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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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출한 영미권의 국내 번역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대개는 번역자 정영목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해외문학 작품을 즐겨 읽는 독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쓴 글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아니 읽을 기회가 엄청 많았을 터인데 읽지 않았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 같다. 번역된 책의 뒤편에는 거의 예외없이 번역자의 해설이나, ‘번역자의 말이라는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지만, 나만의 감상이 혹여 번역자의 글로 인해 변형되는 것을 꺼려하기에 항상 외면하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외면해왔던 글들, 번역자로서 썼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들에 실렸던 그 글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12명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문학 해설집이다. 여기에 그가 번역한 작품들과는 무관한 순수한 일상의 단상이나 그의 문학 예술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작은 평론들이라 할 수 있는 에세이 22편이 함께 구성되어 있다. 신간 안내에 이 책이 눈에 뜨이자 곧 알아차렸던 것 같다. 내 고유의 작품 감상이 번역자의 해설과 뒤섞일 염려가 없는 상태, 즉 한 걸음 떨어져 번역자가 읽고 느꼈던 작가와 그 작품들의 감상을 함께 나눌 좋은 기회라는 것을.

 

1. ‘정영목이 통과한 작가들

 

<내가 통과한 작가들>은 지난 522일 타계한 필립로스를 비롯하여 존 업다이크, 존 밴빌, 코맥 매카시, 커트 보니것에 이르는 12명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평론과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첫 인물을 필립 로스가 열고 있는데, 번역자가 가장 좋아했던 작가였던 것 같다. 유태계 미국인이었던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줄곧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는 기록이었음을 해독해 주는데, 로스를 향해 뻔뻔스러울 정도로 전통적인 소설가라고 비아냥거렸던 바다의 작가 존 밴빌과의 비교 해석은 단연 압권이다.

 

내용이 뻔해지면 스타일도 뻔해진다라는 지론을 펴는 밴빌이 보기에 에브리맨의 평이한 스타일은 곧 삶에 대한 사유가 평이하다.”는 증거로 보였던 모양이다. ‘죽음을 주제로 한 두 작가가 그네들의 작품에서 동일한 모티브인 바다를 등장시킨 문장들을 읽게되면 그 사유의 판이함에 삶의 복잡성을 대하는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 해설자인 정영목의 로스를 위한 대변은 별도로 하고 그 다음의 이해는 독자의 몫이다.

 

내가 예순에 죽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던 주제 사라마구돌뗏목, “강인하고 과묵한 남성의 이미지로 굳건하게 각인된 헤밍웨이의 단편 작품을 통해 작가자신의 내면 치유를 향해 묵언적 평온을 지향하는 또 다른 헤밍웨이의 모습으로 안내하기도 하며, “미국의 소도시 중간계급의 삶에 천착했던 존 업다이크토끼 4부작을 중심으로 존 치버필립 로스의 평론과 어울려 더욱 작품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확대시켜주기도 한다.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 ‘알랭 드 보통’, ‘코맥 매카시등을 새롭게 기억하는 읽기의 시간이 되어주기도 한다.

 

소개된 모든 작가들에 대한 해설은 그들의 작품을 접하게 될 경우 분명 보다 깊은 읽기에 도움이 될 것이지만, 단 한편의 작품을 읽었음에도 강렬하게 내 마음을 지배하는 모더니스트 스타일리스트인 존 밴빌바다를 통한 짧은 평론은 그의 또 다른 회색빛 색조 소설을 기다려지게 한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배치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어둠 속의 웃음소리에 대한 웃음을 자아내는 메타 치정극으로서의 꼼꼼한 작품 해석은 그저 책장에 꽂혀 있기만 했던 그의 작품으로 달려가게 만들기도 한다. 내겐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이들 작가들의 각양각색의 시선을 한 곳에서 발견하는 썩 좋은 시간이었다고 해야겠다.

