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이 저술의 표제인 “세계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은 한편으론 정당하지만 다른 측면에선 부당한 왜곡의 논리라 할 수 있다. 20대째의 CIA 국장은 19대까지의 CIA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와 수행업무분야가 축소된 기관을 맡고 있을 뿐이다. 21세기 초, 세계를 속인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가장 추악한 인류의 시대인 20세기의 무자비한 횡포를 행사한 역대 미국정부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넘기기 위한 희생양으로 CIA를 삼았다는 시선을 피 할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1946년 이래 CIA의 창설에서 오늘에 이르는 CIA의 각종 세계 공작과 첩보활동, 준군사적 활동의 정치적 배경과 시대별 미국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헨리 키신저와 같은 실질적 권력행사자의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저질러진 무지한 음모들과 전쟁의 비밀을 적나라하게 정리하고 있다.
‘팀 와이너(Tim Weiner)'의 이 정리된 CIA역사는 내게 몇 가지 뚜렷한 주제를 시사한다. 그 첫째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대변되는 20세기 후반의 왜곡된 기막힌 세계사의 어처구니없음이며, 둘째는 정보전의 그 비밀스런 공작과 첩보활동의 수확이 실제 얼마나 무익하고 무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렇듯 은밀한 정보전쟁의 이면에 행사된 추악한 권력의 도덕성, 이성의 파괴적인 행태들이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치의 혼란과 무관하지 않음을 이해케 된다는 것이다.
CIA를 통해 취해진 비 서구국가들에 대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진 수 많은 암살과 음모와 쿠데타, 그리고 전쟁의 동기가 오로지 미국의 정치, 경제적 이익과 소심한 자국 안보주의에 기인한 것이라는 은폐되었던 진실에서 20세기 지구촌을 지배하고, 경찰국으로 자임해온 미국 정부의 거짓과 속임수와 몰염치에서 인간의 사악함의 그 극한을 보는듯하여 자괴감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시작된, 지금은 해체된 소련(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란 양대 진영의 냉전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고, 민주주의 이념을 확산하여 자국(미국)의 영향력을 증강하겠다는 오만에서 비롯된 탐욕과 무지의 권력을 보게 된다. 서구사회로는 이탈리아의 정치인과 바티칸 정치조직에서부터 남아메리카의 쿠바, 과테말라, 칠레 등 여러 국가들, 그리고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대만,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동아시아지역 국가, 그리고 이라크,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근동지역 국가, 아프리카, 동유럽 등 전 세계에 대한 CIA를 통한 미국의 제멋대로이고 터무니없는 기만은 바로 20세기 전 인류를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내전, 갈등으로 온통 뒤덮는 최악의 세기로 빠뜨렸음이 그들의 증언으로 명료해졌다.
그들(미국 정부)은 그들이 은밀하게 진행한 수없는 준군사적 행동과 쿠데타의 부추김, 반군의 지원, 전쟁의 야기를 통해 그들의 명분인 자유민주주의의란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CIA의 공개 자료에서와 같이 그들의 순간적 이익이란 편의성에 의존한 무분별한 행동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일례로 “부패하고 믿을 수 없는 두 지도자인 남한의 이승만과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의 정보기관”을 단지 CIA가 동반자로 삼았기에 그들은 이 무능하고 사악한 정권들을 지원했을 뿐이며, 마약밀수범이나 살인자 등 범죄자는 물론, 잔인한 독재군사정권을 불문하고 미국의 권력자들의 한 마디에 친구가 되었고, 다시 적이 되어 반복되는 쿠데타와 내전 등 혼돈과 무질서에 휩싸일 밖에 없었음은 충격이상의 고통을 던져준다.
