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과 심부름꾼 - 두뇌 속에서 벌어지는 은밀한 배신과 정복의 스토리
이언 맥길크리스트 지음, 김병화 옮김 / 뮤진트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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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은 자신들이 경험하는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혹 그릇된 인식으로 세상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의구심은 사실 그리 멀리서 구할 것도 없다. 내 무의식의 세계로 접근하는 법도 여전히 알 수 없으며, 내 의식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리 신뢰 할 수 없다는 것쯤은 아마 반복적으로 누구든 느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린 세상을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더구나 이러한 오만을 토대로 멋대로 세상을 단정하고 조작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인류의 역사 내내 동일한 것은 아니었으며, 때론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합일을, 한편으론 신체는 한 낱 몸뚱아리라는 껍데기이자 혐오의 물질과 고귀한 정신, 영혼으로 분리하는 것처럼 인간 자신의 정체성을 달리 이해하기도 하였다.

과연 어느 것이 진실일까? 바로 이러한 선택적 질문을 하는 것이 이미 단순하고 명료함을 쫒는 소위 ‘합리성’이라는 관점에 경도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둘 다 어느 정도 진실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 할 수 없는 것일까? 분석적이고 무언가를 분명하게 확정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왜 발생한 것일까? 또한 오늘의 사회처럼 물질문명이 기승을 부리고 모든 것을 합리적이라는 기계적 사고로 환원하는 이러한 가치체계가 마치 진실인 것처럼 행동하는 데에는 어떤 궁극적이고 기원적인 연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단지 근대화와 산업화, 소비자본주의라는 속성이 인간과 인간사회를 이렇게 만들고 있다고만 하면 이러한 체제를 바꾸면 합리화, 사물화하는 인간사회의 습속이 변화할 수 있을까? 이보다 근원적인 어떤 인간 본연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기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성질은 아닐까?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인간, 즉 인간의 존재성과 수 천 년에 이르는 인간사회의 역사에서 인간의 문화적 현상들이 두뇌와 어떤 긴밀한 조응 관계를 가지고 형성되었다는 성찰에서 시작되고 있다. 종교개혁에서 자본주의의 출현과 강화를 말한‘막스 베버’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통해 인류의 역사를 바라본 ‘페르낭 브로델’, 그리고 인간의 존재론적 성찰에 한 시대의 위치를 점유한‘헤겔’과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의 철학적 사유는 물론 여느 문학과 예술에 대한 통찰을 뛰어넘으며, 신경생리학, 정신의학의 경험적이고 이론적 기반의 고찰까지 아우르는 이 위대한 저작은 아마 인류 사상사의 기념비적 걸작이 될 것이라 감히 예견하게 된다. 이처럼 인용되고 검토되는, 방대하고 면밀한 지적 통섭은 물론, 이로부터 규명하려는 인간과 인간사회의 현상학적 분석은 가히 敬畏,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인간 존재와 세계에 대한 관점, 아니 믿음은 우반구와 좌반구라는 두 개의 반구로 구성된 인간의 두뇌 작동으로 인간 세상의 문화적 현상이 설명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뇌 구조는 정신 경험의 본성에 대해서, 또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대해 뭔가 말해 준다는 것이며, 우리“경험의 상관 변수들이 두뇌 속에서 묶이고 조직되는 방식에 일관성이 있음이 밝혀진다면 인간 정신세계의 구조와 경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저술은 우반구와 좌반구의 구조와 기능의 이해를 통해 각 반구가 경험하는 세계를 구분하고 바로 이 두 반구의 본래적 이원성이 우리의 정신에서 어떻게 갈등하고 투쟁하는지를 규명한다. 이 두 개의 반구가 각기 어떤 기능들을 하는 것인지를 언어, 진리, 음악 등 그 발생학적, 생리학적, 철학적 탐색을 종횡하며 이루어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지적 성찰의 진수란 이런 것이다. 