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의 소리 - 개정판 최인훈 전집 9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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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1972년에 각기 써진 한반도내에서 암약하던 일본 간자(間者;오늘의 말로 간첩)의 목소리로 전하는 한국인의 자신들이 알지 못하게 뼛속 깊숙이 내재화 되어있는 식민지 노예근성과 그 비루함과 몽매성에 대한 관찰기이며 담화문이다. 최인훈 선생의 이 소설 총독의 소리5년에 걸쳐 총 4편으로 집필된, 소설의 통념적 형식을 파괴하면서까지 이 사회에 전하려 했던 빙적이아(憑敵利我)의 간절한 외침이기도 하다. 일본의 간자와 일제에 부역하던 무리가 그것들이 우려했던 징벌과는 달리 그대로 부패한 축재와 권력을 이어가며 반도의 상층부 지배 집단으로 기득권층을 이루고 있게 되었음에, 바로 그러한 결코 깨어나지 못할 반도민의 정치적 인식능력의 한계를 보았음에 대한 쾌재의 풍자이기도 하다.

 


빙적이아(憑敵利我)’, (,친일부역의 무리)의 입을 빌려 내부(한국민과 그 사회)를 깨우치려는 방편으로 최인훈 작가가 역사적 타자의 입을 빙자해서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를 환기하기 위해 사용한 서술 도구이다. 소설에서 유령방송국을 통해 담화를 발하는 총독(總督)’은 한국 내에서 일본을 위해, 한국의 정치사회는 물론, 외교, 국방, 경제를 망라한 그 현황에 도사린 일제 부역자들의 활약상, 즉 식민지 잔재가 왕성하게 반도를 망치고 있음으로 인한 재 침탈 가능성이 숙성되고 있는 상황에 대한 환호이며, 부역자 무리의 노고에 대한 칭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한국의 기득계층은 곧 친일 부역자무리가 점령하고 있다는 인식이며, 그것들이 지속적으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성장을 방해하고, 국론을 분열시켜 결코 화해할 수 없이 사분오열되어 어떤 단일한 민중의 권력도 부상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제어함으로써 외세에 무기력한 민족으로 남아있도록 하고자 하는 사대주의와 그것들의 자기 영달과 이익 이외에는 철저하게 분쇄하고자 하는 반민주, 권위주의 사회의 지향이며 정착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수단은 남북의 휴전상황 고착화를 이용한 반공(反共)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 즉 빨갱이 몰이는 불의한 친일 뿌리의 기득권을 영속화하는 기막힌 방법이며, 몽매한데다 노예근성까지 갖춘 반도인의 맹목적 충성이 거들어주기까지 한다. 일제 식민지 기간 내내 일제에 저항했던 모든 반도인을 빨갱이로 몰아 처단했던 효율성의 경험이, 이제 반도인의 정신에 각인되어 손쉽게 정치적 반대세력을 몰아세우는 유효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총독의 소리, 189쪽에서

 

소설 속 총독이 발하는 4편의 담화를 읽다보면, 2025년 지금 한국사회에 펼쳐지는 이 혼란의 정국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가의 역사적 실체를 성찰 할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그 근원인 민족 배반자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친일의 근성을 발본색원하지 못한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망각증세, 다시 말해 일제 부역자의 종자인 멸종되어 마땅한 반()민주주의 친일 정당 소속 윤 모가 말하듯 ‘1년만 지나면 개, 돼지들은 모두 잊고 다시 (국회의원으로) 선택해준다는 어리석은 노예근성에 근거한 흉측스런 말에 가닿는다. 아마 이 근성은 한국 내 일본 간자들의 우두머리인 총독의 말처럼, 이들 노예근성의 한국인들이란, 인간 조건에 대한 감각이 모자란 종족이며, 정치적 음치(音癡)이자 풍문에 사는 자이고, 이목구비가 있으면서 죽은 자들로서, 목하 극우를 표방하는 폭력적 야만의 작태에 대해 부끄러움도 모르는 종자들이다.

 

자신들의 역사를 안다는 것이 요즘보다 처절하게 그 중요함을 인식하여야 할 때가 없었던 듯 하다. 이 땅에 민주주의와 그 기반 요소들인 인권과, 평등과 공정성, 법치주의가 표면적으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표면아래서 이를 집요하게 방해하고 훼손하는 엄청난 규모의 퇴행적 세력이 있었음을 목도하고 있는 지금, 한국인, 우리들의 역사적, 민족적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한 뼛속까지 아려오는 통증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너무도 연약하게 흔들리고 있으며, 법치는 일제 부역의 무리들, 민주주의와 헌법수호를 열망하는 국민을 향해 빨갱이 타령을 하며, 법 초월의 무도함을 지껄이는 바로 그것들이 이를 증거한다 할 것이다.


【《총독의 소리, 2121쪽에서

 

50여 년 전에 써진 이 인용문은 <총독의 소리> 노변담화방송을 듣던 한 시인의 자괴감 어린 자기성찰의 목소리다, 방대한 헛소문이 엉킨 전선들의 잡음처럼난무하는 실상은 마치 지금 벌어지는 저열함에 지배된 소셜미디어와 사이비 언론들에 넘쳐나는 조작과 날조, 기만과 거짓을 통해 돈벌이에 나선 군상들과, 이에 영합하여 맹목적 신뢰로 옹졸하고 편협한 이성 없는 무지를 뽐내는, 자신들의 노예근성에 복무하는 군상들의 악의적 댓글과 퍼나르기를 보고 있는 듯하다.

