어 나와 대가리를 빳빳이 쳐들고 국민과 국기(國基)를 모욕, 부정하는 사태에 직면하리라고는 결코 예기치 못했다. 박경리선생의 日本散考를 다시금 읽으며, 주구가 되어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종자들에 뿌리내린 그 저열성의 근본을 확인한다. 혹여 나와 우리들이 잊고 있는 역사 인식과 저것들에 도사린 역사 지우기의 반민족적 행태의 근인을 보다 명료하게 정리코자 읽는 것이다.

 

이 책의 주요 산문원고들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저자가 일본의 반성 없는 태도에 편승하여 마치 자신들만은 메타적이고 세계시민의 시선을 가진 듯 가식과 위선들을 떨어대며 일본의 시각에 동조하는 종자들의 양태를 목도하면서, 뚜렷한 역사인식을 토대로 철저한 조사를 거쳐 쓴 글들이다. 아마 선생이 생존해 오늘의 이 꼴을 보신다면 우리 공동체가 비극적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국민대중에 경계의 목적으로 남겨준 일종의 일본 사용 설명서이자, ‘종일(從日) 부역 족속들에 대한 엄중한 자성의 요구서이기도 한 이 통분의 기록 앞에서 우매한 동족들에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셨을 것만 같다.

 

종일부역 종자들은  그 시절(식민지배기간)이 좋았다고, 근대화가 이루어졌고 먹고사는 걱정이 없어졌으며, 일본인이 되어 자랑스러웠다고, 그렇게 종일 종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다고?   “‘천만의 말씀!’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현재 반일(反日)하는 것이며, 역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반일하는 것이며, 오늘과 같은 종일부역자 종자들과 반성없는 일본인이 있기 때문에 반일하는 것이다.”


일제를 위해 부역하고 푼돈을 얻어 쓰며, 그야말로 청풍당상(淸風堂上)에 앉아 나라 팔아먹고 호가호식(豪家好食)하던 양반 족속들, 그리고 그 종자들에게는 일제의 압제가 오히려 그리움이고 아름다운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말한다. 그 푼돈도 이 나라 발전의 밑천이 되었노라고. 일제에 항거하는 민중들을 빨갱이라고 낙인찍어 지배권력이 알아서 처리해주니 동족을 노예처럼 굴리며 주머니를 채우는데 더없이 우아한 환경이었음을 더 말해서 무엇 하랴.

 

이것들이 오늘 광복절을 부정하고, 민족의 고유 영토를 분쟁화하며, 독립 투쟁에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빨갱이라 왜곡하여 테러리스트라 부르기에 이르렀다. 민족의 정신을 깡그리 뒤엎어 한 줌도 되지 않는 더러운 종자무리들이 역사와 국가 정체성을 전복하려 하고 있다. 가히 반역의 무리들이며, 반민족 행위자들이다. 급기야 일본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며 국민을 향해 존재하지도 않는 열등감, 패배의식이라는 단어를 내밀며 국민의 역사정신에 훈계까지 해대기에 이르렀다. 수치심도, 역사 인식도, 민족 정체성도, 그 어느 하나 갖추지 못한 가장 저열한 것들이 뚫린 주둥아리라고 똥 내지르듯 배설하고 있다. 그 악취가 온 나라의 대기를 더럽히고 있다. 감정적으로 들리는가? 그래 감정의 문제를 어찌 배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감정에는 논리적이고 역사적 사실이라는 근거가 있다.