라는 탄성을 불러일으킨다. 이 화려한 지적 탐색을 통한 반구간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구절이랄 수 있는데, “우반구가 우선적으로‘새 자극’을 처리하고 일상적이거나 친숙한 것들은 좌반구가 처리한다.”는 것이다. 일례로‘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할 때,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우린 그녀를 몇 마디 말로 온전하게 전달할 수가 없다. 그녀는 갸름한 얼굴이고 키가 크며, 쾌활하다고 한들 설명하려는 그녀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를 체험한 나는 그녀와 나사이의 관계라는 지식에 의존하여 그녀를 안다. 이처럼 나와 타자‘사이’의 관계에 의존하여 세계의 면모를 인식하는 것이 우반구이며, 키와 생김새와 같은 사실의 묘사라는 부분적인 지식들을 통해 짜깁기하여 추정하고 짐작하는 것이 좌반구이다. 여기서 우반구는 어떤 맥락속에서 세계를 인식하지만 좌반구는 생명 없는'사실(fact)', 정지한 불변의 지식을 인식한다. 이처럼 두 반구의 앎에 대한 방식은 완연히 다르다. 이러한 기능상의 구분이 현실의 세계에 어떻게 투영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고찰은‘후설’의 정신현상학이나‘메를로 퐁티’의 “살아진 신체(lived body)"에서 심화되어 경험하는 신체와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신체에 대한 이해로 이행하여 신체에 대한 우반구와 좌반구의 상이한 인식을 거듭 설명함으로써 두 반구의 상이한 존재론적 지위를 규명한다. 즉 여기서 좌반구의 추상성, 명료성, 범주화하려는 경향, 폐쇄성, 독단성, 체계화 경향, 일관성 등의 성향과 우반구의 묵시성, 현재성, 상호성, 포용성 등 서로 다른 성격을 구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저작의 본질적 논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서로 다른 두 개의 반구가 항상 대칭적인 균형을 가지고 작동하지 않는다는, 우리 지성의 내적 구조는 의심할 여지없이 비대칭적이라는 통찰이다. 이 둘 사이에는 일종의 권력투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며, 특히 이 투쟁이 어떤 특정 비율에 의한 기능의 배분이 아니라 효율성이 높은 쪽에서 작업 전체를 맡으려는 승자독식 시스템에 의한 독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수용적이며 포용적인 우반구와는 달리 경쟁적이고 배타적인 좌반구가 우위를 누리게 될 경우 세상은 해체되고 파편화되며, 추상적이고 명시성을 중시하는 실용 중심의 물질적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이며, 우반구가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경우 협력과 공유, 공감, 생명력의 복구가 진행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우반구와 좌반구의 성격과 그들의 우위가 의미하는 세계의 현상에 대한 이해를 마치면, 우리 인간의 두뇌가 역사의 시간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경험 세계, 그 삶의 양상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인류 역사의 주요한 문화적 움직임에 따라 명쾌하게 제시하는데, “두뇌는 세계를 어떻게 형성했는가?”하는 질문으로부터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와 산업혁명, 현대와 포스트모던 세계인 오늘에 이르는 인류의 문화적, 정신적 전환시대들 마다의 시대의 본성과 두 반구간의 공존과 충돌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유형의 발견은 가히 인간 정신 통찰의 괄목할만한 제안이라 할 수 있다.

좌반구가 우위를 점하는 시대는 정신과 신체가 분리되어 신체가 사물화 되고, 다시 우반구 우위, 즉 반구간의 평형이 이루어지면 감성과 상상력이 부활하고 새로움과 즐거움이 회복된다. 논리적 체계를 현상에 우선하여 모호성이나 모순을 거부하고 확실성과 정지상태를 달성하려한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의 시대로 구분되는 고대 그리스의 경우처럼 플라톤 이후 르네상스 이전의 서구세계는 관념화되고 표상화되어 물질화되는, 생명과 공존 할 수 없는 분리와 해체로 이어지는 세상이 된다. 즉 획일화하고 명료화하고 신체를 거부하는 좌반구 우위의 시대라 할 것이다. 이러한 좌우반구의 우위의 결과는 르네상스라는 인간의 회복과 예술의 부흥이,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대두로 다시금 데카르트와 같은 물질중심의 단순, 명료화, 개념화에 다시금 신체를 빼앗긴다. 이러한 반복은 산업혁명과 모더니즘이라는 자기 인식 과잉의 시대에 와서는 인간의 소외된 무기력을 양산하고 자아감각의 상실로 치닫는다.

