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플루엔자 (양장)
올리버 제임스 지음, 윤정숙 옮김 / 알마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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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들을 제치고 미국의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빼어난(?) 나라로 한국만한 나라가 없다. “욕구와 욕망을 만들어 내고 오래된 것과 낡은 것에 불만을 갖게 하는”그래서 소비와 시장의 힘이 인간의 각종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다는 신앙인 ‘이기적 자본주의(Selfish Capitalism)'에 경도되어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원하고, 자신의 가치를 성공, 잘 팔릴 가능성,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는 자신을 상품으로 인식하는 인간들로 가득 차 버린 기이하고 추한 사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소비를 향한 무한한 열망, 상품의 빈번한 교체, 자신과 사회에 대한 무비판, 통찰력의 총체적인 부재, 소유가 자신을 더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 거라는 생각, 자신을 선전하고 광고하며, 소유물과 타인의 평가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는 상품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물질주의와 권위주의에 쪄들어 내적조화가 무언지도 모르는 시장형 인간들을 양산하는 무지한 사회, 바로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올리버 제임스’의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소비지상주의가 지니고있는 '몰개인화(Depersonalization)'에 어떠한 자각도 없는 인간들이 걸려든 질병, ‘어플루엔자(affluenza)'에 대한 폐해와 이를 극복하고 해소키 위한 백신에 대한 처방전이라 할 수 있다. 삶의 목표는 돈, 소유, 명성, 외모에 있고, 이의 동기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과시하려는 그릇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들의 허위와 무지, 불행한 욕망을 영국을 비롯한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영어권 국가들과 싱가포르, 중국, 덴마크, 러시아 등지의 상위계층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한 부자병의 실체와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결같이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들은 대조효과(Contrast)에 빠져들어 자신보다 뛰어난 대상과 비교하며, 돈과 소유욕, 그리고 외모와 명성이라는 가치에 집착하고 자신들보다 더 가졌거나 더 나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현상을 나타낸다. 친구나 연인을 고를 때는 사랑보다 외모와 부, 그들의 시장가치에, 그리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원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 빠져있으며, 자극이 삶을 지배하는 상태에 놓여있어 주의력결핍행동장애(ADHD), 양극성장애(Bipolar Disorder), 자기애적인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등으로 정서적인 고통을 겪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유한 소수를 위해 부도덕하고 불평등하게 펼쳐지는 미국식 이기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마케팅사회에 흡수되어 물질적 안락을 위해서는 어떤 인간적 희생도 무릅쓰는 불행한 시장형 인간들이 양산되고, 도달 할 수 없고 결코 채워 질 수 없는 욕망과 성공이라는 환상을 쫓는 이들의 어리석음과 고통이 다양한 양상으로 지면을 채우고 있다.

서점진열대를 채우고 있는 미국식 긍정의 심리학이 장밋빛 허상을 만들어내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생태학적 재앙이라 할 수 있는 헛소리에 경도된 성공지향의 인간들을 이용하여 가짜 행복을 촉진하고 인지행동 치료로 인위적 자존감을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산업의 부상에 일조케 하고 있다. 바이러스 목표(돈, 소유, 외모, 명성)와 바이러스 동기(과시와 認定)에 붙들려 있는 한 삶은 고통과 불만과 불행의 영속일 뿐일 것이다.
미국적 가치는 이기적 자본주의를 대전제로 하고 있다. 내적인 공허를 외적인 수단인 소비로 고쳐질 수 있다고 거짓 약속을 하고, 성공을 쫓는 시스템 속에 가둬놓곤 성공이란 것으로 늘 동기를 부여하게 한다. 그래서 필요가 없음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욕망하는 조작된 욕구에 대체된 취약한 정서는 타인이 가진 것을 자신도 가져야 한다는 공허한 과시적 소비로 끊임없이 내몰린다. 온통‘과시’라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가치로 인해 여성인구 전체가 성형수술을 받는 기괴한 나라가 되어 거짓된 자아의 잠재적 문제점에만 치중하여 자기혐오를 보상하는 자기기만과 무자각의 불행한 무뇌한들로 가득 차게 한다. 이렇게 해서 소수의 상위계층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권력을 독식한다.

