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의 서평을 보내주세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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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개인적 일상사를 다루고 있어 독서로서의 감흥을 표현하기 불편할 정도로 흔한 이야기들이다.

누구나 첫 사랑의 기억을 더듬으면 시시콜콜한 사연이 쌓여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부모에 대한 이렇고 저런 후회와 사랑, 죄송스러움이 존재치 않은 사람도 없다.
자신에게는 소중하고 절절한 애틋함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새롭게 공감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그 무엇도 발견하기 어렵고, 다만 자신의 사회생활에서 자기를 알리기 위한 수단 이상으로서 읽히기 어려운 신변(身邊)적 단상들로 모여진 잡 글 모음이다. 버려주어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 유일한 한사람은 대상이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굳이 출생의 기억들이 잘못 들려지든 말든 작가 자신의 주변인들과 이해관계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의무가 발생했는지 모를 일이나, 일반 독자들에게 무슨 의미를 전달하려 한 것인지? 단지, 알아 달라는 것인지? 사랑과 억지스럽게 연결고리를 찾아내야 할 어떤 것이 있는지? 처음부터 끝말에 이르기까지 자기연민만 무성하고 또 무성하다.

이 몇 글자 되지 않는 신변잡기적 이야기는 드라마의 작품성에 대한 이해에서도 세월의 변화가 사유의 성숙을 주었다고 시선의 전환을 합리화하는 자기애처럼 횡설수설, 사랑의 이해에서도 오락가락, 제아무리 생각이 닿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수필이라지만, 정말 드라마 시나리오의 편의성 처럼 융통성 넘치는 사유의 천박함이 적나라하다.

사랑의 모습이 진정 무엇인지, 언급한 적도 없는 그 알 수 없는 모습에서 왜 유죄를 인정해야 하는지? PD와 인연, 몇몇 연예인들과의 친밀성에 대한 개별사적 이야기가 보편성을 획득할 것이라는 발상은 경박하다는 말 이외에는 할 언어가 마땅찮다. 이 책을 읽어내면서 우리사회의 눈높이를 이해하게 되었다면 그걸 수확이랄 수 있을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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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크 독트린 - 자본주의 재앙의 도래
나오미 클라인 지음, 김소희 옮김 / 살림Biz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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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뿌리내리고 국민경제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그러나 경제력이 취약한 세계의 어떤 국가에나 잔인성과 탐욕으로 가득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국부를 착취한 밀턴 프리드먼과 그 추종자들, ‘시카고 경제학파’, 일명 ‘시카고 보이즈(Chicago Boys)’가 발을 디디지 않은 곳이 없다.

“Shock Doctrine"은 국가(민)경제 및 사회에 대한 충격을 인체에 대한 생물학적 충격과 대비하여 생체적 비유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그 공포와 혹독함, 잔인성,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있다.

이 저술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분하여 이해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美중앙정보국(CIA)의 사주를 받고 진행된 캐나다 맥길大의 인간에 대한 전기충격 실험과 그 의미, 고문방법으로서의 활용, 그리고 시카고大의 밀턴프리드먼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근본주의자들의 재난자본주의 본질을 성찰한다. 둘째로는, 이들이 어떻게 세계경제를 식민화하였는지, 바로 ‘쇼크(Shock)요법’을 어떻게 전개하였는지,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획득하였고, 그들이 획책한 대상 국가들의 참상은 어떠하였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끝으로, 재난자본주의의 현상과 이 충격의 무덤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해 새로운 경제도약을 향해 나아가는, 즉 인간적 삶을 추구해 가는 남미국가들을 중심으로 인류 미래의 가치체계를 조심스럽게 진단하고 있다.

인간의 뇌를 백짓장처럼 만들고 새로운 기억을 주입시키면 완벽하게 새로운 인성을 심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狂人, 맥길大 심리학교수‘이웬 카메론’의 인간 전기충격실험은 실로 그 탐욕스러움에 혀를 내두르게 한다. 지속적인 전기충격과 다량의 환각제, 화학물질을 투여하여 기억을 지워나가는 이 끔직한 인간개조 실험은 오늘날 CIA 고문기법의 핵심을 이룬다. 이 실험은 결국 인간성만을 황폐화시키고 정상인을 정신분열자로 둔갑시키는 역할 이외에는 어떠한 의학적 성과도 얻지 못한 잔인한 인체실험이었으며, 다만 고문기법으로서 환영 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기충격 실험, 즉 충격(공격)을 가해 하얀 백지처럼 만들어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면 의도한바 대로 이상을 실현 할 수 있다는 망상을 경제이론에 그대로 이식한 자들이 바로 밀턴 프리드먼과 그 추종자들, 1970년 이래 오늘의 미국자본주의, 아니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시카고 보이즈’다.

