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천재들의 생각 아포리즘 - 0에서 1을 만드는 생각의 탄생
김태현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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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신조에 갇히지 마세요.”

(Don't trapped by dogma...other people's thinking.) - 스티브 잡스(Steve Jobs)

 

 

누군가의 체험이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표현된 글이라는 아포리즘의 정의와 같이 방점은 체험에 찍힌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양태들을 경험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러한 체험에서 우러난, 특히 끊임없는 삶과 일의 도전을 그치지 않으며, 인류의 행위에 무언가 긍정적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의 말은 귀중한 깨달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이와같은 의미와 함께 삶의 일상 속으로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GPT’처럼 이미 인공지능과 디지털의 세계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기술의 현재와 미래를 경험하는 이들의 언어, 생각을 이해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책은 고인이 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로부터 트위터의 잭 도시’, 구글의 전 CEO에릭 슈미트’, 여성의 사회진출과 일-가정의 양립의 모델이기도 한 유튜브의 CEO ‘수전 워츠츠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링크드인의 리드 호프먼’, 이미지 중심의 소셜 네트워크인 핀터레스트의 벤 실버만에 이르는 25인의 실리콘밸리의 설계자이자 혁신가들의 통찰적 응집의 언어들이 우리들과 교감을 위해 그 웅변을 들려주고 있다.

 

이들에게서 반복되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장기적인 시야실패의 긍정적 수용의 다양한 버전의 조언들은 일과 삶의 목표를 위한 분명한 좌표가 되어 줄 수도 있다. 또한 예견치 못한 사업적 발상의 접근도 발견할 수 있고, 번쩍 하며 어떤 각성의 불빛이 두뇌를 깨어나게 하는 문장에 무릎을 탁하고 칠 수도 있을 것이다. 링크드인의 CEO 리드 호프먼은 소셜 네트워크는 일곱 가지 죄악중 하나를 활용할 때 가장 잘 운영된다.”, 인간의 탐욕을 이용한 네트워크임을 알려주기도 하고, 트위터의 잭 도시는 행운이란 (When)'를 인지하는 것이라며, “You have to start. Start now, Start here, and start small. Keep it simple.”라고 바로 지금 여기서 단순히 시작하라고 제언하기도 한다.

 

유튜브처럼 연령과 학력, 케케묵은 차별의 구분들 그 어떤 것도 장애물이 아닌 곳이 바로 작금의 ICT 세계이다. 주저하지 말 것을, 열정과 실패를 현명하게 그러안는 용기라면 그리고 그것을 지속하는 장기적 안목의 실행이라면 그 자체가 삶의 풍요가 아니겠는가라는 인식 일 것이다. 의미없어 보이는 하나의 점들이 모여 의미있는 선이 되듯, 중요한 것은 열정의 지속임임을 마크 저커버그는 자신의 체험 언어로 들려준다.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서 상상 속의 무수한 변수들을 앞세우고 주저 안곤 한다. 세상에서 실패를 보장하는 유일한 전략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것임에도 이를 실행하는 우매함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볼 수 있게 된다. 비록 아무것도 얻지 못하거나 실패에 부딪힐망정 결코 그것은 삶의 손해도 실패도 아닐 것이다. 실패의 크기가 함께 커지지 않으면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아마존의 CEO 제프 조이스의 말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생의 도전과 용기에 관한 체험적 진리뿐 아니라 ICT 기업의 창업과 기술 선도자로서의 각별한 경험의 글들은 창업과 기업의 운영자들이 경청할 현실적 업계의 분위기와 교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미친 짓을 하고 있지 않으면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구글의 창업주 래리 페이지의 불가능에 대한 도전의 경쟁없는 가능함의 발상이나, 만약 무언가 실패하고 있지 않다면, 충분히 혁신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며 실패를 곧 성취의 한 실현체로 인식하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의 말을 되새겨봄으로써 어쩌면 우리의 태도를 반성하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겠다.


GPT의 설계자이자 Open AI 창업자인 샘 알트만은 “AI가 모든 곳에 스며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능의 한계 비용과 에너지의 한계비용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0에 다가갈 것입니다라고 AI의 세계에 우리 인류가 어느새 들어서 있음을, 그리고 그 실현 비용이 필요치 않을 만큼 낮아질 것을 예견하며, 인공지능의 발전이 예상보다 느리고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알려주기도 한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식견들과 이 새로운 기술 혁명의 시대를 선도하는 인물들로부터 일과 성취, 삶의 이해, 직업을 바라보는 신념들과 미래 기술의 현재를 읽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유명인들의 짜투리 글이 산만하게 나열된 그런 흔한 아포리즘 모음집이 아니다. 열정적 체험에서 우러난 응축된 이들 언어들의 울림과 그 지향의 의미들이 삶과 일의 경영, 그리고 ICT비즈니스업계의 고유한 설계와 기획, 그리고 혁신을 향한 도전의 시간으로부터 건져낸 깊은 내면의 언어들로 구성된 하나의 경영전략서이고 인생 지침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라이언 체스, 에어비앤비 창업자는 하룻밤 사이에 성공을 거두는 데 1,000일이 걸렸습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는 남의 성취를 하룻밤이라 말하지만 그는 3년의 시간임을 들려준다. 반복은 결코 기억을 만들지 않으며, 자신의 새로운 경험만이 기억을 만들어내고 삶의 유익성을 창출한다. 어쩌면 이 책을 읽으며 실제로 우리들이 배워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위험 속을 항해하는 것임을 깨우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판을 뒤집어 자신의 가치를 내세우려는 태도는 이 책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기성의 판을 엎는 데 관심을 가진 이들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정성을 들여, 불가능성에 실패를 무릅쓴 용기로 묵묵히, 미친 듯 열정을 다하는 것이 무엇임을 보여 줄 뿐이다. 인간의 지식에는 아직도 많은 공백이 있다(There are still many large white spaces on the map of human knowledge.)”, 어쩌면 이 책은 기회와 바로 지금의 실천의 용기를 교감하는 계기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스타트업(startup)을 일궈내려는 창업가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주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가능성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무언가를 믿으면 그것은 사실이 된다!

