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 Love - 섹스와 음식, 여자와 남자를 만나다
요코모리 리카 지음, 나지윤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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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스레를 떨 까닭이 없을 정도로 작가는 진솔하다. 자신이 경험한 세상만큼은 그대로 투영하고 싶었던듯하다. 그래서 6개의 연작으로 구성된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각기 1인칭‘나’를 통해 자기만의 고유한 색채를 타인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더욱 선명하게 그려내게 하고 있으며, 타인의 에피소드에 등장되는 1인칭 나의 대상으로서의 시선과 교차하게 하여 바로‘우리’는 어떠한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이 작품의 제목‘이트 앤드 러브(Eat & Loive)'가 상징 하는 바와 같이‘먹는 것과 욕망’을 동일선상의 인식에서 풀어나가는 작가의 일관된 역량은 능청맞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교감을 형성케 해준다. 잘나가는 일류 크리에이터를 남편으로 둔 연예스타이자 요리연구가인 40세의 중년 여성,‘에구치 미라이’가 하는 음식과 섹스가 교묘히 결합된 다음의 표현은 이 작품의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중년 여성은 싸구려 카페의 부실한 음식으론 만족하지 못한다. 고급 재료, 제대로 된 세심한 맛, 향기로운 냄새..., 게다가 그릇, 테이블 세팅, 서비스까지 모두 완벽해야 하는 것이다.”이는 하루 밤 침실로 유혹했던 남성의 부실함에 몸서리치며, 자신의 섹스에 대한 품격을 한껏 치장하여 의미를 나열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관능적 풍미, 고급스러운 미각을 지닌 성숙한 어른만이 아는 섬세하고 농밀한 맛.”, “조금 더 달고 뜨거운 느낌...”은 원초적 욕망으로서의 음식과 섹스에 대한 동일 감각으로 표현되고 있다.

36세의 160센티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키의 카피라이터‘노자키’만이 남성이다. 그리곤 40세,34세,26세,22세,20세의 여성들이 그녀들만의 욕망을 쫓는다. 20세의‘기시타 미오’를 제외하면, 모두 노자키와의 로망을 꿈꾸었던 여성들이다. 노자키란 볼품없는 인물임에도 카피라이터 유망주로서의 신인상의 수상을 계기로 형성된 여성들의 의식의 변화는 그야말로 원초적이다. 그러나 바로 이 원초성이 음식의 차별, 섹스의 차별이란 동의어로 서로 다름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질적 아이러니이다.

이는 노자키와의 하루 밤에 진저리쳐대는 미라이의 남편과 연결되는 작품의 대단원 격인 미오의 이야기에서 먹는 것에 대한 차이가 불러온 섹스의 차이, 삶의 차이를 대비하는 에피소드에서 극명해진다.

“인간은 먹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먹는 것은 인간의 기본이야. 그래서 맛없는 것을 먹으면 안 돼. 늘 맛있는 것, 잘 갖춰진 것을 먹어야 해. 지나친 듯해도 그것이 바로 좋은 인생을 만들어 가지....,반찬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온갖 희귀한 걸 먹어보고 싶은 건 인간의 욕망이니까. 욕망은 끝이 없는 법이지.”하는 에구치의 기성세대로서의 시선에 대해, 20세 미오의 “항상 격식만 차리는 식당에 끌려 다니고, 하루하루가 피곤해. 기껏 밥 한 끼 먹는 것 뿐 인데. 이젠 지쳤어.”하는 반란은 욕망에 대한 정말 신선하고 통쾌한 해석으로 다가온다.

한편,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엄마, 낙태와 계류유산, 일주일에 한번 나타나는 남편에 대한 생활에 대한 의존감등 세대를 불문한 여성으로서의 연민과 그네들의 불안과 고통이 커다란 하나의 주제의식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여성들의 행동에서 홀연히 남성을 털어내고 분연히 홀로이 세상에 선다는 식의 페미니즘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작가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시련이 남성에게 있다는 식의 책임전가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자아를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자신을 보다 냉정하고 세심하게 바라보는 성숙하고 균형 잡힌 - 서로 지원하고 협조하는, 그러나 서로 다르고 독립적인 객체로서 인정하는 - 성(性)개념으로 진화되어있다. 별거형 부부로서 소원한 관계이지만 결국 이탈리아 여행을 속삭이며, 그 안전하고 안락함이란 평형을 찾는 것이나, 자기의 작은 아파트로 돌아와 비로소 평온을 찾고 남성의 지원을 부탁하는 미오에게서 다르지만 같은, 화해의 미덕을 보게도 된다.