케인즈의 공공정책부양과 서민복지시스템을 포함하는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완전한 자유방임적 근본주의적 자본주의를 주창한 시카고 보이즈(Chicago Boys)가 미국정부와 자본가들의 이해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최초로 공격을 가한 국가는 남미의 칠레정권이었다. 오랫동안 서구자본에 침탈된 사업들을 공기업화하고 공공서비스를 강화하여 수탈로 신음하던 국민경제를 복원하려던 1970년의 칠레정권은 미국의 쿠데타지원으로 축출당하고, 시카고 보이즈로 구성된 정부가 구성되기에 이른다. 이 사악한 자본주의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가와 세금을 올리고,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헐값에 사들이고 전기, 상수도, 의료, 언론 등을 장악하여 민간경제를 주물럭대는 것이다. 이의 실현을 위해 이들은 우선‘쇼크요법’을 사용한다. 바로 국민과 국가를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여 어떠한 판단도 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에 몰아넣는 것이다. 반대세력이나 이견을 가진 자들은 모두 감금과 고문으로 회유하고, 그렇지 않으면 살해하여 피가 낭자한 공포가 같이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넣었다. 그리곤 그저 부패한 독재정부 또는 전제정권과 결탁하여 부를 주워 담는 것이다. 헐값에 팔아넘긴 공기업의 댓가는 부패한 정권이 가져가고, 거저 챙긴 막대한 부는 시카고 보이들, 미국자본의 넘치는 몫이었다. 대신 국민들의 대다수는 빈곤으로 추락하고 국가경제는 참혹할 정도로 피폐해지는 결과만 남는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실체이다.

‘남미 원추지대’로 표현되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등 남미국가들이 한결같이 프리드먼의 시카고보이들로 구성된 미국의 사악한 자본주의에 의해 극단적 충격요법을 맞이했다. 바로 오랜 서구의 식민화로 신음하던 이들 국가들에 경제개발자금을 지원해준다는 명분하에 강요된 Shock Doctrine이었다. 상상을 넘어서는 막대한 부의 창출에 맛들인 미국 자본주의는 쇼크를 그칠 줄 몰랐다. 1990년 초의 몰락한 공산주의 국가 러시아의 옐친과 공모한 대대적인 공포정치와 민영화의 사례에서부터, 중국의 덩 샤오핑의 천안문사태로 이어진 폭력과 공포의 쇼크와 시장경제의 도입, 남아프리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이라크 등의 쇼크요법과 파렴치한 착취, 자본수탈의 사례가 끝없이 이어진다. 여지없이 진행되는 자본주의의 무차별적 공격, 쇼크와 공포, 그리고 민영화, 자본 약탈, 남는 것은 국부를 착취당한 국민들의 빈곤심화와 황폐한 도시, 신음하는 농촌의 어두운 그늘만 있다. 그리곤 시카고 보이들과 사악한 미국자본은 떠나버렸다.

여기서도 드러나듯이 자유시장경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쇼크를 주고 반대세력을 숙청하는 프로그램이 전제가 되는 독재 내지 전제정권을 그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럼 우리 대한민국은 시카고보이즈의 이 잔인하고 혹독한 수탈을 피해갔을까? 1997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한국자본시장 공격은 외국인 투자 자본을 급속하게 한국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 달러화에 대한 원화의 환율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고 급기야는 외환위기의 국면에 이르렀다. 국가경제가 휘청거려 대외차관이 절실할 때 미국정부와 세계금융시장은 한국경제가 완전히 침몰 할 때까지 외면했다. 그리곤 때가 오자 - 충격으로 경제적 공포와 두려움으로 정부와 국민이 정신을 잃어버리자 - 시카고 보이들이 이끄는 IMF는 오만한 얼굴로 구제금융을 들고 나타났다. 역시 조건이 있었다. 바로 대기업 및 공기업, 금융기업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인력삭감), 그리곤 조속한 민영화조치(기업 매각), 정부예산의 긴축 즉, 공공정책 집행의 축소 등이 그것이다. 미국금융자본에 종속된 한국경제는 불가피한 것이었고 차기 대선후보자들까지 이 조건을 지키겠다는 각서를 제출하고서야 비로소 그 더러운 자금을 받을 수 있었다. 1910년 경술국치에 이은 20세기말의 또 한 차례의 국치일이었다.

