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잔혹의 세계사 - 인간의 잔인한 본성에 관한 에피소드 172
기류 미사오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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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건, 제도 등을 배경으로, 인신(人身)이 사물(事物)적 대상으로 취급되어온 사악한 탐욕의 문화사적 조명이라 할 수 있을까?

주술적, 종교적 권위의 유지와 같은 위선적이고 이율배반적인 미명하에 인간을 잔인하게 살육하거나, 약자로서의 여성에 가해진 성적 편견의 희생, 또한 귀족 및 가진 자와 같은 권력을 장악한 세력에 의해 자행되어온 강자들의 극악한 행동에서 인류의 본성을 목격하게 한다.

 

인간의 잔인성 이면에는 쾌락이라는 그칠 줄 모르는 욕구가 흐르고 있음을 이 저술은 역사의 편린들 속에서 하나씩 꺼내들어 인간본성을 악마적 잔혹성으로 그려내고 있다. 사람의 피로 목욕하는 공작부인, 여성의 가슴을 도려내어 피부로 가방과 의자 등 소품을 만들어 사용하는 귀족, 산채로 화형에 처해지는 죄수들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에 열광하는 대중들과, 단두대에 목이 잘려나가는 처형장면을 훔쳐보며 섹스에 탐닉하는 귀족들의 모습에서 자괴감을 금할 수 없게 된다.

 

프랑스 혁명광장(콩코드광장)의 단두대에서 처형이 있는 날이면 영국 등 유럽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과 군중들이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 인산인해를 이루고, 단두대가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인기리에 팔리는 것과 같은 놀이, 유흥으로서의 인식은 역시 인간의 사악한 잔혹성과 쾌락의 의식이 서로 다른 본성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례로서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 대변되는 학대와 흥건한 피의 향연에 이어지는 쾌락으로서의 섹스, 나치정권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자행된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 인간에 대한 엽기적 행태 등이 열거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잔혹함 뒤에는 항상 변주된 합리주의와 권력자의 탐욕이 있다. 바로 법과 제도, 종교, 이성이란 이름으로 위장된 살육의 정당성이다. 인류의 질병으로부터의 구제를 위한 나치의 인체실험, 세수(稅收)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재산의 몰수방편으로 자행된 마녀사냥과 같은 종교의 위선, 여성귀족, 왕비, 여제(女帝)들의 성 욕구 충족을 위해 성적도구로 사용된 후의 무차별적 살인, 그리고 채찍질, 신체의 수집 등 그 역겨움의 무수한 잔혹성과 같다.

 

인간의 잔인성을 포함하는 비틀어진 탐욕의 역사편린들이 한두 쪽의 짧은 글로 190여개나 실려 있다.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는 이러한 인간본성의 심연에 도사린 이것들이 과연 우리인가? 이 저술을 보는 시각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일 듯하다. 구토를 일으키는 추악함으로만, 악마적 본성에 대한 지적 탐구로, 인간탐욕의 본질에 대한 사적증거로, 철학적 사유의 일면으로 등 다양할 것이다. 내용의 구성이나 주제의 분류가 다소 산만하여 문화사적 성찰이나 인간본성의 본격적 모색에는 부족하지만 인간의 잔혹성과 성적탐욕의 나름 집약된 자료로서의 가치까지 부인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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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은 조선의 시를 쓰라 인물로 읽는 한국사 (김영사) 3
이이화 지음 / 김영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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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24인의 문인(文人), 예인(藝人)들의 내면세계를 중심으로 한 인물사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사대부와 유교라는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기득권중심의 역사가 아닌 민중(백성)의 삶을 역사의 중심에서 조명한 사관이기에 이 저작은 새롭다.

이 저술이 고려말 조선초의 대신이었으며, 명문장가로 알려진 변계량의 “철저한 사대적, 유교적 명분”에 사로잡힌 교조적 가치관의 비판에서 시작되고, 거론되는 인물 중 민족을 핍박하고, 민중의 삶을 외면하였으며, 자신의 안위에 열중했던 문예인들도 일부(3인) 소개되기도 하지만, 전편에 흐르는 역사의식은 분명 민중의 삶과 그들의 내면세계에 대한 연민이라는 문학과 예술의 지향점에 맞추어져 있다.