 

박경리 선생의 이 모음 글들은 종일 부역배들이 숭배하는 일본인, 일본의 정신이라는 그 텅 비고 공허한 망상과 이 빈 정신에 들어 찬 잔인성과 왜곡된 죽음의 미화, 역사적 무의식에 켜켜이 쌓인 반도와 대륙에 대한 열등감과 침탈, 섬을 탈출하려는 확장에 대한 야욕의 역사를 관류하며, 한국의 지식인이라 자처하며 종일하는 밀정들에 대한 경고와 민중적 경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 책은 일본과 일본인의 실체에 대한 철저한 통찰을 주요 논제로 하고 있다. 이 통찰을 통해 이들의 밀정 노릇을 하는 이 땅의 종일부역 종자들의 허상과 역사 왜곡, 부정의 망상을 꾸짖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일본의 반성 없음을 비난하는 한국인의 반복되는 요구가 일본인을 피로하게 하고, 그렇게 강제된 반성의 언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일본인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괴이한 말아닌 오물을 쏟아내는 종자까지 고개를 내밀고 있다. 한국인의 의식 깊은 곳의 원한은 열등감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웃기는 개수작이다. 일제에 강점된 식민 36년은 일본에게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해왔다는 사실이며, 때문에 그 원한이 일방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뿐 아니라, 이 증오의 가시는 자연스레 뽑아지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현상은 외려 일본인과 이들 종일 부역자들이 이러한 한국인의 원한과 증오보다 더 극악한 원한을 한국인에게 품고 있는 현상이다.

 

나는 40년 전에 일본의 도쿄에 첫 걸음을 했으며, 그 때 도쿄역 건너편 야에수(八重洲)지구에 있는 마루젠(丸善)서점에 가게 되었었다. 이러한 행태는 업무 차 방문 때마다 하는 나의 루틴이었으며 이는 40여년간 계속되었다. 들어서자 제일 먼저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가장 눈에 띄는 위치에 대규모로 진열된 혐한(嫌韓)서적들이다. 한국과 한국인을 조롱하고 폄훼하며 비난하기 위해 그 많은 종류의 책들이 써지고 있으며,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것은 가히 아연실색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오늘까지 한 치도 변하지 않았다. 튀르키예에 한국 건설업체가 건설한 해양 현수교가 완공되자 일본 공영방송에서는 조만간 붕괴할 것이라는 조롱과 함께 저주를 퍼부었다일본인들의 신체에 켜켜이 쌓여온 질투의 심술궂은 사촌인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고통에서 기쁨을 느끼는 던적스럽기 그지없는 저열함 그것일 것이다. 그리곤 최근 튀르키예 정부가 해당 교량의 수려함과 안전성에 감사의 말을 표시했음이 해외 매스컴을 장식하자 근거 없는 원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집요한 한국에 대한 원한의 근본은 무엇일까? 이는 역사적 열등감과 정복자로서의 오만함의 발로만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저자는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오랜 세월 선험적인 것, 즉 무의식 속에 깊이 박힌 한국이 자신들의 원류임을 부정하는 광적 부인의식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역사의 원류는 어떻게 해석되든 좋다. 이미 터럭만큼도 동질성이 없는 마당에 이것이 무엇이 문제가 될까. 이보다 근저를 차지하고 있는 오늘날 신도(神道)라는 그들의 정신이라는 것의 생명없이 텅 빈 도구화적 속성과 아무런 본질도 없이 기만과 닫힌 정신세계이다. 이들의 건국신화라는 고사기에 기록된 구전의 이야기는 전체가 날조와 삭제, 표절로 미화된 짜깁기임을 입증하고, 후일 한일합방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무수한 땜질로 역사를 수정, 왜곡하였음은 이의가 없는 정설이다.