이때 우리의 은행들과 D자동차를 비롯한 S자동차, 중공업 등 대기업들의 지분이 무더기로 실제시장가의 10%도 안 되는 가격에 그들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시카고 보이즈의 이념으로 무장된 네오콘은 단기투기자본까지 동원하여 한국기업들을 유린하였다. 그들은 천문학적 이익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미국의 자본주의가 한국시장을 그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시장으로 공격을 시작하고 있다. 다시 반복되는 환율의 통제 불능 사태, 금융쇼크(Shock)!, 다시 밀려오는 두려움에 안달하던 한국경제, 원-달러 통화스왑으로 달러 수혈, 공기업의 인원 감축시작, MBC방송을 시작으로 공기업 민영화의 목소리가 MB정부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다. 그리곤 규제의 무차별적 해제, 즉 자유방임적 자유시장경제 바로 자본주의 근본주의의 전형인 프리드먼식 착취경제시스템으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45조원이나 소요된다는 4대강 유역 개발사업의 재원조달은 어디서 할 것인가? 가뜩이나 가벼워진 국민의 주머니, 세금으로 조달하겠다는 것인가? 누굴 위해서? ... 부자들을 위해서, 재벌을 위해서, 미국 자본주의자들을 위해서... 주시할 일이다! 답답하다...

이렇듯 미국 금융자본(IMF, 세계은행 포함)에 의존경향이 큰 국가는 예외 없이 시카고보이즈, 그리고 그들의 이념을 추종하는 자본가세력의 사냥감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세계화란 프리드먼식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모습을 하고 수탈과 폭력으로 점철되어있다.

이러한 '쇼크독트린(Shock Doctrine)'은 지향하는 목적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9.11테러로 지칭되는 사건은 이 천박하고 폭력적인 미국의 자본주의자들에게 미소를 짓게 했다. 더 할 수 없는 매혹적인 부(富)창출의 아이디어를 안겨주었다. 바로 ‘재난(災難)자본주의’라는 브랜드를 공고하게 하여주는 아이템이 되었다. 정부의 간섭이 배제된 완전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프리드먼과 추종자, 체니, 럼스펠드, 조지 부시...는 국가안보력의 증강, 확충이라는 명분으로 정부의 안보, 군사기능을 민간화하기 시작했다. 제약, 무기, 보안시스템, 경비회사, 구호식품, 군대..., 재난은 곧 부를 창출하는 경제아이템이 되었다.

이라크에 대한 침공은 럼스펠드를 비롯한 이들 재난자본주의자들에 의해서 오랜 기간 계획된 자본수탈프로그램이었다. 원유를 비롯한 중동지역의 부를 착취하기 위한 정교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으며, 군사작전도 재건계획도 이미 산업이었다. 때려 부셔서 아무것도 없게 만들고 다시 세우고, 부숴버릴 때 돈 벌고, 다시 세우며 돈 버는 재난자본주의는 시카고보이즈의 일대 쾌거였다. 이라크의 국부는 침략자 미국의 것이었다. 이라크인들은 그네들의 재건사업에서조차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제 재난은 곧 경제부흥, 부의 증대하는 공식이 확고해졌다.  즉 소수의 부자는 더욱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대다수의 국민은 가난해지는 공식.

스리랑카를 휩쓴 쓰나미의 현장에서, 이스라엘이 보이는 팔레스타인과 인접국가에 대한 오만한 비타협 행위에서, 그리고 태풍 카트리나가 쓸고 간 미 서부지역 뉴올리언즈의 황폐화된 현장에서 ‘재난자본주의’의 그 더럽고 사악한 탐욕에 찬 자본주의를 본다.

