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세상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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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자신과 닮은, 하지만 자신보다는 저열한 이야기를 필요로 해.”

- 르 주르날사장 데니소프의 신념 중에서, 596

 

 

공동체의 무관심으로 사회에서 배제된 채 빈곤과 자기경멸의 삶을 지탱해가야 하는 상이 병사들과, 전쟁(1차 대전)을 자신들의 명예와 권력, 부의 토대로 인식하는 계층의 혐오스러움을 동일한 광기의 흐름 속에서 경합시켰던 오르부아르의 풍요로운 이야기는 이제 잊어야 한다. 세상에 대고 우스꽝스런 주먹 감자를 날리며, 미칠듯한 행복감을 안겨주던 그 멋진 작품의 추억은 이 위대한 소설 대단한 세상을 위한 전주곡이었음을. 그 기막히게 잘 연출된 우아한 비극 속에 소박한 사랑과 평범성의 꿈을 쫓던 알베르와 폴린이 30여년의 풍파를 거쳐, 그네들 네 자녀의 파란만장한 사연으로 1940년대 전후 세계의 험한 세상을 풀어낸다.

 

그랑 몽드(Le grand monde)’, 위대한? ? 혹은 대단한? 이라 해석될 수 있는 그랑이 오직 대단한이라 번역될 수밖에 없는 사연을 이 소설은 충분하고도 넘치게 풀어내고 있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계를 가히 ~단한으로 발음되는 조롱의 뉘앙스로 역설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까닭이다. 배경은 프랑스 위임정권이 서서히 저무는 1940년대 베이루트(오늘날 레바논의 수도)를 기반으로 글로벌한 비누공장을 일궈낸 펠티에 가문의 일곱 명 프랑스 가족, 펠티에 부부와 세 아들, 한 명의 딸, 큰 아들의 아내인 며느리까지, 이들 독특한 개성의 인간들마다 각개의 독자적 서사를 이끌며, 차별적 장르를 형성하여 읽는 이의 다채로운 욕구를 충족시킨다.

 

항상 충분치 못함, 부족함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뚱땡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장남 ’, 학업에 성과를 보이는 둘째 아들 프랑수아’, 그리고 둥둥 떠 있는 듯한 이상 없는 이상주의자인 에티엔’,과 오빠들이 모두 떠난 베이루트에서 자신의 삶을 계속할 수 없다고 여기는 열여덟 살 막내 딸 엘렌’, 우체국장의 내 딸 중 가장 아름답지 못해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 장의 아내이자 펠티에 가문의 큰 며느리가 된 준비에브가 열연하는 홍수처럼 맞닥뜨리는 인생의 사건들에 홀딱 빠지게 된다.

 

장남 장은 가업인 비누공장의 전무로 취임하지만 아버지 루이 펠티에의 후계자로서의 수업은 실패로 끝나고, 아내와 함께 파리로 도피하듯 떠나지만 그의 뼛속까지 배어있는 무능력은 삶에서 미래를 어둡게 한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로의 엘리트 코스를 밟기 위해 잇따르듯 부모를 떠난 프랑수아는 진학에 실패하고, 황색미디어에 가까운 르 주르날의 데니소프 사장으로부터 임시직 리포터로 채용된다. 셋째 에티엔은 프랑스 용병인 벨기에 출신 레몽에 대한 사랑으로 그의 복무지가 베트남으로 이동하자 식민지 베트남 외환국에 취업하여 부모를 떠난다. 유일한 딸인 막내 엘렌은 교활한 성()착취자인 학교 선생의 성적 노리개로 전전하며 형제들이 모두 떠난 베이루트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루이 펠티에 자식들의 현실적 삶의 실제는 그의 희망찬 기대와는 꽤나 먼 것들이다. 잡화 영업사원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아야 하는 장은 그의 쪼그라든 자존감만큼이나 성적 무능력까지 더해져 파리에서의 귀족적 생활을 꿈꾸었던 아내 준비에브의 욕망은 엉뚱한 호기심과 거친 탐욕으로 표출된다. 사이공 식민지 외환국 직원이 된 에티엔은 본국으로의 수입대금인 외환대금 인가업무를 담당하지만 곧 이 업무가 고질적으로 왜곡된 환차익을 위한 합법성의 가면을 쓴 부패자금 생성의 근원지임을 알게 된다. 베트남 화폐로 송금하면 파리에서 두 배가 넘는 프랑화로 환산되는 환율의 왜곡을 이용한 해외송금의 공식 승인업무인 것이다.

 

이로 인해 승인담당자들은 은밀한 수수료를 챙기고, 송금자들은 합법적으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얻는다. 에티엔의 베트남 사이공의 이주는 연인 레몽과 함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소식이 두절된 연인을 찾지 못한다. 그의 출전지에 대한 정보는 군사전략이라는 미명하에 접근이 불가능하고, 결국 레몽의 처참한 전사소식을 듣게 되자 에티엔은 고독의 고통으로 외환국의 가장 부패한 외환송금 승인자로 돌변한다.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으로부터의 이익을 위해 외국 용병에 의존한 저항 군()인 베트민(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저항 공산주의자들)과의 전투는 프랑스 자국민의 출혈 없이 국익만을 거둔다는 전시적 효과로 인해 프랑스인들의 관심 외() 지대가 되어 부정과 부패의 온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에티엔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이공의 이야기는 식민제국주의 프랑스 기득권 계급의 더러운 욕망에 대한 고발일 것이다. 에티엔으로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여느 첩보물에 버금가는 긴장감과 함께 적국의 군사재원 확보 자금 수단이 됨과 동시에 프랑스 고위정치가들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전쟁의 상시화가 이용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한편 파리의 장과 프랑수아의 현실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두 형제와 준비에브가 함께하는 영화 관람 중 발생한 유명 여배우의 살인사건을 사이에 두고 이것이 이들의 고단한 삶의 투쟁의 중심 언어가 되어 흥미진진한 두 줄기의 서사를 대차게 밀어붙인다. 이 우연한 영화관람 중 벌어진 살인사건의 현장에 있음으로 인해 프랑수아는 모든 신문을 앞질러 독점적이고 생생한 기사를 써내고 르 주르날의 사장 데니소프의 신임을 얻어 잡보(雜報)부의 정식 기자가 된다. 이와 달리 장은 잡화영업을 전전하던 끝에 본사 상임 영업직으로의 전환이 실패하자 사직한다. 장은 자신의 내적 한계에 대한 무력감으로 인한 분노가 폭발할 때마다 우발적인 여성 살인을 반복하는데, 영화관 여배우의 살인 또한 그의 돌발적 살해충동의 결과이다.

 

동생은 해당 살인사건의 취재기자이고, 형은 살인 당사자라는 구도를 두고 벌어지는 사건 수사와 취재, 그리고 장과 준비에브가 벌이는 해프닝들은 한 편의 코미디극과 추리극을 오가며 전쟁 후 프랑스 사회에 만연한 불의와 부패, 그리고 불안정한 치안과 사법제도의 무능력이라는 실상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자기 미래 설정이 없는 열여덟 엘렌의 약물복용과 성적 탐닉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전후 사회상일 것이다. 도덕성이 총체적으로 붕괴된 무질서한 1940년대 프랑스의 드라마틱한 초상(肖像)을 그 누가 이보다 다채로운 시선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사이공의 에티엔은 베트민의 자금 확보수단으로 외환국의 승인이 이용됨을 발견하고, 모국 프랑스의 국부(國富)가 적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식민지내 자금원의 브로커들을 추적하다 자금 세탁 은행들과 본국 고위 정치인들로 추정되는 이니셜을 발견하고 그 증거를 수집한다. 점진적으로 가까워지는 살해 위협의 징후들로 인해 파리에 있는 형 프랑수아에게 이니셜과 함께 자신의 파리로 탈출이후 증거를 제시할 것을 다급하게 전하면서 기사화를 요청하지만 프랑수아는 이를 시급한 문제로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정보누설로 인해 곤란을 겪을 자들의 사전 폭발물 설치로 인해 탈출 비행기의 공중 폭발로 에티엔은 사망한다.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프랑수아는 에티엔의 마지막 전언인 이니셜을 통해 부정한 자금 세탁기관인 은행들과 연루된 정치인들을 추정하고, 당사자인 최고위 상원의원을 인터뷰하기도 하지만, 신문사내 권력 다툼에서 희생 될 위기와 함께 알지 못하는 정보기관에 의해 체포되어 협박을 받기에 이른다. 작가는 가히 폭력적인 함정을 설치해 독자를 기만하기도 하는데, 연쇄 살인범인 장과 향정신성 약물의 탈취에 연루된 엘렌이 별개의 장소와 시간에 체포되게 함으로써 그네들의 범죄가 처리되는가 싶지만, 이는 프랑수아의 프랑스 정국을 혼란에 빠뜨릴 정치와 경제의 총체적 부패에 대한 신문의 공개 고발을 제지하기 위한 정부 정보국의 교활하고 위협적인 거래를 위한 전술로 드러난다.