 

원시인의 귀보다 더욱 가난한 초라한 장치를 조작하면서 이 세상의 악의와 선의의 목소리를 알아들으려는시인은 그나마 자신의 무지에 대한 성찰이 보이기라도 하지만, 저 친일 부역 종자들이자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부패한 기득권 무리들의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무도함과 불순함, 폭력성, 이를 선전 선동하는 것들에게서는 그 어떤 역사적 각성은 물론 도덕성조차 찾을 수 없다. 오직 자신들의 편익과 편의, 권력과 축재(蓄財)라는 탐욕만이 목적인 불의함만이 더러운 썩은 내를 풍길 뿐이다. 이것들에게는 헌법의 수호, 즉 법치의 질서도,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정신도, 헌법 전문에 새겨진 대한민국의 민족정신인 현대사까지도 왜곡과 파괴의 대상이 된다.


【《총독의 소리, 3129쪽에서

 

외교 무대에서 버젓이 자국의 국기를 외면하여 국가를 모멸하고, 적국의 입장에서 식민지민이 생각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발언을 국영방송에서 서슴지 않고 뇌까리는 것들이야말로 한국사회의 기득권 계층의 낯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의 한 표징일 것이다. 위의 인용문장은 청산되지 않고 이 사회의 권력과 부를 움켜쥔 친일부역의 종자들이 지닌 혐오스러운 믿음의 실체를 토설한 내용이다. 움켜쥔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이것들이 자신들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국민을 향해 빨갱이 몰이와 민주주의 근간의 파괴라는 이중의 배격 수단을 활용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소설은 해방 후 2025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식민지 황국신민의 충성스런 노예로서의 민주주의의 싹이 자랄 수 없도록 사회의 혼돈을 상시화하며, 일본의 한반도 재탈환의 토양을 성숙시키고 있음에 대한 자기 격려의 말을 그치지 않고 있음에 매서운 질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식은 식민지 지배 조건이 해방 이후 80년이 지난 지금에도 고스란히 유지 보존될 수 있는 가에 대한 국민 각자의 반성의 요구이다. <총독의 소리>에서 간자가 한반도의 정세에 대해, 분단 대치상황으로 인한 군사비 과도 지출, 남북 간에 적대적 무한경쟁 체제로 인해 통일은 요원한 문제일 것이라고 진단하듯, 친일 부역의 무리들은 이 불안한 분단의 지속이 권력의 유지와 방어에 요긴하기 때문에 종전(終戰)이나, 남북의 평화적 화해무드를 방해한다.

 

이 불안정성이 곧 기득권 유지의 필요조건인 탓이다. 2025, 현재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 민주주의와 국가적 현실의 이해를 향한 적극적 앎의 여정이며, 우리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 가에 대한 충실한 지혜를 향한 탐구의 노력이 될 것이다. 소설은 비단 국내 정치질서에 대한 성찰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에 대한 냉혹한 인식을 촉발시키는 현실적 진단의 통찰도 있으며, 엔카(演歌)를 기원으로 한 일본의 리듬을 그대로 답습한 트로트에 열광토록 분위기 몰이를 하는 황색 미디어들이 유행처럼 하는 짓, 즉 일본풍의 선율과 음계에 익숙해짐으로써 정서적으로 내지(內地;일본을 의미)와의 유대를 계속하고 있음의 제국일본을 향한 복종의 표지임을 말하는 것들을 향한 반면교사의 비판적 메시지도 있다. 즉 보이지 않는 문화적 식민 토양을 축조하려는 은밀하고 더러운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응징의 메시지다.

 

매국 황색미디어에서 시작된 이러한 친일 부역 도당의 신()황국신민화 표방은 이제 공중파 방송에까지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사회의 기득권 계층이 거의 모두가 친일의 뿌리를 지니고 있음의 반증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최인훈 선생은 아직도 이따위 소리를 하고 있구나라며, 작금의 한국사회에 대해 비통과 울분을 금치 못했을 것 같다. 지금 벌어지는 내란의 심판은 바로 신()식민지화를 도모하던 매판 세력과 민족적, 민주주의적 민중세력과의 싸움이라는 오래된 뿌리를 지닌 역사적 심판인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과 소수의 반민주 기득권 집단과의 결전이라는 의미이다. 이 작품으로부터 현대사의 구체적이고 수월한 이해를 수행하고, 나아가 해방전후사의 인식,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와 같은 우리 현대사의 독서로 나아가면 보다 명료한 역사인식을 갖추는데 적절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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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이 저물고 청사(靑蛇), 푸른 뱀의 해인 2025년 을사년이 시작됩니다. 참으로 혹독한 해였습니다. 어쩌면, WHO(세계 보건기구)의 앰블럼에 지팡이를 감고 있는 뱀이 상징하듯 치유의 신으로서 한국사회에 휘몰아친 혼돈의 사회적 질병을 고치는 해라는 의미 같기도 합니다.




뱀은 그 외형적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고대 인도를 비롯한 불교에서는 비와 땅을 관장하는 풍요의 신이기도 하고, 서양에서는 오랜 동안 논리의 신, 지혜의 신, 치유의 신을 뜻하기도 했답니다. 특히 동면하다 만물이 다시금 생동하는 봄에 깨어나는 그 재생의 생명력으로 인해 불사의 존재이자, 집안의 재물을 지켜주는 업신(業神)으로도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을사년의 을()은 동양 오행의 나무로써 초록빛깔에 가깝습니다. 다만 이를 청()과 녹() 양자의 구별없이 사용해 온 것 같습니다.


