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견 - 박권일 잡감
박권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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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에 대한 상대적 표현으로서‘소수’를 말하듯이‘상대성’을 가진 의미이다. 그래서 소수란 결코 작다거나 혹은 수적으로 적다는 절대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보이거나 보일 수 있는 것이고 그 이면에 노출되지 않은 엄청난 다수가 잠재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네 사회의 여론이라든가 정치권력의 의사라는 것이 마치 다수가 동의한 결집된 의견인양 말하지만 사실 아무리 떠들어도 반영되지 않는 대다수 민중의 의지는 결코 들리지 않으며, 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국민의 여론, 즉 다수의 의견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소수 권력계층이 의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대다수이다.

 

방송, 미디어 등 소위 여론을 조작하는 보수경제권력과 자신들의 기득적인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는 수구적 계층이라는 소수가 다수처럼 행동하고, 그래서 정작 다수인 민중은 소수가 되고 이들의 의견은 실종되어 버리는 것이다. 정말의 다수 의견인 주류적 시각에서의‘소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사회이다 보니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민중은 소외되고 그 삶은 점증적으로 피폐화되어 간다. 소득과 자산은 극소수에게 편중되고 배제된 소수인 대다수 민중은 극단적으로 가난해져 간다. 정책과 법제도는 기득권 유지와 부의 축적을 위한 방향성만을 모색한다. 여기에 자신들의 생활경제적 수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양가적 자의식의 중간계층이 자기 이익의 편의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왕복하며 소수의 지배권력을 도와 주류사회라는 것을 형성한다. 이 중립적이고 선수가 아닌 심판 같은 행동만 하려는 중간계급의 이중 잣대가 스스로들은 물론 민중 모두의 의견을 분산시켜 결집을 방해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속화시킨다.

 

학연, 지연을 좋다고 하는 사회

 

다수인 민중의 의견을 압살하는 모순된 중간계급의 노예 의식과 이기적 욕망이 자신 또한 배제된 소수 의견자임을 망각케 한다. 더더욱 소수 의견은 이들의 무지와 무교양으로 인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 종편방송의 문화평론가, 의사, 변호사, 작가, 스포츠 해설가 등 중간계급 주류 인사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패널로 자리잡아 하는 말들은 이들의 무교양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학연 지연 자체는 좋은 거예요”라고 떠들어대며 마치 진리를 말한 것처럼 모두들 머리를 끄덕인다. 한국 사회의 건강성을 가장 악화시키는 악질적 폐해를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처럼 다수인 민중의 소수의견은 오간데 없어지고 보수 언론, 다시말해 소수 기득권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몰염치와 혐오스러움만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들은 왜 학연과 지연이 좋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규칙과 규범 등 공정한 루트를 통하지 않고 자기 개인들의 욕망을 관철할 수 있는‘뒷문 해결’을 위한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은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규칙을 자신만은 지키지 않아도 될 때의 특권의식이 가져다주는 쾌락,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한국은 지구상에서‘뒷문 해결사회’의 대표적 전형으로 지목된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사례로 들었듯이 ‘새치기의 시장 의식’을 떠 올릴 수 있다. 줄서기, 즉 규범과 규칙이라는 공평함과 자기노력의 가치인 공정성을 훼손시키는 주범이 새치기이다. 나는 규칙을 초월한 사람, 규칙의 예외를 적용받는 사람이라는 비뚤어진 권력의식이 작동하는 것이다. 쾌락의 효율성을 위해 민주적 질서와 배분양식을 파괴하는 악덕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이 무지의 타락성이 오늘 한국사회의 도덕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 아니고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나아가 강남이라는 특수한 지대를 낳기에 이르렀다. 학연, 지연이라는 뒷문 해결의 사회인 한국사회에서 내 자식만큼은 모두를 짓밟고 일어서서 학연과 지연의 성채를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규칙의 예외를 적용 받으면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 쾌락을 만끽 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이 아니어도, 학연과 지연이 없어도, 규칙과 규범을 지켜도 손해를 입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중간 계급들이 상식이라고 행하는 것들, 사회적 관습이라고 용인되는 이러한 것들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고 그 어떤 변화가 있겠는가? 구태의 썩은 정치를 바꾸고, 경제의 민주화를 이루자고 제아무리 외친들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중간계급의 의식이 바뀌지 않고서 어느 것인들 도달할 수 있을까?

