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 보았지만 읽지는 못한 명화의 재발견
전준엽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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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나 사조의 순에 의하지 않고 감상의 느낌이나 이야기와 주제로 구분하여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작가는 서로 다른 감상의 장(Chapter)에서 발견되어 특정 작가의 또 다른 작품세계를 느낄 수 있기도 하다. 대략 60인 남짓한 동서양 화가의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미술작품에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대중에게는 비교적 낯선 조르주 라투르, 자크 루이 다비드, 빌렘 헤다, 마리 로랑생,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 등 화가들의 명화(名畵)세계를 접함으로써 회화 감상의 폭을 확장시켜주는 배려를 느끼게 된다.

물론, 바로크, 인상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등 각각의 미술 사조(思潮)를 대표하는 로렌초 베르니니, 얀베르메르, 외젠 들라크루아, 빈센트 반고흐, 폴 고갱,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리다 칼로, 클로드 모네, 폴 세잔, 조르주 쇠라, 구스타프 클림트, 에드바르 뭉크, 바실리 칸딘스키 등 화가들과 명작들에 대한 저자의 특별한 감상 포인트와 뒷이야기들이 회화의 감상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다만“미술 지식 없어도 쉽게 읽는”명화의 재발견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감상 포인트까지 일일이 표기하고 있어 작가의 해설이 혹여 독자의 감상을 획일화 할 수 있겠다는 우려도 살짝 들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항상 난감함을 느끼게 하는 화파(畵波)와 시대의 관계성에 대한 무지로 인해 감상의 깊이를 방해 당했던 기억을 하면 해당 작품에 깃든 시대상이나 신화와 전설, 작가의 작업 환경, 사생활, 일군의 화가들의 시대변혁에 대한 저항과 같은 배경 지식은 감상자의 위치에서 고마운 지식이 아닐 수 없다. 성(聖)스러움과 관능의 그 교묘한 경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로렌초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의 법열>이라는 작품에서는 감상이상의 도움을 받고, 정신과 물질, 보수와 혁신의 대비를 비로소 보게 해준‘얀베르메르’의 <저울질 하는 여인>은 그 작품의 해독뿐 아니라 35점에 불과한 희귀성으로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는 의외의 세속적 정보까지도 얻게 된다.

특히 회화의 주류세계에서 벗어나 있던 영국회화를 서구미술의 중심으로 이끈‘폴 내시’를 비롯한 몇 몇 화가들, 여성에 유난히 인색한 미술계에 여성적 감수성 그 자체로 훌륭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현한‘마리 로랑생’의 <코코 샤넬 초상>이란 작품에 얽힌 이야기와 유명한 시(詩) <미라보 다리>의 시인‘기욤 아폴리네르’와의 사랑에 관한 일화는 문학적 감수성까지 자극할 정도이다.