마침 괴테의 동화 초록뱀과 아름다운 릴리; The green snake and beautiful lily를 읽어나가며, 신비로운 깊이를 지닌 자극적이고 마술적 이야기를 읽게 된 것이 어떤 계시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아마 이 영적 메시지로 가득한 이 동화는 요즘처럼 힘든 나날에 상처 입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위로의 서()이자 치유의 서같기만 합니다. 동화는 평화와 행복, 궁극적 성취로 가득한 시대를 초월한 걸작이랄 수 있습니다. 다만 영적 혹은 무의식적 성향의 신비주의로 인해 다양한 감상을 자극하듯 그 독해가 그렇게 수월치는 않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이 책이 그다지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알지 못할 깨달음과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는 생각의 시간이 되어 주리라 믿어집니다.


By Johann Wolfgang von Goethe,

The green snake and beautiful lily삽화 중에서

 

푸른 뱀은 또한 뛰어난 통찰력과 직관력을 가진 동물로서, 을사(乙巳) 새로운 시작과 지혜로운 변혁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제 부패하고, 오래되어 새로운 시대에 적절함을 상실한 구태(舊態)를 벗어던지고 지혜로움의 양식으로 가득 채운 우리 한국민들의 재도약의 해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알라딘의 모든 블로거님들

그리고 서점 알라딘의 임직원을 비롯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과 지혜가 가득한 

해이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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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몽상가들 알마 인코그니타
뤼도빅 에스캉드 지음, 김남주 옮김 / 알마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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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삶은 지붕 위에 있다.”고 밤이 내리면 거대 파리의 건물들 위 지붕에 올라 그곳에는 내 행복의 양도할 수 없는 일부가 있다.”고 말하는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위원인 중년의 남자 뤼도빅 에스캉드가 있다. 그는 친구인 시인 뱅상과 함께 이웃한 그들의 7층 공동주택 지붕 위를 기점으로 렌가() 좁은 포장도로 7번지에 위치한 발행인 제롬 랭동의 유서깊은 미뉘 출판사의 지붕을 걷고, 지상 80미터 생 쉴피스 성당의 탑 꼭대기에서 수도의 좌안 전체를 내려다보며 관조의 시간, 마음의 격정을 내려놓으며 해방감을 만끽하기도 한다.

 

이 몽상가이자 괴짜는 돌싱남이다. 이혼한 아내가 아이들을 양육하지만 주말이면 협의하여 서로 아이들을 돌본다. 그에게는 새로운 젊은 연인 막신이 있다. 나는 화자이자 주인공인 뤼도빅보다 그의 연인 막신이라는 캐릭터에 더욱 애착을 지니고 읽게 되었는데, 프랑시스 퐁주의 시를 읽으며, 기타를 치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활력 넘치는 일상의 그녀의 태도에 내 감응이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뤼도빅이 저 위에는 뭐랄까, 자유로운 무엇인가가, 손상되지 않은 그 무엇이 있어.”라고 지붕 위 탐사를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일부라 얘기하자, 막신은 손상된 건 당신들인 것 같은데.”고 대응한다. 막신의 명쾌하고 분명한 표현들은 아주 시원한 청량감을 주기까지 한다.

 

막신은 상대의 시선에 맞춰 세상을 볼 수 있는 여성이다. 뤼도빅이 가부장적 교육에 세뇌된 마지막 세대임을.  때문에 그의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조차 관대한 시선으로 보아줄 수 있으며, 뜬금없이 난 철학이 좋아라고 말하는 남자가 구토, 존재와 무...를 얼버무리면, 장폴 샤르트르, 일어나서 샤워해. 당신한테 냄새나.”라고 응대하며, 곧 문학적 공간이라는 상상을 공유할 줄 안다. 뤼도빅의 아파트 1층 카페 여직원 네스린이 선생님은 젊지도 않고 미남도 아니잖아요.....막신은 예쁜 여자고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아요.” 라며 당신의 진짜 모습을 사랑할 줄 아는 그녀를 붙잡으라고,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무조건 동의하게 되는 그런 인물이다.

 

막신은 뤼도빅이 뱅상과 함께하는 야간 외출을 점점 더 참기 어려워한다. 뤼도빅이 잔인한 투쟁의 삶을 요구하는 세계에서의 억제된 정신을 도시의 함석 지붕들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그 방대한 지대를 바라보며 느끼는 자유의 갈망을 막신은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뤼도빅이 건물 벽을 등산하듯 오르며 창문 밖을 보던 이웃과 눈이 마주치거나 지붕 위에서 불을 피워대는 행위는 이웃의 비난처럼 파렴치한 짓이고, 과잉의 자유, 어쩌면 방종에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뤼도빅에게 건물의 지붕 위는 탐사되기를 기다리는 드넓은 공간이고, 안정된 연애 관계의 달콤함의 설렘처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이다. 사랑의 스윗하고 순화된 느낌의 평온함과 경쟁관계에 있는 수직의 도시건물벽을 등반하고 지붕 위를 거니는 자유, 높이 오르려는 이 해방의 감정에 나는 수월하게 감응하지 못해 그저 이해의 한 대상으로 남겨둔다.