“영국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국민에게 최대한의 부가 아닌 최대한의 행복을 주는 것이다.”라는 선언과는 달리 모든 인간들을 불행과 정신적 고통으로 내모는 성장, 성공, 부(富)와 같은 바이러스 목표에 매달리는 한국사회의 낙후되고 추악하며 이기적인 반(反)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근원적 수정과 가치 전환은 시급한 과제이다. 그래서 이 저작의 말미에 덴마크와 같이 어플루엔자가 침입하지 못한 사회주의체제까지는 아니지만 이타적 자본주의를 위한 현대사회의 새로운 이상을 제시하고 있다. 다분히 영국내의 특수성으로 인해 우리사회에는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조화롭지 못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정서적인 애착, 공동체, 효율성, 자치 등을 충족시키는 것을 목표로”하여, “당신의 욕망이 아닌 필요를 충족시켜라. 소유하지 말고 존재하라. 경쟁뿐 아니라 협동도 하라.”는 슬로건은 정서적 고통에 시달리는 한국의 시장형 인간들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제는 외부로부터 지속적인 지지를 얻고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의식하는 부서지기 쉬운 자존감에서 빠져나와 아름다움과 자기표현을 지지하는 진정한 내적 동기로 자신을 채워야 한다. 물질을 위해 노예처럼 일하는 오늘의 우리들, 시장형 인간들의 삶에는 무엇이 남아있나? 불안과 우울, 소외로 다시금 강박적인 소비에 몰리고 채울 길 없는 욕망을 위해 고통스러워 할 것인가? 환상의 세계를 꿈꾸며 삶을 낭비하는 것을 경고하는 엘리엇의 시(詩)로 마감하는 소비지상주의로 비뚤어진 현대인에 대한 신랄한 이 보고서는 오늘의 한국인, 우리들 모두에게 귀중한 거울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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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 정재승 + 진중권 - 무한상상력을 위한 생각의 합체 크로스 1
정재승,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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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중들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21개의 키워드를 통해 오늘의 한국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읽어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특히, 진중권은 오늘의 이 사회에‘디지털 생활 세계’라는 특징적 표현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니콜라스 네그로폰테’(Being Digital의 著者)가 정의하는 디지털사회의 특성인 탈정보화, 개인화, 다양한 감각 충족의 환경을 부여하는 호환성과 유연성의 증대, 문화변형의 극심화, 혼성문화의 발달과 같은 크로스오버 형태 등에 기인한 듯하다.

그래서 표제조차 뇌 공학자 정재승과 미학자 진중권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크로스(Cross)이기까지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인식이 실질적 혼합을 이루어내는 것은 아니고, 다만 각자의 시선에서 동일한 제재를 성찰하여 독자에게 그 믹스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생활환경을 에워싸고 있는 현상들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선정된 것들의 일면을 보면 머리가 끄덕여 질 만 한 것들이다. 소비사회의 대표적 심볼(Symbol)이 되다시피 한 스타벅스, 프라다, 생수에서부터 점점 개인화되고 나르시시즘의 다른 표현인 성형(쌍꺼풀)수술, 몰래카메라, 셀카, 그리고 디지털 문화의 구루(Guru) 스티브잡스와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제프리 쇼, 나아가 복합형 가상현실의 세계인 세컨드 라이프 등등 디지털사회의 속성들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들 어휘들은 우리들의 사회문화적 습속의 층위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오늘을 상징하는 이들 21개의 핵심단어들 모두에 두 편의 단상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과학자의 시선에서, 미학자의 시선에서 읽힌 사회 현상들 모두에 공감하기에는 미흡한 요소들이 분명 존재한다. 때론 진중권의 읽기에 더욱 동의하기도 하고, 정재승의 생각과 지식에서 새로운 발상을 엿보기도 하지만 공히 다양한 장르의 문화들이 서로 복합하고 능동적으로 변형되어가는 정보와 대중취향의 흐름, 창의적 사고가 기초가 되는 오늘의 현실을 높은 수준의 통찰력으로 해독하고 비평한 글들이라는 점에 공감케 된다.

