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유기체 - 곤충 사회의 힘과 아름다움, 정교한 질서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32
베르트 횔도블러.에드워드 윌슨 지음, 임항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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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類比)를 가정할 수 있다면 지구상의 유일한 지성적 존재로 자임하는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진화적 상상을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은 벌, 말벌, 개미를 포함하는 ()사회성을 지닌 벌 목()과의 곤충들, 특히 초유기체로 명명할 수 있는 종들의 사회성을 통해 이들의 진화적 과정에서 발견되는 개체 또는 군락(집단)의 다양한 사회적 양상들을 추적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을 과학 연구의 전범(典範)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세심하고 주의 깊으며, 겸허한 과학자의 연구태도로부터 가설과 실험, 관찰을 통한 발견과 이론의 정립, 동일 유사 연구들의 상호비교와 비판적 수용, 풍부하게 인용되는 유관 연구사례와 대립 이론들의 반복되는 과학적 성취를 포함하는 위대한 두 과학자의 일생을 바친 연구에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 사회생물학, 혹은 생태사회학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의 업적인 이 책은 인간의 행동, 정신의 형성, 사회기능체계를 사유하는 데 무한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으며, 궁극적 초유기체라 할 수 있는 아타니족 잎꾼개미를 비롯하여 침개미인 하르페그나토스에 이르기까지 학문적 성과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과 지적 허영을 만족시키는 데 어떠한 부족도 없다고 하겠다.

 

[오이코필라속 일꾼 개미의 협동; P 195 발췌 수정 인용]

 

 

도심의 한적한 여느 길가에서 빵부스러기 혹은 나뭇잎 조각들을 부지런히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나르는 개미의 작은 행렬을 우연히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저들은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까, 저 일꾼개미와 여왕개미는 어떤 관계일까, 번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그리고 운반한 먹이는 어디에 저장되고 어떻게 배분되는 것일까, 아니 그들의 농장 사료는 아닐까, 그들의 집단은 또한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하는 질문들이 꼬리를 잇는다. 더구나 이성(理性)이 게재할 여지가 없는 저 작은 미물이 조직화된 사회를 구성하고 축조할 수 있는지에 이르면 자연이 부여한 놀라운 경이로움에 매혹되곤 한다.

 

어떤 집단의 일부로서 서로 협동하며 노동을 분담하여 수행하는 듯한 이 곤충들에서 사회성을 보게 되는 것이고, 이들이 이루고 있는 소위 군락이라는 전체적인 어떤 기능체계들의 상상에 이르는 것이다. 바로 이처럼 사회를 형성하고 특성화된 사회계급을 가진 개체를 생산하는 곤충집단을 사회성 곤충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개미를 비롯하여 사회성 벌, 사회성 말벌 등 벌목 곤충들과 흰개미(흰개미는 벌목이 아님)가 포함된다. 특히 진사회성이라 불리기 위해서는 첫째, 조직의 성체는 번식 전담계급과 부분 또는 완전 불임 계급으로 분리되어야 하고, 둘째 한 군락 안에 두 세대 이상의 성체가 함께 살아야 하며, 셋째 완전 또는 불임 계급이 어린 개체(, 애벌레)를 돌봐야한다는 학계의 합의된 정의가 있다.

 

단연 시선을 잡아채는 항목은 기능별로 구분되는 계급이 있어야 진사회성 곤충이라 불릴 수 있다는 지점이다. 그리고 어린 개체를 돌봐야한다는 정의에서 계급 분리의 기원을 발견하게 되는 부분일 것이다. 결국 이들의 사회성이란 어떤 개체인가가 돌봄이 역할을 분담하고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 진사회성 곤충이 개체 사이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군락과 군락간의 경쟁에서 가장 효율적인 형질을 지니도록 선택된 일꾼계급의 생산과 같은계급 조절의 결정규칙이라는 발달 알고리즘을 가지며, 자연 선택의 대상이 되는 군락, 알고리즘 자체의 유전적 진화를 하는 진사회성 곤충을 초유기체라 정의하고 있다.

 

개체가 태어나서 알, 애벌레 등의 단계를 거치며 성()과 계급이 순차적으로 조절 결정되는 일종의 발달 알고리즘의 연구사례를 읽고 있을 때는 신비를 벗겨내는 과학의 지고한 연구관찰과 그 통찰력에 감탄을 연발케 된다. 특히 하나의 동일 집단을 구성하는 개미의 무리인 군락마다 실로 다양한 진화적 차이를 보이는 것에서 자연 선택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군락(群落)’이다라는 다수준 자연선택이론을 접할 때에는 협소한 대중적 상식에 머물던 내 사유의 경계가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할 만큼 과장된 기쁨을 얻게도 된다.