이 걸작중의 걸작인 ‘나오미 클라인’의 자본주의 모순과 실태에 대한 적나라한 통찰은 확고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시장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로 다시금 30년간의 독재와 전제정권하의 자유주의시장경제로 신음하던 빈곤을 털어내고 재건하려는 남미원추지대 국가들의 새로운 모색에 격려를 보내고 있다.

어려운 재정은 서로 인접한 그네들의 원추지대국가들이 블록화하여 상호 지원하는 체제로 발전 성숙시키고 있다. 무역은 현찰이 오가는 거래가 아닌 바터시스템을 확대하고 있으며, 외국기업에 침탈된 공공 서비스 를 위한 기업은 다시 공기업으로 전환하고 있는 등 공적투자의 확대와 국민의 자유로운 시장경제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더구나 IMF나 세계은행의 자금지원을 거절하고 미국금융자본과의 거래를 최소화하였을 뿐 아니라 자유무역협정을 파기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들 국가가 새로운 행보로 정한 제3의 길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희망의 빛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실체에 혹독한 시련을 겪은 남미국가들, 러시아,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그들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더구나 이태리, 프랑스 등 영국을 제외한 유럽 국가들의 대다수는 신사회주의 노선을 걷고 있으며, 스웨덴 등 북유럽국가들은 복지사회국가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유독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란 미국의 행보에 보조를 맞추려는 유일한 국가가 되려는 한국을 이해할 수가 없다. 여전히 미국금융시장에 발목이 붙들려 있고, 미 달러에 직접 연동하는 환율체제를 고집하는 한국정부, 가장 심각한 모순을 지니는 근본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을 모방하는 한국경제가 더욱 안타깝다. 자본주의의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지난 30여 년간의 극악한 자본주의의 폐해를 이처럼 명쾌하고 지적(知的)으로 해부한 저술의 출현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21세기 걸작중의 최고의 저작이다. 해박함과 열정, 지성에 그저 탄성만을 질러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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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비타 악티바 : 개념사 4
이재유 지음 / 책세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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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붕괴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가 세계의 유일한 가치처럼 되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같은 작자는 역사의 종언이라 외쳐대며 자본주의 영원성을 예단하기도 하였다. 21세기 들어서자 밀턴 프리드먼과 그 추종자들인 자본주의 근본주의자들이 세계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저지른 폭력의 가해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분화와 갈등을 이미 초래하고 있다. 급기야 세계의 자본을 마음대로 주물러대고 지구전역의 인류를 노예화하기 위한 슈퍼클래스란 새로운 계급을 지칭하는 용어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계급이란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130여 쪽의 이 짤막한 저술은“먹고 사는데 급급해서 정신적 영역에 눈 돌릴 틈도 없는”지구촌 대다수의 인류인‘노동자’의 각성을 위한 자기인식을 지원하는 기본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다만, 다소 고전적인 투쟁론에 저술의 취지를 두고 있어 세계시장의 글로벌(Global)化에 따라 발생하는 경제식민화로 인한 지배와 피지배에 대한 관점까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계급의 출현과 의미, 계급의 역사성과 그 갈등, 계급의 이해와 새로운 사회를 향한 계급이론을 수월한 언어로 그 핵심들을 적확하게 정리하고 있어 산업화시대 이래 자본과 노동의 이 고착화된 계층의 갈등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 누구에게든 훌륭한 안내서이자 문제해결을 위한 참고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마르크스와 베버의 계급론에서부터, 그리고 카우츠키의 경제결정론과 그람시, 알튀세르, 들뢰즈에 이르는 계급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이론이 정연하게 설명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중대하고도 의미심장한 의지를 가시화하고 있는데, 그 첫째는 노동자가 과연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새로운 이상의 세계를 위한 주체가 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러한 자본주의 해체의 방법이 개량적인 접근보다는 변혁적인 즉, 제3의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와 자본가가 제공하는 생산수단을 이용하여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노동자인 피지배자의 구조가 만들어내는 부의 극단적이고 불균형한 분배는 이제 네오콘같은 극소수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자들이 전 인류를 노예화하여 조정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작게는 한국사회의 소득 양극화로 인한 소수의 거부(巨富)가 전체 국부의 80~90%를 차지하고, 빈곤층을 확대시키는 형국처럼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갈등은 이를 인식치 못하는 노동계급의 착취와 소외를 보다 고착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 저술은 계급(Class)의 진정한 의미의 제공을 통해 피지배계층인 우리들의 인간적인 삶의 향유를 위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사유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으며, 그 출발점으로 노동자의 이중성이란 딜레마의 해결을 위해 산별 및 업종노조와 같은 노조의 연계가 갖는 의미와, 노동자 계급의 자기생산 교두보인 가족의 투쟁장소로서의 중요성, 그리고 가사노동의 사회화, 즉 여성의 가사노동에서의 해방이 계급투쟁의 기점임을 주장하고 있다.

