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의 귀향.꿈의 노벨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7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모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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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기말을 전후하여 인간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강요하는 전환의 시기에는 항상 인간을 분열적인 존재로 비치게 하는 그 무엇이 불안을 증폭시키는 모양이다. 20세기를 전후하여 독일사상의 한 축을 차지하는 프로이트, 말러, 클림트, 호프만슈탈, 베어호프만 등과 함께‘청년 빈파’의 일원이었던 슈니츨러의 작품들은 그래서 왠지 모를 수치심과 분노, 무력감이 교차한다.
두 편의 소설이 수록된 슈니츨러의 이 작품집은 젊고 자유분방한 욕망의 화신으로서의 카사노바가 아니라 노회하고 영락한 카사노바를 그리고 있는가하면, 제도적 결혼의 내밀한 분열을 도덕적 편견과 숨겨진 욕망의 갈등이라는 꿈의 환상을 통해 심리적 일탈을 겪는 부부의 내면을 쫓고 있다.

카사노바의 귀향(Casanovas Heimfahrt)에 대해서

중노년기에 접어든 카사노바, 한 때의 광채가 서서히 꺼져가는 모험가의 누추한 모습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사랑의 보금자리를 위한 하룻밤 동안에는 현세의 온갖 명예와 저세상의 온갖 지복도” 관심 밖이었던 사람, “열망에서 욕망으로, 욕망에서 열망”을 추구하던 영원한 젊음의 심벌같기만 한 카사노바의 늙고 낙망하여 실존의 위기에 처한 모습은 아주 낯섦, 그것이다. 추방당하여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하던 차에 자신의 작은 도움으로 부유한 중산층으로 일어난 추종자의 초대를 받게 되고, 그 저택에 기거하는‘마르콜리나’라는 처녀에 대한 욕망으로 포위된다.

“욕망의 온갖 격정과 청춘의 모든 활력이 혈관을 통해 흐르는 것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나는 그 당시의 카사노바가 아닌가?”더구나 “그 보잘것없는 늙음의 법칙이 왜 내게도 적용돼야 하는가.”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부인은 교활하고 기만적인 사건을 만들어낸다. 카사노바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심드렁한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그녀의 애인인 청년장교 로렌초의 노름 빛을 대신 청산하여 주기로 하고 캄캄한 밤에 로렌초로 변장하여 침실로 잠입한다는 거래를 성사시킨다. 격렬한 정사를 치루고 성취에 취하여 깊은 잠에 빠져 날이 밝기 전에 내뺀다는 계획은 그르치고 만다.
수치심과 경악에 빠진 마르콜리나의 눈길에서 그는 “도둑놈, 난봉꾼, 악당”이란 분노를 본 것이 아니라 그 눈이 하는 말은‘늙은이’라는 것이었으니, 이만큼 그의 정체성, 존재를 명료하게 확인시켜 주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말처럼“늙음이 젊음을 형용키 어려울 만큼 속죄할 수 없는 능욕”이상임을 의미한다.

이‘에로스적 합일’의 파렴치하고 기만적 연출은 오히려 젊음과 남성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아니라 신화의 파괴, 정체성의 상실, 도덕적, 인간적 몰락이란 자기파멸의 재촉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에 더해 수치심으로 도피하다 마주친 로렌초를 죽이게 함으로써 젊음을 동일시한 카사노바의 신화적 정체성을 완벽하게 제거해 버리고, 이것도 부족했던지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와 여관방에 피로해진 몸을 누이는 카사노바를 꿈도 꾸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한 채 그저 잠들게 한다. 아마 이처럼 철저하게 신화를 파괴하는 작품도 드물 것이다. 결국 죽어서야 영속성을 얻는 자연의 순리가 이렇게 엄숙할 줄이야. 늙음, 늙은이가 되는 것에 저항할 길은 없다. 저항할수록 수치심만 깊어질지니...

