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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근대 - 소리.신체.표상 ㅣ 감각의 근대 1
쓰보이 히데토 지음, 박광현 외 옮김 / 어문학사 / 2018년 11월
평점 :
서문 중에서 이 책의 목적은 “감각을 통해서 사고나 언어의 의미를 다시 묻고 혹은 사고나 언어가 어떻게 감각이나 감성을 구축해왔는지”를 물어, ‘근대화 과정’ 속에서 감각의 문제가 어떤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미쳤는지 고찰하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감각이 표현해내는 현상들과 감각관련 담론의 분석을 통해서 그것의 현재적인 문제성을 파악하여 개인과 공동체의 분열된 감각의 균형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저자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은 오늘 우리네 사회를 소셜 미디어, 인터넷의 가속도적인 보급으로 독서, 문자 문화의 쇠퇴와 감각편중의 세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부분적으로는 옳은 진단이지만 또 한편으론 옳지 않다. 네트워크 사회가 지니는 확산과 획일성으로 오히려 감각은 균질화되고, 통제되고 있다할 수 있으며, 개인과 개인의 접촉(오감에 의한) 감소로 인해 감각의 현재성을 상실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감각이 지식과 정보라는 정신세계에 떠밀려 열등한 것으로 폄훼되고 있다고까지 생각된다. 이처럼 실재적 감각의 상실은 혐오, 비혼, 혼밥과 같은 한국인의 삶을 대표하는 어휘가 상징하는 그것일 것이다. 즉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회피, 피곤함, 불안으로 타자성을 잃어버리는 삭막한 세상을 낳고 있지 않는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에서 유입되는 새로운 색채와 물질, 정신세계는 메이지, 다이쇼 시대를 관통하며 일본이 근대화의 세례를 받던 시기이다. 책은 바로 이 시기의 문학과 예술의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그네들의 삶에 침입, 투영되었던 감각의 수용 현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래서 오늘 우리네 사회문화적, 정치적 이해를 반성적으로 사유하는 기반으로서의 의미 있는 검토 주제가 되어준다.
1. 자의식 없는 관찰자들의 세계
책은 <고양이의 관상학>이라는 제목으로 제 1장을 연다. 1905년에 집필되고 1907년에 발표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화자인 고양이가 관찰한 상황의 추이를 실시간으로 고하는 사생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에, 즉 발화 능력을 갖지 못한 존재가 보고, 들은 것을 재현(쓰는)하는, 방관자로서의 고양이 시점으로 인해 지극히 정치적인 논의를 예견케 한다. 자아를 향한 물음, 자기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고양이, 자기 상실과 맞바꿔 타자를 식별하려는 시선과 그 정열에서 “근대적 병리”의 뿌리를 발견하는 저자의 해독은 오늘 우리네 메마른 지식의 오만함으로 젠체하는 몽매한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타자를 읽는 세련된 기술만 읽힌 자의식이 결락된, 또한 권력장치에 의한 시선 관리에만 능한 현대인의 초상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마 당대 근대 일본인들은 감시하고 식별하는 관찰자의 시선, 외면이 내면을 규정하는 방관자적 이기주의에 능한 인간의 계발이라는 기술적이고 처세적인 경쟁에 몰입하고 있었다는 이해일 것이다. 또한 관찰이라는 ‘시선의 일방통행성’은 “타자를 어떻게 볼까?”라는 비평만을 할 줄 아는 기형적인 인간을 양산했으니 이 역시 오늘의 우리네 지식인의 모습과 닮아있어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한다. 등장인물인 ‘하네다 하나코’의 ‘코’를 묘사하는 고양이의 주절거림에 얽혀있는 골상학, 황금률, 악명 높았던 롬브로소의 범죄인 식별학과 같은 인종과 계층 차별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서구의 의사 과학이 시선의 계층성, 시각적 권력의 고착화를 자연화하고 갱신하는데 공헌하였음을 설명하는 장에서는 그야말로 음험한 지식의 기술적 사용의 이기성을 확인하는 수확을 얻게도 된다.
이 관찰자적 시선의 성찰은 제2장에서 계속되는데, 역시 나쓰메 소세키의 『피안 지날 때까지』의 화자이자 청자로 등장하기도하는 탐정 ‘다가와 게이타로’를 통해 “범례적인 욕망의 메커니즘이 노골적으로 구상되고”있는 그 공허함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자기목적화한 탐정행위의 속성인 훔쳐보기의 증상에서 혐오와 폭력의 역겨움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낯선 해독이 아닐 것이다. 탐정의 숨겨진 욕망에 대상이 되는 여성 ‘지요코’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소름이 돋는다. 한편 본 장의 <도시의 표정을 읽는다>는 절(節)에서 고찰하고 있는 이주민이 몰려드는 대도시 도쿄의 담론을 통해 전락하는 당대의 인간군상을 대면하는 것도 또다른 사유의 단초를 제시해 주기도 한다.