 

2. ‘정영목이 읽은 세상

 

사실 <내가 읽은 세상>이라는 제목 하에 모여진 정영목의 에세이들은 기대하지 못했던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번역자라는 직업적 편협성에 한 사람을 가두어두고 그 좁은 곳에 관념을 덧씌우고 있었던 내 편견 탓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22편 중 첫 세 번째에 수록된 칭찬과 성취에 선 사람의 모순된 태도를 지적하는 야유할 권리라는 글에서 완벽하게 전복되고 만다. “칭찬하고 갈채를 보낼 때는 그저 박수만 쳐도 되지만, 자신을 비판하려면 야유하지 말고 예의와 격식을 갖추라고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론부에서 남에게 야유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갈채로 죽는 것을 막는 영리한 방법일수도 있음을 지적하며 맺는데, 그야말로 그의 사유와 문장에 완전히 매혹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비가 정의에 우선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 할머니의 목소리, 김태영 감독의 영화 <가족의 탄생>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 된다>, 여기에 순정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까지 가세하며 가족의 의미를 새기는 새로운 가족은 여느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초월하는 사유의 경쾌함과 깊이가 균형을 이룬 감동을 준다.

 

모두 엄선되고 시의성, 또는 지적 지평을 넓히는 글들이지만 내게 인상 깊었던 에세이는 브레이킹 배드의심의 혜택, 두 편을 선택할 수 있다.

전자는 2014년 미국 에미상 작품상을 수상한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의 삶에 펼쳐지는 삶의 여러 아이러니에 포커스를 둔 글이다. “세상이 자기를 보는 눈 세 가지”, 자신이 설정한 이미지대로 나도 나를 보고 세상도 나를 보아주는 눈이 일치할 때와 불일치 할 때 벌어지는 인간의 상황을 따라가며, 약자였을 경우의 원망, 강자였을 경우의 자기모독에 대한 세상을 향한 폭력의 모습을 바라보게 해준다. 자신의 간절함을 정당화하는 순간 그것이 악으로 변해가며, 그 악을 선으로 인정받으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케 되는 여정은 불과 4페이지의 짧은 글임에도 거대한 장편소설을 읽어낸 듯한 감상을 주기까지 한다.

 

한편 의심의 혜택합리적 의심이라는 법적 용어를 빗댄 영어의 ‘benefit of the doubt'로 출발해서 세상의 이해에 감추어진 합리성과 투명성의 실체가 발하는 삶의 상황들을 알려준다. 단연 삶의 지혜가 농축된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인 김수영, 평론가 김윤식, 소설가 이문구에 대한 소박하고 친밀감 넘치는 평론 또한 진중하며 맛깔스럽다. 번역가 정영목이 아닌 독보적인 에세이스트로서의 진면목을 알게 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번역뿐 아니라 앞으로 그의 더 많은 창작 작업을 기대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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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선인장
싸하르 칼리파 지음, 송경숙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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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문학시장에서 아랍이나 아프리카, 동남아등지의 문학작품을 발견하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이런 기회의 결핍은 해당 지역의 국가와 국민들의 실상을 그네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없음을 의미하고 타인의 시선 특히 서구와 이들보다 정치경제적으로 우월한 언어를 통해서 일방적이고 왜곡된 허상에 익숙하게 되어버려 소외된 이들과의 소통 자체를 어렵게 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국내에 소개된 팔레스타인 문학작품 중 처음 소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국내에 2005년도에 번역 출간되었으니 벌써 햇수로 14년이 되었. 팔레스타인 문학을 찾아보게 된 계기는 잔인한 이스라엘(原題;The hidden history of Zionism), 쇼크 독트린(原題; The shock doctrine)이란 두 저술을 읽고 나서 취한 동작이고, 어렵사리 이 작품을 찾아내게 되었다.

 

작품의 서문에 소개되고 있듯이 작가싸하르 칼리파는  나는 여기 오늘의 이야기를 쓴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유태민족주의자들, 다시말해 시오니스트들의 국가인 이스라엘의 무력침공에 점령지로 변한 자신들의 땅 한가운데 유배 아닌 유배로 신음하는 팔레스타인들의 절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소설의 배경 시간과 공간이 1967‘6일 전쟁에서 아랍 측의 패전으로 이스라엘 점령지가 된 1970년대 초의 요르단 강 서안(西岸) 나블루쓰 이지만 그 사정은 2018년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 정치주도 세력인 시오니스트들은 오늘도 공공연히 이런 선언을 한다.

 

우리는 갈릴리 지역의 아랍주민들을 제거하기 위해

테러와 암살, 협박, 토지강탈, 사회적 서비스의 중단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여기서 노예로 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 모두를 죽여야 한다.”