꿈의 노벨레(Die Traumnovelle)에 대해서

이 작품은 니콜키드만과 톰크루즈가 열연한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Eyes Wide Shut, 1999)'의 원작이다. 내면의 심리적 묘사로 이루어진 소설이다보니 영화도 꽤나 몽환적으로 그려졌다는 기억이 든다. 가장무도회, 일탈, 에로티즘, 꿈과 현실, 현실과 꿈의 미묘한 교차와 혼동이 불러내는 은폐된 갈망의 모습들이란 언어만으로도 이미 선명함을 거부하는 내밀한 무엇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아내 ‘알베르티네’의 꿈으로 은폐된 현실의 욕망, 남편인 의사‘프리돌린’의 현실 속 욕망의 꿈에서 우린 포장된 거짓 환상이라는 위험한 심리적 위기를 읽게 된다. 꿈속의 에로스적 희구와 심리적 일탈을 고백하는 아내, 이와는 달리 현실에서 이중적 삶을 꿈꾸는 남자의 행로는 부부이지만 “우리 사이를 가르는 칼 한 자루”가 놓여있는 것처럼 각자 서로 낯선 다른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소설의 제목에 있는‘노벨레(Novelle)'란, 본디“하나의 갈등구조를 정점까지 고조시키는 드라마적 구조를 갖는 산문이나 운문”을 의미한다고 한다. 특히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이“이중 노벨레 (Doppel-Novelle)”였다고 하는 것은 프리돌린과 알베르티네의 에로스적 모험을 고조시키는 이중구조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평범한 우리네들의 내면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인데, 우린 사회의“금지령과 규정, 성적인 터부와 명예에 관한 불문율” 때문에 마치 모든 것이 안정된 것처럼 질서와 균형을 잡아가며 살고 있지만, 열정적 포옹과 애무에서도 예정된 고난에 대한 예감 때문에 몹시 우울한 느낌이라는 아내나, 늦은 밤 돌아와 아내의 몸에 닿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그 멀고 낯선 감정의 세계와 같이 내면의 세상은 비밀스럽고 위선적이기도 하다.

