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과학과 사회 5
파스칼 피크 외 지음, 배영란 옮김 / 알마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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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앞서 이 질문을 우리가 사유하여야 할 가치란 무엇인가? 가 외려 보다 근원적인 질문처럼 여겨진다. 생물학적, 고인류학적, 철학적 답변 등 이미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무수한 변주곡들이 존재 할 것이다. 이 난해한 정체성을 규명하는 것이 인간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어떠한 효용이 있기는 한 것인가.
오늘의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자연의 내부에 깊숙이 들어가 그 근원을 조작하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초래하는 우려할 만한 징후들에 불안과 공포가 섞인 경고와 자성의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의 한 부분에 불과한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대한 인식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 차별되는 무엇을 지닌 예외적 존재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질문이 되고,‘인간은 무엇인가?’하는 동일한 질문으로 회귀하게 된다.
그렇다. 이 질문은 인간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의 과학적 오만과 사상적 기만이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하는 검토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이 저작에 수록된 생물학자, 고인류학자, 철학자 3인이 이 본원적 질문에 가지는 답변은 그래서 인류의 행위에 대한 나름의 가치기준이 될 수 있고, 향후의 행보에 유용한 좌표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생물학자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정의할까? 신경생물학자인 ‘장디디에 뱅상’은 뜻밖의 답을 하고 있다. 독립영양생물과 종속영양생물로 분류되는 자연계에 ‘인류영양생물’이라는 새로운 영역의 추가를 주장한다. 모든 자연계의 생물과 달리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양분을 얻고 산다.”는 의미에서 별도의 분류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일견 공감할 수 있지만, 이러한 세분을 하게 되면 여타 생물들의 독특한 특성을 전부 반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마 지금의 분류체계는 붕괴되고 말지 않을까. 왠지 인간의 차별성에만 시선을 맞춘 석연찮은 오만함만 느껴진다.
그리곤 인간의 성장 특성 중 대량의 뉴런 생산과 시냅스 생성을 통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예로부터 가장 견고한 기관인‘프시케(psyche;영혼)’를 가진 유일한 동물이란 결론을 내린다. 영혼?, 과학과는 거리가 먼 이 추상적 언어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한편, 또 한사람의 자연과학자인, 고인류학자인‘파스칼 피크’는 인간의 기원에 관한 문제로부터 자연계에서의 인간의 지위를 성찰한다. 특히 신체적 측면의 진화인 '사람화(hominisation)'를 통한 인류기원에 대한 탐색을 진행하며, 700만 년 전 아프리카 어딘가에 살았던 우리 진화형제들의 마지막 공통조상에 대한 불확실성을 쫒고, ‘인간이 그렇게 독보적 존재는 아니다.’라고 결론짓는다. 인간만의 독특한 행동양식이라는 전쟁, 성적금지, 공격과 화해, 정치,도덕,거짓말, 자의식, 웃음과 울음...은 비교동물행동학의 연구결과 다른 영장류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인간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자연과학자의 인간의 독보적 존재성에 대한 상반된 견해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다지 명쾌한 대답으로 다가오지 않으며,‘인간의 미래 지속성’에 대해 오늘의 우리들 태도를 결정하는데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이 저작물의 가치를 격상시키는 현대 인식론의 거두인‘미셸 세르’의 담론에 이르면 많은 비판적 여지를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탁월한 통찰력에 기인하는 인간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이 난해한 질문의 근원에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그는 두 자연과학자들의 접근과 같은 엄청나게 긴 특정 시간동안 차례로 나타난 우발적 정황들에 관해 언급하는 거대담론은 지양(止揚)한다. 실제 진행되어왔던, 그리고 진행되고 있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사람화에 주목한다.
그는 우선 “물질이란 무엇인가?”고 묻는다. 이에 대해 물질(원자에너지)의 발견, 대량살상무기, 인류를 죽음의 공포에 몰아넣는 인간 자신의 재능과 의지가 초래한 인류와 문명의 죽음이라는 위험에 빠진 지구에서 인간은 멸종했는가? 라는 반문으로 물질의 발견을 해낸 인간의 탁월성을 뚝뚝 떨어뜨린다. 이어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보건 환경, 질병치료의 개선 등 죽음에의 종속성을 넘어 존재와 출생에 변화”를 만들어내고, 고전적 의미의 진화처럼 자연계에 어떠한 힘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연의 변이를 제어하는 인간의 현 모습을 투영한다. 인간은 스스로 “특수한 생태적 환경을 벗어나 포괄적인 공간에 진입”하였다는 것이다. 즉, 끈질긴 진화와 길고긴 적응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인간은 적응의 시간을 단축하여 시간의 층위를 환상적으로 압축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히 이 저작의 꽃이랄 수 있는 기막힌 사례(事例)적 질문이 던져지는데, “인간은 왜 옷을 입을까?”하는 것이다. 수치심의 회피?, 약점의 커버? ... 등등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은 단지 “옷을 벗는 것의 기이한 이점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빨리 벗고 빨리 입기 위해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독보성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동물의 표피나 털과 같은 고집스런 해법이 아니라‘착용과 해체’의 재량권이라는 자연의 보수성을 초월하는 고도의 적응력이며, 동물들에게 지난한 시간을 요구하는‘기관의 변화’를 ‘도구’라는‘착탈식 기관’으로 변경한 것이다.
바로변화와 시간’에 주목한 인간은 도구라는 기술을 통해 죽음과 시간의 엄청난 절약을 이룩하였으며, 궁극에는 “자연의 시간을 사용하고 자연의 변화에 복종하면서‘탄생(nature)'을 지휘”하게 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급기야“인간은 수 십 억년 동안 인간과 무관하게 행해진 우발적 진화의 주요요소를 이성과 증가의 방식으로 다스리고”, 기술적 혁신이란 짧은 시간에 압축해내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제 인간은 “시간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었으며, 자신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러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들의 기나긴 기억 속으로 들어가고, 자신들의 본성(nature)을 간파하곤, 자신들의 문화(culture)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 “인간은 자가(스스로) 진화의 길을 가는 생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 묻는다.
인간은 셀 수 없이 많은 급격한 적응과정을 자신의 용도에 맞게 압축하였으며, 이런 “인간은 그 자신의 원인”이 되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를 만들고, 자신의 변화에 맞서 싸워왔으며, 자연의 진화와 적응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자신들만의 독특한 진화를 지속하여 우주의 시간과 자신들의 역사를 공존시켜왔다. 겹겹이 집어넣은 시간의 압축은 기나긴 체험시간을 절약해 주었으며, “변이의 체험 시간을 영(Zero)”으로 만들어낸 인간은 자연과 슬기로운 계약을 해 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시간의 압축을 이해하고 착탈식 도구라는 독특한 진화방식으로 자신들의 몸을 해방시킨 생물이며, 이젠 그 자신이 자신의 원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옳다면 인류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삶의 지속성을 가능케 할 것만 같다. 그러나 과연 2500여년에 불과한 인간의 이성을 신뢰할 만한 충분한 시간의 탐색이라 할 수 있을까?  아무튼‘미셸 세르’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연과 인간의‘시간’에 주목한 그의 통찰력은 새로운 상상력과 지성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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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 과학과 사회 3
프란시스 위스타슈 지음, 이효숙 옮김 / 알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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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메커니즘을 정립하고, 뇌의 신경망과 뇌기능의 연구를 통해 궁극으로는 뇌의 외부적 손상이나 신경 퇴행성 질환으로 인한 기억상실 증후군,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정신착란증후군의 실제적 원인 규명을 위한 일련의 신경해부학적 성과에 대한 보고서랄 수 있다.
프랑스 캉 대학 국립보건의학연구소 신경해부학 팀장인 저자‘프란시스 위스타슈(Francis Eustache)'박사의 인지 신경심리학과 인간 기억의 기능에 대한 연구를 배경으로 하는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에 대한 진전된 성과는 소위 노인성 치매라 불리는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결정적 규명단계의 접근을 알리고 있어 개개인의 건강은 물론 사회적 효용측면에서도 커다란 기대를 갖게 한다.