 

 

"Expectation are a form of first-class truth. 

기대는 가장 중요한 진실의 형태이다."     - 빌 게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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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 문학의 이해
강필운 외 / 명지출판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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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전에 써진 글들이지만 현재적이다. 15세기를 전후한 바로크 시대로 불리는 스페인의 신비주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글인데, 이 책 신비주의 문학의 이해를 찾아 읽게 된 이유는 이 세계를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는 데 거듭 실패하는, 그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글쓰기의 궁극의 방법론으로써 비의(秘意)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작가들과 문학작품의 의지를 엿보기 위함이었다. 사실 여러모로 아쉽지만 신비주의 문학과 관련하여 이렇다 할 대중적 간행물을 찾기가 어려운 가운데 발견한 책이다. 품절, 절판되지 않아 읽어 볼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사실 신비라는 단어자체가 정의를 거부하듯이,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언어로서 설명이 결코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서구의 신비라는 언어의 기원은 그리스어 ‘mistikos’라는 비밀의식에 결합된, 비밀에 찬을 뜻하는 형용사다. 즉 우리 인간의 눈이 닫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이성이나 인간의 언어로 형언하기 어려운 것을 재구성하여 형상화하기 위한 개념이기도 하고, 인간 논리와 기존 사고 체계로 설명하기 힘든 비법, 계시나 현시, 애매모호한 비물질적이고 비논리적인 것과 관련된 무엇이기도 하다.

 

또한 이해 될 수 없기에 말 할 수 없는 무엇이어서 어떤 초월적 체험을 통해서만 접근 할 수 있는 몰아(沒我)와 같은 체험적 경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신비의 형이상학적 개념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인간이 보편적 이성이란 것을 저버리고 특수한 심적 상태에서 인식하는 앎, 즉 신비를 통한 인식은 그 가치가 인정될 수 없다는 버트란드 러셀의 무식하기 그지없는 주장의 대척점인, 이 지극히 우려스러운 관점에 설 수 밖에 없는 지점에 관심이 있다. 신비주의, 혹은 비의에 천착하는 것은 시대가 불안하고 기성의 체제가 불의해짐으로써 세계가 혼란해 질 때면 부상하는 신비, 다시 말해 현재의 억압적 지배체제에 가장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관심이다. 그것은 하나의 언어로 묘사하기 불가능한 것이며, 지독히 복잡하게 얽혀있고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음을 특성으로 하고 있기에 신비에 의탁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카프카가 그랬고, 랭보도 그러했으며, 바로크의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도, 뉴 바로크 문학의 기수이자 마술적 사실주의의 대표인 보르헤스도 신비와 비의를 통해 해로운 이데올로기를 떨쳐내고 새 시대를 열고자하는 염원을 표현했다. 이해 될 수 없기에 말해 질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글쓰기, 간음한 여인의 판결을 요구하는 무수한 입들에도 불구하고 침묵의 언어로서 논란의 무의미성을 일깨우는 예수의 언어 아닌 언어의 행위를 이해하려는 것이다. 위에 예시된 작가들의 작품은 씀으로써 그 써진 것보다 더 풍부하고 더 광범위하게 현실을 묘사하고 있음을 깨우치게 한다. 즉 그들의 신비, 비의는 지성이 좌절하는 순간, 즉 설명이나 이치가 닿지 않으며, 인간적 물음이 무너지는 때에 등장하여 진실의 지대를 가리킨다.

