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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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대중이 영화를 감상하는 이유는 아마 해당 영화의 스토리에서의 재미, 화려한 배우의 모습, 그리고 대형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의 아름다움이 대개일 것이다. 물론 영화의 주제의식과 감독의 제작의도, 전개기법 등에까지 관심이 이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기술적 위상, 철학적 인식론, 현상학적 분석을 들이대는 이들은 거의 존재치 않는다 하여도 지나친 견해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진중권이 소개하는 이 영화담론은 “문화적 코드를 많이 이해할수록 영화의 조크를 더 많이 해독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문학이던 영화이던 아니면 그 밖의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시선이던 바라보는 이의 한정된 지식수준을 새로운 경지로 견인하여 영화 감상의 폭을 확장시켜준다.

고해상과 저해상의 화면, 흑백과 컬러화면의 대조와 같이 무심코 바라보았던 영상이 관람자에게 시사하려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음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소개되고 있는 일부 영화의 담론에 등장하는 미학, 영상기술, 미디어 문화와 관련한 용어들의 생경함은 그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을 그리 녹록치 않게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시야를 제공하여 밋밋하게 별다른 영감 없이 지나쳤던 영화들에서 전혀 새로운 흥미요소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준다.

영화 <300>의 당혹스러웠던 이미지가 “시각적 과잉(visual excess)을 통해 너무나 단순해서 무식하기까지 한 플롯의 빈곤함을 잊게”하려 하였던 것이라는 설명은 그저 도취되었던 당시의 기억을 이해케 된다. “환상이 고해상의 실재가 되어 나타나는 것. 이것이 오늘날 대중이 겪는 새로운 이미지 체험이다.”라는 ‘생성 이미지’의 시각적 이미지와 새로운 체험의 본질을 읽게 되기도 한다.
또한 <슈렉>에서 ‘포스트 모던’과 ‘패스티시 전략’을 이야기 할 때 공감의 머리를 끄덕이게 하는 설명과 유독 어둡고 섬뜩하게 보였던 <폴라 익스프레스>의 인물들에서 느꼈던 감정이 왜 그러해야 했는지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라는 개념을 통해 그 낯섦에 대한 본능적 거부의 이유를 알게된다. 이처럼 ’재현의 인식론‘에서 ’생성의 존재론‘에 이르는 시각적 이미지의 해석에 대한 다채로운 지식을 제공하는가 하면, 기술의 혁명, 미래기술과 연계하여 인간의 정신과 신체의 확장이 의미하는 대중의 욕망을 보여주기도 하고, 지각의 현상학적 분석을 통한 자극의 이전과 의미, 나아가 도덕론, 미학적 상상력으로서의 과학적 이성을 이야기하는 데까지 도달한다.

<나비효과>에서 단순히 단기기억상실증 주인공의 긴박한 스토리에 집착했던 표피적 감상에서 “다수의 플롯을 공간적으로 병행시키는 방법으로 짜인”구성에서 ‘하이퍼 링크(hyper-link)의 형식화’와 오늘날의 복잡한 “시공간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과잉 자극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취약한 인간의 정신인 전형적인‘피크노렙시(pyknolepsie)’를 이해하는 감상영역의 확장으로 안내된다.
한편, ‘인간의 골동성’, ‘인간의 확장’이라는 미디어의 ‘의족명제(prothesenthese)’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미래파’들의 전쟁의 예술성 찬양이나 피카소의 큐비즘을 통해 ‘신체의 금속화’, 양자수준의 조작가능 컴퓨터, DNA결합 디지로그 컴퓨터 탄생 등 미래를‘이식혁명의 시대’로 전망하는 담론을 즐기기도 한다.

특히, 동요하는 카메라, 외부 관찰자가 아니라 스크린 속 주인공과 똑 같이“상황의 내부에 처한 자로 찍었기에” 오마하 해변 전투의 전장이 객석으로까지 연장된 느낌을 주었다는 설명은 영상이란 시각이 관객의 촉각으로 이전되는 ‘신체의 현상학’, ‘지각의 현상학’에 대한 이해로 감상의 격을 높여준다. 이로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대비를 통해 “전략 없이 실천된 현상학의 무의미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우리 영화의 한계를 넌지시 지적하기도 한다.