이러한 시각은 저술자의 문학 작품을 보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극명해진다. “작품을 이야기할 때 이를 만든 인간의 삶도 함께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 시대와 호흡하는 산물이며, 그것이 제아무리 작품성이란 순수주의자들의 시선을 들이대더라도 민중과 국가와 보편적 인간의 삶을 훼손시키는 인물들의 것일 경우에는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래서 김시습에서부터 임제, 허균, 장혼, 이상화에 이르는 백성에 대한 연민을 그치지 않았으며, 사대적이고 형식적인 유교적 권위에 저항하고, 시대의 개혁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부당한 외세에 맞선 문인들의 이 새로운 접근은 사상적, 지적 기반이 날로 취약해지기만 하며, 보편적 가치의 혼란에 휩싸인 오늘의 우리에게 역사의 시선을 어떻게 정립하여야 하는가를 시사(示唆)한다 할 수 있겠다.

한편, “수양대군이 임금의 자리를 빼앗을 때 그는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다는 서거정이지만, 민초들 깊숙이 스며있는 삶의 조명으로서, 온갖 우스개소리를 모아놓은 우리나라 최초의 골계집인 그의 ‘태평한화골계전’의 소개에서, 방외인(方外人)으로 자처하고 한마디로 세상을 등지고 살았던 김시습편에 있어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뿐 아니라 그의 두 권의 시집, 관서록, 관동록의 시(詩)를, 그리고 임제의 알려지지 않은 시편들,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시평론이라 할 수 있는 허균의 성수시화, 학산초담과 같이 교과서적이고 획일적인 사대부들의 충효나 음풍농월의 편협한 주제를 넘어서는 민중 문학적 소개와 성찰은 뜻 깊은 노력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아무리 고생한들 가슬 할 보람없네 / 온 논배미 다 거두어도 한 솥이 못 차누나 / 관청의 세금 갈수록 심하여서/..中略(중략).../ 남쪽으로 울력가고 북쪽으로 징병가네...”와 같은 임제의 시편인 ‘전가원(田家怨)’의 몇 구절이나, 매월당(김시습)집의 ‘고산가고’에 한 편인 “이리 같은 벼슬아치 만났으니 백성은 정말 가엾구나 / 어찌 주리고 얼어 죽는 것이 풍년이 아니기 때문이랴”에서 조선조를 내내 관통하는 우리 백성들의 삶을 바라보는 연민의 시선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고 이 저술이 내내 심오한 사상적 의지만을 전개하는 그러한 구성이거나 내용은 아니다.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의 詩(시), “지난해엔 귀여운 딸을 잃더니 ... 中略(중략)...가슴 메어지도다. 광릉의 흙이여” 처럼, “인간의 내면세계를 노래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시가 지닌 가치는 높다.”는 문학적 평가는 물론,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요, 윤기(倫紀)의 분별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을 일등으로 높였으나 나는 하늘을 따르지,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않겠노라.”하는 허균의 파격적이고 이단적인 사상을 엿 보게도 하여준다.

또한, 우리에게는 김삿갓으로 더욱 잘 알려진 김병연이 “‘柳柳花花’(버들버들하다가 꼿꼿해졌다)라고 부고장을 써준 에피소드에서 삶의 유쾌한 웃음을 던져주기도 하며, 이이암(而已庵)이자 공공자(空空子)로 부른 장혼의 맑고 큰나무와 같은 삶에서 신분을 뛰어넘는 학문적 지향을 보며, 새삼스러운 자기성찰을 넌지시 제시하기도 한다.

오늘의 중국 ‘인민해방군가’의 작곡자이자 중국의 3대 현대음악가로 칭송받는 ‘정율성’ 이란 인물의 발굴이나, 임꺽정의 작가인 월북작가인 ‘홍명희’의 재평가, 조선후기 3대 화가임에도 겸재 정선, 관아재 조영석만큼 알려지지 않았던 현재 심사정의 독립된 드러냄은 신선한 구성으로 여겨진다.

더구나 일제 식민시대에 민족시인으로서 그리고 저항시인인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누락된 6연의 소개는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중인의 신분으로서, 소외된 민중으로서, 나라를 잃은 식민지의 국민으로서 문학과 예술을 통한 우리 선조들의 한(恨)과 그 승화된 삶의 언어들, 풍자와 해학(諧謔)을 통한 정화의 역사를 읽게 된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처절한 자기성찰을 통한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삶과 얼굴을 본다.

