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의 문학터치 2.0 - 21세기 젊은 문학에 관한 발칙한 보고서
손민호 지음 / 민음사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세기 한국문학의 근간을 이루는 30인의 작가와 그들 작품에 대한 변론(辯論)서라 할까? 이들 수록된 작가의 선정에 대한 저자의 언급도 언급이겠거니와 그가 선호하는 작가들임에는 틀림없다. 특히나 이 저작물이 작품 비평이나, 문단에 대한 논평을 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소개되는 작가들에 대한 인품이나, 일화, 그리고 작품의 지향점 내지는 대중적 이해를 지원하는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국문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는데 열중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이 저작물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관심밖에 머물러 있던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 이해를 불러일으키는데 분명히 성공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문단 내에서의 소소한 소음 등이나, 그네들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촌극, 작가들의 성향이나, 드러나지 않았던 작품 이면의 이야기들이 해당 작품들에 대한 충분한 관심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저작자가 구분한 일련의 작가군에 대한 소개 역시 독자들에게 매 작가들마다의 이해를 선명하게 하여 작품의 취향에 따른 작가와 작품의 선택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으며, 부분적이긴 하지만 발표된 작품들에 대한 담론식 소감이 쉬이 접근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독자들에게 친밀감을 높여주기도 한다. 또한, 한국문학의 다양성 결여와 소재의 빈곤, 상상력 부재, 과거와 사상적 편견 등이란 선입견으로 무장된 독자들을 향해 우리에겐 백가흠도, 김민정도, 편혜영도 있고, 김연수, 천명관, 류나도 있다. 그리고 엇박자 악동 김중혁도, 카프카를 닮은 한유주도 있다고 자랑하는 듯싶다.

더구나 소설이나 산문시장에 편중된 독서시장에 권혁웅, 황병승, 이장욱, 김선우, 김민정 등 시인들과 그네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소개는 대중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가져올 수 있을 만큼 신선하고, 수월하게, 이해의 정곡을 안내하며 자리매김한다.

이들 작가들에 대해 세기말의 워밍업을 통해 21세기에 대거 출몰한 새로운 종(種)이라고 까지 너스레를 떠는 저자의 주장은 우리문학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흠씬 느낄 수 있게 해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 문학의 저변을 견고하게 하여주고 즐거운 변주를 만들어가는 이들 작가들의 진면목을 바로 그들 또래의 감성으로 경쾌하게 풀어내고 있어 한걸음 물러나 비딱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려했던 마음을 어느 순간 잊어버리게 한다.

저자 손민호의 21세기를 견인하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건드림은 한국문학에 무심했던 많은 대중들을 새로운 독자층으로 매혹하는데 분명 일조할 것이다. 가볍게 그러나 진심으로 읽게 된다. 우리문학, 우리들의 작가에 대한 애정이 도처에 뚝뚝 흘러난다. 손민호의 어떤 강권도 없었는데 나는 바로 달려나가 구입해서 읽어야 할 작가와 도서목록을 정리한다. 우선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달로’, 그리고 박민규를 다시 읽어야겠다. 이 괴짜(?)들의 세상과 같이 흘러보고 싶어져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기 독자서평단 활동 종료 설문

1.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이유 

   신경숙님의 [엄마를 부탁해] - 이 작품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격렬한 감정의 물살을 좌우하며 눈물 콧물을 쏙 빼 놓고, 결정적으로 한 여인으로서의 비밀에서 삶의 행복을 드러내어 어떠한 이의도 잠재워버리는, 오히려 감성적 동조를 이끌어내기까지 하는 점은 가히 탁월한 이야기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2.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구절 

  김훈님의 [바다의 기별]中 -  "인간에게 다른 인간이 다가오지 않으면 고립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 中略 ~ 다가오는 인기척, 그것이 인간의 희망인 것이다. "

 인간의 타자와의 관계가 삶의 절대적 소인(素因)임을 깨우치게하는 명구절이다. 

3. 내 맘대로 베스트5 

   전 "베스트 3" 만 선택해 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 그 위대한 악법 - 소크라테스, 사랑을 말하다
크리스토퍼 필립스 지음, 이세진 옮김 / 예담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소크라테스는 사랑을 “인간 정신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신성한 비상(飛上)”이라 했던가? 세상에 널브러진 증오, 시기, 갈등, 편견, 차별, 외면, 기아, 죽음, 상실, 전쟁, 그리고 몰락이란 이 부정적 감성의 찌꺼기들이 나 개인, 가족, 지역사회, 인류의 평등과 공감, 공존의 삶을 여전히 해치고 있다.