부부 사이에 드러낼 수 없는 숨겨진 욕망과 잠재된 갈등이 사회적 안정의 욕구와 에로스적 일탈의 심리를 반복하며 환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종국에는 양자 모두 에로스에 대한 기대의 포기로 위기를 극복하고 제도와 규범, 안정을 선택하지만 내적 결속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이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일면 외관상의 행복이 찾아온 것 같지만 침실에 나란히 누워있는 부부가 꿈을 꾸지 않고 있다는 작가의 짓궂음에서 왠지 쉽사리 깨질듯 한 유리병을 상기시킨다. 규범, 제도, 정체성,...이러한 모든 것들, 즉 사회적 장치에 얽매여 놓칠 수밖에 없는 많은 것들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꿈이나 꾸어야 할까? 아니면 좀 냉소적으로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내면의 흐름이 돋보이는 뛰어난 심리극이라 해야 할 것 같다. 30~40대의 부부들이 한 번쯤 읽어 볼 만 한 작품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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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 이야기 3 - 남방의 웅략가 초 장왕 춘추전국이야기 (역사의아침) 3
공원국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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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중국의 고서들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옮겨오는 여타의 이야기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12권의 저작은 신선하다. 서로 다른 내용의 진위를 검증하고, 허구에 불과한 진술이라면 왜 그러한지, 역사는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지, 오늘에서 우리가 발견하고 새겨야 할 것은 진정 무엇인지를 말하는 역사서이다. 지리적 역사성은 물론, 지역의 특수성과 당대의 역학적인 국제질서, 정치문화적 당위성의 배경에 대한 고증에서부터 『사기』,『여씨춘추』,『국어』,『신서』,『좌전』에 이르는 총체적인 사서들의 비교분석까지 실로 방대한 작업의 산물로서 저자의 노력을 읽을 수 있는 저술이다. 아마‘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서구 고대사를 대표한다면, ‘공원국’의 『춘추전국 이야기』는 동양 고대사로서 이를 뛰어넘는 저술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춘추시대란 기원전 8~5세기경 중국대륙의 고대국가들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할거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방대한 저술 중 제 3권인 「남방의 웅략가 초(楚)장왕(莊王)」은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이라는 나라를 등장하게 한 기원전 7세기말~6세기 초의 중원 중심의 중국관을 요동치게 한 역사의 전환 시기라는 측면에서 예사롭지 않은 관심을 가지게 한다. 소위 남쪽의 오랑캐라고 치부하던 화하중심의 중국인의 허세를 여지없이 허물어대는 독자적인 남방문화의 발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초가 등장하지 않았으면 중국의 팽창은 거기서 멈추었을 것”이라는 역사인식처럼 황하이북의 중원의 낡은 사상만으로는 팽창하는 세계를 담지 할 수 없었다는 이해이다. 초(楚)의 대두는 그만큼 오늘의 중국을 이루는 결정적 역사의 대사건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한수와 장강을 끼고 있는 물의 나라, 물을 빼고는 말 할 수 없는 나라인 楚는 이미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흐르는 물은 소통의 물이자 싸움의 물이다.”라는 구절처럼 문물의 자연스러운 교통을 만드는가하면 곧 갈등이 도사린 불온의 상징이기도 하다. 힘이 강대하면 세력의 확장을 위한 유용한 통로이지만 반대의 상황에는 그만큼 불리한 것이다. 역사는 양면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기원전 614년에 왕에 등극한 장왕(莊王)은 춘추오패 중 한 사람으로서 당대 중원중심의 무대에 초라는 나라를 등장시킨 인물이다. 일개 오랑캐로 치부되던 남방의 한 나라가 영토를 확장하며, 중원의 패권국으로 자임하던 진(晉)과 제(齊), 그리고 진(秦)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패자로 부상하였으니, 중원 중심의 중국 역사는 새롭게 재편되어야 했을 것이다.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초나라를 등장시킨 핵심 인물인 장왕, 그리고 장왕이 그러할 수 있도록 조력한 재상‘손숙오’의 됨됨이에 대한 기록은 그대로 정치학이고 도덕철학이 되고 삶의 지혜가 된다. 유명한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고사처럼 장왕의 관대함은 돋보인다. 아랫사람을 끔찍하게 아꼈던 군주, 무(武)란 무릇 창을 멈춘다. 즉, 지과지무(止戈之武)를 말하며, “포학한 것을 금하고, 병기를 거두어들이며, 큰 것(나라)을 지켜가고, 공업을 안정시키며, 백성을 평안히 하는 것”이라 말하는 멈춤과 절제, 바름(正)의 정신이 선 군주가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어쩜 당연하게 보이기조차 한다.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을 때, 죽은 적군을 위해 슬퍼하고 승리를 상례로 처리하는 자세는 적에게까지 외경을 갖게 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중원의 패자인 진(晉)의 남하를 경계하기 위해 진의 위성국들인 정(鄭)과 송(宋),진(陳)등을 복속시킬 때에도 한 결 같이 무력보다는 화해와 동반자로서의 협력을 요구하는 덕의 정치의 진수를 보게 된다.

이와 더불어 『사기』에서 훌륭한 관료의 원형으로 칭송되는 재상,‘손숙오’의 청렴과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관료의 미덕은 장왕의 무사(無事)를 보완하는 탁월한 정책가로서 초의 성장을 주도한다. 이들 장왕과 손숙오의 사상적 배경으로『노자』사상이 깃들어 있음을 설명하는 장은 이 저술의 또 하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운동은 관성의 지배를 받아 평형에서 멈추지 못하지만 멈출 줄 아는 것, 자신의 임계점을 명확히 인식하려 한 것이나,“골짜기는 낮은 곳에 처하기에 물을 받아들인다.”는 노자의 정신이 그대로 스며들어 그 낮춤이 주변국을 초에 끌어들임으로서 패자로서의 성장 동인(動因)이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인물의 해독에 못지않게 당대의 국제질서와 사건들에 얽힌 사회, 경제적 배경이나 각 나라들의 정치적 상황, 하물며 군제나 토지제, 기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치밀한 설명들이 왜 그러한 역사를 만들어내게 되었는지를 명쾌하게 납득시키고 있기도 하다. 일례로 초와 진(晉), 양국에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낸‘언릉 전투’에 얽힌 진의 충신‘사섭’의“밖이 편하면 반드시 안의 우환이 있습니다.”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에 대한 충언은 이 저술의 매력적 구성을 대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사건과 그와 관련한 고사, 그리고 그 의미에 내재한 파급적 현상들이 미시적이고 때론 거시적 관점을 아우르면서 역사적 통찰을 해내는 것이다. 이로부터 오늘의 우리가 되새겨야 하는 지혜들은 정말 번뜩인다. 전쟁과 권력과 정치의 상관관계, 그리고 도덕성의 문제에 까지.