 

이 걸출한 책은 이처럼 두뇌 아니, 이성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곤충이 어떻게 인류와 같은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지, 그들이 자연의 무한한 생태적 압력 속에서 여하히 유효한 선택을 통해 초유기체로 불릴 수 있는 진화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지를 탐색, 규명하는 일련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즈음에 이르면 진사회성이라는 문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앞선 진사회성의 세 가지 조건에서 보여 지듯이 번식 분담이라는 노동 분담의 전()적응특성을 가진 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이들 분담적 특성을 가진 개체가 급기야 해부학적으로도 구별되는 계급으로 생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이것을 진화적 귀환 불능점이라고 부른다. 더 이상 이전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생태적 사건이랄 수 있다.

 

처녀 생식과 양성생식을 모두 하는 반수-배수체 유전을 통해 성별을 결정하는가하면, 발달 중인 암컷 알이나 애벌레가 결정 단계마다 개체의 생리적 조건에 따라 그야말로 단순한 이분법적 경로의 선택으로 계급이 조절 결정되는 이들의 사회계급 생산시스템은 입을 쩍 벌리게 한다.

 

[액상 먹이를 담고 있는 일꾼개미, 일생 저장고 기능을 수행 ; P177 발췌 수정 인용]

 

 

여기서 올더스 헉슬리멋진 신세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예정된 사회계급별로 인공배양과 부화의 조건을 차별하여, 알파, 베타, 감마, 엡실론 등 사회계급에 따라 배양되고 양육된 인간들은 동일한 일의 반복된 노동과 직업에 배치되어 일생을 마친다. 내적 동요가 말살되어 사회는 동요하지 않는다. 즉 필요성의 장치에 의해 유지되는 새로운 세계를 말하는 소설이다. 책에 소개되는 진사회성 벌목 곤충 중 가장 진화된 초유기체인 아타니족 잎꾼개미의 사회가 이러하다. 일꾼개미는 병정개미와 단순한 채집개미, 쓰레기 처리 개미, 알을 돌보는 일꾼 개미, 액상을 저장하는 저장개미로 노동이 세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체구도 해부학적으로 완전히 구분되어 있으며, 이들은 평생을 반복된 노동을 하다가 일생을 마친다. 귀환 불능점을 넘어선 고도로 진화된 개미 종의 사회성은 사실 그리 찬탄과 자연의 경외에 탄복하는 것에 의구심과 거부감을 자아낸다.

 

이들 사회성 곤충의 의사소통과 계급체계의 연구로 집대성된 이 책의 수많은 사례들, 번식 독점을 위한 경쟁, 개체 사이의 공격적 상호작용이 노동 분담을 강화하며, 쓰레기 내버리는 개미가 군락 동료들의 적대행동으로 계속 그 일을 하도록 강요되는 고찰, 합의 도출과 같은 의사결정 체계가 아닌 단지 동료와의 접촉수 감지에 의한 정족수의 다수가 결정하는 혼란 속의 질서, 버섯 농장을 가꾸며, 기생 곰팡이와 벌이는 군비경쟁이나, 둥지의 환기 시스템, 이산화탄소농도조절, 극미한 페로몬의 성분차이가 만들어내는 조직과 번식의 행동 변화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작업마다 최적 효율 달성을 위해 어떻게 융통성있는 행동프로그램으로 노동을 분담하는지에 대한 수천의 사례는 저자들의 주장처럼 인간 두뇌 속 뉴런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나 각종의 컴퓨터 알고리즘의 설계에까지 그 통찰의 결과물이 도움을 주고 있음과 같은 기술적 실익을 획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또한 수많은 종의 진사회성 개미 군락마다 그 사회성 진화정도가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진사회성 사회가 밟아온 진화과정을 이해하고, 그 결과 결정 규칙을 밝히는 데 인간 사회의 진화와 관련하여 유비적 미래 예측의 수단이 되어 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들이 지니고 있지 못한 선()할 수밖에 없는 선천적 이성(理性)이라는 고유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다. ‘귀환 불가능점이란 것은 인류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사회성 곤충들과는 달리 되돌릴 수 없는 진화적 강을 건널지 말지의 선택이 자연이 아닌 인간 자신이 쥐고 있다는 것이다. 최고의 진화종인 아타니족 잎꾼개미와 대비되어 소개되는 침개미 속들의 개미들에서 관찰되는 번식 계급을 위한 투쟁, 일꾼 개미들의 경쟁처럼 고착된 계급사회로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발견되는 술수와 폭력성은 과연 부적응적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야야 할 것 같다.