 


이 책은 가톨릭의 개혁에 반대하던 스페인의 종교적 분위기 탓에 유일신적 종교적 신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형이상학적 신비 관념에 머물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15세기 서반어 문학이란 한정된 공간을 다루고 있으니 불가피한 서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 문학화와 소설화를 위해 천재적 예술정신을 투영한 미구엘 데 세르반떼스(Miguel de Cervantes)’돈 끼호떼의 미학적 예술창작의 소재로서 신비의 사용이나, 변하지 않고 의심할 바 없는 선험적 기표(God, 이데아, 세계정신, 자아, 질료 등등)의 추구와 현존, 실재, 진리와 같은 궁극에 대한 로고스중심주의 비판에서 시작된 호르헤 보르헤스(Jorge Borges)’가 실현하는 이 세계의 새로운 정렬을 위한 상상, 은유, 우화를 통한 유연한 사고방식의 투영으로서 신비의 사용은 문학을 이해하고, 그것이 말하고자하는 비의를 느끼고 깨우치는 데 긴요한 단초들을 알려주고 있다.

 

낯설고 터무니없어 보이는 돈 끼호떼라는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세르반떼스는 16세기 제국의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스페인의 내면적 빈궁함과 불만족스러운 삶의 반영이라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풍조로서의 은유된 인물이다. 결국 이 연속된 은유의 서사를 구성하는 기사도의 세계, 모험의 여정, 특히 몬떼시노 동굴 모험은 현실 세계의 불가형언성(不可形言性)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학적 수단으로서 신비를 사용한 가히 천재적인 미학의 작품임을 알려준다.

 

돈 끼호떼의 이 동굴 체험은 카프카의 단편 의 주인공을 연상케 한다. 두 작품에 사용되는 어휘들이 중세 신비가들이 신비적 비전을 체험할 때 사용하던 언어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동굴, , 어둠, 짐승, 깨어남, 왕궁 혹은 성, 유리, 수정, 심장, 감은 눈, 만지다, 배고픔 , , 또는 이 세계에 대한 참된 이해를 향한 순례의 여정이자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상징, 은유하는 글쓰기가 많은 부분 유사함을 발견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비의적 글에서 세계의 비논리적이고 함축적인 그 어떤 특수성을 느끼게 된다.

 

보르헤스의 소설들 알레프, 픽션들에 수록된 바벨의 도서관, 바빌로니아의 복권등의 난해성이란 은유의 연속성이 발하는 신비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과 환상으로 나누어진 이분법 파괴논리 자체가 주는 우리들의 습관화된 세계인식 틀의 무너짐으로 인한 것이 클 것이다. 그는 철자(알파벳)의 묘사력을 고갈시켜 현실을 보여주고자 하는 신의 글쓰기, 독자에게 전지전능함을 선사하려는 진정한 불멸의 책을 제안한다.

 

그가 제안하는 14개 단어의 조합으로 무진장하게 텍스트를 재배열함으로써 가능한 미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질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독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환상기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문학의 기능은 인간을 위한 일종의 꿈으로써 인간이 그로 인하여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돕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유연한 사고방식을 강조했다. 한편 토라를 해석하고 감추어진 뜻을 제시하기 위해 사용된 유태인들의 일종의 전통적 접신법인 히브리어로 ‘qabbalah’로 표기되는 카발라는 보르헤스 작품의 신비주의에 깊숙이 참여하여 이 세계의 비의를 해석하는 메커니즘으로 활약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신과 모세 사이에 구전되어 계승된 기억의 주석이자 해석인 카발라는 그야말로 본연의 문학, 비의를 간직한 진짜배기 글이기에 보르헤스가 이를 자신의 작품 기반으로 사용한 것은 어쩌면 새로운 현실 세계의 정립을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게 된다. 참 실재에 도달하기 위해 언어 이전의 신화적 조건으로 돌아가 그 진실을 규명하려는 모험이기도 할 것이다. 언어가 하나의 객체로서 진실 밖에 놓여있다는 인식에 동의하게 되면, 우리들은 불충분의 언어에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오늘의 이 세계는 정말 하 수상하기만 하다. 이해력이 점점 좇을 수 없을 만큼 불의하고 혼돈으로 치닫는 인상이다.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며 시민적 자유의 계기를 마련하는 토대로서, 또한 무수하게 난무하는 교조적 신념들을 종합하는 통합적 능력으로서 신비주의가 발흥했던 인류사의 한 시기로 평가될 시대이기만 한 것 같다. 문학의 역할과 그 심원성이 더욱 요구되는 시절이다. 비의 가득한 문학 작품 출현의 기대가 지나친 욕심이기만 한 걸까? 고전 명작으로 거론되는 많은 문학작품들이 바로 이러한 비의(신비)로 가득한 이유일 것이다. 독서의 참 맛을 위한 긴요한 참고 문헌이 되어 줄 것 같다.

 

 

참고: 함께 읽으면 좋은 도서

 

1) 미구엘 데 세르반떼스: 돈 끼호떼

2) 호르헤 보르헤스 : 알레프, 픽션들

3) 프란츠 카프카 : 단편선집, , 학술원에의 보고, 변신

4) 아르튀르 랭보: 나의 방랑, 지옥에서 보낸 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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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글 -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 할 길
조르조 아감벤 지음, 윤병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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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의 존재로 속으로 뛰어든 글쓰기로서 문학, 秘義에 대해서>

 

이 비의(秘義)를 좇는 철학자는 인간의 언어, 문학 속에서 부재와 결여의 존재’, ‘무의 존재속으로 뛰어들어 그 보이지 않고 해석을 불허하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알 수 없는 기원과 감히 마주하려 한다. 그리고는 바로 이러한 행위가 글이고 문학이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시론(詩論)이자 문학론이며 언어에 대한 해석의 글은 태생적으로 어려움을 지닌다.