<클로버 필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해상도가 지각에 미치는 영향력과 상상력, <뷰티풀 마인드>의 “정신이 위대해지려면 아름다워야 한다.”까지 영상에 대한 전혀 새롭고 신선한 관점을 지니게 한다. 아마도 폭넓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저자의 이 영상미학 담론은 대중들의 영화감상에 안목, 지적수준을 얼마간 격상시켜주는 역할을 할 것 같다. 갈수록 높아지는 국내 영화 관객의 시선을 국내 영화가 얼마나 맞추어 낼지가 우리영화의 미래를 결정하는 하나의 좌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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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시절]의 서평을 써주세요.
방황의 시절 문지 푸른 문학
다치아 마라이니 지음, 천지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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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내내 흐르던 어둡고 우울한 숙명론적 이야기가 갑자기 일갈되고 새로운 삶의 지향으로 전환되는 대단원은 작가의 세상에 대한 미숙한 관점처럼만 보여 오늘의 시선에서 그리 세련된 작품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작품의 초반부, 엔리카 가족의 빈한한 일상과 단절된 소통에서 환경결정론적인 인간의 질서를 보는 것 같은 섬뜩한 회의마저 엄습한다.

주거환경의 불안과 엄마의 죽음, 아빠의 경제적 무능력, 어린 소녀의 가사노동의 부담, 학습기회의 제약, 인간관계 형성의 한계, 이러한 피폐한 정신적, 물질적 환경에서 과연 우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열정으로 콩닥거리는 가슴과 화창한 봄날의 희망으로 충만 되어야 할 17살 소녀 ‘엔리카’에게 이러한 환경은 정말 끔직스럽다. 그때 누군가의 달콤한 속삭임과 상냥한 손길이 창백해진 정신을 어루만지면 이를 회피 할 수 있는 정신이란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러한 의문에서 작품을 바라보면‘방황(彷徨)’이란 언어로 소녀의 행동에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은 몰염치한 이기적 시선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의 시선에 동화하기 어렵다.

학위를 준비한다는 구실아래 항상 공부 핑계를 대고 만남을 거절하는 첫사랑 연인‘체사레’와의 관능적 사랑은 어린소녀가 극복하기 힘든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체사레가 준비하는 학위란 것은 계층의 상승, 부의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 이상이 아니며, 그래서 이는 부와 계층에 대한 상징적 기준이자 인간사회의 탐욕스런 이기심으로 보여 진다. 그럼에도 엔리카가 헌신적인 남자친구‘카를로’를 회피하고 약혼녀가 있는 체사레를 지향하는 것은 거부키 힘든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에 더해 가족의 안락함과 삶의 질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어떠한 가치부여도 불능한 ‘새장 만들기’는 경제적 소외자의 무능을 한껏 극대화시키고, 어머니의 직장벌이로 연명하는 생계는 세 사람의 소통장애와 위태로운 가족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취약한 가족관계의 뿌리는 거의 경제적 고통에 연유된 것으로 엄마의 죽음으로 급속하게 와해된다.

집세를 내지 못하는 아빠의 극단적 무능함은 부녀의 이별로 이어진다. 그러나 작가는 엔리카의 행동에서 당황의 기미를 읽어내지 못하게 못한다. 17살 소녀의 임신, 책임을 회피하는 체사레, 그리고 낙태에서조차 어린 소녀의 담담함만을 보게 된다. 결국 이렇게 냉혹하리만큼 처연한 엔리카의 묘사는 어떤 의미에선 절망의 초월처럼 보인다. 여기서 성장과정의 한 소녀를 상상하기는 어려우며, 그래서 소설이 취한 성장기의 방황이란 주제와 전후 모순을 읽게 된다.

홀로서기 위해 찾아가는 세상에의 첫 발은 체사레의 한때의 연인이었던 백작부인인‘바르덴고 부인’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삶의 반경이란, 인생행로에 직접적인 한계처럼 인식된다. 즉, 자신이 속한 일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인생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이 대두된다.

