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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밍고 섬의 약혼 ㅣ 서문문고 174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박종서 옮김 / 서문당 / 2000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00년 세기 전환기의 독일 작가인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오래된 소설작품을 읽도록 견인한 것은 두 여성 인문학자의 글 속에 등장한 단편 「칠레의 지진」으로 인해서이다. 각기 기억과 수치심 문제의 논의 중 인용되었는데, 인간의 비이성성과 자기 합리화의 기만성에 내재된 폭력성의 사유였다. 생존 시 빛을 보지 못한 작가였으나, 그 내막은 정부 시책 비판자로서 주류사회에서 배제되어 그의 출판이 불가능했던 탓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34년의 짧은 생애를 산 이 천재 작가의 비판적 사유는 실러나 괴테를 넘어서는 가히 현대적 인식능력에도 손색이 없는 작품을 써냈음의 뒤늦은 발굴이다.
200쪽 남짓의 이 작은 문고판에는 세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있는데, 어쩌면 그의 단편작품들 중 그야말로 엑기스라 해도 될 것이다. 작가의 자살을 예고한 작품으로서 추정되기도 하는 표제작 「성 도밍고 섬의 약혼」은 물론, 폭력적 기억의 부정으로 빈번하게 인용되는 「칠레의 지진」과 성(性)문학의 선구적 작품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O 후작 부인」이 그것이다.
1. 성 도밍고 섬의 약혼
백인들의 농장에서 노예 노동을 하던 흑인들에게도 프랑스혁명의 자유에 대한 여파는 그들의 의식을 깨워댔던 모양이다. 작품의 배경은 대략 1803년경으로 추정되는데, 오랜 억압의 사슬을 끊고 흑인들의 반란이 거대한 폭력적 봉기가 되어 성 도밍고 섬에 피의 바람을 몰고 온다. 자유 신분으로 거대한 농장을 맡기고 유산까지 줄 정도로 백인 농장주에게 신뢰를 받던 흑인 ‘콩고 호앙고’는 주인을 살해하고 농장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는 흑인 반란군에게 무기와 재원을 공급하고, 백인들을 함정으로 몰아 학살하는 주체가 된다.
자신의 집이 된 전 농장주의 거처를 흑백혼혈인 늙은 아내와 열다섯 살 딸을 이용해 피난하거나 도주하는 백인들을 꾀어 그들의 소유물을 약탈하고 참살하는 짓을 반복한다. 이때 스위스 인으로 친척 일가의 피난을 주도하던 프랑스군 장교인 ‘구스타프 폰 데어리트’는 호앙고의 집에 음식거리와 숙소의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든다. 호앙고의 아내인 늙은 노파 바베칸은 내심 그를 잡아두고, 그 일가족까지 도륙할 기회로 삼으려 한다. 딸 토니를 이용하여 유혹하여 붙잡아두고 호앙고가 다시 집에 올 때 넘기려 계획하는 것인데, 혼혈의 미색을 지닌 토니는 구스타프와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약혼의 언약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바베칸은 딸의 변심을 의심하고, 호앙고가 들이 닥쳤을 때 토니의 배신으로 구스타프가 도주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방에 이르지만 토니는 이미 도주할 통로가 막혔음을 예견하고 구스타프를 몪어 배신의 행위를 은폐함과 동시에 구스타프의 죽음을 지연시킨다. 그리곤 몰래 홀로 탈출하여, 산속에 은거하고 있는 그의 일족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구스타프의 구출이 시급함을 알린다. 이상이 대강의 줄거리인데, 주제는 바로 이 구출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상황에 개입된 사람들의 말, 다시 말해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인 인종적 편견의 적대감이다.
