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핏 - 21세기 위대한 투자신화의 탄생
로저 로웬스타인 지음, 김기준 외 옮김, 최준철 감수 / 리더스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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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계최고의 부자임에도 겸손한 라이프스타일로 인하여‘촌스러운 자본주의자’라 불리며, 대중의 사랑과 숭배를 받는 자본가는 일찌기 없었다 해도 무지한 얘기는 아닐 것이다. 20세기 금융자본주의의 역사 그 자체이자 주류의 금융시장 행태에 휩쓸림 없이‘가치투자’라는 자신만의 투자인생을 묵묵히 걸어온 자본주의 모델, ‘워렌 버핏’의 이 전기(傳記)는 그 만큼이나 독특하고, 흥미로우며, 엄숙한 교훈을 제공한다.

이러한 세상의 관심은 버핏의 출생에서부터 시작되는 성공한 자본가의 신화적 일대기를 그려내고, 시시콜콜한 모든 것을 담으려는 과장된 무수한 평전, 전기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저작은 전혀 새롭게 읽히는데, 오랜기간 세계금융시장의 중심에서 그 실태를 보도하던‘월스트리트 저널’기자인 저자의 경력만큼이나, 버핏의 굵직한 투자행위들 마다 당시의 시장환경 상황을 거시적 경제흐름뿐 아니라 미시적인 개별 금융기업, CEO들의 반응까지 세밀하게 묘사하여, 금융투자가, 자본운영가로서의 시장 통찰력과 이론화된 신념을 체득할 수 있도록 하여주는 전문가적 식견으로 기술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버크셔해서웨이부터 가이코, 살로먼의 대주주로서, 월가뿐 아니라 세계금융시장을 들썩이게 하였던 사건의 한 복판에서 버핏이 보여주는 승부사로서의 기질이나, 아내 수전을 비롯한 가족들, 그리고 그의 사적 인간관계에 대한 조명, 부에 대한 가치관 등 인간적 행위들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일례로‘워싱턴포스트’의 회장인‘케이 그레이엄’과의 끊이지 않는 의혹의 눈길들을 이 책에서 비로소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극적 전환점이나 영향을 간과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예리한 기자의 눈을 번뜩이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모델로 일컬어지는 버핏이 일생 추구한 자본주의란 어떤 것인지 하는 이념적 정체성에 대한 측면도 하나의 관점이 될 수도 있겠다. 이 측면을 선명하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경제석학인‘폴 새뮤얼슨’을 비롯한 ‘효율적 시장이론(Efficiency Market Theory)'주창자들과의 주식시장에 대한 논쟁을 들 수 있다. “회사의 이용가능한 모든 공개정보는 그 회사의 주가에 이미 반영돼 있다.~(中略)~ 트레이더들은 가격을 설정 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하다.”는 이들에 대해서, 버핏은 “트레이더들이 애덤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한다는 웃기는 얘기”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 이에 더해 “펀드 기록은 다트를 던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새뮤얼슨의‘시장의 비이성적 측면’에 대한 폭로는 버핏의‘가치투자’에 의한 성공을 한낱 행운이라고 무시하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례에서 버핏의 자본주의 색채는 다소의 혼란을 일으킨다.

한편 기업 매수와 매각행태에서 본 경영철학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신념의 한 표현인 “진러미(gin rummy; 매번 가장 가능성이 적은 사업을 버리는 일)식 경영은 우리의 투자형태가 아닙니다.~(中略)~현금발생이 기대되고 노사관계가 좋으면 평균이하의 기업도 팔기를 거부할 겁니다.”이나, 불가피한 기업규모의 축소 등 기업정리로 인한 노동자 해고에서, “노동자들에게 칼 마르크스보다 관대하진 않았지만 애덤스미스보다 덜 무자비한 타협점을 찾았다고 생각했다.”에서와 같이, 극단적 시장자본주의나 네오콘류의 보수적 입장에 있지 않는, 굳이 단순한 언어로 정의하자면 일종의 중도적 자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엿 볼 수 있다.

