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허무는 어디에서 오는가 - 도덕을 상실한 시대의 톨스토이 읽기
석영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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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 글은 석영중 교수의 오랜 학문적 연구가 충실하게 녹아있는 책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저술의 내용을 상당 부분 담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스포일러 짓거리를 혹여 한 것 아닌가 저어됩니다. 독자들께서는 이점 해량하시어 읽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현자이자 대문호로 알려진 '레프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한 뒤, 나이 오십에 이르자 인류를 향해 근본주의적 도덕을 연설하기 시작한다. 소위 시쳇말로 꼰대가 되었다. 이를 문학계에서는 톨스토이의 회심(回心)’이라 하는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이미 유년시절부터 그 싹이 도처에서 움트고 있었다고, 그의 소설, 에세이, 일기, 전기를 망라해 행적을 탐사한다. 그것은 인생은 허무한 것이다.’ 이 결론을 반박하기 위한 결론을 얻기 위해, 인간이 지속적 삶을 살기위해서 어떤 근본적 가치를 붙잡아야 하는 것인지, 그 지혜를 발견하기 위한 모순으로 점철된 투쟁을 통해 답을 발견하는 것이었다고.

 

이 책은 이 탐사의 여정을 톨스토이의 대작인 안나 카레니나를 중심으로 소설 전쟁과 평화, 크로이체르 소나타, 부활, 악마에서부터 참회록, 인생의 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등 교훈 에세이들, 그리고 대문호 부부의 일기를 종횡하며 나쁜 사랑, 아주 나쁜 결혼, 좋은 결혼, 육체와 채식, 죽음을 기억하자 등 7개장에 걸쳐 톨스토이가 지녔던 생각과 신념을 풀어놓는다. 그것은 기괴하고 아주 뒤틀린 한 남자의 비극성을 발견하게 한다. 자기 육체의 쾌락에 몰두하면서 그 쾌락을 혐오하고 저주하는 식의 극단을 하나의 내부에 지닌 인간의 모순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괴한 믿음을 일생 일관되게 밀고나간 인물을 보게 된다.

 

물론 대문호의 삶을 하나의 시선에 매몰시켜 폄하하거나 훼손하려는 그런 글은 아니지만, 저자의 관점은 결혼이라는 하나의 근본적 사건에 집중된 수많은 파동에 내재된 본질주의적 도덕주의의 무서운 혐오를 읽어내고 있는 것이기에 딱히 격하가 아니라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아마 이러한 지향성 때문이겠지만 첫 장의 제목도 나쁜 사랑이다. 나쁜 사랑의 대표는 단연 불륜이고 이 불행한 사랑에 목숨을 건 여자가 자기 자신과 사투를 벌이는안나 카레니나는 제격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부터 저자는 톨스토이의 사랑과 결혼, 섭생, 농촌에서의 삶, 예술 전반에 대한 도덕주의적 신념을 생생하게 발굴해낸다.

 

톨스토이가 주인공인 안나에 대해 얼마나 혐오와 증오를 가졌는지, 그 의도를 줄줄이 열거하며, 현실 속 톨스토이의 방탕했던 젊은 시절의 삶과 병행하며 그의 연애관을 해독한다. 오빠의 외도로 인해 풍파가 일어난 올케와의 갈등을 중재하러 온 안나가 모스크바에서 무도회에 참석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안나는 어떤 치장도 없는 블랙 드레스를 입고 수많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을 압도한다. 이 단순하고 자연스러움으로 복식을 초월하여 드러나는 생생한 그녀의 활력은 더욱 화려하게 빛난다. 자기 자신 자체를 어필하는 아름다움이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뭔가 잔혹하고 무서운 것이 있었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안나의 검은 옷은 죽음의 예고이며, 이 무도회는 곧 자기 사망증명서에 서명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장례식, 매춘부의 옷이 검은 색의 드레스였음을 상기시킨다. 무도회등 사교모임과 그곳의 여인네들에 대한 톨스토이의 혐오와 증오가 뿌리 깊었음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 불륜커플이 최초로 정사를 치루는 장면의 묘사는 정말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는 아주 기분 나쁜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죽인 시체야말로 그들의 사랑이었고, 그들 사랑의 첫 단계였다. 수치심이라는 무서운 대가를 치르고 얻는 것을 회상해보니 거기에는 뭔가 무섭고 더러운 것이 있었다.” , 그들의 남녀상열지사에는 그 어떤 쾌락도 환희도 없으며, 오직 공포만이 맴돈다. 톨스토이는 육체의 사랑인 이 불륜커플, 특히 안나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안나의 사랑은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 죽음은 소설 곳곳에 무수한 복선으로 지속적으로 암시하며 급기야 참혹한 죽음으로 귀결시킨다.

 

이렇게 육체의 사랑에 대한 병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그 육체의 욕구에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그 혐오감에 비례해서 성욕도 병적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그의 일기) 그는 대영지의 지주로서 농노의 아낙 악시냐와 3년여에 걸친 정사를 지속했는데, 1858.5.13.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단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이런 사랑은 생전에 처음이다.” 그런데 매우 우습게도 이 지주나리는 악시냐와의 육체관계를 계속하면서도 도덕적 자책감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탐닉하면 할수록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는 것인데, 이는 자기기만이 아니고 뭘까? 육체 욕구에 증오까지 보내면서 그것을 탐닉하는 인간, 아무튼 톨스토이의 젊은 시절, 그가 소피야와 결혼하기 전까지의 방탕함의 일례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1862년 소피야와 결혼하면서 그의 성적 쾌락은 합법적 길이 열렸다. 그런데 또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이 기행(奇行)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에게서도,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포즈드니셰프에게서도 동일한 행동으로 출현하는데, 과거의 지저분한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올바르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아내에게 그 일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부에게만 순결을 요구하는 당대의 인식은 그랬다고 치자. 그래도 또 하나의 심각한 도덕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데, 과거의 일기를 보여주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합법적 쾌락의 도구로 너를 사용하겠어!’라는 자기 아내의 성적 도구화 선언인 것인데, 이 모욕의 행위(일기를 보여주는 것)에 무슨 가정의 행복이 자리 잡을 공간이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사랑, 결혼관이란 육체의 쾌락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다 온갖 망상들, 영혼의 교감, 일심동체의 의사소통을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넌센스를 넘어 이런 부도덕한 몰상식도 없을 것이다.

 

막심 고리키는 톨스토이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여자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적대적이며, 여자에게 벌주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그것은 쾌락을 끝까지 다 만끽하지 못한 수컷의 적대감 혹은 육체의 음탕한 충동에 맞선 영혼의 적대감이었다고 말이다. 톨스토이 자신도 이러한 자신의 욕구를 알았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다시 말해 육체에 대한 혐오감과 도덕적 죄의식에서 사이에서 고뇌했음은 도처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까닭이다. 1890년 전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중편소설 악마에서 톨스토이 자신의 분신인 지주 예브게니는 자신과 정사를 즐기는 농부 아낙에 대한 정욕을 가히 악마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곤 스스로 권총 자살하기까지 한다. 이제 톨스토이의 도덕적 인식은 육체의 아름다움은 곧 추잡함과 동일어에 이르는데, 이 때문인지 그의 작품들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하여 부활, 크로이체르 소나타』 『전쟁과 평화의 인물들에서 성적 매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증오의 대상이 되어 활력이나 육체적 매력을 깨끗하게 지워버린 인물로 변화시키던지, 아니면 모조리 죽여 버린다.

 

2 나쁜 결혼과 아주 나쁜 결혼 에 이르면 정말 가관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소설을 시작하는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가지각색으로 불행하다.”는 이 유명한 문장은 톨스토이 자신의 불행한 가정의 투사였을 것이다. 결혼 직후부터 피터지게 싸우기 시작한 톨스토이와 소피야의 그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은 아마 인간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악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스티바의 중단될 수 없는 외도, 그리고 외로움과 무관심의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하는 돌리, 안나와 카레닌, 톨스토이와 소피야, 크로이체르 소나타의 포즈드니셰프와 그의 아내는 부부 사이의 갈등이야말로 인류 최악의 고통임을 독자들에게 확인시켜준다.