 

소설은 팔레스타인 상류층 가문인우싸마27세의 청년이 고향인 이스라엘 점령지인 요르단강 서안의 나블루쓰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국경검문소에서 이스라엘군이 이들에 가하는 비인간적이고 무참한 심문의 과정을 순화된 문학의 언어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적(史的)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그 끔직한 이스라엘군의 야비하고 잔인한 행태를 떠 올리는데 무리가 없다.

    

 [ 이스라엘 공군의 가자지구 폭격 : 이 사진에는 '이스라엘의 집단학살과 자발적 공범자들'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

 

유전(油田)까지 갔다가 이리로 돌아온다? 여기가 뭐가 좋아서? 당신들은 은혜를 누릴 자격이 없어, 우리야 다르지, 이제 몇 해만 있으면 거기도 우리 땅이 될 것이고,..”하는 이스라엘 군인의 비아냥에서 핍박받는 그네들 고향의 현실을 이내 그려 낼 수 있다. 파괴된 가옥들, 타버린 나무들과 황량하게 드러난 대지,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 만성적 실업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 배운 자들은 고향을 떠나고 힘없는 노동자들만 남아있는 곳, 요르단강 서안 나블루쓰!

 

작품은 이 지역 상류계층이었던알카미르가문의 장남 아딜그리고 동생바씰과 사촌인 우싸마’,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공장 노동자 동료인주흐디를 중심으로 그네들 내부의 갈등과 번뇌를 통해 오늘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좌절과 분노, 증오를 이야기한다. 만성신장병을 앓는 아버지 알카미르를 포함한 9명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딜은 적()인 이스라엘의 공장 노동이란 수단을 취하지만 귀향한 사촌 우싸마로부터 적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주구노릇을 한다는 지속되는 추궁을 받는다. 자신들의 땅을 등지고 떠나는 팔레스타인들은 그나마 외지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찾을 수 있는 계층들이다. 이런 외부의 세력들이 고향을 지키며 이스라엘군의 감시 아래 고립과 억압된 세계에 놓인 자들의 무력함을 호통한다. 배고픔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이스라엘지역으로 새벽부터 이동하는 그네들의 고통과 민족적 자존심을 버렸다는 힐난에는 중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점령! 그것은 여러 의미를 지닌 말이다.

유배! 제 땅 한가운데서 우리는 유배를 당하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이스라엘에 아니 유태인에게 작은 실수라도 하면 고문과 구속, 그리고 죽음만이 기다린다. 저항하는 모든 젊은이들은 인간이하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거나 이미 죽었다. 온통 총부리가 겨누고 있는 지역에서 누가 더 이상 저항이란 언어를 뱉어낸다는 말인가? 나의 가족에게 누가 한 톨의 밀알을 주겠는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언젠가는 해방되리라 믿고있는 이 무지한 사람들의 생존 그 자체가 의도적으로 자행되는 폭압과 잔혹성, 경제적 핍박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려는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이리라.

 

작품은 무력저항과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의 분출만이 민족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싸마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이스라엘의 노동자로서 생계를 지켜나가는 동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그네들 삶의 방편에선 아딜의 대립, 그리고 소위매판자본까지 들먹이며 서로 손가락질 해대는 동족들 간의 반목, 알카미르와 그의 자식들 바씰누와르를 통해 보여지는 세대간의 가치인식의 괴리와 갈등, ‘주흐디의 이스라엘 노동자와의 싸움에서 적의 대상이란 바로 그들 내부인 자신, 자신들 스스로의 몰락이 아닌가하는 회의와 반성까지 이스라엘 점령 하에 있는 오늘의 팔레스타인인들의 울분과 증오의 요소들을 빼곡히 담아내고 있다.

 

요르단 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시장에서는 만족이라는 물건은 팔지 않아.”라는행복이란 사치스럽기조차 한 언어의 상실과 좌절의 외침은 그네들을 외면하는 세계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 누른다.명확한 관점을 위하여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부분의 경험과는 달리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족 대봉기)는 당장 기록될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소설적 작품성을 떠나 이스라엘 부르주아들의 탐욕, 국제 자본주의의 착취,...”라는 외피와 광신적 유태민족주의의 패권주의 망령에 대한 세계민을 향한 고발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문학작품이 이렇듯 이념적 잣대를 깊이 들이대는 것이 곤혹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네들의 문학은 당분간 이러한 현실을 외면 할 수 없을 것이다....

 

P.S.