 

아마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데에 있어 방해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작자의 감정과 사유에 대한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으로, 그가 어느 지붕 위에서 뱅상과 더불어 랭보의 취한 배를 낭송하거나, 자크 바로의 다락방 얘기와 피카소의 게르니카탄생의 일화, 지드의 지상의 양식속 한 문장들이 표현될 때마다 겉도는 서걱거림만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뤼도빅이 막신이나 그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화에서 피어오르는 상황들에 맞춤으로 등장하는 노래들과 문학과 예술작품들을 음미하듯 말하는 장면에 스며있는 그 고유한 예술의 향취에 기분 좋게 흐뭇함의 시간으로 빠져들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 소설은 현대 대도시 그랑 파리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도시 기술문명에 대한 은밀한 저항이고, 이 반항에 잠재된 자유의 욕망이며,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가이자 문학과 예술의 찬미와 혼합되어 묘한 감상에 젖어들게 한다. 저녁 8시면 문을 닫는 시간에 뤽상부르 공원에 들어가 당대에 배척당했던 폴 베를렌의 동상이 아이러니하게 서 있는 시절 맥락의 모순적 변화를 바라보며, 아르튀르 랭보와 한 때 지독한 커플관계였던, 그 유명한 브뤼셀의 총격사건을 화두로 폴 베를렌의 시와 사랑과 광적 열정이 나지막히 흐르고, 자크 프레베르가 노래한 삶은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 놓네. 아주 부드럽게, 소리도 없이.” 라는 샹송 고엽(枯葉; Les feuilles mortes), 막신이 기타를 치며 뤼도빅 앞에서 근사하게 부르는 에어로스미스의 꿈꾸며 살라; Dream on가 감미로운 장면으로 펼쳐지기도 한다.

 

뤼도빅의 한 밤의 지붕 위 탐험의 여정은 도시의 번잡함을 다소 벗어나고 아이들을 키우는 삶의 조건에 조금은 더 맞는 곳으로서 파리 서쪽 15구 외곽 앙드레 시트로앵 공원 근처 이사하면서 중단된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만의 고유한 양도할 수 없는 여러 행복의 감정들을 지니고 있을 터이다. 그것은 뤼도빅처럼 그랑 파리의 건물벽을 오르고, 그 장애 없이 펼쳐진 지붕 위를 거닐며 만끽하는 고양감이기도 하겠지만, "존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일 게다.

 

뤼도빅은 자신의 존재적 근원인 부분을 무엇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떠나버린 막신에게 다시 만남을 요청하는 연락을 하지만 그녀로부터 어떤 회신도 더 이상 받지 못한다. 뤼도빅은 사랑만이 결코 단절될 수 없는 근원이라 여겼던 걸까? 그는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들이라는 퐁주의 시 구절이야말로 모든 시의 제목이 이것이어야 한다고 글을 맺는다. 나는 행복이라는 이 환상을 쫓는 중년의 남자, 도시를 내려다보며 파리의 피 흘리는 역사를 추출해내고, 현대 문명의 과잉과 과도함을 해독해내기도 하며, 문학과 음악 예술의 향취에 젖어들기도 하는 인물로부터 마지막 가부장적, 계급 편향성의 뿌리깊은 잔재를 읽기도 한다. 어쩌면 이를 인지한 인물의 그로부터 벗어나는 자신과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의 기록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갈망이 조금은 타협될 여지가 있는 것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막신은 그래야만 돌아오지 않을까?

 

P.S. 뤼도빅의 지붕 탐사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파리 시가(市街)의 모습이 보이고, 갈리마르, 미뉘, 그라세 출판사 등 이 유명 출판사들의 지붕 위에서의 바라보이는 조망과, 특히 갈리마르의 뒤뜰 정원과 고대풍 기둥이 죽 늘어선 별채인 플레이야드 문화원등 구조가 보인다. 또한 생제르맹 대로의 서점 레큄 데 파주등 몇 몇 서점을 그려 볼 수 있는 부가적 여행이 될 수 도 있다. 파리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는 독특한 문학탐방의 가이드로 삼아도 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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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 - <해방전후사의 인식> 출간 40년 기념기획
오익환 외 지음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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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의도된 혼란, 시대착오적이고 극단적 퇴행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극우를 표방하는 청년 백골단의 사법부 시설 파괴와 공권력에 대한 도전, 민주주의 근간인 법치를 부인하는 집단 폭력 행위는 그저 임의적이거나 우발적으로 발생한 일회적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이들 모두는 역사라는 뿌리를 가진 것이고, 그 역사를 알아야만 이들의 행위가 지닌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 여전히 너무도 많은 국민들이 오늘의 한국 정치사회를 해독하는 데 피상적이거나 그마저도 아닌 무지의 상태에 놓여있다.

 

이 책의 서론 격인 젊은이들에게 역사정신을이라는 글에서 김민웅 교수는 민족 정신사를 훼손하는 언행들이 지금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민족사와 민족정신을 부인하고 배신하던 반민족행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언행들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날 과오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자는 취지에서 1949년 좌절했던 민족 반역자들의 발본색원 작업인 반민족행위처벌은 끝나지 않았음을, 바로 지금 시작할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책은 바로 이러한 목적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40주년 기념기획으로 일부 새롭게 집필되고 재구성된 중요한 우리의 역사정신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훼손하고, 또한 헌법기관인 입법부를 무력으로 정지시키려 하였음과 더불어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국민의 모든 기본권을 제한하려 획책된 내란 시도는 헌정질서를 문란케 하여 독재 권력을 항구화하려 한 추악한 욕망 이외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에 편승하여 민주주의를 파괴하려했던 내란에 동조하거나 이를 선전 옹호하려는 세력들의 준동이 폭력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세력들이 자신들의 퇴행적 반동성을 비판하는 국민을 향해 빨갱이들이라고 철 지난 카세트 녹음기를 틀어대는 몽매한 저열성과 야만성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들의 테러 수준의 반동의 뿌리는 2025년인 지금으로부터 76년의 시간을 거슬러 ‘19496월 6, 반민특위의 좌절이라는 역사적 시간에 놓여있다.