 

톨스토이와 소피야는 그야말로 싸우면서 늙어갔다는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말인데,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난 쉰 살 무렵 톨스토이가 소위 중년의 위기를 겪고 나면서 살아왔던 방식을 바꾸는 회심(回心)을 하면서 인생의 교사로 거듭나는 시점부터 이 대문호부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자세하게 기록될 결혼 생활을 남겨 후대에 전해주고 있다. 이 문호는 이때부터 인류를 향해 온갖 종류의 충고를 해대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가정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실 내게도 하나의 사연이 있는데, 바로 그가 쓴 인생의 길이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이 평론가들로부터 지성의 자살이라거나, 불쾌한 문학 장르의 가장 불쾌한 견본이라는 이야기들을 알지 못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삼분의 일쯤 읽다가 냅다 쓰레기통에 팽개쳐 버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역겨움과 편협함과 황당함은 지금도 불쾌한 기분이 느껴질 정도이니 말이다. 잠깐 다른 길로 샜다. 다시 그의 회심의 시점으로 돌아가자.

 


자신의 오십 평생의 삶은 거짓이며 위선이었다는 것이다. 참회록에 이렇게 쓴다. 가장 반성했던 죄악 중 하나는 허접스러운 글을 써서 그 수익으로 호화롭게 살아온 죄악.”이라고 말이다. 그리곤 자신의 영지인 야스나야 폴라냐와 저택의 소유권을 버리기로 하고, 톨스토이 가문의 주요 수입원인 저작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1883내가 믿는 것에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거지가 되어야 한다. 안 그러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쓴다. 세인(世人)에게 모든 재산을 버리고 가난한 삶을 살아갈 것을 맹세한 대문호에 대한 존경심과 달리 아내 소피야에게는 이런 남편의 행동은 더없이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종들이 음식을 날라 오고, 따뜻한 차를 언제라도 대령케 하며,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아내의 시중과 나이 육십에도 여전히 자신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 아내에게 잠자리를 요구하는 인간에게 어찌 당혹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연민을 보내고 공감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소피야의 반발에도 일말의 잘못이 있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는데, 아마 남편의 진심을 읽으려 하지 않았던 이유인 것 같지만, 당대를 휩쓴 여자, 아내들에게 씌워져 있던 굴종의 미덕(?)을 돌파하지 못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소피야를 왜곡한 것은 아닐까? 소피야의 일기를 여기 간략하게 소개하련다.

 

홀로서기를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속박감은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내가 이런 우울증에 빠진 것은...” - 18751112


나는 남편의 일기들을 정서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영원히 감정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에 내 안의 모든 에너지와 재능을 소진해버렸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후회막심이다.” - 18901231

 

이때의 상황이 소설로 둔갑한 작품이 악명 높은 크로이체르 소나타. 마음을 쏟을 대상, 사랑할 사람,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 줄 사람이 소피야는 필요했을 것이다. 그때 남편이 잘 아는 차이코프스키의 제자이며 훗날 라흐마니노프의 스승인 콘서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타네예프를 소개받게 된다. 톨스토이 백작부인은 타네예프의 모스크바 연주회에도 참석하며 젊은 사내를 쫓는다. 동물적 정욕으로 마누라를 괴롭히는 남편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여인이 순결한 플라토닉 러브를 원했던 것, 정신적 위로가 필요했던 것이 무어 그리 추한 일이겠는가. 톨스토이는 사태의 희극성을 여러 차례 지적한 모양이지만, 소피야는 자신의 순수하고 고결한 열정의 믿음으로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아마 바로 이때의 상황을 소재로 하여 톨스토이는 자신의 결혼관을 압축한 소설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썼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은 살인으로 끝나는 최악의 과격한 결혼 이야기다. 여기서 모든 사랑을 싸잡아 육체적 사랑으로 매도한다. 사랑은 모두 악이라는 것이다. 남녀의 관계는 모두 철두철미하게 육체관계라는 것, 추잡스럽고 낯 뜨거운 것, ‘사랑=성욕=매춘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톨스토이의 결혼관은 시종 육체의 관계, 쾌락의 합법적 사용관계라는 지극히 편협한 인식으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고 그의 생각 전체가 이렇게 뒤틀려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는데, 서른 살에 쓴 지주 세르게이와 이웃집 처녀 마샤의 결혼 생활에 대한 담담한 회고 형식을 한 소설 가정의 행복은 일견 진부한 소박함을 담아내 긍정적인 결혼 생활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삶, 적절한 노동과 휴식과 감사와 평화가 깃든 소박한 삶이라는 것은 그리 단순하거나 쉬운 삶이 아니다. 실제 이러한 삶은 꿈같은 염원일 것이다. 이보다 조금은 현실적인 좋은 삶이 여전히 가부장적 질서 위에서만 행복한 가정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과 키티 커플이 미약하지만 좋은 결혼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분신격인 레빈에게서 우리는 일심동체와 같은 허망한 소통의 기대나, 육체적 행복, 정서적 행복, 도덕적 평화를 한꺼번에 보장해주는 유일한 길로서 결혼을 꿈꾼다는 점에서 한낱 미망임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어쨌든 레빈과 키티 부부의 결혼이 톨스토이가 기대하는 결혼생활의 지극히 양보된 균형감각 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근본주의적 도덕군자는 또 무슨 말을 했을까? 1886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육식과 채식(4)을 대립시키며, 어떤 것을 먹느냐에 따라 그 인간의 심성과 인격, 그리고 전 존재를 말해주는 기호라고 해독한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모스크바에 올라 온 레빈과 스티바가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있다. 톨스토이는 여기에도 음흉한 장치를 해놓고 있는데. 먹는 음식과 심성은 동일한 것임을 암시한다. 이 외도의 고수인 스티바는 굴과 로스트비프를 먹기 전 추잡한 프랑스 여자와 시시덕거리는 것인데, 그런 후 굴과 로스트비프와 스테이크, 보드카와 블랑과 샤블리를 먹성 좋게 배속으로 들이미는 것이다. 즉 스티바는 육체의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 사살하는 것이다. 반면 레빈은 빨리 배를 채우지 않으려고 굴 따위를 먹는 것이 내게는 기괴망측하게 생각된다.”, 그것에 쾌락의 욕구가 있음을 지적한다.

 