내게 있어서 이러한 단상들 중에 특히 재미있는 시선으로 다가온 부분은‘욕망을 찍은 사진관’으로서의‘셀카’에 대한 부분과, ‘남성 옆의 여성’이기를 거부한 ‘안젤리나 졸리’편과, ‘개그 콘서트’, 사이버 민주주의 실현장(場)인‘위키피디아’, “예술에는 근원적 시작이 있다”고 하는 ‘파울 클레’편이라 할 수 있다.
언제부턴가 방문이 닫힌 딸아이의 방에서 찰칵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 아이가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찍어대는 모습이 기이하게만 여겨졌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찍어댄 모습이 모두 저장되는 것이 아니고 이내 지워져 버린다. 정확하게 자신의 모습을 찍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이 가장 예쁘게 나오는 사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임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바로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은 정확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가장 예쁘게 변형되고 조작된 ‘셀카만의 이미지’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었고, 극단적으로 개인화된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의 구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진중권의 독법에서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또한 선함과 악함이라는 양극단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내재하고 있는 듯한 최고의 여배우‘안젤리나’로부터‘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善美)’, 즉 윤리와 미학의 통일, 즉 아름다운 외모와 유덕한 행위의 통합이란 이해를 갖게 되면서 새로운 경지를 이해케되기도 한다. 남의 시선이나 평가를 의식하지 않는 존재의 자연스러운 표현, “도덕을 우습게 보는 개별자의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더 높은 사회적 윤리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데 그 요체가 있다.”는 설명은 그대로 탁월한 미학강의가 된다.

한편, 사회 비평적 측면에서 다루어지는‘9시 뉴스’와 ‘개그 콘서트’에서는 웃음에 대한 과학적 신호, 새로이 도래한 구술문화의 세대에게 어필하기 위한 스탠딩코미디의 특성으로서 ‘이미지의 전복’, ‘뉘앙스의 일탈’‘의미의 전환’과 같은 특성을 해독해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쏟아내는 말장난에는 “사회적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사회적 소수에 대한 무차별적 상해에 대한 고려도 없는 무지함이나, “교양과 반성이 없는 쓸데없이 비열해진”개그에 예리한 비평의 독설도 주저하지 않는 자신감이 있다. 특히 천편일률적으로 9시 땡 하면 시작되는 뉴스의 집단최면을 거는 정보왜곡의 장으로 변질된 현실은 MBC뉴스의 ‘클로징 멘트’를 주시하게 만들기도 한다.

“가시적인 것은 우주전체에 그저 고립된 예에 불과하다.”는 공감각적 현대미술의 거장,‘파울클레’의 말처럼 삶의 내재적 충일(充溢)성 보다는 항상 허기질 수밖에 없는 외재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라는 불만의 생태계를 마냥 쫓는 현대인들의 어리석음과 이를 부와 권력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계층들이 무한히 창출해내는 과대소비사회의 왜곡된 삶의 진정성을 파노라마처럼 보게 된다. 모 광고회사의 선전처럼 따뜻한 디지털세상은 가능한 것일까?