이 한편의 인물사는 저자 이이화선생이 우리의 역사를 대중에게 가까이하고자 하는, 그래서 우리를 자각하고 지성인으로서의 튼튼한 가치를 정립하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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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t & Love - 섹스와 음식, 여자와 남자를 만나다
요코모리 리카 지음, 나지윤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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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스레를 떨 까닭이 없을 정도로 작가는 진솔하다. 자신이 경험한 세상만큼은 그대로 투영하고 싶었던듯하다. 그래서 6개의 연작으로 구성된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각기 1인칭‘나’를 통해 자기만의 고유한 색채를 타인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더욱 선명하게 그려내게 하고 있으며, 타인의 에피소드에 등장되는 1인칭 나의 대상으로서의 시선과 교차하게 하여 바로‘우리’는 어떠한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이 작품의 제목‘이트 앤드 러브(Eat & Loive)'가 상징 하는 바와 같이‘먹는 것과 욕망’을 동일선상의 인식에서 풀어나가는 작가의 일관된 역량은 능청맞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교감을 형성케 해준다. 잘나가는 일류 크리에이터를 남편으로 둔 연예스타이자 요리연구가인 40세의 중년 여성,‘에구치 미라이’가 하는 음식과 섹스가 교묘히 결합된 다음의 표현은 이 작품의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중년 여성은 싸구려 카페의 부실한 음식으론 만족하지 못한다. 고급 재료, 제대로 된 세심한 맛, 향기로운 냄새..., 게다가 그릇, 테이블 세팅, 서비스까지 모두 완벽해야 하는 것이다.”이는 하루 밤 침실로 유혹했던 남성의 부실함에 몸서리치며, 자신의 섹스에 대한 품격을 한껏 치장하여 의미를 나열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관능적 풍미, 고급스러운 미각을 지닌 성숙한 어른만이 아는 섬세하고 농밀한 맛.”, “조금 더 달고 뜨거운 느낌...”은 원초적 욕망으로서의 음식과 섹스에 대한 동일 감각으로 표현되고 있다.

36세의 160센티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키의 카피라이터‘노자키’만이 남성이다. 그리곤 40세,34세,26세,22세,20세의 여성들이 그녀들만의 욕망을 쫓는다. 20세의‘기시타 미오’를 제외하면, 모두 노자키와의 로망을 꿈꾸었던 여성들이다. 노자키란 볼품없는 인물임에도 카피라이터 유망주로서의 신인상의 수상을 계기로 형성된 여성들의 의식의 변화는 그야말로 원초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 원초성이 음식의 차별, 섹스의 차별이란 동의어로 서로 다름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질적 아이러니이다.

이는 노자키와의 하루 밤에 진저리쳐대는 미라이의 남편과 연결되는 작품의 대단원 격인 미오의 이야기에서 먹는 것에 대한 차이가 불러온 섹스의 차이, 삶의 차이를 대비하는 에피소드에서 극명해진다.

“인간은 먹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먹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야. 그래서 맛없는 것을 먹으면 안 돼. 늘 맛있는 것, 잘 갖춰진 것을 먹어야 해. 지나친 듯해도 그것이 바로 좋은 인생을 만들어 가지....,반찬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온갖 희귀한 걸 먹어보고 싶은 건 인간의 욕망이니까. 욕망은 끝이 없는 법이지.”하는 에구치의 기성세대로서의 시선에 대해, 20세 미오의 “항상 격식만 차리는 식당에 끌려 다니고, 하루하루가 피곤해. 기껏 밥 한 끼 먹는 것 뿐 인데. 이젠 지쳤어.”하는 반란은 욕망에 대한 정말 신선하고 통쾌한 해석으로 다가온다.

한편,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엄마, 낙태와 계류유산, 일주일에 한번 나타나는 남편에 대한 생활에 대한 의존감등 세대를 불문한 여성으로서의 연민과 그네들의 불안과 고통이 커다란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여성들의 행동에서 홀연히 남성을 털어내고 분연히 홀로이 세상에 선다는 식의 페미니즘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작가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시련이 남성에게 있다는 식의 책임전가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자아를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보다 냉정하고 세심하게 바라보는 성숙하고 균형 잡힌 - 서로 지원하고 협조하는, 그러나 서로 다르고 독립적인 객체로서 인정하는 - 성(性)개념으로 진화되어있다. 별거형 부부로서 소원한 관계이지만 결국 이탈리아 여행을 속삭이며, 그 안전하고 안락함이란 평형을 찾는 것이나, 자기의 작은 아파트로 돌아와 비로소 평온을 찾고 남성의 지원을 부탁하는 미오에게서 다르지만 같은, 화해의 미덕을 보게도 된다.