 

반민특위의 와해(瓦解), 역사의 왜곡 날조는 물론 친일 부역자 무리를 청산하려는 모든 반민특위 위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민족 내분을 격화시키고, 그 결과 흉포했던 일제 식민체제의 영속화 도모라는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반민족 세력의 공격을 일컫는다. 친일세력과 하나가 된 이승만은 헌법의 노골적인 무시와 입법부의 파괴를 통해 자신의 불안정한 권력을 항구화하는 독재를 위해 반민법의 운영을 고의로 방해는 물론, 급기야는 일제 부역자들의 무리로 구성된 경찰의 폭력을 동원하여 반민특위의 기능을 무력화 시켰다.

 

이때 이승만을 위시하여 윤치호 등 친일내각은 반민특위를 빨갱이, 빨갱이의 앞잡이이라고 날조 비난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기왕에 범죄가 있는 것을 들춰내서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 확보 상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반민특위를 향해 비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독립 운동가들을 비롯한 동 애국지사, 일제에 저항하는 동족을 잔인하게 체포, 구금, 살해하는 데 앞장서 악명을 떨친 친일부역자 고등계 형사 노덕술을 반민특위가 체포하자 이승만이 직접 나서 반민특위를 기습, 무력화를 지시했다.(1949.6.7.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자신이 직접 지시했음을 공표했다) 친일 부역자 무리가 민족정신의 회복을 도모하려했던 반민특위를 빨갱이라 지칭하며 악의적 수법을 동원하여 체포, 투옥, 살해한 것은 이렇게 오래된 뿌리를 가진 것이다. 오늘의 친일 세력은 내란 우두머리인 윤의 권력이 등장하며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작금의 친일 세력들이 하는 짓거리의 뿌리는 일제가 심어놓은 그 구태가 그대로 이어진 것일 뿐이다.

 


1949626일에는 친일 세력 청산의 목소리를 높인 임시정부 수반이자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을 암살하고, 반민특위 활동을 주도하던 국회의원들을 남로당 프락치로 몰아 검거, 살해하였다. 이어 이승만은 친일 세력들을 애국지사로 둔갑시키는 일에 착수하여, 일제 부역자 무리들이 졸지에 국가 공훈자로 서훈되기에 이른다. 국내 기반이 없던 이승만은 오직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3년의 미()군정기간을 통해 친일 세력과 결탁하여 기반을 확립, 확장하고자 했음이다. 드디어 친일 세력이 다시 이 땅에서 역사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거꾸로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친일 부역자 무리들은 이렇게 빨갱이 몰이로 자신들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는 민족 앞에 머리 숙여 백배사죄는커녕 도리어 민족(국민들)의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애국지사들의 투옥, 살해를 지속하고, 정치를 사리사욕의 장으로 삼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1945815일 해방이,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국이 '점령군'으로 한국에 입성했다는 점에 있다. 이후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에 이르는 3년의 시간 동안, 미군정은 행정, 경찰, 검찰과 사법, 교육, 경제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친일 부역자들을 그대로 충당했다. 특히 사법(검찰포함)부는 총독부 하에 부역하던 자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일정한 교육과 경험이 요구되었기에 친일했던 반민족세력이 존속하도록 방치되었던 까닭이다.


이것은 2025년 오늘, 한국의 검찰과 법원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한국 사법부는 위와 같이 그 출발부터 깊게 박힌 친일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법 권력의 역사는 왜 저들의 역사의식이 친일 성향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근간인 것이다. 국회 청문회를 통해 임명부결이 제안되었음에도 윤씨가 임명을 강행한 이상민을 위시한 판사 출신의 고위직 관료들이 한결같이 친일을 마치 자랑하듯 표방하는 이유가 해명된다. (참조: 현재 서울지검 검사출신의 경북대 법학교수인 김두식의 법률가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은 이에 대한 중요한 참고 문헌이 되어 줄 터이다.)

 

이 책,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라는, 좌절한 과거의 역사를 다시 소환하는 이유는 이처럼 오늘날 우리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구태들의 추악한 뿌리를 앎으로써, 이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분열을 획책하는 세력들의 민낯을 직시하려 함이다. 반민특위의 논의는 이것들의 역사적 정체를 밝히는 일이다. 이것들의 정치적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인 것이다. 친일 권력 그 자체였던 이승만과 군사 쿠데타로 친일을 이어갔던 박정희, 그 후예인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진 세력의 본산이 현실 정치에서 여전히 정당으로 존재하고 있는 오늘날, 민족의 앞날과 민주주의 장래를 위해 이 논의는 더더욱 절실한 것이기에 그렇다.