진중권이 우스개로 흘리는 “공동체에 원만히 입성하려면 칼의 세리머니가 필요하다.”는 성형사회, “한국의 여성은 눈두덩에 할레를 받는다.”는 표현은 정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어딘지도 모르고 떠도는 우리사회의 일면이기에 가뜩이나 움츠려든 가슴이 더욱 시리게 느껴진다. 리이프로그시스템(Life-log system),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세컨드라이프(second life)를 즐기는 시대에 성큼 들어선 21세기 디지털 사회, 우리들, 우리사회에 대한 안목을 보다 넓고 깊이 있게 성찰 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인들로 거듭 나야 하지 않을까.
저자들의 말처럼 이 저술은 디지털 생활세계의 현상학을 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에 불과하다. 그래서 진정한 크로스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중심을 잃고 절룩거리는 우리 사회에 이 저술을 초석으로 하여 더욱 심화되고 진전된 사회통합, 학문적 통섭, 지성이 협력하는 미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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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인간실격 - 다자이 오사무 소설선
다자이 오사무 지음, 송숙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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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간극이라 해야 할까? 작품 속 인물들은 오늘의 인간상으로는 지극히 나약하고 인간의 특질들에 대한 이해역시 새삼스러울 정도라 해야 할 것이다.  <인간 실격>은 몇 차례 읽었던 것을 세월이 지나 다시 읽게 되었지만 결국 근대화가 가져온 물질과 자본주의의 유입에 변해가는 세상과 그 갈등정도에 불과한 시대상의 엿보기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집필할 시기에 있어서는 아마 중대한 가치의 혼란이었을 것이다. 작중 ‘요조’라는 인물이 자신을 온통 소진해버리는 모습은 1920년대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의 허무주의적 풍조를 닮아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신뢰의 결여, 물질사회로의 이행에 따른 전통가치의 붕괴, 이러한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근대인은 혹독한 무력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세계대전의 패전국 일본의 몰락해가는 화족(일본의 舊 귀족)의 모습을 쓸쓸한 화면에 담은 <사양(斜陽)>은 작가가 편입된 계층에 대한 안타까운 미련과 고통을 그리고 있을 뿐, 유명 소설가의 아이를 낳겠다는 ‘가즈코’라는 이혼한 황녀의 혁명 행위는 사실 대중의 보편적 공감을 획득키는 어려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 작품은 세상과는 격리된 채 가족의 보살핌 속에 생을 거두는 주인공의 어머니에게서 고고한 귀족의 품위를, 그리고 변화된 새로운 시민체제에 적응치 못하고 아편과 술로, 마침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가즈코의 남동생 ‘나오지‘로부터 진실한 인상을 찾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한편 이 작품들을 대하면서 아시아 식민지로부터 착취한 풍요로운 물질과 서구체제의 이식으로 변모해가는 사회의 비판과 갈등이라는 가진 자의 여유로서 당시대 일본인들의 고통을 읽게 된다. 지독한 수탈에 몸서리치던 우리에게는 생존과 민족자존감의 회복이라는 고통이 있었으니, 작중 인물들의 고뇌라는 것이 얼마나 허위이며 무지하고 편협한 것인지 하는 착잡함과 분리하는 것이 그리 수월치 않음을 느낀다.

결국 부조리하지만 거대한 질서에 거스르는 개체의 최후란 참담한 삶의 위협일 뿐이라는 다소 진부한 결론을 제시한다. 정신병원으로, 자살로, 수긍해야만 하는 질서로 말이다. 다만 <사양>의 가즈코가 보여주는 신분의 궤도를 이탈하고 새로운 자신의 정체성을 향하는 발길 만이 돋보일 뿐이다. 가난의 극복과 계급간의 갈등, 민족의식으로 혼란스러웠던 당대의 우리문학에 새삼 시선을 돌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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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3-08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종의 다자이 오사무 비판론으로 제겐 읽히는데요.

다자이가 공산주의를 접하고 나름의 활동도 하지만 자신의 계급을 넘어서는 뚜렷한 활약을 보이지는 못하죠.

그건 다자이의 부족함이랄 수도 있겠지만, 그에게 지워진 개인의 고통이 상당했고 그가 그를 벗어나기에도 역부족이었음을 알게 되는 증거도 되는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자민족 중심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다자이의 딸인 쓰시마 유코에게서 잘 보여진다 생각합니다.

<불의 산>이나 <나> 등을 보며 작가의 아버지가 미처 보지 못한 경지를 딸이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앨라배마 송
질 르루아 지음, 임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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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피츠제랄드(F. Scott Fitzgerald)와 젤다 세이어(Zelda Sayre)부부의 광기는 1920~30년대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솟구치는 물질의 풍요와 쾌락을 대표하는 심볼로 잘 알려져 있다.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물질과 욕망에 압도되어 황폐해진 영혼들의 스러져가는 삶을 그려낸 작가이자 곧 그들의 인생 모습 또한 그러했으니 그 고통은 더욱 참혹했으리라.

