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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인생공부 - 인간의 마음을 해부한, 67가지 철학수업
김태현 지음, 블레즈 파스칼 원작 / PASCAL / 2024년 10월
평점 :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그 인식 자체는 위대한 것이다.” - 『팡세-분류된 단장』 101쪽, 김화영 譯, 선한청지기 刊
파스칼의 『팡세』는 많은 단장(斷章)으로 이루어진 기독교 유일신을 섬기는 것만이 현실적 존재로서 인간이 걸어야 할 유일한 길임을 안내하는 호교론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에의 귀의(歸依) 여부를 떠나 오랜 역사의 시간을 지속하여 뭇 사람들에게 폭넓게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위의 인용 구절처럼 인간이 겪는 무능과 부조리 상태라는 삶의 항구적 비참에 대한 깨달음과 인간 정신의 존엄과 위대함에 대한 모순과 대립을 돌파할 수 있는 현실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향해야 할 길의 훌륭한 안내서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현실적 조건을 이해하고, 그 존재론적 결여와 존엄함을 진술하는 파스칼의 사유로부터 새로운 삶의 전망이나 인간 실체에 대한 각성이 촉발될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오래된 인간 정신의 스승을 만난다.
이 책, 『파스칼 인생 공부』는 철학자 파스칼의 사유들에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위해 현세적이고, 실천적 언어로 독해하여 삶의 방법들을 유효하게 풀어내어주기 위해 집필된 것 같다. 저자인 인문학자 김태현은 『팡세』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는 프롤로그를 통해 “현대인에게 인생의 지침 및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67개의 대표 구절”을 선택하였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 존재의 나약성에 대한 인정, 인간 삶의 불완전성과 모순성, 불행의 원인,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기위한 인간의 마음이라는 4개의 큰 주제 아래 인간 심리의 알기 쉬운 해설과 설명을 부연하여 설명하며, “자기 이해의 확장과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 한계와 좌절로 슬픔에 주저앉기도 하지만, 타인과 사회, 그리고 세계의 질서와 욕망으로 인해서도 혼란스러워하고 그 장벽 앞에서 번뇌하기도 한다. 선택된 67가지 소주제를 가진 구절들 모두가 우리네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문장들이겠지만, 읽는 이마다 마주한 현실과 개인적 사정이 다른 만큼, 그 직접적 감흥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내면의 평화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던 나는 “불안과 고독은 당연하다.”는 구절에 멈춘다. 그는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불안과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 ‘생각하기’를 강조하지만, 나는 그 생각이 무엇을 향한 생각이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면의 평화를 찾기 위해 방황하면서도 정작 그 원인인 ‘불안’을 직면하는 일을 회피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아마 그 불안의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생(生) 그 자체의 지각”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라는 문장의 의미를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음이리라. 이제 나는 내 침묵 속 불안의 한 요인을 잠재울 수 있는 평온에 이르는 길을 마침내 깨달은 것일 게다.
이처럼 나는 미처 그 사유의 심해에 있는 의미에 진정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눈에 밟히는 몇 구절을 발견한다. 그 첫째는 “적게 설명하는 방식이 있다.”는 구절이다. 이 문장의 의미를 왜 모르겠는가마는 그것이 내게 체화되지 못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단순함과 명확함, 그 간결함은 곧 진짜배기 이해에서 나온다는 것을. 최근 나는 프랑스의 전시기획자이자 작가인 ‘나탈리 레제’의 글에서 바로 이 압도적 간결함을 접하고 매료되었었다. 정보의 양을 단 번에 초월하는 그 단순 명료함을. 우리네 일상적 소통과 글쓰기의 무수한 양상들 속의 내 모습을 다시금 상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는 아마도 요즘의 불의한 정치의 난맥상, 특히 법질서가 파괴되고 있는 실상에 대한 불쾌감으로 인해 주목된 것인데, “대칭은 양쪽에 차이를 만들 이유가 없음을 전제로 우리가 한 번에 볼 수 있는 균형이다.”라는 것이다. 위치와 환경이 달라도 대칭적으로 반사하는 능력은 동일하듯, 이는 평등의 가치를 말하려 함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금 동등한 권리와 기회가 박탈되거나 제거되고 있다. 디케의 저울은 이제 수평을 이루지 않는다. 