2018529, 팔레스타인 박격포 공격에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공습했다는 뉴스는 사흘 전 이스라엘군 탱크의 공격으로 무장대원 3명이 숨진 것에 대한이슬라믹 지하드의 보복 일환이라 전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전투기를 동원해 즉각 공습에 나섰습니다.”패배할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는 절대적 강자가 벌이는 약자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이 지금도 가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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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찰스 디킨스 지음, 강미경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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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그릇을 받쳐 든 작은 두 손과 분홍색깔 배경의 예쁘게 장정된 책,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가 내 시선을 잡아당긴 이유는 이것이었을 것이다. 아이의 작은 손에 느껴지는 공손함과 그 이면의 두려움, 조심스러움, 연약함이, 그리고 강제된 어떤 힘에 대한 것이.

감정의 과잉일까? 이미 소설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배경 지식 때문일지는 모르겠다. 에밀의 저자 ‘J.J.루소아이는 자연이다.”라 말했다. 조작된 어떠한 것도 끼어들지 않은 그것, 그런데 이 인위적인 것들이 자연을 다른 무엇으로 변화시킨다. 굴종을, 겸손을, 불필요한 정념들에 주눅 든 존재로, 소설은 바로 이 조작을 자연이라는 선으로 회귀시키려는 놀라운 희생과 믿음, 사랑을 이야기 한다.

   

 

 

1. 범죄를 생산하는 사회

 

산업자본가들의 광기가 고조되던 노동 착취적 환경, 이로 인한 극심한 빈곤이 대중화되던 19세기 영국사회가 배경인 작품이다. “경비절감, 수지타산”, 이 단어들은 아홉 살 어린아이를 팔아먹기 위해 구빈원 위원들의 비밀회의에서 들려오는 음절들이다. 또한 먹이를 주지 않아도 살수 있다는 괴상한 논리를 실험하여 아이 10명중 여덟 명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보육원장의 탐욕스러움까지 더해진 파렴치와 잔혹함이 사회의식을 장악한 세계이다.

 

죽 한 그릇 더 주세요, 원장님.”

올리버 트위스트가 죽을 더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아이는 교수형을 당할 거요.” (P 30)

    

어쩌다 주어지는 멀건 죽 한 그릇, 그마저도 혹독한 매질이 대신하는 극한의 생존환경, 아이는 구빈원의 탁월한 자본가적 계산에 의해 노동력이 필요하던 장례사에게 떠 넘겨진다. 계층의 밑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약자들 간의 잔인함은 더욱 증폭된다. 거짓과 위선, 질시와 경계의 감정이 더해지고 굶주림과 폭력은 늘어난다.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의 그것들이 편협과 무지, 악과 지배욕에 올라타 아이에게 불행을 요구한다.

 

아이는 도망친다. 광기와 불행이 너울대는 고향, ‘머드포구를 벗어나 런던으로. 농촌에서 쫓겨난 도시빈민들로 득실대는 대도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올리버를 이끈다. 먹을 것도, 잠 잘 곳도 없는 아이에게 구빈원을 대신한 곳은 소매치기 집단이다. 악을 생산하는 사회 구조에서 그야말로 자연스러움 자체일 뿐이다. 집단의 우두머리인 페이긴은 범죄의 종착점인 교수대를 설명함으로써 올리버를 위협하고 속박한다. 사회의 모든 계층이 뒤질세라 범죄를 양산하고, 또한 이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선서 시키시오

입 다무시오.”

쇼를 하는구먼.”

판결을 하겠소.”

“3개월간 중노동형에 처한다. 퇴정하시오.” (P 136~137)

 

단지 두려워서 내달린 어린 아이를 잡아와 벌이는 즉결심판의 모습이다. 왜곡된 지식, 부재하는 도덕, 하찮은 권위들이 팽배한 세계, 올리버를 단지 수지타산의 물건으로만 여겼던 구빈원교구(敎區)직원 범블이나, 소매치기 우두머리 페이긴’, 즉결심판 판사, 이들 모두는 자신들이 악인이라 생각지 않는다. ‘선한 이웃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추악한 세계의 이율배반(antinomy), 개인의 선한 신념이 악을 축조하는 우리네의 투영일 것이다.

 

2. 사랑이라는 믿음, 그리고 희생

 

이처럼 그 경계를 구분키조차 어려울 만큼 얽혀있는 집단과 계층의 부도덕성이 점령한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임에도 소설은 아름다움과 자연이라는 선의 충만한 감동으로 가슴에 파고든다.

