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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맡의 사유 - 초심자도 알기 쉬운 현상학 개념 읽기
심귀연 지음 / 경상국립대학교출판부 / 2022년 8월
평점 :
나는 조금 늦게 객체지향 철학을 접하게 되었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인간의 주체 독점적 권리에 회의를 갖게 되었고, 지금은 존재론적 실재론과 객체지향의 사고에 깊숙이 빠져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평평한 관계가 이 우주의 진실이며 본질이라고 말이다. 때문에 이들의 사유를 읽다보면 그 뿌리인 현상학이 빈번하게 언급되고, 특히, 메를로-퐁티의 몸지각과 몸틀을 토대로 한 세계 내 관계에 대한 이해의 아쉬움이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인데, 물론 지극히 입문적 개괄서이기에 마음에 남아있는 과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그래서 내 읽기의 연속성을 위해 심귀연 교수의 두 책을 선택했다. 『내 머리맡의 사유』는 그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몸과 살의 철학자 메를로-퐁티』이다. 『지각의 현상학』을 읽기에서 배제한 이유는 학문적 접근의 야망같은 것은 애초에 없기 때문이고, 심귀연 교수의 두 책의 안내면 미진한 궁금증 해소에 족하리라는 생각에서이다.
레비 R. 브라이언트와 그레이엄 하먼, 그리고 티모시 모턴이 바로 이 책으로 이끈 객체이론과 존재론 또는 사변적 실재론의 나만의 주인공들이다. 아마도 ‘주체 없는 객체를 향한’ 브라이언트의 『객체들의 민주주의(The Democracy of objects),2011』는 내게 그 직접적 영향을 끼친 사유일 것이다. 레비 교수가 제기했듯, “인간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은 것에 관한 주장을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에 관한 주장으로 전환하는 특이한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적처럼 존재에 대한 데카르트의 근대철학 이래 현대인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존재자들 사이에 맺어진 관계들에 위계를 부여하려는 이 끈질기고 혐오스러운 망상은 이제 더는 이 세계를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위기에 처해있는 것 같다.
무수하게 인간과 사물, 동물의 관계를 재배치하고, 대상화 한 결과 기후온난화에서부터 심각한 경제적 문화적 양극화의 극단적 가속현상, 재화에 대한 헤게모니 쟁탈로 인한 적대화와 핵 전쟁의 위기에 이르기까지 주체의 자리를 차지한 이성과 합리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인간 인식은 그 신뢰의 근거를 완전히 상실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세계 우주에 대한 인식에 있어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대철학은 인간 보편적 특성인 이성적 능력으로 대상의 객관성을 파악하고 타자 문제를 증명하는 데 주력해왔다. 그러나 이 근대적 기획은 스스로를 합리적 이성이라는 지식의 원천인 주관성의 영역에 가둠으로써 철저하게 실패한 것 같다.
1. 현상학자들과 현상의 정의
나는 후설의 의식현상학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만 근대철학이 인식론에 빠져 이분법적 주체와 객체 구도에 의해 지각활동의 객관성을 입증하는 데 실패했음을 지적하고, 기존의 모든 인식론적 편견이나 관념에서 벗어나 ‘사물 자체’를 직관하기 위한 ‘현상 자체의 집중’으로 전환적 사고의 틀을 마련했다는 측면의 이해로 족할 것이다. 책(『내 머리맡의 사유』)은 주요 현상학 학자인 후설과 하이데거, 샤르트르, 메를로-퐁티, 네 철학자의 각기 다른 현상학의 차이를 소개하고, 현상학의 기술에 등장하는 개념어 스물아홉가지를 의미의 관계성을 가지며 설명하고 있다. 우선 내 입장은 존재론적 실재론자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오늘의 우리들을 사로잡는 것은 인식론 우위의 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은 존재론적 철학의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인식론자들은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파악하기 위해 인식이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여기에는 인간중심적 오만이 깃들어있다고 여겨진다. 인간인 자신들의 인식 판단에 의해 대상이 존재한다고 말하니 말이다. 그러나 돌, 나무, 이산화탄소는 인간의 인식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미 거기 있다. 즉 돌은 돌대로, 나무는 나무 그자체로 있다. 현상학은 있음 그 자체인 현상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주장처럼 “존재론적 차원에서 사물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자기 시현(示現),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는 바로 그것’이 곧 실재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그런데, 하이데거 또한 알리는 것 자체이지만 근원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이 ‘현상’이라 정의하며, 마치 실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현상의 결여적 변양(變樣)’이라고 말한다. 즉 현상이란 자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존재자의 존재, 혹은 존재의 모든 변양이나 파생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현상의 배후나 이면에 어떤 다른 본질이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샤르트르는 이러한 주장을 거부한다. 나타남(현상)이란 수많은 나타남의 모든 연쇄를 가리키는 것이지 존재하는 것의 전 존재를 독차지하는 그런 숨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샤르트르의 비판에 동조하며, 배후의 어떤 존재를 상정하지 않은 현상(나타남) 그 자체로 확실성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은 바로 이 나타나는 것, 바로 그것일 뿐이며, 나타남의 무한 연쇄에 의해 발견된다고. 아마 샤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가장 명료한 선언의 문장이 되리라.