 

그렇다고 수록된 11꼭지의 철학적 문학 에세이 모두가 어떤 신비적 비의에 기탁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글이 있는 곳에 불은 꺼져있고, 신비가 있는 곳에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이 불가능한 모순된 듯한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다분히 비의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즉 불과 글, 신비와 서사라는 문학이 포기할 수 없는 요소의 실체를 증명하는 작업이다. 신비가 뿜어내는 검은 빛의 조각들을 식별해 낼 수 있는 일종의 혜안을 알려주려는 선의이기도 할 것이다. 문학을 읽는 독자들을 넘어 문학을 창작하는 작가들에게 의미심장한 영감을 던져 줄 색다른 독서가 되어 주리라.

 

표제이기도 한 <불과 글>이 제일 앞에 놓여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일 것이다. 사실 각 에세이는 그의 설명들을 따라가는 데 비교적 즐겁고 수월한 기분이지만 결론부에 이르면 여지없이 신비적 의미의 장으로 심화되는 바람에 고통스러운 읽기가 되어버리기 일쑤이기에 인내심과 집중력을 요구한다, 작은 방심에도 의미는 마구 꼬여들어 낯선 길을 방황하게 된다. 천천히 차근차근 그가 의도하는 서술을 따라가면 사실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글이기도 하다.

 

우선 불()과 글(or )의 이 낯선 조합이 대체 무언가 하겠지만 친절하게도 이 말의 근원이 된 전설같은 에피소드로 그 연관성이 드러난다. 아주 힘든 문제가 발생하면 현자가 숲속의 어느 장소에 가서 불을 피우고 기도를 드리면 상황이 해결되었다. 그런데 세대가 흐르고 불과 기도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이윽고 장소마저도 망각할 만큼 오랜 세월이 자났을 때 그 세대의 현자는 이렇게 말한다. 장소도, 불 피우는 법과 기도드리는 법도 모르지만 글로 전할 수 있습니다.”라고. 이렇게 말하자 문제는 해결되었는데, 그 현자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문학이란 곧 태초의 신비가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는 뜻이며, 불의 상실에 대한 기억이 문학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로 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정작 망각이라는 것이다. 이 의미의 전도(顚倒), 소설은 이같은 비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오늘의 문학은 바로 이 둘의 관계를 단절하거나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작가와 문학의 본질을 상실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단테를 인용한다. 예술가는 예술의 옷을 입었지만 떨리는 손을 가졌다.” 예술가의 떨리는 손이야말로 불의 부재, 신비의 부재로 인한 기억이라는 불가능한 과제 앞에선 극적 긴장이며, 기원의 부재라는 완강함 속에 가끔 전율이 흐르고 은밀한 흔들림을 통해 양식이 느닷없이 밖으로 흘러넘치기 시작하는 그것이 바로 필력이라고 주장한다. 아감벤에게 필력이란 신비의 망각이 언어를 할퀴면서 만들어내는 이 상처가 빚어내는 떨림의 내재성이다. 사실 이 사변적인 정의를 문학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는 여인의 초상, 안나카레니나, 보바리 부인을 완전한 신비의 상실을 통해 삶의 비의를 드러낸 작품으로 예시하고 있는데, 그의 서술을 상기하며 이들 작품을 다시 읽어보는 과정을 통해 불과 글, 신비와 서사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비교적 대중적인 읽기가 가능한 몇 편이 있는데, <비유와 왕국>은 복음서의 예수와 카프카의 작품을 통해 비의적 비유를 시작으로 수사학적 비유를 통해 일종의 글쓰기의 지향성과 해석으로서의 읽기를 성찰하도록 돕는다. 예수가 복음서에서 얼마나 비유(parabola)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지 말하다는 동사가 이 비유에서 유래할 정도였으니 말과 비유의 관계는 예수가 비유하는 왕국(하늘나라)을 설명하는 8가지의 비유와의 관계만큼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씨앗이니 왕국이니 비유는 건너뛰고 카프카의 유고(遺稿)중 한 편인 비유에 관하여로 바로 가보면 비유가 지닌 비의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다. 이 글은 비유에 관한 비유를 주제로 하지만 정작 비유에 관한 비유는 더 이상 비유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면서, 사실 말과 현실 사이의 차이 없음, 왕국이라는 신비적 차원의 장소는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암시한다.