평생의 스승인‘벤자민 그레이엄’의‘가치투자’를 그만의 독특한 ‘장기 가치투자’방식으로, 즉 증시 비평가들의 “미래를 확실히 볼 수 있다는”터무니 없는 추측에 편승한 투자로서가 아니라, 기업의 내재가치에 대한 분석과 통찰에 의한 저가주 공략과 성장주에 대한 투자행태를 목격 할 수 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네 주식중개인을 비롯한 자산운용자들, 투자자들에 많은 교훈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주식의 겉을 보지 않고 그 내면에 깔린 경제적 본질을 살피면 주식은 리스크가 크지 않다.”는 그의 통찰력에서부터, 비이성적 거래를 야기하는 기업 경영자들이나, “많은 경영자가 정부가 납세자의 돈을 마구 써대는 것은 한탄하면서 자신이 주주의 돈을 마음대로 쓰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그의 비판에서 자본주의 윤리와 도덕적 책임에 대한 고결한 신념을 읽는 것과 같다.

이 세계 최대의 금융투자가이자 부자는 단기차익 집중투자인 하이레버리지(high leverage)나 파생상품과 같은 부도덕하거나 투기성이 강한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투자는 한적 없다는 사실이나, 사악한 기업사냥꾼인 ‘칼 아이칸’이나, ‘솔 스테인 버그’같은 그린메일(투기자본이 특정기업의 주식을 대량으로 매입한 다음 해당기업 경영진을 교체하겠다고 위협할 때 경영진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비싼 값에 투기자본이 보유한 주식을 되사들이는 행위)을 겨냥한 야비한 행위자들을 쓰레기 취급한 것은 정의(正意)만으로서도 성공적인 투자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그의 자본주의의 긍정적 가치관을 엿보게 한다.

1987년 10월 19일, 검은 월요일(Black Monday)라 부르는 금융시장의 몰락에 대한‘초현대적인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8월 12일, 소유 주식을 여간해서는 팔지 않는 그가“버크셔의 주식 포트폴리오 모두를 매각”하는 결단은, 월스트리트의 야만성과 부도덕성이 만들어낸 주가 상승의 붕괴를 확신한 것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시장 추락의 징후에 대한 버핏의 통찰은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석도 없이 군중심리에 의해 작동하는 증권시장에 경도된 상황에서 한 걸음 떨어져, 기업과 시장의 내재적 가치를 신뢰하는 그에게는 아마 미쳐 날뛰는 모습으로 비추어졌을 테니 말이다.

가이코의 회생이나 살로만의 재무부채권에 대한 부도덕한 독점입찰행위로 인한 위기의 대처에서 보여주는 버핏의 행동은 지극히 도덕적인 행태를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미국의 한 변두리인 오마하의 촌놈, 청교도라고 까지 그의 정직성을 조롱하던 타락한 월스트리트에 진정함과 솔직함, 부정에 반대하는 정의의 태도가 승리하는 모습은 버핏을 숭배하고, 그의 금융투자 신념이 하나의 교리가 되어 신앙이 될 정도에 까지 이르렀음을 이해하게 된다.

부잣집 아이가 다른 아이들 보다 출발부터 앞서가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는‘초우량부자’, 버핏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일면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그의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행태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 기업가들, 지배계층, 금융 관련자들에게, 아니 우리들 모두에게 부에 대한 귀중한 관점을 보여준다. “신뢰가 누더기가 된 사회에 투자관계를 거의 사회계약 형태로 발전”시킨 사람, 주당 10여 달러에 불과했던 버크셔해서웨이를 2007년 주당 14만1,600달러에 이르게 성장시킨 투자의 귀재, 금융신화를 만들어낸 사람, 전 재산의 85퍼센트를‘빌&멜린다 재단’에 유증을 통해 기부한 사람, 금융자본주의의 진정한 정의를 보여준 사람의 분석적 성찰이 돋보이는 탁월한 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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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매달린 원숭이
헤르만 요세프 초헤 지음, 박병화 옮김 / 열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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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룩수리아(luxuria;괘락과 음란), 굴라(gula;탐식), 아케디아(acedia;무관심,나태) 등 기독교의 전통적인 7대 죄악을 21세기 현대사회의 정신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노정된 문제의식을 해체하여 어떤 미덕으로 대체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빼어난 사회문화적 통찰을 담고 있다.