 


2019년 친일부역자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자들의 서훈을 취소한다고 발표하자, 나경원이는 국론 분열의 책임을 친일파 검증의 행위로 돌리려는 의도로 반민특위가 국론을 분열 시켰다.”고 주장했으며, 황교안이는 좌파 중에 정상적으로 돈 번 사람들이 거의 없다, 다 싸우고 투쟁해서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라고 민주당을 비롯한 이를 지지하는 국민들을 약탈하는 강도들이라고 날조, 공격했다. 이러한 작태는 이종명, 김순례, 김진태, 김무성 등 일제 부역자들의 몰염치를 승계한 무리들은 문 정권을 빨갱이라 칭하며 청와대를 폭파하자고 테러수준의 언어를 쓰기까지 했다, 이들의 폭력성과 야만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작금에 쏟아지는 이것들의 말은 오직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맞추어져, 법치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언어는 물론 폭동을 선동하며, 헌정질서의 훼손과 혼란을 부채질하기까지 한다.

 

사실 이것들의 이러한 작태는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려는 국민 열망을 무력으로 좌절시켰던 76년 전 그날의 시간에 펼쳐진 상황의 판박이다. 책의 시작은 친일 부역자 무리들, 해방 후에 오히려 더욱 세를 키우고 기득권을 유지하던 종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바로 지금에도 일제 식민지 시대가 연속되고 있는 역사를 치열하게 고발하는 작가 최인훈 선생의 총독의 소리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대일본제국 40년 경영에서 뿌려진 씨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며, 이는 폐하(일본천황)의 유덕을 흠모하는 충성스런 반도인의 가슴 속 깊이 간직되어 있는 희망의 꽃입니다...해방된 노예의 꿈은 노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라며 식민지 부역자로서의 세력을 지금에도 공고히 하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문장이다. 오늘 우리들은 고위 관료라는 것들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뻔뻔스레 친일을 드러내놓고 그 부끄러움도 모르고 주절거리는 모양을 본다. 독도의 영유권을 부정하고, 위안부를 조롱하며, 신사참배를 숭배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가해자의 논리를 한국 국민에게 감히 강요한다.

 

식민지 시대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고, 총독의 손발을 자청하며 동족을 잔혹하게 학대, 살해하던 군, 경찰, 밀정, 낭인들이 옷을 바꾸어 입고 대로를 활보하는 것을 넘어 민족의 주인 노릇을 하며 나라의 정치와 문화, 교육과 경제를 주물럭거리고, 자신들의 이익 도모에 열을 올리는 한 치의 변함도 없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 윤의 내란은 이것들, 바로 청산되지 못한 친일 부역무리를 그대로 잔존시킨 우리의 좌절된 현대사에 그 뿌리가 있음이다. 이 책의 고귀한 가치는 그 어떤 언어로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뿌리를 내리면서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는 일본의 파시스트 세력이 그대로 권력을 유지하게 된 연원에서부터, 친일 무리들의 극히 일부분의 척결조차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 부역자들의 구체적 면면, 이 역사적 상황이 지니는 오늘의 의미까지 2025년을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숙독해야만 하는 필독서라 할 것이다. 태생 자체가 기만과 거짓인 수구정당, 손쉽게 폭력을 동원하여 저항하는 이들을 짓밟음으로써 민주주의를 이 땅에서 오랜 세월 질식시켰던 것과 그 종자들이 왜 발본색원(拔本塞源)되어야 하는가를 성찰할 수 있으리라. 저자들은 이렇게 맺는다.

 

반민특위는 1949년 실패했으나 그렇다고 지금도 실패할 까닭이 없다.... 도대체 그날 그 순간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기억하고 알리며, 누가 가해자이고 희생자인지 직시하면 시작 할 수 있다.. 진실에서 후퇴하지 않는 역사를 우리는 지니고 있다고, 때문에 반민특위는 그 임무를 완수 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님을 선언한다. 이제 우리들은 반민특위를 재입법하고 그 실천을 완수해야 할 역사적 임무 앞에 섰다. 윤 씨의 부패와 퇴행성 덕택에 숨어있던 친일 종자들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는가! 이것이 진정한 역사의 힘일 것이다.

 

(이 글에 대한 참고 글로 송건호 외 공저, 해방 전후사의 인식 1및 그 후기 참조-나는  해방전후사 1권이 출간된 1979년 다음 해인 전국 비상계엄령 하에 군부에 의해 판금되어, 대학 3학년 이었던 1980년에 돌려 읽어 너덜너덜해진 복사된 프린트물로 읽었으며, 그로부터 41년이 지난 2021년 정상적인 책으로 다시 읽었다. 40여 년 전의 상황으로 역행하는 그 퇴행성을 인식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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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격자의 차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6
연여름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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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빛은 이미 자기의 삶을 장악한 자의 것이었거든.” - 116쪽에서


강렬한 이야기다. 경계를 두르고 그 내부에 폐쇄적 집단을 형성하는 인간 무리들의 삶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그들의 언어와 행동 양태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보는 것은 야릇한 흥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의 힘, 상상력의 힘이란 어쩌면 인류가 자신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위대한 방편인지도 모르겠다. “2692823, 생애한도가 연장될 수 있다는 소문이 병원을 도는 중이었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그리곤 이번 오류 사건이 규모가 컸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뒤따른다. ‘오류 사건은 소설의 표제에 있는 부적격자와 하나의 관련어로 묶여 이 소설의 서사를 이끄는 핵심어랄 수 있겠다.