 

변화 없는 삶, 매일이 동일한 삶, 아마 이러한 영원성, 동일성이란 시간이 멈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살아있는 것일까? 죽은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시간이 백 년 동안 멈추었을 때를 회고하는 백팔십사 세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성중작가의 이슬라라는 소설이 있다. 멈춘 백년이 과연 인간의 삶을 얼마나 의미 그득한 것으로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또 다른 야만과 폭력, 살아 있음에 대한 고통의 외침이 있을 뿐이다. 너무 나간 것 같다. 말하자면 이런 생각이다. 이들 진사회성 곤충들의 사회성 진화와 관련한 유전체적 지식의 습득, 단순한 되먹임 혹은 본질적 행동의 의례화에 따른 신호 의미의 축적과 같은 의사소통의 행태학적 이해, 의사결정의 단순성과 그 규칙의 이해처럼 인간이 미쳐 발견해내 못했던 기술적 이해의 확장과 같은 인류의 반성적 삶의 도움이 아니라, 과학 만능적인 발상에 의거한 인간과 인간사회의 사물적 이해와 자연선택은 곧 옳은 것이라는 논리로 진행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지적 혼돈으로 보이는 상태로부터 어떻게 전체적으로 질서가 창발 되는가? 와 같은 의문에서 출발되는 단순한 결정규칙들의 합리성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곤충생물학의 발전적 연구에 갈채를 보낸다. 여기에는 인류의 반성적 삶에 의미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모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생물학, 특히 진사회성 곤충에 대한 최고의 연구 업적을 담고 있는 인류의 위대한 저작이다. 개미의 생태적 진화의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는 걸작임에 매 페이지마다 탄성을 지르지 않은 곳이 없다. 그만큼 이 책이 지닌 권력은 엄청나다 할 수 있다. 또한 그 만큼의 인간과 인류 사회에 대한 책임도 지니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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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19-01-12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보시다니 대단합니다

필리아 2019-01-12 14:47   좋아요 1 | URL
우연히 기회가 닿았네요. 의사소통과 진사회성의 조건등을 설명하는 장은 가히 독서의 시간이 아깝지않네요. 고맙습니다. 닷슈님~

얄라알라 2019-03-09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파노라마섬 기담 / 인간 의자 대산세계문학총서 15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단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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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이셔널한 촉각 관능의 세계, 그로테스크한 인체예술적 취미의 전형을 볼 수 있다. 농축된 모조품으서의 현실을 황당한 유토피아로 그려낸 수작(秀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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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go 2019-03-01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몰라서 여쭙습니다
대개 수작은 한자를 秀作 이라고 쓰는 것 같은데
殊作이라고 쓰신 이유가 달리 있는지요?

필리아 2019-03-0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vango님이 맞습니다. 한자변환을 무심코 해버렸네요. 수정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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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공동체라는 말에 어떤 기쁨도 위안도 느끼지 못할 것 같아요.”

- P133 유나의 편지에서

 

 

요즘 들어 세상이 두렵다는 생각을 부쩍 많이 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이 사회가 공감 능력이 부재한 인간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깊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감정과 말을 쏟아내면 그뿐, 타인의 느낌과 표현에는 무감하다. 아마 미투’, ‘갑질과 같은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언어들이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타자란 내 욕구를 받아내는 대상일 뿐, 게다가 라는 에고이스트에 방점을 찍어대며 자기애를 부추기는 정신병적 미디어 세계는 세상의 더러움, 사회적 불의에 자신의 공모 사실을 인식할 능력조차 앗아가 버린다. 우리 모두는 공모자다.

 

소설은 감정 노동에 시달리는 항공 승무원 여성의 공포와 불안 가득한 절망적 다짐의 일기로부터 시작된다. “아빠, 여기서 실패하면 군말 없이 삶으로 돌아갈게요.” 그리곤 불명예 제대한 공군대령 홍정근이 자살한 딸아이의 장례식장이라는 낯섦과 혼란의 지대에서 손님처럼 서성거리며 타자성(otherness)과는 괴리된 투박하고 어설프며 고집스럽게 뱉어내는 중얼거림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아내와 딸아이와 결별한 채 10여년의 시간이 지나 주검이 된 딸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성장과정과 일상의 삶, 그녀의 생각과 환경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인 유나의 일기, 유나의 연인이었던 주원’, 정근의 관사시절 운전병이자 유나와 같은 항공사 부기장이었던 영훈, 그리고 유나의 죽음을 이해해보려는 정근의 목소리를 오가며, 오늘 우리네가 상실한 것들, 그래서 추하고 무서운 세상, 그렇게 되어가는 공동체 공모자들의 민낯을 살펴보게 한다.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인 우리들이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고.

 

정말 무심히 저지른다. 타자의 배제와 몰인식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인간들로 넘쳐난다. 타인과의 정서적 교감, 타인의 언어와 표현에 대한 숙고적 경청(reflective listening)이란 말이 생소할 것이다. 이것은 곧 자신의 생각과 감정관리의 미숙함과 자아통제의 어려움으로 나타나곤 한다. 소설 속 정근은 오늘 우리네들의 초상일 것이다.