한편, 이 두뇌와 세계현상의 동질적 상관관계의 서술에 동원되는 문학작품과 회화, 음악 등 예술의 비평적 해석은 그야말로 지적 성찬이며 주제읽기에 넘치는 덤이라 할 수 있는데, 모더니즘의 대표적 인물들인 니체, 네르발, 달리, 비트겐슈타인, 카프카, 베케트에서 발견되는 무관심과 공포, 불안과 지루함이 좌반구의 폐쇄된 거울 방에 갇혀 반복되어 증폭되는 인식의 과잉, 편집증적 정신의 양상임을 지적하는 것과 같다. 이는 우반구의 결함에서 나타나는 정신병적 소견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당대의 성격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서의 저자의 믿음이 하나의 문화 분석 방법으로 가치와 권위, 신뢰를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좌반구가 우위를 점한 오늘의 우리 사회를 굳이 정리하려 한다면, 이 저작에서 규명한 좌반구의 성격을 그대로 나열하면 될 것이다. 세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말(語)중심의 사회이자, 조각난 부분에 열중이며, 그래서 명료성을 확인하려하고, 은유나 육화된 능력을 상실하고, 우반구를 배제함으로써 스스로 폐쇄될 수밖에 없는 자기 앎의 테두리에서 되돌이하는 지루함, 그래서 엄청난 자극과 충격이 아니면 자신을 확인 할 수 없는 곳, 은유나 미토스를 상실해서 정신적 물음에는 회피하는 세상, 기계적이며, 획득적이고 효용과 목표에만 염두를 두는 세계, 맥락이 박탈되다보니 조각의 순서에만 초점을 맞추어 기계적으로 환원한 것이 세상의 모습인 줄 아는 허위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적 경험의 본성이 양분되어 있다는 이 저술의 논지를 수용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우리 자신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경험 형태에서 우반구의 우위를 위해 우리가 노력한다면, 괴테의 파우스트가 외친 “두개의 영혼이여, 아아! 내 가슴에 깃들라”라는 선언을 받아들인다면 아마 우리의 세상은 불안과 물질적 경주를 종식하고 르네상스와 낭만주의의 인식능력을 회복할지도 모를 일이다. 신경과학이 역사와 문화, 사회 분석적 통찰의 도구가 되고 시와 소설, 그림과 조각, 쇼팽과 바흐의 음악,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에서 니체에 이르는 철학이 다시금 인간의 두뇌와 존재의 의미로 돌아와 나와 세계가 서로 조우하고 은유가 넘치는 감성의 사상이 되는 이 저작은 이 세기의 사상적, 문화적 방향을 제시하는 최고의 철학서요, 신경과학서이자, 인류문화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위대한 역작이며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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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욘더 - Good-bye Yonder, 제4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
김장환 지음 / 김영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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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있었다. 어느 사이에 우리 인간들은 아주 낯선 세계에 들어섰다는 느낌인데,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아는 의식의 세계가 더 이상 무언가 전체적인 현재성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과 명료성을 요구하면서 이상한 형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모호하고 흐릿하며 선명하게 인식되지 않는 실재의 세계는 무시하고 배제하면서부터 고작 자기가 알고 있고 통제할 수 있는 한정된 지식의 단편들로 짜 맞추다보니 코끼리 코에 부엉이 눈을 하고 사자의 입을 한 얼굴과 같은 기이한 것을 창조라느니 상상력이라고 하면서,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을 마치 새로운 것으로 인식하는 무지와 편협성, 편집증적 현상에 빠져있는 지금의 거침없는 세상의 모습 말이다. 


