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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ㅣ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평점 :
이 작품을 읽어나가다 소설 속 아버지, “이 땅 어디서도 존재하지 못했던 유령”처럼 살아가야만 했던 김이섭의 생을 복기해나가는 딸 지형이 나와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임을 발견하고 어떤 동지애를 갖게 되었다. 좌익 경향의 사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특정 범죄’를 다시 범할 가능성 혹은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가 되어 여행과 거주이전의 제한을 가하고, 취업을 봉쇄하며 보호관찰과 보안 감호로 운신의 자유를 제한하던 ‘사회안전법’이라는 해괴한 독재권력의 억압을 피할 수 없었던 이섭의 고통에 감히 비할까 만은, 학내에서 은밀히 암약하던 사복경찰들을 피해 늘 잠행해야만 했던 내 대학 시절의 기억은 아마도 이 소설의 저류를 흐르는 “올가미를 휘두르며 사냥꾼에 포위된” 악몽과 ‘고독한 울음’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꼭 30년 되는 날이니 1975년 8월 15일이다. 인생의 절반을 일체 치하에서 살았고 나머지 30년을 해방된 조국에서 살았던, 한 남자의 “짐작할 수도, 감히 알 수도 없었던 시간들”의 이야기다. 이 60년이라는 시간에 이 땅과 이 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으며, 그 삶이 오늘 우리들의 삶에 어떤 변화, 영향을 가져왔던 것일까. 이러한 물음을 왜 다시금 해야 하는 가는 서글프고 안타깝기조차 하지만, 오늘,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동료 시민들에 대해 연민조차 가질 내면의 공간이 사라져버린 그 무감해진 우리네 도덕 감각의 전환이 요구되는 지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가 진실, 진정성 따위를 등 뒤에 흘릴 때 그것을 조용히 수습하는 문학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2016년 이 작품에 대한 대산문학상 선정 사유처럼, 우리는 이 책에서 어느 센가 잊어버린 도덕적 책임의 감각, 시민적 양심을 긴급하게 각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아하게 유영하는 새우는 물속만 벗어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몸을 구부려 옆으로 누워있는 꼴은 언제나 ‘투항의 자세’처럼 보였다.” 48쪽
그래, 이섭이 대하(大蝦) 종묘 양식장의 등 굽은 새우를 자기반영으로 인식했듯, 딸 지형이 “세상 누구보다 뜨겁고 격렬했지만 오랫동안 차갑고 어두운 곳에 갇혀버린 새우”처럼 온몸으로 이 땅의 불의하고 냉소적 물결을 버텨내던 한 남자의 삶을 통해서 보게 되는 우리 현대사의 한 그늘에서 그 흔적이 슬그머니 지워지고 망각된 모두의 비극을 읽게 된다.
일제 식민 지하에서 살아내야 했던 이 땅의 사람들은 모욕과 굴욕, 억압의 삶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때 식민지 권력의 압제에 저항하는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었던 이념이 사회주의였으며,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와의 나눔과 배움이고, 공평한 사회를 향한 시민의 연대였다. 이섭이 “식민지 말단 관리나 잘해야 선생 노릇”이라는 이용만 당하고 말 일본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친일 자본주의의 이권을 물려받은 권력에 의해 쫓기는 것은 자신들의 불의한 권력의 항구적 유지를 위해 사상과 이념에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 까닭이다. 오늘도 여전히 권력의 무능과 부패와 부조리함에 저항하면 곧 빨갱이라 매도하는 작태, 그 불의함은 이처럼 식민지의 잔재이고 그 친일 종자들의 더러운 욕망이 한 연원일 것이다.
5년의 수감 생활과 전쟁통에 아내와 세 어린 자식들과의 헤어짐은 이섭에게 죄의식과 사라지지 않는 그리움을 남긴다. 돈과 권력을 헐벗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사는 공평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그가 믿었던 이념은 자신의 가족조차 지키지 못하는 빛바랜 몽상이 되어버렸다. 그는 결코 폭력도 전쟁도 꿈 꾼 이가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소수 권력자들은 이념을 자신들 권력의 방패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만난 고교 시절 친구였던 최라는 인물은 이섭에게 말한다. “인간은 그렇게 거룩하지도 않으며, 인간이 타고난 잔혹한 욕망을 무시한 이념일 뿐”이라고. 공평함과 약자와의 나눔이 한낱 몽상이며, 이상주의라 치부하며 이섭의 꿈꾸었던 세계에 대한 희망을 냉소적으로 힐난한다. 더구나 최는 “약육강식의 생존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이, 이 사회의 조건이라 말한다. 식민지 치하에서도 부를 축적한 친일부역자나 할 만한 소리다. 이것은 다시 변조되어 이섭의 꿈은 범죄이고 절대악이 되어버린 세계가 된 것이다.