이에 더해 정물화가 독립적인 회화장르로 발달하게 된 대표적 화가인 17세기 네덜란드의‘빌렘 헤다’의 ‘바니스타 정물화’의 미술사적 지식이나, 당대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소설가‘조르주 상드’와 염문을 뿌리기도 했던‘들라크루아’나,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 유명한 에로티즘의 극치를 표현한 <다나에>의 실제인물인“오스트리아의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불렸던‘알마 말러베르펠’의 일화는 회화 감상을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 세계로 안내하기도 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와 ‘베첼리오 타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비교함으로써 "알몸(Naked)과 누드(Nude)", 즉 매춘부의 알몸과 비너스의 누드라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형이상학적 구분을 해대는 상투적인 인간의 허위의식을 슬쩍 비꼬아대기도 하고, 사랑, 불안, 장엄, 순수, 기쁨, 슬픔, 경건, 사색 같은 정서와 같이 구체적 형상이 없는 것들의 표현으로서 추상(抽象)이 지니는 의미, 나아가 ‘라울 뒤피’나 ‘바실리 칸딘스키’, ‘로베르 들로네’ 등 회화와 음악의 교류, ‘교향곡 같은 예술적 감흥’의 표현에 이르는 작가들과 작품의 설명에서 회화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물론 그 친근성을 견인하여 구별짓기로서의 문화의 벽을 허무는 성실한 저자의 노력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저작의 마지막 장에는 우리 전통회화의 장을 따로이 수록함으로써, “일본이 우리 문화와 정신 말살”의 일환으로 우리의 회화를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는 억지를 주입키 위해‘동양화’라고 그 주체성을 상실시킨 용어는 더 이상 지양되어야 할 것이라는 요구는 채색화, 수묵화와 같은 우리고유의 회화특성으로 전환하여 부르는 중요한 각성이 된다. “가장 위대한 예술은 가장 쉬워야 한다.”는 신념을 지켜내면서 이처럼 풍성한 미술의 지식을 품어낸 저술도 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중 독자들을 향한 작자의 애정과 진실이 느껴지는 훌륭한 미술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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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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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단위 주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생명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발생시킨다.   종(種)이나 집단선택, 개체선택, 유전자선택과 같이 진화가 발생하는 실체로 학설이 나뉘고 있으나. 이 저작은‘유전자 선택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동원되는 선구적 실험이나 연구조사 사례와 논증은 그야말로 풍부하고 탁월한 지적 향연이라 할 수 있다. 특히,‘이기적’이라는 도덕적 냄새가 나는 유전자의 성향이 대중을 매혹하지만 단지 결과의 인식을 수월하게 이해토록 하기 위한 도킨스식 표현 방법에 불과하다는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된 것은 나로서는 성과라 할 수 있겠다.

생물은“‘종(種)의 이익을 위하여’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다윈의 사상에 대해 여기서 말하는 종이란 단지 번식에 대한 완곡한 표현일 뿐이지 진화의 주체를 종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시작하여, 진화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라는 신념을 강조한다.
그리고 개체나 집단선택설들이 주장하는 자연의 사례에 대해 유전자선택으로 해석 가능함을 입증함으로써 진화의 주체는 자기복제자인 유전자나 유전자세트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 과정에는 무척이나 진기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어 진화의 단위로서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이해를 떠나 모든 존재의 이유를 성찰할 수 있는 지적감동의 시간으로 충만한 느낌을 갖게 된다.

유전자는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통해 영속하고자 하는 것, 이것만이 유일한 목적이며, 자연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유전자를 선택할 뿐이다. 진화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지 여기에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방향이 개입될 여지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복제 능력을 지닌 유전자가 굳이 몸이라는 개체 속에 들어 앉아 번거롭게 생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하는 의문을 낳는다. 즉 자기복제자가 모든 것을 행하는 운반자를 구태여 만들어 내어 생식과 생장이란 과정을 겪게 하는 이유의 실익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감수분열을 통해 서로 다른 개체가 한 개체에 모이게 함으로써 이로운 돌연변이를 지니게 될 수도 있으며,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함으로써 정확성과 복잡성을 공고하게 하며, 유전자수를 극대화하는데 결정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기적 유전자는 생존기계를 만들어 그 안에 들어앉아 생존기계의 행동에 영향을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자기 유전자의 번영을 증진시킨다. 사실 이 말은 당혹스럽고 획기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신체가 단지 유전자의 자기 생존과 번영이라는 이기적 행위를 수행하기 위한 운반기계, 즉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으로 하나의 개체로서의 주체성이 부정되고 하위단위인 유전자의 생존기계라는 것이니 그 발칙함은 선뜻 수용하기가 버거운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개체나 집단이 자기복제능력을 지니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되면 사실 자기복제 역할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생명체가 자기복제를 하는 실체의 생존율 차이에 의해 진화한다는 것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현재의 학설은 개체선택설과 팽팽한 대립)