 

전투기 도입과 정비와 관련한 부정 자금의 수수를 관행처럼 여기던 정근은 내부고발자인 윤 대령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곤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았으므로 결백하며, 어떠한 도의적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부당한 불명예를 뒤집어쓴 자신은 위로받고 이해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 대령의 죽음이라는 세평에 대한 딸 유나의 의문에 정근은 극악한 폭력으로 대응한다. 아내 지숙과 딸을 향한 무자비한 폭행은 정근과 모녀와의 이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정근이 딸의 자살 원인 규명에 나서는 모습은 주변 인간들에게 공감을 지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의미하는 본질을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마 이 본질의 규명은 유나의 일기와 주원의 회고, 영훈의 기억을 통해 바로 지금 오늘의 공동체가 상실한 가치를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타자성이라는 궁극의 가치를 알려주는 듯하다. 그것은 대령 사모의 차량을 운전하는 영훈의 입을 통해, 혹은 유나의 기억을 통해 운전석 옆자리에 앉기를 고수하는 어린 소녀의 배려와 존중의 의미에서, 임신상태에서 상사의 대소사에 노동력을 동원해야하는 병사의 아내인 혜진의 유산을 돌보는 유나의 엄마, 대령 정근의 아내인 지숙의 속 깊은 자기 이해와 배려의 행위에서 인간의 접촉, 그 따스한 정서 교감의 빛을 보여준다.

 

소설의 서사는 이처럼 정근의 자기애와 대척점에서 타자성을 부각하기도하지만 유나를 죽음으로 내몬 사회적 공모관계를 엄폐물인 구조적 형태에서 끌어내 가시화해내기도 한다. 자신의 무능과 배척을 벗어나기 위해, 직장에서 쫓겨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유나와 부기장의 불륜관계라는 누명을 씌워 고발하는 항공사의 엑스맨 제도(숨은 감시자)와 이를 교사하는 임원의 행위, 이를 모른척하는 동료집단의 행태는 인간사회, 그 공동체의 역겹도록 더러운 현실을 드러낸다. 타인의 진심과 비극을 이용하는 인간들의 사회, 우리는 그런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박민정 소설의 문장들은 더할 수 없이 나지막하고 조용하다. 그러나 소박한 어느 문장에도 강직한 의미들이 날카롭게 꽂혀있지 않은 곳이 없다. “상대가 아픈 이야기를 할 때 쓸데없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지 않는 것처럼 타자성이란 타인에 대한 정감 깊은 배려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갓 태어난 아기시절, 엄마의 젖가슴에 작은 손을 올려놓고 그 품에서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안정감을 느끼던 그 기억을. 내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타인의 피부와 체온을 느끼며 교감할 줄 아는 그 정감의 무의식이 아닐까? 아기의 작은 동작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베풀어주던 타인, 그 배려의 손길을.

 

내가 살기 위해서 동료를 죽이는 것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것, 사회적 불의에서 자신만은 쏙 빠져나와 타자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것, 자기를 알려고 해 본적이 없는 결코 반성적 사유라는 것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것, 이 세상의 더러움에 자신도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능력이 없는 것, 정근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아니 우리가 느껴야 할 것들이지 않을까? 유나가 느껴야 했던 분노와 배신, 그리고 그녀가 넘어서 마주한 슬픔과 그 책임감의 실체란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지 않을까?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유나의 글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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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장편소설 가면의 고백을 다시금 읽게 된 동기가 있다. 철봉에 매달린 동급생 오미(omi)의 상체에 대한 매혹을 바라보면서 화자인 가 떠 올리는 인상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귀도 레니(Guido Reni)’의 그림, 성 세바스찬(St. Sebastian)으로 비롯된 일종의 모방작인,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를 피사체로 하여 사진작가 시노야마 기신(篠山紀信)’이 촬영한 동명의 사진에 가해지는 논의들에 대한 어떤 확인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분히 키치(kitsch)적인 이 사진작품과 함께 사진작가 호소에 에이코(細江英公)’가 미시마 유키오를 피사체로 촬영, 1963년 간행된 나체 사진집 장미형(薔薇刑)은 여성의 나체와 달리 대상화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주체화되며 우상화되려는 미시마의 의식을 해독하는 증거로 제시되곤 한다. 사진집의 표지는 피사체를 객체화하려는 사람의 시선을 제압하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응시하는 미시마의 사진으로 꾸며져 있는데, 바로 이 미시마의 시선에 내재된 의미의 독해가 그의 첫 장편소설인 가면의 고백이 진정 무엇을 말하려했는가에 대한 상보적(相補的) 재료가 되어 주리라는 생각에서이다

    

 

사진: 細江英公(호소에 이이코)撮影三島由紀夫를 피사체로 한 裸体 写真集 表紙

      

미시마 유키오의 반()자전적 작품으로 읽히는 이 소설은 화자인 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불안, 이에 대한 자의식의 끝없는 정상화라는 자기기만과의 투쟁, 그리고 성적 자기실현에 이르는 시련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나의 모든 존재는 모종의 이교도적인 환희로 뒤흔들렸다. 내 피는 끓어오르고 내 육체의 기관은 분노의 빛으로 넘실거렸다. ...(중략)... 나의 내부로부터 어둡고 번쩍거리는 것이 빠른 걸음으로 공격해 올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중략)... 아득한 도취와 함께 튀어올랐다.” (출처: 문학동네 가면의 고백P 48 에서)