이와 같은 질병의 의료적 개가에 못지않게 이 저술은 인간의 뇌기능과 기억의 메커니즘에 대한 수준 높은 성찰로 구성되어있다. 특히‘기억’에 대한 신경심리학적 언어들의 정의와 이해를 기초로 하여 기억의 층위(위계)별 역할과 기능, 나아가 인문학적 통찰에 이르는 기술(記述)은 독자를 인간 기억시스템에 관한한 견고한 이론가로 만들어줄 정도로 탁월하다.
‘신경심리학’은 “뇌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인지적 기능장애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정보의 획득과 저장, 회수의 시스템인 기억에 장애를 일으키는 요인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뇌의 구역별로 특정한 또는 지배적 역할의 파악을 가능케 하고, 인류의 정신건강은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혁신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저자는 기억의 다양한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 일화적 기억과 의미적 기억, 서술적 기억과 절차적 기억이 그것인데, 이는 다양한 종류의 지각이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명확한 공간적, 시간적 맥락 속에 위치한 사건에 관한 기억인 일화적 기억과, 이와는 달리 언제,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는 탈맥락화한 낱말, 세계에 대한 지식 같은 의미적 기억이나, 이와 같이 일반적이고 특별한 정보와 관련된 의미적 기억과 일화적 기억을 포함하는 서술적 기억, 훈련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숙련성을 획득하고 저장하여, 이전 경험에 근거하지 않고도 회복할 수 있는 절차적 기억에 대한 설명은 우리들의 기억 방식이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 정보를 제공해 준다. 