경제기반이 취약한 국가들에 재난(災難)적 위기와 충격을 가해 거대자본의 이익을 실현하는 재난자본주의까지 등장할 정도로 자본주의는 사악하고 탐욕스러우며 자기모순과 폭력에 심취해있다. 이제 근본주의적이고 방임적인 자본주의 만능에 대항하는 진정한 인간적 삶의 실현을 위한 노동자 계급, 노동자적 지위의 약소국가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내야 할 위기의 시대에 있다. 개념사(槪念史)로서의 이 저술이 시사(示唆)하는 바는 자못 심대하고, 시의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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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도 이브도 없는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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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인들이 단지 동양의 내밀함에 대한 호기심에 의거한 찬탄으로 어어진 연장선에서 이번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공감할 수 없다. ‘살인자의 건강법’에서 시작된 노통브의 인간에 대한 회의와 악의 찬미, 그리고 궁극의 연민과 같은 보편성으로의 접근과는 달리 사뭇 서구의 위선으로 점철된 이 작품으로 지금까지 발표된 그녀의 모든 글들이 진실을 상실한 것으로 느껴지기 까지 한다.

성년기에 접어든 21살의 여성 ‘아멜리’의 마냥 신비스럽기만 했던 일본에서의 2년 남짓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의 아멜리가 말하듯이 ‘사랑’의 이야기까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아니, 분명 사랑이 아니라 연(戀)이자 연(緣)이라고 애매한 자신 나름의 해석으로 동서의 문화적 차이라는 부존재의 언어로 피해간다. 프랑스어를 배우려는 스무살의 청년 ‘린리’를 상대로 한 최초의 만남에서 좋아하는 상대로서의 관계를 성장시킨다.

소위 남녀가 사귀는 과정에서 이국적 관습과 문화에 대한 포용력 넘치는 아멜리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연인(戀人)으로서의 성실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랑받는 기쁨을 사실의 표현으로 객관화하여 자신의 사랑은 존재치 않았음을 시종 암시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발생하는 자기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여기서부터 그녀의 진정성은 내게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이 작품은 지나치게 이기적 감성을 당연시 한다. 이는 동양과 서양의 단순한 차이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아멜리’의 행동에서는 이해와 배려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배제되어 있으며, 이를 향한 어떠한 노력도 존재치 않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자신의 자유와 자기실현에 대한 상대의 멋스런 이해와 같이 자기식 이해가 완결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식이다.

벨기에로 어떠한 언급도 없이 일본을 떠난 후, 약혼자인 린리의 구애가 거칠게 요구되지 않은 것을“그는 졸렬하게 요구하지 않았다.”고 지극히 자기중심적 해석을 내리는 지독한 에고를 보인다.

여기에선 그 누구도 죽음에 이르는 자가 없다. 마치 강자가 약자에 선심 쓰듯‘악(惡)’이 없기에 죽음이 필요치 않았다고 아멜리는 떠벌린다.

물론 ‘린리’는 그녀도 인정하듯이 그 순수한 사랑에 악이 게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는 역겨운 악의 오만한 이기심을 아멜리로부터 본다. 그녀가 내건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진실을 밝히지 않고 떠났다는 주장은 공감하기 어렵다. 아니, 결혼은 자유의 반의어라는 황당한 위선일 뿐이다. 교묘한 언어의 장난이고 술책이기에 서구 중심의 시선으론 읽히지 않을 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배신이고 사악함이다. 그래서 노통브가 보다 자기에게 솔직하였다면 린리의 손을 통해 아멜리의 목을 조르는 기쁨을 선사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작품은 비로소 ‘아멜리 노통브’식 소설의 공평한 선택이 될 것이다.