 

화자의 아버지가 사온 화보집에 실린 귀도 레니의 그림, <성 세바스찬>을 보고 최초의 ejaculatio(射精)를 경험하는 묘사이다. 이것은 탄탄한 근육질의 어깨와 가슴을 지닌, 또한 금지의 반역자이기도 한 동급생 오미의 육체에 대한 성적 갈망과 분출에 연결되어 혼란스러운 그의 성적 정체성을 묘사한다. 자신과 같은 또래의 소년들과는 다른 자신의 발견인데, 결코 친구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기에, 그들의 호기심에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 남자아이가 혼자일 때 느끼는 것을 추리하기위해 수많은 소설들에 이야기되는 인생의 모습들을 세심하게 읽기까지 한다.

    

 좌측: Guido Reni , St. Sebastian, 우측: 三島由紀夫 St. Sebastian

 

결국 내 관심사는 일견 미시마 유키오의 자전적 상()이기도 한 소설의 화자가 동성의 남자에게만 육체적 욕망을 지니는 자기이해로부터 시작된 외견적 연기와 내면의 기만과 저항, 그리고 수용의 반복을 거듭하며 세상의 윤리적 시선을 어떻게 포섭해 나가느냐는 문제이다. 아마 다음의 문장은 화자의 정체성 성숙의 중간 기착지, 그 경유의 지대로 적절할 것 같다.

 

“....(전략)...남의 눈에 나의 연기로 비치는 것이 나로서는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었고, 남의 눈에 자연스러운 나로 비치는 것이 곧 나의 연기라는 메커니즘을 그 무렵부터 나는 희미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육체적 감각에 대한 불안, 완벽하게 자신의 천성을 배반하기 위한 의식적인 연기에 돌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의 여동생인 소노코거짓된 육감의 인공적인 합금으로만 이루어진 감정으로만 바라보던 여자”, 즉 위장된 연기가 아니라 존재의 밑바닥이 뒤흔들리는 듯한 슬픔의 감정으로 느끼게 됨으로써 전환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것조차 남성 고유의 정체성으로 향하려는 의지의 시작이라는 자기의식의 강요에 불과하다. 그의 침잠한 내면의 소리는 어떤 여자에게서도 비열한 욕망이라는 것을 품어 본적 없는 너 자신을 잊어버릴 셈인가? 소노코의 벗은 몸을 상상해 본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어?” 하고 묻는다. “애초에 육체적 욕망에 전혀 뿌리를 두지 않는 사랑 따위가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명백한 배리(背理)가 아닌가?” 가 답변일 것이다. 이제 소설의 서사적 진전은 잠시 미루고, 욕망과 금욕, 수난과 속죄, 고통과 황홀, 남성의 동일화와 여성의 동일화 사이에 존재하는 귀도 레니<성 세바스찬>이 지닌 성을 넘어선 도상학적 양의성에 반발, 강력하게 반시대적 남성성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미시마 유키오<성 세바스찬>을 얘기할 때가 된 것 같다.

 

미시마 유키오가 표현한 이 그림이 페미니즘으로부터의 이의신청을 받아야 하는 그야말로 순전한 마초이즘의 발산에 불과하며, 성적인 시각의 한 가지 편향을 뒷받침하는 그런 것이기만 할까하는 의문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충분한 요소들과 증거가 있다. “성 세바스찬의 그림에 매혹당한 이래로 나는 벌거숭이가 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머리위에서 교차시켜보는 버릇이 생겼다. ...(중략)... 그러자 내 시선이 겨드랑이로 향했다. 불가해한 정욕이 솟구쳐 올랐다.” 가면의 고백에 등장하는 몽상의 문장이다. 평자들은 이 몽상을 몰래 엮어 넣은 것이 미시마가 표현하고 있는 <성 세바스찬>이며, 이것은 찍히는 대상이 우위를 확보한 대상화의 전도(顚倒)라고까지 한 장미형의 미시마와 함께 남근중심적 성의 문화사회적 왜곡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의 화자가 하는 내적 의식과 행위는 생물학적이 아닌 사회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성()에 순응하려는 것이 아니다. 소노코의 청혼을 비겁하게 거절하고 나서 타인의 아내가 된 소노코와의 재회이후 재개되는 만남의 마지막 장면인 댄스장에서의 한 묘사를 보자. 앞에 앉아있는 소노코를 잊고 울룩불룩한 팔 근육의 젊은 남자에 시선이 빼앗겼던 화자가 마침내 두 사람의 재회가 끝나는 시간, 젊은 남자가 있었던 해가 들이치는 의자 쪽을 훔쳐보는 시선이다. 그는 최종적으로 젠더, 사회적 규정을 배반하는 것이다.