 


어느 현자가 말한다. 저쪽으로 가라, 이 말은 비유이지 실제로 저쪽으로 가라는 말이 아니다. 저쪽으로 가봐야 아무것도 없으며, 그 저쪽이 어디인지도 알 수도 없다. 이 비유가 일깨우려는 것은 무엇일까? 카프카의 작품 속 이름 없는 누군가가 비유를 더 이상 좇지 않으려는 화자에게 왜 거부하시나요?”라며 문제해결을 제시하지만 화자는 그 이야기 역시 비유인 듯하군요라고 받는다. 그러자 이름 없는 자는 안타깝게도 비유로만 이기셨습니다.”라며 패배를 선언하는 듯하지만 실제 자신이 이겼음을 넌지시 비춘다. 이에 다시 화자는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만 이기셨어요, 비유로서는 지셨습니다.” 고 답한다. 화자는 현실과 비유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분리와 상응!’, 구분된 별개의 대립이 아니라 현실과 비유는 개체인체로 서로 다르지만 둘은 하나로서의 다름이라는 것이다. 하아~, 보이지 않는 비의가 어느 순간 문장을 흘러넘치는 것을 발견하거나 그것을 내장시키는 것이 과연 필력이란 말의 의미를 깨우치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이 등장했으니 계속해서 이어가면 에세이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는 창조행위란 곧 저항행위라고 들뢰즈를 인용하며 시작하는데, 창조 행위란 소유한 기량의 잠재태, 이를테면 그 힘(기량)을 표출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규정이다. 즉 창조란 역설적으로 발휘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며, 하지 않을 수 있는 무능력의 인정으로부터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주 멋진 말이 등장하는데, 능력뿐 아니라 무능력까지 거머쥘 수 있는 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지고한 힘이 창조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글렌굴드는 연주하지 않을 수 있는 힘으로 연주한 피아니스트라는 것이다. 연주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재주 앞에서 거장은 연주를 통해 그의 연주 능력이 아닌 연주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갈망하는 표면적인 것들의 욕심을 무너뜨리는 것, 힘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충동을 멈춰 세우는 저항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위대하고 은밀한 매너, 부동의 형식 속에서 발견되는 감지 할 수 없는 가벼운 떨림의 출현이 바로 창조 행위라는 것이다. 제어되지 않는 힘의 남용이 얼마나 하찮은지 매양 목격하는 오늘, 우리의 마음에 이 말의 의미는 더욱 크게 와 닿는다.

 

카프카의 단편 위대한 수영선수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탁월한 가수 요제피나만큼 이의 적절한 예가 없을 것 같다. 휘파람만 겨우 불지만 요제피나는 부족한 조건에서만 허락되는 효과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기에 탁월한 가수이다. 마찬가지로 수영 선수 또한 헤엄칠 줄 모르는 덕분에 성공한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할 수 있는 힘의 무위라는 도식에서 해제로부터 비롯된 결과이다. 진정한 능력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들은 깨닫게 된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할 수 있는 힘의 내부에 존재하는 저항력이다. 스스로의 무능력을 거머쥘 수 있는 잠재력, 그것이 창조행위이고 진정한 능력이란 말이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시와 소설은 말하지 않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표현하는 문학이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무위의 시학에서 무위의 정치학을 상상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오늘의 권력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를, 그 얄팍한 무지의 정신에 전율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의 에세이들 중 적어도 9편은 가히 빛나는 문학적 사유를 담은 굉장한 글들이다.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인 소설의 준비로 시작되는 <책에서 화면으로, 책의 이전과 이후>에서는 문학작품의 완성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니체파솔리니’, 그리고 조르조 망가넬리의 소설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글이 있으며, 우주이자 신이 된 글의 양태를 제시하여 설명하기도 하고, 시인 파울 첼란의 허락되지 않는 공간에서의 허락된 삶을 살아야 하는 유대인으로서의 삶이라는 불가능성에 온통 전념했던 침묵의 시를 <이집트에서의 유월절>이라는 팽팽한 긴장을 담은 이 모순된 제목의 글이 있다. 한편, 물의 원형적 움직임으로부터 언어의 기원, 이름의 기원, 삶의 기원에 이르는 시론의 성격을 지닌 <소용돌이>는 가히 최고 지성의 사유를 맛 볼 수 있게 해준다.

 

소용돌이를 한 번 관찰해보자. 분명 물의 일부지만 물의 흐름에서는 전적으로 분리된 형태이다. 즉 소용돌이는 그 고유의 법칙과 자체로 닫힌 구조를 고수하지만 그럼에도 주변의 모든 것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물방울은 한 방울도 소유하지 않는 절대적 비물질적 정체다. 이 소용돌이가 기원의 비유로 사용되는데, 이와 같은 소용돌이 현상의 변화와 동시적이지만 현상 속에 독자적이고 견고한 자체의 방식으로의 존재하는 것이 곧 역사적 변화의 기원이다. 역사의 기원은 그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끝에 도달해야만 마주할 수 있다. 작가는 바로 이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드는 자여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 극단적 모험과 치열함의 집요함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 작가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문필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중대한 글이 아닐 수 없다, 망각되어 글이 되어 어떠한 신화의 흔적도 없는 문학이 되었지만 그것에는 이 잃어버린 망각 -, 주문, 장소- 이 부재 속에서 넘쳐나야 한다는 과제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어려운 과제를 안을 작가들이 많은 세상이 되기를, 어쩌면 불가능한 기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 위대한 창작자를 기대해 보게 된다. 글쓰기와 글 읽기의 어려움을 체험하려는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은 활짝 열려있다.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창작 활동으로서의 연금술>은 하나의 독립된 책으로 출간되어도 손색이 없는 지적 만찬장이다. 삶과 철학과 역사와 창조의 행위가 일치하는 위대한 문학의 길이 여기에 있다. 문자를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감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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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몸의 역사
자크 르 고프 지음, 채계병 옮김 / 이카루스미디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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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대한 정치적 기술의 역사 