이 작품의 구석구석에서 묘사되는 발칙한 섹스는 솔직함으로 오히려 담백하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다채로운 음식들의 향연과 섹스의 절묘한 조합, “음식의 진정한 맛을 가려내지 못하는 남자는 여자의 수준도 가려내지 못”한다는 유머가 독서를 내내 즐겁게 한다. 문득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부부 서로의 원초적 욕망을 인정하면서 또 서로의 성에 충실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별거형 부부가 우리사회에 안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작품을 읽은 여성들이‘먹는 것으로 알아보는 남성 수준의 구별법’으로까지 이 작품을 유행시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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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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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맡기 힘든 토속의 냄새가 솔솔 피어납니다. 이 짧고 당찬 동화 속에 등장하는 한가로워 보이는 백양나무와 참을 이고 가는 어린 소녀의 무채색의 모습, 된장찌개의 구수한 보글보글 거리는 소리, 도란도란 초롱불에 흔들리는 소박한 가족들의 창호 문에 비친 그림자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두엄더미와 사립문, 외양간, 헛간, 뒷간, 토담, 아담한 기와지붕, 굴뚝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그리워집니다.

이 가을, 어린 시절의 잊혔던 기억이 새록새록 잠든 감성을 깨워댑니다.‘양지마을’을 깨우는 낯설고 앙칼진 기적소리가 문명이란 소리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듣기 싫고 괴롭지만, 기관사인 마을이장의 아들이 지날 칠 때 인사 올리는 소리라 이해합니다. 우린 그렇게 낯설음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입니다.

똥친 막대기는 그래서 어미백양나무에서 꺾여 농부 박기도씨의 손에 들리게 됩니다. 기적소리에 놀란 새끼 밴 암소를 몰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양나무의 어린 새끼가지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열두 가지의 연작 에피소드는 각기 우리네 소박한 일상의 아름다움과 교훈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미 백양나무에서 부러져 나온 ‘나’(똥친 막대기)는 어미로부터 무심코 받아왔던 영양분과 삶의 안락의 고마움을 새롭게 느낍니다. 어린 딸 재희에게 회초리를 든 엄마 최씨와 아빠 박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가족의 평온이 따뜻한 시선으로 중첩되어 보여 집니다.

나는 회초리에서 측간의 똥친 막대기가 됩니다. 그래서 항아리(똥통)에 담긴 인분을 휘 젓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나는 미래에 낙담합니다. 나뭇가지로서 살아가기 위한 물관과 채관이 오물 찌꺼기로 막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기적을, 삶의 미래에 대한 꿈을 접지 않습니다. 재희의 손에 내가 들렸습니다. 나는 마을의 악동들을 물리치는 기막힌 도구가 됩니다. 그리곤 봇도랑 개흙 속에 던져집니다. 나의 막혔던 물관의 찌꺼기가 봇도랑 물에 씻겨 나는 잠시 싱그런 물길을 빨아들이는 행운을 가집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의지로 세상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부모와 형제, 가족의 무조건적 사랑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러다 우린 어느 순간 부모에게서 분리됩니다. 정말 미미한 존재인 나는 세상, 우주를 향해 어느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내 의지를 꺾어대기 일수입니다. 불어난 물에 휩쓸려 나는 정처 없이 떠내려갑니다. “햇살이 비치고 있는데 나는 갈증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내 몸속 물관에는 충분한 자양분이 축적되어있었겠지요.” 홍수에 시달리며 떠내려 온 고통스런 시간이었지만 똥친 막대기에게는 영양분과 생존의 식수가 되었습니다.

이 아름답고 소박한 한편의 이야기는“정말 위대한 발견”을 하게 합니다. “나는 비로소 내가 뿌리내리고 서 있어야 할 장소에 도달 한 것입니다.”살랑거리는 가을바람과 따사로이 내리비추는 햇살이 삶을 깨끗하고 파랗게, 그리고 신선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이 계절,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없는지, 무엇을 잃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게 합니다.