 

이 전술은 시효는 만료되었지만 국민적 감정을 자극해 펠티에 가문을 붕괴시킬 수 있는 오르부아르의 그 유명한 전몰장병 가족을 대상으로 한 희대의 사기사건 주범 공개라는 사건과 프랑수아의 정치금융 부패사건 공개와의 거래이다. 자취를 감추었던 전쟁 기념비 사기사건의 주범인 알베르와 폴린은 이름을 바꾸어 루이 펠티에 부부가 되어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불의한 자금을 기반으로 사업을 일궈낸 것이다. 프랑수아는 신문사내 입지를 굳히고 탁월한 신문기자로 성장할 기회를 목전에 두었지만 자신의 부모와 가족들의 안녕이라는 선택지에서 고뇌한다.

 

이후 아버지 루이 펠티에가 자식들을 위해 음지에서의 끝없는 격려와 사랑을 보냈음을 확인하는 이야기들이 당대 혼란과 계급적 부패가 극성을 부리던 프랑스 사회에서의 약자가 생존하기 위한 불가피성과 함께 부모와 형제, 가족의 안위를 선택케 한다. 아마 프랑수아가 최초로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의 미래와 이익이라는 이기심에서 가족 공동체로 시선을 옮기는 첫 걸음을 디뎠음을 의미할 것이다. 사실 새로운 소설이 출간될 때 출판사들이 뽑아낸 광고 문구들은 고장되기 일쑤고, 특정한 몇 몇 화려한 문장으로 독자를 현혹하곤 한다.

 

때문에 이 작품 역시 소설에서 무엇을 더 이상 바랄 수 있단 말인가!”와 같은 더 타임스의 극찬의 문구에 머리를 갸우뚱했지만, 화려하고 다양한 서사와 시대에 대한 고발을 녹여낸 플롯들은 오히려 이 수사 또한 부족함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19세기 발자크의 인간극시리즈에 버금가는 20세기 인간극이라는 최고의 칭찬을 하는데 주저치 않겠다. 발자크의 풍속, 철학, 분석이라는 범주하의 구성과 달리, 피에르 르메트르는 연대기적으로그만의 인간극을 써내고 있는 것인데, 1차 대전 후인 1910년대를 시작으로 이제 1940년대를 완성한 것이다. 이 작품은 이미 70대 고령에 접어든 작가의 마지막 정열의 투사일 것이다. 프랑스 부흥기인 영광의 30년인 1945~1975년을 배경으로 하는 4부작 <영광의 세월>, 그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서 모두 완성되어 새로운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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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밍고 섬의 약혼 서문문고 17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박종서 옮김 / 서문당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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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세기 전환기의 독일 작가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오래된 소설작품을 읽도록 견인한 것은 두 여성 인문학자의 글 속에 등장한 단편 칠레의 지진으로 인해서이다. 각기 기억과 수치심 문제의 논의 중 인용되었는데, 인간의 비이성성과 자기 합리화의 기만성에 내재된 폭력성의 사유였다.  생존 시 빛을 보지 못한 작가였으나, 그 내막은 정부 시책 비판자로서 주류사회에서 배제되어 그의 출판이 불가능했던 탓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34년의 짧은 생애를 산 이 천재 작가의 비판적 사유는 실러나 괴테를 넘어서는 가히 현대적 인식능력에도 손색이 없는 작품을 써냈음의 뒤늦은 발굴이다.

 

200쪽 남짓의 이 작은 문고판에는 세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있는데, 어쩌면 그의 단편작품들 중 그야말로 엑기스라 해도 될 것이다. 작가의 자살을 예고한 작품으로서 추정되기도 하는 표제작 성 도밍고 섬의 약혼은 물론, 폭력적 기억의 부정으로 빈번하게 인용되는 칠레의 지진과 성()문학의 선구적 작품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O 후작 부인이 그것이다.

 

1. 성 도밍고 섬의 약혼

 

백인들의 농장에서 노예 노동을 하던 흑인들에게도 프랑스혁명의 자유에 대한 여파는 그들의 의식을 깨워댔던 모양이다. 작품의 배경은 대략 1803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오랜 억압의 사슬을 끊고 흑인들의 반란이 거대한 폭력적 봉기가 되어 성 도밍고 섬에 피의 바람을 몰고 온다. 자유 신분으로 거대한 농장을 맡기고 유산까지 줄 정도로 백인 농장주에게 신뢰를 받던 흑인 콩고 호앙고는 주인을 살해하고 농장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는 흑인 반란군에게 무기와 재원을 공급하고, 백인들을 함정으로 몰아 학살하는 주체가 된다.

 

자신의 집이 된 전 농장주의 거처를 흑백혼혈인 늙은 아내와 열다섯 살 딸을 이용해 피난하거나 도주하는 백인들을 꾀어 그들의 소유물을 약탈하고 참살하는 짓을 반복한다. 이때 스위스 인으로 친척 일가의 피난을 주도하던 프랑스군 장교인 구스타프 폰 데어리트는 호앙고의 집에 음식거리와 숙소의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든다. 호앙고의 아내인 늙은 노파 바베칸은 내심 그를 잡아두고, 그 일가족까지 도륙할 기회로 삼으려 한다. 딸 토니를 이용하여 유혹하여 붙잡아두고 호앙고가 다시 집에 올 때 넘기려 계획하는 것인데, 혼혈의 미색을 지닌 토니는 구스타프와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약혼의 언약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바베칸은 딸의 변심을 의심하고, 호앙고가 들이 닥쳤을 때 토니의 배신으로 구스타프가 도주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방에 이르지만 토니는 이미 도주할 통로가 막혔음을 예견하고 구스타프를 몪어 배신의 행위를 은폐함과 동시에 구스타프의 죽음을 지연시킨다. 그리곤 몰래 홀로 탈출하여, 산속에 은거하고 있는 그의 일족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구스타프의 구출이 시급함을 알린다. 이상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주제는 바로 이 구출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에 개입된 사람들의 말, 다시 말해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인 인종적 편견의 적대감이다.

 

구스타프의 친척들로 구성된 소수의 사내들이 토니의 안내로 급습하여 호앙고와 바베칸을 포박하는 것인데, 토니가 이를 주도한 것을 알아차린 호앙고는 토니에게 말한다. 네가 그런 창피한 짓을 하고 기뻐하기도 전에 천벌이 내릴걸.”이라고 동족인 흑인을 배신한 토니를 질책한다. 그때 토니는 난 배신한 일 없어요. 백인 여자인 나는 당신들이 붙잡아 둔 저 청년과 약혼한 사이예요.”라고 답한다. 혼혈 여성인 토니는 부모인 호앙고와 바베칸과 달리 자신의 정체성을 백인으로 주장하는 것이고, 따라서 백인인 자신이 백인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아무런 부당함이 없다는 항변인 것이다. 이것은 피부색이 옅어진 흑인 여성의 백인사회로의 동화(同化)에 대한 갈망이지만 바로 이러한 의식 자체가 피부색에 의한 차별을 더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이어서 구스타프를 구출하기 위해 감금되어 묶인 방으로 토니와 습격자들은 향하는데, 토니를 본 구스타프는 구원자들에 의해 풀려나자마자, 어쩔 작정인지 알아 볼 사이도 없이, 분노의 이빨을 갈면서 토니에게 피스톨을발사한다. 총알은 토니의 심장을 관통하고 그녀는 죽는다. 이 장면도 흑과 백에 대한 차별의 의식이 구스타프의 마음 저변에 있었음의 한 상징일 것이다. 그는 전후 상황을 헤아리지 않고, 단지 토니가 자신을 묶어 둔 행위에 대한 적의만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그를 살리기 위한 토니의 임기웅변으로서의 행위였음을 그는 애초에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놀란 친척들은 그를 살리기 위한 토니의 술책이었음을 구스타프에게 설명한다. 은혜를 살해로 갚은 것인데, 이 사실을 알자 구스타프 또한 피스톨을 자신에게 겨누어 자살하고 만다. 자신을 지배하던 차별의 의식에 대한 수치인 자괴감과 성급한 판단이 약혼한 여성을 살해하게 하였다는 깊은 죄책감이었다고 해석하여야 할 것 같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이 뿌리깊은 인종적 편견은 인간 세계에 무수히 다양한 갈등의 문제로 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성찰의 이야기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내성적이고 인간 사회에 대한 비판과 혐오로 인해 은둔을 희구했던 작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데, 불치병을 앓고 있던 유부녀인 헨리에타 부인과 사랑을 나누던 클라이스트는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인과 함께 피스톨로 머리를 쏘아 이중자살(二重自殺)했다. 이 소설은 클라이스트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작품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구스타프는 작가 클라이스트의 분신이었던 것일까?