한편 시선을 잡아당기는 특징적인 이론 중에‘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etgy, ESS)'라는 매파와 비둘기파의 장기적 생존 이익에 기반한 협력과 배신의 시나리오를 통한 자연 선택의 특성은 배신자에 대한 보복자와 같은 조건부 전략자의 승리처럼 자연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고도 의미있는 시사를 한다. 특히 게임이론의 중추인 죄수의 딜레마가 무한 반복될 경우‘호혜적 이타주의’로 안정 상태에 도달하는 실험은 자연선택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중대한 이해를 제공한다. 여기서 어떤 한 전략이 계속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전략이 다수일 때 즉 자기 자신의 사본이 많은 환경에서 특히 유리하며, 계속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ESS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 저술은 저자의 우려처럼 도덕성을 논하려는 의도가 있지는 않지만, 다른 유전자들과 잘 어울리고 상호보완적이어야 생존 가능성이 높다는 것으로 ‘마음씨 좋음’과 ‘관대’함이 승리한다는 자연의 속성은 인간세계에 의도하지 않은 미덕을 알려준다.

이 저작이 제기하는 또 하나의 탁월한 이론으로 모방의 단위이자 문화 전달의 단위로서‘밈(Meme)’이라는 일종의 문화유전자를 들 수 있다. “현대인의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자만이 진화의 기초라는 입장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의복과 음식의 유행, 의식과 관습, 예술과 건축, 기술과 공학 등 문화가 뇌에서 뇌로 퍼져 가면서 그 수가 늘어나며 진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동물의 행동은 어쨌든 유전자의 제어 하에 있지만, 세상을 시뮬레이션하고 자기인식까지 갖게 된 뇌를 지니게 된 인간은 유전자의 독재에 반항하는 힘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완벽하게 실행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유전자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실행의 결정권을 생존기계가 갖게 되는 날 아마 새로운 진화의 단계로 나아갈 것이라는 도킨스의 예견은 유일한 자기복제자인 유전자(DNA)의 독점권을 밈(Meme)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새로운 진화를 시작하게 될 것이라는 데 공감케 된다.

이 밖에 저자의 동명의 저작인‘확장된 표현형’이라는 유전자의 생존기계 내,외부를 막론하고 해당 동물의 행동을 담당하여 유전자 자신의 생존을 극대화하는 경향에 대한 이론은 매혹적이다 못해 감탄스럽기조차 하다. 이외에도 숙주와 기생체의 협력이 궁극에는 완전히 동화하여 하나의 동일체로 진화할 수 있다는 가설은 생물의 급작스럽게 변형된 형태와 행동을 설명하는데 스티븐 제이굴드의 단속평형설 못지않은 발상을 주기도 하며, 생존기계 안에서 자기사본을 알아보는 유전자의 그럴싸한 방법이나, 대투자 정직 전략과 소투자 착취전략의 두 갈래로 진화한 성 전략이‘종의 이익’에 미치는 검토는 앎에 대한 갈증을 산뜻함을 넘는 청량감을 느낄 정도로 풀어준다.

진화는 돌연변이를 필요로 하는 유전적 변화이다. 여러 생물 개체 속에 들어앉아 유전자가 미치는 영향력의 모습들을 도킨스의 설명으로 보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사물이 어떻게 진화되었는지,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한 진술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최적자의 차등적 생존인 자연선택과 유전자, 그리고 생존기계, 협력의 진화에 이르는 이‘유전자선택설’을 주장하는 진화론의 저술은 그 이론적 주장을 초월하는 생명과학에 대한 성찬이자 신(新)다윈주의의 위대한 저술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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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라, 세계를 향한 영혼의 승부
김한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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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많은 한국인들은 해외에서 벌어지는 유명 자동차경주대회를 접할 때마다 저 많은 차량 중에‘메이드인코리아(Made in Korea)'는 왜 없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느꼈을 법 하다. 효율성이라는 대량생산의 가치에 집중하는 체제에서 자기만의 고유의 가치와 상상력이 결합한 이러한 차량을 만들어 낸다는 의식이 자리 잡을 틈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영혼을 투여하는 예술적이라 할 수 있는 창조의 정신,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는 장인(匠人)정신이 어느 샌가 대량생산이라는 경제적 논리에 밀려났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저작의 표지와 삽화를 장식하는 날렵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스포츠카를 대하면서 우리에게도 포르쉐와 람보르기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슈퍼카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러한 노력이 대접받기에 턱없이 황폐한 환경에서 무모하기까지 할 수 있는 도전을 한 사람이 누군가하는 호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해야 할까? “대한민국 최초의 수제 스포츠카”가 우리의 시선에 놓이기까지의 사연들과 그 제작과정, 한 젊은이의 꿈이 중년이 되어 비로소 실현되기까지의 여정이 소개되고 있다.

