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네 뒤에 있었어
니콜라 파르그 지음, 이혜원 옮김 / 뮤진트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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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느낌을 뭐라 말해야 할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쓴 유일한 소설이라고 작가가 말했듯이 감정의 미세한 흐름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화자에게서 삶의 민낯 그대로를 보게 된다. 사랑하고 질투에 분노하며, 비참한 굴욕감에 몸을 떨다가, 또 다른 성적욕망에 행복과 불안으로 갈등하는 남자가 있다. 사실 소설의 테마만 놓고 보면‘사랑과 이별’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밖에 없지만 일상의 사건에서 부딪는 순간순간들의 감정에 대한 찬란한 묘사와 자기 행복을 꿈꾸는 인간들 본연의 욕구에 대한 숨김없는 발설, 남편과 아내의 관계성에 대해 수없이 반복되는 이해와 갈등, 그리고 사랑에 대한 오해와 균형을 상실한 관계의 비대칭성이 가져오는 고통 등이 내면의 서사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의 맛으로 진부함을 완전히 참신함으로 뒤바꾸어 놓는다.

화자(話者)인 30대 남자가 쏟아내는 처연해 보일정도의 세세한 내면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숨을 가쁘게 하는지, 자신에 대한 엄숙한 비판인가하면 어느덧 아내‘알렉상드린’의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의 결함을 우회하고 있고, 필요이상으로 아내에게 무력감을 보이며 자기의 삶을 희생하는 남자인가 하면 스물일곱 남자로 변하여 자유와 사랑의 열정에 휩싸인 자신감 넘치는 남성을 희구하는 것처럼, 그 감정의 오르내림으로 멀미가 날 정도이다.

“잠자리를 할 마음도 없는 여자” 때문에 아내에게 헤어지자고 불쑥 내뱉은 고백으로 전깃줄에 상처가 나도록 얼굴을 맞고는 비열한 위협으로 죄스럽기 짝이 없는 짓을 한 자신이기에 아내의 감당해야하는 고통을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야 했다는 남자의 말은 과연 진실일까? 자기의 비굴할 정도의 희생은‘마조히즘의 극치’였다고 말하는 남자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남편을 자기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며, 일방적 감정을 강요하는 아내, 항상 화를 내는 폭력적 아내에 대한 잠재의식 속의 반란이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화자는 한 달 반 동안 쉬지도 않고 신뢰를 손상한 대가를 치르지만 필요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아내에 대한 적의로 고통을 받는다.

한편 소설의 중요한 두 사건인 아내가 태연히 저지르는 성적 일탈과 화자의 이탈리아 로만체에서의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발생한‘알리스’라는 여성과의 사랑이야기로부터 파생하는 심리적 파동의 섬세한 묘사는 바로 이 작품의 탁월함 그 자체로서, 아마 이러함이 소설을 풍요롭게 하고 공감을 일으키게 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남자와 성적탐닉에 빠져버린 아내의 수첩을 우연히 읽고 반응하는 화자의 절망적인 감정의 흐름은 그야말로 문장의 진수이다.

“나아닌 다른 몸을 향한 사랑의 말을 읽고 또 읽었어. ~ 나는 그 글을 읽는 바로 그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줄 알았지. ~ 중략 ~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 아무 차에나 뛰어들 수도 있다는...”
“그녀는 나 없이 정욕의 역사, 일시적인 열정의 역사를 체험한 거야. ~ 그 자식의 완벽한 육체와 무심함에 홀딱 반했지.”

이렇듯 배신의 고통으로 몸을 떨면서도 아내의 성적 욕망은 부부의 사랑, 가정의 존속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자신을 위로한다. 더구나 아내와 헤어지자고 한 비열한 남자로서 당연히 감수하여야 할 문제로 말이다. 그럼에도“그놈의 호텔방에서 섹스 할 때 쏟아냈을 그녀의 거친 숨소리”를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화자에게서 제도와 윤리, 그리고 개인의 행복에 대한 끊임없이 소모적인 충돌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알리스라는 여성과의 운명적 만남이 남자의 삶에서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알아가는 것은 사랑, 성적욕망에 대한 중요한 이해가 된다. ‘로맹가리(에밀 아자르)’의 아내기도 했던‘진 세버그(Jean Seberg)'처럼 윤곽이 또렷하며, “르네상스 시대 그림에 나오는 금발의 라틴계 마돈나”라고 묘사되는 여자, 알리스로부터 비로소 알게 되는 사랑의 희열, 행복과 삶의 자유에 대한 이해이다. 작품의 표제인‘난 네 뒤에 있었어(Ero dietro di te)’는 바로 이들 만남의 표상이기도 하다.