 

성적 시각의 편향을 고착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며, 성의 대상화를 남성인 자신의 나체를 통해 부인하려는 역설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자신의 인공적 정상성이라는 인위적 연출이라는 위험한 작업에 소노코를 끌어들인 것을 자각, 성찰하는 것에서도 화자의 최후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을 무익하고 정교한 하나의 역설이라고 인식했던 미시마의 시적 이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지 않을까? 다름의 자기 인정이 그토록 어려웠던 것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이른다. 타자의 피부에 이르지 못하는 자신의 욕망을 과감하게 드러낸 배리(背理:역설)의 미학, 혹은 의지의 미학이라 부름이 타당치 않을까? 아니 육체와 인간의지의 치열한 투쟁의 그 공존과 균형을 향한 미학이라 하고 싶다. 오늘 우리들은 이해의 다름에 더욱 넓은 시선을 갖도록 요구되는 환경에 있다. 시간의 변화, 시대의 감각적, 지적 수용의 변화는 인식의 확장을 또한 요구한다동성애등 퀴어가 시대의 어휘가 된 요즘 다시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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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근대 - 소리.신체.표상 감각의 근대 1
쓰보이 히데토 지음, 박광현 외 옮김 / 어문학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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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중에서 이 책의 목적은 감각을 통해서 사고나 언어의 의미를 다시 묻고 혹은 사고나 언어가 어떻게 감각이나 감성을 구축해왔는지를 물어, ‘근대화 과정속에서 감각의 문제가 어떤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미쳤는지 고찰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감각이 표현해내는 현상들과 감각관련 담론의 분석을 통해서 그것의 현재적인 문제성을 파악하여 개인과 공동체의 분열된 감각의 균형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저자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은 오늘 우리네 사회를 소셜 미디어, 인터넷의 가속도적인 보급으로 독서, 문자 문화의 쇠퇴와 감각편중의 세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부분적으로는 옳은 진단이지만 또 한편으론 옳지 않다. 네트워크 사회가 지니는 확산과 획일성으로 오히려 감각은 균질화되고, 통제되고 있다할 수 있으며, 개인과 개인의 접촉(오감에 의한) 감소로 인해 감각의 현재성을 상실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감각이 지식과 정보라는 정신세계에 떠밀려 열등한 것으로 폄훼되고 있다고까지 생각된다. 이처럼 실재적 감각의 상실은 혐오, 비혼, 혼밥과 같은 한국인의 삶을 대표하는 어휘가 상징하는 그것일 것이다. 즉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회피, 피곤함, 불안으로 타자성을 잃어버리는 삭막한 세상을 낳고 있지 않는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에서 유입되는 새로운 색채와 물질, 정신세계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를 관통하며 일본이 근대화의 세례를 받던 시기이다. 책은 바로 이 시기의 문학과 예술의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그네들의 삶에 침입, 투영되었던 감각의 수용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래서 오늘 우리네 사회문화적, 정치적 이해를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기반으로서의 의미 있는 검토 주제가 되어준다.

 

1. 자의식 없는 관찰자들의 세계

 

책은 <고양이의 관상학>이라는 제목으로 제 1장을 연다. 1905년에 집필되고 1907년에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화자인 고양이가 관찰한 상황의 추이를 실시간으로 고하는 사생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즉 발화 능력을 갖지 못한 존재가 보고, 들은 것을 재현(쓰는)하는, 방관자로서의 고양이 시점으로 인해 지극히 정치적인 논의를 예견케 한다. 자아를 향한 물음, 자기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고양이, 자기 상실과 맞바꿔 타자를 식별하려는 시선과 그 정열에서 근대적 병리의 뿌리를 발견하는 저자의 해독은 오늘 우리네 메마른 지식의 오만함으로 젠체하는 몽매한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타자를 읽는 세련된 기술만 읽힌 자의식이 결락된, 또한 권력장치에 의한 시선 관리에만 능한 현대인의 초상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마 당대 근대 일본인들은 감시하고 식별하는 관찰자의 시선, 외면이 내면을 규정하는 방관자적 이기주의에 능한 인간의 계발이라는 기술적이고 처세적인 경쟁에 몰입하고 있었다는 이해일 것이다. 또한 관찰이라는 시선의 일방통행성타자를 어떻게 볼까?”라는 비평만을 할 줄 아는 기형적인 인간을 양산했으니 이 역시 오늘의 우리네 지식인의 모습과 닮아있어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한다. 등장인물인 하네다 하나코를 묘사하는 고양이의 주절거림에 얽혀있는 골상학, 황금률, 악명 높았던 롬브로소의 범죄인 식별학과 같은 인종과 계층 차별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서구의 의사 과학이 시선의 계층성, 시각적 권력의 고착화를 자연화하고 갱신하는데 공헌하였음을 설명하는 장에서는 그야말로 음험한 지식의 기술적 사용의 이기성을 확인하는 수확을 얻게도 된다.

