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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매달린 원숭이
헤르만 요세프 초헤 지음, 박병화 옮김 / 열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룩수리아(luxuria;괘락과 음란), 굴라(gula;탐식), 아케디아(acedia;무관심,나태) 등 기독교의 전통적인 7대 죄악을 21세기 현대사회의 정신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노정된 문제의식을 해체하여 어떤 미덕으로 대체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빼어난 사회문화적 통찰을 담고 있다.
제목과 저자의 신분에서 받은 종교적 설교나 훈계와 같은 선입견은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통섭적 지식을 통한 현대 사회 병리 현상들에 대한 비평적 식견임을 발견하면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쾌락은 성공 지향적 삶에 몰두하는 현대인의 모습으로 변화하는데, 마치 성공하면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감에 휩싸일 것 같지만, 결코 이러한 느낌을 “넓고 전체적인 수준에서 지속적으로 보존하지는 못한다.~(中略)~성공은 쉽사리 사라지며 사라진 다음에는 다시 새로운 성공에 대한 집착이 시작된다.” 속도와 신경과민, 초조함이 끊임없이 인간을 불안하고 침착하지 못한 상태로 몰고 가는 오늘의 삶에서 인내는 보기 드문 미덕이 되어버렸고, “사랑의 하느님, 인내를 주소서, 그러나 빨리 주소서!” 하는 이 우스개는 인내가 없는 오늘의 현실을 보여 한다. “성공이 의미와 결부되지 않고 멋대로 떠다닌다면 그것은 결국 미련한 탐욕의 결과일 뿐. 우매한 성공의 욕구에 사로잡혀 인생을 허비하게 될 것”임을 알려준다.
또한 탐식은 오늘의 쏟아지는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획득하려는 형상으로 비유되는데, 그래서 탐식의 기회에 맞는 좋은 입담거리의 소재인 삶의 지혜라고 끊임없이 뱉어내는 허튼소리들을 늘어놓으며 인기를 모으려고 안달을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비루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구나 이들 경험이란 것을 들여다보면, 감각적인 느낌, 인지의 첫 단계에 불과한 미성숙한 체험의 나열임을 알게 된다. 내면에서의 숙고와 성찰의 과정을 거쳐 정신적으로 평가될 때 비로소 경험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 일 것이다. 해석되지 않은 체험의 양적 포화로 더 이상 가공 할 수 없는 인상들로만 가득 찬 자기과시와 외형중심적인 속 빈 인간들은 어떤 체험이 경험으로 전환하는데 쓸모가 있는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즉 어떤 일이 의미가 있는지를 긍정적으로 분류할 능력을 상실한 것일 게다.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의미를 만드는(make sense)일은 한계에 달한, 또한 무절제를 바탕으로 한 경험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굶주림의 고통으로부터 헤어 나오는데 중요한 덕목이 될 터이다.
한편 무관심은 “인간이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덕”이란 측면에서 해석을 시작하는데, 자유는 행동할 때만 얻을 수 있기에 그렇다. 무기력과 수동성이라는 독이 온몸에 퍼져 있음에도 감지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자유를 정의하는 의무를 포기한 요즘의 세태를 안타깝게 지적하기도 한다. 나아가 우리사회에 만연한 자유의 왜곡된 이해를 시정하면서,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 수단으로 남용하거나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타인의 개입을 꺼리는 부조리가 아니라 사회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지닌 자유로서만 진정한 자유임을 직시토록 한다. 땀 흘려 쟁취하는 것이고, 그 과정은 무척이나 긴장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서 체념의 하녀인 무관심으로는 자신의 운명조차도 유지하기 힘든 것임을 강조한다.