“꿈결과도 같은 구원의 이 늦여름 햇살, 내 마음을 달래주고, 나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이 햇살, 이 자유의 빛, 정지된 시간, 제 빛을 되찾은 색채, 완벽하리만치 온화한 대기, 매혹적으로 전개되는 일들...”

같은 순간에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거나 이해할 수 있는 미지의 여자를 어디선가 만난다면 그 행복을 구체화 시킬 수 있을 거라고. 바로 알리스가 그런 여자라고. 행복은 그런 여자. '랭보‘의 「감각」이라는 詩의“여자와 함께 할 때처럼 행복하다”는 바로 그런 감정. 소설 속 길게 나열되는 사랑의 산문시 같은 문장들에서 만사를 잠시 잊고 문득 언젠가 느꼈던 것만 같은 늦여름 아침의 나른한 햇살이 그리워지고 좋아지게 된다.

자신의 비정상적이고 공격적인 감정에 순응하며 희생하는 남편, 배려하는 남자에 대한 일종의 중독증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여자와 이러한 기만적인 감정으로 심적 고통과 삶의 균형을 잃어가는 남자의 내면이 다양한 일상의 모습에서 그려진다. 결국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주고 같은 사랑을 원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자에 대한 로망은 남자에게 자신을 생각할 권리, 삶의 본질적 자유를 환기시켜준다. 남편의 감정을 지배하려는 아내의 굴레를 벗어나 프랑스에서 연인이 있는 이탈리아를 향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남자, 그리곤 5일간의 꿈결 같은 열애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남자의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그의 시선에 비친 제야의 불꽃에서 왠지 심각하고 복잡한 인생이란 벗어던질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처럼 아득함이 느껴진다. “경쾌함에 대한 작은 환상”이라고 치부하면서, 더구나 “각자가 지닌 비밀의 정원 속에 감추어진 멋진 추억”정도로 묻어두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여자와 평생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이 작품은 이렇듯 사랑했으며, 그리고 결혼하여 아이를 두고 가정을 이루고 있는 우리네들 모두에게 항상 반복되는 질문에 대한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햇살이 적당하고 만사가 순조롭다고 억지를 부리지 않을 때,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인데, 바로 그 햇살의 기억이 흐리멍덩하기만 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무능한 남자의 고백을 읽고 가슴이 뭉클하고 시린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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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2 - 천문편
조용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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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인문편이 강호고수의 걸출한‘구라빨’이었다면 2권인 천문편은 주역(周易)을 중심으로 풍수와 사주, 관상이 어울려 사람답게 사는 법, 자연과 화친하는 법등 우주의 섭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여야 할까. 해서 산과 강, 자연이 있고, 천지의 질서인 태양과 달을 말하며, 유약한 인간이 섬기는 신의 세계인 종교가 있고, 우주 질서 속의 미물인 인간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보약 세 첩 먹는 것보다 등산이 좋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등산 예찬을 하면서, 40~50대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3대 종주코스를 완등(完登)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면서 고단백 에너지 코스로 바위의 화기(火氣)와 계곡물의 수기(水氣)가 이상적으로 버무려져 있는 백담사에서 봉정암 올라가는 길이 최고라고 적절한 중용의 길을 안내한다. 산을 오르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통즉등산 通則登山, 궁즉입산 窮則入山”이라고 즐거워서, 또는 삶의 궁지에 몰려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든 묶었던 노폐물이 걸러지는 상쾌함과 다 올랐을 때 선들선들 불어오는 바람이면 삶이 평화로워지는 것처럼 입산이건 등산이건 한 번 날 잡아 떠나야 할 터이다.