 

브라운로’, ‘로즈’, ‘메일리 여사로 등장하는 인물들에 의해 아이는 구원되고, 보호받는다. 이들은 버려진 채로, 외면 된 채로,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 냉담함과 밀려드는 공포의 환경이기만 했던 세상에서 안전과, 위로와 평온의 존재함을 아이에게 알려주는 사람들이다. 아이의 고통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들, 아이라는 자연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의 강렬함은 간신히 벗어났던 구렁텅이로 어린 올리버를 다시금 소매치기집단에 넘겨주었던 낸시라는 여성이 발휘하는 죄에 대한 자기이해와, 그로부터 시작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처참한 죽음의 장면이랄 수 있다. 매춘, 좀도둑질, 밀고로 점철된 삶을 살아야만 했던 여인이 새로운 삶의 무대로 나갈 수 없을 만큼의 악의 조밀한 얽매임은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이란 것이 짐작할 수 없는 용기와 고통임을 보여준다.

 

세상에서 버려졌던 아이, 그 자연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데에는 무수한 사람들 공동의 협력과 노력, 그리고 생명을 건 분투여야만 한다. 이 소설이 발산하는 감동의 울림은 이처럼 진정함, 정의, 믿음의 회복을 위한 지난한 헌신과 희생임을 발견케 하는 데 있는 것이지 않을까?

 

고작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인간됨을 잃지 않고 행복을 찾아가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라는 이 소설에 오랫동안 달린 계도(啓導)적 해석들은 사회와 기성의 인간 공동체가 자신들은 책임이 없음을 회피하는 몰염치가 될 것이다. 디킨스의 이 문학작품은 단순한 아동문학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어린아이 올리버 트위스트로 대변되는 자연의 순수성과 도덕적 가치의 고귀함에 대한 환기이며, 이의 회복을 위한 자기반성을 상실한 사회와 인간 구성원들에 대한 비판이라 해야 할 것이다. 때 묻은 마음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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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과 이야기 행위 현대의 문학 이론 46
피터 브룩스 지음, 박인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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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문학작품을, 소설을 읽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일까? 타인의 지리멸렬한 삶의 이야기에 불과한 그것을 마지막까지 읽어나가게되는 것일까? 아마 이러한 원론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 우리는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정신분석이 창조적인 텍스트가 지닌 풍부함을 흔해빠진 범주에 가두고, 상투적인 옛 이야기만을 발견하게 되는 환원적인 조작이라는 비판이 있을지언정 허구적 작품들이 발생시키는 의미작용에서 보다 심층적 층위를 파악하는 역할 또한 부인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피터 브룩스는 첫 장에서 문학작품에 대한 정신분석 비평의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한 개념의 설명에 할애하면서 눈에 번쩍 뜨이는 문학 텍스트의 미학적 형식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의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이것은 모두(冒頭)의 세 번째와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될 것 같다.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는 사람들은 불쾌해지거나 싫증이 나는 데 비해, 작가가 창조한 몽상은 어째서 쾌락을 주는가? 에 대한 예술적 성취의 비밀이랄 수 있다. 그것은 미학적인 쾌락을 제공하여 독자들을 유희의 세계로 인도하는 사전쾌락이라는 장치라는 것이다.

 

1. 텍스트 미학의 중추; 사전쾌락

 

사전쾌락(일종의 前戲:foreplay)이란 목적이나 결과를 향해 전진하는 움직임과, 목적이나 결말로부터 후퇴하는 움직임, 그러한 유희의 형식적 영역을 포괄하는 수사학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즉 텍스트 역학에 있어서 지연과 전진을 오가며 형식과 욕망을 조작한다는 것이다. 어떤 소설을 읽다보면 과정 내내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혹은 향긋한 향기만이 가득한 듯하지만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곧 발생할 사전의 신호로 읽힐 수 있는 이야기의 세부사항, 부속물, 대상, 인물, 장소, 플롯의 점진적인 창조과정에 지배당하고, 잘못된 예측을 유도하는 지연, 속임수, 수수께끼를 경유하면서 의미에 도달해간다. 이같이 피터 브룩스는 이것을 페티시즘과 관련하여 노출증과 관음증이 문학 텍스트와 독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확신한다.