 

이 관찰자적 시선의 성찰은 제2장에서 계속되는데, 역시 나쓰메 소세키의 피안 지날 때까지의 화자이자 청자로 등장하기도하는 탐정 다가와 게이타로를 통해 범례적인 욕망의 메커니즘이 노골적으로 구상되고있는 그 공허함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자기목적화한 탐정행위의 속성인 훔쳐보기의 증상에서 혐오와 폭력의 역겨움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낯선 해독이 아닐 것이다. 탐정의 숨겨진 욕망에 대상이 되는 여성 지요코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소름이 돋는다. 한편 본 장의 <도시의 표정을 읽는다>는 절()에서 고찰하고 있는 이주민이 몰려드는 대도시 도쿄의 담론을 통해 전락하는 당대의 인간군상을 대면하는 것도 또다른 사유의 단초를 제시해 주기도 한다.

 

2. 타자를 상실한 나르시즘, 그리고 키치

 

잘 알려진 소설 묵동기담의 작가 나가이 가후가 도쿄 최대의 사창굴인 다마노이의 골목세계에 대한 추억의 변을 시작으로 하는 3<주니카이의 풍경>에 이르면, 1890년에 세워진 정식명칭 료운카쿠로 불리는 아사쿠사의 12(주니카이)짜리 도쿄내 최고층 건축물()과 그 아래의 난삽한 미궁세계가 어울려 빚어내는 근대 일본의 나르시즘과 거세될 수밖에 없었던 치부를 비춘다. “주니카이는 도쿄 명물인 기묘한 말뚝 버섯, 포경상태의 음경이라고 읊었던 가네코 마쓰하루의 시()처럼 꿈과 환영이 쌓아올린 빈약한 남근으로서의 근대 일본인의 시선, 그 욕망을 엿보게 한다. 자기를 상실한 세계의 음영을 바라보는 오늘의 내 시선이 교차하며, 서울의 저 높은 쾌락의 고도가 떠오른다.

 

, 이 책의 모든 장()을 얘기할 의도는 없다. 감각(感覺)의 표상으로서 내게 어떤 사유의 꿈틀거림을 제공했던 부분을 언급하려는 것뿐이다. 사실 시와 사진예술을 통해 노스탤지어를 이야기하는 4<향수의 시각>이나, 역시 잃어버린 근대 이전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말하는 5<산과 시네마>는 내게 동시대성의 담론을 발견해내는데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비로소 시각적 표상이 아닌 촉각을 탐색하는 6<손가락 끝의 시학>을 만나게 된다. 1917년 발표된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시()에서 발견되는 초점화된 촉각에 의한 관능과 위로의 모티브로부터 한 개인의 퍼스낼리티로 통합되지 못하고 페티시한 쾌락에 머물러 있는 단편화와 나르시스적 병성(病性)이라는 유동화의 도취감을 당대의 정신으로 읽어내는 부분은 꽤 강한 이미지로 남는다.

 

특히 발생학적으로 아포토시스(apotosis; 計劃細胞死)에 의해 손이 형성되는 생명과학이론으로부터 손가락 끝의 촉각이 자멸, 자기상실이라는 상실된 통증을 댓가로 예민함, 세계와 타자와의 접촉능력을 획득하고 있다는 발상은 접촉(touch)이라는 촉각이 타자와의 정서교감이라는 타자성의 시작이자 본질이 아닐까하는 심적 믿음까지 가져온다. 인간 피부의 인류학적 권위자인 애슐러 몬터규가 쓴 터칭(Touchng)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초기 발달과정에서 꼭 겪어야 하는 촉각 경험이 떠오른다. 타자와의 소통은 물론, 평화와 화합을 유지하는 데 촉각행위의 경험을 강조하는 이 문장은 오늘 소외와 관계의 피로에 시달리는 우리네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게 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회복되어야 할 촉각의 절대적 배려와 신뢰의 손길, 그 타자성의 지고함을 말이다.

 

가면의 고백을 쓴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피사체가 된 그의 나체 사진집인 장미형의 사진을 중심으로 촉각적 시각사디즘=마조히즘의 자상증후군에 시달리는 근대 일본인의 비틀린 초상을 독해하는 6<세바스찬의 피부>는 후각을 얘기하는 8장과 9장과 함께 이 책의 백미(白眉)중 백미라 하고 싶다. 더구나 다니자키 준이치로금색의 죽음(金色)과 함께 타자의 시선에 의해 소유, 객체화되지 않으려 하는 자기애적 기호와 마초적 남성성의 모순적 충돌을 통해 근대일본의 형이상학적 한계를 해독해내는 부분은 교양주의의 노예가 된 일본문화의 추악한 모방성의 질타로까지 이어진다. 물론 모조품의 근대, 키치(kitsch)로서의 근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예술창조 의지조차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대 일본에 넘쳐났던 빈 수레와 같은 졸부취미의 요란함은 역시 오늘의 한국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오랜 도상학적 규범이 축적된 귀도 레니가 그린 성 세바스찬의 순교를 모방한 미시마 유키오의 남근중심적 일탈의 사진은 새로운 의문을 갖게 한다. 촉각, 통각적 세계가 추방된 일방통행적 섹슈얼리티의 강고한 요구를 보는 세평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와는 달리 1981년에 발표된 페미니스트 작가인 마쓰우라 리에코가 쓴 소설 세바스찬의 여주인공인 마조히스트 마키코를 통해 표현하는 그 거부는 지금의 미투와 더불어 신체에 성이 제한되어 살아가야하는 우리네의 타자 접촉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욕망과 동경의 아프리오리(a priori)한 자연법칙을 생각게 한다. 다른 성과 성차이를 배제한 미시마와 다니자키를 일신한 오늘의 믿음과 가치를 다시금 반추하게 된다.