이러한 공개된 자료와 증언에서 이미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가치는 그 의미를 모호하게 하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유럽이 지구촌에 강요해온 보편성이란 가치의 붕괴를 직시하게 된다. 한편, CIA라는 정보원천의 60년에 이르는 연대기에 있어 비밀정보 활동의 속성과 그 한계를 성찰하게 된다. “개방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밀첩보 사업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 할 것인가? 거짓말을 수단으로 해서 진실에 복무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 할 것인가? 속임수와 교활함을 이용해서 민주주의를 널리 확산시킨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 할 것인가?”하는 본질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질문을 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군대의 파병으로 우리와 무관치 않은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정부(백악관,국무부,국방부 등)와 CIA의 거짓과 속임수, 그리고 오만으로 점철된 실패사례는 이 질문에 대한 한 단면을 시사해 준다. 또한 21세기에 초기부터 시작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역시 세계를 속인 가장 극악한 거짓이었음을 모두 알고 있다. 여기서 전직 CIA요원들의 “지식이 없는 행동, 정보가 없는 전쟁은 위험한 일이었다.”는 자성(自省)과 같이 “60년 동안 수 만 명의 비밀 공작요원들이 수집한 정보들 가운데 정말 중요한 정보는 극히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이 CIA의 가장 은밀한 비밀이다.”는 비판은 비밀정보활동의 속성을 신랄(辛辣)하고 솔직하게 지적하고 있다하겠다.
소련의 붕괴(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인도의 핵실험과 같이 전혀 감지하지 못한 CIA의 정보활동이나, 중동(근동)에 대한 무지와 실패, 쿠바의 카스트로에 대한 미국의 끊임없는 압박과 침공의 실패, 베트남전의 완벽한 패배 등에서 “첩보활동의 실패, 사진 분석의 실패, 보고서 이해의 실패, 사고의 실패, 그리고 관측의 실패”와 같은 정보활동의 근원적 한계를 볼 수 있으며, 권력자(미 대통령 등)의 이해관계와 통치스타일에 따른 정보 왜곡현상의 불가피성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시선을 달리하여, 한 국가의 안보유지를 위한 정보활동을 실천하는 요원의 자질은 어떠해야 할까? 하는 질문으로 부터 “주어진 일을 하는 과정에서 교활하게 거짓말을 잘해야 합니다. 이런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덕적인 안정감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비범한 인재”여야 한다는 지적이나, 정보활동이 지니는 원천적 속성으로서 적(상대국)의 기밀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가 인정하는 도덕적 행동규범이 지켜져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지금까지 인정되어왔던 인간 행동규범은 이 대치(전쟁 등) 상태에서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비위에 거슬리는 이 철학에 익숙해져야 하며, 이 철학을 이해하고 또 지지해야합니다.”하는 대답은 과연 진실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활동에 있어 인간 행동, 조직 행동에 대한 일탈이란 측면만으로 20세기, 그리고 21세기 오늘에 이르는 동안 미국행정부와 그 권력의 수반인 대통령, 그들의 수하인으로서의 권력집행자, CIA가 인류에게 저지른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전쟁에서 이기려면 정보가 중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은 정보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전쟁터로 내보내는 청년들의 피와 용기로 이긴다.(...)정보가 정말로 도움이 되는 것은 전쟁을 피하도록 할 때이다.” 그들은 전쟁을 억제하고 전 지구촌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정보와 권력과 힘(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뻔뻔한 거짓말로 세계사회를 기만했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세계경찰로서의 오만한 지위를 버려야 할 것이다.
이 저술에는 “‘잿더미의 유산’만을 남긴 채 떠났다. ”는 표현이 수차례 등장한다. 즉, 돌이킬 수 없는 폐해만 남긴 그네들(CIA, 미국의 최고권력들)의 수치스런 오점을 의미한다. 이 충격적인 보고서이자 증언이며, 역사서인 이 저술에서 자유와 정의, 그리고 혼돈에 가려진 이성과 파괴된 인류의 도덕적 가치를 바로잡고자 하는 저자의 용기를 읽는다. 자유주의적이지도 않고 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20세기에 보여준 미국과 유럽적 가치의 몰락은 불가피하다. 이제라도 전 지구적 보편적 가치와 새로운 이성의 세계를 위해 확장된 사유와 지성을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저작물을 단순히 CIA와 미국 정부의 숨겨졌던 비화로서, 그리고 비밀정보 활동이란 용어적 고뇌에 국한하여 보기에는 그 질량이 둔중하다.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위한 철학적 반성의 기반으로서 이해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저자의 오랜 세월에 걸친 노고와 뛰어난 통찰력이 만들어낸 노작(勞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