이들의 창조신화에는 현실의 권력 상속에 관한 실질 문제이외에는 그 어떠한 약속이나 계율, 정신적 메시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만세일계의 위력만이 넘실대며 그것을 신국(神國)이라 포장한다. 정신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단지 기만성만이 가득한 텅 빈 상자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신국이라는 상자에는 어떤 본질 없이 그때그때 써 먹을 수 있는 도구만이 담기고, 사상적 내용이 없어 실체와 본질에 대해 무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더구나 일본인들이 미화하고 자랑하는 자기네 정신의 표본이라 하는 하라키리(切腹)’는 생선 배 갈라 내장 꺼내듯, 복부이기에 절명까지 시간이 걸리고 배 가른 사람의 목을 쳐주는 가이쿠샤라는 존재에 의해 두 번의 죽음을 맞는다.(여기에만 두 개의 피 묻은 칼이 필수가 된다) 이 추악하고 야만적인 자살방법에 일본인들은 비단을 휘감아 치장하고 미화한다. 자기 고통의 하수인이 자기 자신이며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게 하는 잔인무도한 의식일 뿐,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복합된광적 잔혹함이다. 이것을 대단한 죽음의 철학인양 미화된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체념의 타의성만이 넘실댈 뿐이다. 일본인의 의식 속에는 오직 도구성이라는 기회주의적 수단과 민족정신이란 것 없이 공허한 빈 상자만이 있다.

 

그 상자는 항시 남의 것을 베껴 만든 조악함, 그것을 경제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데는 긴요할 것이지만 의식은 야만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귀중한 것인 생명의 지엄함과 창조의 정신이 없다. 텅빈 공허한 정신과 잔인하고 어두운 죽음의 세계, 그 수동성과 무감증만이 있는 일본의 망상을 숭배하며 종일 부역배들의 종자들은 말한다. 삶의 터전을 잃고 국토가 유린당하며 민족이 살육당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던 식민시대를 살았던 우리들이 마땅한 권리 쟁취를 하기 위해 민족주의와 반일사상을 간직하는 것이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떨치지 못한 저열성이라고. 이런 무식한 개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들의 민족주의와 반일 사상은 몇 푼의 물질 피해가 아니라 환산이 불가능한 민족적 정기와 민중의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상처이다. 마치 평등의 세계주의자인 양 한국인의 민족주의와 반일을 조롱 비난하며 이상주의자처럼 지적 허영을 떨어댄다. 강자 편에서, 가해자 편에 서서 양심을 비판하는 것은 피해자의 불이익을 바라보지 않는 외눈박이의 사시(斜視)이며, 허구이자 망상일 뿐이다. 일본인, 일본은 단 한 차례도 진실어린 반성도 사죄를 한 적이 없다, 고작 통분에 공감한다느니, 과거사의 불편이 있었음을 인정한다느니 하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뻔뻔스레 빠져나갈 뿐 아니라 여전히 한국인과 한국의 민족주의와 반일정신을 조롱, 폄훼하며 나아가 한국의 자랑을 자신들의 피해로 간주하며 못 견뎌한다.

 

일본의 극우를 대표하는 독재 정당인 자민당은 도대체 마음의 문제를 외교 레벨에서 사죄로 풀 수 있는 것인가라고 사죄의 무의미성을, 불필요성을 주장한다. 지금 이 땅의 종일 부역배 종자들이 따라 하는 말이 바로 이 터무니없는 말이다. 일본인과 일본은 사죄할 용기조차 없는 족속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또한 그까짓 사죄를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누가 모르겠는가! 방자하고 양심없는 시정잡배나 하는 소리를 일본을 대변해 지껄이는 종일 종자들의 이치에 닿지도 않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언어 오용에 이처럼 시시콜콜 따지고 입증해야 하는 오늘의 상황이 서글픈 생각조차 든다.

 

지금 반일의 대중화와 대중의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해 보인다. 외세와 불의한 매국노들이 판칠 때면 항상 부녀자들과 승려들, 힘없는 백성이 일어나 항쟁했다. 일본을 이웃으로 둔 우리 민족의 불운이었다는 선생의 통찰에 공감한다. 일본이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는 때 우리는 비로소 민족을 떠나 인간으로서 인류로서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식민사관에 물들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전복하려는 종일 부역 종자들이 지금처럼 노골적으로 횡행한 적이 없을 것이다.