 

비도덕성이 옹호되는 저열함이 그득한 사회

 

자, 다수로 보이는 것들의 왜곡과 편협의 사례는 이 사회에 무궁무진하다. 소위 소셜 미디어라고 칭하는 SNS의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여론을 읽어내고 소통하는 만능의 공간처럼 주류의 미디어들은 떠들어 댄다. 그러나 정작 이 도구가 세상의 문제와 본질, 그리고 민중의 의견을 읽어내는, 진정한 의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 재벌, 그리고 고작 연예인들의 자기 전시 욕망의 표출 장소이고 연극성 인격장애와 무교양의 자폭 공간이외의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더구나 감각적이고 표피적 단문으로 본질을 논하기 보다는 취향의 시비를 다투는 저열함이 더 극성을 부리지 않는가? 자신을 보여주고 대상화 하는 것에 집중하는 전시 욕망, 바로 물신화와 자기소외의 황폐함만이 그득하지 않은가? 정신의 실종, 생각의 결여, 문제본질의 왜곡, ...

 

그래서 사회안전망의 바깥에 선 오늘의 청년과 중노년의 불안과 사회전체의 생산력을 불임화시키는 불안정 노동 진전의 사회인 현실의 논의는 이런 곳에서 행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혹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엉뚱하게도 무지의 대결인 취향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장으로 추락하고 만다.

“임금소득 불평등 OECD 1위, 임시직 비율 2위”, “비정규직 858만명(2008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조사)”, OECD국가 “GDP대비 공적 사회복지 지출 비중 최하위”라는 지표가 말하듯이 한국사회는 불과 5년도 이르기 전에 두 국민(1%의 강부자와 99%의 민중)정책의 성공적 성취로 인해 국민 전체가 가난해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고용없는 성장, 불안정 노동의 확산, 자산 소득의 극단적 불평등으로 남미사회의 지독한 양극화 모델과 동일해지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시장의 비도덕성이 옹호되는 도덕성 상실의 사회, 탈규범적 행태를 능력이라 찬양하는 타락과 부패의 사회가 된 한국사회에서 소수 의견이 짓밟히고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혁신을 기치로 내건 사람, 공평과 정의,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 사람이 나서 이제 한국사회를 바꾸자고 외친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 것인지, 누가 변화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바로 소수가 된 민중, 양가적인 중간계급이 자신들의 상식을 파괴하는 힘든 여정을 지나야 하는 것일 게다. 정치, 일상,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취업, SNS, 청년빈곤 문제에 이르는 음영이 짙게 드리운 이 사회에 날선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소수의견’이 다수, 주류의 의견이 되는 사회가 곧 우리들이 지향해야 하는, 변화의 도달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소수 의견이 상식이 되는 그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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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를 위한 밤 데이브 거니 시리즈 2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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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야기에 이 만큼 완결성을 내재한 구성력을 갖춘 작품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쩜 행운일지도 모른다. 구태여 분류하자면 범죄 스릴러의 장르라고 하겠지만 ‘존 버든’의 소설은 이런 어정쩡한 구분을 넘어선다. 삶의 방향감각에 대해서, 인간과 사물, 어떤 대상에 대한 이해, 성 에너지와 같은 인간 내면의 독특한 심상들이 특정 사건의 해결을 향한 추리와 탐색이란 과정과 분리되지 않고 촘촘히 얽혀 뻔한 재미 이상의 진중한 무엇을 선사한다.

 

전작 <658,우연히>에서 느껴졌던 전직 뉴욕형사‘데이브 거니’의 자기 성찰과 삶의 정작 중요한 것들에 대한 이해로 다가서는 고뇌의 원천이 계속하여 저변에 흐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취약한 정신세계를 조롱하는 지적도발 역시 이 작품의 세련됨을 더해준다.

소설 속에 인용되고 있는 노벨상 수상자인 영국의 극작가‘헤럴드 핀터’의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성되는 가장 큰 두려움은 말로 설명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이란 말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첫 페이지의 문장들은 그야말로 평온 속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담겨진 위협들로 엄청난 공포의 직면을 기대케 한다.