 

결국 이같은 앎을 향한 충동’, 혹은 지식 애호증에는 성애적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롤랑 바르트S/Z에서 이것을 지연 공간(dilatory space)’으로 부르면서 텍스트의 중간본질이라 하기도 했는데, 도착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지연시키거나 후퇴시킴으로써 지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독자는 단지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서만 텍스트를 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동(情動)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무엇들, 즉 사전쾌락은 소설의 미학적 형식의 중추라는 것이다. 인용되고 있는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에서 로돌프가 엠마를 최초의 성관계로 유도하는 한 장면은 명쾌한 사례가 되어준다.

 

그러나 그녀의 옷이 너무 길어서 옷자락을 뒤쪽으로 들어 올리고 

걸어도 여전히 거치적거렸다.

그래서 로돌프는 그녀를 뒤따라가면서 그 까만 나사 옷자락과 

까만 반장화 사이로 엿보이는

우아한 흰 양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왠지 그녀의 나체를 

연상시키는 느낌이었다.” (P 55)

 

이 짧은 페티시즘적 문장은 소설의 독해과정을 오롯이 담고 있는데, 엠마 보바리는 한 인간이라는 통일체가 아닌 물신화된 부속물, 조각난 응시와 의식의 매혹적인 대상으로만 나타난다. 엠마가 하나의 통일체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가 전체성이 없는 존재이며 비논리적인 욕망 덩어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텍스트의 결말을 향해가려는 독자를 채근하며, 소설의 알레고리를 드러내려는 작가의 의도임을 우리는 읽어 내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이러한 강렬한 섹시함을 느꼈던 이언 매큐언의 『넛셸』이 떠오르는데 ' 마치 영원한 전희(前戱)만 있는 쾌락의 정원 같기만 하다.'고 감상을 썼던 기억이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전쾌락이 형식주의적 미학의 기능을 함의하고 있음은 지식의 탐구가, 그리고 허구적 이야기의 직조가 실제로 관음증적인 동시에 지식애호증적이라는 인간 욕망의 본질이 투영되고 있음의 무의식적이거나 불가결한 반영일 것이다. 이것이 내러티브의 힘일 것이다.

 


2. 전이(轉移)와 내러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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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와 내러티브는 이 저술, 정신분석을 토대로 하는 문학비평의 중심을 관통하는 내용일 듯하다. “정신분석은 내러티브에 대한 학문이라한 프로이트의 말처럼, 문학 작품의 텍스트란 환자와 분석가가 주고받는 대화의 진척에 따라 점진적으로 완결되어가는 서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어떤 결말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완전한 그림을 그려낼 수 없다. 이야기의 여정은 마치 비틀리고, 기억의 단락이 있으며, 연대기적 진행의 불가해한 모순, 억압된 소재를 비밀리에 보존하는 은폐된 기억으로 가득한 정신분석 피분석자의 비일관적인 내러티브를 반복, 심화시켜가며 일관성을 지닌 완전함으로 가는 것과 같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있는 무수한 분석사례에는 환자의 기억을 구조화하고, 불완전한 것을 다시 반복 요청함으로써 완전한 내러티브로 재현해 나가는 의사와 환자, 청자와 화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있다. 이때 의사, 청자 혹은 독자는 자신이 점유한 장소를 텅 빈 장소로 제공함으로써 화자 또는 발화된 내러티브의 욕망이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우리는 책읽기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자의 욕망을 우리들의 욕망으로 현실화 시키곤 한다. 즉 인식의 변화, 확장, 삶의 충일함을 더하게 된다.

 

그런데 전이는 텍스트와 독자, 텍스트내 서술자와 수신자 사이의 대화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텍스트 구성의 주도권 장악, 또는 이를 통제하려는 싸움이기도 하다. 우선 독자와 텍스트의 관계에서 전이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거부되거나, 혹은 실패한다면 그 독자는 언제나 동일한 텍스트만을 읽게 되거나, 독아론적인 해석만을 실천하는 데 그칠 것이다. 구태여 소설을 읽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책을 읽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욕망의 되먹임도, 변화의 움직임도 없는, 아무런 전이도 없는 그런 독서 행위가 경계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연유일 것이다.

 

한편 텍스트 내 화자와 청자, 서술자와 수신자 사이의 관계에서 전이가 발생시키는 변화의 다양한 양상을 목격 할 수 있는데, 발자크의 소설 아듀처럼 청자가 개입하여 화자의 과거를 재현하여 현재의 결과를 고쳐 쓰려 할 경우 발생하는 재앙적 효과의 흥미로운 사례가 있는가하면,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과 같은 내러티브에 전이의 반복적 상호 되먹임의 복잡한 작동 방식을 통해 별도의 이야기(액자 이야기)에 품고 있는 욕망의 전형을 발견하게도 한다.