제목과 저자의 신분에서 받은 종교적 설교나 훈계와 같은 선입견은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통섭적 지식을 통한 현대 사회 병리 현상들에 대한 비평적 식견임을 발견하면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쾌락은 성공 지향적 삶에 몰두하는 현대인의 모습으로 변화하는데, 마치 성공하면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감에 휩싸일 것 같지만, 결코 이러한 느낌을 “넓고 전체적인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보존하지는 못한다.~(中略)~성공은 쉽사리 사라지며 사라진 다음에는 다시 새로운 성공에 대한 집착이 시작된다.” 속도와 신경과민, 초조함이 끊임없이 인간을 불안하고 침착하지 못한 상태로 몰고 가는 오늘의 삶에서 인내는 보기 드문 미덕이 되어버렸고, “사랑의 하느님, 인내를 주소서, 그러나 빨리 주소서!” 하는 이 우스개는 인내가 없는 오늘의 현실을 보여 한다. “성공이 의미와 결부되지 않고 멋대로 떠다닌다면 그것은 결국 미련한 탐욕의 결과일 뿐. 우매한 성공의 욕구에 사로잡혀 인생을 허비하게 될 것”임을 알려준다. 
 

또한 탐식은 오늘의 쏟아지는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획득하려는 형상으로 비유되는데, 그래서 탐식의 기회에 맞는 좋은 입담거리의 소재인 삶의 지혜라고 끊임없이 뱉어내는 허튼소리들을 늘어놓으며 인기를 모으려고 안달을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비루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구나 이들 경험이란 것을 들여다보면, 감각적인 느낌, 인지의 첫 단계에 불과한 미성숙한 체험의 나열임을 알게 된다. 내면에서의 숙고와 성찰의 과정을 거쳐 정신적으로 평가될 때 비로소 경험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 일 것이다. 해석되지 않은 체험의 양적 포화로 더 이상 가공 할 수 없는 인상들로만 가득 찬 자기과시와 외형중심적인 속 빈 인간들은 어떤 체험이 경험으로 전환하는데 쓸모가 있는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즉 어떤 일이 의미가 있는지를 긍정적으로 분류할 능력을 상실한 것일 게다.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의미를 만드는(make sense)일은 한계에 달한, 또한 무절제를 바탕으로 한 경험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굶주림의 고통으로부터 헤어 나오는데 중요한 덕목이 될 터이다.

한편 무관심은 “인간이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덕”이란 측면에서 해석을 시작하는데, 자유는 행동할 때만 얻을 수 있기에 그렇다. 무기력과 수동성이라는 독이 온몸에 퍼져 있음에도 감지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자유를 정의하는 의무를 포기한 요즘의 세태를 안타깝게 지적하기도 한다. 나아가 우리사회에 만연한 자유의 왜곡된 이해를 시정하면서,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 수단으로 남용하거나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타인의 개입을 꺼리는 부조리가 아니라 사회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지닌 자유로서만 진정한 자유임을 직시토록 한다. 땀 흘려 쟁취하는 것이고, 그 과정은 무척이나 긴장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서 체념의 하녀인 무관심으로는 자신의 운명조차도 유지하기 힘든 것임을 강조한다.

특히 시기심에 이르러서는 물질에 경도된 현대사회의 공허하고 형식적이며 빈약한 정신세계를 각성시키고 있는데, 의미지향에서 체험지향으로 이동하는 오늘의 향락을 지향하고 인내를 거부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체험지향 사회의 기본노선은 속성상 시기심이나 질투, 시샘을 조장하며, 이로인한 콤플렉스는 소유하려는 탐욕에 한 몫 참여하려는 열망으로 냉정을 잃게 하고, 맹목적이며, 설혹 욕심을 채운다 할지라도 짧은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대상을 향해 다시금 욕심을 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시기심은 나만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을 키우고, 끝없이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며, 종국에는 반복된 자극으로 인하여 감성을 상실하고 새로운 물질, 새로운 애인을 찾아다니지만 더 이상의 효력을 발휘하는 자극을 찾지 못해 실망과 삶의 좌절에 이르는 정신의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고 만다. 이러한 현상을‘이벤트 사회’라고 부르는 저자는 순간의 느낌인 재미에 열중하고, 기만적인 감정에 최면당해 있는 현대인의 체험에 대한 무모한 갈증을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부피도 없고 기만적이며 순간적인 ‘재미’가 아니라 의미로 충만된 ‘기쁨’을 추구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날마다 지식의 한계, 만족의 한계, 신체의 한계에 부딪힌다.”그래서 한계에 봉착했다는 감정, 바라는 대로 할 수 없다는 감정은 분노로 표출된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해 굶주린 분노의 감정은 실망한 영혼의 광기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오늘의 사회구조, 환경이 더욱 부채질을 하고 있는데, 바로 동기부여만 되면 누구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부추김이다. 그러나 이들 동기부여라는 것은 표피적인, 즉 겉으로만 동기를 촉진 할 뿐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동기를 형성시키지는 못한다. 실제로 사람을 지속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기훈련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동기부여 전문가들이 내세우는“내 안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라는 말에 아무리 확신을 가져 봐도 그 효과란 것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순간적일 것이다. 16세기 카톨릭의 사악한 면죄부를 닮은 오늘의 소비전략사회는 상품과 이상을 결합시켜 판매한다. 가구를 파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편의를 판다고 하고 있으며, 난방기가 아니라 따뜻함을 팔고 있다고 한다. 제품을 약속과 결합시킴으로써 소비자에게 열망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허황된 약속은 이기주의만을 부추기고 인간의 불안하고 연약하며 불확실성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외면케 한다. 진실은 이러한 동기부여란 위선이며, 실제 동기부여 세미나는 어떠한 것도 실현시켜주지 않는다. 진정 중요한 것은 한계와 불가측성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용기를 주는 이 세상의 변화 가능성이다. “사랑, 봉사, 겸손과 검소 혹은 자제, 자신의 한계를 안고 살아가는 능력과 같은 전통적인 미덕”의 지혜가 아닐까.