이 저작의 비판적 시각이 특히 돋보이는 것은 중원 중심의 북방 연합을 와해시키고, 춘추질서의 새로운 담지자로 등장한 초나라에 대해 중원과는 다른 강한(江漢)일대의 토착문명을 기원으로 독자적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재조명하고, 인간에 대한 관념적 선진성을 지닌 초의 사상과 문화를 흡수함으로서 비로소 초라하고 낡은 중원을 탈피해 중국의 팽창이 가능해졌음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중국 고대 한자 기록의 5할은 허구라고 초나라를 저평가한 편협한 중화사상과,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면 보이는 중국인들 특유의 정신승리법인 허세의 위선을 비판한다. 주 왕실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왕을 칭하며 황하가 아니라 한수와 장강에 제사를 지낸 남방의 패자, 낭만과 실용의 정신, “눈보라의 차가움과 꽃의 정열이 한꺼번에 있는 곳”, 초(楚)의 문화를 비범하게 읽게 해주는 걸출한 역작이다. 빛나는 성찰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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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 1 홍신 엘리트 북스 13
서머셋 몸 지음 / 홍신문화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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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상태의 실정적 요소들에 사람이 어떻게 강제되고 그래서 순수한 이성에 때가 묻는지, 그런데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이 쌓인 후에 그 영상들을 천천히 감상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것을 성숙이라는 말로 터무니없이 포장하고 비로소 적응했다고, 온전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하는 황당함에 욕지기가 치미는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분노가 치미는 것이다.
이런 불쾌감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잘 길들여진 순한 양처럼 온갖 전략적인 사회적 장치들에 순응하여 살아 온 삶이 불현 듯 항의 할 구체적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필립’이라는‘서머셋 몸’의 소설 속 분신인 인물이 소년에서 장년에 이르며 마주하는 삶의 그 수많은 감정적 요소들이 마치 지금의 내가 감당해 온 삶의 역사와 다를 수 없다는 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일 게다. ‘몸’의 자전적 소설인 이 작품의 표제가 몇 차례의 변경 끝에‘스피노자’『윤리학』의 한 표제인「인간의 굴레」를 인용한 것은 사회의 유무형의 힘인 장치들이 작동하는 현장에 포획당하지 않고 그 속성을 관찰 할 수 있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바로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이 빛나는 통찰의 언어만으로도 소설은 이미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린 어린 시절 가족들에게서 그리고 학교라는 집단의 규범 속에서, 또한 이상과 취향에 따른 또래들과의 상호작용에서, 나아가 이질적인 보다 큰 사회의 무리와 소통과 단절을 지속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구축해 나간다. 그러나 이 자신만의 삶이란 것이 순전히 개인의 자율로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가족, 학교, 또래집단, 사회의 이상과 규범으로부터 무언의 강제와 주입의 영향 하에 내면화되는 것이니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면 삶이 그리 순탄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의사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어린 필립은 목사인 백부와 백모의 슬하에서 성장하게 된다. 아이가 없는 백모의 헌신적이고 조심스러운 사랑과는 달리 인색하고 속물적인 백부의 위압적인 훈육은 다리를 저는 아이의 사회성을 위축시키고 모든 언어와 행동을 내면으로 숨어들게 한다. 왕립학교에서의 생활은 절름발이 소년에 대한 또래의 공격과 조롱에 대한 저항과 순응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속성의 본질을 터득케 하고, 교사와 교장이라는 어른들, 기성 사회의 졸렬하고 구차한 삶의 위선들을 관찰하는 시간이 된다. 대학 진학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정형화된 구속을 벗어나기 위해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향하는 필립의 저항적 행위는 청년으로 성장하는 소년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거름이 되지만, 자기 삶에 대한 주도적 능력을 기르지 못한 상태에서의 자유란 자칫 공허한 맹목의 방황 이상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몸은 이 시기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새롭게 인식되는 보다 다양한 삶의 모습들에 대한 경험과 이해의 과정, 그 자체로서 기억될 뿐이다.