이섭이 사회주의자로서 행동을 하도록 했던 깨달음의 일화가 회고되고 있는데, 상전, 아랫것과 같은 자신을 가두었던 오랜 습관적 위계의 굴레를 떨쳐내기 위해 직접 땅을 갈고 나무를 하며 몸의 감격을 느끼고 있을 때, 마을의 가난한 친구 운식이 “도련님이 심심풀이 원족이라도 나오신 겐가? 심심한 도련님이 나무를 싹싹 긁어가는 바람에” 빈 지게로 내려가며 하는 말이다. 당장 끼니를 끓일 나무가 없어 온 산을 헤매고 다니는 사람은 놀이삼아 지게지고 온 도련님과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 이섭의 “작은 나뭇짐은 누군가의 것을 빼앗은 것”이라는 얘기다. 분배의 정의, 곧 자본주의가 메우지 못한 결핍, 사회적 정의를 위한 각성의 한 표현일 것이다.
지형의 기억을 통해 1960~70년대 이 땅을 지배하던 반공주의의 그 악질적 악령, 그리고 독재의 항구화를 위해 탱크를 시내 한가운데 세워놓고 시민을 위협하며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기이한 구호를 내세운 10월 유신, 그리고는 사회안전법이라는 자신들의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사상범으로 옥죄기 위한 법령에 이르기까지 그 던적스러운 시대의 풍경이 흐른다. “오랜만에 오신 삼촌/ 간첩인가 다시보자.”는 표어로 가족의 유대에까지 불신의 눈초리를 밀어넣는 그런 파렴치함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시간이었음을, 이섭은 취업을 위한 신원조회에서 모든 취업이 봉쇄되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려갈 권리가 부정되고, 하물며 5촌인 종질로부터 종질부의 외교관 발령을 위한 신원내역 조사로 이섭의 전력이 드러나 반려되었다는 비난을 듣기까지 한다.
1981년이 되어서야 우리의 형법에서 완전히 폐지되었던 연좌제, 즉 친족관계로 연루시켜 형사 및 각종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하는 ‘자기책임의 원칙’에 반하는 악질적 법규에 붙들려 옴짝달싹 할 수 없게 한 제도였다. 그런데 오늘, 헌법상 개인의 기본권에 반하는 이 폐지된 단어의 망령이 다시 되살아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여론에 흘려져 누군가를 비난하고 조롱하려 할 때마다 그 화살을 대상인의 가족에게까지 겨누어 사회적 불이익을 조장하려는 악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의 헌법 13조 3항은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로 명시하여 연좌제가 적용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결국 이 땅에 함께 살고있는 우리네 믿음이란 것, 그 인식의 도덕적 불모성일 것이다. 권력의 안위를 위해 저항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기위해 악용되었던 이 시대착오적 법률이 폐지되기까지 해방 후 36년이 걸렸다. 소설 속 이섭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사회안전법이라는 또 다른 악의적 법률과 그의 삶을 내내 옥죄었던 연좌제가 폐지되는 걸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이섭의 장인은 잃어버린 딸과 손주들, 가슴에 박힌 대못을 차마 뽑지 못하는 사위의 생존을 위해 어떻게 든 연줄이 닿는 사람들을 동원해 그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래서 제주도 목장을 거치고 충청도 서해안 양식장을 꾸려나가고, 가구점 외판영업사원을 전전한다. 옛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처 없는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시선조차 주지도 않는 이섭의 집에 들어와 치매 시아버지를 간병하고, 여인 미자는 아들과 세 딸을 가지게 된다. “종이라도 들인 듯 뻔뻔하고, 제 고통을 무기삼아 함부로 칼을 휘두르는” 남편이지만 시린 가슴을 부여안고 묵묵히 내조한다. 이섭의 두 번째 아내가 되는 지형의 엄마인 미자의 신산한 삶 또한 이 사회가 만들어낸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을 보여 준다. 전쟁, 국가의 폭력성, 삶의 잔인성을.
이들 가난한 삶에 다시 균열이 발생한다, 막내딸 지우의 죽음을 겪게 된다. 다시 이룬 가족을 위해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걷지만 누추한 병실에 누워있던 아이가 병원비 걱정을 하던 장면은 아비로서의 어깨를 걱정하게 만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억지로 버티고 있던 마음의 철심이 툭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는 자신의 생 전부가 부정당하는 이 소리에 그는 삶의 길을, 그 방향을 상실하고 방황한다. “내 탓이다. 내 탓이야, 모두가 잘 못 산 내 죄다.”