 

3. : 기억과 욕망

 

이야기, 내러티브란 일관성과 이해를 원하는 본질적인 심리적 요구에 따라 사람들이 인식하고 작동시키는 정신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소설의 창작과 그것을 읽는 행위는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내러티브의 충동은 우리 존재가 육체와 시간 속에 있다는 인간적 진실에 대응하기 위한 본능적 시도라는 점이다.

 

내 소박한 기억의 일화도 어쩌면 내러티브 충동의 일면에 닿는 것 같아 그 이야기의 한 토막도 맞춤일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면 누구나 마주하는 일인데, 하나의 책이 또 하나의 책으로 이어지게 하는 책 읽기의 연상작용을 생각하던 끝에 불현 듯 열네 살 소년이었던 시절의 기억으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종로 2가에 있던 대형서점으로 부지런히 발길을 향하던 내 어린 모습과 책을 사려고 차비를 아끼며 모은 돈으로 벼르고 별렀던 책을 사던 전경이다.

 

그리 특이할 것 없는 옛 기억이지만 당시에 이 과정을 잠시 기록으로 옮겨놓았었는데, 그 내용이 온통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호기심과 소유와 인정의 욕망들이 빼곡했다. 이것은 백일몽, 회상 또는 환상이 지닌 재현 행위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세 개의 시간대를 꿰뚫고 개인이 품고 있는 어떤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상황임을 지적하는 정신분석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었다는 발견이랄 수 있다. 아마 아래의 인용문장은 이처럼 인간의 기억, 정신에 내재된 것의 성찰(정신 분석)이란 것이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어떤 이해를 선사하는지 충분한 설명이 될 것 같다.

 

정신분석은 문학 분석에 이용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신분석은 유난히 스스로를 주장하고 요구하는 상호 텍스트다.

정신분석은 두 가지 영역의 경계를 넘어서 사고함에 따라, 정신이 현실을 

다시금 형식화하는 방법,

그리고 우리가 꿈을 꾸거나, 욕망을 가지거나, 해석을 하거나,

무엇보다 자기를 인간 주체로서 구성할 때 필요한 허구를 만드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이와같은 이해의 토대를 견고하게 하면서도 복잡화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P 71)

 

정신분석은 허구적 작품들이 발생시키는 의미작용에서 보다 심층적 층위를 탐구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문학의 구조 역시 정신의 구조라는 말처럼 문학작품이 심리적 장치로서 정신의 경제적, 역동적인 조직을 설계하는 구조화 과정임을 이해할 때 정신분석 비평은 당위성을 지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책은 문학작품에 대한 정신분석 비평이 무엇을 발견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개념 설명이자 또한 문학비평이기도 하다. 즉 정신분석적 지식을 갖춘 문학비평이 인간주체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어떻게 사용되는지, 특히 문학 텍스트의 형식과 욕망의 상호작용, 내러티브의 구성과 재현 방식에 내재된 욕망의 힘에 대한 이해, 이야기로서의 문학작품이 지닌 삶의 경험 전달과 변화를 유인하는 역할의 설명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본적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임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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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문고판)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이종숭 옮김 / 예경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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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E.H. 곰브리치서양 미술사(The story of art)를 읽으려 한 의도는 미술 작품에 대한 감상자로서의 이해력을 갖추는데 도움을 받으려는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획득하게 될 지식 쪼가리를 비축해 보려는 천박한 기대 또한 있었다고 해야겠다. 무려 '413개의 도판'과 함께하는 선사 및 원시부족 사회의 그림과 조각으로부터 현대 추상표현주의와 '옵 아트(Op Art)', '팝 아트(Pop Art), ‘데이비드 호크니의 카메라 영상작품에 이르기까지 400여(화가,조각가,건축가)미술가에 대한 해설을 포함하는 미술의 성대한 기록은 이러한 욕구를 만끽하는 데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곰브리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감상하는 게 아니라 그것에 적합한 설명서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찾는 데 몰두한다.” 라며 미술 작품을 대하는 그릇된 태도를 지적한다. 게다가 어쭙잖은 도식화된 설명의 기억을 과시하고자 미술에 관해서 똑떨어지고 재치있는 발언을 하려는 유혹에 사로잡힌 어중이떠중이들의 허영을 점잖게 꾸짖기도 한다. 미술에 관해서 속물근성을 조성하는 설익은 지식을 갖는 것보다 미술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훨씬 좋다.”라는 것이다.