한편, 필립에게 생의 불안정성, 한계를 암시하는 기호로서 부모가 남긴 2000파운드의 유산은 그의 삶을 실용적인, 아니 속물의 시선으로서 세상을 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결국 학업보다는 런던의 회계사무소 보조원으로서 안정적 직업으로 예견되는 생의 수단에 목적을 두지만, 이내 미술 스케치에 대한 주변의 칭찬이 자신의 뒤늦은 잠재력을 발견한 것인 양, 파리의 미술학교로 태도를 전환한다. 여기에서 통상 아이와 부모들은 갈등하고 반목하게 되는데, 직장을 이내 그만두고 돌연 미술공부를 하겠다는 인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아이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자기 삶의 그럴듯함에 도취된 아이의 대립이다. 상충하는 인식들, 즉 인간의 삶에 유용하다고 간주된 방향을 향해 운용되고, 통치되며, 지도되는 실천과 앎, 제도의 세계에 대한 부딪힘의 결과는 체험만큼 훌륭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서로 달리 습관화되고 내면화된 개인의 규범은 보다 보편적일 수 있는 기성의 장치에 종속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리에서의 미술학교 생활역시 자신의 역량에 대한 깨달음, 일종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는 재능 없는‘프라이스’라는 동료의 죽음은 이류 화가로서의 불투명한 미래를 확인케 되는 계기가 된다. 이 역시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이해보다는 생계의 원활한 수단으로서 자신의 미술세계가 가능치 못하다는 판단에 연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성사회의 장치에 타협하는 것이 그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결론은 확실한 소득을 가져다주는 직업의 길을 걷는 것이 된다. 아마 소설의 실질적 시작은 이제부터라 할 수 있는데,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하는데 걸린 10년의 세월에 걸친 삶의 이야기이다.

여기 출발점에 서서 필립이 하는 위대한 말이 있다. 이는 그의 인생이 사회와 본격적으로 부딪히는 20대의 장구한 시간이 놓여있는데, 그 한 복판에‘밀드레드’라는 그의‘굴레’가 드러누워 있다. 밀드레드라는 천박하고 간특한 여성의 행동과 교차하며 사회의 속성을 선언하는 가히 몸의 빛나는 통찰력의 진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과의 투쟁에 있어서 사회는 세 가지의 무기를 가진다. 법률, 여론, 양심이 그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술책으로 대항 할 수 있는 무기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술책만이 강자에게 대항 할 수 있는 약자의 유일한 무기이다. ~ 中略 ~ 국가라는 유기체와 자의식을 가진 개인, 이 양자가 화목하게 손을 잡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며...”
즉 사회의 실정성을 이루는 장치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삶의 지혜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필립은 찻집의 웨이트리스인 밀드레드란 여인에 사로잡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지만 여자는 사랑은 물론 그 어떠한 것도 필립에게 진실로 내어주지 않는다. 모욕과 좌절, 수치심만을 안겨주는 여인에 대한 갈망은 그 만큼 자기모멸을 심화시킬 뿐이다.