『위대한 갯츠비』로 대표되는 스콧 피츠제랄드의 낭만주의적 이상과 현실사이의 간극에 좌절하는 당대의 허영과 위선으로 포장된 인물들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표상들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이러한 속물적 욕망에 시달리는 인간과 같은 시대의 조류 보다는 젤다라는 한 여인의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를 제안한다.

“글쓰기는 남자들의 일”이라는 의식이 지배하는 여전히 남성중심의 사회, 여성이란 남성의 명예와 부를 위해 악세사리처럼 따라붙는 부수적 존재로 인식되는 사회에서‘스콧’이라는 권력자인 남성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이자 착취의 대상자로서‘젤다’라는 여성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다분히 페미니스트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은 파멸해가는 당대의 인간들에게 단지 피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정도로 그려지는 스콧 피츠제랄드식(式) 남성적 관점을 전면적으로 전복하고,“죽이 잘 맞는 추문 덩어리 동성 커플로 꾸며” 보이고, 대작가이자 남편의 성공과 욕망에 육체와 영혼이 모두 고갈되도록 착취당한 여자의 안타까운 항변의 회고록이다. 
 

유독 이 작품은 애착이 가게 되는데, 등장인물들이 유명세를 치룬 실재했던 사람들이 그대로 차용되어 작가의 픽션주장에도 불구하고 스타의 사생활을 엿보는 관음증적 욕구를 자극하고, 스콧의 작가적 역량에 의구심을 키워내 궁극적으로 스콧의 소설은 다름 아닌 젤다의 소설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독특한 마력을 지니고 있음에서이다. 특히, 젤다의 정신병원에서의 의사와의 대화나 회고의 장면은 스콧 피츠제랄드의 자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Tender is the night : 밤은 부드러워』와 대비되어 더욱 화자인 젤다의 주장에 미혹(迷惑)되게 한다.

세 딸을 둔 엄마 미니가 “세 군데 달아맨 조종 끈을 잡아당기며 인형극을 공연”하듯이 자신의 좌절한 희망을 보상하려 한 행위의 희생자로서, 또한 남편에게는 영원한 익살광대이자, 사랑스러운 광대, 웃음에 덮여진 광대, 분칠로 망가진 광대로서 남용되어야 했던 여자로서,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겨온 여자를 여왕으로 안아준 프랑스인 조종사 조즈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관능의 미련으로 평생을 그리움에 떨어야 했던 여자의 소용돌이 같은 삶의 기억들이 하나의 강이 되어 흐른다.

결혼이 두 이성의 사랑의 결합이 아니라, “광고 계약서에 서명”을 한 것처럼 자신을 감추고 세상의 광대로서, 스콧의 장난감으로 살아야 했던, 그래서 남김없이 남용당한 육체로 열망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끝내는‘뇌 백질 절제술’까지 받는 정신병자가 되어야 했던 음울한 한 여인의 삶이 시종 묵직하게 가슴을 억누른다.
미스 앨라배마이기도 했던 출중한 미모와 남부의 근엄한 명문가의 여식으로서 도덕적 엄숙주의를 일탈하고 삶의 탕진이라는 순수로의 회귀를 온 몸으로 실현하려했던 여인의 매혹적이지만 쓸쓸한 여운을 던지는 그러나 삶의 조연이었던 여자에게 주연의 자리를 들려준 신선한 작품이다.

“내 몸은 한줄기 강, 앨라배마라는 이름의 강이다. 내 몸 한가운데 삼각주가 펼쳐진다. 내 두 다리는 모빌만으로 뻗어나가 플레저(기쁨)라는 이름의 반도를 이룬다...” - 작품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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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08-05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제가 생각했던 스콧과 젤더의 관계가 아니어서 충격적인데요. 이 책 곧 읽어야겠네요.