재희의 껑충한 치마와 단발머리가 귀엽습니다. 새끼 밴 암소와 뒤를 따라가는 재희의 뒷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사라진 우리네 농촌의 풍경이 그리워집니다. 이 투명하고 맑은 이야기와 그림들이 찌든 나를 청명하게 만들어 놓은 것만 같습니다. 책을 읽는 순간만이라도 나는 오염되지 않은 세상에 있었던 듯 상쾌합니다. 올 가을 나는 이 작은 책을 한동안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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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 2008-10-10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만큼 아름다운 리뷰네요...
 
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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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술의 표제인 “세계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은 한편으론 정당하지만 다른 측면에선 부당한 왜곡의 논리라 할 수 있다. 20대째의 CIA 국장은 19대까지의 CIA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와 수행업무분야가 축소된 기관을 맡고 있을 뿐이다. 21세기 초, 세계를 속인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가장 추악한 인류의 시대인 20세기의 무자비한 횡포를 행사한 역대 미국정부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넘기기 위한 희생양으로 CIA를 삼았다는 시선을 피 할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1946년 이래 CIA의 창설에서 오늘에 이르는 CIA의 각종 세계 공작과 첩보활동, 준군사적 활동의 정치적 배경과 시대별 미국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헨리 키신저와 같은 실질적 권력행사자의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저질러진 무지한 음모들과 전쟁의 비밀을 적나라하게 정리하고 있다.

‘팀 와이너(Tim Weiner)'의 이 정리된 CIA역사는 내게 몇 가지 뚜렷한 주제를 시사한다. 그 첫째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대변되는 20세기 후반의 왜곡된 기막힌 세계사의 어처구니없음이며, 둘째는 정보전의 그 비밀스런 공작과 첩보활동의 수확이 실제 얼마나 무익하고 무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렇듯 은밀한 정보전쟁의 이면에 행사된 추악한 권력의 도덕성, 이성의 파괴적인 행태들이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치의 혼란과 무관하지 않음을 이해케 된다는 것이다.

CIA를 통해 취해진 비 서구국가들에 대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진 수 많은 암살과 음모와 쿠데타, 그리고 전쟁의 동기가 오로지 미국의 정치, 경제적 이익과 소심한 자국 안보주의에 기인한 것이라는 은폐되었던 진실에서 20세기 지구촌을 지배하고, 경찰국으로 자임해온 미국 정부의 거짓과 속임수와 몰염치에서 인간의 사악함의 그 극한을 보는듯하여 자괴감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시작된, 지금은 해체된 소련(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란 양대 진영의 냉전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고, 민주주의 이념을 확산하여 자국(미국)의 영향력을 증강하겠다는 오만에서 비롯된 탐욕과 무지의 권력을 보게 된다. 서구사회로는 이탈리아의 정치인과 바티칸 정치조직에서부터 남아메리카의 쿠바, 과테말라, 칠레 등 여러 국가들, 그리고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대만,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동아시아지역 국가, 그리고 이라크,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근동지역 국가, 아프리카, 동유럽 등 전 세계에 대한 CIA를 통한 미국의 제멋대로이고 터무니없는 기만은 바로 20세기 전 인류를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내전, 갈등으로 온통 뒤덮는 최악의 세기로 빠뜨렸음이 그들의 증언으로 명료해졌다.

그들(미국 정부)은 그들이 은밀하게 진행한 수없는 준군사적 행동과 쿠데타의 부추김, 반군의 지원, 전쟁의 야기를 통해 그들의 명분인 자유민주주의의란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CIA의 공개 자료에서와 같이 그들의 순간적 이익이란 편의성에 의존한 무분별한 행동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일례로 “부패하고 믿을 수 없는 두 지도자인 남한의 이승만과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의 정보기관”을 단지 CIA가 동반자로 삼았기에 그들은 이 무능하고 사악한 정권들을 지원했을 뿐이며, 마약밀수범이나 살인자 등 범죄자는 물론, 잔인한 독재군사정권을 불문하고 미국의 권력자들의 한 마디에 친구가 되었고, 다시 적이 되어 반복되는 쿠데타와 내전 등 혼돈과 무질서에 휩싸일 밖에 없었음은 충격이상의 고통을 던져준다.

