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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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를 읽고 다음과 같은 소회를 남긴 한 블로거의 문장이 떠오른다.  "타자에 의한 사랑의 호소가 내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문득 찾아오고, 내 마음을 흔들 때 이것에 대해 무관심 또는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타자를 향해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

'맞춤형 결혼 기술자'라 자명하는 소설 속 '노인지'라는 여성이 자신의 삶에서 구하려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이것을 규명하려 한다는 것이 어쩌면 어리석은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해소할 수 없는 존재의 불안?,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 호소하는 양심?

 

'기간제 결혼'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 만나고 헤어지는 것에 자유롭고 싶어 조금 다른 결혼을 하는 것이라고 화자(話者)는 자신을 변론한다. FW(Field Wife)니, FH(Field Husband)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면서 매춘과 그 경계가 모호한 아내와 남편의 역할을 약속된 기간동안 수행한다. 이 시스템을 이용하는 사람들, 전통적인 관습과 법제도에서 자유로운 결혼관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 어쩌면 나라는 존재의 참을 수 없고, 없앨 수 없는 무거움, 타자성이 주는 불안감과 불확실성의 혼란에 적대감을 지울수 없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결국 이 적대감의 실현인 폭력으로부터의 도피, 그래서 언제든 파기할 수 있는 결혼의 이익만을 향유하려는 사람들. 노인지가 소속된 이 파격적인 결혼시스템을 사업으로 영위하는 NM은 이러한 인간의 위기를 이용하는 것일게다. 그런데 "NM은 허위를 감춘 사막이고, NM밖은 허위로 포장된 사막이다."라고 화자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허위를 감춘 사막이야 비즈니스이니 그럴 수 있다지만 이 사회 전체가 허위로 포장된 사막이라는 진단에는 꺄우뚱 할 수 밖에 없어진다. 이 여성이 해독하려는 사회는 어떤 것이기에 이러한 주장이 가능할까? 타자를 어떻게 정의하기에?

 

기간제 결혼 기간중 다가온 '엄태성'이라는 남자, 일방적으로 타인의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 그러나 이 사랑의 호소에 무심과 폭력으로 대응하는 NM의 시스템은 오늘 우리들이 타자 읽기에 얼마나 무지한가를 대변하는 것만 같다. 아마 '인지'라는 여성의 시선이 여기에서 멈춰버렸으면 소설 읽기를 중단했을지 모르겠다. 인지가 자신의 폭력성 발견과 사랑의 지혜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수행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동성의 친구 '시정'이 끊임없이 자신, 노인지에게 다가오려 했음을, "내 사랑이 늘 시정의 반대편에 있었기에 시정을 볼 틈이 없었다."는 변명이 분명 미완의 이해이긴 하지만 타자성이 주는 불확실성에 대한 폭력성을 비로소 감지한것이기에.

 

'볼 틈'이라고 했다. 무얼 본다는 것인가? 어떻게도 환원되지 않는 시정,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것일게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이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얼굴에 다가가려고 끝없이 애쓰는 것 말이다. 결혼, 섹슈얼리티, 사랑, 이것만큼 시간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한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원천이 있지 않겠는가? 인지가 시정을, 엄마를, 다섯번째 남편의 그 환상적인 시도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 끊임없이 나에게서 도망가려는 타자로부터 도망치지 못하는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그 근원적 폭력의 단절을 나는 <트렁크>에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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