양기가 뭉친 명당이라는 지리산 남쪽의 악양(岳陽), 봉우리들이 뾰죽하여 화기가 넘친다는 화체산인 화왕산과 200칸 규모의 고택인 아석헌(我石軒), 속세의 먼지가 없는 절경인 관동팔경과 기쁘게 이야기하는 집이라는 현판이 걸린 선교장, 논산 노성리 윤증고택 등 풍수에 얽힌 재담과 이들에서 맛보는 별미인 무장공자(無腸公子)와 탕중왕(湯中王)이라면서 얼마나 맛있었으면 먹을 때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지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민어탕에 이르면 역시 저자의 입담을 인정치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동물과 식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자연 모두에서 절절한 사연들을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보다보면 궁극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에 통하는 거대한 줄기를 발견케 된다. 선탠이 있으면 문탠(moontan)도 있어 매월 보름에 달의 기운을 받으면 오장육부에서 달 월(月)자 들어가는 장(腸)과 부(腑)가 튼튼해지고 감성에너지가 회복되어 화병이나 우울증을 다스리는데 좋다는 해설처럼 건강하게 살다가 평온하게 죽는 방편의 고수다운 인생지침이기도 하다. 문득 사람이 죽으면 지수화풍의 4대로 흩어지는데, 보이지 않는 바람이라는 미세한 조짐에 대한 감지를 말하는 구절에서“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 中略 ~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하는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이라는 詩구절과 겹쳐, 내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이 그 누군가일 것 만 같아 조심스러운 긴장이 돌기도 한다.

한편 저자는 강요하거나 훈계하지 않으면서 넌지시 도덕을 야기하고 인물이나 정치사회의 일면을 은근슬쩍 비판하는 세련됨도 선사한다. 명당자리에 묻히면 후손들이 잘 될 거라고 명당을 찾지만, 풍수에도 윤리가 있단다. 도덕적 자격에 미달하는 자에게는 발복(拔福)하지 않는단다. 그러하니 적악자(積惡者)가 제아무리 명당에 묻히더라도 복하고는 인연이 없다니 살아서 공덕을 부지런히 들 쌓아야 할 터이다. 특히 이 저작에서 풍수법 하나를 배웠다면 화기와 수기에 대한 것으로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소실된 숭례문이 정면에 화기가 넘쳐나는 관악산 때문에 이를 잠재우기 위해 비보(裨補:모자라는 것을 채워줌)용도로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두었었다는 것이다. 금싸라기 땅이고 도로확보 때문에 메워버려 표지판만 남아있다니, 만일 이 연못이 있었다면 역사적 유적이 그렇게 맥없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만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결과론이긴 하나 풍수론도 예사롭지만은 않다.