과연 우리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의식이란 협소한 범주에서 이해 가능한 것일까? 나는 정신과 마음이란 것이 내 몸을 떠나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나는 온 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체험한다. 그 감각을 통해 다가오는 세상은 그리 선명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교감과 전체성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사람들, 세상을 주도하는 힘은 신체는 사물이라고, 정신의 세계와 분리하고, 그래서 부품으로 대체 가능한 조립기계 정도로 치부하려 한다. 자꾸만 우리 인간에게서 생명성을 박탈하려고 한다.





배아 줄기세포를 통한 생명에 대한 교정적 간섭은 물론이거니와 실시간이라는 동시성을 구현하는 가상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이 융합하는 모바일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과학기술 지상의 사유, 즉 합리성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감성의 세계, 생명의 세계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인간 마음의 세계는 쓰레기처럼 처리되고 있다. 소설 속‘욘더(Yonder)’의 세계는 그래서 분명 우리 인간 세상의 미래에 출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가 남긴 기억의 저장이 사후 사이버 공간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로하기 위해 가상의 공간에서 실현되게 된다. 바이 앤 바이(by and by), 머지않은 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홀’의 아내‘이후’가 죽음의 고통을 회피하기위해 머리에 뒤집어쓰는 브로핀 헤드란 장치에서 나는 현실을 지우려는 오늘의 우리들 모습을 본다. 인간 정신의 승리, 자연의 섭리를 조작하고 통제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을. 이 장치는 기술의 거침없는 추진을 통해‘브레인 다운로드’라는 인간 의식의 이식이 가능한 꿈의 기술로 표현되고, 급기야는 사이버스페이스(Cyber Space) 상에 구현되는 천국, "인간이 바랄 수 있는 모든 만족이 구현되어 진정한 쾌락과 행복이 가능"하다는 불멸의 공간, 욘더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나 신체와 분리되어 작동하는 정신의 존재에 동의할 수 없는 나는 소설의 결말에서야 겨우 화해 할 수 있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생적 부조리가 주는 고통이 이미 두려움인 것을 부인 할 수는 없지만, 과연 죽음이 없는 불멸, 영원성이란 것이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삶의 행복을, 아니 나아가 인간의 존재자로서의 의미에 어떤 것일 수 있을까하는 데에 이르면 아마 그것은 곧 존재하지 않음의 다른 의미 이상이 아닐까. 불멸을 쫒는 인간 군상들, 그래서 영원한 삶이 보장되는 욘더의 세계로 향하기 위한 자살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다시금 개념화와 물질화, 기계화에 몰두하는 오늘의 세계, 그칠줄 모르는 탐욕의 현실세계와의 교차를 본다. 


화자인 주인공 홀이 죽은 아내가 있는 불멸의 공간인 욘더로 향하기 위해 중개자를 찾아가는 장면에 등장하는 사이보그 타운의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인간”의 묘사에서 사물화의 극한을 치닫는 오늘의 정신세계를 거듭 확인케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신체의 기계화를 위해 소위 B.M.(Body Modification)이란 현상은 아마 현대인의 왜곡된 삶의 시선이 낳은 정신적 질환의 연장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신체통합 정체성 장애, 신체이형장애와 같은 질병으로서의 호칭은 기술지상의 오늘을 경계하는 장치로서 작가의 우려와 비판을 읽게 된다.