린리 어머니에 대한 아멜리의 태도에서, 약혼의 그 절묘한 유보적 가치의 부여에서, 동양적 집단 가치에 대한 서구의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갈등이 진지하지 않지만 스칠 듯 지나간다. 아멜리의 후지산에 대한 찬미와 사도섬의 내경관(內景觀)에 대한 감탄, 청명하고 신선한 도시의 공기까지 모두 자신의 감상에 대한 도취일 뿐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나 경외, 동화된 감상이 아니다. 오직, 자기애(自己愛), 완벽한 개인적 자유의 가치만이 삶의 진실이듯 주절거리는 것은 위선이다. 위선은 악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그녀의 소설이 위악(僞惡)속에 진정의 선을 이야기 했다면, 이 작품은 위선(僞善)속의 악이다.

자유(自由)란 이 추상적 분방함이 타인을 손상시키고, 그 모호함은 오직 주체의 감정적 느낌에 불과한 것일 때, 상대의 관용과 희생위에 선 자신의 자유를 어떻게 정당화 할 수 있는 것인지? 2년간 충분히 사용된 연인(緣人;인연이 있었던 사람)에 불과해버린 린리의 부족한 볼테르의 언어가 빚어낸 유치찬란한 문장 “사무라이의 우애”를 빌어 정당화하는 것은 결국 극도의 이기적 자기위안에 불과한 것이다.

‘적의 화장법’, ‘황산’, ‘제비일기’에 이르는 근작(近作)들의 세련미 넘치는 인간본성에 대한 성찰이 이 한 편의 위선(僞善)투성이 연애담론으로 붕괴되는 듯하다. 그녀가 바로 악이다. 어설픈 자기연민으로 타자를 희생해서라도 자신의 초인성만 상처입지 않는다면, 그것이 선이라고 주장하는 비열한 서구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에덴동산의 무화과를 사도의 감에 비유한 기발한 언어잔치, 이외에는 어떠한 읽을 가치도 없는 허위(虛僞)다. 진정한 동양의 아담 린리와 위선의 이브 아멜리가 있을 뿐이다. “아담도 이브도 없는”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과연 동양인들이 서구인의 이 교묘한 위선을 찾아내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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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데이비스의 미술투자 노하우 미술시장 올가이드 1
론 데이비스 지음, 최리선 옮김 / 아르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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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회화소품이라도 한 점 장만하기 위해 미술관, 화랑에 발걸음 하기 전, 미술품에 대한 나름의 감식안을 갖기 위해 시동을 걸던 완전 초보자의 미숙함과 두려움으로 주저하던 순간에 이 저작을 대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미술품 투자가로 나설 정도의 미술전문가나 재정적 여력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며, 재력 있는 컬렉터도 물론 아니다. 정말 좋아하는 그림을 형편이 닿는 대로 구입하여 벽에 걸고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호사를 누려보고 싶은 소박한 기대뿐이다.

이 저술의 제목이 미술품의 투자를 통한 경제적 이익의 실현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또한, 미술품거래를 통한 투자수익을 주된 사업으로 하려는‘딜러’를 위한 기초매뉴얼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내에 소개된 미술품 초보자 등 애호가를 위한 많은 저작들이 미술품의 소장에 대한 기쁨과 그 미술품의 작품성이 보여주는 감동, 조금 나아가서 화랑이나 미술관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용기를 불어넣어주는데 그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실제 미술품을 구입하기 위한 지식이나, 방법론, 위험요소, 미술시장의 동향, 정보와 자료수집의 방법, 미술품 가격정보와 그의 추정등과 같은 좀체 접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어 실전용으로 탁월한 저술이라 할 수 있다.

당장 전시장이나 화랑, 또는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그림 한 점을 구입하려는 초보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막막하기 그지없다. 어떤 그림을 구입할 것인가? 그 그림의 가격은 과연 얼마가 적정한 것일까? 혹 그 그림이 위작은 아닐까? 가지고 있는 동안은 충분히 즐기겠지만, 언젠가 팔아야 할 때는 팔수 있는 작품일까? 그땐 어떻게 팔아야 하는 것일까? 이왕 그림을 구입할 때 가치 있는 그림은 어떻게 구별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많은 의문들이 떠오른다. 그야말로 이 저술은 이들 내용 즉, 미술전문가들만이 지니고 있는 노하우를 숨김없이 소개하고 있으며, 어느 영역에서는 상당히 심화된 단계로까지 안내하여 여차하면 단순 애호가에서 전문딜러로의 길로 나아갈 정도에 이른다.