자만심에서는 돈이면 어디든 벌떼처럼 몰려드는 공격적인 오늘의 자본주의인 터보자본주의(Turbo Capitalism)를 화두로 하여 통제 없는 시장이 만들어내는 기계론적 경제법칙에 경도된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적 세계화를 질타하고 있다. 이들은 시장에는 친화적이지만 인간에게는 적대적인, 그리고 극심한 경쟁의 승패주의와 수혜계층과 소외계층의 극명한 분리로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영혼을 고갈시키는 시장의 횡포를 인류의 대재앙이라고까지 혹평한다.

1927년 물리학자‘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는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했다. 물체의 근본적인 불확실성에 대한 믿음은 오늘의 인류에게 보편적 지식이다. 그러나“우리의 일상생활은 인기목록과 순위로 결정된다.”현실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다는 총체적 측정 가능성에 맹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여기에는 모든 것을 규정하고 통제하려는 광기가 서려있다. 중요한 것은 수치고 이는 그들의 욕심을 부추긴다. 수치에 굶주린 자들은 게걸스럽게 수를 늘린다. 수집하고, 소유하고, 탐욕의 욕심이 채워질 때 까지. 돈이 창출하는 가치는 본디 인간적인 노력으로 수행되는 것일 뿐 아니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임에도 모든 사물들과 같이 측정 가능한 대상으로 치환하려는 시도는 정신적인 인식의 폭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축소시킨다.
돈 만이 유일한 기준이고 다른 모든 문제는 의미가 없다면 모든 인간의 가치나 인간 사이의 관계는 탐욕의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 이상이 아닐 것이다. 일례로 통증을 객관화 할 수 있나? 르네상스시대 최고의 돔 건축물에 대한 미술사적 업적을 수치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키는 한 것인가? 고통, 정신적 노력, 미학적 감정이나 사랑을 강제로 수치화한다면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화되어 수치에 묶인다. 수량화 할 수 없는 것을 상품화하고 판매할 때 어떤 참담한 결과가 오는지 인간들은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인류의 악덕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통찰은 진정 우리들의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인간간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반성과 사색의 시간을 선사 한다. 이에 더해 저자 초헤 신부가 던지는 우리들을 향한 새로운 윤리로서의 7가지 미덕인 외부의 사물에 대한 내면의 자유로서의 겸양, 자존을 잃지 않는 자기집착의 경계로서의 금욕, 열기 한가운데 존재하는 차가움, 부드러움, 호의, 인내, 진정성, 온화, 자비의 삼촌인 부동심(不動心), 그리고 기쁨의 나눔, 진리를 위한 토대로서의 열정, 위대하고 놀라운 본질 앞에선 존재의 순수한 순종, 시기와 냉소적 멸시를 제거해주는 담대한 마음인 양보에 대한 성찰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인류를 위한 경외의 윤리학으로서, 인간의 진정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선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길을 묘사한 이 저술의 맺음말에 인용된 ‘에리히 케스트너(Erich Kastner)’의 시 구절은 잔인할 정도로 오늘의 우리를 묘사한다. 우리들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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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럼 아일랜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5-1 존 코리 시리즈 1
넬슨 드밀 지음, 서계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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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물느물, 능글맞은, 그러나 자신의 말대로 자기를 보호하기위한‘안전지대’라는 장치로서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완고한 남성우월주의자인 수퇘지”로 짐짓 행동하는 호쾌한 남자가 있다. 수발의 총상을 입고 외삼촌의 롱아일랜드 해안주택에서 요양을 취하고 있는 뉴욕시경 강력계 형사‘존 코리’의 탄생 작(作)이다.