 

“뻔뻔한 년을 제거하는 작업은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고 결론지어도 좋으리라. - 中略 - 거울 앞에 서서 미소 짓는 자신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또한 이 문장은 한 사람을 살해한 자의 도취적 독백과 모습을 암시함과 아울러, “제아무리 추리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를 쫓을 수 없었다.” 라는 한껏 고양된 자신감으로 아예 초장부터 도발해 댄다. 많은 하객들이 모인 결혼식에서 신부가 살해되었지만 현장에는 불가능한 단서들, 조작된 단서들 이외에는 흔적조차 없다. 다만 사건과 함께 사라진‘멕시코인 정원사’라 알려진‘헥터 플로레스’란 인물이 유일한 추적의 대상일 뿐이다. 이미 전작에서 경험한 답변이 불가능한 살인사건에의 봉착이란 동일한 플롯임에도 이 작품은 더욱 지적 깊이를 더한 복선들로 한 없이 몰입되게 한다.

 

소설의 키워드라 할 것들을 감히 정리해본다면 ‘섹스 중독’혹은 ‘성 에너지’, ‘경계 의식’혹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 ‘잠복근무’혹은 , ‘감정적 이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어휘들은 소설 저변을 도도히 흐르는 이야기의 정체성이자 주제이고, 사람과 삶의 방식에 대한 빛나는 통찰적 언어들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성적 피해자였으나 가해자로서 폭력성을 습득하게 된 여자 아이들의 성 중독을 치료하겠다는 특수학교, 섹스 중독 치료분야의 권위자인 정신과의사가 소설의 배경을 가득 채우고, “다른 사람이 칼에 찔리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움찔하는 하는 것처럼” 친절하게도 인간의 불완전한 경계의식이야말로 타자에 대한 연민의 기초임을 설명하며 사이코패스들의 완벽한 경계의식을 통해 인간 본성의 본질을 생각게 한다. (사이코패스들은 움찔하지 않는 단다!)

 

특히 거의 작품을 지배하는 정의라 할 수 있는 “상대가 믿어주기를 바라는 사실을 그가 스스로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기술”이 바로 잠복근무임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감정적 이득으로 인해 시야를 흐릴 수 있음을 지적 하는 대목은 우리들의 삶의 방향감각과 이해에 대한 정곡을 가리키며, 동시에 사건 해결의 단서로 향하는 길목을 제대로 바라볼 것을 경고한다. 이를테면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자신이야말로 항상 부재중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자신의 생각이 맞기를 무의식중에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하나의 시선과 언어에서 삶의 본질에 대한 사유와 사건의 추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단서로 동시에 작동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 자체로 가공할 위력을 지닌 성(性) 에너지의 특징들을 통해서 사건의 완전무결성, 위험성, 왜곡의 현상들을 보여준다. “인간을 그토록 완전무결하게 집중시킬 수 있는 힘”으로써 성(SEX)은 인간의 고통과 욕망의 근저에 자리잡는다. 자 속칭 ‘개잡년’이라고 명명된 섹스중독의 여자들이 잇달아 살해되는 범죄의 본류를 따라가야 하는 험난한 수사는 감정적 이득으로 판단을 흐려서도 안 되며, 그 엄청난 파괴력과 집중성이라는 힘을 이해해야 하고, 인간의 가면이라는 태생적 본질을 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야기를 믿고 싶은 바로 그 마음이 우리를 파멸시키기에 인간의 상상력만큼이나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없으리라는 이해일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진 미덕들을 얘기하다보니 스토리가 소홀해졌지만, 소설을 지배하는 암흑의 심연이 발산하는 압도적인 흡인력은 거부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폭력적이라는 말로 대체해야 할 것 같다. 재미와 사유를 동시에 잡아맨 걸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6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이 오히려 부족하다 할 정도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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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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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 선과 악, 그 경계를 찾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소설은 삶의 실제와 몽상적 시공을 오간다. 그런데 그 구분이 지극히 모호하다. 이승과 저승의 이원적 경계를 오락가락하는데, 그것이 대체 현실인지 죽음의 세계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나치게 은유의 세상을 살아 온 탓에 순수하게 바라 볼 수 없을 만큼 내 관념의 세계가 불순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표의된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을 혹여 정말의 의미는 따로 있다고 억척스레 해석하는데 익숙해진 이유일 것이다. 자고 일어나니 양쪽 관자놀이에 뿔이 자라나 있다면 이미 현실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뿔은 그저 심상(心象)일 뿐인 것인가? 악(惡)이 깃든 마음의 표상의 수단으로서? 아니 이 둘 모두는 아닐까? 현실의 악이자, 저승의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모순된 기표로서 말이다.