 

박경리 선생은 일본인에게 예()를 차리지 말라!”고 했으나, 이를 수정해서 종일 부역배 종자들인 일본의 밀정들과 일본인에게는 예를 차리지 말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한 가지 지적하고 맺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을 선별 편집한 문학평론가 이승윤은 이 문장을 도발적 발언이라 하고 있는데, 이 표현은 심히 불쾌감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를 도발한다는 것인가? 일본을 도발한다고? 종일 부역배들에게 도발적이란 말일 텐데, 그것들에게 도발할 것이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선생이 한국의 동족들인 민중에게 경계삼아 하는 말인데 어떻게 도발이란 말이 가능한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 책은 작금 한국 사회의 어지럽혀진 역사의 부정과 전복 사태를 냉철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줄 터이다. 나도 민족주의와 반일을 내던지고 싶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않으니 너무도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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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view - 지식의 탄생 (Knowing what we know), 사이먼 윈체스터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세계에서 지식이란 인간에게 무엇인가?


[ 8월 29일 출간 예정인 사이먼 윈체스터의

지식의 탄생(Knowing what we know)』에 대한 프리뷰입니다.]



모든 인생의 발자취는 끊임없는 지식의 축적으로 만들어진다.” -10

 

책은 지식의 생성에서 오늘과 같은 지식(knowledge)의 의미로 쓰이게 된 변화과정, 그리고 지식의 전승과 확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이러한 배경 하에 지식의 획득과 기억이 더 이상 인간의 뇌를 필요로 하지 않고 컴퓨터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오늘의 상황에서 지능의 쓸모에 대해 살펴보려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유리 화면에 손끝을 가볍게 터치하는 것만으로 어딘가에 있을 방대한 정보와 지식 더미에 접근하여 필요로 하는 지식을 재가공 또는 생성하여 이용할 수 있는 시대에 도달해 있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인공지능(Chat GPT와 같은)에 의해 자신의 지적 노력없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의 문제 제기처럼 지식의 생성, 분류, 조직, 저장, 확산에 있어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여 지식을 습득하고 대신 생각해준다면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는 정말 기이하고 염려스러운 상황이라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제기를 탐구하기 위해, 지식이란 인간에게 무엇인지, 즉 안다는 것의 의미를 플라톤의 테이아테토스에서 정의한 정당화된 믿음이라는 정의를 기초로 인간의 일관성 없는 다양한 관습과 의례, 종교로부터의 영향 속에서 믿음에 의지했던 지식이 합리성에 의존한 계몽주의에 의해 비로소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검증할 수 있는 확정적 개념으로서의 지식에 이른다. 소위 인식론이라 불리는 지식의 오랜 지배 끝에 이를 제치고 새롭게 대두된 오늘의 지식이론인 DIKW(Data, Information, Knowledge, Wisdom)체계를 토대로 지혜의 발현에 작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요인들이며, 지식 구조와 선행요소인 데이터와 정보의 역할, 그렇게 만들어진 모든 정보로부터 비로소 지식의 생성과 이 지식들을 삶의 유용한 소중한 지식으로 바꿔 놓은 지혜를 설명한다.

 

또한 지식은 어떻게 전달, 전파, 확산되어 사회에 퍼져 나갔는지, 그 수단들과 건강과 생존, 공동체 결속이라는 전승 목적을 살펴본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이로울 가능성이 큰 지식의 전승이 상업자본주의를 비롯한 민족주의와 전쟁들의 잡음에 파묻혀 사장되거나 지식 고유의 목적을 잃는 것은 왜 인지 성찰 한다.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저자 사이먼 윈체스터는 교육(가르치고 배움의 터전으로서의 장소), 저널리즘, 백과사전, 사진, 방송에 이르는 광대한 분야를 조사하고, 바빌론의 설형문자부터 금속활자 인쇄술, 인공지능에 이르는 지식 확산의 전반적 범위를 친근한 일화와 일상적 사례를 통해 독자의 사유 접근성을 높이고 있다.