2. 타자를 상실한 나르시즘, 그리고 키치
잘 알려진 소설 『묵동기담』의 작가 ‘나가이 가후’가 도쿄 최대의 사창굴인 다마노이의 골목세계에 대한 추억의 변을 시작으로 하는 3장 <주니카이의 풍경>에 이르면, 1890년에 세워진 정식명칭 료운카쿠로 불리는 아사쿠사의 12층(주니카이)짜리 도쿄내 최고층 건축물(탑)과 그 아래의 난삽한 미궁세계가 어울려 빚어내는 근대 일본의 나르시즘과 거세될 수밖에 없었던 치부를 비춘다. “주니카이는 도쿄 명물인 기묘한 말뚝 버섯, 포경상태의 음경”이라고 읊었던 ‘가네코 마쓰하루’의 시(詩)처럼 꿈과 환영이 쌓아올린 빈약한 남근으로서의 근대 일본인의 시선, 그 욕망을 엿보게 한다. 자기를 상실한 세계의 음영을 바라보는 오늘의 내 시선이 교차하며, 서울의 저 높은 쾌락의 고도가 떠오른다.
아, 이 책의 모든 장(章)을 얘기할 의도는 없다. 감각(感覺)의 표상으로서 내게 어떤 사유의 꿈틀거림을 제공했던 부분을 언급하려는 것뿐이다. 사실 시와 사진예술을 통해 노스탤지어를 이야기하는 4장 <향수의 시각>이나, 역시 잃어버린 근대 이전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말하는 5장 <산과 시네마>는 내게 동시대성의 담론을 발견해내는데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다고 하겠다.
그리고 비로소 시각적 표상이 아닌 촉각을 탐색하는 6장 <손가락 끝의 시학>을 만나게 된다. 1917년 발표된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시(詩)에서 발견되는 “초점화된 촉각에 의한 관능과 위로의 모티브”로부터 한 개인의 퍼스낼리티로 통합되지 못하고 페티시한 쾌락에 머물러 있는 단편화와 나르시스적 병성(病性)이라는 유동화의 도취감을 당대의 정신으로 읽어내는 부분은 꽤 강한 이미지로 남는다.
특히 발생학적으로 아포토시스(apotosis; 計劃細胞死)에 의해 손이 형성되는 생명과학이론으로부터 손가락 끝의 촉각이 자멸, 자기상실이라는 상실된 통증을 댓가로 예민함, 세계와 타자와의 접촉능력을 획득하고 있다는 발상은 접촉(touch)이라는 촉각이 타자와의 정서교감이라는 타자성의 시작이자 본질이 아닐까하는 심적 믿음까지 가져온다. 인간 피부의 인류학적 권위자인 ‘애슐러 몬터규’가 쓴 『터칭(Touchng)』의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데 초기 발달과정에서 꼭 겪어야 하는 촉각 경험”이 떠오른다. 타자와의 소통은 물론, 평화와 화합을 유지하는 데 촉각행위의 경험을 강조하는 이 문장은 오늘 소외와 관계의 피로에 시달리는 우리네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게 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회복되어야 할 촉각의 절대적 배려와 신뢰의 손길, 그 타자성의 지고함을 말이다.
『가면의 고백』을 쓴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피사체가 된 그의 나체 사진집인 『장미형』의 사진을 중심으로 ‘촉각적 시각’을 “사디즘=마조히즘”의 자상증후군에 시달리는 근대 일본인의 비틀린 초상을 독해하는 6장 <세바스찬의 피부>는 후각을 얘기하는 8장과 9장과 함께 이 책의 백미(白眉)중 백미라 하고 싶다. 더구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금색의 죽음(金色の死)』과 함께 타자의 시선에 의해 소유, 객체화되지 않으려 하는 자기애적 기호와 마초적 남성성의 모순적 충돌을 통해 근대일본의 형이상학적 한계를 해독해내는 부분은 교양주의의 노예가 된 일본문화의 추악한 모방성의 질타로까지 이어진다. 물론 모조품의 근대, 키치(kitsch)로서의 근대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려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예술창조 의지조차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대 일본에 넘쳐났던 빈 수레와 같은 졸부취미의 요란함은 역시 오늘의 한국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오랜 도상학적 규범이 축적된 ‘귀도 레니’가 그린 《성 세바스찬의 순교》를 모방한 ‘미시마 유키오’의 남근중심적 일탈의 사진은 새로운 의문을 갖게 한다. 촉각, 통각적 세계가 추방된 일방통행적 섹슈얼리티의 강고한 요구를 보는 세평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와는 달리 1981년에 발표된 페미니스트 작가인 마쓰우라 리에코가 쓴 소설 『세바스찬』의 여주인공인 마조히스트 ‘마키코’를 통해 표현하는 그 거부는 지금의 미투와 더불어 신체에 성이 제한되어 살아가야하는 우리네의 타자 접촉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욕망과 동경의 아프리오리(a priori)한 자연법칙을 생각게 한다. 다른 성과 성차이를 배제한 미시마와 다니자키를 일신한 오늘의 믿음과 가치를 다시금 반추하게 된다.