1886년 톨스토이는 모스크바 빈민굴을 방문하고 돌아 온 후 자신의 사치스러운 식생활을 고발하고는 타인의 결핍과 빈곤을 조금이라도 배려해주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맛있고 기름지고 비싼 식사를 해서는 안 된다, 이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채식성 인간으로 거듭난다. 톨스토이는 이로부터 음식과 정욕의 함수관계를 확고하게 각인했던 모양이다. 이는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다시금 토로되고 있는데, ‘저주의 삼총사로 불리는 음식, 흡연, 육식을 빗대어 오입쟁이란 아편쟁이나 술꾼, 흡연자처럼 하나의 육체적 현상입니다.”라고, 정상인이라 부를 수 없음을, 이것이야말로 타락의 절정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이러한 음식에 대한 도덕주의적 관점의 투영은 그의 소설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5 도시와 시골에 이르면 도시 생활은 곧 타락과 퇴폐의 동의어가 되고, 이 타락을 지속하기 위한 체면 비용 등 생활비의 급증을 지적한다. 이는 레빈과 키티 부부의 잠시 모스크바의 생활 장면에서 부각되는 데, 톨스토이의 실용성의 도덕을 반영하는 것일 테다. 레빈을 통해 톨스토이는 이 사상을 선언케 하는데, 낡은 생활 부정하기, 무용한 지식 부정하기, 쓸모없는 교양을 부정하기. 전형적인 실용성에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데, 톨스토이가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로서 발견한 행동(실천) 양식을 이루기 때문이다. 즉 삶의 구성이란 당장 실생활과 연결돼야만 하는 것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6예술을 박멸하자은 그야말로 당대 문단에서 톨스토이 옹()이 치매에 걸렸다.”며 그 과격성과 황당함의 지적에 대한 탐사다. 여기서 오늘의 우리들도 일관되게 예술과 예술가를 몰살시키는 악의 가득한 예술 소멸론을 주장하는 톨스토이의 근본주의적 도덕론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예술이란 가장 선한 감정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감염시킨다는 대단히 거룩한 사명임을 전제하고는 이 기준에 미흡한 예술은 죄다 나쁜 예술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인데, 물론 그의 주장에는 일말의 정당한 일리가 있기도 하지만, 저자의 지적처럼 일리가 있다고 진리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97년에 발표된 예술이란 무엇인가의 주장에서 살아남을 예술이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발레는 반라(半裸)의 여자들이 뇌쇄시킬 듯한 동작을 하면서 여러 육감적 기교를 보라는 구경거리에 불과하며, 오페라는 남녀 사이의 추잡한 짓거리를 위한 배경 음악을 제공해줄 따름이며, 음악은 예술적 표현을 통해 영혼을 고양시키기는커녕 살인을 저지른 것은 베토벤의 소나타 때문이라는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통해 ...! 끔찍하다고 까지 한다. 급기야 음악은 간통의 매개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고, 소설과 시는 별의별 형태의 성애가 고정적으로 묘사되어 색광증 환자를 흉내 내고 있다고, 예술은 우리 인류를 학대하는 가장 잔악한 악 중 하나이기에, 모두 매장해버리는 것이 그리스도 세계를 위해서는 오히려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는 결론을 내린다. 결국 이 대문호에게는 이 세계 모든 것이 성욕의 쾌락을 은폐하는 거짓과 위선의 행위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에, 도시 생활도, 예술도, 음식의 섭생도, 사랑도, 결혼생활도 쾌락의 끝없는 욕구를 절제하는 것이어야만 하는 것으로 통한다. 정말 단순한 극단적 근본주의적 도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거장이 이러한 외곬의 도덕주의를 삶의 목적, 궁극의 삶의 이유로 생각하게 되었는가의 의문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 장인 죽음을 기억하자는 이에 대한 답변이 되어도 될 것 같다. 1856, 1860년에 두 형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었던 젊은 톨스토이는 이 죽음에서 단지 혐오감을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공포만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평생을 시달렸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것, 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래서 삶은 어디로 가야하는가라는 회의와 의문으로 이어졌을 게다. 그는 이에 대한 규명 이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바로 인생의 허무함이다. 이 허무를 돌파하기 위해, 사상적 혼란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에게 펼쳐진 그 부와 영광을 뒤로하고 거대하면서도 기괴한 도덕가로 거듭나게 되었으리라는 점에 어떤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는 참회록에서 사람들을 향해 아주 극단적 종용을 하고 있는데, 살아서 삶의 의의를 깨달을 수 없다면 삶을 끊어버리는 것이 좋다.”라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참되게 살든지, 아니면 죽든지 두 가지 선택 길 외에는 우리에게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을 통해 시사되고 있는데, 레빈이 농부들의 이야기를 듣다 한 노인으로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냐고 삶의 의미를 묻는 장면이다. 그로부터 레빈은 지극히 단순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순리에 맞게 사는 것, 결국 참되게 사는 것으로서, 자기 욕망을 위해 살지 않으며, 영혼을 위해 사는 것이고,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며, 선하게 사는 것, 이것이 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발견한 신앙이다. 그래서 항상 죽음을 기억하며 살라는 것은 인간 삶의 본질은 죽음의 자각과 맞물려 참 된 삶을 걷는 길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수시로 혹은 간혹 왜 사는가의 물음에 빠져 인생의 허무함 속을 유영할 때가 있다. 이 위인은 도덕주의의 근간을 실용주의적 삶 속에서 발견하였지만, 우리들 또한 자기 나름의 근원적 가치를 발견하여야 할 것 같다. 살 이유를 가지려면 그 무엇이든 가치를 붙잡아야 할 것이라는 당연한 이 말보다 진실이 어디 있을까?

 

위대한 대문호의 광활한 작품과 신념의 세계를 저자의 안내로 함께 거닐며, 우리들의 일상이 포획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쾌락의 욕망으로부터 호출되는 허영과 사치, 권태, 그리고 위선과 가끔은 아름답기조차 한 이것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그렇게 수월하지만은 않은 것임을 아는 우리들이 바로 그것들로 구성된 삶에서 어떻게 자기만의 가치를 발견하고 붙들어내는 가는 정말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혐오와 경멸로 이것들을 저 극단으로 몰아붙이며 도덕주의자의 길을 걸었지만 끝내 48년에 이르는 아내를 등지고 몰래 집을 떠나 역사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가정의 행복조차 지켜내지 못했던 이 위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아무튼 이 책은 그 흥미로움에서 무진장하고, 잊거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던 작품 속 은닉된 문장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읽는 즐거움도 만만찮다. 다시금 새롭게 읽어 볼 책들이 늘어났다.

 

꼬리말: 안나가 기차역에서 자살한 것은 톨스토이가 역사에서 죽은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 진실은 톨스토이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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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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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은 한국문학의 기쁨이다이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을 번역 없이 우리말 원작 그대로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세 해 전, 쓰고 게시하지 않았던 감상을 그 축하의 감격과 함께하는 감동으로 이제 옮겨 놓는다. 


역사적 사건, 그 본질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언어, 감정적 동일성을 우리가 가지고 있을까? 라는 물음이 작품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아마 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을 낸 지 두 달 가까이 지났을 때(11)”, 밀물에 수많은 무덤들과 뼈들이 씻겨날까 안타까워하는 반복된 꿈의 의미에 대한 화자의 자각 장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빠르고 직관적이었던 그 결론은 내 오해였거나 너무 단순한 이해였는지 모른다고

처음 생각한 것은 지난여름이었다.” - 11

 

불가능성을 예시하는 듯한 반복된 꿈은 광주민중 항쟁이라는 민중적 트라우마를 지닌 역사의 이야기인 자신의 책(소년이 온다)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윌 수 있을 거라고(23)”, 순진하고, 뻔뻔스럽게 바랐던 것일까라고 자성하는 것에서 다시금 제시된다. 타인의 고통에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라고 편승하지 말 것을 당부했던 수전 손택의 말을 이제야 어렴풋이 헤아린다. 고통에 공감했다는 마음만으로, 나름의 다시 쓰기만으로 수월하게 흔적들을 떨쳐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해였고 단순한 생각이었다는 문제의 제기일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소설의 제목이 화자에게 역사적 고통은 단지 그것 밖에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27)”처럼, 삶과 함께 지속될 수밖에 없으니 등지고 갈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작별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리라. 화자에게 광주의 트라우마는 삶에 틈입하여 일체화된 고통이 된 듯하다.

 

바닷가 묘지 꿈을 토대로 공동의 영상작업을 하기로 했던 영상 다큐멘터리 작가인 인선의 절단되어 봉합 수술을 한 손가락 두 개의 치료 장면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49)”는 걸, 신경이 죽지 않도록 3분마다 바늘로 찔리는 고통의 전율로 다가온다.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것이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後略),57 라고 인선이 속삭이는 고통의 감응에서 역사 재현이란 어떤 한계, 영원히 결핍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읽게 된다.

 

어쩌면 화자와 인선의 삶과 동반하는 역사적 고통의 지속성은 폭설이 내리는 제주 인선의 집에서 고통을 겪는 앵무새 아마와, 길을 잃고 두통과 위경련으로 화자의 현실 속에서 재현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끊어진 전기와 한기, 생생한 신체적 고통의 한계 끝에 바다가 빠져나가고 있었다.(175)”는 악몽의 떠남을 막연하게 예감하며 화자는 자문한다. 그들과 싸워 이긴 건지, 그들이 나를 다 으깨고 지나간 건지 분명하지 않았다.(177)” 이렇듯 광주의 흔적에 대한 화자의 감응의 미결성(未決性)은 인선이 자신의 어머니가 겪었던 제주 4.3과 보도연맹 사건 속에 사라져간 참혹한 역사의 증언으로 이어진다.

 

인선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 자신의 삶을 옥죄는 비겁하고 나약한 사람으로서 어머니에 대한 반감,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후에야 알게 된 그녀가 찾으려했던 흔적과 실패의 처연한 사연이다. 소설의 2부는 사건의 기록들과 증언들이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영화로 만들 것인지를 인선에게 물었을 때 인선은 다음의 이유로 즉시 부인한다.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287

 

그래, 이 작품은 작가의 전작 소년이 온다의 연속선상에서 읽힌다. 무수한 기록들과 증언, 인터뷰의 내용들이 발산하는 고통 재현의 불가능성, 어떻게 그것을 오늘 우리네가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었던 것 같다. 재현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그 초월의 폭력성과 그칠래야 그칠 수 없고 현재의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고통의 실재에 대한 윤리적 자기 한계에 대한 고뇌가 계속되고 있음을.