여기서 절차적 기억은 우리들의 관심을 끌게 되는데, 우리가 운전할 때 기억의 도움을 받는다는 의식 없이 수행하는 것처럼, 이 기억의 표상은 암묵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 정신생활의 일부는 우리 의식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이 기억이 우리도 모르게 욕망과 신념을 드러내어 정신의 중립성을 배반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의 “기억의 세계는 이상하고 매혹적이며, 두렵기조차” 할 정도로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기억은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주관적 느낌과 시간 속에서 중요성 여부에 따라 정보를 지속적으로 보유하고 고정화시키기도 하지만, 불과 몇 초, 몇 분 뒤에 기억 속에서 날려버리기도 한다. 특히, 일화에 관한 기억은 며칠, 몇 달, 몇 년 에 걸쳐 형성된다고 한다. 이러하다보니 겪은 장면을 그대로 복사하듯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주체의 관심과 욕망에 따라 기억이 구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기억이란 ‘역동적 현상’이며, 부정확하고 불안정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불안정하고 장애를 일으키기 쉬운 우리들의 기억은 여러 형태의 질환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PET나 MRI와 같은 뇌기능 영상기술의 발전은 “전두부 피질은 전략적 회상을 담당하고, 해마는 에크포릭(ecphoric; 어떤 상황에서 기억에 자동 접근하고 심지어는 억누를 길 없이 접근하게 되는 것) 회상을 맡는다. 단어들의 코드화에 요구된 뇌 구역은 어디일까?”와 같은 뇌의 부분별 기능에 대한 탐색을 진전시켜왔고, 이러한 부단한 실험은 질환의 조기진단영역에서 ‘알츠하이머병’의 초기잠복진행을 발견하고 진행을 완화시키거나 심지어는 중단 시킬 수 있을 만큼 효과적 치료가 가능한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저술은 인간 기억의 새로운 상호체계의 모델을 구축하고, 뇌기능의 탐색에 엄청난 기술적 발전의 진행상황을 보여준다. 인간 뇌의 신경망과 그 위치별, 영역별 기능과 역할이 정복되는 날, 다가올 의료적 낙관 못지않게 왠지 모를 불안도 엄습해온다. 치밀하고 세련된 논리와 구성, 차원 높은 사유가 돋보이는 뇌 과학을 기초로 한 기억 시스템의 선도적 저작이다.