구스타프의 친척들로 구성된 소수의 사내들이 토니의 안내로 급습하여 호앙고와 바베칸을 포박하는 것인데, 토니가 이를 주도한 것을 알아차린 호앙고는 토니에게 말한다. “네가 그런 창피한 짓을 하고 기뻐하기도 전에 천벌이 내릴걸.”이라고 동족인 흑인을 배신한 토니를 질책한다. 그때 토니는 “난 배신한 일 없어요. 백인 여자인 나는 당신들이 붙잡아 둔 저 청년과 약혼한 사이예요.”라고 답한다. 혼혈 여성인 토니는 부모인 호앙고와 바베칸과 달리 자신의 정체성을 백인으로 주장하는 것이고, 따라서 백인인 자신이 백인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아무런 부당함이 없다는 항변인 것이다. 이것은 피부색이 옅어진 흑인 여성의 백인사회로의 동화(同化)에 대한 갈망이지만 바로 이러한 의식 자체가 피부색에 의한 차별을 더 한층 두드러지게 한다.
이어서 구스타프를 구출하기 위해 감금되어 묶인 방으로 토니와 습격자들은 향하는데, 토니를 본 구스타프는 구원자들에 의해 풀려나자마자, “어쩔 작정인지 알아 볼 사이도 없이, 분노의 이빨을 갈면서 토니에게 피스톨을” 발사한다. 총알은 토니의 심장을 관통하고 그녀는 죽는다. 이 장면도 흑과 백에 대한 차별의 의식이 구스타프의 마음 저변에 있었음의 한 상징일 것이다. 그는 전후 상황을 헤아리지 않고, 단지 토니가 자신을 묶어 둔 행위에 대한 적의만이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그를 살리기 위한 토니의 임기웅변으로서의 행위였음을 그는 애초에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놀란 친척들은 그를 살리기 위한 토니의 술책이었음을 구스타프에게 설명한다. 은혜를 살해로 갚은 것인데, 이 사실을 알자 구스타프 또한 피스톨을 자신에게 겨누어 자살하고 만다. 자신을 지배하던 차별의 의식에 대한 수치인 자괴감과 성급한 판단이 약혼한 여성을 살해하게 하였다는 깊은 죄책감이었다고 해석하여야 할 것 같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이 뿌리깊은 인종적 편견은 인간 세계에 무수히 다양한 갈등의 문제로 출현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성찰의 이야기라 할 것이다. 이 소설은 내성적이고 인간 사회에 대한 비판과 혐오로 인해 은둔을 희구했던 작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데, 불치병을 앓고 있던 유부녀인 헨리에타 부인과 사랑을 나누던 클라이스트는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인과 함께 피스톨로 머리를 쏘아 이중자살(二重自殺)했다. 즉 이 소설은 클라이스트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작품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구스타프는 작가 클라이스트의 분신이었던 것일까?
2. 칠레의 지진
1647년 칠레 산티아고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실제 엄청난 인명 손실과 재산의 파괴로 기록된 사건이다. 소설의 발단은 산티아고의 최고 부자인 귀족 돈 엔리코 아스테론의 고명딸인 돈나 요제페와 가정교사인 청년 예로니모 루쮀라와의 은밀한 사랑이 알려짐으로서 루쮀라는 해고되고, 요제페는 수도원으로 보내진다. 요제페가 루줴라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청년은 형무소에 수감되고, 요제페 역시 수도원에 감금된다. 도시는 이 젊은이들의 사건을 불상사이자 범죄행위라 하여 분노의 목소리가 들끓는다. 루줴라는 목숨을 끊기위해 형무소의 기둥에 노끈을 묶고 결심을 굳히려는 순간 갑자기 온천지가 무너지고 갈라진다. 대지진이 산티아고를 강타한 것이다. 아비규환의 폐허 속에서 탈출한 두 사람은 아기 젖동냥을 하던 귀족 돈 페르난도의 아이를 도움으로써 그들 부부로부터 귀한 영접을 받는다. 그리고 요제페와 루줴라, 그들의 아기 필립에게 마치 재난이 그들의 영혼을 치유라도 한 듯 아름다운 꽃처럼 피어나는 세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지위와 신분의 구별 없이 서로 돕고 희생한다.