 

소설은 이처럼 모순의 세계를 넘나든다. 삶과 죽음, 선함과 악함이 마구 뒤섞여 살아있는 것인지, 죽은 것인지, 사람인지, 악마인지 분간할 수 없다. 이렇게 분간하려는 것이 오류는 아닌지, 사실 그 구분이란 본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악이란 것이 오롯이 악이지만은 아닌 것처럼. 그래서인지 뿔이 솟아난 남자‘이그’는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악인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사랑하던 연인‘메린’의 처참한 죽음이라는 상실을 지우지 못하고 있음에도 세상은 그에게서 메린의 살해용의자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미래의 아이들을 말하던 두 사람의 사랑, 그 사랑을 앗아간 세상은 그에겐 이미 지옥이다. 지옥 같은 현실, 바로 죽음의 세계 아니던가?

 

소설은 사랑을 만들고 우정을 키워가며 사람의 본성을 알아가던 과거의 시간을 통해 인간에 내재된 악마성의 실체를 탐색한다. 자기중심적 사고, 오해, 잃을 것을 가진 자의 두려움, 집착, 소유욕..., 하찮은 욕망들이 발산하는 터무니없고 또한 형편없는 산물들. 뿔은 메린이 살해되는 현장을 들려주고, 살인자와 희생자, 동행자인 오랜 지기인 ‘리’와 연인 ‘메린’, 형 ‘테리’와의 기억들을 통해 신(神)의 자리를 대신한 악마의 선의를 역설(逆說)한다. 선과 악의 혼화(混和) 그리고 순환. 그런데 더럽게 종교적이다. 이 뿔 달린 악마가 죽은 연인의 십자가 목걸이에는 무력화하고 순화된다. 굳이 평하자면 이 소설의 오점이랄 수 있는데, 관대하게 보아 넘기려면 연인의 순결한 영혼의 상징이라고 할까? 결국 조금 유치하게 되어버리긴 하지만 아무튼 이것은 소설에서 중요한 중의적 도구로 사용된다.

 

십자가가 달린 메린의 목걸이, 이것은 사랑의 매개이며 또한 욕망의 매개체로 이그와 리, 메린의 육신을 돌아다닌다. 우상이다. 그러면서도 본질은 영원성을 말하는듯하다. 이들이 모두 이승을 떠났을 때에도 지상에 남아 누군가를 또 기다리는 걸 보면. 물질이 영원이라는 정신을 대체하는 것 아닌가? 사랑하는 여인이 어느 날 서로 다른 이성과의 경험을 위해 자신들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것인지 확인하는 이별의 시간을 갖자고 한다. 분노한 남자는 그런 여자를 남겨두고 떠나버린다. 여자의 살에 대한 집착을 가진 이그의 친구, 리는 여자가 자신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이별이라고 여기지만 여자에겐 사랑하는 연인 이그를 위한 필연적 선택으로서의 이별일 뿐이다. 여기서 세상의 악은 자라난다. 분노는 살인을 부르고 거짓과 위선, 기만, 도피를 만들어낸다. 그리곤 세상은 저주와 죽음의 욕망만이 부글거린다.

 

소설은 또한 피살된 여자의 죽음에 기묘한 필연을 엮어 넣는다. 암(癌)에 점령당한 육신의 부패를 사랑하는 이에게 부담시키지 않기 위한 절절함의 당위성으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살인자의 행위는 악행이면서도 선행이기도 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선악의 구분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오류이자 얼토당토않은 것이냐고 묻는 것일 게다. 삶이란 이렇듯 규정지을 수 없는 무엇들일 것이다. 분노와 악의가 설설 끓어댈 것 같은 악마가 더없이 인간적인 행보를 하는 것도 이미 분간 할 수 없는 본성의 본질을 역설(力說)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캄캄한 절망의 세계, 저주가 너울거리는 지옥의 세상에서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흐느끼는 절묘한 이야기에 인간의 본질을 탁월하게 담아낸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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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웃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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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에는 왠지 모르게 순수하고 투명한, 그리고 어느 것도 놓치지 않는 세심한 관찰력을 가진 작은 어린 여자아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우리네들의 삶과 세상이 그녀에게 모두 들켜버린 것 만 같은 그런 수치심 때문일까?