이 작품의 구석구석에서 묘사되는 발칙한 섹스는 솔직함으로 오히려 담백하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다채로운 음식들의 향연과 섹스의 절묘한 조합, “음식의 진정한 맛을 가려내지 못하는 남자는 여자의 수준도 가려내지 못”한다는 유머가 독서를 내내 즐겁게 한다. 문득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어진다. 부부 서로의 원초적 욕망을 인정하면서 또 서로의 성에 충실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별거형 부부가 우리사회에 안착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작품을 읽은 여성들이‘먹는 것으로 알아보는 남성 수준의 구별법’으로까지 이 작품을 유행시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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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친 막대기
김주영 지음, 강산 그림 / 비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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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맡기 힘든 토속의 냄새가 솔솔 피어납니다. 이 짧고 당찬 동화 속에 등장하는 한가로워 보이는 백양나무와 참을 이고 가는 어린 소녀의 무채색의 모습, 된장찌개의 구수한 보글보글 거리는 소리, 도란도란 초롱불에 흔들리는 소박한 가족들의 창호 문에 비친 그림자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두엄더미와 사립문, 외양간, 헛간, 뒷간, 토담, 아담한 기와지붕, 굴뚝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그리워집니다.

이 가을, 어린 시절의 잊혔던 기억이 새록새록 잠든 감성을 깨워댑니다.‘양지마을’을 깨우는 낯설고 앙칼진 기적소리가 문명이란 소리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듣기 싫고 괴롭지만, 기관사인 마을이장의 아들이 지날 칠 때 인사 올리는 소리라 이해합니다. 우린 그렇게 낯설음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입니다.

똥친 막대기는 그래서 어미백양나무에서 꺾여 농부 박기도씨의 손에 들리게 됩니다. 기적소리에 놀란 새끼 밴 암소를 몰기 위해서였습니다. 백양나무의 어린 새끼가지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열두 가지의 연작 에피소드는 각기 우리네 소박한 일상의 아름다움과 교훈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어미 백양나무에서 부러져 나온 ‘나’(똥친 막대기)는 어미로부터 무심코 받아왔던 영양분과 삶의 안락의 고마움을 새롭게 느낍니다. 어린 딸 재희에게 회초리를 든 엄마 최씨와 아빠 박씨의 자식에 대한 사랑과 가족의 평온이 따뜻한 시선으로 중첩되어 보여 집니다.

나는 회초리에서 측간의 똥친 막대기가 됩니다. 그래서 항아리(똥통)에 담긴 인분을 휘 젓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나는 미래에 낙담합니다. 나뭇가지로서 살아가기 위한 물관과 채관이 오물 찌꺼기로 막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기적을, 삶의 미래에 대한 꿈을 접지 않습니다. 재희의 손에 내가 들렸습니다. 나는 마을의 악동들을 물리치는 기막힌 도구가 됩니다. 그리곤 봇도랑 개흙 속에 던져집니다. 나의 막혔던 물관의 찌꺼기가 봇도랑 물에 씻겨 나는 잠시 싱그런 물길을 빨아들이는 행운을 가집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의지로 세상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부모와 형제, 가족의 무조건적 사랑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러다 우린 어느 순간 부모에게서 분리됩니다. 정말 미미한 존재인 나는 세상, 우주를 향해 어느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회는 내 의지를 꺾어대기 일수입니다. 불어난 물에 휩쓸려 나는 정처 없이 떠내려갑니다. “햇살이 비치고 있는데 나는 갈증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내 몸속 물관에는 충분한 자양분이 축적되어있었겠지요.” 홍수에 시달리며 떠내려 온 고통스런 시간이었지만 똥친 막대기에게는 영양분과 생존의 식수가 되었습니다.