지진이 끝나고 마음의 안정을 찾자 산티아고 도미니크 성당으로 미사를 올리려는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몰려온다. 요제페와 루줴라 역시 열렬한 마음으로 하늘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성당 미사에 참여한다. 그러나 성당의 늙은 승정(사제)은 하느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인 지진에도 불구하고 전멸당하지 않은 죄악이 남아 신을 모독하고 있다고 저주에 가득찬 어조로 두 사람의 이름을 분명하게 부른다. 이때 미사 군중 속에서 설교를 가르는 외침이 들려온다. “오, 여기 바로 그 죄인들이 있소!” “어디 있느냐!” “여기 있다!” “돌로 때려라, 때려 죽여라!” 성당에 모인 신자들이 모두 외친다, 그리곤 곤봉으로 내리쳐 그들을 때려죽인다. 이어 “저년과 함께 저 사생아도 지옥으로 보내라!”라는 소리와 함께 어린애(요제페의 아이가 아닌 페르난도의 아이)를 낚아채 다리를 붙잡아 빙빙 돌리다 교회 기둥 모서리에 부딪쳐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머리가 터져서 골이 삐어져 나온 채 아이는 바닥에 내팽겨 쳐진다.
인문학자인 ‘오카 마리’는 소설의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대지진이라는 폭력적 사건으로 부정된 자신들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기만적인 헛소리(신의 의지, 헛소문)에 의거한 폭력을 휘두름으로써 사건 자체가 지닌 폭력의 기억을 부정“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관동(關東)대지진시 재일조선인이 약탈과 폭력으로 일본인을 학살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자신들의 재앙을 조선인의 탓으로 돌렸던 그 범죄적 기만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자신들의 대재앙을 해소할 희생양을 찾아 그것에 들씌우는 폭력과 기만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아주 민감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데, 인간들의 이 잔혹한 폭력성이 드러난 그 날의 기억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다.
어떤 참혹한 사건의 당사자로 있어야 했던 존재가 과연 그 사건을 단지 의미가 흐릿해진 막연한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요제페와 루줴라는 맞아 죽었고, 그들의 아이는 오인된 죽음을 맞이한 페르난도의 아이를 대신해 페르난도의 자식으로 양육된다. 그런데 클라이스트는 과연 이 소설을 칠레의 지진이 야기한 인간 폭력의 기억이라는 재앙적인 인류 트라우마를 증언하려 한 것일까라는 점에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페르난도는 필립을 판과 비교해 보기도 하면서, (...) 그에게는 지금이 더 낫다고 생각되기도 했다.”는 이 마지막 문장은 그들이 사건을 사건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즉 의미가 모두 바랜 단지 문자적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처럼 인식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사건을 다수의 타자와 나누어 갖기 위한 증언이 아니라 한낱 이야기로서의 소비에 멈춘 그저 그런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당사자랍시고 울고 짜대는 그것이 진실의 면목일까 하면 그것이야말로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다시 말해 사건의 말 할 수 없음 자체를 증언하려는 기억의 서사문제를 클라이스트는 이미 선취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아마 이러한 가능해석으로 인해 이 작품은 오늘날 여전히 기억 나눔의 대표적 서사로 회자(膾炙)될 수 있는 것일 게다.
3. ‘O’ 후작부인
조금은 황당한 신문 광고 문장이 소설을 연다. 아기 아버지를 찾는 사연의 광고를 자신의 신원을 밝힌 채 모든 신문에 낸 것이다.
“저는 뜻하지 않게 모든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낳을 아이의 아버지는
계신 거처를 알려주십시오. (...) 당신과 결혼할 결심을 했습니다.”
