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상처, 죄책감, 그리움, 향수가 때론 열병처럼 그리고 차가운 이성 속을 오가며 심리적, 사유적, 정치사적 고뇌와 더불어 아픈 사랑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다. 정말 치명적이고 압도적이라 할  이 사랑 이야기에 우리의 도덕적 잣대는 초라해 질 정도로 무색해진다.

법제사(法制史)학자인 ‘미하엘 베르크’의 인생에 차곡차곡 쌓인 층위(層位)속 저 기반에 놓여 그의 삶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던 이야기, 벗어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에 글로 쓰기로 했다는 역설에서 그 사랑과 상처, 배반과 죄책감, 그리움의 깊이를 되뇌게 된다.

열다섯 살 소년과 서른여섯 살 여자의 우연한 만남, 여자 ‘한나 슈미트’에게 ‘미하엘’은 사랑스런 ‘꼬마’이다. 사춘기 소년에게 비친 그녀의 스타킹 신는 모습은 관능과는 다른 그러나 무감응의 장면은 아니다. 어린 소년에게 그녀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영상으로 맺히고 그녀의 아파트를 찾아가 계단에 앉아 기다리는 순수한 열정과 용기, 팽배한 기대에 차있는 소년의 수줍은 긴장의 모습을 본다. 모성의 그리움, 여인에 대한 신비로운 기대감, 막연한 육체적 수줍음과 갈망의 혼돈이다.

그녀의 아파트 창고에서 갈탄의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소년, 욕조 속에서 검은 갈탄 먼지를 씻어내고, 물기 먹은 발가벗은 몸으로 그녀 앞에 시선을 떨어뜨린 채 서있는 소년과 물기를 닦아주는 ‘한나’의 손길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그래서 너무도 감각적인 이 문장들은 아름다운 미학적 한 편의 영상을 상상케 한다.

미하엘은 그렇게 매일 그녀를 찾아가고, 그것은 두 사람의 의식(儀式)처럼 자리를 잡아간다. 어느날 부턴가 책을 읽어주지 않으면 사랑을 나눌 수가 없다는 그녀의 요구는, 아파트에 들어서면 책 읽어 주기, 샤워하기, 사랑 나누기, 그리곤 나란히 누워있기의 정형적 패턴으로 이루어진다. 이 관능적 유희에서 누구도 그 어떤 추함을 발견해 내지 못할 것이다.

열다섯 소년의 그 충만한 상상력과 환희, 열정의 표현들은 내 어린 그 시절의 환상과 겹쳐 공감의 미소를 짓게 한다. 그녀를 생각하느라 뒤척이는 불면의 밤을 “결핍의 시간이 아니라 충만의 시간”이라고 정의하는 소년은 “동경, 회상, 불안, 욕망 등이 미로를 만들어 놓는다.”고 혼돈의 설렘을 이야기한다. 또한 그 때를 “그렇게 충만한 날들을 보낸 적이 없으며, 나의 삶이 그렇게 바쁘고 촘촘한 적이 없었다.”고 그녀와 함께하는 매일의 의식이 온통 그를 점령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소년의 시점어서 그런 것일까? 세상 이목의 모든 소음들을 배제하고 그저 가슴 벅찬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만 이해하고 싶어진다.

어느 날 사라져버린 그녀, 직장도 뒤로하고 한 마디 이별의 말도 없이 홀연히 소년의 시야에서 없어졌다. 사라지기 전날, 학교친구들과 수영을 하던 수영장 먼발치에 나타났던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주저했던 자신의 이기심이 자책감으로 떠오른다. 여인의 사라짐이 가져온 사건은 죄책감과 배신감이란 양극단의 감정을 오가게 한다. 자책과 자기합리화, 그리고 배신감.

이는 이 작품의 중대한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심리적, 철학적 고뇌의 핵심 언어이자 전환적 사건이 된다. 그녀가 떠난 이유를 소년은 그녀 존재의 ‘부인(否認)’이란 “배반의 보이지 않는 변명”이라 자책한다.

한동안 한나를 찾아 헤매던 일을 멈추고 일상의 평정된 삶에 익숙해진 법대생으로 성장한 청년 미하엘은 한 법학세미나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세미나 목적의 탐구를 목적으로 제3제국(나치정권)의 강제수용소 감시원들의 전범재판에 참석하게 된다. 피고인들의 모습에서 꼿꼿이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한나를 발견한다. 심리과정에서 한나의 과거가 규명되기 시작하고 한나의 무계획과 무전략의 사실 발언에 미하엘의 감성과 이성은 안타까움으로 번민한다. 미하엘은 이 재판심리과정을 통해 비로소 한나, 그녀의 실존 자체를 인식하게 된다.

이 재판심리 장면은 홀로코스트란 소재를 통해 한나, 그리고 미하엘, 전후 독일의 나치 청산문제에 대한 독일인의 인식과정에 대한 정체성 논의까지 아우르는 확장된 제재와 주제의 강화로 이끈다.

글자를 읽고 쓰지 못하는 그녀가 강제수용소 감시원의 지도자로서 사건의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시인한다. 여기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색이 이뤄진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 보다는 차라리 나를 놀라게 하는 쪽을 택했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하고 또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수치심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이는 한나의 수치심과 미하엘 자신의 수치심, 상처에 대한 보편적 공감의 이해이기도 하다.

이처럼 한나의 전범재판 심리의 과정은 한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리고 삶의 미래를 좌우하는 결정적 판단에서조차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희생할 가치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고뇌에 찬 철학적 질문들을 쏟아낸다.

종신형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는 18년동안 미하엘은 한나를 찾지 않는다. 그 어떤 사적 내용을 담지 않은 오직 책을 읽어 녹음한 테이프만을 보낸다. 그녀의 사면허가가 취해지고 석방되는 18년 동안.

형무소 소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석방을 앞두고 미하엘은 한나를 만나,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재판과정에 언급된 사실들에 대해서 재판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어요?”

“그게 그렇게도 마음에 걸리니?”

“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군 인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너는 알거야.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법정 역시 나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었어.”

소장의 안내로 18년간 수감되었던 한나의 방에서 신문에서 오려낸 자신의 졸업식 사진을 발견한다.

“우리는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되어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우리네 인생에서, 역사에서 우리들은 과거의 상처와 죄책감을 떠나버릴 수 없다. 그곳에는 그리움과 사랑도 함께 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이 독일의 과거사에 대한 아픔과 청산이란 정치사적 회고일 수 있지만, 서사의 내용인 미하엘과 한나의 사랑, 그리고 파노라마 같이 펼쳐지는 인생에 대한 사색적 성찰은 문학의 완벽한 미학적 구도를 완성시키는 중심이라 하고 싶다.

정말 우아하고 도발적이며 감동적이다. 이처럼 급하게 설레는 심장의 울림, 감성의 울림을 가져온 작품은 아마 굉장히 오랜만일 것이다. 20세기 독일문학의 걸작중 하나로 손색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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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리나 2009-03-05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의 품격과 주제가 손에 잡힐듯 완벽하게 기술된듯 합니다. 멋진 서평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