 

일례로 인간이 어떻게 정보를 획득하고 유지하며 전달하는 지에 대한 훌륭하고 포괄적 지식의 설명이 세 살 때 벌에 쏘인 기억의 일화로 충분할 만큼 일견 사변적일 수 있는 지식의 장벽을 철수시켜 주는 것인데, 이 경험은 말벌이라는 곤충의 존재를 알게 하고, 상처를 치료해주었던 어머니가 얼음과 연고로 통증을 가라앉혀주었으며, 이 상처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용감성을 알리는 일종의 전리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기도 했고, 참을성을 가지고 대처하면 칭찬을 받는 다는 사실과 벌에 쏘인 발이 왼발이라는 오른쪽과 구별이라는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일화에는 지식의 생성, 전달, 확산이 모두 포함되어있다. 결국 경험은 지식 습득, 즉 새로운 사실을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수세기에 걸친 지식의 생성과 전달 확산의 역사와 그것들이 의미하는 목적에 대한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책의 중심 주제인 지식의 전달과 그 전달로 인해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사유하게 한다. 책의 한국어 표제는 지식의 탄생이라는 역사성에 초점을 두고 있는 듯하지만, 원 제목은 우리가 아는 것을 안다는 것(Knowing what we know)이라는 점에서 학습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심층 탐구라는 물음의 사유에 가깝게 여겨진다.

 

결국 저자가 도달, 제기하려는 물음은 이 매혹적인 지식의 여행을 통해 오늘의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지에 대한 숙고의 요청이고,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이 생각의 부족으로 이어지는 듯한 현대 정보기술 의존적 태도의 양가성의 문제일 것이다. 세 살 아이가 느꼈던 어떤 새로운 사실의 습득이 가져온 지식 획득과 전달의 즐거움이 사라진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사물과 사건과 상황을 안다는 생각에서 수학, 지도읽기, 암기 등의 가치들을 제거하여 사고 능력이 점점 위험에 빠져드는 작금의 세계는 우리를 어떤 인간들로 변하게 할 것인가의 우려이기도 할 것이다.

 

컴퓨터 알고리즘에 의해 출현하는 데이터와 정보의 편협성에 길들여지고, Chat GPT가 생성해주는 정보와 지식에 의존하는 세상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 선험 또는 경험 지식을 위한 노력이 추구되지 않는, 그래서 소중한 지식으로 만들어낼 지혜가 없는, 현명한 인간이 없는 세상이 펼쳐진다면, 그 세계는 어떤 곳이 될지 상상해 보는 것은 왠지 두렵기조차 하다. 어쩌면 지혜 없는 정보만이 가득한 세계를 상상케 하는 생각이 없는, 지식이 결여된 세계를 숙고하고 자성해보는 시간이 되어 줄 것 같다. 독서와 체험의 삶에 이어 지혜를 잃은 인간 세계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우울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의 호기심과 지혜의 관계에 대한 지적은 오늘 우리들이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정말 우리 인류에게 중대한 질문이 무엇인지, 그 물음에 우린 답할 수 있는지도 또 하나의 물음이 되어 울리는 듯하다. 아무튼 이 책은 지식 전달의 역사를 뛰어넘어 인류의 미래 삶에 대한 지식과 지혜에 대한 고귀한 고찰로 안내한다. 호기심 많고 경험하고 생각하는 지적 독자들에게 그야말로 매혹적인 책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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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이먼 윈체스터의 지식의 탄생에 대한 이 프리뷰는 프로롤그와 1, 배움의 시작, 2장 최초의 도서관에 대한 사전 읽기에 의해 써진 것입니다. 책은 위 2개 장을 포함하여 지성의 행진, 조작의 연대기, 생각이 필요 없는 시대 등 총 7, 575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분적 독서만으로 작성되었기에 저자의 결론이나 주제와 괴리가 있을 수 있음을 양지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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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 지음, 서대경 옮김 / 아모르문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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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시오? 아직도 피가 충분치 않다는 것이오? 권력의 주구들아,

너희 차례를 기다려라. 너희도 곧 먹게 될 터이니!” -401쪽에서

 