 

 

2. 칠레의 지진

 

1647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실제 엄청난 인명 손실과 재산의 파괴로 기록된 사건이다. 소설의 발단은 산티아고의 최고 부자인 귀족 돈 엔리코 아스테론의 고명딸인 돈나 요제페와 가정교사인 청년 예로니모 루쮀라와의 은밀한 사랑이 알려짐으로서 루쮀라는 해고되고, 요제페는 수도원으로 보내진다. 요제페가 루줴라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청년은 형무소에 수감되고, 요제페 역시 수도원에 감금된다. 도시는 이 젊은이들의 사건을 불상사이자 범죄행위라 하여 분노의 목소리가 들끓는다. 루줴라는 목숨을 끊기위해 형무소의 기둥에 노끈을 묶고 결심을 굳히려는 순간 갑자기 온천지가 무너지고 갈라진다. 대지진이 산티아고를 강타한 것이다. 아비규환의 폐허 속에서 탈출한 두 사람은 아기 젖동냥을 하던 귀족 돈 페르난도의 아이를 도움으로써 그들 부부로부터 귀한 영접을 받는다. 그리고 요제페와 루줴라, 그들의 아기 필립에게 마치 재난이 그들의 영혼을 치유라도 한 듯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는 세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지위와 신분의 구별 없이 서로 돕고 희생한다.

 

지진이 끝나고 마음의 안정을 찾자 산티아고 도미니크 성당으로 미사를 올리려는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몰려온다. 요제페와 루줴라 역시 열렬한 마음으로 하늘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성당 미사에 참여한다. 그러나 성당의 늙은 승정(사제)은 하느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인 지진에도 불구하고 전멸당하지 않은 죄악이 남아 신을 모독하고 있다고 저주에 가득찬 어조로 두 사람의 이름을 분명하게 부른다. 이때 미사 군중 속에서 설교를 가르는 외침이 들려온다. , 여기 바로 그 죄인들이 있소!” “어디 있느냐!” “여기 있다!” “돌로 때려라, 때려 죽여라!” 성당에 모인 신자들이 모두 외친다, 그리곤 곤봉으로 내리쳐 그들을 때려죽인다. 이어 저년과 함께 저 사생아도 지옥으로 보내라!”라는 소리와 함께 어린애(요제페의 아이가 아닌 페르난도의 아이)를 낚아채 다리를 붙잡아 빙빙 돌리다 교회 기둥 모서리에 부딪쳐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머리가 터져서 골이 삐어져 나온 채 아이는 바닥에 내팽겨 쳐진다.

 

인문학자인 오카 마리는 소설의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대지진이라는 폭력적 사건으로 부정된 자신들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기만적인 헛소리(신의 의지, 헛소문)에 의거한 폭력을 휘두름으로써 사건 자체가 지닌 폭력의 기억을 부정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관동(關東)대지진시 재일조선인이 약탈과 폭력으로 일본인을 학살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자신들의 재앙을 조선인의 탓으로 돌렸던 그 범죄적 기만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자신들의 대재앙을 해소할 희생양을 찾아 그것에 들씌우는 폭력과 기만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아주 민감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데, 인간들의 이 잔혹한 폭력성이 드러난 그 날의 기억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다.

 

어떤 참혹한 사건의 당사자로 있어야 했던 존재가 과연 그 사건을 단지 의미가 흐릿해진 막연한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요제페와 루줴라는 맞아 죽었고, 그들의 아이는 오인된 죽음을 맞이한 페르난도의 아이를 대신해 페르난도의 자식으로 양육된다. 그런데 클라이스트는 과연 이 소설을 칠레의 지진이 야기한 인간 폭력의 기억이라는 재앙적인 인류 트라우마를 증언하려 한 것일까라는 점에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페르난도는 필립을 판과 비교해 보기도 하면서, (...) 그에게는 지금이 더 낫다고 생각되기도 했다.”는 이 마지막 문장은 그들이 사건을 사건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즉 의미가 모두 바랜 단지 문자적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처럼 인식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사건을 다수의 타자와 나누어 갖기 위한 증언이 아니라 한낱 이야기로서의 소비에 멈춘 그저 그런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사자랍시고 울고 짜대는 그것이 진실의 면목일까 하면 그것이야말로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사건의 말 할 수 없음 자체를 증언하려는 기억의 서사문제를 클라이스트는 이미 선취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아마 이러한 가능해석으로 인해 이 작품은 오늘날 여전히 기억 나눔의 대표적 서사로 회자(膾炙)될 수 있는 것일 게다.

 



3. ‘O’ 후작부인

 

조금은 황당한 신문 광고 문장이 소설을 연다. 아기 아버지를 찾는 사연의 광고를 자신의 신원을 밝힌 채 모든 신문에 낸 것이다.

 

저는 뜻하지 않게 모든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낳을 아이의 아버지는

계신 거처를 알려주십시오. (...) 당신과 결혼할 결심을 했습니다.”

 

왜 이런 광고가 게재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사연이 소설의 거의 4분의 3을 채우고 있다. 이탈리아 유명도시 M시 요새의 사령관 G씨의 딸이자, 남편과 사별한 젊은 미망인인 O후작부인은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요새가 점령당하면서 러시아 병사에 의해 끌려 다니며 온갖 수치스러운 학대를 받게 되자 도움을 구하는 비명을 지른다. 이때 러시아군 중령 F백작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구원되지만 이내 실신하여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만다. 이 러시아군 장교는 요새사령관인 G씨의 항복을 받아내고 편의를 봐준다. 세월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평화로운 어느 날, F백작이 느닷없이 O후작부인과 그녀의 부모인 G씨 부부가 살고 있는 M시의 저택으로 찾아와 O후작부인에 청혼하며 이 결혼을 승낙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O후작부인은 그 어떤 남자와 관계를 맺은 기억이 없음에도 마치 임신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마침내 의사와 조산사에게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녀는 이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으로 이해한다. 의사는 조롱하듯 동정녀 마리아 이외에 그러한 임신을 들어본 적 없다. O후작부인은 부모로부터 암캐의 염치없는 행실에 여우의 간사한 꾀를 열 갑절 보태도 그년의 그것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라며 집에서 내 쳐진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성의 성()에 대한 남성, 즉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의 기울어진 잣대를 비판하려 한 것 같다. O후작 부인은 죽은 남편으로부터 상속받은 V시의 영지로 거처를 옮겨 두문불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 마침내 인과성에 대한 자연법칙에 굴복함으로써 자신은 알지 못하는 아비를 찾는 광고를 내기에 이른 것이다.

