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욘더 - Good-bye Yonder, 제4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
김장환 지음 / 김영사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있었다. 어느 사이에 우리 인간들은 아주 낯선 세계에 들어섰다는 느낌인데,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아는 의식의 세계가 더 이상 무언가 전체적인 현재성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심과 명료성을 요구하면서 이상한 형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모호하고 흐릿하며 선명하게 인식되지 않는 실재의 세계는 무시하고 배제하면서부터 고작 자기가 알고 있고 통제할 수 있는 한정된 지식의 단편들로 짜 맞추다보니 코끼리 코에 부엉이 눈을 하고 사자의 입을 한 얼굴과 같은 기이한 것을 창조라느니 상상력이라고 하면서,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을 마치 새로운 것으로 인식하는 무지와 편협성, 편집증적 현상에 빠져있는 지금의 거침없는 세상의 모습 말이다. 


과연 우리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의식이란 협소한 범주에서 이해 가능한 것일까? 나는 정신과 마음이란 것이 내 몸을 떠나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나는 온 몸으로 세상을 느끼고 체험한다. 그 감각을 통해 다가오는 세상은 그리 선명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교감과 전체성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사람들, 세상을 주도하는 힘은 신체는 사물이라고, 정신의 세계와 분리하고, 그래서 부품으로 대체 가능한 조립기계 정도로 치부하려 한다. 자꾸만 우리 인간에게서 생명성을 박탈하려고 한다.





배아 줄기세포를 통한 생명에 대한 교정적 간섭은 물론이거니와 실시간이라는 동시성을 구현하는 가상의 공간과 현실의 공간이 융합하는 모바일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과학기술 지상의 사유, 즉 합리성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감성의 세계, 생명의 세계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인간 마음의 세계는 쓰레기처럼 처리되고 있다. 소설 속‘욘더(Yonder)’의 세계는 그래서 분명 우리 인간 세상의 미래에 출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암으로 죽어가는 아내가 남긴 기억의 저장이 사후 사이버 공간에서 사랑하는 이를 위로하기 위해 가상의 공간에서 실현되게 된다. 바이 앤 바이(by and by), 머지않은 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홀’의 아내‘이후’가 죽음의 고통을 회피하기위해 머리에 뒤집어쓰는 브로핀 헤드란 장치에서 나는 현실을 지우려는 오늘의 우리들 모습을 본다. 인간 정신의 승리, 자연의 섭리를 조작하고 통제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을. 이 장치는 기술의 거침없는 추진을 통해‘브레인 다운로드’라는 인간 의식의 이식이 가능한 꿈의 기술로 표현되고, 급기야는 사이버스페이스(Cyber Space) 상에 구현되는 천국, "인간이 바랄 수 있는 모든 만족이 구현되어 진정한 쾌락과 행복이 가능"하다는 불멸의 공간, 욘더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나 신체와 분리되어 작동하는 정신의 존재에 동의할 수 없는 나는 소설의 결말에서야 겨우 화해 할 수 있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생적 부조리가 주는 고통이 이미 두려움인 것을 부인 할 수는 없지만, 과연 죽음이 없는 불멸, 영원성이란 것이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삶의 행복을, 아니 나아가 인간의 존재자로서의 의미에 어떤 것일 수 있을까하는 데에 이르면 아마 그것은 곧 존재하지 않음의 다른 의미 이상이 아닐까. 불멸을 쫒는 인간 군상들, 그래서 영원한 삶이 보장되는 욘더의 세계로 향하기 위한 자살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다시금 개념화와 물질화, 기계화에 몰두하는 오늘의 세계, 그칠줄 모르는 탐욕의 현실세계와의 교차를 본다. 


화자인 주인공 홀이 죽은 아내가 있는 불멸의 공간인 욘더로 향하기 위해 중개자를 찾아가는 장면에 등장하는 사이보그 타운의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인간”의 묘사에서 사물화의 극한을 치닫는 오늘의 정신세계를 거듭 확인케 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신체의 기계화를 위해 소위 B.M.(Body Modification)이란 현상은 아마 현대인의 왜곡된 삶의 시선이 낳은 정신적 질환의 연장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신체통합 정체성 장애, 신체이형장애와 같은 질병으로서의 호칭은 기술지상의 오늘을 경계하는 장치로서 작가의 우려와 비판을 읽게 된다.

한편, 아내가 있는 세계로 가기위해서는 자살을 시도하고 자신과 아내의 의식이 이식된 욘더에서 두 사람은 조우한다. 사실 소설적 묘사임에도 사이버스페이스인 욘더의 생활 내용에서 내 사유가 끊임없이 거부하고 이탈하려고 했던 부분이 있는데, “몸이 없었다.(....) 의지가 있었다.”하는 것인데,  몸의 부존에도 불구하고 의지의 존재라는 데카르트적 이분법적 사고, 즉 기계화, 사물화, 합리주의라는 오늘의 타락한 사유의 끈질긴 무지에 대한 분노 때문이랄 수 있다. 더구나 “내 몸의 실체감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홀의 감각에 대한 동일성의 주장은 신체를 부인하는 앞 선 주장과 모순되고, “손톱으로 튀기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라든가, “재스민 향, 훌륭한 맛, 내 눈으로 확인”과 같은 신체의 감각에 대한 표현은 해체되고 파편화되어 신체를 잃어버린 소설 내내 비판되었던 물질화 기계화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혼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자로서의 갈등도 잠깐 머물고 말게 하는 멋진 성찰의 구절이 등장하는데, 문득 홀이 욘더의 세계에서 어떤 것들이 없는 상태로서 “실존적인 우울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체로서의 마음에 대한 깨달음인데, 결국 자라지 않는 그네들의 아이로부터 진행되지만 정지한 시간,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지, 즉 불멸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이라는 각성이다.  이에 더해 인간의 말이라는 불충분한 세상의 묘사에 불과한 기호, 바로 삶이 이 기호에 갇히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가 극히 왜곡되고 관념화되어 편협해져 있음을 총체적으로 해독해내고 있다.

오늘의 기술은 과학이라는 만능의 언어로 인간, 인간사회에 자신이 쏟아내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와 여파를 가져올지에 대해 어떠한 검토도 예측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하지 못하는 것일 게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오직 효용과 편익, 편리와 복지와 같은 긍정적 전망만 쏟아 놓는다. 그것이 인류의 완전한 파괴로 이어질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 소설은 한번 적용되기 시작한 기술, 인간의 조작은 과거로 돌이킬 수가 없음을, 역행 불능의 현실에 대해 너무도 무감각해져있는 현대의 인간, 인간사회에 넓고 깊은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생명을 팽개친 정신세계란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신체를 멸실한 불멸의 삶이 있다면 그건 바로 죽음의 다른 이름임을 천명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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