나는 이 통한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싶어진다. 그의 탓이 아니다. 그는 결코 잘 못 살지 않았다. “가장 아끼는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나서까지 남는 게 무어란 말인가” 와 함께, “나는 결국 몽상가였어”라는 자조적 고백의 말은 그 고통을 알기에 감히 이해에 근접할 수 없지만, 나는 그의 좌초된 꿈이 곧 이념적 굴종이라 믿지 않는다. 뭇 사람들은 꿈, 이상, 유토피아는 그 단어의 의미처럼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도달 가능한 현실의 성취가 아닌 망상이라며 혐오감을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아주 작은 변화를 이루고 다시금 그 곳에서 또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해 나가는 것이 곧 이상이요, 꿈이라고 말이다.
한낱 몽상이라는 자발적 굴복을 정당화하는 그 노예적 삶을 강압하는 현실 조건의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삶, 바로 이 작품처럼 그것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노력이 바로 꿈이라고 생각한다. 이섭은 절대 실패한 삶이 아니다. 지형이 작가가 되어 아버지 삶을 온통 채우던 그리움, 지켜내야 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전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 우리 인간의 삶은 충분하지 않은가? 준엄한 삶의 가치만을 말한다고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섭을, 그가 이룬 가족들의 삶에 감히 고통을 느낀다. 내가 느끼는 공감과 슬픔이 무어 대수롭겠는가마는 이섭은 우리들이 잊어버릴 이야기를 다시 듣고 각성하게 해주지 않는가. 그로서 그의 꿈이 절대 몽상은 아님을 증명한 것일 게다.
술에 취해 요에 엎드려 사지를 버둥거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 지형의 연민과 그녀의 보이지 않는 각오가 보이는 것만 같다. 아마 지형은 “뭐든지 뜨거운 마음으로 해야 돼. 공부를 해도, 연애를 해도 마음을 다 바쳐야 돼. 그렇지 않으면 의무감만 남고 사는 게 재미없어”라는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남겨준 마지막 말은 소설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채우는 작가로서 방북해 평양 시가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글로 응축되어 아버지 김이섭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의 애도로 승화한다. 지형은 그곳에서 “욕망이 철저히 통제된 세계와 욕망이 지나치게 과잉된 세계, 그 어느 쪽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념으로 재단하여 타자를 적대화하여 공격하고 매장하던 시대가 완전히 저물고 이제는 공정과 평등, 개인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가 열렸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큰 오해가 되고 말았다. 다시금 역사 퇴행적인 친일과 색깔론이 우악스럽게 등장하고, 국민을 이념적으로 분열시켜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려는 무도함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이제 또다시 권력에 의한 이념과 사상의 왜곡으로 존재를 부정당하고 모멸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 이섭이 자신이 쓰려는 제목 ‘유령의 시간’이라는 삶을 부정당해야만 했던, 자서전을 쓸 것임을 해방 30년이 된 날 아내 미자와 지석, 지형, 지선을 모아 앉혀두고, “나중에 너희가 커서 이걸 읽게 될 때 오늘을 기억해주면 좋겠구나.”라는 그 유언같은 말을 되새긴다. 이 책은 이념과 사상으로 인해 뒤틀린 세상을 살아내야만 했던 한 인간의 삶의 비극성을 바로 지금의 우리네 삶의 현실 속으로 현재화하여 읽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 실천일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이섭이 지켜내려 했던 것, 바로 신뢰와 연민, 소중한 사랑일 것일 것이다. 혹자들은 말한다. 사상, 이념, 국가폭력, 반공주의 등등 케케묵은 옛 시절의 단어들, 그것들이 소환하는 진부함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 안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보지 않거나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치졸한 변명의 언어가 아닐까? 어찌 그 진부함이란 오만한 언어로 이 땅의 역사가 은폐한 것들을 함부로 재단할 수 있다는 말일까?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작가 김이정은 “제목 때문인지 책은 몇 년간 죽어 있었다.”고, “유령과 같이 떠돈 지 4년째 책의 의미가 지난 역사로 묻힐 것 같은 분위기가 도래하기도 했다.“고 쓰고 있다.
나 또한 2015년 이 나라에서 더 이상은 국민의 삶을 억압하는 폭력적 권력은 들어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성급한 오판이었음을 실토한다. 지금 직면한 이 가당찮은 현실은 유령의 시간을 긴급하고도 절대적으로 소환한다. 수많은 가려져 보이지 않은 존재들이 견뎌야 했던 그 고통의 실체를 다시 복기하고, 환기하며, 각성의 추동력으로 삼으라고 말이다. 독자인 나 또한 작가처럼 기쁘게 이 책을 맞이했다. 젊은 독자들이 그 어떤 자들이 말하는 오래전 시간의 먼지 더미를 뒤집어 쓴 묵은 언어라는 자기 합리화, 변명에 휩쓸리지 않고 읽어야 할 작품이라고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