- 인간 몸을 규범화, 억압해온 모욕의 역사를 복원한 걸작



이 책을 다시금 읽고, 감상을 끄적이는 내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21세기 오늘날은 유전학적 창조, 기계화된 신체와 뇌 임플란트, 새로운 형태의 노동 지배, 성의 개념적 변화 등등 인간의 몸에 대한 변화를 숙고하는, 급격한 인류의 신체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중심이 되는 시대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재적이고 근미래에 대한 정책적 숙의(熟議)와는 달리 중세시대에나 자행되었던 인간의 몸을 권력이 지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러한 역사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발상이 지금 논쟁이 된다는 것, 이미 수세기 전에 종료된, 그리고 인간의 존엄과 자율에 대한 존중, 인간 사생활에 대한 헌법적 보호라는 기본권리로 자리매김한 것들이 단지 소수의 탐욕스러운 권력욕에 의해 파괴되는 이 역사적 시간의 낭비가 너무 안타깝고 분노가 인다. 정말 새삼스런 이야기이지만 푸코가 쓴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앎에의 의지)를 더 이상은 인용하는 세계가 한국 사회에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권력관계는 몸에 직접적인 지배를 수행한다. 몸을 둘러싸고, 몸에 흔적을 남기고, 몸에 고통을 주고, 몸에 노동을 강요하고, 몸에 지나친 예절을 의무 지으며, 몸에 복종의 몸짓을 요구한다.” 라고 썼다. 작금의 정권이 1980년대 이전의 노동착취 시대였던 주 69시간의 노동을 요구하며, 군 정보기관인 기무사를 부활하여 민간사찰에 착수하겠다고 을러대고, 술집 앞 대로에 도열하여 선 인간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과 건들거리며 이 장면을 과시하는 하찮은 하나의 인간을 보는 것은 수많은 인민들의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

 

인간의 몸, 특히 평민으로 지칭되던 인민 대중은 인류의 오랜 역사 시대에서 언급되지 않았으며, 단지 감시와 통제, 억압의 대상으로만 인식되어왔던 것17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세계의 주체자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조차 서구의 역사이지 한국 사회에서 인민의 몸은 그저 무시되고, 비난받고, 모욕당하는 대상에 불과했으며, 20세기 후반에서야 비로소 엄중한 권리로서의 실재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40여 년 전의 일이다. 이 고통스럽고 힘겨운 시민적 투쟁의 성취물들이 순식간에 중세의 야만적 폭력의 시대로 회귀하려하고 있다. 한국은 20세기 후반까지 서구의 중세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중세의 인간 육체는 권력의 철저한 지배물이었다. 눈물, 피와 같은 체액조차 위계질서의 수단이었으며, 웃음과 꿈조차도 인간 개인에게 권리가 없었다. 눈물은 고귀한 성직자, 군왕, 기사와 귀족만이 흘릴 수 있었으며, 평민이 꿈을 꾸는 것조차 죄악이 되는 세계였다. 하물며 군중 속에서 웃을 경우 매질이 가해지는 것이 입법화되어 있었을 정도이니 인간의 육체성은 깡그리 부정되고 있었다. 몸에 대한 철저한 억압을 도입하고 조장한 권력, 서구의 중세는 이 권력기관이 기독교 교부집단이었으며, 한국 사회는 왕과 권문대신, 그리고 일제의 주구들, 해방 후 오랜 기간 독재자가 대물림하며 인민의 몸을 관리했다.

 