한편, 아내가 있는 세계로 가기위해서는 자살을 시도하고 자신과 아내의 의식이 이식된 욘더에서 두 사람은 조우한다. 사실 소설적 묘사임에도 사이버스페이스인 욘더의 생활 내용에서 내 사유가 끊임없이 거부하고 이탈하려고 했던 부분이 있는데, “몸이 없었다.(....) 의지가 있었다.”하는 것인데,  몸의 부존에도 불구하고 의지의 존재라는 데카르트적 이분법적 사고, 즉 기계화, 사물화, 합리주의라는 오늘의 타락한 사유의 끈질긴 무지에 대한 분노 때문이랄 수 있다. 더구나 “내 몸의 실체감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홀의 감각에 대한 동일성의 주장은 신체를 부인하는 앞 선 주장과 모순되고, “손톱으로 튀기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라든가, “재스민 향, 훌륭한 맛, 내 눈으로 확인”과 같은 신체의 감각에 대한 표현은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신체를 잃어버린 소설 내내 비판되었던 물질화 기계화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혼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자로서의 갈등도 잠깐 머물고 말게 하는 멋진 성찰의 구절이 등장하는데, 문득 홀이 욘더의 세계에서 어떤 것들이 없는 상태로서 “실존적인 우울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체로서의 마음에 대한 깨달음인데, 결국 자라지 않는 그네들의 아이로부터 진행되지만 정지한 시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지, 즉 불멸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라는 각성이다.  이에 더해 인간의 말이라는 불충분한 세상의 묘사에 불과한 기호, 바로 삶이 이 기호에 갇히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가 극히 왜곡되고 관념화되어 편협해져 있음을 총체적으로 해독해내고 있다.

오늘의 기술은 과학이라는 만능의 언어로 인간, 인간사회에 자신이 쏟아내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와 여파를 가져올지에 대해 어떠한 검토도 예측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하지 못하는 것일 게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오직 효용과 편익, 편리와 복지와 같은 긍정적 전망만 쏟아 놓는다. 그것이 인류의 완전한 파괴로 이어질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 소설은 한번 적용되기 시작한 기술, 인간의 조작은 과거로 돌이킬 수가 없음을, 역행 불능의 현실에 대해 너무도 무감각해져있는 현대의 인간, 인간사회에 넓고 깊은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생명을 팽개친 정신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신체를 멸실한 불멸의 삶이 있다면 그건 바로 죽음의 다른 이름임을 천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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앱경영 시대가 온다 - 손 안에 펼쳐진 새로운 미래
김종승 외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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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앱(App)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이미 커뮤니케이션 변화의 한 복판에 서있음을 온 몸으로 체감하고 있으며,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흐릿해져‘경영’이라는 일방향의 언어도 모호한 느낌을 줄 정도이기에, 호들갑스러운 표제가 선동적이고 경망스러워 보이기조차 한다. 다분히 장사꾼의 언어이지만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 정보통신 환경의 변화로 인한 세몰이에 뒤엉킬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보니 이를 주된 비즈니스로 하는 사람들의 관심영역을 파악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아마도 적절한 생존의 방편이라 할 것이다.

다양한 응용프로그램을 자유로이 설치하여 실행시킬 수 있는 고기능의 휴대폰, 즉 손안의 PC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출현과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Social Media)가 이와 극단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일대 변혁을 야기한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우리네 삶에 밀착되어 휘감아 돌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경쟁하여야 한다는 압박감은 모두를 속도전에 뛰어들게 하고, 이 조급증은‘실시간’에 이루어지는 그 어떠한 사건이나 현상, 대화에 참여치 못하면 마치 도태되는 것처럼 부추긴다.