추리(推理), 스릴, 서스펜스, 미스터리, 그리고 하드보일드까지 거의 모든 요소들이 장치되어있어 소설적 재미라는 측면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탄저균, 에볼라 바이러스 등 끔직한 질병을 연구하는 정부 산하의‘동물질병연구소’가 있는 생화학적 봉쇄구역인 경외의 섬, ‘플럼 아일랜드’의 젊은 과학자 부부가 의문의 죽음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300여년에 걸친 섬의 역사에 스며있는 사연들, 지역 상류사회를 잇는 와인파티와 포도원, 고급요트와 푸른 해안... 살인을 의심케 하는 환경적 요인들은 즐비하지만 무엇 하나 명료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성적 흥미로움에 더해 이 작품의 절대적 매력인 ‘존 코리’의 징글맞은 유머는 읽다말고 몇 차례나 킥킥거리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걸쭉한 농을 멋지게 받아주는 여인들이 있으니, 그녀들과 벌이는 저릿저릿한 데이트는 추리로 팽팽하게 긴장된 독자의 정신을 적절하게 이완시켜가며, 작품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기막힌 요소가 된다. 지역역사회인‘피코닉 역사회’회장으로 등장하는 미모의 여성, ‘엠마 화이트스톤’과의 열정적 관계가 하나인데, 참을성 없고, 거칠며, 냉혹한 형사 캐릭터인 코리의 사랑에 대한 진정성이 드러날 때, 이 주인공 남자의 매력은 정말 하늘 꼭대기에 까지 이른다. 아마 ‘존 코리’에 반하지 않을 여성 독자들은 없으리라. 경쟁자인 남자도 매혹될 정도이니 말이다.

그리고 괴병원체의 도난의심이 만들어내는 공포, 의문의 섬 플럼아일랜드에서 벌어지는 왠지 알 수 없는 음모, FBI, CIA등 연방정부기관들의 노골적인 은폐와 방해, 살해된 이들의 모호한 행적,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용의자들, 이처럼 작품의 핵심 장치들이 뿜어내는 불분명한 복선과 단서들의 뒤엉킴 역시 작가의 정교하고 탁월한 구성역량을 돋보이게 한다.

특히나 파트너 아닌 파트너가 되어버린 서포크카운티 경찰서의 사건 담당 형사인‘베스 펜로즈’와 형성해 가는 신뢰의 과정에서 어느덧 함께“입조심을 하고, 꽁무니를 감추고, 머리 뒤에 눈을 달고, 배신자의 냄새를 맡고, 말하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이며”진전시켜나가는 살인 사건 동기로의 접근 장면들은 아드레날린을 마구 솟구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이 저지르는 사건의 동기는 정말 단순한 것, 바로 인간의 탐욕에 맞추면 되는 것이라는 이 진리가 유별 섬뜩하다.