3. 후각, 계급화, 젠더화 - 그 차별의 감각
책의 마지막장을 이루는 8장 <맡아지는 언어로>와 9장 <향기로운 텍스트>는 근대의 신체와 후각표상이라는 부제처럼 시각중심주의에서 주변부위로 밀려난 후각에 내재하는 굴절된 편견과 계층화와 같은 권력 기호의 기능으로 작동하게 되는 당대의 문화정치적 추이를 따라가며 사회적 시선의 확장을 위한 커다란 논의라 하겠다. 도시화가 급격하게 추진되면서 당대 도쿄의 악취는 사람들의 공통화제였던 모양이다. 이것은 곧 도시민의 감수성 및 모럴로 이전되고, 편견적 담론이 통속적으로 과학화되어 차별화, 계층화라는 후각의 정치학을 낳았다는 것이다.
결국 냄새가 위생이나 경제상의 부(負)의 가치를 짊어지게 됨으로써 후각이라는 감각 자체가 폄하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로써 냄새는 악취라는 공공감각이 되어 저급한 계급의 상징이 되고, 에로스적 감각을 일으키는 향수라는 인공적 향기는 개별 감각이 되어 상류계급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그런데 이 ‘냄새’가 세기말 퇴폐주의와 함께 낭만화 극화하는 요소로 변질되는 것에서 자연주의와 상징주의가 혼합되어 유입된 일본의 근대 문학과 예술 세계는 ‘근대인의 감수성’의 상징으로 반전시키는 퇴화 병리의 증후를 보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냄새가 사적인 관계나 나르시스적인 신체 영역에서 이탈하여 널리 공유되면 즉시 불쾌한 악취로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계급을 분절하는 권력의 기호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간바라 아리아케’라는 시인의 1905년에 발표된 자서(自序) 속 한 구절을 보면 당대 후각에 대한 양의성 논란, 즉 감각표상의 악전고취를 보게된다.
... (전략) ...
영혼의 향미(香味)를 느끼는 것은 악취를 맡는 관능이다.
후각을 비관(卑官)이라 칭함이란 절실한 관능의 힘을 모르는 자들이나 하는 말이리라.
더욱 흥미로운 논의는 색, 형태, 소리처럼 재현하거나 재생될 수 있는 감각과 달리 재수용되는 것이 불가능한 냄새를 기록하려는 시도이다. 기록의 영역이 아닌 기억의 영역인 냄새를 도식화려는 것, 냄새의 언어화에 대한 몽상에 짙게 드리운 에로스적 표상에의 편입을 통한 고상화는 꿈틀거리는 남성적 욕망의 굴절된 젠더의식의 비대칭성을 발견케 한다. 다시금 회귀한다. 냄새를 맡아서 구별하는 남자, 여자라는 향기로운 텍스트를 해독하는 남자, 포로노그라피의 무대를 발견한 것이다. 결국 냄새는 계층화, 성차별, 인종의 구별과 같은 위계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이해일 것이다. 이 두 개의 장은 후각에 대한 넘칠 듯 풍부한 담론과 문학작품의 인용으로 빼곡하다. 에밀 졸라의 『나나』, 파트릭 쥐스킨트의 『향수』에서부터 카를 위스망스의 『거꾸로』, 다무라 도시코의 『여작가(女作家』와 『선혈(生血)』, 다자이 오사무의 『여학생(女學生)』에 이르기까지 냄새와 향기에 어린 문화적 해독의 다양함에서 인간과 그 사회의 정치적 욕망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책은 감각의 기원을 통한 탐색을 통해 인간과 그 사회가 감각을 어떻게 문화적, 사회정치적으로 수용하고 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오늘,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인식하고 표출하는 감각의 지형을 되새겨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수하게 인용, 분석되는 소설과 시, 그리고 예술작품과 도시풍경의 산책을 제시하여 근대 문학에 대한 비교문학적 읽기와 문화비평서로서의 탐구 기틀도 마련해주고 있으니 가히 즐겁게 생각하는 독서가 되어줄 터이다. 내겐 읽는 동안 감각과 타자성의 회복과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사유가 떠나지 않았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가 감각편중이 아니라 감각 상실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만, 촉각의 고유한 영역인 ‘타자성’의 고찰 없음에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