돌산(돌산-관악산-서울大)은 불이고, 기가 세단다. 그리고 돌 속에 잠재한 광물질로 인해 뇌세포의 활성화를 도와 암석위에 사는 것은 정신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에게 좋다니 어디 돌산위에 지은 집들을 찾아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지반이 온통 돌인 평창동, 구기동이 고급주택가로 뒤바뀐 것을 보면 그럴듯하기도 하다. 팔자니 관상이니 궁합이 맞느니 그렇지 않느니 하는 것에 사실 아예 관심이 없는 내게는 이 저술 중 예언, 사주, 관상을 말하는 운명의 장은 내키지 않는다. 다만 전, 현직 대통령의 관상을 동물의 유형에 빗대어한 운명 풀이처럼 심심풀이 장도 흥미롭거니와 나이 쉰이 넘으면 얼굴에 격(格)이 천격과 귀격으로 정해진다는 성찰은 나름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탐안(貪顔), 진안(嗔顔), 치안(痴顔)은 아닌지 거울을 한 번 들여다보고, 지안(知顔), 호안(好顔), 낙안(樂顔)이면 잘 산 얼굴 아니겠는가하며 또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즐거움이 어려 있는 얼굴이면 좋겠다. 우리의 수려한 산천과 고택 사찰은 물론 천문의 신비를 주역으로 풀어내어 들려주는  삶의 이치가 저자의 넉넉한 품성만큼 여유롭고 풍요롭게 수록되어 있는 역술 기행이라고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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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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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귀신(鬼神)하면 하얀 소복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붉은 피를 흘리며 소름끼치는 흐느낌을 하고 나타나는 처녀 귀신의 공포를 떠올린다. 이렇게 고정화된 이미지와 귀신 이야기는 서늘한 두려움과 공포로 무더위를 날려버리겠다는 납량(納凉)물과 같은 단지 흥미의 산물이기만 한 것일까? 이들 귀신 이야기가 담아내고자 하는 것의 본질적인 내면은 무엇일까? 왜 귀신하면 우리는 여자 귀신을 떠 올리는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사회적인 무슨 코드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 저술은 이와 같은 한국의 귀신에 대한 조선후기 대표적 야담집인 『동야휘집』,『기총문화』,『청구야담』을 비롯하여, 고소설에 나타난 귀신이야기를 통해 문화적, 사회적 기호로서 표상된 이야기의 본성과 정신을 해독하고 있다.
“생사의 경계에서 삶과 죽음이란 이원적 구분을 조롱”하는 존재이자, “생기를 먹고 사는 사신(死神)의 기호”로서“냉정하고 잔혹한 현실이 만들어 낸 가학적 증거물”이라고 귀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있는데, 아마 죽었음에도 억울하고 분한 원한으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넘보며, 하나같이 귀신을 보면 그만 죽어버리는 현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귀신이 나타나는 순간 현실적 규범과 질서에는 균열이 생기고 세계는 혼란에 빠지는데 현실이라는 삶에 죽음이라는 귀신의 충돌은 이미 우주의 질서를 교란하는 대 혼란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소복을 하고 흐느끼는 여성이 한 밤중에 나타난다면 소스라치는 놀라움, 그 충격은 물론 아마 심장이 멎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귀신이야기에는 유독 처녀귀신이 주로 등장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당시 한문으로 써진 야담의 독자, 즉 이야기의 향유층이 사대부 남자였다는 점과, 당대 여성은 살아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가당한 일이 아니었으니, 오직 죽어서만 소위 ‘말하는 입’을 가질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 할 곳이 없었던 여자들이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야기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性)의 구분, 즉 성의 차별적인 요인을 발견 할 수 있다. 야담과 고소설 등에 등장하는 귀신 중 한결같이 억울하게 죽은 원귀(寃鬼)나 자살귀(自殺鬼)는 여자귀신이며 통계적으로 여자귀신 대비 10%에 불과하게 간혹 등장하는 남자귀신의 경우 가족을 수호하고 미래를 알려주는 조상신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귀신 이야기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건 향유층인 사대부 남자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보편성을 덧입힌 방편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관점을 들 수 있는데, 나타난 처녀귀신은 자신의 원한을 직접 복수하지 않고 꼭 남성인 관리들에게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이야기를 잘 못 살피고 있는 것으로서, 귀신의 호소는 원한을 복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하거나 죽게 된 사회적 여건을 말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여 훼손되고 추락한 자신과 가문의 자존심을 복구하는 데 있었기에 불가피한 것이라는 측면을 알게 되면 당연한 맥락임을 이해케 된다. 다시말해 귀신이야기는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고 이에 대한 교정을 요청하는 전복의 서사”이며, “현실의 복구를 강렬히 희구하는 환원의 서사”라는 것이다.

