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사월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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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소설의 제재인 삶과 죽음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카눈의 관습법’, 즉 죽음의 법칙이 우선시되는 기괴한 서사시를 읽으면서 어떤 위대함, 숭고함,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데, 문득 칸트가 분류한 숭고함의 유형에 맞닿으면서 두려움과 아름다움이 뒤엉킨 곳에서 숭고함이 피어난다는 감성의 보편성 같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끔찍하고 부조리하고 숙명적인 죽음의 법칙이 지배하는 ‘라프쉬’라는 알바니아 북부지방의 피의 복수에 얽힌 침울한 이야기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신비스러움과 친근함, 아름다움, 욕망의 감정이 어우러진 그 어떤 위대함, 경외를 떨 칠 수 없게 한다. 아마도 죽음이 내재하고 있는 그 자체의 위대성으로 인해 인간의 운명에 어떤 영원한 것이 부여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한데,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삶이 이어질 수 있다는 삶이 두 동강 난 청년이 발하는 비극성이 수반하는 감당키 어려운 위엄, 육중한 무게가 직접적인 영향일 것이다.

 

“피는 피로 갚는다!”바로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라 할 수 있는데, 죽음을 당한 집안은 반드시 죽음을 일으킨 집안에 죽음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명예라는 자본을 축적하려는 것인데 이 역시 아름다움을 야기하는 한 요소라 볼 때, 우리네가 성스러움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어떤 감성의 소용돌이가 그치질 않는데, 그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줄기차게 작동하여 아마도 시종 아련한 그리움, 동경, 연민, 그리고 미(美)로서의 숭고함 같은 것에 마음이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네 형의 피를 회수하지 않는 한, 너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살 수 없다.”형을 죽인 크리예키크 가문의 남자에게 복수를 하여야 하는 것이다. 칠십년 전 손님으로부터 비롯된 이 처절한 복수의 반복은 카눈의 엄격한 법칙이며, 이를 어길 수 없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살 권리가 없다는 이 기이한 삶과 죽음의 모순법, 이제 피를 회수해야 한다. 피를 회수당한 형의 피를 다시 회수해야 하는 것, 그리고 피를 회수하면 역시 그의 피도 회수당한 가문으로부터 회수당할 것이다. 이 작품이 위대한 것은 이처럼 생명의 법칙을 압도하는 죽음의 법칙이 뿌려대는 그 음울한 숭고함 때문만은 아니다.

 

신화와 같은 서사적 아름다움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층위의 비판이 그것인데, 카눈의 관습법이 지배하는 라프쉬를 신혼 여행지로 선택한 관찰자, 이 불행한 산악주민들로부터 예술적 재미를 찾으려는 작가‘베시안’의 오만함이 대변하는 지배자와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에 대한 은밀한 비난이다. 아름다운 신부‘디안’과 함께하는 라프쉬의 마차여행은 살인의 의식으로 점철(點綴)된 카눈의 관습법이 삶의 모든 행위를 실타래처럼 얽어 도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 속에서 미를 찾는 양태이다. 그러나 피를 회수하고 피의 세금을 내기위해 피의 관리인인 오로쉬 성을 나선 청년‘그로즈그’와 먼발치에서 눈을 마주한 디안은 죽음의 표시를 몸에 달고 있는 그 비극적 광휘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다. 죽음이 내려앉은 청년이 발산하는 두려움과 그 속에 동반된 전율, 그것은 마음을 끄는 그 무엇이다.

 

소설은 애초에 생명의 법칙보다 죽음의 법칙이 우선시 되는 이 지역, 즉 카눈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 바로 그러한 장치 속에 베시안과 디안이 뛰어들게 함으로써 비극의 씨를 잉태하게 하는 것인데, 그래서 소설이 온통 비극적 숭고함에 빠져들게 한다. 그조르그, 죽음의 표상인 검은 리본을 단 파리한 청년의 모습에 디안은 고통스럽게 그러나 동시에 감미롭게 무너져 내린다. “아무리 비싼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리라”고 디안은 마음속으로 되뇐다. 이것은 남편 베시안의 의도를 무참하게 전복시키는 것이며, 자신의 예술을 살찌우기위한 행동, 즉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지배 권력의 탐욕에 대한 파멸의 예고이기도 하다. “당신의 예술에선 범죄 냄새가 나오!”“피비린내 나는 연극을 공연하라고 몰아넣고는 그 연극을 관람하는 거요.”바로 그걸 ‘살인의 미학’이라 부르면서.