 

3. 후각, 계급화, 젠더화 - 그 차별의 감각

 

책의 마지막장을 이루는 8<맡아지는 언어로>9<향기로운 텍스트>는 근대의 신체와 후각표상이라는 부제처럼 시각중심주의에서 주변부위로 밀려난 후각에 내재하는 굴절된 편견과 계층화와 같은 권력 기호의 기능으로 작동하게 되는 당대의 문화정치적 추이를 따라가며 사회적 시선의 확장을 위한 커다란 논의라 하겠다. 도시화가 급격하게 추진되면서 당대 도쿄의 악취는 사람들의 공통화제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곧 도시민의 감수성 및 모럴로 이전되고, 편견적 담론이 통속적으로 과학화되어 차별화, 계층화라는 후각의 정치학을 낳았다는 것이다.

 

결국 냄새가 위생이나 경제상의 부()의 가치를 짊어지게 됨으로써 후각이라는 감각 자체가 폄하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로써 냄새는 악취라는 공공감각이 되어 저급한 계급의 상징이 되고, 에로스적 감각을 일으키는 향수라는 인공적 향기는 개별 감각이 되어 상류계급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그런데 이 냄새가 세기말 퇴폐주의와 함께 낭만화 극화하는 요소로 변질되는 것에서 자연주의와 상징주의가 혼합되어 유입된 일본의 근대 문학과 예술 세계는 근대인의 감수성의 상징으로 반전시키는 퇴화 병리의 증후를 보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냄새가 사적인 관계나 나르시스적인 신체 영역에서 이탈하여 널리 공유되면 즉시 불쾌한 악취로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계급을 분절하는 권력의 기호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간바라 아리아케라는 시인의 1905년에 발표된 자서(自序) 속 한 구절을 보면 당대 후각에 대한 양의성 논란, 즉 감각표상의 악전고취를 보게된다.

 

... (전략) ...

영혼의 향미(香味)를 느끼는 것은 악취를 맡는 관능이다.

후각을 비관(卑官)이라 칭함이란 절실한 관능의 힘을 모르는 자들이나 하는 말이리라.

 

더욱 흥미로운 논의는 색, 형태, 소리처럼 재현하거나 재생될 수 있는 감각과 달리 재수용되는 것이 불가능한 냄새를 기록하려는 시도이다. 기록의 영역이 아닌 기억의 영역인 냄새를 도식화려는 것, 냄새의 언어화에 대한 몽상에 짙게 드리운 에로스적 표상에의 편입을 통한 고상화는 꿈틀거리는 남성적 욕망의 굴절된 젠더의식의 비대칭성을 발견케 한다. 다시금 회귀한다. 냄새를 맡아서 구별하는 남자, 여자라는 향기로운 텍스트를 해독하는 남자, 포로노그라피의 무대를 발견한 것이다. 결국 냄새는 계층화, 성차별, 인종의 구별과 같은 위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이해일 것이다. 이 두 개의 장은 후각에 대한 넘칠 듯 풍부한 담론과 문학작품의 인용으로 빼곡하다. 에밀 졸라의 나나, 파트릭 쥐스킨트의 향수에서부터 카를 위스망스의 거꾸로, 다무라 도시코의 여작가(女作家선혈(生血), 다자이 오사무의 여학생(女學生)에 이르기까지 냄새와 향기에 어린 문화적 해독의 다양함에서 인간과 그 사회의 정치적 욕망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책은 감각의 기원을 통한 탐색을 통해 인간과 그 사회가 감각을 어떻게 문화적, 사회정치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인식하고 표출하는 감각의 지형을 되새겨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수하게 인용, 분석되는 소설과 시, 그리고 예술작품과 도시풍경의 산책을 제시하여 근대 문학에 대한 비교문학적 읽기와 문화비평서로서의 탐구 기틀도 마련해주고 있으니 가히 즐겁게 생각하는 독서가 되어줄 터이다. 내겐 읽는 동안 감각과 타자성의 회복과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사유가 떠나지 않았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가 감각편중이 아니라 감각 상실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만, 촉각의 고유한 영역인 타자성의 고찰 없음에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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