이처럼 귀신들이 털어놓는 사연은 타의에 의해 억눌린 감정과 출구를 봉쇄당한 말들로써, 억울함과 분노, 슬픔과 절망으로 버무려진 순도를 상실한 묵은 감정이라는 억울함이 뒤섞인 불편한 정서로서, 그 실체는 바로‘한(恨)’이라는 것이며, 이를 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에 적절한 수단과 과정으로서 사대부 남성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납득 할 수 있다. 더구나 이와 관련하여 원혼이 되는 여인네들의 자살에 대해서 물음을 갖게 되는데, 그녀들의 자살을 과연 개인적인 책임으로만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고찰하는 기막힌 이야기 한편이 소개되고 있는데, 충(忠),효(孝),열(烈) 삼강(三綱)의 덕목을 동시에 완수하고 희생된 여종의 이야기로서 자신을 탐한 양반을 죽이려는 동료 노비들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양반에게 미리 이를 고하여 죽음을 면케 하면서, 이들 노비들을 처벌할 때 대신 자신의 아비만은 살려달라고 청한 후 자살한 여종의 이야기이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던져 사대부 양반남성에게 충하고 노비인 아비에게는 효하며, 지아비에게는 열하였다는 것으로 이에는 여자의 슬픔이나 고통보다는 외적 명분에만 관심을 보내는 문화적 맥락을 살 필 수 있는 것으로서 자살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강요의 다름 아니었음을 발견케 된다.

한편 여인네들의 간절한 소청을 물리쳐 그 수치심과 좌절로 자살한 여인네들이 원혼이 되어, 자신들의 요청을 거부한 남성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에서, 상처받은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즉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자의 출세나 성공은 좌절되어야 한다는‘시대적 합의’가 깃들어 있으며, 이는 곧 귀신이야기라는 공포의 기호가 문화적 건강성의 자리로 탈바꿈하여 사회적 건강성의 지표로서 작동하였다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귀신이야기는 저승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현실의 이야기이며, 귀신담의 공포는 엄밀히 말해 귀신의 복수가 아니라 가해자의 죄책감, 자기처벌의 형식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즉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가 소외시키고 배제시킨 대상이 무엇인지 발설하여 불합리한 현실을 준열하게 비판하는 정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무방비의 복색인 소복을 한 쳐녀귀신의 패션코드로부터 한국사의 트라우마인 장화홍련, 금오신화의 여자귀신들과 같은 흥미롭고 기발한 이야기와 인문학적 독해는 물론, 다채로운 귀신담들의 소개와 이에 대한 사회사적 성찰, 게다가 “귀신의 말하기는 문화적 위험지수에 대한 안전장치이자 일종의 경고음이다.”라는 문화인류학적 통찰까지 우리 전통문화의 한 기호에서 화려한 정치도덕적 소통 도구를 발견케 하는 한국문화 해석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이제 귀신은 개인 정체성의 형상화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를 환기하는 장치로서 해독되는 하나의 문화적 기호임을 명료하게 환기시켜준다. 어쨌거나 30여 편의 귀신 이야기로 짜여있는 이 저술이 귀신이야기를 사회적 책임과 죄의식이 만들어 낸 공통의 문화적 사유임을 설파하고 있지만, 바로 이 예리한 해석을 수반하고 읽게 되는 귀신담은 재미에 그 상상력이 더해져 대단히 매혹적인 저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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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닷되
한승원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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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시절을 되돌아보니, 아물아물 안개 속의 음화 한 폭이네. ~ 그 슬프면서도 설레던 시의 편린들을.” - 본문 P10 中에서

뉘엿뉘엿 황혼이 검붉게 물드는 인생의 시간은, 작가가 노래하듯 성장의 진통을 겪던 어린 시절의 그 아릿하고 시린 기억들이 아름답고, 슬프고, 또한 설렘이 교차하는 안타까움인가보다.‘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파우스트’를 자신에게 비유하였듯이 젊은 날의 기억인 이 소설을 위해 작가는 자신의 악마인“시꺼먼 놈”에게 영혼을 저당 잡혀야 했을 만큼 그 꽃 같은 시절로의 회귀는 간절함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었던 것 같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에세이처럼 펼쳐지던『해산 가는 길』이라는 작품의 연작으로서 『보리 닷 되』는 인생길의 선택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성년 이행기의 자전적(自傳的)소설이다. 작가의 문단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신춘문예 당선작인, 단편소설「목선」이 탄생하기까지의 젊은 날의 치기와 오기에서부터 실패와 성공에의 갈등, 그리고 영원히 계속 될 것 만 같던 좌절의 운명을 교정하는 집념의 시간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흐른다. 가부장제의 전통, 병영국가의 획일적 군사문화, 겉보리 닷 되로 상징되는 가난한 삶의 끈적거림에 대항하고, 애틋한 사랑과 세속적 성공이 소설가 시인이 되고자하는 청년의 삶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친다.