필립의 사랑과 돈을 마음껏 유린하곤 건달과 살림을 차린 탕녀가 건달의 아이를 임신한 채 잊혔던 필립을 다시금 찾아와 수단으로 그를 이용하며, 필립의 친구와 사통하는 과정은 진정 교활한 장치와의 타협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회와의 타협이란 것이 이처럼 구역질나는 술책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마 암이겠지만 죽을병에 결려서야 다시 찾아온 탕녀에게 비로소 내보이는 냉소적 연민은 사회와의 타협점을 암시한다. 마침내 밀드레드란 굴레를 벗어나 중단되었던 의사수업과 면허의 취득, 그리고 순수한 이성, 겸손과 배려의 미덕을 갖춘‘샐리’와의 결혼으로 맺는 이 소설은 인간의 성장기에 거치게 되는 의례들을 삶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권력의 장치들과 연계하여 다면적이고 또한 규범의 안팎을 종횡하면서 관찰하게 해준다.

오이코노미아, 실정성, 장치, 규범과 이상이라는 정체성처럼,  그 용어와 의미의 범위의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사회의 행동을 지배하는 모든 유무형의 전략적 힘으로서‘굴레’라는‘서머셋 몸’의 철학적 통찰을 실현한 이 소설은 가히 천재의 면모를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과연 선의지에 의한 순수이성만으로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삶이란 어느 만큼은 술책을 용인하여야 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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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덴티티 경제학 - 정체성이 직업.소득.행복을 결정한다
조지 애커로프 & 레이첼 크렌턴 지음, 안기순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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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판단이자 결론일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모든 이론과 학문은 결국 한 장소로 모이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한다. '아이덴티티(Identity)', 즉 정체성(正體性)이란 개개집단 또는 개인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하는 환경과 집단 내 인간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내재화되고 습관화된 특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이는 그간의 사회분석을 지향하는 여러 성찰에서 용어를 달리하긴 하지만 개인과 사회집단의 행동을 지배하는 요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일례로 푸코나 바디우가 말하는 소위‘장치’라는 것처럼 제도와 규범, 사회적 취향등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배경의 상호작용이 인간의 행동을 억제하거나 방임하는 형태로 작동하는 힘이라고 역설한 것과 상통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덴티티 경제학’이란 이 낯선 경제학의 새로운 접근은 전통 경제학이 설명하지 못하거나 놓치고 있는 인간의 인지적 편견과 심리학적 발견을 반영한 행동경제학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실제 효용의 선택에 있어서 개인이 소속된 사회집단의 배경에서 비롯되는 선호나 취향이라는 정체성, 다시 말해서 사회적 맥락에 기인하는 동기에 의해 효용을 결정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정체성 개념을 사용하면 현대경제학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명예나 의무는 물론 성차별, 인종차별, 조직 갈등 등 사회 제반의 현상이 규명 가능케 되어 그 현상의 원인과 치료에 대한 탐색의 범위를 넓혀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실례(實例)를 위해 기업조직과 교육,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 빈곤과 인종차별의 현상에서‘정체성’이 결정적인 동기임을 밝혀내고 있다.

저자들은 이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 개인이 어떠한 집단적 소속 또는 위치에 포함되거나 포함되려하는 지라는‘사회적 범주’와, 그 집단 또는 사회의‘규범과 이상’, 그리고 ‘정체성 효용의 이익과 손실’의 저울질을 중심으로 인간의 동기가 사회적 맥락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소개되는 실험사례나 관찰된 일화는 우리 사회가 해명하지 못하거나 이론(異論)으로 분열되어 갈등을 겪고 있는 현안 문제들이어서 이해와 관심을 집중시킨다. 일례로 기업경영자들을 아주 혹하게 하는 매력적인 장으로, 기업조직의 갈등을 해소하고 효율적 경영관리를 위한 영감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인데,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의 공정한 설정은 생산성과 연대하여 항상 고민에 빠뜨리는 부분이다. 어떤 조직이든 조직의 이상과 규범에 충실한 부류와 이에 반발하는 부류가 있다. 충성하는 집단을‘인사이더’라 하고, 적대하는 집단을‘아웃사이더’라 하면, 인사이더는“적은 노력을 기울일 때 정체성 효용을 잃지만 아웃사이더는 자신이 일부라고 느끼지 않는 조직에 많은 노력을 투입할 때 오히려 정체성 효용을 잃는다.”이 경우 아웃사이더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한다고 해서 과연 생산성이 제고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실제 많은 기업들이 금전적 인센티브로 효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군대조직이나 대기업들이 자아상을 효과적으로 변환시켜 공동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형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신입 생도나 직원에게 입사초기에 강도 높은 혹독한 훈련을 실시하는 원인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아웃사이더를 인사이더로 전환시키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다. 단 이 전환비용, 즉 정체성비용이 아웃사이더의 생산성 저하로 인한 손실보다 적은 수준에서 실시 될 것은 물론이다. 목표 달성도 하고 자원을 저감시킬 수 있는 효과적 발상을 자극하는 다양한 일화들은 일선 경영자들에게 분명 유용한 장이 될 것이다.