 

딸의 결백함을 반신반의하던 O후작부인의 어머니 G씨 부인의 한 실험에 의해 딸이 주장하는 이해 불가능한 임신의 결백성을 확인하고 남편과 가족들과 딸의 화해를 주선하며, 남자들은 O후작부인의 순결성을 품는다. 사실 O후작부인을 수태케 한 당사자가 누구인지 독자들은 어렴풋 짐작할 수 있는데, 러시아군이 요새를 습격했을 때 F백작의 구원 이후 그녀가 완전히 실신한 장면이 있다. 그리곤 이후에 비록 청혼 수락이 훗날로 미뤄지긴 했으나 F백작이 구혼한 사실이 있다. 신문 광고의 문장에 따르면, 나타나면 결혼하겠다고 선언했기에 F백작이 자신임을 고백하려 약속된 기일에 나타났으나 O후작부인은 완강히 이 사실을 부인한다. 그녀가 정신을 잃었던 그 고통스런 시간에 F백작이 추행한 것이니 용서될 수 없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에 이와 동일유사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리고 후일 그 당사자가 혼인을 요청한다면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논쟁적 주제가 될 것이다. 불량한 인간들로부터 구출해준 선의의 기사이자, 실신 상태에서 간음한 인간이 후일 나타나 청혼을 할 때, 당사자인 여성은 이 황당무게한 사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당대의 성적 환경 하에서는 이는 대범한 물음이었을 것이다. 실제 소설 속에서 F백작은 O후작부인의 처분에 맡기고 그녀의 신뢰를 쌓는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곤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지만, 사실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안은 분명 아니다. 오늘 누군가 이러한 소재의 이야기를 쓴다면 과연 어떤 귀결을 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많은 영지와 재산을 지닌 귀족인 F백작의 자본주의적 관점의 외형적 지위는 일단 현대 여성들에게 장애요인은 당연 아닐 것이고, 더구나 전쟁에서 적군병사의 노리개로 취해질 수 있는 순간 구원해준 기사이기에 그의 도덕성도 평범성 이상의 수준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는 여자의 심신이 가장 취약한 틈새를 이용하는 성적 비열함을 보였다. 한편으론 아이의 생부이기도 하며, 정식 청혼을 함으로써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하지 않았다. 클라이스트와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한 건가? 이 소설은 본격적으로 젠더()에 내재된 차별과 폭력성을 다룬 선구적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또한 클라이스트의 작품들은 당대 여타 작가들의 소설들과 달리 인물의 심리나 정황 묘사가 거의 없이 사건전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때문에 조금 건조한 느낌마저 들지만, 그의 다수의 작품들이 오늘날에 논의되는 주제들을 이미 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에바 폰 레데커오카 마리두 인문학자의 글 덕분에 다시금 엷어진 의식을 환기하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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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 폴리틱스 -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
프란스 드 발 지음, 장대익.황상익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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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등동물인 영장류 침팬지에 대한 행동연구과정에서 발견된 이들의 사회적 행동 패턴을 통해 정치적 행위의 기원을 탐구한 저작이다. 20여 마리의 암수 침팬지로 구성된 하나의 집단을 가능한 자연적 조건에서의 자발적 행동을 6년여에 걸친 관찰 속에서 그들의 행동을 해석한 동물 행동 연구이다. 사실 동물행동학(ethology)의 결과를 인간의 행위 해석에 전용하는 것에 대한 반대론이 만만찮다. 일례로 침팬지가 갈등 후에 적수 사이에 이뤄지는 접촉 행위를 화해(reconcilation)’와 같은 인간 용어로 사용하는 것에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거나, 인간에게 이(齒牙)가 동물에겐 이빨이어야 하고, 키스는 입과 입의 접촉일 뿐이며, 얼굴은 주둥이 부위라는 중립적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극렬하게 싸운 뒤 두 적수가 첫 접촉을 통해 털고르기를 해주며 입을 맞추고 이후 평화로운 관계를 갖게 된다면, 이는 곧 화해가 아닌가? 이것을 인간 중심주의의 위엄을 지킨답시고 싸움을 한 뒤의 첫 접촉이라 고 길게 표현하는 것만이 정당한 것인가? 저자 프란스 드 발 머리를 모래에 처박아서 되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얄팍한 수의 기만이 아니냐고. 물론 침팬지의 어떤 행위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할 때 옳거나 그른 해석이 있을 수 있으며, 이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차별화된 선입견을 사전에 개입시킬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권력투쟁의 동물적 기원이라는 부제를 하고 있듯, 성장한 네 마리의 수놈과 열아홉 마리의 성숙한 암놈, 그 새끼들 각각의 개성과 상호작용의 여러 패턴, 몸짓이나 음성과 같은 의사소통 신호들을 식별하여 일관된 해석을 함으로써 이들 사회의 안정과 안녕의 균형유지와 경쟁행위를 통한 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일련의 행위들을 추적 묘사하여, 인류 정치 기원의 형태를 발견해 내고 있다. 7개 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는데, 개성, 권력교체, 불안한 안정, 성적 특권, 사회생활의 원리, 정치의 기원이 그것인데, 수컷과 암컷 집단의 각 개체들을 마치 졸업앨범 사진처럼 증명사진 크기로 이름과 함께 그 모습이 실려있는 개성(個性)’에 대한 장은 그야말로 이 관찰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토대일 것 같다. 저자는 자신 있는’, ‘자긍심 높은‘, ’계산이 빠른과 같은 주관적 인상을 과감하게 침팬지의 개성에 반영하여 굳이 인간 행위를 비교할 필요조차 없게 만들어버린다.

 

본문 80~81쪽에서


주요 개체 하나 마다 그네들의 개성을 설명하는데, ‘여장부 마마로 불리는 침팬지부터 설명이 시작된다. 가장 나이 많은 암놈으로 눈빛에 큰 힘이 담겨있으며, 특유의 예리하면서도 모든 걸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공동체 안에 최대의 존경을 받고 있는 개체이다. 그리고 성장한 수컷 클럽을 이루는 이에룬, 라윗, 니키, 단디, 네 마리의 수놈 각 개체에 대한 독특한 개성들이 이어지는데, 천성적으로 계산이 빠르고, 신경질적이며 이해관계에 민감한” ‘이에룬부터, 놀기 좋아하고 장난기 많으며 생기발랄한 라윗이 이어지고, 정말 독특한 암놈인 파위스트의 암놈에 적대적인 성격과 그 어떤 성적 접촉도 거부하는 친()수컷 행동을 보이는 개체의 설명으로 이어진다.

 

아마 저자와 연구진은 이 파위스트라는 암놈을 가장 싫어했던 모양인데, 위선적이고 비열함에서 단연 독보적 행태를 보였던 모양이다. 수놈이 암놈들을 공격하면 다른 암놈들은 서로 힘을 합치는 데 반해 파위스트는 실제로 수놈들에 협력하여 암놈을 공격하는, 정말 기이한 성격의 암놈이다. 스물세 마리가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개성들의 존재로서 그들의 이후 합종연횡의 배경이 된다. 마치 인간 사회의 여느 소집단의 인간 구성원들의 개인적 특성를 묘사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그 유사성의 매혹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 이 책은 단연 훔쳐보기의 가장 멋들어진 재미로 가득해서 일견 사회적, 정치적 상호작용의 발견과 같은 짐짓 무거운 주제를 쉽게 이해가능하게 해준다.

 

권력교체의 장은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될 것 같은데, 사실 침팬지라는 영장류에 대한 동물로서의 편견이 여지없이 전복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놀라운 사회적 조작 사례가 목격되고, 고도로 지능적인 '목적성을 가지고 생각하는(think purposefully)'능력에 대한 행동 특징들을 입증한다. 특히 높은 수준의 협력을 달성하기 위한 공동연대의 형성과, 경쟁적 경향성을 극복하고 의식화함으로써 전략적 연대를 취하는가 하면, 아주 교묘한 삼각관계를 통해 소위 최소승리의 연합이라는 인간들이 즐겨 쓰는 합리적 행동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최고 권력자의 힘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인지시키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예측과 계획능력을 이들이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장을 읽고 있다 보면 불현 듯 진화한 유인원 리더 '프록시무스'가 활약하는 혹성탈출이라는 영화 장면들을 떠 올리게 된다. 침팬지라는 동물의 우두머리는 육체적 힘이 가장 센 놈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깨지는데, 지도자로서의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연합에 바탕을 둔 서열구조의 전제 하에 개체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당연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두 수놈의 리더자리를 놓은 싸움의 승패 결과가 그들의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싸움의 결과를 결정한다는 집단 구성원 전체에 대한 세심한 사회적 관찰을 통한 선행적 이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리더인 이에룬을 전복시키고 권좌에 오르기 위한 라윗의 수개월에 걸친 사회적 책략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하는 털고르기, 입의 접촉, 옆에 앉아있기, 함께 걷기, 지원하기 등 그 자체로는 하잘 것 없어 보이는 행동 모두가 복잡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행위임을 알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어떤 행동이 어떤 결과를 야기할 것인지를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도 성취 가능한 목표에 효과적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꾀로 상대방을 이기고, 속임수로 전략을 감지하고, 상호이익이 되는 타협을 이루며 자신의 삶에 이득이 되는 사회적 연대를 증진시키기 위한 필요로서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지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권좌를 차지했다고 리더의 권한이 연속되는 것이 아니다. 1인자였던 이에룬이 2인자였던 라윗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은 그가 라윗과 니키, 두 수놈의 구성원에 대한 공격을 효과적으로 지켜내지 못한 이유 때문이다. 해서 새롭게 리더가 된 라윗은 패자의 지원자가 됨으로써 질게 뻔한 놈의 편을 들어 평화와 안녕의 투사로 자신을 확립한다. 여기서 1인자의 보안관 역할은 호의(好意)라기보다는 의무(義務)에 가까운 행위이며, 이를 실천하지 못하면 그 권좌는 위태로워졌음을 보여준다.