 

부적격자라는 단어는 개념 자체에 어떤 기준을 내포함으로써 특정한 시대와 공간, 그리고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새로운 다섯 차례의 세계대전과 기후변화, 바이러스로 인한 식수오염으로 종말의 위기에 내몰린 일군의 생존 무리들은 오염되지 않은 식수원을 찾아 방벽을 쌓고, 외부로부터의 오염원을 차단하여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경계를 두른다. 즉 경계 내부가 된 집단은 자신들만의 규범을 통해 적절함과 부적절함을 나눈다. 부적절함이란 이처럼 특정 집단 체제가 자신들의 안전이라는 명목 하에 배제하는 것들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 허구가 되어버리고 금지되거나 사장되어 버린다. 보이지 않는 폭력의 한 유형이다.

 

그런데 배제라는 것은 영구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상황의 다름, 적용 대상의 구분 등등 무수한 요인들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다. 본래적으로 자의성을 내재하는 것이고, 개념상 상대성을 지닌다. 모세라는 인공지능의 제안으로 발견된 오염되지 않은 식수원의 발견에 따라, 한정된 자원 내에서 살기위해 불가피하게 구성원들의 생몰(生沒) 연령의 한계를 설정하게 되고, 집단의 리더가 지닌 인류의 경험, 권력이 고이고, 내부분열과 탐욕과 악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자멸하는 것을 알기에 인공지능과 인간은 상호협력 관계자로서 인공지능 모세를 중재자로 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을 실무자로 하여 한정된 공간에서 8만 명의 인간이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는 대략 40년을 생애한도를 설정한다. 따라서 중재도시에는 그 어떤 리더도 없으며, 중재자인 인공지능 모세 또한 실무자들이 중재자의 제안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언제든 사용을 중지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중재자와 실무자가 합의한 생애한도 연령에 도달한 실무자는 소거된다. 소설의 시간은 그로부터 대략 9세대에 이른 시기이고, 주요 배경은 중재도시 중앙병원이다. 8만 명의 집단구성원은 모두 실무자로 불리는데, 제각기 방벽 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수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책은 애초부터 부적격자 차트임을 거듭 강조한다. 어떤 실무자가 부적격자일까. 소설은 바로 이 부적격에 내포된 무수한 함의들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 그리고 산다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우리들은 생존을 위해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는가?

 

세대를 이어가며 상시 8만 명의 생존유지가 가능한 세계가 목적인 곳, 그래서 최소의 필요로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에 효율성을 덕목으로 하는 합리(合理)가 최고의 원칙이다. 사치, 유희, 쾌락, 종교, 예술, 감정 등 인간의 모순을 촉발하는 변수들은 금지, 제거되고,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균형제라는 약물을 정기적으로 투여한다. 한편, 세대를 거듭하며 방벽 바깥이란 모두에게 각인된 근원적 거부로서의 의미를 띠게 됨에 따라, 모든 허구는 모순이라 여겨지고, 상상력은 죽은 단어가 된다. 실무자로 지칭되는 모든 구성원들은 점차 중재자의 합리에 길들여져 간다. 허구, 이야기, 상상력은 도시의 안정과 지속을 위협하는 개념이 된 것이다. 합리를 구성하는 효율성의 관점에서 허구는 불필요한, 군더더기요, 생존의 필요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기록은 그래서 철저하게 군더더기가 제거된 사실인 필요 내용이외에는 기재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융통성, 충동, 소중함. 애착, 애도와 같은 생존의 필요라는 효율성의 기준과 모순되는 단어들은 전부 죽은 단어가 된다. 한편, 사실로 확인되지 않거나 확인될 수 없는 꿈이나 상상과 허구를 이야기 하거나 이를 듣고도 중재자에게 고발하지 않는 실무자도 결점을 부과 받는다. 생애 연령 한도에 이르기까지 결점이 7회 누적되면 즉시 부적격자가 되어 3병동에서 소거된다. 하나의 예로 워터드롭이라는 중재자와 소통하는 일종의 리시버가 있는데, 이의 미착용도 결점 대상이다. 모든 대화는 이 워터드롭을 통해 중재자에게 전송되고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다. 일종의 감시체계이다.

 

따라서 이를 귀에서 제거하는 행위는 집단규범을 위협하는 행위가 된다. 이제 오류사건의 의미를 말 할 때가 된 것 같다. 오류사건이란 생애연령 한도에 도달하기 전에 몽증을 겪으며,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는 균형제라는 약물의 투입으로도 완화되지 않는, 결국 자기 소거를 감행하는 부적격자의 발생이며, 이는 실무자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끼쳐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실무자가 사망하는 일종의 재난을 일컫는다. 소설의 시작문장에 생애한도가 연장될 수 있다는 것은 실무자의 무더기 결손으로 불가피하게 한도에 도달한 실무자들의 연령한도를 연장하여, 중재도시의 정상적 순환을 가능토록 하는 조치이다.

 


실무자들은 중재도시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생존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자신들의 감정과 쾌감과 욕망, 그리고 꿈과 상상력, 이야기마저도 효율성이라는 합리를 위해서. 이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지닌 모순성, 즉 두 가지의 판단, 사태 따위가 양립하지 못하고 서로 배척하는 상태에서 갈등하는 존재이기에 이 모순을 소거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꿈이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현상이고, 이는 다양한 상상을 낳는다. 이 상상은 마음에 홀로 담기에는 버거운 것이고, 발설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또한 방벽 밖의 세계가 제아무리 근본적 부정을 의미한다지만 호기심, 궁금증은 물론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무수한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지식을 늘려나가고, 그 무지를 줄여나감으로써 경계 밖의 존재자들은 물론 다름을 수용하고 포용성을 확대해 나간다.