“모든 영혼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법을 아는 사람”, 소크라테스의 ‘사랑’에 대한 신념과 의지, 실천적 행동을 기저로 한 철학카페, ‘소크라테스 카페’는 지구촌 모든 인류의 진정한 ‘아고라’가 되고, 견해와 경험, 관심이 다른 이들이 모여 타자들의 삶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터전이다.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실천도량으로서 오늘의 세계에 요구되는 가치를 실천철학의 확장된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에로스, 스토르게, 크세니아, 필리아,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에 이르는 사랑의 해석은 철학적 사유(思惟)가 우리들의 현실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스며들어 삶의 양식이 되며, 실현되는 것인가를 철학적 사유를 통한 그 근원의 고찰, 즉흥적이고 다양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보통사람들의 스스럼없는 진지한 대화, 그리고 오늘의 세계로부터 조명하는 사랑의 의미를 성찰한다.

성적 에로티시즘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에로스(Eros)'에 대한 우리의 단편적 이해를 창조성, 실험, 발견을 자극하고 고무하는 관능적 욕망 그 자체의 고귀함과 고결성을, “우리의 시야를 열어 인간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 혹은 차원을 보여주는 그 무엇을 생성하는”아름 다운 지혜로 이끈다. 성적 욕망은 저열한 것인가? 하는 질문은 자유롭게 저마다의 사유를 이야기하는 이웃들의 견해에서 “성적 열정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발산 할 수 있는 사회건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할 수 잇는 가장 아름다움 것은 지혜”라는 관념으로의 발전에 이르는 과정으로 이어지고, “성공의 닮음(semblance)만을 기약하는”현대인의 위험스런 삶의 추구에 대한 경종의 개념으로까지 확산시킨다.

성적열정이 적절하게 흐르지 못하고 삶의 중심에 머문다면 “문화 및 문명의 건설에 투신할 여력과 의욕을 잃게 되고 사회는 병들게 된다.”는 고대 아테네사회의 몰락을 통해 오늘 우리세계에 펼쳐지는 욕망의 왜곡을 경계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 저술은 《향연》에서 찬란하게 빚어졌던 ‘에로스’의 관념을 오늘의 확장된 세상의 가치에 접목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듯이 가족에 대한 사랑(Storge), 이방인에 대한 사랑(Xenia), 친구에 대한 사랑(Philia), 헌신적인 사랑(Agape)이 관념론적 사랑론에 머물지 않고 도덕성, 인류애, 공동체의 사랑, 삶의 내면을 향해 외치는 본연의 목소리로서의 인류의 절대적 실천가치로서 연결하고 있다.

“가족의 사랑이 사라지면서 자기자신, 지역사회, 타인에 대한 사랑도 사라졌다.”는 가족사랑의 실천적 의미는 “혁명의 최대 동력은 사랑”이라는 ‘체 게바라’의 언어에서 힘을 받아 세상의 자비로움은 집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일깨운다. 또한 낯선 이들에 대한 사랑인 ‘크세니아’로부터는 아메리카 인디언인 ‘수’족의 “모든 인류는 인종을 불문하고 영혼의 정수(wakan tanka)를 이루는 일부”라는 믿음에서 이방인이란 진정 존재하는 개념인가고 묻는다.

종교의 갈등, 민족주의의 편협함, 이기적 자원전쟁, 계급간의 갈등이 어느때보다 첨예해진 오늘에서 ‘이타적 이기심’, 동정심 이전에 겸손함을 배우는 자세에서 크세니아의 정신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러나 선진국에게 빈곤에 신음하는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성장을 돕기 위해 국민총생산의 0.7%를 할애하도록 요구하는 UN결의를 지키는 국가는 텐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스웨덴 4개국에 불과하고 세계경제대국인 미국은 고작 0.08%에 불과한 현실은 “배려는 인간실존의 기본적인 상태”라는 독일철학자‘마르틴 하이데거’의 언어를 무색케 한다. 상처와 좌절에 신음하는 이웃에 내미는 연민과 동정심에 고통이 수반될 수는 있으나, 이는 개인의 자아와 사회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 즉 이타적 이기심의 발휘를 필요로 하는 바로 사랑의 본원적 실행으로서의 의미를 확장한다.