이 아름답고 소박한 한편의 이야기는“정말 위대한 발견”을 하게 합니다. “나는 비로소 내가 뿌리내리고 서 있어야 할 장소에 도달 한 것입니다.”살랑거리는 가을바람과 따사로이 내리비추는 햇살이 삶을 깨끗하고 파랗게, 그리고 신선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이 계절,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없는지, 무엇을 잃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게 합니다.

재희의 껑충한 치마와 단발머리가 귀엽습니다. 새끼 밴 암소와 뒤를 따라가는 재희의 뒷모습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사라진 우리네 농촌의 풍경이 그리워집니다. 이 투명하고 맑은 이야기와 그림들이 찌든 나를 청명하게 만들어 놓은 것만 같습니다. 책을 읽는 순간만이라도 나는 오염되지 않은 세상에 있었던 듯 상쾌합니다. 올 가을 나는 이 작은 책을 한동안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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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 2008-10-10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만큼 아름다운 리뷰네요...
 
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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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저술의 표제인 “세계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은 한편으론 정당하지만 다른 측면에선 부당한 왜곡의 논리라 할 수 있다. 20대째의 CIA 국장은 19대까지의 CIA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규모와 수행업무분야가 축소된 기관을 맡고 있을 뿐이다. 21세기 초, 세계를 속인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가장 추악한 인류의 시대인 20세기의 무자비한 횡포를 행사한 역대 미국정부의 책임을 고스란히 떠넘기기 위한 희생양으로 CIA를 삼았다는 시선을 피 할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1946년 이래 CIA의 창설에서 오늘에 이르는 CIA의 각종 세계 공작과 첩보활동, 준군사적 활동의 정치적 배경과 시대별 미국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헨리 키신저와 같은 실질적 권력행사자의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저질러진 무지한 음모들과 전쟁의 비밀을 적나라하게 정리하고 있다.

‘팀 와이너(Tim Weiner)'의 이 정리된 CIA역사는 내게 몇 가지 뚜렷한 주제를 시사한다. 그 첫째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대변되는 20세기 후반의 왜곡된 기막힌 세계사의 어처구니없음이며, 둘째는 정보전의 그 비밀스런 공작과 첩보활동의 수확이 실제 얼마나 무익하고 무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렇듯 은밀한 정보전쟁의 이면에 행사된 추악한 권력의 도덕성, 이성의 파괴적인 행태들이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가치의 혼란과 무관하지 않음을 이해케 된다는 것이다.

CIA를 통해 취해진 비 서구국가들에 대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진 수 많은 암살과 음모와 쿠데타, 그리고 전쟁의 동기가 오로지 미국의 정치, 경제적 이익과 소심한 자국 안보주의에 기인한 것이라는 은폐되었던 진실에서 20세기 지구촌을 지배하고, 경찰국으로 자임해온 미국 정부의 거짓과 속임수와 몰염치에서 인간의 사악함의 그 극한을 보는듯하여 자괴감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시작된, 지금은 해체된 소련(소비에트 연방)과 미국이란 양대 진영의 냉전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고, 민주주의 이념을 확산하여 자국(미국)의 영향력을 증강하겠다는 오만에서 비롯된 탐욕과 무지의 권력을 보게 된다. 서구사회로는 이탈리아의 정치인과 바티칸 정치조직에서부터 남아메리카의 쿠바, 과테말라, 칠레 등 여러 국가들, 그리고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대만,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동아시아지역 국가, 그리고 이라크,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근동지역 국가, 아프리카, 동유럽 등 전 세계에 대한 CIA를 통한 미국의 제멋대로이고 터무니없는 기만은 바로 20세기 전 인류를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내전, 갈등으로 온통 뒤덮는 최악의 세기로 빠뜨렸음이 그들의 증언으로 명료해졌다.