이태리 피렌체 국립미술대학을 거쳐 FIAT社가 있는 수제자동차의 본고장인 토리노 SDAD(디자인대학원)에서의 자동차디자인을 전공하면서 꿈의 실현을 한 단계씩 밟아나가는 청년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일종의 디자인 능력을 갖춘 자동차 공방(工房)이랄 수 있는‘카로체리아(Carrozzeria)', 즉 대량생산시스템을 구축하지 않고 솜씨 좋은 디자이너와 장인들이 어울려 수공업 방식으로 차를 만드는 그의 의지는 실현된다.

귀국 후 국내 자동차회사들의 디자인실에서의 경험, 그리고 마침내 아내와 프로토디자인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직원들의 헌신적인 참여로 이상을 향해 매진하지만, 세상은 항상 장애를 마련해 순탄한 길을 열어주지 않는가 보다. 고난과 역경, 위기를 기회의 국면으로 이해하고, 극한의 낭떠러지에서 조차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의 손길은 기적처럼 다가온다.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는‘해낼 수 있다’는 자기암시의 긍정적 최면은 분명 이처럼 현실로 다가온다는 것이 진실임을 목격하게 한다.

2007년“시속 100킬로미터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제로백)이 3.8초, 최고속력 330킬로미터”의 슈퍼카인‘스피라 레이싱카’ 버전이 당당히 GTM(Grand Touring Masters)시리즈에서 우승했을 때 그 감격과 감동은 근 30년을 지속해 온 장인에게는 형언 할 수 없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자동차디자인 프로세스, 디자인과 설계기술자, 제작기술자의 조화와 협력, 자동차산업의 환경, 개인의 신념과 인간에 대한 신뢰와 감사의 곡진한 이야기들이 수제자동차의 제작이라는 꿈의 도전에서뿐 아니라 삶의 진정함까지 아우르면서 감동을 선사한다.

혼신을 다해 이루고자 하였던 그 과실이 마침내 열리고, 이젠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한 토대에서 정말 세계의 명차들을 향해 우리도 장인정신이 이렇게 꽃을 피우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은 저자 ‘김한철’의 긍지이기도 하겠지만,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서도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외면당했던 그의 분투가 더 많은 투자자들의 관심과 지원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21세기, 대량생산의 시대는 저물고 인간의 감성과 영혼을 담겨있는 장인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지 않은가. 소량이지만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장인산업은 우리의 이상도 실현하고 충만한 미래의 삶을 일궈내는 새로운 가치일 것이다. 정말‘스피라’가 무럭무럭 자라나길 응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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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거짓말 - 무엇이 우리의 판단을 조작하는가?
마이클 캐플런 & 엘런 캐플런 지음, 이지선 옮김 / 이상미디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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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작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낳는 사회의 현상들에 도사리고 있는 믿음의 실체를 파헤친다. 그래서 그 믿음들에 내재하고 있는 무수한 오류와 위선, 기만을 만들어내는 근원의 탐색은 생물학적 반응으로서의 본능을 중심으로 인지과학, 진화생물학, 행동경제학을 넘나들며 신랄한 분석과 이해를 만들어내어 우리들의 불완전성과 몰이해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게 하고, 화합과 협력, 결속과 유대, 자유와 평등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사회를 위한 자기성찰의 지혜를 제공한다.