그러나 유산계급인 부자, 백작부인의 개인비서로 숙식을 해결하지만 이내 자기 또래의 어린 남자와의 관계에 몰입하는 비천함만을 목격하게 되고, 체사레의 부자 약혼녀와의 결혼과 그의 학업중단이 인생항로의 전환점으로 비춰지지만 엔리카의 지속되어온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결정적 갈등의 요소로 이해하기에는 무언가 필연성이 없음에도 급기야는 구태의연한 계몽적 귀결로 치닫기 시작하기까지 한다. 또한 부기학교 동료이자 희생적인 남자친구‘카를로’를 저버리는 행위는 사회의 계층과 부에대한 갈망을 고착화시키는 작가의 또 다른 의식처럼만 보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해 단순한 육체적 해갈을 위한 욕망의 대상, 또는 계층과 부의 방편정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등장 여성들이 이를 극복하려는 어떠한 적극적 행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 작품은 한 소녀의 성장기 방황도 아니요, 침해받는 여성 권익의 보호도 아니며, 사회제도의 위선이나 자본주의의 계층적 고착화에 대한 고발도 아니며, 생존하는 것은 다만 환경결정론적 계층의 고착화 지지가 아닌가 할 정도로 당혹스럽다. 너무 극단적 해석이라 보여 질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를 불식할 어떠한 필연적 이야기나 주장을 찾을 수가 없다. 1960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하나 시대를 포용하거나 작품의 완결성 측면에서 오늘에 읽히기에는 많은 취약성을 가진 작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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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비행기 - 팝아트 소설가 죠 메노 단편집
죠 메노 지음, 김현섭 옮김 / 늘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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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 범상치 않은 제목들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사람이 구름이 되어가고, 달의 건축양식이란 또 뭔가? 세상의 종말에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미니어처 코끼리는 인기가 있다니! 그리고 비현실적인가 하면 아이의 낙서 같기도 하고, 멋진 추상화 같기도 한 삽화들이 책장 곳곳에 숨어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그 전형적 냄새가 확 끼친다. ‘앙드레 브르통’의 극단적 문체주의 작품보다는 ‘나탈리 사로트’ 의식과 의식저변의 재현에 가깝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상당히 순화되어 그저 흐름을 따라가면 될 정도이나 몇몇의 작품은 작가의 시선을 쫓는 것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굳이 작가의 의도를 살피느라 재미를 반감시켜서는 곤란하다. 그저 와 닿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음미하면 전체가 구상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의외의 즐거움에 빠져들게 되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고, 나아가 공감키 어려운 비판의식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집을 구성하고 있는 단편 속 인물들에서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형을 담아내기 위해 20편이란 숫자를 맞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이없이 은행 강도가 되는 미친놈에서부터 동성애자, 말단 경찰관, 외로움에 지친 여자와 입 다문 딸아이, 바람피우는 아내와 자살하는 남자, 권태와 진부에 몸을 떠는 사람들, 못난이와 에고이스트들, 위선과 가식, 그리고 진실의 실체를 쫓는 무수한 사람들에서 어쩔 수 없는 고독의 두려움과 좌절, 우주의 유한성과 제어력을 잃어버렸음에도 질주하기만 하는 인간들의 무한공포가 있다.

황당함, 기이함, 취약함, 하찮음, 어리석음, 결여, 분노, 짜증, 상실, 이별, 죽음, 미친 세상, 어둠... 이 무수한 인간의 변화무쌍한 감성이 다양하게 변주되어 흐르고 있다. 여기에 ‘상실감’이니 어쩌니 하는 주제를 찾으려는 어쭙잖은 노력은 거두는 것이 좋다. 소외된 감성들, 잊혀진 언어들, 어쩔 수 없는 고독들, 이성의 거대한 사유와 무력함, 그리곤 어느 순간 정말 소중한 것들이 잿빛 의외성으로 가슴에 실린다.