작품 어디에도 빈 수레들의 큰소리가 없다. 소란스럽지 않은 나지막한 소리에 거절과 두려움, 상처와 슬픔, 불안과 균형, 삶의 깨달음이 실려 있어 더 없이 그 이야기들의 진지함에 동화된다. 이렇듯 8편의 소설 모두에서 삶의 그 우연함과 몰염치함의 부조리에도 항상 평온이 깃들어 있고, 측은함과 연민이 애틋하게 배어있음을 본다.


“크게 되는 것만은 나의 의지였으니까.”라는 엄마의 중얼거림에서 삶의 자유로운 평화를 보는 것처럼, 출생과 성장의 비애로만 비추어지는 불쾌한 세상의 이야기들로 뻣뻣해져오던 몸이 이미터 사십 센티가 되어버린 엄마처럼 시원한 기분을 맞이하게 된다. 나와 엄마에 퍼진 그 훈기의 편안함이 그 모녀만이 아닌 나에게까지 전해져 오듯이. <나를 위해 웃다>

세상을 제 정신만으로 바라보는 것이 힘겨운 사람들, 사랑과 상실의 외로움으로 정신의 결을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사람들, 거절당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뒤 서서히 소모되어온 사람들, 꿈꾸지 않기에 적당히 살아 갈 수 있는 사람들, 삶 어딘가 늘 텅 비어버린 듯한 체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먼 길을 돌아와 비로소 가야할 길을 깨닫는 이들의 모습에 보내주는 그 따뜻한 기대와 긍정의 기운이 우리네 마음에도 어느덧 깃들게 한다.


“남자들이 끝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새벽. 죽고 싶을 때마다 대신 바라보려고 손목 아래 그려놓은 빨간 점선”을 내려다보는 세상 밖에선 그녀들의 두려움을 정말“선명한 정신으로 바라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손을 내밀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고 덥석 물어버리는 쪽에 언제나 마음이 더 끌”리는, 사람에 대한 그 이해와 관심이 너무 소중하고 탐나기까지 한다. <아프리카>


한편으로 론 “열두 평짜리 임대아파트와 미뉴에트 선율”의 어색한 조화, “보석을 손에 쥐어보면 그 속에 뜨거운 불길이 갇혀 있다”와 같은 일상에 대한 작가의 진솔한 성찰이 어디에까지 이르는지 보는 것 또한 분명 기분 좋은 독서에 일조한다.

위태로워 보이던 가족의 그 평범함에서, “품위”를 되뇌는 아버지의 자전거. 그리고 매연이 이는 거리와, “그 뒤에 앉은 엄마를 떠올릴 때면, (중략) 그게 아주 균형 잡힌 춤처럼 느껴지는”주인공의 시선에서 소중한 그 무엇들이 행복한 슬픔으로 남겨진다.<댄스댄스>


그리고 “매번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던 그 노래들. 늘 어딘가 텅 비어있는 듯하던 삶, 절름발이처럼 느껴지던 그 삶, 구겨져서 보이지 않던 그 삶의 노래는 <천막에서> 의 ‘나’처럼 내가 가야 할 곳을 깨닫는다. <휴일의 음악>


젊은 작가의 시선이 그리 녹록치 않다. 세상을 깊고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 엄숙하다고까지 할 성찰에서 깨끗하고 고귀한 품격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번잡함도 없다. 정면을 마주하고 오늘을 귀 기울여 듣고, 지금의 모습을 헤쳐 가는 그런 성숙함이 있다. 감히 만족스럽다는 말을 사용하고 싶다. 모나지 않은 조용한 숨결 속에 예리함을 넘어서는 탁월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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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시카고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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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

 

꿈을 가슴에 가득 품고 있는 열두 살 소녀의 시리지만 빛 같은 이야기다. 또한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쇠락(衰落)하는 기지촌의 시퍼런 멍의 기록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알지 못하는 삶의 이야기, 단지 심심할 때만 동물원 구경하듯 바라보는 시선 밖의 이야기다. 어설프게 타인의 고통을 말하는 위선을 부끄럽게 하는 이야기이며, 슬프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외된 골목이자, 공동묘지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온통 향긋한 장미꽃 향기가 “말 할 수 없는 감정들을 밝히 비추어주는” 빛처럼 흘러넘치는 정말의 이야기다. 그리고 소녀의 마음 속 거인을 품고 싶어질 만큼 사랑이 풍성한 이야기다!