 

우열관계는 계속 증명되고 확인받아야만 했는데, 확립된 서열관계는 자동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윗, 니키, 이에룬의 삼각구도는 늘 불안정적으로 흔들렸으며, 절대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한 상호위협의 과시가 빈번하게 자행됨으로써 그 위기상태를 노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니키는 이에룬의 라윗과의 연대를 방해하고 두 수놈을 분리함으로써 위협을 증대시켜 이에룬을 라윗으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신체적 힘의 우위로 라윗을 굴복시키고 권좌에 오른다. 그러나 구성원은 니키의 폭력적 성향 때문에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

 


아마 내겐 정말 놀라울 만큼 교활한 행위를 접하게 되었는데, 몰락하여 3인자 자리로 물러나게 된 이에룬의 전략이다. 2인자가 된 라윗과 접촉 할 수 있는 문을 열어둔 채, 1인자인 니키와 은연히 접촉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니키의 지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구성원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니키의 공백을 자신이 채워주며, 실질적 권력을 공유하는 것이다. 니키는 라윗의 도전에 대해 이에룬과 공동전선을 결성해 방어하며, 구성원에 대한 반발까지 통제하며 리더자리를 수호하는 것이고, 이에룬은 그가 결여한 부분을 자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각인시킴으로써 1인자에 준하는 권력을 누리는 것이다. 이 정교하고 치밀한 정치적 전략에서 오늘 인간들의 정치적 술책의 역사적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공유는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설파한 논리에서도 드러난다. 귀족의 원조를 받아 군주권을 얻는 것은 평민들의 지원을 받아 군주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귀족들은 군주와 동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군주는 원하는 대로 그들을 지배하거나 통제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귀족인 이에룬이나 라윗의 원조로 권좌를 차지하면 구성원들의 지원을 받아 리더가 된 것과 달리 그들을 온전히 통제, 지배할 수 없다는 이 말이 니키 권좌의 고질적이고 태생적 불완전성이다. 민주주의 어렴풋한 그림자를 보게 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책은 이렇듯 침팬지들의 행동특성과 권력투쟁의 과정, 그들의 사회생활을 관찰함으로써 침팬지 사회의 정치적 활동 요소를 추출해내고 있는데, ‘서열은 승인되어만 하며 불명확해지면 권력투쟁이 벌어지는양상으로부터 공식화(公式化)’의 중요성과 권력상승을 위한 기회주의적 유형의 개입인 연합’, 사회적 연대성과 상호간 연합과 같은 지지기반의 확립인 균형’, 그리고 안정과 사회적 호의의 교환, 합리적 전략, 특권, 술수 등을 열거하고 있다. 결국 유인원인 침팬지들의 사회생활을 통해 우리 인간의 정치적 활동은 진화적 유산의 일부처럼 여겨지며, 정치의 기원은 이처럼 석기 시대 원시 인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정치를 이처럼 영향력있는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사회적 술수라고 정의한다면 정치의 기원은 이처럼 인류 역사보다 오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정치적 교훈같은 것을 건져낼 수 있는데, 그 첫째는 모든 것을 독점하려는 리더는 곧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다, 착취적 연합과 기회주의라는 속물 정치만을 지향하는 자의 권력은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긍정적이었건 부정적이었건 호혜성은 중대한 정치적 필수 행위라는 것인데, 티보(J. Thibaut)와 켈리(H. Kelly가 저술한 집단의 사회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개인은 보상과 대가의 측면에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때에만 자발적으로 관계를 맺고 유지한다.” 고 했듯, 호혜성의 원리는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기억돼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작용은 일종의 손익거래임을 정치가 망각하는 순간 권력은 몰락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작금의 검찰 독재 권력이 정권을 차지하기 무섭게 이 상호 호혜성을 부정하고 소수 기득권자들을 위한 부의 집중 배치에 전념함으로써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것과 같을 것이다. 권력의 균형은 매일매일 시험되며 그것이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도전이 일어나고 새로운 균형이 찾아온다고 한다. (4.10) 이 균형을 위한 시도가 과연 어떤 결과를 보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정치적 기원의 교훈으로는 아마 놀라운 결과로 드러날 것 같다.

 

네덜란드 아른험 소재 뷔르허스 동물원(Burgers Zoo) 침팬지 대규모 사육장에서 펼쳐지는 파란만장한 침팬지들의 정치적 행동 양태를 보고 있노라면 욕망이 난무하는 한 편의 인간 정치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 정도다. 대중적 과학 연구 논문이지만 반전을 거듭하는 여느 미스터리 소설 뺨치는 권력투쟁의 스토리가 어쩌면 이 책 입소문의 본질일 것만 같다. 침팬지들의 행동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인간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통찰을 전해준다. 누가 정치를 인간만의 영역이라 말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인간이란 말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닌 말이 되었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를 다시 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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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성비판』 강의 원전디딤돌 2
이수영 지음 / 북튜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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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형식적 윤리명령’, 그 신성한 도덕법칙의 의무를 사유하며>

 


"일단 칸트를 견뎌낼 수 있다면 그 어떤 철학의 가시밭길도 걸을 수 있으리라. 

칸트는 통과의례다."  -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진은영, 그린비


칸트가 땡기는 시절이다. 특히 도덕법칙이 경험주의적 광신에 찌들거나,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도덕적으로 위장된 행위가 이즈음처럼 난무할 때면 더욱 내 심난한 도덕 감정을 정화하기위해 칸트를, 특히 실천이성비판을 펼쳐든다. 엄격하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온 도덕철학의 정수에 집중하면서 현상적 대상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욕망이나 애착 등 내게 유리한 정념적 질료를 윤리의 기초로 삼으려는 경험주의적 도덕의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반성한다. (*실천이성비판은 도덕법칙에 대한 세심한 논의를 한 저술이다.)

 

실천이성비판을 대표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은 정언명령이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 하라.” (A-54),

이를 순수실천이성의 원칙이라고도 부른다. 이 정언명령에는 어떠한 행위의 내용도 없으며, 그저 형식만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고, 그 형식의 내용은 보편성임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보편성의 형식을 확보하지 않으면 어떤 행위도 윤리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천명이다. 내용이 비워져 있고 오직 절차와 형식만 존재하는 이것이 칸트의 윤리적 명령인 것이다.

 

보편적 수립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작동하여야 한다는 것은 개인의 호불호나 정념의 지배를 받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무쌍한 것을 원인으로 해서 행위 하면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장 흔한 예로 행복이 과연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가를 파악해보면, 우선 행복이란 이성적 인간의 현존에 부단히 수반하는 쾌적한 삶에 대한 의식이라 정의할 수 있다. 즉 행복이 도덕법칙을 행하는 의지의 근거로서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가이다. 행복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표상이 인간 개체에게 얼마만큼의 만족을 줄 수 있는가라는 양적 문제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개체마다 동일한 표상에 대해서도 그 만족의 정도는 모두 다를 것이다. 결국 행복은 보편성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주관적 규정 근거들에 따라 무수한 양태가 존재하는 것은 결코 도덕법칙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보편적 법칙의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현상계에서 감각 또는 지각할 수 있는 표상을 질료라 부르는데, 이러한 것들은 의지의 원인성에 의해 무엇이 벌어지는가에 따라 천태만상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정언명령에서 보았듯 순수 이성의 실천법칙은 이러한 원인성에 개의치 않고 오로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shall), 혹은 명령(imperative)의 형태를 지니고, 욕구나 쾌나 불쾌와 같은 정념적 조건들로부터 해방된 순전한 형식이다. 이를 순전한 법칙 수립적 형식이라하며, 이 형식만이 의지의 충분한 근거임을 전제로 하는 실천 법칙만이 도덕법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자유(의지)’에 대한 깨달음이 생겨난다. 의지가 오직 형식에 의해서만 작동한다면 자연현상인 자연인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말이며, 이는 다시 말해 자연의 인과성으로부터 자유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는 말이다. 의지는 형식의 지배를 받을 때만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자유로운 의지만이 도덕 법칙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자유의지가 중요한 이유는 만일 어떠한 도덕법칙의 실천에 이 자유가 없다면 사실 도덕법칙이란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상해한 자가 자유의지 없이 그저 자연의 필연성에 의해 저지른 것이라면 어떻게 징벌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의 자유란 소위 심리적이거나 경험적 인식 가능한 그런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인과에 종속된 자연 현상계 너머의 예지계에서만 가능한 선험적 자유를 뜻한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이 자유를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는 없다. 이 자유는 도덕법칙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을 작동인(作動因)이다.