공감을 함께하는 이들의 편리한 정보와 교감을 기초로 한, 개인 간의 사사로운 소통공간이었던 트위터가 기업과 정치인, 연예인의 마케팅 홍보도구로서의 유용성이 발견되자 팬과 연예인, 유권자와 정치인, 소비자와 판매기업과 같은 약삭빠른 관계의 형성이 조성되고, 이윽고 적극적인 비즈니스 통로가 되었다. 더구나 실시간이라는 막강한 파급효과에 기름을 붓듯이 스마트폰의 출시는 사람들의 행동패턴을 극적으로 바꿔 놓았는데, 이동하면서 교통, 지리, 날씨는 물론, 음식점, 빌딩, 여행예약, 이메일, 불로그, 그리고 음악을 듣고, TV와 영화까지 감상을 하며, 대상에 스마트폰을 향하기만 해도 관련정보가 표시되는 증강현실로 그야말로 이 새로운 모바일 환경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도라 하여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은 곧 무궁무진하지만 누군가 선점하여야 할 신규 비즈니스 시장이자 효율적인 마케팅 도구의 등장을 의미한다. 그러니 경영이란 시선은 그만큼 사활이 걸린 변화된 생태환경의 소스라치는 체감의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이에따른 경영환경의 구축, 즉 새로운 모바일 환경에 적응하는“실시간의 기업을 만들고 여기에 따르는 업무프로세스의 변화, 상품과 비즈니스 모델의 창출, 시장과 산업 재편을 선도”하는 소위‘앱 경영’은 중차대한 생존의 과제로 대두된다.
그래서 책은 앱이라는 이 새로운 모바일 기반이 어떤 의미, 그 특성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어떤 비즈니스 가치의 창출을 가져오는지를 기술적, 사회공학적 의미를 통해 해석한다. 그리곤 여기서 나아가 소비대중의 심리학적 성찰을 기반으로 내부 시스템의 구축에서 인사, 조직문화, 마케팅에 이르는 일련의 경영체제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트위터에서 나눈 일상의 소소한 대화가 얼마나 빠르고 넓게 순식간에 전 세계에 퍼지는지 그 위력은 뉴스의 중요 소스가 될 정도로 엄청남을 우리들은 목격하고 있다. 사용자들의 대화에는 가공되지 않은 주관적 정보들이 그득하고 속도 또한 매우 빠르며, 이어지는 댓글들로 관심사와 논점이 변화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다. 여기에는 날것 그대로의 가공되지 않은 사람들의 욕구와 감성과 사회적 관점이 녹아있다. 그리고 그 확산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이것이 소셜 미디어의 특징이다. 정보공유나 공감대 형성과 교류 등의 감성 통로이자 공간으로서 여기서는 무엇이든 빠르게 확산되고 소비된다. 무언가를 알리고자 하는 측에서는 더 할 수 없는 매력적 공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즉 개방적 소비와 공유로 대변되는 소셜 미디어의 특성은 이 통로를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몇 가지 전략적인 시사를 안긴다. 바로 소셜 미디어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본질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되는 일방적 소통의 지양, 공감과 재미라는 스토리텔링, 집단지성의 활용과 같은 것들이다.

한편 참여, 개방, 공유로 정의되는 새로운 모바일 환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앱(Application)은 그야말로 무한한 비즈니스 기회를 낳고 그만큼 선점과 치열한 각축장이 되고 있다. 누가 소셜 트렌드를 만들어낼 것인가, 누가 먼저 지속적인 가치 창조의 접점을 찾아낼 것인가는 이 변화된 가치사슬을 행동에 옮기는 능력에 따를 것이다. 인터넷 10년의 변화보다 더욱 급격하게 진행되는 모바일환경의 진화는 앱 경영이 생소하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우리생활에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당혹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이 거침없는 변화에 대응키 위해 앱기반의 시스템 구축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리더십과 조직문화는 왜 수평적 참여와 소통의 체제로 변화하여야 하는지가 자명해 진다.

