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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요즈음은 맡기 힘든 토속의 냄새가 솔솔 피어납니다. 이 짧고 당찬 동화 속에 등장하는 한가로워 보이는 백양나무와 참을 이고 가는 어린 소녀의 무채색의 모습, 된장찌개의 구수한 보글보글 거리는 소리, 도란도란 초롱불에 흔들리는 소박한 가족들의 창호 문에 비친 그림자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두엄더미와 사립문, 외양간, 헛간, 뒷간, 토담, 아담한 기와지붕, 굴뚝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그리워집니다.
이 가을, 어린 시절의 잊혔던 기억이 새록새록 잠든 감성을 깨워댑니다.‘양지마을’을 깨우는 낯설고 앙칼진 기적소리가 문명이란 소리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듣기 싫고 괴롭지만, 기관사인 마을이장의 아들이 지날 칠 때 인사 올리는 소리라 이해합니다. 우린 그렇게 낯설음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입니다.
똥친 막대기는 그래서 어미백양나무에서 꺾여 농부 박기도씨의 손에 들리게 됩니다. 기적소리에 놀란 새끼 밴 암소를 몰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양나무의 어린 새끼가지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열두 가지의 연작 에피소드는 각기 우리네 소박한 일상의 아름다움과 교훈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미 백양나무에서 부러져 나온 ‘나’(똥친 막대기)는 어미로부터 무심코 받아왔던 영양분과 삶의 안락의 고마움을 새롭게 느낍니다. 어린 딸 재희에게 회초리를 든 엄마 최씨와 아빠 박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가족의 평온이 따뜻한 시선으로 중첩되어 보여 집니다.
나는 회초리에서 측간의 똥친 막대기가 됩니다. 그래서 항아리(똥통)에 담긴 인분을 휘 젓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나는 미래에 낙담합니다. 나뭇가지로서 살아가기 위한 물관과 채관이 오물 찌꺼기로 막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기적을, 삶의 미래에 대한 꿈을 접지 않습니다. 재희의 손에 내가 들렸습니다. 나는 마을의 악동들을 물리치는 기막힌 도구가 됩니다. 그리곤 봇도랑 개흙 속에 던져집니다. 나의 막혔던 물관의 찌꺼기가 봇도랑 물에 씻겨 나는 잠시 싱그런 물길을 빨아들이는 행운을 가집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의지로 세상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부모와 형제, 가족의 무조건적 사랑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러다 우린 어느 순간 부모에게서 분리됩니다. 정말 미미한 존재인 나는 세상, 우주를 향해 어느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내 의지를 꺾어대기 일수입니다. 불어난 물에 휩쓸려 나는 정처 없이 떠내려갑니다. “햇살이 비치고 있는데 나는 갈증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내 몸속 물관에는 충분한 자양분이 축적되어있었겠지요.” 홍수에 시달리며 떠내려 온 고통스런 시간이었지만 똥친 막대기에게는 영양분과 생존의 식수가 되었습니다.
이 아름답고 소박한 한편의 이야기는“정말 위대한 발견”을 하게 합니다. “나는 비로소 내가 뿌리내리고 서 있어야 할 장소에 도달 한 것입니다.”살랑거리는 가을바람과 따사로이 내리비추는 햇살이 삶을 깨끗하고 파랗게, 그리고 신선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이 계절,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없는지, 무엇을 잃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게 합니다.
재희의 껑충한 치마와 단발머리가 귀엽습니다. 새끼 밴 암소와 뒤를 따라가는 재희의 뒷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사라진 우리네 농촌의 풍경이 그리워집니다. 이 투명하고 맑은 이야기와 그림들이 찌든 나를 청명하게 만들어 놓은 것만 같습니다. 책을 읽는 순간만이라도 나는 오염되지 않은 세상에 있었던 듯 상쾌합니다. 올 가을 나는 이 작은 책을 한동안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