그들(미국 정부)은 그들이 은밀하게 진행한 수없는 준군사적 행동과 쿠데타의 부추김, 반군의 지원, 전쟁의 야기를 통해 그들의 명분인 자유민주주의의란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CIA의 공개 자료에서와 같이 그들의 순간적 이익이란 편의성에 의존한 무분별한 행동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일례로 “부패하고 믿을 수 없는 두 지도자인 남한의 이승만과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의 정보기관”을 단지 CIA가 동반자로 삼았기에 그들은 이 무능하고 사악한 정권들을 지원했을 뿐이며, 마약밀수범이나 살인자 등 범죄자는 물론, 잔인한 독재군사정권을 불문하고 미국의 권력자들의 한 마디에 친구가 되었고, 다시 적이 되어 반복되는 쿠데타와 내전 등 혼돈과 무질서에 휩싸일 밖에 없었음은 충격이상의 고통을 던져준다.

이러한 공개된 자료와 증언에서 이미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가치는 그 의미를 모호하게 하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서구유럽이 지구촌에 강요해온 보편성이란 가치의 붕괴를 직시하게 된다. 한편, CIA라는 정보원천의 60년에 이르는 연대기에 있어 비밀정보 활동의 속성과 그 한계를 성찰하게 된다. “개방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밀첩보 사업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 할 것인가? 거짓말을 수단으로 해서 진실에 복무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 할 것인가? 속임수와 교활함을 이용해서 민주주의를 널리 확산시킨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 할 것인가?”하는 본질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질문을 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군대의 파병으로 우리와 무관치 않은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정부(백악관,국무부,국방부 등)와 CIA의 거짓과 속임수, 그리고 오만으로 점철된 실패사례는 이 질문에 대한 한 단면을 시사해 준다. 또한 21세기에 초기부터 시작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역시 세계를 속인 가장 극악한 거짓이었음을 모두 알고 있다. 여기서 전직 CIA요원들의 “지식이 없는 행동, 정보가 없는 전쟁은 위험한 일이었다.”는 자성(自省)과 같이 “60년 동안 수 만 명의 비밀 공작요원들이 수집한 정보들 가운데 정말 중요한 정보는 극히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이 CIA의 가장 은밀한 비밀이다.”는 비판은 비밀정보활동의 속성을 신랄(辛辣)하고 솔직하게 지적하고 있다하겠다.

소련의 붕괴(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인도의 핵실험과 같이 전혀 감지하지 못한 CIA의 정보활동이나, 중동(근동)에 대한 무지와 실패, 쿠바의 카스트로에 대한 미국의 끊임없는 압박과 침공의 실패, 베트남전의 완벽한 패배 등에서 “첩보활동의 실패, 사진 분석의 실패, 보고서 이해의 실패, 사고의 실패, 그리고 관측의 실패”와 같은 정보활동의 근원적 한계를 볼 수 있으며, 권력자(미 대통령 등)의 이해관계와 통치스타일에 따른 정보 왜곡현상의 불가피성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시선을 달리하여, 한 국가의 안보유지를 위한 정보활동을 실천하는 요원의 자질은 어떠해야 할까? 하는 질문으로 부터 “주어진 일을 하는 과정에서 교활하게 거짓말을 잘해야 합니다. 이런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덕적인 안정감을 잃지 않을 수 있는 비범한 인재”여야 한다는 지적이나, 정보활동이 지니는 원천적 속성으로서 적(상대국)의 기밀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가 인정하는 도덕적 행동규범이 지켜져야 하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지금까지 인정되어왔던 인간 행동규범은 이 대치(전쟁 등) 상태에서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비위에 거슬리는 이 철학에 익숙해져야 하며, 이 철학을 이해하고 또 지지해야합니다.”하는 대답은 과연 진실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활동에 있어 인간 행동, 조직 행동에 대한 일탈이란 측면만으로 20세기, 그리고 21세기 오늘에 이르는 동안 미국행정부와 그 권력의 수반인 대통령, 그들의 수하인으로서의 권력집행자, CIA가 인류에게 저지른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

“전쟁에서 이기려면 정보가 중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은 정보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전쟁터로 내보내는 청년들의 피와 용기로 이긴다.(...)정보가 정말로 도움이 되는 것은 전쟁을 피하도록 할 때이다.” 그들은 전쟁을 억제하고 전 지구촌 인류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정보와 권력과 힘(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뻔뻔한 거짓말로 세계사회를 기만했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세계경찰로서의 오만한 지위를 버려야 할 것이다.