범인에 쫒기고 쫒는 폭풍우속에 펼쳐지는 해상장면, 온통 어둠이 지배한 공간, 그리고 범인과 조우한 코리의 위태위태한 그 증오의 부르짖음, 한 숨 놓으면 다시 나타나는 의외의 인물과 생명의 위협, 작품의 마지막 장에 이르면, 그 예리하게 일어선 긴장과 벌렁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침을 꿀꺽 삼키고 마음을 진정한 다음에야 비로소 한 페이지를 넘길 정도가 된다. 대략 700여 쪽에 이르는 이 작품을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아마‘버라이어티(variety)추리소설’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최고의 재미를 선사한다. 이상의 무슨 말이 필요할까! 아 ~‘존 코리’에 중독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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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기원 과학과 사회 9
베르나르 빅토리 외 지음, 이효숙 옮김 / 알마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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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귀납적인 인간중심의 동어 반복적 시선을 완전히 탈피한 독특한 관점을 제공한다. 일례로 두발사용, 손의 자유로움이니 뇌의 발달이니, 후두의 하강들을 연합시키는 호미니제이션(hominization;사람화)과 같은 기원과 진화의 원인에 대해 조금도 설명해주지 못하는 그런 교만이나 우월콤플렉스를 止揚한 명쾌하고 신선한 관점으로 우리 자신의 종(種)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언어의 기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어의 관행들에 말하는 것이라는 정의는 이 저술의 본성을 말해준다. 그래서 호모사피엔스의 다른 종들과 호모나란스(homo narrans)를 구별해주는 최초의 언어 출현의 가설에 이르는 과정은 지극히 흥미로울 뿐 아니라 오늘의 인간행동을 이해하는 탁월한 관점을 선사한다.

첫 장에서 고인류학자인‘파스칼 피크’는 인간과 영장류 공동의 마지막 인지적 조상을 찾는데, 이는 현재의 종들 가운데서 인지능력이 출현하는 빈도와 분포, 그리고 인지능력과 연관된 구조적 특징들을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뇌의 크기나 언어(문법)적 영역이라 부르는 뇌의 브로카 영역이니 베르니케 영역이니 하는 인간 “자기 자신의 진화에 대해 숙고할 때만 되면 인식론적 지혜를 온통 잃어버리는” 그런 오만을 불식시키기 위함이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들이 사용하는 분절언어의 복합성에 대한 이론들을 검토한다. 메시지들로 구성된 의사소통 방식으로서의 ‘찰스 호게트’나, 언어의 산출조건과 독립적 언어기능을 끌어들여 언어 기능들을 정리한 ‘로만 야콥슨’을 통해 언어의 본능을 탐색한다. 그러나“의사소통 방식으로서의 언어의 기원들에 관한 문제가 명확히 밝혀지기는 요원하다”는 현실 하에 방법 면에서 제안된 몇 가지 틀로 시선을 연결한다.

언어역사학에서, 그리고 언어행동학적 측면에서의 검토가 그것인데, ‘베르나르 빅토리’의 언어학자 ‘룰렌’을 통한 인류 모어(母語), 즉 현 인류 언어의 모태가 된 어근에 대한 가설이다. 200만 년에서 160만 년 전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共通基語(프로토랭귀지; protolanguage)의 상정과 그 언어의 의사소통 체계에 대한 단계적 발전에 대한 가정이다. 첫 단계는 호모 에렉투스가 뛰어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미발달된 매우 거친 언어로 일종의 타잔 언어, 즉 프로토랭귀지로서 “아르투르 먹는다 바나나”와 같은 어휘는 있을지언정 문법은 없는, 사실적 정보교환이 가능한 상태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는 10만 년에서 20만 년 전에 존속했던 호모사피엔스의 작은 집단에 이르러 표현력과 복잡성을 인간 언어에 부과한 즉, 통사(統辭)라는 중요한 혁신을 이루어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여기서 언어학자‘장루이 데살’의 언어의 사건기능과 논증적 기능의 분류에 더해 매우 흥미로운‘서술적 기능’을 언급하고 있는데,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공간의 틀로 들어가 거기서 실제적인 또는 상상의 인물들이 튀어나오게 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의 엄청난 함의(含意)를 들려준다.
즉 호모에렉투스의 조악한 프로토랭귀지에서 통사를 창조해 냄으로서 호모사피엔스의 한 집단은 상상력, 동류들의 감정 깊이와 풍요, 자기 행위의 충동과 원인을 해독하고, 태도의 공감과 지탄을 이해하는 획기적인 정신의 형성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바로 모든 신화와 종교는 이야기들에 근거하며, 그것은 금기를 정해 놓는 하나의 수단이 되고, 결국 집단의 합의를 정립키 위한 행동에 이르렀다고 보는 견해이다.