“드러난 자신이 곧 본질 자체다. 중요한 것은 나타남의 존재는 존재의
나타남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실존 자체다.’”
- Jean-Paul Sartre, 『존재와 무』
메를로-퐁티는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파고든다. 후설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라는 ‘자유로운 변경’을 통해서 변하지 않는 본질을 파악하려 했으며, 하이데거는 본질은 현상의 이면에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현상은 현상의 장에서 드러난다고, 중요한 것은 상황이며, 상황 속에 드러나는 것은 ‘사물 자체’이며, 이것이 곧 ‘현상’이다. 라고 말했다. 배후에 이면이란 것은 애초에 없으며, 현상은 상황 속에 드러날 뿐이라는 것이다. 즉 ‘현상적 장(場)’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비록 존재론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레비 R. 브라이언트의 비판처럼 하이데거의 존재론 부활의 시도는 그 의미를 철저히 변화시킴으로써 이루어졌을 따름이며, 존재에 대한 현존재, 인간의 접근에 관한 심문으로서 ‘현존재에-대한-존재’에 대한 탐구가 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의 존재 자체 탐구는 ‘인간에-대한-존재’ 탐구가 되어버림으로써 인간 비인간 구분도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고 읽을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존재론적 실재론에 가장 근접한 현상에 대한 접근은 단연 메를로-퐁티의 것이다. 이 책의 독서 동기가 현상학과 현상의 거친 개념 및 메를로-퐁티의 일차적 이해였으므로 2개 장으로 구성된 책의 1장, 「현상학자들의 현상학적 관점」이라는 차이를 통한 성찰의 과정에서 이만큼의 수확으로 만족하리라. 2장은 현상학의 「스물아홉 가지의 개념」 설명인데, 이 개념어의 설명 자체가 진행됨에 따라 현상학 이해의 단계적, 상호 연결적 이해의 심화를 돕도록 구성되어 있을뿐더러, 더욱이 해결코자한 내 물음의 개념어들을 중점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 지적 해소의 과정이 되기에 충분했다.
2. 현상학의 개념어들
이 개념어들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과 사물 등 비인간과 서로 얽혀 나타나는 이 세계를 직시하는 데 많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이 세계우주에서 인간의 행동이 어떻게 변환해야 하는가를 성찰토록 안내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세계를 마주하고 있는가? 인간이 오만하게 주체의 자리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만물과 현상을 대상화함으로써 질서지우고 통제하려 한 결과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읽어나가면 이들 개념들이 단순한 철학의 전문 용어만으로서의 소용이 아님을 깨우치게 된다. (부분적 감상의 진술로 몇 개의 개념으로만 정리하련다.)