「기억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해 두는 대뇌 활동이 아니라, 매순간 변하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경험의 질료’이다」 - 추천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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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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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나래를 활짝 펴고 삶의 편린들을 모아 문학작품 속에 잠겨있는 진중한 정신세계를 비범한 통찰력으로 정리한 책 읽기의 진수라 해야 할까. ‘프루스트’를 읽어내는‘알랭 드 보통’의 방식 - 온전히 작가의 시대와 삶으로 들어가 작가의 시선과 생각으로 - 으로서만이 프루스트를 독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프루스트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세운 그의 대표작『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좀처럼 손에 들기가 여의치 않다. 7편 11권으로 국내에도 완역된 전질이 나의 서가에 나란히 꽂혀진지 몇 해가 지났는 지 모르겠다. 매번 읽어야지 하면서도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는 내게, 그의 동생‘로베르’의 말처럼 “사람들이 매우 아프거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는 읽을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는 조크가 진실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마 밀폐된 침대에서 쓰인 글이라서 그런 것일까. 당시 프루스트의 열정적 팬들조차 작품의 길이가 너무 길어 난처했다할 정도이니 위안이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프루스트를 좋아 하세요』라는‘보통’의 프루스트 읽기를 따라가며 마주하는 인생의 작은 조각들과 사건들에 대한 광대한 사유는 세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이면의 층위들을 깊고 색다르게 느끼게 해주는 멋진 길잡이가 되어준다.
프루스트가 들으면 정확히 기분 나빠할 얘기가 되겠지만,‘보통’의 이 에세이를 정의한다면, 삶을 바라보는 법, 그리고 감사하는 법의 탐색이 아닐까?
“신문 읽기라는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라고까지 단문과 빈약한 표현에 질색했던 프루스트이고 보면 조잡한 이 정의가 무책임하고 독자를 우롱하는 방해공작이라고까지 비난할지 모를 일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제1권 「스완네집 쪽으로」의 첫 페이지를 접하는 누구든 바로 느낄 수 있는 지루할 정도의 세세한 묘사와 설명으로,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장면을 몇 장에 걸쳐 기술하는 프루스트의 글쓰기가 당혹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의 설명을 듣고 보면 그 구체적이고 작은 경험들이 모두 표현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전달이 된다는 믿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너무 빨리 하지 마세요.(N'allez pas trop vite)"라는 프루스트주의적 슬로건이 있으며, 너무 빨리하지 않으면 생기는 이점은 그러는 도중에 세상이 재미있어진다는 그의 신념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철학은 형태는 다르지만 “예술작품은 왜곡되었거나 지나친 현실의 측면들을 우리의 시야에 회복시키는 능력이다.”라는 예술작품에 대한 그의 생각과 공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생을 천식을 앓으며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에서 보낸 병약한 사람인 프루스트의 고통에 대한 찬양은 역설적이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고통에 빠지고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까지는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고통스러울 때만 철저한 탐구심이 발현된다는 진리의 실천으로 느껴지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될까.
어쨌든‘보통’은 프루스트의 이러한 삶의 견해로부터 “우리는 앓는다. 고로 생각한다.”고 데카르트를 차용한 재치 넘치는 명구를 만들어낸다.

한편 ‘보통’의 의도야 어찌되었든 ‘프루스트주의적’, ‘프루스트적’, ‘프루스트하다’는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프루스트의 행동과 말, 그리고 그의 글들이 일체화되어 동시대인들을 비롯해서 오늘의 문학적 삶에까지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또한 정형화된 의미가 될 정도로 새로운 하나의‘가치’이자 ‘정신’이 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보통’의 이 글이 돋보이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들에게 프루스트의 작가관, 친교관계, 성장 배경과 과정, 삶의 자잘한 것들에 대한 신념, 예술관들을 명쾌하고 유연하게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작품 속 화가인‘엘스티르’는 “조잡한 그림에서 르아브르 항구에 대한 놀라운 재현”이라는 양극의 평가를 받았던 인상파 화가‘클로드 모네’의 일면임을 통해, 프루스트의 예술관을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프루스트가 하는 작은 상념의 자투리로부터 연결되어 무성한 기억의 층위들을 헤집는 모양과 아주 닮아있다.