거대 담론에 휩싸여 보이지 않던 그 안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본다. “세상의 종말에 들리는 소리”처럼 그것은 한낱 로크론일수도 있으며, 사막의 전쟁에 나간 남편의 무심함과 달리 아이의 고집스런 무언(無言)과 하얀 린넨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빛의 에어포트”에서 삐죽이 올라오는 마천루나 “유나바머와 우리 형”의 문명이 뱉어내는 찌꺼기의 추악함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폭탄테러 뒤의 조작된 ‘문명의 충돌’이니 하는 허위의식과 ‘스톡홀름 신드롬’과 같은 지식의 허영과 억측스러울 뿐 보잘것없는 이야기들에 대한 조소와 반란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룸메이트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벌이는 그 열정적이고 격렬한 섹스의 울림을 피해 우주인 헬멧을 뒤집어 쓰고 있는 오드리나, “오션랜드”에서 보여 지는 나와 타자간의 진실의 간극, 인간피라미드 꼭대기에 서는 치어걸의 실존의 체험과 같이 세상과 화해하고 조화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임을 확인한다. 지독스럽게 고독하고 공허한 이야기들이 손을 대면 구름수증기로 변해버리기만 한다. 작품집의 마지막 편인 인구 30여 만 명의 작은 나라,“오늘날의 아이슬란드”는 그 화산과 지진, 혹한 등 척박한 땅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사실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죠 메노’의 이 작품집은 이처럼 의외의 소재와 상상력이 결합한 낯선 표현으로도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구나 하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읽을수록 맛이 나는 “달의 건축 양식”이나, “사람은 구름이 되어간다”는 오랫동안 회자될 명작으로 추천하고 싶어진다. 어쩜 세상은 진지함을 코믹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진실이 드러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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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난화 경제이야기 - 환경이 세계 산업지도를 바꿔나가고 있다
김종서 지음 / 참콘경제연구소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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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가 자연에 실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면서부터 지구를 폐허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이 저지른 극악한 환경침해의 경고 메시지가 시급한 현실의 문제로 그리고 존속 가능한 세계를 열기위한 처방전으로 구체화 되어 기술되고 있다.
지구환경 오염, 그 폐해의 지적과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어제 오늘의 외침은 아니다. 다만, 성장과 소비 일변으로 치닫는 인간 욕망의 그칠 줄 모르는 무한성이 이를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저술은 우리 인류가 아니 우리 대한민국도 이러한 지구환경의 절망적 상황에서 예외일 수 없으며, 바로 이러한 위기에 대한 다급성을 명료하고 바르게 인식함으로서 생존, 나아가 성장 동력의 준비와 발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하는 당위성에 직면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재앙에 대한 위기의 실상 - 지구위에 존재하는 얼음의 90%가 있는 남극의 해빙과 해수면 상승, 국지성⋅게릴라성 집중호우 등 기후 이변, 산성비의 수용성(水溶性) 알루미늄 적출로 인한 생명의 멸종, 사막화, 물 부족 등 - 을 통해 오늘의 환경오염은 지구의 자정(自淨)능력을 이미 초과하고 있음을 보다 긴박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세계 각국의 환경보전을 위한 동향은 물론 선행되어야 할 과제의 제시, 대안의 모색까지 아우르고 있는 사회시스템의 통합적 성찰을 담고 있다.

특히, 1997년 12월, “온실가스의 감축 없이는 지구의 미래는 없다.”는 교토의정서의 선언을 시작으로 2005년 11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탄소배출권의 거래(ET: Emission Trading), 청정개발체제(CDM: Clean Development Mechanism), 동시이행 (JI: Joint Implementation)을 내용으로 하는 교토메커니즘 도입으로 구체화되고, 2009년 이들의 실질적 로드맵 확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세계적 환경규제 활동 일정이 각국의 경제적 부담의 과중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으며, 이의 대응을 위한 우리의 자세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명쾌하게 기술하고 있다.

즉, 온실가스의 배출에 대한 규제는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당위의 명제가 되었으며, 2005년부터 시작된 EU국가들의 탄소배출권 거래제도는 기업들, 국가경제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과 같다. 전력을 비롯하여 제품생산에 투입되는 각종 원재료와 에너지는 석탄, 석유, 가스등의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필수적으로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바로 이러한 탄소배출 제품을 판매, 수출하기 위해서는 탄소배출권을 돈을 주고 사야하는 시스템이다. 결국 탄소배출의 저감을 위한 노력이 없는 기업의 경우 제품가격의 상승 초래, 이윤의 감소, 기업경쟁력 약화, 국가경제의 위기까지로 이어지는 정말의 생존적 위기를 안아야 한다.