대중들의 통찰력과 지혜를 끌어들이는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이나 카탈리스트 기업의 일례는 변화된 환경에서 기업들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또한 앱 시대의 마케팅 기법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주위에서 인식된 자신의 가치를 얻으려”하는 인간의 내적 동기와 같은 심리학적 접근은 비록 얄궂지만 근원적이고 예리한 전술로서의 가치가 돋보인다.
앱의 기술적 기반과 그 기술의 지향점, 사회경제적 파급효과와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과 시장, 그리고 이를 위한 경영체제의 구축에 이르는 선도 기업들의 실사례를 통한 현재의 분석과 미래의 예측 등을 조언하는 이 저술은 변화의 변곡점에 서있는 우리를 화들짝 놀라게 자극한다. 분명 우리들은 앱의 시대라 불릴만한 세상에 성큼 들어서 있다. 정보 등 서비스와 상품의 소비자이자 블로그, 페이스 북 등을 즐겨하는 정보의 생산자이기도 한 우리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판단케 하는 훌륭한 조언의 역할도 하고 있다. 피처폰(feature phone)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여, 스마트폰(smart phone)의 세상으로 뛰어들 것을 주저하지 말라. 삶 그 자체가 지체될지도 모를 세상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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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에게 날개 달아주기 - 이외수의 감성산책
이외수 지음, 박경진 그림 / 해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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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물과 부딪치다 보면 인생과 자연의 섭리,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깨달음이 어느덧 깃들기 시작하고, 볼 수 없었던, 보지 않았던, 그리고 이성에 금지당하고 은폐되었던 진실과 조밀하게 연결된 세상의 진면목을 조금씩 알게 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것을 어찌 보잘 것 없는 조악한 사람의 언어로 표현 할 수 있겠는가마는 어렴풋하게 인생의 길을 안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젠 사유의 세계와 경험이란 연륜이 깊어진 작가가 이러한 삶의 지혜들을 자신의 목소리와 또한 이를 대변하는 명인들의 일화, 고사, 우화, 금언, 잠언 등 아포리즘(aphorism)으로 엮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인생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의 울림을 준다.

허영, 위선, 기만의 본성을 질책하기도 하고, 좌절과 절망으로 암흑을 헤매는 고통의 실체가 삶의 과정이며 도구임을 깨우치게도 해주며, 어리석음과 과욕이 불러내는 자멸의 이치, 부분의 집착으로 생명을 잃고 사물화하고 기계화되는 자아를 상실한 오늘의 우리들을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감성의 숭고한 세계로 인도하기도 한다.
현실, 시대에 압도당해서 의지를 상실하거나 자유를 상실한 젊음에게 “선택의 여지없는 상황에”처해 선택을 강요당하는 불행을 자초하는 무지와 안이함을 번뜩 깨닫게 하고, 순간 우쭐함에 젖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개구리의 우화처럼 자만의 실체를 보여주거나, “남을 욕하고 싶을 때는 그가 당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생각하라.”고 인간 실체의 진실을 향한 전체상으로 이끌어주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구름이 무한히 자유로운 것은 자신을 무한한 허공에다 버렸기 때문이다.”처럼 자율과 자유란 무엇인지, “실 날 같은 소리라도 밖으로 표출하려면 실 날 같은 바람 한 가닥이라도 만나야 한다.”는 나와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란 존재의 섭리를 가르쳐주고, 무지와 발전, 그리고 궁극의 멸망이란 역사의 이치를 통해 자기인식과 반성 없는 현대인의 반복되는 우(愚)를 경고하기도 한다. 바로 이처럼 무질서하게 배열된 듯한 이 아포리즘들이 전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작가의 사람에 대한 진한 애정이 베어 가지런히 정렬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한편 뼈있는 진리들이 저절로 우리에게 체화되는 재미있는 일화들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재치넘치는 구성이나, 각 장마다 수록된 몇 편의 감성 시(詩)는 은유라는 보다 원천적인 마음의 세계로 시선의 지평을 확장케 하는데, 감칠맛 나는 다음과 같은 시는 해맑은 진솔함과 낭만, 그리고 우주와의 멋들어진 교감까지 산다는 것의 진면목을 느끼게 해준다.