이러한 공개된 자료와 증언에서 이미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가치는 그 의미를 모호하게 하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유럽이 지구촌에 강요해온 보편성이란 가치의 붕괴를 직시하게 된다. 한편, CIA라는 정보원천의 60년에 이르는 연대기에 있어 비밀정보 활동의 속성과 그 한계를 성찰하게 된다. “개방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밀첩보 사업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 할 것인가? 거짓말을 수단으로 해서 진실에 복무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 할 것인가? 속임수와 교활함을 이용해서 민주주의를 널리 확산시킨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 할 것인가?”하는 본질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질문을 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군대의 파병으로 우리와 무관치 않은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정부(백악관,국무부,국방부 등)와 CIA의 거짓과 속임수, 그리고 오만으로 점철된 실패사례는 이 질문에 대한 한 단면을 시사해 준다. 또한 21세기에 초기부터 시작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역시 세계를 속인 가장 극악한 거짓이었음을 모두 알고 있다. 여기서 전직 CIA요원들의 “지식이 없는 행동, 정보가 없는 전쟁은 위험한 일이었다.”는 자성(自省)과 같이 “60년 동안 수 만 명의 비밀 공작요원들이 수집한 정보들 가운데 정말 중요한 정보는 극히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이 CIA의 가장 은밀한 비밀이다.”는 비판은 비밀정보활동의 속성을 신랄(辛辣)하고 솔직하게 지적하고 있다하겠다.

소련의 붕괴(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인도의 핵실험과 같이 전혀 감지하지 못한 CIA의 정보활동이나, 중동(근동)에 대한 무지와 실패, 쿠바의 카스트로에 대한 미국의 끊임없는 압박과 침공의 실패, 베트남전의 완벽한 패배 등에서 “첩보활동의 실패, 사진 분석의 실패, 보고서 이해의 실패, 사고의 실패, 그리고 관측의 실패”와 같은 정보활동의 근원적 한계를 볼 수 있으며, 권력자(미 대통령 등)의 이해관계와 통치스타일에 따른 정보 왜곡현상의 불가피성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시선을 달리하여, 한 국가의 안보유지를 위한 정보활동을 실천하는 요원의 자질은 어떠해야 할까? 하는 질문으로 부터 “주어진 일을 하는 과정에서 교활하게 거짓말을 잘해야 합니다. 이런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덕적인 안정감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비범한 인재”여야 한다는 지적이나, 정보활동이 지니는 원천적 속성으로서 적(상대국)의 기밀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가 인정하는 도덕적 행동규범이 지켜져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지금까지 인정되어왔던 인간 행동규범은 이 대치(전쟁 등) 상태에서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비위에 거슬리는 이 철학에 익숙해져야 하며, 이 철학을 이해하고 또 지지해야합니다.”하는 대답은 과연 진실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활동에 있어 인간 행동, 조직 행동에 대한 일탈이란 측면만으로 20세기, 그리고 21세기 오늘에 이르는 동안 미국행정부와 그 권력의 수반인 대통령, 그들의 수하인으로서의 권력집행자, CIA가 인류에게 저지른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전쟁에서 이기려면 정보가 중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은 정보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전쟁터로 내보내는 청년들의 피와 용기로 이긴다.(...)정보가 정말로 도움이 되는 것은 전쟁을 피하도록 할 때이다.” 그들은 전쟁을 억제하고 전 지구촌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정보와 권력과 힘(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뻔뻔한 거짓말로 세계사회를 기만했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세계경찰로서의 오만한 지위를 버려야 할 것이다.

이 저술에는 “‘잿더미의 유산’만을 남긴 채 떠났다. ”는 표현이 수차례 등장한다. 즉, 돌이킬 수 없는 폐해만 남긴 그네들(CIA, 미국의 최고권력들)의 수치스런 오점을 의미한다. 이 충격적인 보고서이자 증언이며, 역사서인 이 저술에서 자유와 정의, 그리고 혼돈에 가려진 이성과 파괴된 인류의 도덕적 가치를 바로잡고자 하는 저자의 용기를 읽는다. 자유주의적이지도 않고 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20세기에 보여준 미국과 유럽적 가치의 몰락은 불가피하다. 이제라도 전 지구적 보편적 가치와 새로운 이성의 세계를 위해 확장된 사유와 지성을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저작물을 단순히 CIA와 미국 정부의 숨겨졌던 비화로서, 그리고 비밀정보 활동이란 용어적 고뇌에 국한하여 보기에는 그 질량이 둔중하다.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위한 철학적 반성의 기반으로서 이해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저자의 오랜 세월에 걸친 노고와 뛰어난 통찰력이 만들어낸 노작(勞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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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 2008-10-10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술의 논지와 독자의 느낌이 분명한것 같네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