우리 인간들은 현실의 일상에서 결코 이성적이지도 않으며, 전통경제학이 말하는 것처럼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경제인도 아니다. 또한 빈번하게 현실을 왜곡하는 인지오류에 빠지며, 많이 알고 있다는 오만으로 엄청난 실패를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인종과 지역, 이념과 종교 등 수많은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갈등을 생산하고, 저마다의 도덕율과 정의를 부르짖는다. 그럼에도 개인들은 모두 자신의 생각과 판단, 행동은 정당하고 정의라고 주장한다. 무엇이 잘 못된 것인가? 개인마다 진실과 진리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회의 안정성이 지속될 수 있을까?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일을 처리 할 때마다 진리의 협상과 타협을 하여야 할 것이고, 세 사람이 모이면 또 다른 질서와 규범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수없는 갈등과 충돌, 그 혼란으로 얼마 되지 않아 인간이란 종은 아마도 멸종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신념과 행동의 오류를 낳는 것일까? 이는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아닌가? 저자는 이 원인을 인류의 역사가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속도를 능가하는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오래된 마음(구석기 시대의 뇌)이 적응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차이는 인간 스스로를 궁지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우리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깃든 다양한 오류가 백과사전적으로 망라되어 소개되고 있다. 아마도 우리들의 마음과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 오류의 모습들이 여기에 모두 진열되어 있는 것 아닐까 할 정도로 그 절망적 풍부함이 지천이다.

흥미롭고 날카롭기 조차한 오류의 사례들이 빼곡하지만 특히 우리사회에서 요즘 벌어지는 도덕성과 정의, 기후변화와 자원의 고갈과 같은 생태계의 문제, 그리고 이념과 종교와 같은 사상의 대립, 전문성으로 무장한 지식의 오만이 야기하는 문제점의 분석은 유독 관심을 집중시킨다.
인간의 심리적 기제를 말할 때면 단골로 등장하는‘죄수의 딜레마’와‘최종게임이론’은 바로 합리성이나 효율성과는 다른 결정을 하는 인간의 대표적 오류이다. 인간에게‘공정성’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으로 이성과 합리성을 가진 존재라는 인간의 정의를 완전히 파기한다. 여기서 우리는“강한 상호성”이란 의지를 발견하게 되고, 균형을 잃어버린 불공정이 발생하면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공정성이라는 정의를 주장하고 분노를 표시하는 사회적 대등관계를 중시하던 원시시대의 우리의 뇌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한편 사회를 지탱하는 법칙의 근간인 우리가 도덕성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것일까 하면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유를 위해서 상대를 죽이고, 정의를 위해서 또 상대와 싸운다. 도덕성이 왜 이렇게 서로 다를 수 있는가. 도덕은 감정적이고 추상적 요소에 의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사실 엄청난 충격을 가져온다. 위선, 배반, 무자비, 비방...같은 잘못에 대한 감각은 직관적인 동시에 무조건적이며, 단지 불쾌감을 자극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이란 얘기다. 또한 도덕적 감정이란 영혼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중재와 자존심을 만족시켜줄 만한 대안과 같은 집단내의 추상적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역과 인종과 문화와 관습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랄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원시시대의 뇌가 저지르는 기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누구나 이용 할 수 있는 공개된‘공유지의 비극’이론처럼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이 불일치 할 때 인간은 사적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려는 이기심이 앞선 나머지 모두가 손해를 보는 비극을 자초한다. 일례로 전 세계에 개방된 공유지인 바다에서 참치는 이제 멸종의 위기에 처해있다. 이처럼 광물자원, 야생동물, 열대우림은 고갈되고 남획되어 공멸을 재촉한다. 또한 고정관념과 편견은‘그들’과‘우리’를 나누고 서로의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혐오를 부추기고 적대를 낳는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내재적 공동체의식이 직감과 본능적 감각들을 제어하는 한낱‘인슐라 ’라는 신경물질에 좌우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치와 종교의 문제에 이르면 인간들은 이성을 상실하고, 극단적 감정에 휘둘린다. 여기에는 논리도 적용되지 않으며, 성장과정에서 습득한 저마다의 개념들에 입각한 동기에 따른 추론 결과를 사실인양 포장하고 그것에 강한 믿음과 정당성을 주장한다.