이미 일본을 비롯한 선진유럽 각국들은 2013년부터 가동되는 탄소배출 규제조치에 대한 다양한 준비와 실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환경은 돈이다.”라는 적극적 의식의 전환은 환경보전을 위한 비용의 증가라는 소극적 사고를 벗어나게 하고 있으며, 환경오염 물질의 최소 발생 억제라는 수준에서 생산은 물론 운송, 사용, 폐기, 재활용에 이르는 전방위적 환경규제라는 적극적 보전개념으로 변화함으로서 근본적 산업시스템의 변경은 불가피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교토메커니즘의 제도화에 따른 “배출거래 시스템의 구축 -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파생상품시장, ESCO(Eenrgy Saving Company)사업, 탄소관련 컨설팅, CDM중개서비스, 온실가스 감축인증 서비스”- 은 위기를 기회로 인식케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시장경제 패러다임의 변화를 최소화한 기반하에 경쟁적으로 참여 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고, 지속가능 사회로 전환하려는 인식을 확고하게 하였다.

이제 "환경과 경제가 통합되는 새로운 제3차 산업혁명 시대, 왓트컴(WATTCOM)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한다. 캐나다, 호주 등 조림사업이 잘 된 나라는 자국의 탄소생산 제품 판매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물론 탄소 잉여배출권을 판매할 수도 있으며, 기존의 생산 시스템에서 탄소배출량을 감축하게 되면 탄소배출권을 획득할 수 도 있다. 탄소배출권이 돈인 시대에 진입해 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지구 환경, 지구 생태계의 보전을 위한 지구촌 각국들의 합의는 자국의 탄소 배출량을 억제하는 적극적 노력으로 그 어느 때 보다 급속하게 전환되고 있다. 앞으로 40년 후면 고갈될 석유자원을 대체키 위한 신생 에너지의 개발, 탄소배출을 야기하는 제품의 재활용은 궁극적으로 “거대한 소비패턴을 줄여야 하는”필연성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류를 재앙으로 몰고 가는 온실가스의 감축을 위해서는 화석연료의 억제인 에너지 소비억제, 대체 에너지 개발, 폐기물의 재활용 방안 마련이라는 자원순환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들처럼 국가차원의 환경보전 로드맵, 즉 중장기 환경 보전계획이 아직 없다고 한다. 다만, 지자체, 일부 대기업, 국책연구소등의 개별적인 대책마련이 진행되고 있으나, 2013년부터 실행되는 탄소거래제도라는 당면의 문제를 위해서도 시급히 준비되어야 할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극한적 자원경쟁 시대인 지금 태양광 발전, 태양전지, 담수화 사업, 대체에너지 개발 등을 비롯하여 각종 공해방지 장치기술, 폐기물 재활용 기술과 같은 5RE - Reduce, Reuse, Refine, Recycle, Reconvert to energy -기술개발은 이러한 세계경제환경 하에서 향후 우리의 국가 미래 산업으로 중대한 요청으로서“위기관리에서 산업의 성장 동력을 찾아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이렇듯 존속 가능한 세계를 열기위한 과제로서 “새로운 정보 변혁이 전제되어야 한다고”지적하면서“상상력, 네트워크, 진실 알리기, 학습, 그리고 사랑을 동원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것은 낱개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세상(홀로닉스:Holon, Whole+One)을 인식하고 실현하는 길이라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를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 저술은 산업화와 거대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불러온 멈춤 없는 온실가스의 배출이 이젠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시점에 임박해 있음, 그리고 지금 당장 온실가스를 감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구촌 곳곳의 현상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장만능의 인식과 경쟁지향의 자세는 자제되어야만 할 궁극의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에 도달해 있음을 각성케 하고 있다. 이렇듯 경고하는 위기의 메시지에 더해 탄소저장고 조성계획, 해외 조림사업을 통한 청정개발체제를 통한 탄소배출권의 확보와 같은 준비와, 소개 된 다양한 기회산업들의 제시, 과제의 제안 등은 기존의 많은 환경침해의 메시지와 차별되는 실용적이며 현실적 대안으로서의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환경보전을 위한 우리의 이야기로서, 우리 한국의 시선으로 기술된 환경경제 학습을 위한 노작(勞作)이다. 개인은 물론 기업인, 행정관료, 정부정책자들 모두가 읽어 보야 할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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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
최현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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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人權), 그리고 당위적 가치에 머문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이 권리를 실현하는 제도, 즉 인권을 구체적으로 현재화(顯在化)시키는 권리로서 시민권의 발전과 오늘의 세계에서 보완되어야 할 기본권들을 정리하고 있다.