빗나가기만 하는 형의 그릇됨을 방기하여 장자세습의 전통에 저항하는 둘째의 심리가 비밀스럽게 고백되고,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학교 악대원이 되어 엄격한 획일성을 강요하는 교련시간을 피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본성을 엿보게 된다.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거예요.”라는 소박한 꿈은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과는 괴리된 실패의 삶으로 이해되던 시절에 아버지로부터도, 연인에게서도, 형제로부터도 외면되는 것이었으니, 집안의 일손을 돕기 위해 쟁기질하고 김을 뜯어야 하는 문학청년의 번민은 자신의 현실이 과연‘성공을 준비하는 것인지, 실패를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시름을 깊어만 가게만 한다.

한편 소설에서 주인공‘승원’은 오금의 고질적 피부질환으로 수시로 긁어대는데, 바로 이“오금의 환부”는 긁어대어 진물이 나고, 딱지가 앉아 걸음에 불편을 주는 고통이지만, 마구 긁어대면 가려움과 아픔을 한 순간에 덮어버리는 환장할 것 같은 쾌감이기도 하듯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역설이자 인생의“모순된 슬픈 거래”로서, 스스로 극복해야 할 장애로서 따라다닌다. 그래서 이 오금의 가려움증이 낫게 될 때, 비로소 성장의 통증은 치유된다.

“소설가의 말로는 좋지 않다”는 아버지의 반대에 저항하여 가출하고는 머슴살이의 반복되는 노동에서 언덕위로 돌을 나르는 시시포스의 영원한 형벌을 생각하지만, 바로 이 영원할 것만 같은 동어반복의 고통에서 탈출시키는 것은 자신일 뿐이라는 깨달음, 그리고“오직 혼자만의 지혜와 판단과 힘으로 이를 갈면서 올바른 물길을 찾아 배를 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바닷가 거룻배 위의 교훈처럼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이 삶임을 어느 순간 우린 터득한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원고지 팔십팔 매의 단편소설「목선」이 게재된 신문을 아버지 영정 밑에 걸면서, “아버지 제 고집이 이겼습니다.”라는 주인공의 울음석인 자부심의 목소리가 짠하게 울려온다. “실패를 준비하는 삶을 기록하는 것”이 진짜 소설 아닌가? 하는 주인공의 외침처럼, 우린 누구나 다 이렇듯 자기만의 부대낌과 통증을 앓으면서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이제 고향 장흥으로 돌아가 해산 토굴마당에서 소설가로서 그의 문학적 뿌리가 된 꽃 같은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는 이 소설에서 진정“파릇파릇 새싹들”이 움트는 것을 확인케 된다. “시쓰기와 소설쓰기에 확실히 미쳐버린다는 조건”으로 영혼을 맡기겠다는 계약을 한 작가처럼 내게 다시 세월을 돌려준다면 난 무엇을 약속 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품에 안겼을 때 맡아지던 유향, “곡신(谷神)의 향기”라 했던가? 아름답게만 기억되는 그 철없던 어린 시절이 문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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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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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이란 이 자전소설은 조지오웰이라는 필명으로 본격적 작가의 인생을 시작한 1933년 발간된 그의 최초 작품이다. 오늘의 경제적 사회적 현상과는 사실 많은 괴리가 있지만 “가난 그 자체”를 쓰려했다는 작가의 선언처럼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 본질과 이를 만들어내는 사회, 사회의 왜곡되고 편협한 시선을 교정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탐지할 수 있다.

소설로 분류되고 있지만, 파리 빈민가의 하층민들과 섞여 그들의 힘겨운 일상과 호텔 접시닦이 등을 통한 생존을 위한 분투와 런던 구빈원을 들락거리며 걸인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본성을 통찰하는 일종의 밑바닥 삶에 대한 체험기이자 사회고발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여인숙 숙박비와 빵 값을 조달하기 위해서 일자리 찾아 헤매지만 청소부, 접시닦이와 같은 허드레 일도 주어지지 않는 일상이 지속되고, 급기야 굶주림과 하늘을 가린 냄새나고 불결하며 조잡한 안식처인 여인숙마저도 유지하기 힘든 날이 계속 된다.