인간은 왜 집단을 구성하고 살게 되었는가? “개인이 자신답게 살게 하는 것, 최대한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사회조직의 일차적 목표. 그것을 위해 공동체의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곧 공감어린 애정 ‘팔리아’의 벗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지식과 기술과 가치의 전달을 나누고, “타자들의 삶을  배우고 광범위하고 다양한 인간 체험을 들려주는” 더욱 밝고 희망찬 토대를 만들게 하는 유대가 될 것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영리하고 열심히 일하지만 뒤처지는 저소득 계층 학생들은 막대한 국가 재원의 손실을 의미한다.”는 차갑고 어두운 곳, 세상의 시선에서 외면된 이웃과 주변에 눈을 돌리면 우리가 보태야 할 사랑의 시선을 필요로 하는 곳이 무진장임을 알게 된다. “의문을 통해 고찰하는 삶”,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온정을 갖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사랑 아니겠는가!  그리고 지속적으로 타자의 “가장 내밀한 소망과 욕구와 욕망을 알아내기 위해 지대한 노력을 쏟고서야” 비로소 우린 온전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세상에 흩뿌릴 수 있지 않을까? 아가페를 위하여... “의미 없는 고통이 있는 세상”일지라도 사랑은 인간정신의 가장 위대한 가치가 아닌가!

전 생애를 바쳐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지혜에 대한 사랑을 심화시키려 했던 사람, 운명을 향한 사랑을 알기에 운명을 창조했고 운명에 자신의 의지를 행사했으며, 운명을 사랑했던 낭만주의자, 아르테(Arete;탁월성)와 명예와 연민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그래서 그 가치들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게 하였던 사람. 소크라테스의 사랑이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전범(典範)이 되는 것은 초록빛 초원과 맑은 물이 흐르는 평화의 대지 위를 뛰놀 우리들의 후손, 인류의 미래를 위한 정말의 가치이기 때문이리라. 읽고, 읽고 또 읽을 만 한 살아 숨 쉬는 진정한 윤리교과서라 할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상처, 죄책감, 그리움, 향수가 때론 열병처럼 그리고 차가운 이성 속을 오가며 심리적, 사유적, 정치사적 고뇌와 더불어 아픈 사랑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다. 정말 치명적이고 압도적이라 할  이 사랑 이야기에 우리의 도덕적 잣대는 초라해 질 정도로 무색해진다.

법제사(法制史)학자인 ‘미하엘 베르크’의 인생에 차곡차곡 쌓인 층위(層位)속 저 기반에 놓여 그의 삶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던 이야기, 벗어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에 글로 쓰기로 했다는 역설에서 그 사랑과 상처, 배반과 죄책감, 그리움의 깊이를 되뇌게 된다.

열다섯 살 소년과 서른여섯 살 여자의 우연한 만남, 여자 ‘한나 슈미트’에게 ‘미하엘’은 사랑스런 ‘꼬마’이다. 사춘기 소년에게 비친 그녀의 스타킹 신는 모습은 관능과는 다른 그러나 무감응의 장면은 아니다. 어린 소년에게 그녀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영상으로 맺히고 그녀의 아파트를 찾아가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 순수한 열정과 용기, 팽배한 기대에 차있는 소년의 수줍은 긴장의 모습을 본다. 모성의 그리움, 여인에 대한 신비로운 기대감, 막연한 육체적 수줍음과 갈망의 혼돈이다.

그녀의 아파트 창고에서 갈탄의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소년, 욕조 속에서 검은 갈탄 먼지를 씻어내고, 물기 먹은 발가벗은 몸으로 그녀 앞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서있는 소년과 물기를 닦아주는 ‘한나’의 손길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그래서 너무도 감각적인 이 문장들은 아름다운 미학적 한 편의 영상을 상상케 한다.

미하엘은 그렇게 매일 그녀를 찾아가고, 그것은 두 사람의 의식(儀式)처럼 자리를 잡아간다. 어느날 부턴가 책을 읽어주지 않으면 사랑을 나눌 수가 없다는 그녀의 요구는, 아파트에 들어서면 책 읽어 주기, 샤워하기, 사랑 나누기, 그리곤 나란히 누워있기의 정형적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이 관능적 유희에서 누구도 그 어떤 추함을 발견해 내지 못할 것이다.