우리는 이처럼 이 저작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오류를 만들어내는 근원을 알게 되고, 그 오류로 인한 인간사회의 위기를 직시하게 된다. 문제의 원인과 현상을 알게 됨으로써 우린 이들을 통제하고, 전환시킬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분리와 구별짓기와 배반과 비난, 혐오와 분노를 화합과 교감으로, 협력과 결속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영역 방호의 신호로 발생한‘춤’은 같은 영역을 공유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또한 웃음은 상호신뢰의 표현으로서 진화한 산물이란다. 함께 춤을 추고 미소를 교환하는 인간관계에서는 결코 싸움이 잉태되지 않는다. 이에 더해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의 ‘엠마’를 인용한 여성의 성 선택의 흥미로운 일화와 함께 소개되는 비록 “두 환상의 교환, 두 피부의 접촉 이상은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세상을 움직이고, 서로에게 헌신함으로써 서로를 완전하게 한다.”는‘사랑’의 정의는 인류를 지배하는 엄청난 오류에 대한 희망의 언어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관념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이러한 대처가 궁극의 해결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지만, 경험을 단순화하도록 설계된 뇌가 조작한 허구에 기만당하는 인간들이 무작위성으로 가득한 세상에 의미를 주입하며 살려고 바둥대는 그 진실을 대면케 하는 것은 이 저작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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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다윈의 시대 - 인간은 창조되었는가, 진화되었는가?
EBS 다큐프라임 <신과 다윈의 시대> 제작팀 지음 / 세계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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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런 논쟁을 왜 하는가에 주목 할 필요성을 느낀다. 진화론은 생물학이라는 과학의 영역에 있는 여느 과학이론과 다를 바가 없다. 과학은 가설과 경험적 실험 등을 통하여 검증하고 그래서 보편적이랄 수 있는 진실을 밝히는 과정을 갖는다. 그래서 이 진실을 뒤집는 새로운 진실이 밝혀지면 수정되거나 폐기되기도 한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과학적 진실은 둥그렇다는 증거에 폐기되었으며, 인력에 의해 인간이 지구에 붙어있다는 진실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왜 유독 진화론을 향해서만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론자들이 자기검증 체제를 갖는 과학에 맡기지 않고 억척스러운 개입과 논쟁을 야기하는 것일까?

사실 이 저작물은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것 같다. 단지‘생명 탄생’의 말할 수 없음을 이유로 신비주의와 초월적인 그 무엇에 대한 다분히 종교적인 규명의 갈등에 맞추어져 있어, 세간의 유일신 근본주의자들의 창조론과, 기계론적 이상주의로 의사(擬似)과학이라 할 수 있는 지적설계론을 과학이론인 진화론에 대립시키는 잘못된 전제와 구성을 하고 있다. 이러한 실례로 미국에서 지적설계론이나 창조론을 진화론과 같이 과학 교과서에 실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사법부의 판결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과 같이 과학이 아닌 것을 과학교과서에 반영하려는 기이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행동을 소개하는 것처럼 이미 반영이 기각된 황당한 일화를 담는 것이 그것이라 하겠다.

또한 과학적 진리가 마치“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것이라는, 즉 진리란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는 극단적 상대주의적 논리를 보이기도 하며, 편의주의적 논의로 과학을 종교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표명하기도 하고, 영국의 특수한 현상을 보편적 세계의 현상으로 확장하여 무신론을 유신론에 대한 또 다른 종교인 듯 인식케 하는 신중치 못한 표현으로 객관적 성찰을 저해함은 물론 진화론의 과학적 논쟁이라는 본질을 흐리기도 한다.