올리시는 리뷰글들이 어려워서 댓글을 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올께요.
이런 표현 실례가 아니라면, '심 봤다'를 외치고 싶네요. ^^

필리아 2012-08-07 16:02   좋아요 0 | URL
허구이긴 하지만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이 정작 젤다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할 정도니까요...^&*
 
랜트 - 연쇄살인범 랜트를 추억하며
척 팔라닉 지음, 황보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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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팔라닉’이 집요하게 관찰하는 또 한편의 인류, 인간사회에 대한 비범하고 냉혹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다. ‘랜트’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발표된 작품들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데, 완벽한‘자기파괴’만이 나를 새롭게 세울 수 있을 뿐이라던 『파이트 클럽』의 ‘타일러’를, 어둡고 모호한 이미지의 퍼즐 맞추기, 그리고 뒤틀린 현실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궁극에 쌓아 올릴 미래에 대한 의문을 던져준 『질식』의 ‘빅터’, 인간에 대한 회의와 열패감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키고, 소비지상주의의 폭력성으로 침몰해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처절하게 그려낸 『인비저블 몬스터』의 ‘셰넌’등을 모두 통합한 인물이며 몽타주, 플래시백, 등장인물 모두가 화자(話者)인 구술전기 방식 등, 기법 또한 망라되어 있다.

이 작품에는 낯설고 이질적이며 혐오스러운‘광견병(rabies)’, ‘운전자 실황 교통방송’, ‘자동차 충돌 파티’라는 언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커뮤니타스(Communitas)'라는 순화공간으로 순환시키기 위한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랜트’의 의도적인 광견병 감염은 등장하는 구술자들의 입을 통하여 미쳐버린 현대사회이며, 겁내던 미래상이고, 자신을 재목격하는 환각의 통로이며, “축적된 불안을 해소하고 문명 전반을 보호하는”순간의 표상으로 표현된다.

또한 실시간으로 중개되는 운전자 실황 교통방송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음증적 자기기만을 폭로한‘수전 손택’의 다시 보기이며, 이 작품의 핵심 제재이자 소재인 자동차 충돌파티는 “카타르시스적 순화를 제공하는 리미널(liminal)공간”을 만들어 내는 이벤트로서 현대사회의 위계와 경쟁의 긴장관계를 해소하는 이상적 시공간이 된다. 작품 속에서도 열거되고 있지만, 작가의 전(前)작품들에서 등장한‘파이트 클럽’,‘로드트립 휴가’등이 바로 이러한 '리미노이드(liminoid)'행사들의 유사형태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오늘의 사회가 다름 아닌 디스토피아의 세계로 인식되는 것이다.

어둡고, 불안하고, 강렬하고 그리고 음울한, 그러나 진지하고 철학적이며 사색적인 이상향(理想鄕)을 그리는 작가의 시선은 이 작품에서도 변한 것이 없다. 그래서 삶과 세상의 모순을 혹독하고 기이하게 표현해 낼수록 더욱 그 진지하고 웅숭깊은 인간과 인류사회의 성찰은 예리하고 매혹적이다.
“어둠속에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요란해지는, 그 울부짖고 물어뜯는 소리. 수많은 이빨과 발톱이 물고 할퀴는”쓰레기 같고 추악한 현대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논평인 이 작품은 작가의 시선이 한층 성숙하여 인류 사회학적 비평서에 이른다고까지 할 수 있다.
질서와 무질서에서 다시 질서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그리고 다시 새로운 일상을 반복하는 인류의 문화현상을 색다른 것을 경험하게 되는 과도기적 시간, 또한 심화된 난장판의 시간으로 상징화한 탁월한 작품이다.  

자기 자신을 키우고 자기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는, 그리고 시공간을 뛰어넘는 삼위일체론 등 “시간의 거대한 역행 고리들”을 이야기하는 환상적 시간여행, “트림을 할 때마다 분홍색 플라스틱 구세주들이 무더기로 마구 튀어"나오는 황당한 유머, 개처럼 예민한 후각을 지닌 인간 블러드하운드, 지문보다 100배는 더 특징적인 여성의 입술...등등 팔라닉 다운 상상력과 표현, 문장은 그의 매니아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영리한 사람이 자기는 단지 부패하고 타락한 제도의 산물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하나요?”아마 자기표현과 사회구조를 실험하고 개발 할 수 있는 장을 찾아 헤맬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살인마 랜트의 죽음을 진정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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