이 저술에는 “‘잿더미의 유산’만을 남긴 채 떠났다. ”는 표현이 수차례 등장한다. 즉, 돌이킬 수 없는 폐해만 남긴 그네들(CIA, 미국의 최고권력들)의 수치스런 오점을 의미한다. 이 충격적인 보고서이자 증언이며, 역사서인 이 저술에서 자유와 정의, 그리고 혼돈에 가려진 이성과 파괴된 인류의 도덕적 가치를 바로잡고자 하는 저자의 용기를 읽는다. 자유주의적이지도 않고 민주주의적이지도 않은 20세기에 보여준 미국과 유럽적 가치의 몰락은 불가피하다. 이제라도 전 지구적 보편적 가치와 새로운 이성의 세계를 위해 확장된 사유와 지성을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저작물을 단순히 CIA와 미국 정부의 숨겨졌던 비화로서, 그리고 비밀정보 활동이란 용어적 고뇌에 국한하여 보기에는 그 질량이 둔중하다.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위한 철학적 반성의 기반으로서 이해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든다. 저자의 오랜 세월에 걸친 노고와 뛰어난 통찰력이 만들어낸 노작(勞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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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 2008-10-10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술의 논지와 독자의 느낌이 분명한것 같네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이별을 잃다
박영광 지음 / 은행나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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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 울었다.  그 상실이 너무 간절하고 애틋해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훔쳐댔다. 어, 지운이 녀석 이렇게 가슴 아프게 하나, 다시금 그리움에 절망하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별조차 잃어버린 이 지독한 역설이 사무치도록 아플 것이라는 걸 몰랐다. 사랑이란, 행복이란, 그리고 삶이란, 그것은 이미 살아있음의 다른 표현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의 관심이 미치지 않는, 그러나 세상 어딘가에서 세상의 한 축을 떠받치고 살아가는 소박한 이웃인 경찰관 ‘진수’의 고단한 일상 속 작은 행복의 커다란 이야기이다.  진수는 정말 이별을 잃는다. 은빛 칼날이 그의 몸 깊숙이 들어와 헤집고, 수 없이 뚫려버린 구멍들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에 젖은  자신을 부여잡고 추적추적 뿌려대는 빗속에서 아스팔트 도로위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시신을 내려다 볼 때, 죽음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이별조차 앗아가 버렸음을 이해한다.

아내 ‘수경’과의 수줍고 마냥 설레기만 했던 만남과 아이들의 출산, 그리고 깊은 속 내비칠 줄 모르시는 어머니는 그에게 행복 그것이었으며, 삶의 의미 자체였다. 자신의 죽음에 비통해 하는 가족과 친지, 동료들과 지나온 날을 바라보고, 살아있는 그들의 슬픔에 한없는 연민을 보내는 여정은 내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이 작품이 살아있음에 대한 고귀함과 가족이란 그 애절한 관계의 본성적 사랑, 그들과의 작은 일상들이 바로 행복이라는 삶의 한 시선을 던져주고 있지만, 주인공 진수의 직업적 신분인 일선 범죄 수사관들이 처한 우리사회의 후진적 구조와 위험에 내몰리고 혹사되어 피곤에 찌든 그네들의 현실이 작품의 중요 배경을 형성하고 있음은 그저 지나치기에는 부족한 무엇이 있다. 네 가족이 살기에 빠듯한 소형공동주택과 소형 중고 자동차, 생계와 소박한 미래를 위해 허드렛일을 해야만 하는 아내,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란 거의 존재가 불가능한 업무현실 등은 소설이 제공하는 또 다른 고발이라 할 수 있겠다.

살아있음의 감동과 곁에 있어주는 가족들을 향한 연민의 감정이 마구 솟아나게 하는 작품이다. 그저 감동적인 작품이라는 표현이외에 어떤 말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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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적 보편주의 - 권력의 레토릭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김재오 옮김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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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의 시기라는 서구화의 물결에 거세게 휩싸인 20세기, 그리고 21세기 오늘에 이르는 동안 우리의 신념 깊숙이 자리한 보편주의란 어떠한 것인가? 우리는 어떤 가치를 신봉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보편주의라 말하는 것은 진정 전 지구적인 보편주의라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보편주의의 정체는 무엇인가?