 

하나의 실험사고를 해보면, Y라는 최고 권력자가 권력의 독점에 방해가 되는 정적을 제거하고 싶어 B라는 누군가에게 그 정적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을 수 있는 증언만 해준다면 B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위협하였다고 하자. B는 고뇌하기 시작할 것인데,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무언가가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인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경향성과 동시에 거짓말을 해서까지 구차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도덕법칙이 내면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고뇌가 도덕법칙에 의한 자유의 표현이다. 우리는 자유를 먼저 경험할 수 없으며, 도덕법칙을 통해서만 자유로운 상황에 놓인다. 자유란 언제나 우리가 도덕법칙에 놓여 고뇌에 처했을 때 비로소 작동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해석을 하자면, 어떤 인간이 이와 같은 도덕법칙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번뇌하지 않는다면 그 인간에게는 자유가 부재한, 즉 자연적 인과성에 종속된 기계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더 끌고나가기 전에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준칙과 법칙을 구별하여야 하는데,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타당한 것으로 인식되는 객관성을 실천 법칙(laws)’이라 하며, 특정한 주체의 의지만을 규정하는 원칙을 준칙(maxims)’이라 한다. 라는 개인의 정념적이거나 경향성에 의해 촉발된 의지는 준칙이어서, 이것은 수시로 법칙들과 충돌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행복은 부를 쌓는 것을 준칙으로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이 준칙은 무수한 타자들과 극한의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극단적으로는 전쟁을 낳기까지 한다.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는 실천 법칙과 충돌을 일으킨다. 즉 준칙이란 개체들의 특수성에 의거한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불화와 폭력을 낳는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 반례, 최악의 상충과 의도의 완전한 절멸로 이어진다. 칸트가 왜 형식만이 순전한 도덕 법칙을 위한 의지의 근거라 주장했는지의 일례 일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인간 개체는 개인적 준칙을 수립할 때 이미 내면에 그에 대한 보편화 작업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행위를 해도 좋을까?’하는 반성이 개입되지 않은 그 어떤 준칙의 채택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이미 선험적 보편성과 대조하는 작업을 ()의식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경험을 우리들은 모두 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 의지 앞에 일종의 타자처럼 나타난 우리를 괴롭히는 무자비한 타자처럼 나타나 그 행위를 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정언명령이다. 물론 우리는 최고의 예지자(절대자, )처럼 일체의 정념성 없는 존재일 수 없기에 온갖 필요 욕구들과 감성적 동인(動因)에 의해 자기 합리화로 준칙을 정당화하곤 한다. 우리 인간은 신성한 의지만으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기에 도덕법칙은 정언적으로 명령으로 강제하는 것일 게다.

 


이제 칸트를 다시 꺼집어내 읽고자 한 의도에 도달한 것 같다. 자유로운 의지란 도덕법칙만을 의지의 의무로 간주하는 사태를 가리킨다. 우리는 도덕법칙 앞에서 강요와 의무 아래 있게 된다. 앞선 사고 실험의 예처럼 정념적으로, 질료로부터 촉발된 의지는 실천 이성의 저항 앞에 부딪친다. 실천 이성, 도덕법칙은 모든 정념을 일소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때 인간 개체들은 어떤 의무감과 숙명의 마주함을 회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실천이성의 법칙인 보편성을 갖는 것처럼 속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특히 자기 행복의 원리가 윤리성의 원칙과 상충할 때 인간은 기만과 위선을 자행한다. 칸트의 윤리학은 지극히 엄격한 도덕철학이라 말했다. 도덕적인 것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動機)의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때문에 법칙에 맞아도 도덕적이지 않은 경우 비윤리적이라 한다.

 

칸트의 결과적 도덕이 아닌 동기의 도덕은 오늘날 매우 중대한 시사점을 던진다. 바로 도덕의 오용과 남용이다. 특히 정치사회의 현장에서 이용되는 도덕법칙은 그 형식에 있어 보편성과 정언적 형태를 띠고 도덕법칙의 합법성으로 이면의 동기를 감춘다. 그래서 비윤리적이라는 조롱과 혐오를 면치 못한다. 이들 대부분은 일종의 인정요구인 자신의 인상을 좋도록 꾸며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동기를 지닌 비윤리성 뒤에 숨어 도덕법칙을 말한다. 이를테면 상대를 향해 도덕적 수치를 모르는 몰염치라고 비아냥대며, ‘검찰에 기소된 자가 어떻게 선거에 출마할 수 있나?’라고 공격한다. 거친 욕설과 조롱의 언어에 도덕성을 입혀 마치 자신은 높은 도덕적 자질을 가지고 있는 듯 행세하는 것이다. 칸트는 동기에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것은 결코 도덕법칙이 아니라며, 특정한 경향성, 즉 욕망이나 기호에 대한 애착을 설명한다.

 

실천이성이 다루는 대상과 관련된 문제란 행위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차원의 질문이며, 실천 이성의 대상들에 대한 판별은 행위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가치를 따지는 작업이라 했다. 우선 오늘날 그랜드스탠딩(grandstanding)이라 명명된 도덕의 정치적 오남용 이면에 있는 동기의 경향성들을 살펴보면, 자기인정이 되었건 그 무엇이 되었건 이들 경향성들의 만족이라는 이기심인 자기애와 자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순수실천이성은 도덕법칙과 일치하는 조건에 국한된 자기애 이외에는 단절시켜버린다. 그리고 자만은 아예 타도해 버린다. 도덕법칙과 합치하기 이전에 생긴 모든 요구들은 법칙 수립의 의지 근거의 권한이 없는 까닭이다. 도덕법칙을 위해하는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경향성의 동기다. 칸트는 이같은 모든 참칭(僭稱)은 법칙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매우 중요한 말을 한다. 윤리법칙과 합치하는 마음씨에 대한 확신이 모든 인격가치의 첫째 조건이라고. 도덕법칙이란 자만을 약화시키고 타도함으로써 우리를 겸허하도록 하는 존경(respect)’의 대상이라는 적극적 감정의 근거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존경은 누군가를 존경한다고 할 때의 그런 경험적 존경이 아니다. 이는 선험적으로 인식되고 그 필연성을 통찰할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라 말한다. 이것은 오로지 이성의 그것도 실천적 순수이성의 지시 명령 편에만 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라고. 도덕법칙은 주관적인 존경(외경)의 근거이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자신의 감성적 성향을 도덕법칙과 비교하게 하면서 겸허하게 만드는 그런 표상인 것이다. 동기가 불순한 실천 법칙은 바로 이러한 도덕법칙에 대한 외경이 부재하기에 겸허를 찾아 볼 수 없다. 도덕 감정이란 법칙이 저항을 제거함으로써 그 법칙이라는 원인성을 적극적으로 촉진하는 그것이다. 결국 법칙에 대한 존경의 감정은 윤리를 위한 동기가 아니라 윤리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아마 정치 현장의 난무하는 추악한 도덕적 위선의 언어는 이러한 동기의 비윤리성과 아울러 도덕법칙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뜻도 될 것이다.

 

칸트가 도덕법칙 동기의 윤리성을 강조한 이유는 이러한 도덕적 기만인 남용보다는 도덕적 광신을 예방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욱 컸던 것 같다. 도덕법칙의 정신은 법칙에 복종하는 마음씨에 있으며, 동기를 법칙에 두지 않고, 자신의 정념에 두면서 도덕적 행위를 모방할 때 광신이 자란다.”고 지적했다. 작금의 검찰권력은 자신들의 도덕적 무오류를 주장하면서 그 어떤 지시명령도 자신들에게는 불필요하다며 선량함을 선전한다. 칸트는 바로 이 순간 그들은 도덕법칙과 책무를 망각하는 것이라며, “의무의 법칙은 지시 명령하는 것이지 우리의 성향에 맞을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우리의 임의에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며, 이것이야말로 순수이성이 인간성에 부여한 한계를 벗어난 도덕적 광신이라 질책한다. 도덕적 동기를 법칙이외의 다른 것에 두는 한 그것은 결단코 도덕법칙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지금의 정치권력의 혐오스러움이 있는 것이다.