특히 시기심에 이르러서는 물질에 경도된 현대사회의 공허하고 형식적이며 빈약한 정신세계를 각성시키고 있는데, 의미지향에서 체험지향으로 이동하는 오늘의 향락을 지향하고 인내를 거부하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체험지향 사회의 기본노선은 속성상 시기심이나 질투, 시샘을 조장하며, 이로인한 콤플렉스는 소유하려는 탐욕에 한 몫 참여하려는 열망으로 냉정을 잃게 하고, 맹목적이며, 설혹 욕심을 채운다 할지라도 짧은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대상을 향해 다시금 욕심을 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시기심은 나만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을 키우고, 끝없이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며, 종국에는 반복된 자극으로 인하여 감성을 상실하고 새로운 물질, 새로운 애인을 찾아다니지만 더 이상의 효력을 발휘하는 자극을 찾지 못해 실망과 삶의 좌절에 이르는 정신의 공백상태에 놓이게 되고 만다. 이러한 현상을‘이벤트 사회’라고 부르는 저자는 순간의 느낌인 재미에 열중하고, 기만적인 감정에 최면당해 있는 현대인의 체험에 대한 무모한 갈증을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부피도 없고 기만적이며 순간적인 ‘재미’가 아니라 의미로 충만된 ‘기쁨’을 추구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날마다 지식의 한계, 만족의 한계, 신체의 한계에 부딪힌다.”그래서 한계에 봉착했다는 감정, 바라는 대로 할 수 없다는 감정은 분노로 표출된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해 굶주린 분노의 감정은 실망한 영혼의 광기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오늘의 사회구조, 환경이 더욱 부채질을 하고 있는데, 바로 동기부여만 되면 누구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부추김이다. 그러나 이들 동기부여라는 것은 표피적인, 즉 겉으로만 동기를 촉진 할 뿐 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동기를 형성시키지는 못한다. 실제로 사람을 지속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기훈련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동기부여 전문가들이 내세우는“내 안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라는 말에 아무리 확신을 가져 봐도 그 효과란 것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순간적일 것이다. 16세기 카톨릭의 사악한 면죄부를 닮은 오늘의 소비전략사회는 상품과 이상을 결합시켜 판매한다. 가구를 파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편의를 판다고 하고 있으며, 난방기가 아니라 따뜻함을 팔고 있다고 한다. 제품을 약속과 결합시킴으로써 소비자에게 열망을 불러 일으킨다. 이런 허황된 약속은 이기주의만을 부추기고 인간의 불안하고 연약하며 불확실성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외면케 한다. 진실은 이러한 동기부여란 위선이며, 실제 동기부여 세미나는 어떠한 것도 실현시켜주지 않는다. 진정 중요한 것은 한계와 불가측성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용기를 주는 이 세상의 변화 가능성이다. “사랑, 봉사, 겸손과 검소 혹은 자제, 자신의 한계를 안고 살아가는 능력과 같은 전통적인 미덕”의 지혜가 아닐까.
자만심에서는 돈이면 어디든 벌떼처럼 몰려드는 공격적인 오늘의 자본주의인 터보자본주의(Turbo Capitalism)를 화두로 하여 통제 없는 시장이 만들어내는 기계론적 경제법칙에 경도된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적 세계화를 질타하고 있다. 이들은 시장에는 친화적이지만 인간에게는 적대적인, 그리고 극심한 경쟁의 승패주의와 수혜계층과 소외계층의 극명한 분리로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키고, 영혼을 고갈시키는 시장의 횡포를 인류의 대재앙이라고까지 혹평한다.
1927년 물리학자‘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는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하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했다. 물체의 근본적인 불확실성에 대한 믿음은 오늘의 인류에게 보편적 지식이다. 그러나“우리의 일상생활은 인기목록과 순위로 결정된다.”현실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다는 총체적 측정 가능성에 맹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여기에는 모든 것을 규정하고 통제하려는 광기가 서려있다. 중요한 것은 수치고 이는 그들의 욕심을 부추긴다. 수치에 굶주린 자들은 게걸스럽게 수를 늘린다. 수집하고, 소유하고, 탐욕의 욕심이 채워질 때 까지. 돈이 창출하는 가치는 본디 인간적인 노력으로 수행되는 것일 뿐 아니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임에도 모든 사물들과 같이 측정 가능한 대상으로 치환하려는 시도는 정신적인 인식의 폭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축소시킨다.
돈 만이 유일한 기준이고 다른 모든 문제는 의미가 없다면 모든 인간의 가치나 인간 사이의 관계는 탐욕의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 이상이 아닐 것이다. 일례로 통증을 객관화 할 수 있나? 르네상스시대 최고의 돔 건축물에 대한 미술사적 업적을 수치로 표현하는 것이 타당키는 한 것인가? 고통, 정신적 노력, 미학적 감정이나 사랑을 강제로 수치화한다면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화되어 수치에 묶인다. 수량화 할 수 없는 것을 상품화하고 판매할 때 어떤 참담한 결과가 오는지 인간들은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 인류의 악덕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통찰은 진정 우리들의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인간간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깊은 반성과 사색의 시간을 선사 한다. 이에 더해 저자 초헤 신부가 던지는 우리들을 향한 새로운 윤리로서의 7가지 미덕인 외부의 사물에 대한 내면의 자유로서의 겸양, 자존을 잃지 않는 자기집착의 경계로서의 금욕, 열기 한가운데 존재하는 차가움, 부드러움, 호의, 인내, 진정성, 온화, 자비의 삼촌인 부동심(不動心), 그리고 기쁨의 나눔, 진리를 위한 토대로서의 열정, 위대하고 놀라운 본질 앞에선 존재의 순수한 순종, 시기와 냉소적 멸시를 제거해주는 담대한 마음인 양보에 대한 성찰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인류를 위한 경외의 윤리학으로서, 인간의 진정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선을 실현하기 위해 인간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길을 묘사한 이 저술의 맺음말에 인용된 ‘에리히 케스트너(Erich Kastner)’의 시 구절은 잔인할 정도로 오늘의 우리를 묘사한다. 우리들은 과연 변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