세계의 지성은 ‘크리스토퍼 콜럼부스’의 미(美)대륙 발견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 지구를 세력범위로 통합하는 지구상 유일한 역사체제로 지속되어온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를 구성하는 지식기둥 모두가 견고함을 상실하고 있으며, 체제의 진동이 격렬해지고 무질서해지는, 그래서 근대세계체제의 권력들이 지난 5백년간 정당화시켜온 일련의 이념들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시기에 도달해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2001년9월11일의 사건은 바로 이러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와 새롭거나 통합된 전 지구적인 보편주의에 대한 고민을 가속화시켰다.

이 저술은 500년간 지속되어온 보편적 가치의 실체를 그 역사적 배경 하에서 조명하면서, 그 허세와 독선, 편파적이고 왜곡된 강자들의 기본적인 레토릭(rhetoric)으로서, 또한 범 유럽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이 근대세계체제 지배계층의 이익을 도모 할 강자들의 자기정당화 이데올로기에 불과했음을 역설하고 있다.

美 예일大 석좌교수인 저자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박사는 이렇듯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범 유럽 세계의 오만과 허세로 가득한 그들의 보편적 가치와 진리를 유럽적 보편주의(European Universalism)라 명하고 이들, 즉 서구문명이 16세기 이후 근대세계체제의 역사 내내 그 밖의 세계에 팽창, 확산시킨 보편주의의 모순되고 폭력적이며, 탐욕으로 일그러진 상(像)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적 보편주의, 다시 말해 오늘 우리의 가치관 중심을 관통하는 보편적 가치의 다른 표현인 이 가치의 근원적이고 시계열적인 성찰에서 나 자신과 우리들의 무분별하고 무지한 가치사유와 그 무비판적 수용에 초라하고 궁색한 그 무엇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스페인 인들의 아메리카 신대륙의 침탈, 원주민 인디오들에 대한 추악한 범죄로 야기된 ‘후안 히네스 쎄뿔베다 와 바로똘로메 데 라스까싸스’의 1550년 논쟁을 근대세계체제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인식기반으로 하여, 18세기, 19세기, 그리고 1945년, 1968년의 인류 지식기반의 대 격변기별로 그들의 정당화된 보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최초의 ‘개입’에 대한 라스까싸스와 쎄뿔베다 논쟁의 핵심인 “누가 개입 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와 언제 어떻게 개입 할 것인가?”는 오늘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폭넓은 갈등의 중심에 놓여있는 정의의 문제이다. 16~7세기 비 유럽권에 대한 악랄한 침탈과 팽창은 비 기독교인인 이종교자의 개종, 그리고 야만인의 교화라는 명분으로, “ 그 팽창이 문명화, 경제성장과 발전, 그리고 혹은 진보”로 불리는 어떤 것을 확산시키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가치체계였다는 것이다.

이는 스페인이라는 서구의 신대륙이라는 그 밖의 세계에 대한 탐욕스럽고 잔인한 수탈행위가 자행된 이래 21세기 미국의 이라크 전(戰) 개입에 있어서도 동일한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미국이 허구적이기 짝이 없는 ‘국제사회’라는 것에 주장하는, 인류사회에 위협이 되는 악으로서 이라크의 ‘야만성’이란 정치적 이고 자의적 수사로 치장된 구실을 내세워 그들이 이라크에 개입하는 것이 정당한 명분이 될 수 있는 것인가? “누가 그 행위를 범죄라고 규정했으며, 그 행위들이 저질러졌을 때 그렇게 범죄로 규정되는가? 누가 처벌할 사법권을 갖는가? 처벌이 마땅하다면 처벌에 참여하는데 우리보다 더 적합한 다른 어떤 이는 없는가?”,  결국 이는 누구의 개입할 권리인가의 문제이며, 실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행동결의에서 15표 중 4표의 동의를 받는데 불과했던 이라크 개입은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자신(미국)의 의사를 밀어 붙였으며, 강자에 의해 전유된 전 지구적 보편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그들만의 정치적, 윤리적 가치의 실행임을 드러나게 한다.