 

"적의 독단과 궤변보다는 자신의 가슴 안에 숨어있는 

독단과 궤변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칸트


칸트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을 우리 인간은 겉으로 보류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느끼는 것 자체를 막을 수 없는 것이라 말했다. 따라서 이 존경의 독특한 감정은 부정하려해도 할 수 없는 고매한 공물과 같은 것이라 비유한다. 사실 도덕법칙에 대한 이 존경은 욕망과 정념의 동물인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어서 하시라도 덜어버리게 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없나하고 찾아다닌다고 한다. 즉 윤리적 본보기로 인해 우리가 감수한 겸허에 대해 보상을 해줄 흠을 늘 찾아 나선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물로부터 작은 오점이 발견되었을 때 무수히 달려들어 한 인간과 그 가족을 도륙하다시피 공격해 댄 사실이 있다.(실정법을 떠나 도덕의 문제로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엄격하게 꾸짖는 가혹한 도덕법칙의 존경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욕망을 볼 수 있다. 엄혹한 도덕법칙의 짐으로부터의 시련을 타자에게 투사해버림으로써 마치 자신의 도덕성이 나아질 수 있다는 듯, 그렇게 어리석은 것이 우리들 인간 군상이다. 한 술 더 떠 도덕법칙을 친근한 경향성 정도로 깎아내리거나 한낱 지시규정 정도로 취급해버리는 짓거리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은 가장 나쁜 비윤리적 행위를 넘어 도덕법칙을 허영 프로젝트로 격하시켜 사회에 해악과 손실을 야기하는 위험사회의 신호이다. 비근한 예가 공정과 상식이라는 도덕적 언어를 표면에 내세우고는 가장 더러운 행위를 그치지 않음으로써 이 도덕적 언어가 더 이상 도덕이기를 멈추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네가 하고자 하는 행위가 네 자신이 속한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면 과연

그 행위를 네 의지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네 자신에게 물어보라.” (A122)

 

이 문장은 예지계에 속한 도덕법칙을 감각계인 인간의 지성과 어떻게 연결 실천할 수 있는가라는 조금은 어려운 문제의 해법으로 칸트가 도입한 도덕법칙의 범형(type)'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해보자. 사기 치는 것이 자연의 인과성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라 해도 이 행위가 정말 해도 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과연 그것이 상식적이라 하겠는가라는 물음이다. 당연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실천 영역에서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기에 우리는 이미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장착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충분히 신성하지는 못해도 인격에 있어서는 신성한 존재들이다. 우리 인간은 자유 의지의 힘에 의해 신성한 도덕법칙의 주체가 된다. 인격성이란 특정한 존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정도의 이성을 소유한 인간 모두에 있다. 그래서 자신을 심사하는 내적 시선 앞에 부끄럽지 않았다는 의식만으로도 우리들은 스스로를 다독이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는 것은 매 한가지라 한다. 그렇지 않다. 그저 사는 것과는 다른 도덕법칙에 대한 의무의 존경에 입각한 삶이 있는 법이다.

 

그 어느 때 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요구되는 시절이며, 이러한 겸허와 존경이 모든 인간들에 내면화되는 성숙한 도덕성의 사회를 향해 우리는 한 걸음 고양되어야 할 지점에 서 있다. 그 전환의 국면이다. 여기서 주저하면 아마 영원한 도덕적 퇴락의 시대가 가져오는 억압과 폭력의 오랜 터널을 관통해야 할 것이다. 칸트의 이성비판은 우리네 삶과 동떨어진 낯선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이성의 능력과 활동조건과 그 한계를 규정하고 이성의 인식 범위와 이성의 지배 속 우리 의지의 자율성을 탐사하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작업이다. 가까이 두고 지성과 인식능력, 의지에 대한 반성의 요구가 있을 때면 그의 사유를 따라가며 함께 생각해보는 것은 좋은 위로와 성장의 시간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

- 칸트, 실천이성 비판 마지막 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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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멜모스·아듀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파롤앤(PAROLE&)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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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사건 재현의 한계를 기억과 서사측면에서 성찰한 오카 마리의 저술 복간과 때를 같이해 리얼리티 문학에 비판적 시선을 던졌던 발자크의 대표적 두 작품이 번역 출간되었다. <회개한 멜모스><아듀> 두 작품은 발자크의 인간극에 속하는 세 개의 하위 연구(풍속, 철학, 분석연구)’ <철학연구>에 속하는 작품으로, 환상과 기억, 현실의 관계성과 그 재현 ()가능성에 대한 고찰을 거의 직접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소설이다. 오카 마리는 기억서사의 한계를 논의하는 한 축으로 발자크의 <아듀>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쟁이라는 인간의 가장 잔혹한 폭력행위와 그 폭력적 사건 내에 존재했던 인간 고통의 기억 문제를 다룬다. 이것은 재현성의 문제로 부상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물론 특히 역사 서술에 있어 극한적 대립을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아듀를 읽게 된 동기다.

 

1. 소설, <아듀(Adieu)>에 대해

 

발자크의 소설 모두가 인간극이라는 인간에 대한 전반적 통찰인 까닭에 그는 인간심리에 대해서는 여느 과학적 연구를 앞서고 있다고까지 여겨진다. 때문에 읽는 사람들의 집중을 쥐어 채는 데 있어 달관의 경지를 보인다. 작품 도입부에는 필리프 드 쉬시 대령과 친구인 달봉 후작이 실패한 사냥을 거두고 이동 수단 하나 없이 지친 몸으로 낯선 황폐한 건물을 발견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단지 건물과 주변 풍경의 묘사에서 마주하게 될 사건이 비유의 언어로 촘촘하게 박혀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어떤 인위적인 손질도 닿지 않은 (...) 야생의 은둔지에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세상의 풍문이 이 안식처에 다가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아름드리나무들발치에 서면 인간사 희로애락은 가뭇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100쪽 에서

 

야생’, ‘막아주는 역할’, ‘사라진 희로애락등의 표현은 등장인물들의 속성이나 전개될 사건의 내용을 이미 함축 예시한다. 어쨌든 이러한 폐허의 풍경들이 매혹적 시정(詩情)과 더불어 몽환적 관념을 독자가 공유하게 하며 텍스트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특히 달봉 후작은 일찌감치 저주의 시선으로 바뀌어 그 집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사는 궁전이로군.”이라며 망령들의 세계에 속한 미지의 여인이 스쳐지나갔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윽고 그 미지의 여인은 두 남자와 얼굴이 마주치자 달려가며 아듀!”라 말하고 사라져간다.

 

이때 필리프 대령은 풀밭위에 죽은 사람처럼 뻗어버리는데, 그는 패퇴한 전쟁의 퇴각 길에서 이별하고 이미 죽었다고 여긴 연인을 상기했음에 분명한 충격을 상징하는 장면일 것이다. 병석에 누운 필리프에게 달봉은 그녀가 실성한 방디에르 백작부인이라 전한다. 여기까지가 작품의 주요 도입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는 영화감독 스필버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시작 장면을 가득 채운 전쟁터의 리얼한 재현을 통해 전쟁의 폭력성을 노출하였듯이 발자크는 작품의 중간에 나폴레옹 군의 러시아에 패퇴한 전쟁 중 하나인 베레지나 강 도하 전투를 재현한다.

 

허기와 갈증과 피곤과 수마로 빈사 상태에 빠진 병사들 (...) 최악의 지경까지 몰린 그 무리에 끝도 없이 떨어지는 포탄들은 그저 불편함이 또 하나 추가되는 것일 뿐이었다.며 극한 상황에서 눈 덮인 광막한 허허벌판에 자신들의 목숨을 잔혹한 무관심에 맡긴 채 아무 곳이나 누워 잠들어 죽음으로 돌진하는 3만 명의 불쌍한 군인들의 전경이 흐른다.  제아무리 전쟁의 참혹성을 사실에 근접하도록 재현하더라도 손가락 사이로 무수한 사실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발자크는 리얼리티한 재현이란 것의 한 실례를 보여주려 한 것이라 여겨지는데, 대체 그것이 전쟁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적 반증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다의적 주제를 담고 있는데, 그 하나인 전쟁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후대의 사가들은 발자크의 베레지나 퇴각 장면의 묘사를 칭송한 것 같은데, 이는 작가의 의도와는 아마 상당히 동떨어진 이해였을 것이다.