 

어머니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지리라 여겼던 그 고통이 인선에게 더 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314)” 싶은 감응으로 남는 것처럼 화자의 광주 흔적은 제주 4.3사건과 결합하여 지금 우리에게 말해지고 있다. 수많은 정치적 타살이 남긴 한국사회의 트라우마는 차치하고라도 대중 혹은 군중인 나와 우리는 이들 동료 인간들, 타자를 향했던 무참함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 망각과 무심함을 되돌아보게 된다. 혹여 회한과 애도라는 순수한 연민이 억압되거나 잃게 된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에 압도되어 냉담함과 잔인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호흡하고 있다. 고통과 그 참담한 상처의 흔적은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동료 인간들의 고통을 야기했던 그 역사적 인식의 이해는 바로 지금 우리네 윤리의식의 위치일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모든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앓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님으로써 비로소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이해를 촉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계속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표현의 한계가 지닌 윤리적 결여라 할지라도. 잠든 도덕 인식을 일깨우는 처절한 자기 고투의 이 작품에 작은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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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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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어나가다 소설 속 아버지, 이 땅 어디서도 존재하지 못했던 유령처럼 살아가야만 했던 김이섭의 생을 복기해나가는 딸 지형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임을 발견하고 어떤 동지애를 갖게 되었다.  좌익 경향의 사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특정 범죄를 다시 범할 가능성 혹은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가 되어 여행과 거주이전의 제한을 가하고, 취업을 봉쇄하며 보호관찰과 보안 감호로 운신의 자유를 제한하던 사회안전법이라는 해괴한 독재권력의 억압을 피할 수 없었던 이섭의 고통에 감히 비할까 만은, 학내에서 은밀히 암약하던 사복경찰들을 피해 늘 잠행해야만 했던 내 대학 시절의 기억은 아마도 이 소설의 저류를 흐르는 올가미를 휘두르며 사냥꾼에 포위된악몽과 고독한 울음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꼭 30년 되는 날이니 1975815일이다. 인생의 절반을 일체 치하에서 살았고 나머지 30년을 해방된 조국에서 살았던, 한 남자의 짐작할 수도, 감히 알 수도 없었던 시간들의 이야기다. 60년이라는 시간에 이 땅과 이 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 삶이 오늘 우리들의 삶에 어떤 변화, 영향을 가져왔던 것일까. 이러한 물음을 왜 다시금 해야 하는 가는 서글프고 안타깝기조차 하지만, 오늘,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동료 시민들에 대해 연민조차 가질 내면의 공간이 사라져버린 그 무감해진 우리네 도덕 감각의 전환이 요구되는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가 진실, 진정성 따위를 등 뒤에 흘릴 때 그것을 조용히 수습하는 문학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2016년 이 작품에 대한 대산문학상 선정 사유처럼, 우리는 이 책에서 어느 센가 잊어버린 도덕적 책임의 감각, 시민적 양심을 긴급하게 각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아하게 유영하는 새우는 물속만 벗어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몸을 구부려 옆으로 누워있는 꼴은 언제나 투항의 자세처럼 보였다.” 48

 

그래, 이섭이 대하(大蝦) 종묘 양식장의 등 굽은 새우를 자기반영으로 인식했듯, 딸 지형이 세상 누구보다 뜨겁고 격렬했지만 오랫동안 차갑고 어두운 곳에 갇혀버린 새우처럼 온몸으로 이 땅의 불의하고 냉소적 물결을 버텨내던 한 남자의 삶을 통해서 보게 되는 우리 현대사의 한 그늘에서 그 흔적이 슬그머니 지워지고 망각된 모두의 비극을 읽게 된다.


일제 식민 지하에서 살아내야 했던 이 땅의 사람들은 모욕과 굴욕, 억압의 삶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때 식민지 권력의 압제에 저항하는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었던 이념이 사회주의였으며,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와의 나눔과 배움이고, 공평한 사회를 향한 시민의 연대였다. 이섭이   식민지 말단 관리나 잘해야 선생 노릇이라는 이용만 당하고 말 일본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친일 자본주의의 이권을 물려받은 권력에 의해 쫓기는 것은 자신들의 불의한 권력의 항구적 유지를 위해 사상과 이념에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 까닭이다. 오늘도 여전히 권력의 무능과 부패와 부조리함에 저항하면 곧 빨갱이라 매도하는 작태, 그 불의함은 이처럼 식민지의 잔재이고 그 친일 종자들의 더러운 욕망이 한 연원일 것이다.

 

5년의 수감 생활과 전쟁통에 아내와 세 어린 자식들과의 헤어짐은 이섭에게 죄의식과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을 남긴다. 돈과 권력을 헐벗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사는 공평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그가 믿었던 이념은 자신의 가족조차 지키지 못하는 빛바랜 몽상이 되어버렸다. 그는 결코 폭력도 전쟁도 꿈 꾼 이가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소수 권력자들은 이념을 자신들 권력의 방패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만난 고교 시절 친구였던 최라는 인물은 이섭에게 말한다. 인간은 그렇게 거룩하지도 않으며, 인간이 타고난 잔혹한 욕망을 무시한 이념일 뿐이라고. 공평함과 약자와의 나눔이 한낱 몽상이며, 이상주의라 치부하며 이섭의 꿈꾸었던 세계에 대한 희망을 냉소적으로 힐난한다. 더구나 최는 약육강식의 생존본능대로 살아가는 것, 이 사회의 조건이라 말한다. 식민지 치하에서도 부를 축적한 친일부역자나 할 만한 소리다. 이것은 다시 변조되어 이섭의 꿈은 범죄이고 절대악이 되어버린 세계가 된 것이다.

 

이섭이 사회주의자로서 행동을 하도록 했던 깨달음의 일화가 회고되고 있는데, 상전, 아랫것과 같은 자신을 가두었던 오랜 습관적 위계의 굴레를 떨쳐내기 위해 직접 땅을 갈고 나무를 하며 몸의 감격을 느끼고 있을 때, 마을의 가난한 친구 운식이 도련님이 심심풀이 원족이라도 나오신 겐가? 심심한 도련님이 나무를 싹싹 긁어가는 바람에빈 지게로 내려가며 하는 말이다. 당장 끼니를 끓일 나무가 없어 온 산을 헤매고 다니는 사람은 놀이삼아 지게지고 온 도련님과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이섭의 작은 나뭇짐은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것이라는 얘기다. 분배의 정의, 곧 자본주의가 메우지 못한 결핍, 사회적 정의를 위한 각성의 한 표현일 것이다.

 

지형의 기억을 통해 1960~70년대 이 땅을 지배하던 반공주의의 그 악질적 악령, 그리고 독재의 항구화를 위해 탱크를 시내 한가운데 세워놓고 시민을 위협하며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기이한 구호를 내세운 10월 유신, 그리고는 사회안전법이라는 자신들의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사상범으로 옥죄기 위한 법령에 이르기까지 그 던적스러운 시대의 풍경이 흐른다. “오랜만에 오신 삼촌/ 간첩인가 다시보자.”는 표어로 가족의 유대에까지 불신의 눈초리를 밀어넣는 그런 파렴치함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시간이었음을, 이섭은 취업을 위한 신원조회에서 모든 취업이 봉쇄되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려갈 권리가 부정되고, 하물며 5촌인 종질로부터 종질부의 외교관 발령을 위한 신원내역 조사로 이섭의 전력이 드러나 반려되었다는 비난을 듣기까지 한다.