프루스트의 친교관계를 쫒아가면서, 대화와 책이 갖는 장단점으로 이어지고, 다시금 프루스트의 내면을 조명하는 변화무쌍, 종횡 무진하는 ‘보통’의 글쓰기 역시 삶의‘이면(裏面)의 원인들’을 현란하게 탐색해 낸다.
부호(富豪)인‘공작부인’과 소시민인‘알베르틴’의 소비행태를 통해 “욕망과 기쁨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주는 막대한 이득에 대한 식견이나, 프루스트의 성적(性的)이해와 의지에 대한 고찰로서 “오늘밤 시간 없어요.”라는 여성의 말이 소유가능성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만들고, 이는 진정하고 지속적인 욕망의 원인이 된다는데 까지 이르는 상상력의 연결은 가히 혀를 내두르게 한다.

평범하다고 생각한 것,(....)하찮다고 생각했던 자연에 위대한 예술이 있다는 것에 압도되었을 때, 철물과 질그릇도 매혹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자발적으로 생겨난 기억이 과거의 진정한 모습을 환기시켜줄 때, 오랜 망설임 끝에 예쁜 옷을 구입했을 때 느끼는 기쁨이야말로 행복이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 될 것이다.

프루스트의 높은 감수성과 “시간의 분해와 상실의 이면에 있는 원인들을 탐색하는”,‘보통’식 이 에세이는“대상자체 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의 질에 달려있다.”는 그의 말처럼 세상을 이해하는 사고의 품격을 한 단계 올려주고, 우리의 정신적 삶을 한층 고양시켜준다. 풍부한 지성의 향취를 만끽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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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각들>을 리뷰해주세요.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 유가에서 실학, 사회주의까지 지식의 거장들은 세계를 어떻게 설계했을까?
황광우 지음 / 비아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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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소비와 쾌락, 대중 미디어를 통한 무차별적인 욕망의 부추김과 우민화는 소수 지배계층이 힘도 들이지 않고 다수의 대중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저 천박한 속물주의가 지상의 목표인 사람들에게 자유니, 민주니, 인권의 침해니, 비민주적이니, 정책이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들이 들릴 리 없으며, 설혹 들린다 한들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알 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이고 좀처럼 자신들의 삶과 연결 짓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이 보이지 않는 위계에 얽혀있으며, 직접의 모욕과 침해가 발생하면 그제서야 기득권 계층이 어쩌니 저쩌니, 권력가진자들이 자기를 멋대로 취급한다느니, 돈 없고 백 없는 놈 서러워서 못살겠다느니 하는 것을 보면 이기적이고 교활하며, 어리석어 보이고 일면은 측은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보행자도로에서 아빠 목마를 탄 어린아이가 촛불을 들었다고 체포되고, 세 걸음 걷고 한걸음 쉬었다고 구속되는, 그리고 인터넷을 마구 감청하여 사생활이라는 기본권의 침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정책을 비난하면 조직적으로 매장해버리는 점점 폭력적이고 인권을 마구 짓밟아대는 현실에도 모두 나 몰라라 하는 이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 극단적 이기주의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그나마 모든 국민들이 오늘 이만큼의 자유와 민주적 질서를 누리고, 인간의 기본권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20년 남짓에 불과한 것을 모두들 잊고 있는듯하다. 정치의 옳고 그름을 논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고, 실정(失政)과 독재적 일방주의를 비판하면 빨갱이로 몰아대고 악랄한 고문과 죽음으로 내몰던 자유가 억압되고 인권이 부정되던 야만의 시절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이다.