이 작품을 읽기에 앞서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연주되는 등에(The Gadfly’)를 몇 차례 반복하여 들었다. 고독한 격정이 억제된 누군가의 삶의 풍파가 느껴진다.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의 이 소설(1897년 발표)1955년 영화화되자 영상 삽입곡으로 작곡되었던 것 같다.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는다면 작중 인물들의 내면에 다가가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 선율의 비장미로 이미 감응하는데 적합하게 예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Ethel Lilian Voynich), 1864~1960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등 외세의 억압과 통제에 대한 거센 저항이 시작되던 민족주의에 눈뜬 19세기 이탈리아다. 그러나 이것이 소설의 전경(前景)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저항과 혁명의 정신이 이야기의 토대로서 저변을 흐르며, 여인에 대한 사랑, 부정(父情)에 대한 그리움, ()과 속()의 갈림길에 선 신부의 고뇌를 통한 신을 향한 사랑의 문제 등이 서로 얽혀들며 내면에 깊은 상처를 안은 한 영혼이 뿜어내는 우정과 헌신성, 사랑이 진한 서정성과 감동을 일으키는 열정적이고 일견 낭만적이기까지 한 작품인 까닭이다.

 

때문에 소설은 혁명이데올로기나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을 들이대는 그런 상투성의 작품이 아니다. 옮긴이의 설명처럼 오히려 혁명의 관념성이나 종교 이데올로기의 위선성을 정면으로 뚫고 나가는 실존적 삶의 궤적으로서 한 인간의 내면적 열정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의 죽음에 시름하던 청년 아서는 오스트리아를 축출하고 자유 이탈리아를 건설하겠다는 비밀 저항 운동 단체인 청년 이탈리아그룹에 관심을 갖게 된다. 가계(家系)내 성장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억압, 부조리는 자연스레 젊은 영혼의 마음을 장악하는 대상이 된 것 같다


그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보호와 가르침을 아끼지 않는 피사의 신학교 교장인 신부 몬타넬리가 있다. 아서의 비밀 조직 가입활동을 우려하지만 교황청의 명령을 받아 새로운 교구로 이동하게 되고, 피사에는 새로운 신부가 부임한다. 아서는 소꿉친구였던 젬마를 그룹에서 발견하게 되고 그녀의 조직에서의 역할과 활동에 더욱 호감이 깊어진다. 그녀가 아서의 조직 경쟁자인 볼라와 가깝게 지내고 함께하는 동지임에 아서는 질투를 느낀다. 몬타넬리 신부가 떠남에 따라 신임 신부에게 아서는 젬마와 볼라의 관계로 인한 혼란스러움과 시기심을 고해(告解)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청년이탈리아그룹 내에서의 사정을 발설하게 된다.

 

그는 영문을 모른 채 체포되어 구속되고, 조직원과 활동내용을 토설하라는 지속되는 고문을 받지만 끝내 입을 다문다. 그럼에도 어느 날 석방되고, 그가 그룹원들을 토설하여 풀려 난 것으로 오해된다. 그로부터 고해를 받은 신부의 배신에 의한 조작임에도 이를 알지 못하는 젬마는 볼라와 동료들의 체포와 구속을 아서의 책임으로 오인하고 뺨을 올려 부치며 배반자로 낙인을 찍고 돌아선다. 아서는 돌아가기 싫은 이복형제들이 있는 집으로 귀가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몬타넬리임을 듣게 되고, 성스러움과 고귀함으로 흉측함을 은폐한 존재로서 단정해버린다. 그는 자신의 온 영혼을 차지했던 가톨릭과 사제집단, 신에 대한 신앙을 폐기한다.