 


1981년이 되어서야 우리의 형법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던 연좌제, 즉 친족관계로 연루시켜 형사 및 각종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하는 자기책임의 원칙에 반하는 악질적 법규에 붙들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한 제도였다. 그런데 오늘, 헌법상 개인의 기본권에 반하는 이 폐지된 단어의 망령이 다시 되살아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여론에 흘려져 누군가를 비난하고 조롱하려 할 때마다 그 화살을 대상인의 가족에게까지 겨누어 사회적 불이익을 조장하려는 악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의 헌법 133항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로 명시하여 연좌제가 적용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결국 이 땅에 함께 살고있는 우리네 믿음이란 것, 그 인식의 도덕적 불모성일 것이다. 권력의 안위를 위해 저항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기위해 악용되었던 이 시대착오적 법률이 폐지되기까지 해방 후 36년이 걸렸다. 소설 속 이섭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회안전법이라는 또 다른 악의적 법률과 그의 삶을 내내 옥죄었던 연좌제가 폐지되는 걸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섭의 장인은 잃어버린 딸과 손주들, 가슴에 박힌 대못을 차마 뽑지 못하는 사위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 든 연줄이 닿는 사람들을 동원해 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래서 제주도 목장을 거치고 충청도 서해안 양식장을 꾸려나가고, 가구점 외판영업사원을 전전한다. 옛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처 없는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시선조차 주지도 않는 이섭의 집에 들어와 치매 시아버지를 간병하고, 여인 미자는 아들과 세 딸을 가지게 된다. 종이라도 들인 듯 뻔뻔하고, 제 고통을 무기삼아 함부로 칼을 휘두르는 남편이지만 시린 가슴을 부여안고 묵묵히 내조한다. 이섭의 두 번째 아내가 되는 지형의 엄마인 미자의 신산한 삶 또한 이 사회가 만들어낸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을 보여 준다. 전쟁, 국가의 폭력성, 삶의 잔인성을.

 

이들 가난한 삶에 다시 균열이 발생한다, 막내딸 지우의 죽음을 겪게 된다. 다시 이룬 가족을 위해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걷지만 누추한 병실에 누워있던 아이가 병원비 걱정을 하던 장면은 아비로서의 어깨를 걱정하게 만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억지로 버티고 있던 마음의 철심이 툭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는 자신의 생 전부가 부정당하는 이 소리에 그는 삶의 길을, 그 방향을 상실하고 방황한다. 내 탓이다. 내 탓이야, 모두가 잘 못 산 내 죄다.”

 

나는 이 통한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의 탓이 아니다. 그는 결코 잘 못 살지 않았다. 가장 아끼는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나서까지 남는 게 무어란 말인가와 함께, 나는 결국 몽상가였어라는 자조적 고백의 말은 그 고통을 알기에 감히 이해에 근접할 수 없지만, 나는 그의 좌초된 꿈이 곧 이념적 굴종이라 믿지 않는다. 뭇 사람들은 꿈, 이상, 유토피아는 그 단어의 의미처럼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도달 가능한 현실의 성취가 아닌 망상이라며 혐오감을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아주 작은 변화를 이루고 다시금 그 곳에서 또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해 나가는 것이 곧 이상이요, 꿈이라고 말이다.

 

한낱 몽상이라는 자발적 굴복을 정당화하는 그 노예적 삶을 강압하는 현실 조건의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삶, 바로 이 작품처럼 그것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노력이 바로 꿈이라고 생각한다. 이섭은 절대 실패한 삶이 아니다. 지형이 작가가 되어 아버지 삶을 온통 채우던 그리움, 지켜내야 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 우리 인간의 삶은 충분하지 않은가? 준엄한 삶의 가치만을 말한다고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섭을, 그가 이룬 가족들의 삶에 감히 고통을 느낀다. 내가 느끼는 공감과 슬픔이 무어 대수롭겠는가마는 이섭은 우리들이 잊어버릴 이야기를 다시 듣고 각성하게 해주지 않는가. 그로서 그의 꿈이 절대 몽상은 아님을 증명한 것일 게다.

 

술에 취해 요에 엎드려 사지를 버둥거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 지형의 연민과 그녀의 보이지 않는 각오가 보이는 것만 같다. 아마 지형은 뭐든지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돼. 공부를 해도, 연애를 해도 마음을 다 바쳐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의무감만 남고 사는 게 재미없어라는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남겨준 마지막 말은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채우는 작가로서 방북해 평양 시가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글로 응축되어 아버지 김이섭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의 애도로 승화한다. 지형은 그곳에서 욕망이 철저히 통제된 세계와 욕망이 지나치게 과잉된 세계, 그 어느 쪽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념으로 재단하여 타자를 적대화하여 공격하고 매장하던 시대가 완전히 저물고 이제는 공정과 평등, 개인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열렸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큰 오해가 되고 말았다. 다시금 역사 퇴행적인 친일과 색깔론이 우악스럽게 등장하고, 국민을 이념적으로 분열시켜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려는 무도함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이제 또다시 권력에 의한 이념과 사상의 왜곡으로 존재를 부정당하고 모멸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섭이 자신이 쓰려는 제목 유령의 시간이라는 삶을 부정당해야만 했던,  자서전을 쓸 것임을 해방 30년이 된 날 아내 미자와 지석, 지형, 지선을 모아 앉혀두고,  나중에 너희가 커서 이걸 읽게 될 때 오늘을 기억해주면 좋겠구나.”라는 그 유언같은 말을 되새긴다. 이 책은 이념과 사상으로 인해 뒤틀린 세상을 살아내야만 했던 한 인간의 삶의 비극성을 바로 지금의 우리네 삶의 현실 속으로 현재화하여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 실천일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이섭이 지켜내려 했던 것, 바로 신뢰와 연민, 소중한 사랑일 것일 것이다. 혹자들은 말한다. 사상, 이념, 국가폭력, 반공주의 등등 케케묵은 옛 시절의 단어들, 그것들이 소환하는 진부함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않거나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치졸한 변명의 언어가 아닐까? 어찌 그 진부함이란 오만한 언어로 이 땅의 역사가 은폐한 것들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다는 말일까?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작가 김이정은  제목 때문인지 책은 몇 년간 죽어 있었다.”, 유령과 같이 떠돈 지 4년째 책의 의미가 지난 역사로 묻힐 것 같은 분위기가 도래하기도 했다.“고 쓰고 있다.


나 또한 2015년 이 나라에서 더 이상은 국민의 삶을 억압하는 폭력적 권력은 들어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성급한 오판이었음을 실토한다지금 직면한 이 가당찮은 현실은 유령의 시간을 긴급하고도 절대적으로 소환한다. 수많은 가려져 보이지 않은 존재들이 견뎌야 했던 그 고통의 실체를 다시 복기하고, 환기하며, 각성의 추동력으로 삼으라고 말이다. 독자인 나 또한 작가처럼 기쁘게 이 책을 맞이했다. 젊은 독자들이 그 어떤 자들이 말하는 오래전 시간의 먼지 더미를 뒤집어 쓴 묵은 언어라는 자기 합리화, 변명에 휩쓸리지 않고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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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1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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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1 1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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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인생공부 - 인간의 마음을 해부한, 67가지 철학수업
김태현 지음, 블레즈 파스칼 원작 / PASCAL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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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그 인식 자체는 위대한 것이다.” - 팡세-분류된 단장101, 김화영 , 선한청지기


파스칼의 팡세는 많은 단장(斷章)으로 이루어진 기독교 유일신을 섬기는 것만이 현실적 존재로서 인간이 걸어야 할 유일한 길임을 안내하는 호교론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에의 귀의(歸依) 여부를 떠나 오랜 역사의 시간을 지속하여 뭇 사람들에게 폭넓게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위의 인용 구절처럼 인간이 겪는 무능과 부조리 상태라는 삶의 항구적 비참에 대한 깨달음과 인간 정신의 존엄과 위대함에 대한 모순과 대립을 돌파할 수 있는 현실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향해야 할 길의 훌륭한 안내서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현실적 조건을 이해하고, 그 존재론적 결여와 존엄함을 진술하는 파스칼의 사유로부터 새로운 삶의 전망이나 인간 실체에 대한 각성이 촉발될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오래된 인간 정신의 스승을 만난다.