이제 언론까지 마음대로 하려들고, 비판 세력은 고립시키고, 국민을 딴따라 출신의 관료가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조롱할 정도로 이 막돼먹은 권력은 그 어느 때 보다 자유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민들은 자신들의 기본권이 점점 축소되고, 자유가 손상되며, 민주적 질서를 폭력적 권위로 눌러대는 상황이 자신들과 관련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궁극적으로 권력이 오만 불손해지고 국민 위에 군림하여 명실상부한 지배계층으로 네트웍을 공고히 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심화 확장키 위해 전 국민의 노예화를 치닫는 사실을 결코 자각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탓일 게다.

이 『위대한 생각들』이라는 저작은 바로 이러한 오늘의 우리사회를 표현하고 있는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체제와 이념을 구성하는 본질과 의미를 세상에 가장 쉬운 글로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어린아이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지켜내야 할, 그리고 당연히 주장하여야 할 권리와 질서, 즉 ‘자유민주의’국가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갖는 내재적이고 실질적인 의미를 차근차근 전달해 주고 있다.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그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은 어떤 것이고, 그래서 보완되어야 할 이념으로서 민주주의를 설명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왜 결합되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오늘에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이른다.
또한, 자유주의의 대척점으로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본질과 민족주의에 대한 다각적인 시선, 빗나간 민족주의의 극단적 사례인 파시즘이 인류에게 남긴 상흔, 나아가 동아시아,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의 근대이전의 사상과 정체성을 지배해 온 유학(儒學)과 그 밖의 도가, 법가 등 동양사상, 실학과 동학사상까지 우리의 사상적 계보를 아우르고 있다.

오늘의 인류사회에 자유주의 이념의 근본이 된 프랑스 대혁명과 인권선언, 이에 이르는 로크, 루소 등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사상, 시민계급(부르주아)의 사상이었던 자유주의의 정치적 한계와 노동자, 농민의 경제적 소외가 민주주의라는 확장된 의지의 포함까지 결합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자유주의가 야기한 뚜렷한 불평등의 현실에서 자라난 평등사회의 꿈을 지향하던 인류의 유토피아라는 염원으로 시도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 태생적 오류를 지적하고, 비록 현실에서는 폐기된 이념이지만 계급의 해방을 위한 실천적 사상으로서의 가치를 새로이 조명하기도 한다.

특히 민족주의의 토대가 되는 국민국가라는 개념의 형성과정과 이 과정이 만들어 낸 국가적 이기주의와 편협성, 제국주의와 식민지 정책으로의 이향에 대한 배경, 그리곤 20세기 인류 이성에 근본적인 상처를 가져온 독일,이태리,일본의 빗나간 민족주의의 광기와 열정인 파시즘이 한국과 같은 제3세계 의 미숙한 국가들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교묘하게 전파되고 있는지 높은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오늘의 인류에 여전히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들 이념과 아울러, 한국인의 습속과 태도에 깊이 침착되어있는 유가(儒家)사상을 비롯한 동양사상의 본질을 꿰뚫고 있음은 이 저작의 또 다른 탁월함이랄 수 있겠다.