특히, 자연법(自然法)사상에서 출발하여 장 제르송, 수아레스, 그로티우스의 근대 인권사상, 그리고 계몽주의 사상가인 홉스, 로크, 루소의 자연권, 토마스 마셜, 아이리스 영, 소이잘에 이르는 현대 시민권에 대한 이론까지 인권과 시민권에 대한 발전과 방향에 대한 다각적인 인용과 설명으로 심도 있는 기초 학습의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인권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요구할 수 있는 자유와 서비스”라는 사전적 정의에 더해, 인간의 권리가 “자연법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의로운 상황에서, 정당하게 가지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서 발전”하였음을 고대 그리스, 로마 자연법사상의 출현을 시작으로 고대의 시민적 지위로서의 시민권을, 보편주의 시민권, 자연법에서 자연권으로의 사상적 성숙, 시민(Citizen)과 국민국가의 성립, 1789년 프랑스의《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비로소 근대적 의미의 시민권 확립, 자유권적 기본권에서 사회권적 기본권으로의 시민권리 확장, 그리고 다문화 시민권, 지구시민권에 이르는 오늘과 21세기 인권의 지향점을 제시한다.

비록 유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민 권리의 성문화라는 흠결을 가지고 있으나,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며, 신체, 재산, 언론사상, 출판의 자유 등이 확립된 프랑스 인권선언은 오늘의 인권개념의 성립에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시민 권리는 “개인주의와 보편주의를 강화해 평등한 시민권을 정당화 했지만” 동시에 경제적 불평등을 낳아 평등한 시민권을 다시금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러한 시민계급의 분화와 사회발전은 자유권적 기본권에 머물렀던 시민권을 점차 선거권을 포함하는 정치권적 기본권, 나아가 공교육, 공중의료 등 사회권적 기본권까지 보다 온전한 인권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자들은 사회권적 기본권에 대해 시장경제를 거스르는 자본주의 공격을 위한 도입으로 왜곡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는 “시장의 변덕과 불완전한 고용상황을 늘 고려해야 하는”현실에서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불가결한 인권으로 인식하여야 함을 지적한다.

나아가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인권의 내외민(內外民)에 대한 차별은 다른 국가시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문제 등 지구화(Globalization)에 따른 지구공동체의 실현, 즉 전지구의 보편적 인권이란 가치를 실현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문제화하고 있다.

또한, 여성, 노동자, 유색인종,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보호와 특정국가내 다종족, 다문화로 인해 소외되는 시민의 권리까지 보장해야 한다는 다문화시민권까지 인권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기도 한다.

이처럼 인권과 그 실현제도로서의 시민권에 대한 개념을 오늘의 문제적 인식까지 포함하여 기술하고 있으나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첫째, 국민과 국가를 뛰어넘는 기구와 조직으로서 유럽공동체를 제시하고 다종족, 다문화의 통합예로서 온전한 인권, 지구화된 인권의 예로서 설명하고 있으나, 유럽공동체의 실상은 독일과 프랑스의 2개 핵심국과 영국, 벨기에, 이태리 등 크리스트교(카톨릭 포함)라는 종교권으로 통합되고, 오히려 동일 유럽권에 있으나 동방정교, 이슬람교권인 국가들은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배타성으로 더욱 선명하게 블록화하는 현재의 실상을 왜곡하는 설명이 되어 인권의 지구화가 아니라 인권의 극단적 차별과 훼손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설명치 못하게 되고 있다.

둘째는 지구화, 집단인지적시민권,  다문화시민권 같은 거대 담론에 치우쳐 오늘의 세계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의 현장인 중동지역에서의 서구와 유태민족주의의 반인권, 비인간적 인권부정의 실상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실제 시민권, 인권의 문제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미국과 서구에 의해 또다른 형태의 자본식민화, 재앙자본주의에 의해 18세기의 인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억압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현실세계에서 발생하고, 가까운 미래에 예견되는 서구 중심적 편협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문명의 충돌’과 같은 왜곡의 발상이 오히려 문명권의 패권주의로 치닫게 하여 세계를 종교적, 자본적 정체성에 의해 새로운 블록으로 재편하고 시민권 즉, 인권의 배타적이고 차별적 실행을 심화시키는 것을 설명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소책자는 모두(冒頭)에서 언급하였듯이 인권, 시민권에 대한 기본적 개념 정립을 위한 기본안내서로서 쉽고 충실하게 정리되어 있어 대중적 이해를 확충하는데 유용한 기여를 하는 도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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