 

이 책, 파스칼 인생 공부는 철학자 파스칼의 사유들에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위해 현세적이고, 실천적 언어로 독해하여 삶의 방법들을 유효하게 풀어내어주기 위해 집필된 것 같다. 저자인 인문학자 김태현은 팡세읽어야 하는 이유라는 프롤로그를 통해 현대인에게 인생의 지침 및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67개의 대표 구절을 선택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 존재의 나약성에 대한 인정, 인간 삶의 불완전성과 모순성, 불행의 원인,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기위한 인간의 마음이라는 4개의 큰 주제 아래 인간 심리의 알기 쉬운 해설과 설명을 부연하여 설명하며, 자기 이해의 확장과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 한계와 좌절로 슬픔에 주저앉기도 하지만, 타인과 사회, 그리고 세계의 질서와 욕망으로 인해서도 혼란스러워하고 그 장벽 앞에서 번뇌하기도 한다. 선택된 67가지 소주제를 가진 구절들 모두가 우리네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문장들이겠지만, 읽는 이마다 마주한 현실과 개인적 사정이 다른 만큼, 그 직접적 감흥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내면의 평화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나는 불안과 고독은 당연하다.”는 구절에 멈춘다. 그는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불안과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생각하기를 강조하지만, 나는 그 생각이 무엇을 향한 생각이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면의 평화를 찾기 위해 방황하면서도 정작 그 원인인 불안을 직면하는 일을 회피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아마 그 불안의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 그 자체의 지각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라는 문장의 의미를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음이리라. 이제 나는 내 침묵 속 불안의 한 요인을 잠재울 수 있는 평온에 이르는 길을 마침내 깨달은 것일 게다.

 

이처럼 나는 미처 그 사유의 심해에 있는 의미에 진정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눈에 밟히는 몇 구절을 발견한다. 그 첫째는 적게 설명하는 방식이 있다.”는 구절이다. 이 문장의 의미를 왜 모르겠는가마는 그것이 내게 체화되지 못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단순함과 명확함, 그 간결함은 곧 진짜배기 이해에서 나온다는 것을. 최근 나는 프랑스의 전시기획자이자 작가인 나탈리 레제의 글에서 바로 이 압도적 간결함을 접하고 매료되었었다. 정보의 양을 단 번에 초월하는 그 단순 명료함을. 우리네 일상적 소통과 글쓰기의 무수한 양상들 속의 내 모습을 다시금 상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는 아마도 요즘의 불의한 정치의 난맥상, 특히 법질서가 파괴되고 있는 실상에 대한 불쾌감으로 인해 주목된 것인데, 대칭은 양쪽에 차이를 만들 이유가 없음을 전제로 우리가 한 번에 볼 수 있는 균형이다.”라는 것이다. 위치와 환경이 달라도 대칭적으로 반사하는 능력은 동일하듯, 이는 평등의 가치를 말하려 함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동등한 권리와 기회가 박탈되거나 제거되고 있다. 디케의 저울은 이제 수평을 이루지 않는다. 대칭을 통해 평등이 발견되고 이것을 보지 않고 외면하기 시작하면 진리는 알아 볼 수 없는 어둠에 잠기고 만다. 사회의 건전성과 안정성이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붕괴한다. 불편한 진실을 보지 않으려하는 것, 그래서 현명한, 지혜로운 선택은 물 건너가게 되고, 공동체는 함께 그 부정적 영향에 매몰되어 버린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인간은 필연적으로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미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광기일 것이다.”는 문장에 한 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아마 이성의 한계, 완벽한 이성적 삶의 불가능성에 대한 겸허한 수용의 문제를 생각게 하였다. 자기 수용과 이해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에 우리들이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인정이 그 얼마나 커다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게 되는지 목격하고 있기에 더욱 새롭게 인식된 구절이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누누이 우리 사회의 자기 성찰을 위해 강조했던, 그리고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구절의 발견이다. 적게 생각하거나 많이 생각하면 고집스러워지거나 광신이 된다.”, 이 문장은 무지와 이념적 과잉에 찬 사람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가짜뉴스, 편향 정보들이 홍수를 이루는 오늘, 사고 없이 표면 정보만 받아들이고, 비판적 사고를 배척하는 이 사회의 만연한 무지의 행태들이 보이는 고집스러움, 그것이 이 사회가 많은 피를 흘리며 성취한 것들을 퇴행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가하면 과도한 생각들은 끊임없는 불신과 의심을 생산하고, 이내 극단적 이념에 몰취하여 사회적 갈등과 분열의 심화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고집스러움과 광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오늘의 우리들을 생각해본다.

 

끝으로 형식 자체에 희망을 두는 것은 미신이다라는 구절이다. 법률과 규칙, 예절 등 조직 질서의 유지라는 생활양식의 기준, 이것 자체에 희망을 두는 것은 심각한 개인적, 사회적 해가 됨에 대한 지적의 문장이다. 형식이란 우리네 삶의 도구이지 삶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더구나 변화의 시도에 장애가 될 뿐이다. 그렇다고 형식을 무시하면 자의적 판단이 정당화되고 사회적 혼란이 초래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형식에 종속된 삶이란 이 세계를 수구화하고, 그 기득권적 색채로 인해 차별의 심화와 사회적 불평등의 항구화라는 불편한 세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 형식과 본질의 균형을 항시 성찰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수의 지혜일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듯하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단순함, 호기심이라는 지혜를 잃어버리고,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과 아집이 얼마나 극성을 부려대고 있는가? 퇴행이고 추락이며, 자멸을 향한 지점이 가까워질 뿐일 게다.

 

이렇듯 이 책은 충만한 자아욕구 충족과 자신의 가치 신념의 실현을 위한 삶의 의미와 목적의 발견을 향한 무수한 구절과 해설들, 나아가 사회와 공동체적 시선으로 오늘의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 이를테면 빈곤, 무지, 죽음처럼 필히 직면하여 그 해결을 사유해야 할 문제들을 회피하려는 기제들과 그 근본적 문제에 도사린 상실되거나 차단된 능력들을 사유토록 안내하기도 한다. 요즘 빈번하게 발견되는 자신 만의 삶에서 의미와 목적을 찾아라는 문장은, 내적 빈곤과 영적 공허로 불만족과 내적 갈등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음의 반증 일 것이다.

 

도처에서 비교된 삶, 타인과 비교하느라 내적 공허를 외부로부터 채우려 안달이다. 그럴수록 내적 공허는 더욱더 증폭될 뿐이다. 외부로부터 채워지는 것이 아닌 것을 채우려는 헛된 행위들을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인간 존재의 본질, 그 미약하고 취약하며 한계를 지닌 존재임을 처절하고 겸허하게 자각하고, 그로부터 자기 욕망과 동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어 자기 고유의 삶의 가치를 발견해 낼 수 있으리라. 아마 파스칼의 사유를 현재화하여 해설한 이 시의적 사유의 기록은 자신과 깊은 유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기 성찰의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 줄 터이다. 또한 창의와 개성을 추구하고 다양성과 혁신을 향해 노력을 경주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계발 지침서가 되어 주리라 믿는다. 팡세도 읽고 자기 계발도 하며, 저자의 인문학적 지식도 아울러 경청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읽기가 되어 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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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나탈리 레제 지음, 김예령 옮김 / 봄날의책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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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글을 쓰기에 앞서 이 책의 미덕을 먼저 말하여야 할 것 같다. 150여 쪽 남짓 간결하고 농축되어 써진 작품으로서 그 내용의 풍성함과 강렬함은 수천 쪽에 이르는 여느 대하소설을 단 번에 넘어서는 엄청난 사유가 집적된 글이라고 말이다. 작가는 정말이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한 여인이 나타내려한 방식 그대로를 관찰하며, 하나의 주제로 돌진한다. 그럼으로써 그 어떤 본원적 비가시성을 우리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현재화 시킨다. 가히 압도적인 소설이다.