「보름달」

얇은 속옷 밖으로 드러나는 네 무릎
어느 중이 훔쳐다가 부처님께 공양했나
달도 참 밝구나     - 본문 P 323 에서

아마 진리란, 지혜란 보려고 애쓰는 사람만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육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따위에게 고작 생명 없는 물질밖에 더 보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절망 속에 창조와 희망이 있고, 시련 속에 평화가 있듯이 우연 속에 필연이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상에서 우리가 잊고 지내던 삶에 깃든 진실들을 통해 희망과 행복의 날개를 달아준다. 작가와 같이 수록된 이 아포리즘들의 산책을 끝내고 나면 우리 내면의 그릇이 제법 커져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세상살이에는 비록 서툴지 몰라도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혜안과, 행동의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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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나라의 작가들 - 대화적 관계로 본 문학 이야기
최재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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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있는 그대로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즉 모든 것을 독립적이고 부분적인 단절의 그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상호 연결된 구조로서 이해한다면 사실 우리들의 생각이 서로 닮은꼴을 하고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텐데, 어느 순간부터 고작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란 한계를 가지고 분석하고 짜깁기하는데 익숙해져 정작 진실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학 작품을 접하는 우리네에게 저자가 발견케 해주는 서로 다른 작품들의 다채로운 방식의 연결의 드러냄을 통해 알지 못했던, 또한 알려지지 않았던 의미의 발굴과 소개는 가려졌던 진실을 그의 말대로 “조금은 넓고 깊어지게”해준다.

선행자로부터 후행자에게 꽃다발이 전해지는 축적됨의 문학사적 의의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구조와 본질을 보다 넓고 깊게 전체적인 형상으로 볼 수 있게 하여주는 의미 깊은 시도라 하여야 할 것이다. 단지 문학적 영감의 일치라 볼 수밖에 없는 동일성에서부터 선배 문인(文人)에 대한 존경의 뜻을 가득 품은 오마주, 때론 원작을 비비꼬고 조롱하는 다시쓰기, 그리고 동일한 모티프나 서로의 작품에 우정과 사랑, 경외로 소통하는 작품의 형태까지 그 거울의 모습은 다양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 대화의 질이 어떻든 그 소통의 변주들에서 우리네 심성의 보다 풍부한 전경을 읽게 되는 것은 이 저작의 진짜 힘이라 할 수 있다.

20여 쌍의 거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거울의 상(像)은 사랑이고 존경이며 공감이기도 하지만 저항과 뒤틀림, 적대감이기도 하다. 바로 이렇게 흥미로운 연결을 지닌 작품들을 대함으로서 미쳐 보지 못했던 의미를 비로소 보게 되고 앎의 지평이 넓어진다. 복제된, 독자적 하루로서 의미를 지닐 수 없는 반복의 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란 모티프는 아마 국경과 거리를 초월하는 인간의 보편적 형상일 것이다.‘안정효’와 ‘밀란 쿤데라’의 오묘한 영감의 일치처럼 말이다. 그리고 분명 같은 인물을 소설화하였음에도‘김동인’의 「김연실 전」은 ‘정이현’의 「이십세기 모단걸 - 신 김연실 전」에 와서 심하게 공격당하고 일약 창부에서 세대와 투쟁한 여성전사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채만식’의 「치숙」은 존경을 그득 담은‘송경아’의 「치숙」으로 더욱 빛나고,‘최인훈’은‘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를 거의 일반명사화 시키는데 공헌하기조차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내면은 무릇 수많은 방해작용으로 제한된 대상만을 인식하지만 이들 작가들의 누적된 관점을 통해 보다 원형에 가까운 세상의 이해에 근접하게 된다. 더구나 이러한 거울 작품들이란 존재 자체가 두 세계의 본질이 여전히 바뀐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할 때 어쩜 동일함의 반복은 그리 달가운 현상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같은 곳을 바라보는 존재의 확인은 분명 기쁜 일임에 틀림없다. ‘신석정’의 「작은 짐승」과 ‘안도현’의 「저물 무렵」에서 발하는‘蘭이와 나’ 또는 ‘그 애와 나’처럼 말이다. 우리 문학작품을 새삼 넓게 열리고 깊이있게 이해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저작이다. 저자의 기대를 넘는 문학의 영감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우리 문학의 이해를 높여 독자의 지평을 넓히는데 커다란 기여를 할 저작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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