여기에는 현대 인류의 행동을 이해케 하는 중요한 지식이 도사리고 있는데,  인간과 다른 사회적 포유동물들은 종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동들을 이른바 본능적 메커니즘들에 의해 억압하는 반면에 언어의 서술적 기능을 획득한 것과 같이“금기 사항들이 부과되는 것은 사회집단의 말과 압력에 의한 것”처럼, 인간에게서는 사회적 제어가 생물학적 차원에 실행되지 않고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행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초기 호모사피엔스인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을 설명해준다. 영장류의 인지능력 증대는 점차적으로 본능적 태도들의 제어로 이어졌으며, 이 본능적 태도들은 더 적응할만하고 더 사려 깊은 태도들로 대체되었는데, 급기야는 본능적 반응 등을 잃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장류가 진화하던 중 어느 순간, 집단합의와 같은 사회생활의 규칙들로 구성된 해독제가 아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때”사회적 문란 현상과 같은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는 위태로운 시기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영장류들의 개체적 지성 증대가 오히려 스스로의 멸종을 야기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비대칭적인 진화가 示唆하는 멸종의 시나리오는 오늘의 현대 인류의 자연에 대한 일방적 지배행위로 야기되는 폐해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교훈이 된다.

끝으로 다윈의 원칙에 준거하여 언어가 왜, 어떻게 출현하였는가에 대한 가설은 끔찍할 만큼 오늘의 우리모습을 투사하고 있다. 언어의 두 기능중 하나인 사건적 기능을 보면, 그 이면의 의미를 해독케 되는데, “습관적인 일들과 차이나는 사건들을 동류에게 알려주려고 애쓰고”, “감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까지 여지없이 전달”하려는 습성이다. 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일까? 이러한 행동이 과연 생존, 번식 등 자신에게 이로운 행위일까? 일견 유익한 정보를 경쟁자에게 전달해 주는 것은 다윈의 원칙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하지 않는 자들에 비해 훨씬 번식을 이롭게 한다. 적과 같은 위험에 대한 사전 정보나 집단의 생태적 성공을 위한 위험감수 능력은 동맹 파트너들에게 필요한 자질을 과시하는 행동이 되고 명예를 획득케 된다. 이 위상 덕분에 자원과 생식에 가장 잘 접근 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동맹의 일원으로 소속되며, 경고한 동맹관계를 구축함으로서 이익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의 인간 정치 속에 추구되는 자질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용기, 동맹의 이익을 위한 위험감수, 자기 자질을 과시하려는 광고성 경쟁, 비겁함에 대한 경멸 등으로 이들의 핵심적 자질은 바로 언어가 우리로 하여금 과시할 수 있게 하여준다는 점이다. 다시 진화론적 측면으로 들여다보면 이런 이타적 행동에 소요되는 비용을 떠안을 수 있는 개체가 바로 집단으로부터 선택 될 수 있다는 점의 확인이 된다.

한편 언어의 두 번째 기능인 논리적 기능에서, 확인된 것과 욕망사이의 양립불가능의 형태로 탐지되는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토론하는 것은 사건적 기능에 대한 진위를 판단하기위한 탁월한 기능이 된다. 부조리한 것이 드러나 보이면 언제든지 설명이 요구된다. 아마 호모사피엔스들은 자기가 한 말과 관련된 부조리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 저술은 인류의 분절언어는 발달 영장류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의사소통 체계를 혁명적으로 발명한 산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러한 언어의 출현은 상징적-문화적 세계의 발달을 가능케 하였으며, 다른 영장류들에 비해 진화의 성격과 속도를 현격하게 변화시키고 독보적 자리를 차지하게 된 근인으로 조명하고 있다. 다채로운 학술적 가설과 이론들의 인용, 그리고 인문학적 성찰 뿐 아니라 인지과학, 진화론까지 포함하는 탁월한 통합적 연구과실로서 언어의 기원에 대한 저명한 연구자들이 송신하는 최신의 내용이란 측면만으로도 지적 흥미를 배가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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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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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의 남자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보통’이란 어떤 의미일까? 사전적 주석을 달면 부사적 용법으로는 흔한 일반적이라는 의미이고, 명사적으로는 뛰어나거나 열등하지 아니한 중간정도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사실 애매하기 짝이 없는 추상적 언어인데, 기준이나 대상이 특정화되어 있지 않은 정의 때문에 난 항상 이 단어가 들어간 표현을 보거나 듣게 되면 난감함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러한 곤혹스런 느낌 때문에 ‘보통’이라고 주장하는 이 젊은이는 어떠한 의미에서 이러한 표현을 하였을까가 내심 호기심을 유발하였다는 것이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이유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랄 수 있다.