 

전시기획자, 출판물기록 연구자이자 작가이기도 한 나탈리 레제의 이 독특한 작품은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밀한 프랑스 제 2 제정시대(1850년 전후)의 물질문명의 발흥과 새롭게 대두된 소비 시대를 관류하던 한 여인의 초상에 대한 에세이로 읽을 수 있는, 그런가하면 작품의 제목인 전시((L'Exposition; 展示)’의 중의성((重義性, ambiguity)으로 이 어휘는 물론 작품 구조와 그 내부에서의 작용에까지 두루 둘 이상으로 해석되기를 요청하는 듯하다. 때문에 모호하고 불확정을 지향하는 작가의 의도를 예상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의 책장을 열면 스스로를 방기하기, 아무것도 미리 계획하지 않기.(...) 흐릿하게 만들기.(...) 이동시키기, 교묘하게 빠져나가기, 모습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1)마티에르를 관찰하기,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대로,(...) 심지어 그 질서 속에서라는 문단을 만나게 된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문장이 불러일으키는 당혹감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하고 첫 페이지를 넘기게 되지만, 이내 이 문장이 곧 이 작품의 전개 양식을 안내하며, 작가를 덮쳐 혼란을 느끼게 하고 급기야 길을 잃고도 끈질기게 고집부리는 유령들을 천천히 게워내게 하는 주제로 밀어 넣는 글쓰기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야기는 그래서 이리저리 주제가 이끄는 대로 마치 불가항력적 어떤 힘에 끌려가듯 기억과 기록(아카이브), 문학과 사진, 회화, 영화를 망라한 예술 작품들을 종횡하며 당초 박물관 소장품의 한 점을 모티프로 하여 선택된 소장품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한 테마 폐허와 관련해 의뢰된 기획전에서 시작되었던 화자의 감수성과 시간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의 근저에 있던 것들을 깨워낸다.

 

작품 속 화자는 박물관에서 제안한 전시기획담당 학예원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만의 전시(Exposition)의 의미를 프랑스어 보전 Tresor de la langue francaise의 설명을 압축요약하여 정의하고 있는데, 사물명을 주어로 하여 모종의 비밀스러운 유기를 배치하는 일이라고 상기시키려 한다. , 이 전시기획의 한 소품 글을 닮은 듯한 이 소설은 바로 이것, 책의 첫 문단을 실천하는 글쓰기임을 다시금 확인케 한다. 미리 계획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마티에르’, 그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이 이내 확인되는 데, 화자는 우연히 어느 지방도시의 작은 서점 나무 계단 꼭대기에 붙어있는 스스로의 연출에 의한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의 카탈로그 표지 위 시선의 심술궂음에 소름끼치며, 이미지로 떠오른 그 여인의 난폭함에 깜짝 놀란.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혼란한 정신 상태에서 올라탄 노선버스에서 들려오는 소위 굴곡진 여성성의 여정에서 발이 걸려 비틀거리는 돌부리인 딴 여자’“라는 한 인간의 특질을 무효화하는 이름의 불쾌감이 들려온다.

 

아버지로 하여금 엄마 곁을 떠나도록 하였던 여인, 딴 여자로 불렀던 합법적이지 않으며, 기능에만 결부된 여자, 증오의 대상이며 동시에 욕망케 하는 여자의 이야기가 병행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두 이야기가 분리되어 기술되는 것이 아니라,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라는 여인의 사나움과 깊이 없는 애수와 실패가 주는 불쾌감의 이미지가 폐허와 관련한 기획의 훌륭한 주제로 불쑥 덮쳐 옴을 느낀다. 형태의 소멸, 비극적 시간의 비수같은 의식에 대해서.

 

<스케르초 디 폴리아Scherzo di Follia>로 명명된 사진, 1899년, 생을 마감한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인 피사체의 사진은 1900년 프랑스 만국박람회에

<금세기 최고의 미녀 La Plus Belle Femme du siecle>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다.

이 사진은 그녀를 상징하는 심볼이 되었다. 책 표지 사진은 이 사진의 일부이다.

 

이제 소설은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 그녀가 살던 동시대인들 가운데 이 여인보다 사진을 많이 찍은 사람이 없다고 알려진 인물의 아카이브와 사진과 남겨진 소품들, 그리고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 백작(1855~1921)의 주의깊고 면밀하게 수집 정리된 유언, 약력 기사들, 하다못해 재산 경매의 코멘트에 이르는 관계 자료들과 카스틸리오네의 사진을 찍었던 피에르 루이 피에르송과의 작업 방식과 환경, 그리고 장면들, 발자크, 에밀 졸라, 보들레르와 프루스트, 위스망스, 쥘 베른에서 트루먼 커포티, 이자벨 위폐르, 메릴린 먼로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영화와 사진 예술에 대한 비유적 인용이 더해져 그야말로 거대한 예술비평이 한 여인의 현전과 비가시성, 몸짓들과 부재의 수수께끼 같은 조합의 광야를 거닐게 한다.

 

비르지니아 올도이니 디 카스틸리오네’, 스스로의 미모에 대한 확신이 불어넣은 상상력 이외의 상상력은 갖고 있지 않은 나폴레옹 3세의 정부였던 귀족 여인, 그녀는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그와 얼추 비슷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라는 지고의 미로 칭송되던 그녀는 500장이 넘는 당대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초상을 비롯한 여러 포즈의 사진을 남겼다. 전시하고자하는 주제를 위해 화자는 모티프를 설정하는데, 처진 눈매, 그토록 지치고 불만에 차 보이는 얇은 입, ()을 치르는 듯한 모습, 이 여자의 슬픔은 소름이 끼친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슬픔이라니, 그야말로 진정한 자기의 괴멸이고, 내면의 와해이며, 침통이다.”라는 1857년에 찍은 <베일을 걷어 올린 초상>의 감상을 남긴다.

 

화자는 아마 이 초상사진에서 폐허를 읽었을 것이다. 이 폐허는 1995년 몇 겹의 종이막을 찢고 나오는 전위 예술가 무라카미 사부로의 몇 초간의 퍼포먼스를 통해 부연 설명되는데, 제 빈 구멍위로 천천히 늘어지는 찢긴 종이 자락이 바로 한 인간을 먹었다가 다시 뱉은 그 주제라는 것, , 박물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이같은 폐허, 마모되며 길을 트는 통과로서, 그 터진 구멍이라는 것이다. 이제 소설은 이 수많은 의미를 담은 터진 구멍에 담긴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이 된다. 마모되며 길을 트는이야기들.

 

비르지니아 올도이니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력가문에서 1837322일 출생한다. 그리고 18541916세에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 된다. 13세 때 이미 자신만의 의상실과 농장 마차를 소유할 정도의 대귀족의 여식이었다. 이 여인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꾸밈노동에 시달리고 그 사태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자신 앞에선 모든 것이 굴복했으며, 완고하고 변덕스러움과 비탄으로 가득 찬 밉살스러운 인형 그것이었을 테다. 하늘이 주는 지배와 고통, 그 경악과 미친 듯한 고독을 손에 쥔 여인,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은 나폴레옹과 동침으로 파리로 거처를 옮긴다. 사진들은 이러한 여자가 처했던 상황 속에 숨겨진 내면의 연극을 드러낸다. 설혹 온통 거짓일지언정 역할의 정수가 내부로 충분히 침투돼 자신이 하고자 하는 공연의 현실성을 스스로 믿을 수 있었던 여인의 실체를.

 

파리 상류층의 사교계는 이렇게 말한다.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은 완료형의 미인에 속했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의 시간대에 속한 것 같지 않았다.”, “비할 데 없이 영롱한 눈, 진주같은 이를 내보이는 입, 용모의 우아함과 세련됨, 얼굴의 광채, 어쩌다 길을 잃어 우리의 세속적인 시대에 있게 된 고대의 대리석상.”, 랭데팡당 벨주 L'Independant belge그녀는 우리 지역 사회의 미인들 사이에 불안을 심었다.(...) 부인들은 심히 당황했다.”고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절망적 곤혹을 전한다. 대중들은 이 고귀한 여인을 보기위해 좌석위에 올라서 완벽 그 자체인 여자를 향유했다,

 

더 멋진 발언도 있다. 모니 백작이라는 인물은 그녀는 마치 구름에서 내려오는 여신처럼 등장했다. 그녀는 여자들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 자신의 우월성에 대단히 심취해 남을 업신여기고 거만한 그녀는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숭앙을 하고 있었다.” 그래, 미모와 상상 이상의 우아함을 향한 깊고 아낌없는 경탄 뒤에는 그 무심성에서 발산되는 거만함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자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여자 나르키소스, 유연함도, 부드러움도 없는 성격, 아무런 자비심 없이 야심차고, 터무니없이 거만하다.“는 표현은 그녀가 마치 황후처럼 행동하는 데 심사가 뒤틀린 상류사회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바로 딴 여자라는 이름의 19세기식 반응이었을 것이다.