왜 이런 광고가 게재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사연이 소설의 거의 4분의 3을 채우고 있다. 이탈리아 유명도시 M시 요새의 사령관 G씨의 딸이자, 남편과 사별한 젊은 미망인인 O후작부인은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요새가 점령당하면서 러시아 병사에 의해 끌려 다니며 온갖 수치스러운 학대를 받게 되자 도움을 구하는 비명을 지른다. 이때 러시아군 중령 F백작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구원되지만 이내 실신하여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만다. 이 러시아군 장교는 요새사령관인 G씨의 항복을 받아내고 편의를 봐준다. 세월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평화로운 어느 날, F백작이 느닷없이 O후작부인과 그녀의 부모인 G씨 부부가 살고 있는 M시의 저택으로 찾아와 O후작부인에 청혼하며 이 결혼을 승낙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O후작부인은 그 어떤 남자와 관계를 맺은 기억이 없음에도 마치 임신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마침내 의사와 조산사에게 임신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녀는 이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으로 이해한다. 의사는 조롱하듯 “동정녀 마리아 이외에 그러한 임신을 들어본 적 없다”고. O후작부인은 부모로부터 “암캐의 염치없는 행실에 여우의 간사한 꾀를 열 갑절 보태도 그년의 그것을 따를 수는 없을 것”이라며 집에서 내 쳐진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성의 성(性)에 대한 남성, 즉 가부장적 남성중심사회의 기울어진 잣대를 비판하려 한 것 같다. O후작 부인은 죽은 남편으로부터 상속받은 V시의 영지로 거처를 옮겨 두문불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다, 마침내 인과성에 대한 자연법칙에 굴복함으로써 자신은 알지 못하는 아비를 찾는 광고를 내기에 이른 것이다.
딸의 결백함을 반신반의하던 O후작부인의 어머니 G씨 부인의 한 실험에 의해 딸이 주장하는 이해 불가능한 임신의 결백성을 확인하고 남편과 가족들과 딸의 화해를 주선하며, 남자들은 O후작부인의 순결성을 품는다. 사실 O후작부인을 수태케 한 당사자가 누구인지 독자들은 어렴풋 짐작할 수 있는데, 러시아군이 요새를 습격했을 때 F백작의 구원 이후 그녀가 완전히 실신한 장면이 있다. 그리곤 이후에 비록 청혼 수락이 훗날로 미뤄지긴 했으나 F백작이 구혼한 사실이 있다. 신문 광고의 문장에 따르면, 나타나면 결혼하겠다고 선언했기에 F백작이 자신임을 고백하려 약속된 기일에 나타났으나 O후작부인은 완강히 이 사실을 부인한다. 그녀가 정신을 잃었던 그 고통스런 시간에 F백작이 추행한 것이니 용서될 수 없는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일 오늘에 이와 동일유사 사건이 발생했다면, 그리고 후일 그 당사자가 혼인을 요청한다면 그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논쟁적 주제가 될 것이다. 불량한 인간들로부터 구출해준 선의의 기사이자, 실신 상태에서 간음한 인간이 후일 나타나 청혼을 할 때, 당사자인 여성은 이 황당무게한 사태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당대의 성적 환경 하에서는 이는 대범한 물음이었을 것이다. 실제 소설 속에서 F백작은 O후작부인의 처분에 맡기고 그녀의 신뢰를 쌓는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곤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지만, 사실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안은 분명 아니다. 오늘 누군가 이러한 소재의 이야기를 쓴다면 과연 어떤 귀결을 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많은 영지와 재산을 지닌 귀족인 F백작의 자본주의적 관점의 외형적 지위는 일단 현대 여성들에게 장애요인은 당연 아닐 것이고, 더구나 전쟁에서 적군병사의 노리개로 취해질 수 있는 순간 구원해준 기사이기에 그의 도덕성도 평범성 이상의 수준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는 여자의 심신이 가장 취약한 틈새를 이용하는 성적 비열함을 보였다. 한편으론 아이의 생부이기도 하며, 정식 청혼을 함으로써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하지 않았다. 클라이스트와 같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한 건가? 이 소설은 본격적으로 젠더(性)에 내재된 차별과 폭력성을 다룬 선구적 작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또한 클라이스트의 작품들은 당대 여타 작가들의 소설들과 달리 인물의 심리나 정황 묘사가 거의 없이 ‘사건’ 전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때문에 조금 건조한 느낌마저 들지만, 그의 다수의 작품들이 오늘날에 논의되는 주제들을 이미 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에바 폰 레데커’와 ‘오카 마리’ 두 인문학자의 글 덕분에 다시금 엷어진 의식을 환기하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