2-1. 본질
데카르트를 출발로하여 흄과 칸트, 헤겔에 이르는 전통적 철학은 ‘사실의 가능 근거’를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설은 구체적이면서 사실적인 주체의 주관성에서 본질은 획득된다고 주장하면서 본질은 체험하는 의식 내용까지 실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질은 판단중지를 통해 자유로운 상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냄으로써 획득된다는 것이다. 메를포-퐁티는 “존재란 사실 자체임으로 본질이 따로 있지 않다.”며, 존재는 인식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미 그 자체로 있는 것을 인식대상으로 삼는 순간 수많은 왜곡이 담기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었을테니 말이다. “설명되는 순간 존재는 사실성에 벗어난다.”는 말이 바로 그것일 테다.
2-2. 지향성, ~에 대한 의식
“의식은 경험을 통해 순간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고 종합한다.”, 이 말은 대상은 인식 밖에 있지 않고 인식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며, 의식 체험으로 드러나고, 인식과 인식 대상은 분리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을 사유한다’가 아니라 ’~을 할 수 있다‘라며, 전체적 통일성을 가지고 끊임없이 연속체를 이루어 의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몸은 사물의 부름에 표상없이 대응하는 방식이라고 몸이야말로 지각하는 몸이며, 주체-의식의 상관자로서가 아니라 행위하는 몸이며, 지향성이야말로 몸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한다. 사고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우리는 사물 혹은 타인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저자 심귀연 교수는 사랑을 예로 제시하는데, “사랑은 계획도 생각도 아니며,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행위는 느낌을 수반하고 사랑을 함으로써 알려지게 되는 것이라고. 사랑은 관계에 있는 존재들을 사랑이라는 특별한 세계로 이끌어내는 것인데, 몸 없이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겠느냐고, 몸 없이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라는 물음만큼 명료한 묘사는 없으리라.
2-3. 지각장(知覺場)
근대인식론은 경험에 의존한 지각을 정당화한다. 경험을 객관화하기 위해 대상을 적정 거리에 두고 고정시켜 변화를 제거한 채 인식한다. 이때 대상은 수동적 존재로 격하되고, 그럼으로써 타자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게 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것이 인식론의 근본문제이다. 경험할 수 없는 타자를 안다고 하지만 그것의 타당성을 확증할 길이 없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객관성을 담보하는 이러한 순수 인상이란 것은 없다고 말한다. 단지 있다면 지각의 상황, 지각장(知覺場)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각이란 개별적이고 순수한 감각들의 연합이 아니라 온몸 지각이기에 공감각적이며,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모든 상황 속에 드러남으로써”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각은 이성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고, 몸인 지각이 세계에 감정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라고 한다. 만지고 더듬고 살펴보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지, 결단코 이성 판단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지각은 “교접 작용이자 짝짓기”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2-4. 몸주체
메를로-퐁티에게 몸은 대상도 객체도 아니다. 생리적 기계도 아니며, 인과율에 지배받는 물리적 몸도 아니다. 더구나 이성에 의해 통제되고 조절되는 몸도 아니다. 몸은 지각하기도 하며 지각되기도 하는 주체임과 ‘동시’에 대상이다. 몸은 주체의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두 손을 맞잡아보라) 이로써 그 오랜 세월 배제되었던 존재 권리를 회복한다. 여기에 오늘의 신유물론적 사고의 토대인 객체지향 철학의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몸들은 관계 속에서 세계를 열어간다는 점에서 사실적이다. 몸을 객관화하고 밀어내는 순간 우리 몸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불완전한 인간이 자신들의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애’라는 정상과 비정상 구분의 말처럼 망상이 출현한다.