 

연인으로부터 거절되고, 신뢰했던 사제에 대한 배신감으로 실의에 잠긴 아서는 자살로 가장하고 아르헨티나로 향하는 선박에 승선한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의 무일푼 청년을 기다리는 것은 온갖 압박과 폭력의 무한정한 노출이며, 노예보다 못한 지옥 생활로 점철된다. 부러진 팔과 얼굴을 수직으로 찢어놓은 상처, 뒤틀린 신체와 절름거리는 다리로 그는 13년 만에 귀환한다. 귀환은 저항조직을 비롯한 대중에 널리 알려진 풍자가로서 오스트리아에 붙어 권력횡포를 자행하는 예수회파에 대항하는 연합전선 구축에 효과적인 대항책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예수회파의 음모를 폭로하고, 민중을 일으키는 수단으로서 팸플릿의 글을 쓸 유일한 대안으로 호명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일명 쇠파리 등에’, 펠리체 리바레즈가 되어 이탈리아 통일전선 조직의 비밀 협력자가 되어 피렌체로 귀환한다. 그가 쓰는 조롱과 풍자의 글에 대한 내부의 옹호와 비판이 갈등하지만, 대중적 지지로 폭넓게 수렴된다. 조직에는 미망인이 된 볼라 부인, 즉 젬마가 있다. 볼라 부인은 리바레즈를 아서로 인식하지 못한다. 거북하고 불쾌한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진하는 사고와 행동에 대해 긍정적 이해를 갖게 되고, 두 사람은 작은 이념적 갈등이 있지만 대의에 대한 공통의 목표를 위해 정치적 동행을 하게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낼 수 없는 아서인 리바레즈, 오해로 빚어진 어린 날의 우정에 되돌릴 수 없는 상처를 주어 자살하게 했다는 죄의식을 품고 있는 볼라 부인으로 불리는 젬마의 리바레즈에 대한 의혹과 내면적 갈등이 끊어질 듯한 실()처럼 연결되며, 봉기를 위한 연대가 이어진다. 이처럼 아서와 젬마의 고귀한 사랑으로의 이행과 더불어, 추기경이 되어 민중으로부터 유일하게 청렴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몬타넬리에 대한 아서의 증오와 연민, 그리움과 사랑의 치열한 갈등이 속과 성의 갈림길에서의 선택과 병행하며 종교와 혁명의 가치의 통합을 통한 참됨에 대한 격렬한 사유가 흐른다.

 

그런데 이 소설의 위대함은 조롱과 독설, 부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 대상에 대한 사랑의 숭고함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지는 점이랄 수 있다. 소설은 비극으로 맺지만 결코 비극이 아닌, 오랜 생의 격전 끝에 맞이하는 안식처럼 평온이 독자의 정신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감상글의 모두에 인용한 추기경 몬타넬리의 민중을 향한 음성은 다분히 중의적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을 신의 선택을 통해 내어 놓아야 했던 성인(聖人)의 피의 울부짖음이다. 그 피를 들이켜라, 기독교인들아...., 그 피를 들이켜라, 너희 모든 사람들아! 그 피는 너희들의 것이 아니더냐? 너희를 위해 붉은 핏물이 풀밭에 흐르고 있지 아니 하냐, (中略) 식인종들아..., 찢겨진 살을 씹어 삼키려므나.(394)“

 

민중을 위해 아버지로서 자식을 희생제물로 내어준, 추기경 몬타넬리의 통한의 외침이다. 그는 자신의 파멸로 어리석은 민중, 압제 권력에 살과 피를 내어 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이었으리라. 그럼에도 그는 그럼으로써 신을 배신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소설의 마지막을 이루는 3아버지와 아들7,8 챕터의 아서와 몬타넬리의 대화와 아서를 잃은 몬타넬리의 민중을 향한, 그리고 신을 향한 목소리는 핏 멍울이 되어 독자의 가슴에 맺힌다. 아마 소설을 관류하는 주제는 고뇌와 투쟁을 통해 드러나는 영혼의 광채 그것일 게다. 그 고독하고 격정으로 충만했던 한 인간의 삶에 감응하며, 나는 여전히 작은 빛조차 꿈꾸지 않았던 열정 없음의 그 수치심에 몸을 떤다. 때문인지 철지난 로맨티시즘에 자꾸 감정이 이끌리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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