열다섯 소년의 그 충만한 상상력과 환희, 열정의 표현들은 내 어린 그 시절의 환상과 겹쳐 공감의 미소를 짓게 한다. 그녀를 생각하느라 뒤척이는 불면의 밤을 “결핍의 시간이 아니라 충만의 시간”이라고 정의하는 소년은 “동경, 회상, 불안, 욕망 등이 미로를 만들어 놓는다.”고 혼돈의 설렘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 때를 “그렇게 충만한 날들을 보낸 적이 없으며, 나의 삶이 그렇게 바쁘고 촘촘한 적이 없었다.”고 그녀와 함께하는 매일의 의식이 온통 그를 점령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소년의 시점어서 그런 것일까? 세상 이목의 모든 소음들을 배제하고 그저 가슴 벅찬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만 이해하고 싶어진다.

어느 날 사라져버린 그녀, 직장도 뒤로하고 한 마디 이별의 말도 없이 홀연히 소년의 시야에서 없어졌다. 사라지기 전날, 학교친구들과 수영을 하던 수영장 먼발치에 나타났던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주저했던 자신의 이기심이 자책감으로 떠오른다. 여인의 사라짐이 가져온 사건은 죄책감과 배신감이란 양극단의 감정을 오가게 한다. 자책과 자기합리화, 그리고 배신감.

이는 이 작품의 중대한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심리적, 철학적 고뇌의 핵심 언어이자 전환적 사건이 된다. 그녀가 떠난 이유를 소년은 그녀 존재의 ‘부인(否認)’이란 “배반의 보이지 않는 변명”이라 자책한다.

한동안 한나를 찾아 헤매던 일을 멈추고 일상의 평정된 삶에 익숙해진 법대생으로 성장한 청년 미하엘은 한 법학세미나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세미나 목적의 탐구를 목적으로 제3제국(나치정권)의 강제수용소 감시원들의 전범재판에 참석하게 된다. 피고인들의 모습에서 꼿꼿이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한나를 발견한다. 심리과정에서 한나의 과거가 규명되기 시작하고 한나의 무계획과 무전략의 사실 발언에 미하엘의 감성과 이성은 안타까움으로 번민한다. 미하엘은 이 재판심리과정을 통해 비로소 한나, 그녀의 실존 자체를 인식하게 된다.

이 재판심리 장면은 홀로코스트란 소재를 통해 한나, 그리고 미하엘, 전후 독일의 나치 청산문제에 대한 독일인의 인식과정에 대한 정체성 논의까지 아우르는 확장된 제재와 주제의 강화로 이끈다.

글자를 읽고 쓰지 못하는 그녀가 강제수용소 감시원의 지도자로서 사건의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시인한다. 여기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이 이뤄진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보다는 차라리 나를 놀라게 하는 쪽을 택했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하고 또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수치심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이는 한나의 수치심과 미하엘 자신의 수치심, 상처에 대한 보편적 공감의 이해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나의 전범재판 심리의 과정은 한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리고 삶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적 판단에서조차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희생할 가치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뇌에 찬 철학적 질문들을 쏟아낸다.

종신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는 18년동안 미하엘은 한나를 찾지 않는다. 그 어떤 사적 내용을 담지 않은 오직 책을 읽어 녹음한 테이프만을 보낸다. 그녀의 사면허가가 취해지고 석방되는 18년 동안.

형무소 소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석방을 앞두고 미하엘은 한나를 만나,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재판과정에 언급된 사실들에 대해서 재판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어요?”

“그게 그렇게도 마음에 걸리니?”

“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군 인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너는 알거야.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법정 역시 나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었어.”

소장의 안내로 18년간 수감되었던 한나의 방에서 신문에서 오려낸 자신의 졸업식 사진을 발견한다.

“우리는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우리네 인생에서, 역사에서 우리들은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을 떠나버릴 수 없다. 그곳에는 그리움과 사랑도 함께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이 독일의 과거사에 대한 아픔과 청산이란 정치사적 회고일 수 있지만, 서사의 내용인 미하엘과 한나의 사랑, 그리고 파노라마 같이 펼쳐지는 인생에 대한 사색적 성찰은 문학의 완벽한 미학적 구도를 완성시키는 중심이라 하고 싶다.