 

그러나 중재도시에서 이것은 도시의 생존을 위협하는 범죄적 행위다. 합리의 저해는 곧 도시의 생존성 저해인 까닭이다. 오류사건으로 인해 생애 한도가 연장되자 소거 대상자의 최후 기록을 담당하던 1병동 근무자인 세인은 한시적으로 부상 또는 질병 실무자들을 치료하는 2병동에 근무하게 된다. 세인은 방벽에서 떨어져 기억을 상실한 방벽유지 보수 실무자인 레드를 담당하게 된다. 기억을 상실한 레드는 세인에게 허용되지 않는 군더더기의 이야기들, 사용하지 않는 죽은 단어들은 물론 도시 공용어인 존중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어느 날 레드는 자신의 귀에서 리시버인 모세를 빼 내고는 세인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암묵적 신호를 보낸다.

 

중재자가 들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모세를 차단한 시간이 168시간, 일주일이 경과하면 결점이 1회 누적된다. 168시간은 레드가 결점 부과 한계시간을 알기 위해 자신의 귀에서 빼내 알아낸 사실이다. 부적격자로 강제 소거 될 위험을 알면서도 저지른 행위라는 점이다. 자신에게 죽음의 가능성이 설정된 한도보다 빨리 도래할 것임을 알면서도 저지른 이 행위는 그저 단순한 일탈이 아니다. 그는 내부 체계가 금지한 것, 특히 상실된 선택이라는 자유를 행사한 것이다. 무결점 실무자인 세인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 역시 발설되지 않은 자신만의 꿈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 머릿속 상상의 세계에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에 레드의 제안을 수락한다. 모세를 자신의 귀에서 빼내고 레드와 세인은 자유롭게 확인되지 않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군더더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너무도 많은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물음들이 내재하고 있다. 생애 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날이 도래하면 자발적으로 소거되는 삶에 대한 물음, 타인의 상상과 그에 기초한 이야기 나눔의 금지란 대체 인간에게 무엇인지, 그리고 방벽 바깥이라는 잊혀진 부정의 세계, 다시 말해 금지된 무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 그 앎의 욕구에 대한 본질적 물음이다. 이에 더해 적격과 부적격의 구분이란 것의 그 자의적 분별이란 것 또한 중재도시가 금지한 허구의 하나가 아닌가하는 것이다. 이제 모두에 인용한 자기의 삶을 장악한 자의 의미가 조금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외부에 무언가를 바라거나 거기에 어떤 목적을 두지 않는 내적 확신을 지닌 주체적 존재의 힘으로서 인간의 존재 조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체계에 순종한 한 실무자의 고발에 의해 강제 소거된 레드가 14년 전 방벽 너머에서 보았던 하얀 머리를 한 낯선 인간에서 발견된 자기 삶을 장악한 자로서의 삶을 위해 세인은 3세대 이후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굳게 닫힌 방벽의 육중한 출입문을 열어젖힌다. 세인의 이 행위에도 여러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는데, 그는 레드의 몽증(夢症)을 공유했으며, 부적격자인 레드에 대한 애착을, 그리고 허구를 재생산하고, 이윽고 그것을 실행한 것이다. 그리고 세인은 레드를 이렇게 기록한다. 얼마나 비합리적인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반짝거리던 사람이었는지.”라고.

 

우리는 이야기를, 허구의 소설을 왜 읽는가? 우리는 왜 꿈을, 희망을 갈구하는가? 아마 그것은 알지 못하는 내 인식 경계 너머의 존재와 존재자들을 알고자 함이요, 그를 통해 혹여 금지와 배제로 자기만의 동굴 속, 그 편협과 왜곡에 묻히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한 두려움의 지대를 벗어나 가능성이 숨 쉬고 있을 경계, 방벽 너머로 나아가려는 삶에 대한 무한한 의지와 용기일 것이다. 세인을 따라나선 이폴, 그들은 언어라는 한정된 영토를 떠남으로써 새로운 언어를, 그 낯선 지대를 발견하고, 허구로 치부되었던 바깥이 곧 진실임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왜 허구의 이야기가 읽혀야 하는지를 강하게 역설하는 작품이다. 또한 바로 그 상상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언어와 삶의 조건들을 발견하게 되고, 자유라는 선택의 주체로서 자기 삶의 지평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것임을 이야기 속에서 절로 깨닫게 이끈다. 레드의 차트를 기록하는 세인의 눈동자에 깃든 작은 불꽃, 또 그것을 바라보고 기쁨을 느끼는 이폴의 마지막 모습에서 인간의 모순성, 절망적 상황에서 죽음을 희망하며 한편으론 삶을 갈구하는 비합리가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우리들이 어떤 특정한 집단만의 공동체를 꾸린다면, 그래서 그곳에서 생을 누려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생존을 위해 꿈과 감정과 선택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을까? 효율과 합리성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자본주의의 척추인 이들 합리가 최고의 원칙인 오늘의 세계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앗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반면교사일 것이고, 감정과 상상력과 허구의 이야기가 지닌 그 강력한 힘이란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하는 작품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한 호흡에 내쳐 달려 읽게 되는, 그와 동시에 굵직한 인간 삶의 본래적 조건을 생각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너의 처지를 기꺼이 상상하는 용기, 그러한 힘들이 이 무심한 세상을 완전히 박살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거라는 작가의 말로 감상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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