 

방디에르 백작부인인 스테파니는 당시 필리프 드 쉬시 중령의 정부(情婦)였으며, 그녀는 남편인 방디에르 백작의 종군에 동행한 비방디에르(vivandiere)’였다. 이는 군인 남편을 따라 부대에서 세탁, 간호 업무를 지원하는 종군 아내를 이르는데, 프랑스는 20세기 초에 이 관행을 폐지하였다니 여성이 이러한 성적착취 대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불과 100년 전이었음을 시사한다. 손에 닿을 정도로 근접한 러시아군을 피해 도주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혹한의 강을 건너야 하고, 필리프는 연인을 위해 마차를 부수고 잔해들을 그러모아 뗏목을 만들지만 생존을 위해 몰려든 병사들로 인해 가까스로 방디에르 백작부부만 승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때 스테파니는 필리프에게 몸을 던지고 으스러지도록 껴안으며 입술을 맞추면서 아듀!”를 남기고 떠나지만, 남편은 도하(渡河)중 강물에 떨어져 죽고, 그녀는 러시아 군대에 2년 동안 끌려 다니면서 비루한 인간들의 노리개로 착취당한다. 전쟁이 끝나고 10여 년이 지난 스테파니가 실성한 사람이 되어 오직 본래의 뜻을 상실한 아듀만을 소리내는 이유는 이 같은 전쟁의 폭력성에 기인한다.

 

 

여자는 그 엄청난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이 충실하게 재현됨으로써 과거가 현실의 세계로 회귀하는 것을 차단, 철저하게 망각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었음을 신체가 자각했다는 의미이다. 오직 실성만이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것인데, ‘사건의 기억이란 그녀에겐 곧 폭력이며, 그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극한의 고통 그 자체임을 가리킨다. 소설은 이 폭력으로서의 사건을 통해 또 다른 주제를 역설하는데, 실성한 연인 스테파니를 전쟁 전 파리 무도회의 여왕이었던 바로 그 여인으로 돌리고자 하는 필리프의 욕망에 깃든 젠더(性化)의식에 대한 비판이다.

 


필리프는 그녀를 길들이기로 마음먹는데, 그것은 자기 정부의 본능에 대한 지배이며, 여성으로서의 복원에 대한 갈망이다. 필리프가 스테파니를 보호하고 있는 숙부인 의사에게 하는 말 속에 이러한 이기심이 드러난다. 그녀가 미쳤더라도 여자다움을 조금이나마 간직했다면 난 어떤 일이든 견뎠을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야만적이고, 심지어는 수치심도 모르는 그녀를 바라보자니,..”와 같이 지난날 자신의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서 아름다움을 간직하던 여성성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결국 스테파니를 죽이려 하지만 의사의 방해로 미수에 그치고 추방된다. 의사는 그를 신랄하게 꾸짖는데, 그러니까 당신에게는 오페라에나 나오는 그런 터무니없는 사랑이 필요했던 거군요.”라며 실성한 스테파니를 하나의 인간 존재로서가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필리프는 고아(高雅)한 여성으로서의 스테파니를 잃을 수 없는 것이고, 의사 몰래 베레지나 강을 도하 하기 위해 이별할 때의 장면을 위한 대규모 재현 작업에 돌입한다. 이로써 재현된 장면은 리얼리티에 대한 발자크의 냉혹한 비판 의지였던 것 같다. 필리프는 19세기판 스필버그로서 행위하는데, 실상에 가깝게 하기 위해 운하를 파고 폭약을 터뜨리고, 눈이 내려 벌판을 덮는 계절과 당시의 시간까지 정교하게 맞추는가하면, 복식과 병사들의 남루한 상태까지 그야말로 실감나게 형상화한 것이다. 스테파니를 잠에 취하게 한 후 마차에 태워 재현 장소로 달려가 그녀를 깨우고 준비된 뗏목을 두고 끔찍했던 진상의 재현 속에 빠뜨린다.

 

스테파니는 생생하게 되살아난 기억 속 현장에 자신을 옮겨놓고 필리프를 바라본다. 순간 아름다운 얼굴에 화색이 돌고, 눈부시게 빛나는 젊은 여자의 광채를 되찾는다. 재현된 그 리얼리티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육체를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여자는 드디어 말한다. ! 필리프 당신이군요.” 그리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축 늘어지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듀, 필리프. 당신을 사랑해, 아듀!”, 여자는 필리프 대령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다. 그녀는 말 할 수 없어 망각으로 지워버렸던 사건이 의식의 표면에 이르는 순간 죽은 것인데, 끝을 알 수 없는 사건의 흔적인 아듀라는 말만 남은 폭력적 사건으로서 기억은 완결되지 않는 채 하나의 정신적 외상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전이시키곤 소설은 종결된다.

 

이 소설은 몇 가지 고발을 하고 있는 것인데, 물론 전쟁의 폭력성은 주된 한 가지이고, 두 번째는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비판이다. 온전한 재현의 확실성을 주장하는 리얼리티란 것이 엄청난 틈새, 사건 자체가 지니고 있는 정작 중대한 사실성들이 다 빠져나가고, 그럴듯함만 남겨진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여성의 젠더화에 은폐된 남성적 욕망의 이기주의적 시선에 대한 비판이다. 결국 기억의 서사를 표상하는 문제에 있어 발자크는 재현의 과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것이고, 또한 그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을 내포하고 있음에 대한 사유의 촉구였을 것 같다. 리얼리티라는 사실성 재현의 욕망에는 필리프의 그것처럼 항시 불순한 동기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경종의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2. 소설 <회개한 멜모스>에 대해

 

이 작품은 몇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어떤 환유(換喩)로서의 사유를 제안하는 것으로 갈음하려 한다. 발자크는 그의 인간극에 대한 보조적 참고서로서 일련의 생리학 시리즈를 썼다. 이 작품의 도입부는 이들 중 <공무원 생리학>을 연상시키는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그 신랄함이 가히 현대적이어서 비판의 대상 주체만을 바꾸면 그 의미가 손상됨 없이 그대로 전해질 것만 같다. 소설의 첫 문장부터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데 다음과 같다.

 

식물계에서 화초재배업자가 (...) 번식시킬 수 없는 희귀한 잡종을 온실 교배를 통해

새로 만들어내듯이, 사회계에도 문명이 빚어내는 희한한 인간종이 하나 있다.”

-회개한 멜모스, 첫 문장에서

 

희귀한 잡종이자 희한한 인간종에 대한 구체적 인물에 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지는데, 악행의 손으로 자잘하게 가지치기되면서 (...) 참한 아내와 성가신 아이들에 둘러싸여 나무처럼 자란다.”, 한마디로 악행의 손길에서 나무처럼 자라는 불의하고 부도덕한 관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 인간종을 떠올려보라며, 덫에 갇힌 생쥐를 앞에 둔 고양이처럼 항상 돈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며, 선박 조타실에 못 박혀 있는 항해사보다도 덜 움직이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고, 왜소하다고 할 만한 몸집을 가진피조물이다. 왠지 저절로 온갖 도덕적 규범으로 지탄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는가? 이러한 신랄한 언어로 악덕에 대한 대담성과 법망을 빠져나갈 교묘한 능력까지 갖춘 패덕한 인간을 사회적 생리에 만연한 덕에 출현한 생태계로 그려나간다. 이것은 소설의 사건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예비고찰로서 써 진 것인데, 특히 폐쇄된 공적 권력 조직에 일찌감치 소집된 젊은이들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어떻게 부패하며 재능을 소진하는 가를 오늘 한국의 정치검찰과 비교하며 읽어나가면 꽤나 흥미로운 읽기가 될 것 같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문명의 진정한 상처를 미리 내다볼 만큼 뛰어난 통찰력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라고. 허튼 소리가 아니라 정말 믿어도 될 만큼 흥미로운 작품이다. 글자 조합에 절대 누설될 수 없는 비밀이 담겨있고. 단조(鍛造) 흔적이 역력한 캐비닛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금융공무원이다. 금융공무원의 자리에 어떤 부패하거나 불의한 인간 무리를 대입해도 의미는 통할 것이다.  ‘멜로스는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를 연상시키는 악마에 가깝지만 발자크는 환상론자가 아니기에 현실 감각으로 환상을 끌어내린다. 사실주의 비판자이기도 했지만 환상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자로서의 관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의식이나 줄거리는 독서의 흥미를 위해 남겨놓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아무튼 꽤나 흥미를 돋우는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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