 

사실 화자의 시선 또한 이러한 여성성이란 것의 화신인 이미지에 거의 적대적 불쾌감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감만으로 일관된 편협성을 유지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사진을 찍기위해 일과처럼 찾아가는 촬영소에서의 포즈와 그 연출에서 여인이 표현하고자 했던 음각으로 새겨진 격동, 다시말해 흐느낌의 각인을 읽어내기도 하고, 진실을 말하기 위한 최후의 트릭, 그 사나우면서도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발견한다. 아마도 전시기획자인 화자에게 이 사진이라는 가면 속 여인은 지속적으로 딴 여자로 불리는 그 기능적인 불쾌함의 투사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의 종교, 복식, 입관이라는 온통 각종의 욕망이 담긴 유언의 글에서 냉소적으로 물론 그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는 욕망이야 관 속에 기꺼이 넣어줄 수 있다. 처치 곤란인데 잘 됐네.”라고 싸늘하게 한 대 갈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욕망 가득한 유언의 글과 달리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 남긴 사후 요망 사항 목록 20가지는 더 이상 욕망되지 않는 굴욕에 휩싸여 세상과 등진 여인의 미련없는 세상에 대한 무심한 고통이 보인다. 십자가 없이, 사제 없이, 종교의식 없이, 꽃 없이, 전시 없이, 밤 샘 없이, 의사 없이....대사 없이, 사례금 없이, 상속인 없이, 동반인 없이, 장례식 없이, 부고 없이, 안내 자료 없이, 신문기사 없이

 

높은 지능을 지녔던 이 여인은 자신의 전도를 정치에서 찾기를 욕망했지만 그녀에게 전달된 것은 자기 믿음으로부터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화자가 소개하는 18575, 아르티스트 Aritiste에 발표된 보들레르의 시, 나는 음산한 거울/ 그 속에서 메가이라는 제 모습을 노내!”라는 저 자신의 사형 집행인의 시구들은 묘하게 그녀가 처했던 상황 묘사처럼 보인다. 여인은 하스페치아의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여기서도 화자는 그녀를 아름다움과 권력에 도취된 채 타인에게 바라보인다는 그 마르지 않고 변하지 않는 향락, 즉 자기 반영의 주위를 돌고 도는 인물로 묘사한다. 프루스트의 게르망트 부인의 모델인 몽테스키우 백작의 사촌인 엘리자트 그레푈 백작 부인의 입을 빌어 향락 가운데 자신이 모든 시선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아는 여인이 누리는 향락에 견줄 만한 것은 없으리라.”, 자기에 주어지는 동시에 자기 스스로는 개의치 않게 되는 절대적인 힘, 이 거대한 익명의 애무를 경험하고 맛보다 더는 촉발할 수 없게 된 존재의 삶을 상상해 본다.

 


여기서 엄마가 느껴야 했던 외할머니에 대한 두려움과 외할머니의 딸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그녀의 교태와 절대적 지배력에 대한 이야기가 교차되어 흐른다. 엄마는 화자에게 비통이나 모욕, 협박, 배신에 얽힌 추억들을 얘기했다고 회상한다. 그럼에도 그런 일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는 남자들은 외할머니에 대해 장난을 잘 치는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 다였음을 말한다. 화자는 색 바랜 엄마의 사진 한 장을 바라본다. 자기 엄마 곁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있는 어린 엄마의 모습이다. 엄마를 지지하며 사랑하고, 그토록 다정하고 자애로웠던 엄마이지만 그건 정말 수치스럽다고. 수치심은 마치 묘비같은 말이라고 머리를 흔드는 것 같다.

 

화자는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 이 여인을 자신을 찾으러 자신을 붙들고 가두기 위해서 생애 전체를 기꺼이 사진가 작업실에서 촬영으로 축소된 인간으로 묘사한다. 경박함의 외피 아래로 멜랑콜리의 내부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사진을 찍고 그것에 붙들린 여인으로서. 인간의 초상을 찍은 인류 최초의 사진은 하나의 얼굴을 고정시킨 <익사자의 모습>이다. 이것은 당대 한 컷의 사진촬영을 위해 오랜 시간 고정된 포즈를 취해야 했던 그 고정성, 그 굳음의 예시이다.

 

화자는 한 장의 사진에서 폐위의 채비가 된 여인이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굳어버린, 요컨대 죽음의 침상을 위한 대상임을 알아본다. 이제 더 이야기를 진척시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화자는 폐허를 주제로 한 전시 재료를 찾기 위해 한 여인의 사진과 기록과 관련 정보들을 수집했다. 그녀는 그것들 속에서 비가시적인 것의 소실성 자체를 한데 모아 역으로 그 존재를 확고히 하는 탐색을 진행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준비는 왜 박물관의 소장품을 오브제로 삼지 않느냐는 제안측의 말처럼 폐허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거부된다. 이미 스러진 한 인물의 초상은 현전과 부재라는 폐허의 이미지에 진정 부합하는 것이라는 화자의 생각은 폐허 위에 솟은 문화유산 한 점을 통한 영광의 재현이라는 실리와 상충하는 것이다. 이제 화자는 지금까지의 방식을 고수하며 교묘하게 빠져나가 주제를 따라가는 자기만의 질서를 이어나간다.

 

그것은 사적인 화자만의 전시다. 입센의 연극 브란 Brand에는 죽은 아이의 작은 옷가지를 펼쳐놓고 기억을 추억하는 여인이 있다. 그러나 집에 돌아 온 남편은 그 조그만 물건들을 처분할 것을 강요하고, 마침내 그 강요에 동의하지만 그녀는 죽은 이처럼 되고, 곧 그로 인해 죽는다. 화자가 인용한 이 연극은 결국 그 어떤 것은 생의 한 기억이 아니라 생 그 자체, 생의 감지할 수 없는 박동임을 제시하려는 듯하다.

 

이어서 1843년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이 메리 러셀 밋포드에게 쓴 글을 인용한다. 초상 사진들은, 비단 그것들이 지닌 유사성 뿐 아니라 이 오브제가 불러일으키는 여러 연상과 근접감 때문에도 신성화된 듯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인물의 그림자 자체가 거기에 영원히 고정되고 마니까라는 내용이다. 화자는 어린 엄마를 포함하여 넓적다리까지 물에 잠긴 등 돌린 세 소녀의 사진을 바라본다. 잠수하는 아이, 탐색하는 아이, 몽상하는 아이, 등 돌려 볼 수 없는 소녀의 시선, 미지의 불확정성이 기다리는 머나먼 저곳이 있음을 그 비가시적 의미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소설은 덮치고 사로잡아 더 이상 숨 쉴 수 없게, 거의 살 수 없게 몰아붙이는 주제들을 향해 이끌려갈 절박한 필요성을 소환한다. 이것은 카스틸리오네 백작 부인이 생의 전부를 투사했던 초상 사진, 즉 정확히 제가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바를 공연하는 바로 그 사진, 저 자신을 전시하고 제 포즈 속에 지속하며 그럼으로써 제 반영으로 응고되려는 육체의 영속 안에서 포착되는 보이지 않는 시계판에 새겨진 엄숙한 시간을 찾는. 화자가 마침내 발견한 단 하나의 마티에르는 시간이 해부되어 돌출된 교태스럽고 사치스러운 페티코트 위의 음산한 죽음의 생각이고, 이는 화자의 죽은 엄마에 대한 애틋함, 여성성이란 것의 교묘한 역전에 의해 고통받았던 삶에 대한 애도로 향하는 것 같다.


 “구멍 앞에서 그녀는 다만 부재의 덩어리다. 사진들에서는 그 점이 보인다. 그 점만 보인다.” 부재의 덩어리인 구멍, 그 어둠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들은 본다. 거기에 영원히 고정된 존재의 그림자를, 사진 예술에 관한 소논문이며, 전시에 관한 에세이이고, 한 귀족 여인의 전기이며, 가족사인 엄마에 대한 애도로서의 사()소설이기도 하다. , 이 작품은 고전적 지위를 분명 확보할 걸작으로 살아남을 것 같다. 문학을 예술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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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티에르: 표현된 대상 고유의 재질 그 자체 또는 재질감, 작품 자체 표면의 평활(平滑)함과 울퉁불퉁한 질감, 용법에 따라 창출한 표면 효과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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