한편, 우리사회는 물론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교육문제처럼 민감하고 집단을 분열시키는 주제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효과적으로 만드는 사항들, 개혁프로그램의 성공과 실패 원인, 학생이 학교에 가는 이유, 교육수요의 파악”등에 이르기까지 학부형, 교사, 교육 정책자에 아주 긴요한 시각을 제공하는 정체성과 교육경제학의 장은 이즈음의 우리사회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실로 적시(適時)의 내용이 아닌가 한다. 아웃사이더가 되어 교사와 학교에 적대감을 갖는 학생이나 그들의 집단이 지향하는 정체성의 효용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순간,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학생과 학교, 교사가 상호 동일시하고 일체화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면, 기존 경제학의 주장처럼 학생의 기술과 미래의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는 기계적 교육의 편협성과 어떠한 사회갈등의 봉합을 위한 처방도 제시하지 못하는 헛된 정책을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규범이나 이상의 변화와 같은 정체성으로서만이 비로소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경제적 분석과 판단을 가능케 하는 예가 풍부하다. 남녀에게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직업이 서로 다른 것이나, 이 남녀라는 성의 구분이 희석되어 어떠한 시장구조의 변화도 없음에도 직업의 구분이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현상역시 정체성으로 해독할 수 있다. 소수자 우대정책이나 직업훈련프로그램과 같은 공공정책의 수립에 있어서도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가 의미하는 정체성의 반영은 절대적인 경제적 의사결정에 있어 필수적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개인의 자선행위나, 광고, 정치행위, 나아가 증오와 폭력, 범죄의 행위까지 정체성이 경제분석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는 이유로 설명되고 있다.

행동방식에 대한 규범은 사회적 맥락에서 사람들의 지위에 따라 결정되며, 동기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변한다. 어떤 행동은 소비를 증가시킬 수도 있지만 정체성에 대한 효용을 감소시킨다. 한 개인은 이런 상충관계에 균형을 맞춤으로서 효용을 극대화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개인의 효용 선택은 전통 경제학처럼 합리적 이성에 의한 선택도 아니며, 그렇다고 인지적 편견의 작동에 의해서만도 아니다. 바로 개인이 속한 사회적 범주와 그 범주 속에서의 이상과 규범의 틀에서 결정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새로운 개념의 사회분석 틀을 접하는 순간 우리사회의 요즘과 같은 극단적 사회 분열의 해소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과 국가와 사회 및 경제적 문제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유용한 툴(tool)로 손색이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학문적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15년 남짓 된 출발점에 서있는 유아상태의 학문이다. 그렇다고 정체성 경제학 자체가 학문적 유아상태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고전경제학에 수많은 취향적 효능을 반영하고 심리적, 인지적 편향이라는 행동경제학의 토대위에 서있는 학문이다.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기 위해 어쩌면 반드시 밟아가야 하는 길을 정말 유일하게 안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간결한 언어와 일화로 짜임새 높게 압축된 정체성경제학을  개괄한 최초의 입문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산업 경제, 교육, 여성 및 노동분야의 정책자들, 정치 및 정당인들, 기업 경영자들에게 이즈음 반드시 읽어두어야 할 필독서로 권유하고 싶은 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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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지 오웰 지음, 김욱동 옮김 / 비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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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하게 읽힌 작품 중 하나여서, 또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인용되는 작품 중에 아마도 순위권에 들 정도로 그 노출의 빈도가 높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출판사 비채가 출간한 김욱동 교수의 번역 판본을 접하면서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이 작품의 감상을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이 어떻게 한국사회에 유독 많은 번역 판본을 갖게 되었는지는 아이러니이지만 추정되는 이유가 있긴 하다. 우리사회에 처음으로 번역 소개된 1950년대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 대결이 첨예한 장이었으며, 소위 우익은 이 소설을 소비에트연방으로 상징되는 공산주의의 패악과 실패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미에서 활용한 것이었고, 좌익은 노동자가 끊임없이 자본가에 의해 착취당하는 삶의 현실을 설명하는 효과적 도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극렬한 이념의 갈등이 낳은 참으로 모순되는 좌우의 아전인수는 이 작품을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은 읽어야 되는 권장도서가 되는데 서로 이의가 없었다. 여기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 작가의 의도를 떠나 얼마나 다양한 관점으로 읽히고 서로 다른 해석을 갖게 하는지, 바로 이것이 문학특성의 일면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게 하는 것이다.