한편, 18세기 서구열강의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향한 인식체계에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16세기 “쎄불베다의 교묘한 변주곡”이 있다. 이 변주곡은 고도의 “고급 문명세계”인 동아시아와 인도라는 잠재적 적(敵)이자 일정한 존중을 갖도록 한 낯선 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며, “유럽 문명만이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흥성한 관습, 규범, 관행”을 가지고 있다는 서구의 본래적 우위성을 입증하기 위한 허세에 불과하다. 여기서 이들은 '윤리적 선이자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오만한 “서구 관찰자의 발명품”으로 근대성(Modernity)'을 산출해낸다.

이들의 보편주의가 자민족중심주의이며, ‘특수주의’的이라는 역설을 낳게 한다. 이렇듯 위선과 왜곡의 보편주의가 19세기에 이르러는 ‘자본주의 세계경제’라는 전 지구를 세력범위로 하는 역사체제의 고착과 함께 독창적인 인식론인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이분법적 구별을 구체화하여 자기본위적, 윤리적 확신이라는 오만의 뿌리를 내린다. 서구는 보편적 가치를 가지나 그 밖의 세계는 특수적이고 보편적이지 않다는 편협한 인식론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전 세계적인 대규모 탈식민화 기간은 새로운 추동력을 요구하게 되었고, 더 이상 ‘쎄뿔베다’ 식(式)기독교 복음전파라는 방식은 합당하지 않았으며, 이들은 자연법적 견지의 윤리의식에 호소하게 된다. 나아가 이의 합리화를 위해 “폭력수단의 사용만이 자신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명백한 악(惡)을 박멸할 수 있다는 구실”로 ‘꾸시네’ 식 민주주의 전파라는 왜곡된 정당화의 질서로 재빠르게 갈아탄다.

더구나 1945년 이래 의심 할 여지없는 서구 보편주의의 가장 유력한 형태인 ‘과학적 보편주의’의 대두는 “보편주의를 문화의 외부, 정치적 싸움과는 무관한 이데올로기적 중립에 위치시켜 강자들의 가장 교묘한 이데올로기 정당화 방식”으로 정착 시켰으며, 이는 즉시 “선(善)에 대한 추구를 우월한 지식의 영역에서 배제”시키고, “윤리적 비판의 가능성과 객관성을 평가절하 함으로써 윤리적 비판으로부터 강자를 지켜주는” “자기정당화 과정의 최종적인 못질”이 되었다.

이렇듯 500년간 대단히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전 지구를 지배해 온 그들의 보편주의가 기술과 부(富)의 엄청난 팽창으로 야기된 20:80과 같은 세계체제의 뒤틀린 양극화를 낳고, 무자비한 권력의 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독트린으로 전락하였으며, 선과 윤리의 평가절하와 장기 추세적 균형상태의 이격으로 더 이상 지식기둥으로서의 역할이 작동되지 않는 시기에 이르렀다. 이제 이 왜곡되고 편협하며 독선적이고 자의적인 유럽적 보편주의를 대체할 ‘보편적 보편주의(Universal Universalism)'를 찾아야 할 터 인데, 우리는 모두 어떻게 서로 주고 받는 그런 세계에 도달해 낼 수 있겠는가? 저자는 “모든 지식의 재통합에 대한 희망을 유지시켜줄 유일한 종류의 인식론 - 배제되지 않은 중도(unexcluded middle)론 - 을 제안하지만 이 역시 그의 지적처럼 또 하나의 딜레마를 낳는다.

“성취할 가능성은 있으나 자동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실현될 거라는 보장은 없는 보편주의를 선언하고 제도화 할 길을 찾아”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지식인들의 필연적 소명이다.

서구인들의 비 오리엔탈리스트가 되려는 노력, 보편주의가 특수주의를 포용하고, 특수주의가 보편주의가 되는 “일종의 끊임없는 변증법적”교환이 지속되는 그런 세계의 도래를 기대해 본다. ‘가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동서(東西) 지식인들의 고뇌가 도처에서 진중하게 논의되는 오늘은 보편적 보편주의를 발견해 낼 그 가능성을 희망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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