뛰어난 작품의 특징이란 무엇일까? 뛰어난 “그림은 해부학과 원근법, 구성, 색채와 콘트라스트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점점 더 의미 있게 다가오면서 우리 눈을 자연스럽게 이끈다고 한다. 우리의 시선을 이끌고 감동을 주는 그림이라면 그래서 내가 좋아 할 수 있는 그림이라면 충분 할 것이라고.

이 탁월하고 진솔한 저자는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쉽게 정리된 실질적 현장론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어떤 그림을 구입하여야 할까? ‘리스트에 오른’작가의 작품을 사도록 하라고 주문한다. 즉, 미술품 경매시장이나 전시장, 화랑 등과 같이 이미 미술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작가들의 작품을 구입하라는 조언이다. 그리고 미술운동을 스스로 창시하였거나, 그 운동을 따르는 특정 화파(畵派)에 속해 있는 작가의 그림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정말 중요한 핵심적 관점을 꼼꼼하게 정리하여 주고 있다.(내용을 모두 기술하는 것은 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듯하여 생략함)

엄청나게 많은 화파와 작가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초보자인 내가 이들 모두에 대해 감식안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각자 마음이 가는 화파나 소재, 작품의 주제가 있다면 해당 분야에 속한 10명의 작가들을 조사하여 연습하라고 한다. 그들의 이름, 활동연대, 작품 가격수준, 서명, 전체 작품목록,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던 액자까지 기억하도록 꾸준히 학습하고 해당 작가들의 회화전에 방문하여 비교하고 감상하면서 실전 감각을 키우면 기초적 준비가 완료 될 것이라고 단계화되고 구체적 설명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초보자가 일류작가의 작품을 구입하려다가는 구매금액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실수하면 단지 장식용에 불과한 작품가치가 떨어지는 작품을 구입하게 되는 위험까지 안을 수도 있다. 이류작가의 최상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오히려 보다 안정되고 투자가치까지 확보할 수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즐거운 주제의 작품을 구입하라. 등등... 정말 너무 실제적이어서 감히 남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보석 같은 조언들이 이 까다로운 초보자에게 감동을 줄 정도이다.

작품의 진위의 판단을 위한 기초지식들로 캔버스 기저재(基底材)에서 나무패널, 아교, 제소에 이르는 각종 미술품 기저재에 대한 식견에서부터 시장의 이해를 위한 업계소식지, 경매 카다로그, 미술잡지의 구독의 당위성, 카다로그 레조네의 그 조심스러움과 중요성 등 헤아릴 수 없는 미술품 투자에 대한 지혜들이 가득하다.

미술품의 구매전략에서 판매방법까지도, 분명 우리 대다수의 서민들은 단순히 미술품 애호가에 이르기도 쉽지 않다. 구매력도 여의치 않을 뿐 아니라, 전문성 또한 간단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한 점의 마음에 드는 회화나 소품을 구입하려 할 때 훗날의 투자가치를 고려치 않는다면 거짓일 것이다. 저자의 조언처럼 구입한 후 7~8년 후에 팔게 되면 상당한 투자수익을 실현 할 수도 있다. 그림이란 것이 천년만년 소장 할 것이 아니고 내 집에 걸어놓고 가족과 친지들이 기쁘게 즐기고, 적절한 시기에 팔아 또 새로운 그림을 구입하여 감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과정이랄 수 있겠다.

미술 시장의 추세, 현재의 유행, 재정적 계획이 아니라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미술작품이야 말로 오랜 시간 관심과 즐거움을 유지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미술작품에 대한 초보자 뿐 아니라 투자가, 딜러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저술은 진정한 참고도서로서의 역할에 어떤 모자람도 없다. 다만, 이 저작물이 ‘론 데이비스’라는 미국인에 의한 미국미술시장을 기준으로 기술되어 있어, 우리나라 미술시장의 시스템이나 현실과 다소 괴리가 있어 부분적으로 국내의 현실을 따로이 파악해야 될 요구가 발생하는 점이 아쉽다. 다만, 이 저작물의 후속으로 발간 될 한국 미술시장‘올 가이드(All Guide)’의 출간을 기대하며 아쉬움을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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