 

한편 이 작품을 미학의 향연장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인데, 칸트를 비롯해서, 바타이유, 랑시에르의 숭고미와 죽음의 사유들과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그 지적 감수성을 깨워대는 통에 정말 예술의 지고한 즐거움에 빠진다는 것이 이런것이구나 하고 내심 기쁨의 탄성을 질러대게도 된다. “날짜도 계절도 연도도 미래도 없는 영원의 시간, 더 이상 어느 것도 그와 결부되지 않는 추상적 시간”속에 누워 부서진 사월을 어둠에서 맞는 그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삶에서 오히려 삶의 무한성을 발견하게 하는 작가의 위대함에 그저 찬사를 보낼 밖에 없다. 진정 기립 박수를 보내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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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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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를 읽고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긴 한 블로거의 문장이 떠오른다.  "타자에 의한 사랑의 호소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문득 찾아오고, 내 마음을 흔들 때 이것에 대해 무관심 또는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타자를 향해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

'맞춤형 결혼 기술자'라 자명하는 소설 속 '노인지'라는 여성이 자신의 삶에서 구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이것을 규명하려 한다는 것이 어쩌면 어리석은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해소할 수 없는 존재의 불안?,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 호소하는 양심?

 

'기간제 결혼'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자유롭고 싶어 조금 다른 결혼을 하는 것이라고 화자(話者)는 자신을 변론한다. FW(Field Wife)니, FH(Field Husband)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매춘과 그 경계가 모호한 아내와 남편의 역할을 약속된 기간동안 수행한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는 사람들, 전통적인 관습과 법 제도에서 자유로운 결혼 관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어쩌면 나라는 존재의 참을 수 없고, 없앨 수 없는 무거움, 타자성이 주는 불안감과 불확실성의 혼란에 적대감을 지울수 없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결국 이 적대감의 실현인 폭력으로부터의 도피, 그래서 언제든 파기할 수 있는 결혼의 이익만을 향유하려는 사람들. 노인지가 소속된 이 파격적인 결혼시스템을 사업으로 영위하는 NM은 이러한 인간의 위기를 이용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NM은 허위를 감춘 사막이고, NM밖은 허위로 포장된 사막이다."라고 화자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허위를 감춘 사막이야 비즈니스이니 그럴 수 있다지만 이 사회 전체가 허위로 포장된 사막이라는 진단에는 꺄우뚱 할 수 밖에 없어진다. 이 여성이 해독하려는 사회는 어떤 것이기에 이러한 주장이 가능할까? 타자를 어떻게 정의하기에?

 

기간제 결혼 기간중 다가온 '엄태성'이라는 남자, 일방적으로 타인의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 그러나 이 사랑의 호소에 무심과 폭력으로 대응하는 NM의 시스템은 오늘 우리들이 타자 읽기에 얼마나 무지한가를 대변하는 것만 같다. 아마 '인지'라는 여성의 시선이 여기에서 멈춰버렸으면 소설 읽기를 중단했을지 모르겠다. 인지가 자신의 폭력성 발견과 사랑의 지혜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수행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동성의 친구 '시정'이 끊임없이 자신, 노인지에게 다가오려 했음을,  "내 사랑이 늘 시정의 반대편에 있었기에 시정을 볼 틈이 없었다."는 변명이 분명 미완의 이해이긴 하지만 타자성이 주는 불확실성에 대한 폭력성을 비로소 감지한 것이기에.

 

'볼 틈'이라고 했다. 무얼 본다는 것인가? 어떻게도 환원되지 않는 시정,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일게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이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얼굴에 다가가려고 끝없이 애쓰는 것 말이다. 결혼, 섹슈얼리티, 사랑, 이것만큼 시간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한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원천이 있지 않겠는가? 인지가 시정을, 엄마를, 다섯 번째 남편의 그 환상적인 시도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 끊임없이 나에게서 도망가려는 타자로부터 도망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그 근원적 폭력의 단절을 나는 <트렁크>에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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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삶이냐 / 사랑한다는 것 동서문화사 월드북 45
에리히 프롬 지음, 고영복.이철범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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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짐 - 고독과 불안 - 에서 벗어나기 위한 적극적 자유 실현의 인간변혁 사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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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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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Utopia)를 거론할 때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헉슬리의『신세계』, 오웰의『1984년』, 그리고 이후의 많은 反유토피아적 미래사회를 그린 작품들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는 문학사적 지위를 가지기에 그 소설적 작품성을 떠나, 우리인류에게 미친 사상적 공감의 족적은 지대하다 할 수 있겠다.

우리 인류가 염원하는 이상향, 욕망이 불필요한 곳, 경쟁과 갈등이 없는 곳, 모든 이가 평등 한 곳, 이러한 곳이면 우리는 행복을 만끽 할 수 있을까?

행복이란 우리들에게 진정 어떤 의미일까? 고통, 근심, 번뇌가 지워진, 꿈과 환상이 더 이상 우리의 정신을 자극하지 않는 상태를 행복한 사회, 인간의 미래 사회로 상정한다.

<은혜로운 분> 1인이 지배하는 사회, 숫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획일화된 사회,‘자유’라는 어휘가 낯선 사회, 아니 ‘자유’는 미개했던 인간들의 불안한 이성에 대한 다름의 표현이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을 지배하는 이념, 행복과 자유의 공존에 대한 고뇌를 축으로 하여, 인류가 지향하는 궁극의 낙원(樂園)이란 어떤 것인가를 성찰하게 하며, 이는 작품이 쓰여진 러시아 사회주의 10월혁명(일명 볼쉐비키 혁명)으로 인한 공산화한 전체주의 러시아의 집단화되고, 경직된, 그리고 유물론에 의해 사상이 강제된 시대적 상황과 정치사회적 배경과 결합하여, 자연스럽게 민중의 해방으로, 공산주의 혁명이 지향한 것은 다름 아닌 부의 평등분배, 균등한 기회, 욕망의 고통이 없는 사회, 즉 ‘유토피아(utopia)'의 세계로 안내된다.