인간의 몸을 규율하고 통제 억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그 터무니없는 수사(修辭)들로 이 책은 가득하다.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 사회는 두 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잘 알려진 기록이며, 또 하나는 감추어져 있다. 감추어진 역사는 문명이란 이름에 의해 억압받고 왜곡된 인간의 본능과 정열의 운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 인류의 역사는 서구의 역사뿐 아니라 한국의 역사도 피지배민의 몸을 은폐하고 지배자 자신들을 과시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지배권력 계층의 쾌락과 무위의 게으름을 위해 피지배자의 몸은 도구화되고, 절제와 금욕, 죄악을 씻기 위한 고통의 육신으로만 승인되었다. 이 책에는 권력(기독교 교부들, 귀족 엘리트 들)이 어떻게 인간의 몸에 각종 굴레를 씌워 통제, 억압했는지 그 기이하고 거대한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기술, 관습화의 강요 방식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노동하는 사람들(라보라토르; laboretores)에 가해진 기만들도 무진장하다. 성직과 귀족계급은 피의 금기에 성()을 결부시켜 질병화 하는 도식화 과정을 통한 차별에서부터 아담과 이브의 호기심과 오만이라는 앎에의 의지인 원죄를 성적 범죄로 변화시키면서까지 인민의 몸을 악마화하는 이중적이고 교활한 시선들을 볼 수도 있다. 평민은 노동하는 인간들이어야 하며, 그러하기에 육체적 일은 사회적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상스러운 특성으로 고착화되기에 이른다. 아마 이러한 서구 양상의 흔적들이 맹목적으로 수입되어 이 땅에 이식됨으로서 그 추악함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육체의 죄와 입의 죄는 함께한다는 선언으로 색욕과 식탐을 결부하는 것, 금욕과 단식의 강제로 단식기간 9달 후엔 임신곡선이 하강했다고 하니 인간 몸에 대한 처참한 차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이러한 위선적 이데올로기, 정치적 기술의 자기 모순적 진실들은 사회적 긴장을 내재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폭발하기 마련이다. 일례로 무소유, 구걸하며 사는 것이 더 고귀한 신앙심의 표출이라 선언했던 성 프란체스코의 말을 들여다보면 이 말이 모순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자신은 창조자지 육체노동자가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당시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노동자와 농민을 도구와 대지에 결박시키려는 계급적 이익의 표출이상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눈물을 흘리는 것 또한 고귀한 귀족과 성직자만 가능하다고 평민에게 금지되었던 것이 부정한 액체의 사용이라는 충동을 피하는 체액 경제 논리로 둔갑하여 육체의 금욕에 해당한다고 권장하는 것도 인간 세상의 슬픈 코미디라 하겠다. 웃음은 고귀한 머리와 심장이 아닌 비천한 배에서 출발하기에 사탄의 몫이 되어 금지되고, ()은 선악을 구분하는 여과기이자 언동의 흐름을 제어하는 차단기이기에 철저한 통제의 대상이 되어 발설의 자유, 소위 근대 이후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억압되기도 한다.

 

이러한 억압과 통제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수많은 경기장과 공동목욕탕이 폐쇄되어 사라지고 인간의 육체 활동은 전면 금지되기도 하며, 사랑(Amor)은 탐욕스럽고 야만적 정열이라 정의되고, 오직 이웃을 향한 동정심, 연민(Caritas)만을 인정하며 인간의 본능까지 지배한다. 남녀의 애착과 쾌락은 전면 부정되는 사회, 인간의 노동은 오직 도구로서 멸시하면서 고된 일은 위업을 능가한다는 헛소리를 통해 평민에게 어떠한 삶의 자유도 부인한다. 어쩌면 이 책의 제목을 몸에 대한 정치적 기술의 역사라 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몸을 정치적 관리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감시와 통제, 그리고 길들이기와 고문, 고통을 수반하는 폭력의 시대가 열린다. 40여 년 전의 비()민주화된 후진적 야만의 시대, 서구의 중세적 양상으로 회귀하려는 야망에 불타는 막되 먹은 정권이 이 책의 길로 안내했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마치 이러한 퇴행적 현상에 환호하듯 음식에 지나친 기교를 부착하여 식도락의 강박적 쾌락이 전 매체를 장악하며 사회적 차별을 부추기고, 자기모순의 언어, 무지의 언어를 자랑하고 터무니없이 보편화시키는 모욕의 정상화를 현상화하고 있다.

 

책은 19세기 역사철학자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의 저술로 시작하여 마르셀 모스, 노베르트 엘리아스, 요한 호이징가, 시오도어 아도르노, 미셸 푸코, 역사학의 역사로 불리는 아날학파의 창설자인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에 이르는 위대한 지성들이 복구해낸 인간 몸의 역사가 어떻게 사회적 규범화로 이어지는 지 그 몸의 기법들을 하나의 가치 있는 역사로 정리해내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권력과 미디어의 양상들, 그리고 공권력의 걸신들린 듯한 탐욕적 이기심과 그 기형성의 정체, 그 은폐된 본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참고 문헌이 되리라 생각한다. 제아무리 설쳐대는 혹세무민의 권력도 인간 몸의 자유를 통제할 수 없다. 끊임없는 저항과 통제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내는 사회는 필연코 암흑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다. 역사의 사실은 인간 세상의 거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차별과 모욕이 횡행하는 세계로의 반동적 행태를 바로 잡아야 할 때가 도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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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한용운 지음 / 열린책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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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집 초간본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표 시집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사실 시대의 간극은 물론 20세기 초, 한국의 현실이란 식민지민으로서의 고달픈 삶에서 비롯된 제한된 문명 접촉이라는 한계로 그 시적 언어의 빈곤함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당대의 시작(詩作)들에 대한 제 관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 몇 권의 시집을 선택하게 했고, 저는 네 권의 시집을 다시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 네 권의 시집 중에서도 만해(萬海)님의 침묵은 당대 여타의 시작들과 확연히 다른, 즉 당대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언어와 상상력으로 오늘에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고 날카로운 미적 감동과 높은 사유의 감각을 깨우는 시집이라는 신뢰에서 유일하게 호의적으로 선택한 시집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편애가 이미 한용운의 시가 말하는 분별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남과 같은 것들과 괴리가 있는 행위이겠지만, 한편으론 그 벗어남이라는 언어 자체의 속박을 거부하는 저다움의 주장이기도 할 것입니다.