정말 우아하고 도발적이며 감동적이다. 이처럼 급하게 설레는 심장의 울림, 감성의 울림을 가져온 작품은 아마 굉장히 오랜만일 것이다. 20세기 독일문학의 걸작중 하나로 손색이 없으리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브리나 2009-03-05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의 품격과 주제가 손에 잡힐듯 완벽하게 기술된듯 합니다. 멋진 서평 잘보고 갑니다~
 
사요나라 사요나라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전작(前作),‘惡人’을 상기시키는 계보(系譜)작이다. 작가가 던지는 화두는 악인에서 그랬듯이 우리가 쉽게 답변 할 수없는 혼란스런 질문을 던진다. ‘가쓰라 계곡’의 유아 살인사건, 이는 다분히 우리들의 편협한 시선을 고착화시키는 자극 수단이다. 행적과 겉모습으로 보아‘그 사람이 범인이 맞을 것이다.’라는 식의 편견 말이다. 살해된 아이의 엄마인 이웃집 여인‘다치바나 사토미’, 살해범으로 경찰에 구인되고 느닷없이 사토미는 이웃집 남자 ‘오자키 슌스케’와 정을 통했다고 진술한다. 사건은 치정살인사건으로 치닫고 대중을 자극하는 소재에 열을 올리는 삼류 잡지기자들의 취재경쟁 속에서 잡지기자 ‘와타나베’는 사건의 추이에 집착을 갖게 된다.

소설의 치밀한 정지작업이 진행되면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수한 상상력을 만들어내게 한다. 범인은 누구일까? 사토미가 정부를 위해 거추장스런 아이를 살해한 것일까? 둘이 공모한 것일까? 아님 오자키가 교사한 것인가? 추측이 난무할 때 와타나베의 집요한 뒷조사는 의외의 시각으로 소설을 반전 시킨다.

시간은 10여년을 거슬러 대학 야구부 선수들의 여학생 집단강간이란 과거의 사건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오자키가 바로 강간사건의 주범으로 전도양양하던 야구선수 생활을 접었던 사실을 드러낸다. 소설의 전개속도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급하게 오가며 빠르게 흘러간다. 그렇담 범인은 분명해진 것이 아닌가? 조금씩 실체가 드러나는 오자키, 신비스런 그의 아내‘가나코’, 그리고 집단 강간의 희생자였던 당시 여고생 ‘미즈타니 나쓰미’의 사건 이후의 험난한 인생을 추적한다.

작품은 중반에 이르러 독자들을 당혹감에 휩싸이게 한다. 강간사건의 주범이었던 오자키와 피해자였던 나쓰미와의 우연한 만남, 마음의 정리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던 죄의식은 진정 잊혀진 것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쫒아온 오자키를 알아본 나쓰미 역시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투성이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한다. 몇 차례 결혼의 시도와 결혼생활의 파탄을 겪은 나쓰미의 정신적 상처는 정신병원의 주기적 입원으로 이어진다. 어린시절 저지른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사죄하기 위한 오자키의 만남의 시도가 이어지지만 나쓰미를 만나는 것은 거절된다. 가해자의 죄의식, 피해자의 사회적 냉대와 상흔은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통절한 상처로 깊어지기만 할 뿐이다.
급기야 나쓰미로부터 연락이 온다. 진정 사죄하려 한다면 함께 가장 불행해지도록 하자. 더 이상 불행해질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불행에 이르기까지.

“인생에서 발을 헛디딘 남자의 말로.”오자키의 아내 가나코는 남편을 사토미의 정부라고 경찰에 진술하고 오자키는 살해공범이란 수렁에 빠져든다. “가나코가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까?” 그렇다면 맞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긍정해버리는 오자키의 자백에서 사랑과 연민의 눈물을 보게 된다.

이제‘사요나라(さよなら)溪谷’은 ‘악인’의 작품성을 뛰어넘는다. 더욱 정교해진 플롯, 스릴러식의 반전, 통속적 이야기의 맛깔스러움, 그리고 존재를 거부하고 싶은 사랑까지. 어느 순간 읽어버렸고 다시금 책장을 첫 페이지로 돌려놓고 시선을 떨어뜨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피해자의 처절한 삶의 고통, 무엇으로든 어떤 식으로든 사죄하고자 하는 오자키의 나쓰미에 대한 진정은 전달되고...사토미의 거짓주장 철회와 범죄의 인정에 따라 풀려난 오자키는 자신을 떠나면서 가나코가 남긴 편지를 손에 쥐고 있다. “안녕이라고.....그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행복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녀와 나, 행복해질 것 같았습니다.”.....
불행해지기로 약속했기에, 그렇게 약속했기에 함께 할 수 있었던 연인, 그래서 행복해질 것 같기에 떠나는 사랑이 눈시울을 흐리게 한다. 이런 사랑이 있구나. 이처럼 참담한 사랑도 있구나. 인생은 대체 뭔가. 작가가 던진 사랑이야기에 좀체 답변을 할 수가 없다. 악인에 이어 또다시 허둥대는 내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