따라서 이 작품이 획일화된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무관치 않으며, 근대산업사회의 기계화되고 비인간화된 현실적 우려를 분명하고 깊이 있게 천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모든 인간은 번호로만 식별 될 뿐이다. ‘D-503', 나는 수리(數理)전문가로서 우주선‘인쩨그랄’호의 조선(造船)기사이다. 투명한 유리벽에 인공해가 비추는 숙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자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난다. 모든 번호들은 같은 음식을 같은 시각에 같은 동작으로 삼키고, 거대한 사각형 구조로 단일한 움직임으로 동시에 이동한다. 하루에 두 번의 휴식시간, 성(性)의 구분은 번호표식 앞의 알파벳이 알려준다. 지정된 시간에 당국에 등록하고 투명한 유리 숙소의 커튼을 내리면 두 번호는 섹스를 한다. 여기에 의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적 오류가 없는 행복, “절대적인 미학적 소속성에, 이상적인 비자유에 근거”하는, 그 누구도 ‘개인’이 아닌 ‘...중의 한 개인’인 사회, 강력한 단일 조직체로서, 비자유의 본능이 태곳적부터 인간의 유기적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실재할 수 없는 생각이기에 그렇다.

“모든 번호에게는 다른 어떤 번호라도 성적 산물로 이용할 권리가 있다.”라는 ‘단일제국’의 성법전(性法典)이나, 사전에 만장일치의 완벽한 동의가 이뤄진 뒤 진행되는 <은혜로운 분>의 선출방식처럼, 국가가 통제하는 것은, 통제치 못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우연성과 맹목성, 비과학성의 부조리에 비해 월등한 이성적 결실이라 주장된다. 즉, 기지수(旣知數)의 시대, 불확실성이 배제된 사회, 비자유의 이상성으로 상징된다. 나아가, 이렇게 통제되고 비자유가 지배하는 단일제국이야말로 낙원이라고 외친다. “우리는 다시 아담과 이브처럼 천진무구 해졌어”라고. 어떠한 것도 개인이 자유로이 생각하고 행동 할 필요가 없는 완전히 획일화되고 통제된 사회에서 ‘천진무구’란 것은 최고의 선(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은혜로운 분>과 단일제국을 찬양하던 나, D-503에게 믿을 수 없는 것, 미증유의 혼란스러움이 발생했다. I-330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심장이 뛰는 것은 “압축, 수축 펌프에 의한”기계적인 이상적 펌프의 작동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이러한 심장의 울렁거림에 “사랑이니 연민이니 하는 것들은 부조리하고 부자연스럽다.”그래서 질병일 밖에 없다. 이는 개인이 말살된 사회, 오직 ‘우리’만이 존재하는 사회만을 아는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당혹스런 생각이 된다.

결국 혼돈에 휘말린 D-503의 I-330에 대한 집착은 단일제국과 그 밖의 세계를 구분하는 초록색 유리벽너머 숲을 통해, 믿을 수 없는 것, 새로운 것, 미지수의 세상을 보게 한다.

통제된 감시사회 속에서 D-503의 혼란스런 두뇌는 용인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한다. 또한 I-330을 비롯한 단일제국을 파괴하려는 ‘그들’, 그리고 번호들의 감정적 흔들림을 말살하기 위한 두뇌수술이 자행된다. 오직 기계화된 천진무구한 절대이성의 인간으로 개조된다.

감성을 지배하는 뇌세포의 제거수술을 받은 D-503은 자신의 자백으로 처형을 기다리는 가스상자 속의 I-330을 바라보며, “처형을 연기해선 안 된다. ~ 中略 ~ 유감스럽게도‘이성을 배신한 인간’의 수는 상당히 많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승리하길 희망한다. 아니, 그보다 나는 우리가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이성은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이 마지막 D-503의 독백에서 우린 역설적으로 공산주의 혁명의 실패를 보기도 하고, 유토피아의 불안하고 위험스럽기조차 한 형태를 읽어내기도 한다. 이렇듯 작품은 유토피아 혹은 당시 러시아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한 풍자극이며, 근대산업사회가 가져온 비인간화, 기계화, 물질 만능화, 획일화, 집단화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기도 하다.

“자유가 없는 행복이냐, 아니면 행복 없는 자유냐”, 인간의 이성이 이 본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전개할 수 있을까? 존재 할 수 없는 낙원, 상상속의 이상향, 인류는 UTOPIA를 과연 건설해 낼 수 있을까? 자유를 선택한 오늘의 우리는 정말 행복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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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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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능은 같은 본성에 속한다. 지능의 세계에 세워진 위계의 허위를 들춰내는 평등의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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