【몸틀(신체도식) 151쪽에서】
2-5. 몸틀 (1)
어떤 몸들이건 그 자체로 고유성을 가진다. 몸의 상태가 어떻게 달라진다 해도 나는 몸인 나이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의 달라진 나는 동일한 대상으로서의 영속성을 가진다. 설혹 팔이나 다리가 잘려나가도 나의 동일성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습관에 의해 형성된 ‘몸틀’ 때문이라고 한다. 환지통, 시각장애인 등의 예시를 통해 역동적으로 변화가 가능한 몸틀을 확인하게 된다. 개조되고 확장되는 몸틀과 반복에 의해 습관이 됨으로써 드러나는, 스스로 공간성을 확보해가는 몸틀의 변신을 쫓는 우리의 눈길은 세계를 새로운 차원에서 인지하게 될 것이다. 김초엽이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에 대한 바로 그 출발 사유이다.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만나 어색해 할 때 우리는 낯선 세계라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인식론의 세계에 고착된 사고는 그 낯선 세계의 이질감으로 곧 배제하고 장벽을 쌓아 올린다. 익숙한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익숙해지면 진정 관계 맺음을 통해 새로운 몸틀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내면의 시간을 참지 못한다. 줄곧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라는 근대 인식론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명의 예로 소개되는 지팡이 이야기를 짧게 옮겨 읽어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시각 장애인의 지팡이는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부딪치고 넘어지기 일쑤다. 그렇다고 지팡이를 내팽겨쳐 버리면 영영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러나 계속 사용하다보면 어느 순간 땅과 지팡이 끝의 위치가 가늠되고 자연스레 지팡이는 팔의 감각을 이어받는다. 물론 지팡이에 인간 몸이라는 다른 몸이 생긴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몸틀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인간 비인간이 서로 얽혀들며 새로운 공간적 가치를 만들어낸다. 세계는 지성에 이해 판단되는 그런 세계가 아닌 것이다.”
2-6. 몸틀 (2) - 장애와 결핍
인간은 몸의 존재이기에 결코 완전하지 못한 결핍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완전을 희구한다. 그것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다. 인간에게 몸이 없다면 장애란 애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완벽한 몸을 꿈꾸며 정상적 몸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바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도식으로 장애를 만들어 정상이 아닌 존재를 장애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존재론적 결핍을 전가하면서 결핍의 상태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결국 장애란 관계에서 겪는 트러블이라는 말이다. 장애는 몸의 속성이지 결핍이 아닌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비뚤어진 시선들이 정치사회 곳곳에서 차별의 시선을 던지며, 배제를 당연시하려 한다. 우리 모두는 몸의 존재자들이다. 그 몸은 다양하고 고유한 것이다. 본디 불완전하고 결핍된 존재인 것이다. 장애란 이 세계에 없다는 진술이 진실이란 말이다.
2-7. 조건 지어진 자유
자유란 구속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몸인 인간에게 구속없는 자유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대상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불가피한 대자존재(對者存在)이기도 하다. 다만 이때 누구와 어떻게 관계 맺는가는 절대적 주체의 선택의지에 달려있다. 따라서 몸인 인간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구속되는 존재이다.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말한다면 그것은 ‘조건 지어진 자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정신과 영혼을 말하는 자들은 정신의 자유, 영혼의 자유를 말하지만, 몸적 존재인 인간에게 그런 자유로운 영혼 따위는 없다.
“몸인 나는 상황 속의 나이다. 몸인 수많은 존재들이 상황을 만들어내고 그 상황이라는 조건 속에서만 자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는 상황 속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말이며, 이 참여의 힘이 없다면 자유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건 없이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얼빠진 한 인물은 자신만의 자유에 빠져 말마다 자유 타령을 한다. 그 자유는 국민이 요구하는 책임의 조건을 못견뎌한다.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자유란 조건 지어진 자유임을 알지 못하는 우매함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들을 변신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자유이며 이 자유를 조건 지어진 자유라 말한다. 상황과 책임을 부정하는 자유를 외치는 것은 망상이외의 것이 아니다.
3. 맺는 말
이 책은 현상학 공부를 시작하는 입문자를 위한 개념 안내서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책은 현상학의 의미와 윤곽을 잡는 디딤돌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꼭 필요한 현상학과 존재론에 대한 개념들을 마음에 각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오늘의 현대철학들은 주체를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이제 인간중심적 사고인 인식론적 틀에 근거한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너무 많은 공허와 왜곡을 가져온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객체지향의 철학, 존재론적 실재론과 같은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동등한 존재로 파악함으로써만 이 세계가 가능하리라는 사유가 그 토대의 철학으로 길을 이끌었다. 아마 이것도 이 책 스스로 그 자체를 드러낸 현상일 것이다. 내 몸지각과 서로 얽혀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