 

시집을 여는 첫 면에 시인의 군말이 있습니다. 아마 그가 쓴 에 대한 의미를 독자에게 먼저 알려주려는 의도로 저는 이해합니다. “<>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시작하여 너에게도 님이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라고, 님이란 어떤 별개의 개체가 아니라고, 그리고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말합니다. 나라를 잃고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는 백성들이 가엾어서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그리고 세계 만물에 대한 연민을 통한 깨달음, 대자유의 진리를 가르쳐주고자 함이었던 듯싶습니다.

 

수록된 88편의 시() 어느 하나의 시편도 생의 감각을 일깨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제 어린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님의 침묵을 획일적으로 해석하도록 강요되었던 그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읽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편협하게 이끌었는지를 매번 분노로 곱씹습니다. 조국애니 민족애니 하며 오로지 국가의 충성만을 말하던 그 천박한 입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만해가 말하는 은 연인이요, 민족 해방 구원의 힘이며, 인간 삶의 진리와 구도(求道)의 본원인 미륵이고, 인간 자체의 본질이 탁월하게 결합된 응결체입니다. 그것의 매체는 사랑이며 연민이자 그리움인 기룸(기루다)’일 것입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로 시작되는 님의 침묵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로 맺습니다. 연인이자 조국이며 삶의 본질인 깨달음은 떠나버렸지만 결코 시인은 떠나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님의 부재를 침묵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실재하는 것으로 뒤바꿔버린 것이죠. 그리곤 이별이 만들어낸 슬픔이 곧 새로운 삶의 원천일 것임을 말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어지는 시 이별은 미의 창조,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中略)...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라는 구절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사랑의 깨달음, 이것은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아마 만해는 우리들에게 이 깨달음을 직접 체험하도록 견인하려 한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깨달음을 묘오(妙悟)’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이 있답니다. 완전히 죽은 뒤에 비로소 새롭게 소생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여기서 죽음이나 이별이라는 것은 상식화된 이름이나 관념의 초월로서 분별, 집착,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죠.

 


특히 좋아하는 시가 있는데요, 꿈 깨고서예술가라는 두 편입니다. 전자에는 밤마다 문밖에 와서 발자취 소리만 남기고 그저 가버리는 사랑에 대한 야속함을 말합니다. 그 발자취 소리 탓에 님을 찾아가려고 구름을 타는꿈을 꾸다 깨어났거든요. 해방의 광영이 들어오지 않고 도로 가버리는 안타까움, 님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아름다워 그 아련한 아쉬움 탓에 자꾸만 읽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연인의 눈 코 입, 그리고 두 볼에 파인 샘까지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예술가가 됩니다. 연인의 모습을 백 번이나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그 서투름이 묻혀버린 저 오랜 기억의 장소를 거닐게 합니다. 그런데 그 연인이 이젠 곁에 없습니다. 시의 화자는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장합니다. 연인이 가는 바람이 되어 화답합니다. 고마움에 절로 두 손을 모아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어떤 생각도 일지 않는 어묵(語默)의 세계에 잠겨있는 순간이 너무도 좋습니다. 아무런 구속도 없는 참다운 존재가 된 것 같은 그런 상태, 이것이 부처인 것일까요?

 

구원의 간절한 염원이 절절히 느껴지는 오셔요라는 시를 읽으며 당대를 살던 우리들의 선조들의 마음이 안타깝게 다가왔는데요,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라고 시작하고 같은 시구로 끝납니다. 당신의 위험을 위해서는 황금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되며, 자신의 가슴이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누구도 당신에게 손댈 수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당신을 위해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고요. 그러니 어서 오시라고. 이처럼 만해의 시편들을 읽다보면 마치 문 없는 문을 열어젖히는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간 것 같은 평안 속에 침잠하게 됩니다.

 

시인은 시집의 마지막에 독자에게라는 글에서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라고 겸허하고 문학의 시대성을 예감한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라면서 말이죠. 시인의 이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 그의 시는 철지난 메마른 국화송이가 아니라 더욱 그윽한 꽃향기를 여전히 발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를 부인하고 분별과 차별의 언어를 내세우며 권력과 재화에 탐욕스럽게 매달리는 인간들이 춰대는 망나니의 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깨달음 없음의 이 재현을 보며 더욱 시인 만해 선사의 기룸의 의미가 높고 깊게 다가옵니다. 강과 산으로 길이 막혀오지 못하는 님을 위해 시 속의 화자는 보석으로 사다리 놓고 진주로 배 모아 길을 냅니다.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선종(善終)하신 시인의 숨결이 한 겹 봄바람 속에 실려 임박한 님의 지엄한 행차를 알려주는 것만 같습니다. 시인의 위대한 사유의 광채를 감히 조금은 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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