 

미술 작품의 감상은 조화에 대한 올바른 균형, 가장 조화로운 전체를 구성하는 올바른 관계, 바로 그 감각을 발전시킴으로써 삶의 조화로움이 보다 풍부해지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며, “미술가의 체험 정체가 무엇인지”, 그들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노력함으로써 감상을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라 조언한다. 미술가가 소위 제대로 했다!’라고 느끼는 자기완성으로써의 결과물과 공감하려는 마음상태의 상상과 추측의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출발점에서 위대한 예술 작품의 면면을 연대기별로, 과연 하나하나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전통적 뿌리에서 시대적 요청의 산물로서, 혹은 그 기법과 작가적 고뇌까지 역사의 위치를 설정하며 감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따라서 구태여 어떤 의지를 가지고 읽어나갈 필요의 긴장을 해제시킨다. 그저 곰브리치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와 함께 미술 작품을 음미하는 초보 감식가가 된 듯 미술가가 해당 작품을 그리고, 조각할 때의 마음을 상상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탈리아 화가인 카라바조의 <성 마태오>라는 그림에 얽힌 일화는 그림을 대하는 인습과 편견이 예술작품의 감상을 방해하는 맞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稅吏)였던 마태오에 어울리는 천사와의 조우를 마침내 그리고 성당에 제출했으나 위대한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거절되었다는 것이다.

     

[ 카라바조 <성 마태오>, 1602년경 : 거절본 ]

 

카라바조는 그들의 입맛에 맞는 정형화된 그림을 납품했다. 전해지는 그 두 그림은 정직하고 생생한 하나와 불성실해 보이는 하나의 그림으로 보인다. 아마 친숙하게 알고 있는 주제를 뜻밖의 방법으로 표현한 그림을 대했을 때 우리에게 그것이 정확하게 해석되지 않는다고 매도하는 그러한 태도가 당시 성당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그 소재가 지닌 아름다움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의 교훈일 것이다.

    

[ 카라바조 <성 마태오>, 1602년경 : 승인본 ]

 

깨알 같은 글자로 텍스트만 장장 500여 페이지(413 개 도판포함 10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미술사의 서술은 하나의 미술 작품마다에 숨겨진 조화와 암시를 포착하고 감응하려는 참신한 감상자의 마음가짐을 숙성시키는 여정이라 할 수도 있겠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의지와 마음 속 원시적인 무엇에 대한 사색, 세상의 변화와 그에 따르는 생각과 요구들이라는 예술의 역사성, 시대성에 대한 이해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피카소를 비롯한 입체주의 창시자들의 작품에서 이집트인의 회화가 지녔던 - 사물이 잘 드러나는 각도에 그린 것 - 원칙을 발견하게 되고, 그네들의 작품 소재가 왜 사람들의 생활에 익숙한 것들을 다루고 있는지, 그리고 그 복잡하게 흩어진 묘사들을 감상자와 함께 맞추어 보자고 유혹하는 초청임을 알게 되는 것이나, 표현추상주의 화가로 불리는 잭슨 폴록의 물감을 마구 흘리고 뿌려댄 듯한 작품들이 중국화가들의 시를 휘갈겨 쓰듯 필획마다 충만해야 하는 달인의 느낌과 영감의 경지에서 비롯된 붓놀림의 기법임을, 낙서같은 단순하고 자발적인 동경과 순수회화가 부딪친 고답성의 탈출구였음을 엿보게도 된다. 시대와 전통의 연결, 당대의 미술적 긴장과 갈등, 각종 요구의 분출 등이 곧 미술 작품의 반영이었음을 발견하게도 된다.

    

[ 파블로 피카소 <바이올린과 포도>, 1912년 ]

 

 

미술 감상자로서의 태도를 배우며 감수성을 키워나가는 토대로서 훌륭한 기반이 되어주는 책이라 할 수 있으며, 많은 미술 입문자들에게는 미술가의 노고와 고뇌가 감내하는 역할을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진주같은 저술이라 할 것이다. 미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기대하는 말, 정말 제대로된 책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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