우리가 본격적으로‘근대화’라는 세계적 질서에 편입되는 1945년 이전의 시기에 한국인을 지배하던 사상은 ‘성리학’이다. “조선사회 전체의 행동규범이자 통치철학이었던 이 사상은 양반과 상놈을 철저히 나누어 서로 다른 일을 하는 현실을 정당화한 지배층의 사상”이었으며, 이는 역시 ‘군자(君子)의 학(學)’이라 했던 유가사상을 그 이념의 핵심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18세기 실사구시의 실학사상을 시작으로 피지배계층이던 국민의 절대다수였던 농민의 수탈로 인한 ‘갑오농민전쟁’과 동학의 의의, 29개조로 구성된 폐정개혁안은 비록 무능한 당시 지배세력과 외세에 의해 무력화되기는 하였으나, 인내천(人乃天)등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각성과 투쟁의 역사를 알려준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민주주의의 최전선이라는 생각으로 국민 각자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각성하고 싸우지 않는다면 언제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성큼 후퇴하고 말 것이다.”생명권, 신체권, 재산권, 자유권, 명예권, 인격권 등의 권리는 인간의 실존 조건이다. 불법과 불의를 감수하고 관용하는 비겁함과 무관심을 벗어던지고,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하여야 하는 것은 그래서 당위성을 갖는 것이다.
진정 이 저작은 오늘의 한국인들을 위한 ‘위대한 생각’의 기초적 이해를 제공한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을 위한 필독서로서 어떠한 손색도 없다. 저자의 의지와 노고가 돋보이는‘자유민주주의’의 대중교과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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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계곡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0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0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음습하기 짝이 없는‘포’의 시구가 함께하던 어둠과 죽음의 사자,‘시인(poet)’이 돌아왔다!
FBI를 향한 시인의 도발, 그것도 즐비한 사체들을 쌓아두고 자신에게 총을 겨누었던‘레이첼 월링’을 수신자로 하는 소포와 함께.
이 작품은‘마이클 코넬리’의 주력 시리즈물의 주인공인 전(前) LAPD베테랑 수사관이던‘해리 보슈’가 해결사로 등장하면서 시인과의 대결에 한층 긴장감을 더해준다.

한 때 공조수사 파트너였던 전직 FBI요원인‘테리 매컬렙’의 심장질환에 의한 돌연사의 의혹을 시작으로 보슈는 사망하기 전 테리의 석연찮은 행적을 좇는다. 테리가 남긴 프로파일의 메모들은 네바다 사막으로 연결되는 '지직스 로드(zzyzx road)'를 가리키고,  한편 시인이 조종하듯 안내하는 사막에 묻힌 사체들로 레이첼을 비롯한 FBI수사팀은 시인의 의도와 행적을 찾지 못해 곤혹해한다.

결국 한 인물을 좇는 보슈와 FBI수사팀간의 미묘한 신경전은 레이첼의 애매한 입지로 수사력의 균형을 보슈로 기울게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전작(前作) 시인의 전체를 떠돌던 죽음의 망령이나 공포와 같은 음침하고 음울한 분위기의 스릴러에서, 걸출한 전직 수사관을 통해 본격적인 추리작품으로서의 속도감과 남성적 박진감이 장착된 범죄 수사물(탐정물)로 보다 강화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듯 냉정한 이성적 전유물로서의 크라임스릴러(crime thriller)에는 여간해서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의 가족이 등장하는 의외로움도 있다. 사건 해결의 중심에선 주인공인‘해리 보슈’의 전처와 그의 딸‘매디’의 출현인데, 이는 아이의 순수한 시선과 오염된 어른들의 사악한 사회를 교차시키고, 시인의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의 심리적 외상과의 대비를 통해 아이들의 양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책임을 드러내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어쨌든 이 작품만의 보기 힘든 특징이고, 시리즈의 다음 작품과의 어떤 관련성이 예견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섬세한 감수성이나 타자에 대한 배려와 같은 보슈에게서의 인간적 갈등의 묘사가 몇 차례 등장하는 것도 새로운 형태의 추적자이자 형사의 인물상을 보여준다.

작품의 정점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감정이입과 몰입으로 긴장을 넘어 안절부절 못할 정도로 독자를 흡입해댄다. 세차게 퍼붓는 비와 급하게 휘감아 도는 검푸른 강물, 세상의 끝만 같은 계곡, 그리고 처절한 추격과 대결장면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의 하나로 각인 된다. 단서 하나하나에 까지 미치는 정교하고 세심한 장치는 정통 크라임스릴러의 진수란 이런 것이다! 라는 작가의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지 LAPD(L.A.경찰국)로 복직 신청을 한 보슈의 다음 행보는 예사롭지 않다...영혼을 잃은 망자의 검은 눈이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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