 

소설의 프롤로그에는 “매일매일 유실”을 경험하고 있다는 조숙한 열일곱 살 소녀가 보이지만, 이내 시간은 소용돌이쳐 열두 살 소녀 ‘선희’의 시선이 자리 잡고, 이전을 앞둔 기지촌 골목의 풍경이 ‘모래 그림’처럼, 아니 지워지지 않고 허물어지 않을 기록이 되어 아릿하게 지면을 채운다. 마을에 미군부대가 들어온 직후부터 생긴 공동묘지에는 미군들에게 꽃을 파는 여인들, 그녀들과 그녀들이 낳은 아이들의 고통과 죽음이 지나온 시간만큼 켜켜이 쌓여 있다. 모래로 그린 그림 같은 삶, 매일매일 허물어지는 삶, 텅 빈 가슴을 부여잡고 죽을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 같은 삶들로 가득 채워진 골목, 그래서 그 허기를 메우기 위해 열두 살 소녀가 찾아드는 숲 속 공동묘지는 “자다 깨어 엄마!”하듯이 단단히 쥐고 싶은 그것이다.

 

“꽃의 스크럼 - 장미 묘목”

 

미군 기지의 이전(移轉)과 함께 골목의 클럽들과 상점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마을의 풍경은 더욱 을씨년스러워진다. 세상의 시선은 비로소 골목을 찾아든다. 심심한 대중의 관음증을 채우기 위해 카메라 무리를 이룬 방송사 촬영팀이 들어와 ‘죽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만들고, 더 이상 살(flesh)을 팔지 못해 꽃을 팔아 하루하루 먹고사는 할머니들에게 “지금 기분이 어떠냐고” 마이크를 들이댄다. 어린애도 묻지 않을 몰염치한 말들을.

그래서 꿈꾸는 사람인 ‘체 게바라’가 그려진 셔츠를 입은 촬영팀에게 열두 살 소녀가 묻는다. “아저씨는 우리 골목 때문에 숨도 못 쉬게 마음이 아픈가요?” , “자기 몸처럼 아파야 진짜 꿈이라고요.”하고 말이다. 호기심, 관음증, 고작 일회성 연민으로 자신들의 외면을 위로하는 그런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어린애다운 항변일 것이다. 위선들,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들...

 

공동묘지는 미군 기지가 떠나고 난 터의 골프장 건설을 위한 연결 도로로 파헤쳐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엄마와 그리고 죽은 여자들과 그녀들의 아이들이 묻힌 곳, “납작한 거북이 등”같은 세상의 끄트머리에서 우르르 떨어져 죽은 약한 자들이 자리한 쉼터의 약탈을 막기 위해 소녀는 장미 묘목을 심기 시작한다.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흙을 덮고 물을 길러 나르는 열두 살 아이의 고된 노동은 그 어떤 것보다 성(聖)스럽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의 폭력을 무위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 아닐까?

 

공동묘지를 빙 둘러 사방에 장미꽃이 빽빽하게 둘러쳐진 곳, 눈꽃 같은“하얀 장미꽃들이 향기로운 화관”을 쓰고 있는 풍경은 슬프고 가난한 자들의 무덤이 아니라 ‘천국’ 그것이었을 게다. 열일곱 살이 되어 펼쳐보려 했던 엄마의 일기에 담긴 간절하고 따뜻한 사랑의 언어들은 에필로그가 되어 시간을 다시 옮겨놓는다. “다른 사람들을 온 마음으로 가엾게 여기는 사람!”, “온 숲에 ‘무조건적으로’ 다 내리는 비 같은 사랑”이 읽는 이의 마음을 촉촉이 적신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 시인의 마음 아니런가.  빛과 같은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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