대칭을 통해 평등이 발견되고 이것을 보지 않고 외면하기 시작하면 진리는 알아 볼 수 없는 어둠에 잠기고 만다. 사회의 건전성과 안정성이 심하게 훼손되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붕괴한다. 불편한 진실을 보지 않으려하는 것, 그래서 현명한, 지혜로운 선택은 물 건너가게 되고, 공동체는 함께 그 부정적 영향에 매몰되어 버린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인간은 필연적으로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미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광기일 것이다.”는 문장에 한 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아마 이성의 한계, 완벽한 이성적 삶의 불가능성에 대한 겸허한 수용의 문제를 생각게 하였다. 자기 수용과 이해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에 우리들이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인정이 그 얼마나 커다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게 되는지 목격하고 있기에 더욱 새롭게 인식된 구절이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누누이 우리 사회의 자기 성찰을 위해 강조했던, 그리고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던 구절의 발견이다. “적게 생각하거나 많이 생각하면 고집스러워지거나 광신이 된다.”, 이 문장은 무지와 이념적 과잉에 찬 사람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가짜뉴스, 편향 정보들이 홍수를 이루는 오늘, 사고 없이 표면 정보만 받아들이고, 비판적 사고를 배척하는 이 사회의 만연한 무지의 행태들이 보이는 고집스러움, 그것이 이 사회가 많은 피를 흘리며 성취한 것들을 퇴행시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가하면 과도한 생각들은 끊임없는 불신과 의심을 생산하고, 이내 극단적 이념에 몰취하여 사회적 갈등과 분열의 심화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고집스러움과 광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오늘의 우리들을 생각해본다.
끝으로 “형식 자체에 희망을 두는 것은 미신이다”라는 구절이다. 법률과 규칙, 예절 등 조직 질서의 유지라는 생활양식의 기준, 이것 자체에 희망을 두는 것은 심각한 개인적, 사회적 해가 됨에 대한 지적의 문장이다. 형식이란 우리네 삶의 도구이지 삶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더구나 변화의 시도에 장애가 될 뿐이다. 그렇다고 형식을 무시하면 자의적 판단이 정당화되고 사회적 혼란이 초래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형식에 종속된 삶이란 이 세계를 수구화하고, 그 기득권적 색채로 인해 차별의 심화와 사회적 불평등의 항구화라는 불편한 세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 형식과 본질의 균형을 항시 성찰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수의 지혜일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듯하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단순함, 호기심이라는 지혜를 잃어버리고,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과 아집이 얼마나 극성을 부려대고 있는가? 퇴행이고 추락이며, 자멸을 향한 지점이 가까워질 뿐일 게다.
이렇듯 이 책은 충만한 자아욕구 충족과 자신의 가치 신념의 실현을 위한 삶의 의미와 목적의 발견을 향한 무수한 구절과 해설들, 나아가 사회와 공동체적 시선으로 오늘의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 이를테면 빈곤, 무지, 죽음처럼 필히 직면하여 그 해결을 사유해야 할 문제들을 회피하려는 기제들과 그 근본적 문제에 도사린 상실되거나 차단된 능력들을 사유토록 안내하기도 한다. 요즘 빈번하게 발견되는 “자신 만의 삶에서 의미와 목적을 찾아라”는 문장은, 내적 빈곤과 영적 공허로 불만족과 내적 갈등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음의 반증 일 것이다.
도처에서 비교된 삶, 타인과 비교하느라 내적 공허를 외부로부터 채우려 안달이다. 그럴수록 내적 공허는 더욱더 증폭될 뿐이다. 외부로부터 채워지는 것이 아닌 것을 채우려는 헛된 행위들을 돌아보게 되기도 한다. 인간 존재의 본질, 그 미약하고 취약하며 한계를 지닌 존재임을 처절하고 겸허하게 자각하고, 그로부터 자기 욕망과 동기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어 자기 고유의 삶의 가치를 발견해 낼 수 있으리라. 아마 파스칼의 사유를 현재화하여 해설한 이 시의적 사유의 기록은 자신과 깊은 유대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기 성찰의 훌륭한 안내서가 되어 줄 터이다. 또한 창의와 개성을 추구하고 다양성과 혁신을 향해 노력을 경주하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귀한 계발 지침서가 되어 주리라 믿는다. 팡세도 읽고 자기 계발도 하며, 저자의 인문학적 지식도 아울러 경청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읽기가 되어 주리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