어쨌든 주된 논점으로 제기하고 있는 진화론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된 기획인 만큼,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이라는 지적설계론자들의 진화론의 비판적 논의가 서두를 장식한다. 교과서에 잘못된 설명을 이유로 진화론 전체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거나, 눈과 같은 생물체의 기관을 예로 들어, 환원할 수 없는 복잡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 누군가 지적설계자가 생명을 창조했다는 영적 신비로 자연을 설명하는 기계론적 이상주의자들의 주장을 장황하게 나열하고 있다. 결국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이론적 토대로 과학을 흉내낸 의사과학을 과학인양 오해토록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어처구니없게도 “진화론이 믿는 사람이 점점 많아진다는 이유로 종교의 교의처럼 되어버렸다.”는 논리의 비약으로 본질을 훼손하기도 한다.

특정 과학 이론을 신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종교의 교의’가 된다고 하면, 만유의 인력의 법칙, 상대성 이론 등등 오늘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모든 과학이론은 저마다의 종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결국 유일신의 창조론이라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야기되는 비과학적 논쟁의 합리적 타당성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말 기괴한 논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태초의 생명 탄생이라는‘발생학’에서 다루어야 할 분야를 진화론에 대입하여 학문적 경계를 혼동시켜 생명체의‘진화’에 대한 과학적 논증인 자연선택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진화론을 무능한 과학처럼 비추는 태도와 같이 바람직하지 못한 논의도 보이고 있다.

한편 합리주의 이성중심의 오늘의 사회가 과학의 물질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음은 모두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며, 이로 인한 가치의 재고로서 과학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인류의 미래 가치에 대한 고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허나 진화론에 대한 종교주의자들의 비판을 물질주의로까지 확장하여 포괄적 과학비판의 일환으로 몰아넣는 것 또한 본질을 호도하는 무지한 자세라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한 지적설계론에 경도된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과학과 종교라는 다른 영역”이니 만큼 영역을 존중하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이는 과학은 종교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는 적대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진화론이라는 과학이론 자체에 끊임없이 신비주의와 종교성을 주입하려는 편협성을 스스로 멈추지 않으려는 거친 의지라는 저의임을 숨기려는 것과 같다.

물론, 이 저작이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에드워드 윌슨, 데니얼 데닛, 제리 코인과 같은 저명한 진화론자들과 마이클 베히나 윌리엄 뎀스키라는 의사과학자들의 지적설계론, 그리고 앨빈 플랜팅카와 같은 창조론자들의 견해를 적절히 배열하여 각각 그들의 이론과 직접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주장을 소개하고 있는 형식으로, 진화론과 종교의 간극을 좁혀보자는 취지임을 천명하고 있으나, 저마다의 주장을 산만하게 배열하기만 하고 있어 프로그램 기획의 진의를 명확하게 파악하기가 곤란하기도 하다. 다만, 진화론에 적의를 보이는 창조론자(지적설계론자 포함)들이 제기하는 논의의 쟁점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는 점과 과학과 종교의 갈등, 진화론의 발전적 현황에 대한 개괄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정보로서의 유익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과학은 새로운 입증이 발견되면 기존의 이론은 스스로 폐기된다. 입증할 수도 검증할 수도 없는 신비주의를 과학이라고 주장하거나 불과 6,000년 전에 생명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황당한 창조론은 과학으로서 다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수없이 시중에 나도는 反진화론을 표명하는 저작들의 주장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이념적 대립으로 그 갈등을 키우고, 나아가 인류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는 발아점이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존중하면 될 것이고, 과학은 과학 그자체로서 논박되고 다투어야 할 것이다. 종교로서 과학을 파괴하고, 과학으로 타자의 신념을 훼손하려는 행태는 지양(止揚)되어야 할 것이다. 진화론은 과학이다. 이를 전복할 새로운 과학적 증거가 발견 되었을 때 비로소 논의와 비판의 의의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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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 2010-09-14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례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 하시는 분이신지
여쭤 보고 싶네요.

검색하다 우연히 이 글 읽게 되었는데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별을 네 개나 주신 건
책 나름의 가치를 인정하신 건가요?
리뷰 내용을 보면 짜게 주셨을 것 같았는데...

2010-09-15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