일기(日記) 전반에 걸쳐 되뇌는 사랑에 관한 단상들이 반복되어 등장하는데, 작자가 정의하는 사랑은 가슴이 설레고 불꽃이 튀는 그런 ‘열정적’인 감성의 세계인 듯하다.  그래서 3개월이면 식어버리는 사랑 때문에 3개월이란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사랑이란 거짓이고, “다시는 이런 기분을 느끼기 싫었는데...(中略) 한 줌 재만도 못한 허망한 신기루 따위 결코 맛보기는 싫었는데...”라고 새롭게 다가오는 사랑에 절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과연 작자처럼 사람들은 이러한 ‘에로스’로서의 사랑만을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일까? 스토르게, 크세니아, 필리아, 아가페처럼 우리들의 삶을 풍족하게 하여주고 행복을 느끼게 하여주는 사랑도 있다. 물론 창조성, 실험, 발견을 자극하고 고무하는 그 황홀하고 열정적인 욕망 그 자체의 고귀함과 고결성,  우리의 시야를 열어 인간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 혹은 차원을 보여주는 긍정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열정이 적절하게 흐르지 못하고 삶의 중심에 머문다면 일상의 관계에 투신할 여력과 의욕을 잃게 되고 자아는 심하게 병들게 될 것이다.

이러하다보니 “수많은 결혼들이 무책임하게, 호기심에서, 그저 남들 하니까...(中略) 별로 신중하지 못한 이유에서 행해진다.”라고 결혼에 대한 인식이 편협해지고, 대다수의 보통사람들이 저마다 찾아가는 행복의 다름을 부인하게 된다. 더구나 “어떻게 한 사람하고만 잘 수 있을까. 어떻게 한 사람하고만 평생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한 사람만을 평생 좋아할 수 있을까.”라는 일부일처(一夫一妻)의 혼인제도를 부정하고, 급기야 “서로를 갉아먹는 햄스터”라고 결혼에 혐오의 시선을 보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작자의 이러한 극단적 시선 때문에 오히려 나는 가장 내밀한 소망과 욕구와 욕망을 알아내기 위해 지독하게 앓고 있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 것은 왜 일까?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회의와 노력을 쏟고서야 비로소 온전한 사랑, 무궁한 사랑을 세상에 흩뿌리기 위한 고통의 과정이라고 해석해본다. 사랑은 인간정신의 가장 위대한 가치가 아닌가!

이와 같은 남녀간의 사랑, 결혼에 대한 작자의 시니컬한 회의론에 이어 가족에 대해서, 그리고 친구에 대한 나름의 사유들이 지면의 도처에서 등장하는데, 이는 바로 개인이 자신답게 살게 하는 것, 그래서 자신에 내재한 최대한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해 보다 확장된 사랑의 공감으로의 이행이 아닌가 하고 생각게 된다. 항상 고통을 수반했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 실존의 기본 상태로서의 배려’라는 스토르게(storge)로, 둘도 없던 친구 상문으로부터 시작되는 친구, 그리고 정들였던 고양이,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이미 필리아(Philia)와 크세니아(Xenia)를 발견케 되는 것은 작자, 이석원이 삶의 내면을 향해 외치는 본연의 목소리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하게 되는 것이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작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재들로부터 비롯되는 관념의 진행이어서 우리들 누구나 겪었던 유사한 경험들을 보게 된다. 출근길의 도로체증을 피해, 돌아가는 길일지언정 저만의 길을 달려가는 모습에서, 정말 외로워서, 심심해서 누워 책을 읽는 모습에서 나와, 우리와 닮은꼴의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다. 때론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까탈스런 사람으로, 또 때론 영혼의 정수란 무엇인지, “세상이 원래부터 이렇게 엿 같은 곳이었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하는 사춘기 소년 같은 질풍노도식 외침에서 건강한 청년정신에 미소 짓게도 된다. 사실 결코 ‘보통의 존재’로서 이해하기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이의 내면의 일기이어서, 간혹 생경함과 외곬의 고집이 읽히지만 그 이상으로 닮은 형상을 훨씬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글이다. 가벼운 느낌으로 천천히 그의 시선을 쫒다보면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무엇인지, 또한 우리들의 시야를 열어 인간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 혹은 차원을 보여주는 그 무엇을 생성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게 하는 시간이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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