“사람이 처음으로 가난에 부닥치게 되면 아주 묘해진다. ~ 무시무시하리라 생각했지만 그저 궁상맞고 진절머리가 날 따름이다. 처음에 발견하는 것이 특유의 구차스러움이다. 편법과 비굴한 쩨쩨함...”

그리곤 가난이 지닌 장점으로 가난은 미래를 말살해버리고, 마침내 밑바닥까지 왔다는 안도감이 주는 쾌감을 말하는데 이르면, 가난이 사람을 정상적으로 온건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을 왜 포기하게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욕설이 난무하고 허리를 펼 수조차 없이 낮은 지하의 지저분한 호텔 주방에서의 접시닦이로 하루 17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리면 잠이“휴식이라기보다는 관능적인 무엇, 즉 탐닉과 같은 것”이라는 잠의 진가를 말하는 화자(話者)의 고통이 그대로 전달된다. 현대의 노동자란 사실 노예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임금에서 일전 한 푼 저축하기 불가능하고 겨우 연명할 정도이며 죽도록 아니 악착같이 일하지 않으면 그나마 기다리는 것이 헐벗은 굶주림 박에 없을 때 선택이란 자유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유일한 휴가는 해고당했을 뿐이라는 자조(自嘲)섞인 유머는 육체적 노동을 숭배하고 신성하다고 부추기는 맹목적 설교의 허위를 강타한다.

런던으로 건너와 전당포에 잡혀먹을 옷가지조차 없게 되자 부랑자 구호소를 전전하게 되는데, 부랑자가 재활 할 수 없도록 조장하는 당시의 구빈시스템을 고발하고, 나아가 물질주의에 침몰된 상실되어가는 인간 존엄성과 자선, 구빈을 말하는 사회주체의 위선, 가진 자들의 폭력적인 격리체계임을 지적하고 있다. 단지 적절한 생계비를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경멸 받는 부랑자들, 결국 능력이니, 효율성이니 하며 돈이 미덕을 가늠하는 위대한 척도가 되어 이 기준에 맞지 않기에 멸시당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란 것이며, 만일 구걸로 돈을 많이 벌어들인다면 존경 받는 직업이 될 것이라고 자본주의 물질 지상의 이념에 조소를 보내기도 한다. 예배를 조건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교회의 위선적인 자선이 그네들에게 얼마나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지, 생활방식의 결과를 원인으로 호도하여 편협한 잣대를 들이대는 무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은 타고난 악덕이 아니라 바로 영양실조였다.”라는 사회 편견에 대한 냉소적 시정의 이 한마디는 이 작품의 전체를 설명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비록 한 세기라는 격세지감이 있지만 소외받는 하층민과 빈곤에 대한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케 하여 사회 공동의 일원으로서 우리들의 자세와 태도 교정에 소박한 일조를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930년대의 영국과 프랑스 사회 서민들의 일상을 보는 사료적 재미뿐만 아니라, 오웰의 이후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경험과 시선을 만끽 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엿보는 기회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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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소설집에는 예나 지금이나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실상을 우화적으로 비판한, 오웰의 작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준 <동물농장>이 수록되어 있는데, 봉사의 즐거움과 노동의 존엄성에 대한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기만을 하는 지배자의 탐욕이나, 당시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권력투쟁과 사회주의의 폭력과 위선, 그리고 실패에 대한 엄중한 비판을 읽을 수 있다. 볼쉐비키의 멘쉐비키에 대한 잔혹한 처단이나 인간 해방을 부르짖는 이면의 암울한 실상이‘수퇘지 나폴레옹’이란 독재자를 통해 비유적으로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다. “누가 돼지인지 누가 사람인지 구별하기란 이미 불가능 했다.”고 맺는 이 소설은 인간이란 자기 자신 이외에는 다른 어떤 동물의 이익을 위해서도 봉사하지 않는다는 개인 이기주의 본성에 대한 신랄한 반성의 토대를 제공하기도 한다.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는 고전은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그 재미를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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