소설은 장원농장의 주인인 인간‘존스’로부터 동물들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착취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려는 동물의 반란과 이후 동물들의 공동자치, 그리고는 권력의 갈등과 지배권력의 등장, 다시금 반복되는 계급사회와 노동력 착취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무력한 동물들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사실 너무도 극명한 플롯으로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인간과 인간사회, 그리고 사회주의를 나아가서 당대 소비에트연맹(구 소련)을 상징하는 동물들과 동물농장을 통해 후기산업자본사회의 노동자인 대다수 시민들의 비참한 삶의 현실과 부와 권력의 비열한 기만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견 스탈린의 소비에트연맹 건설이란 특정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소설의 인물과 사건들을 실제의 인물들과 사건의 연장으로 해석하면 그야말로 단순명료해져서 정작 작품의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의도들을 놓치고 말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소비에트공산주의의 초기 권력투쟁이나 자본주의 사회와의 갈등과 기만적 협력이라는 협소한 틀에 고정시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단지 하나의 가능한 독해로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지, 마치‘조지 오웰’이, 이 작품을 하나의 단순한 맥락으로만 썼다고 주장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자본권력이 무산계급인 노동자의 노동력 착취기반에 서있음으로서 이 구조는 여하한 방식으로 개선하여야 할 당위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 소재는 하나의 구성요소일 뿐이지 소설의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을 획득하고 권력을 유지 존속키 위해 계층을 다시금 분리하는 인간 사회의 구조적 본성에 대한 성찰이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발단은 농장동물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메이저 영감이란 돼지의 훈시로 착취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평등, 동물다운 동물(인간다운 인간의 은유)의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기본 권리에 대한 자각과 선동이다. 즉, 자본권력에 억압되어 착취만 당하는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혁명을 통해 개인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혁명이론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시작은 당대의 무산계급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주의의 염원으로 시작되지만, 이 후 돼지‘나폴레온’이 정적(政敵)인‘스노볼’을 무참히 쫒아내는 것과 같이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연상하게 하지만, 이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서의 권력에 대한 본성의 발현이라 보는 것이 오히려 현대적인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권력이 획득되었을 때, 또한 이의 유지존속을 위해 인간이 하는 행동에 대한 일련의 통찰로 보면 권력자의 정당성 확보와 특권의식의 발효, 시민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두려워하는 요소를 통해 언로를 차단하거나 반대의견을 묵살하는 사악한 논리전술을 볼 수 있다. 동물들의 회의(懷疑)와 반대가 예상되는 정책을 권력자의 의도대로 실현코자 할 경우, 동물들이 끔찍스럽게 싫어하는 인간‘존스’나 추방된 ‘스노볼’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여 아무도 이의를 말 할 수 없게 하는 형식이다. “존스가 다시 돌아오는 거요! ~ 여러분 중에 존스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자는 아마 하나도 없겠지요?”이의를 달면 반동이 되는데 어느 누가 의견을 말 할 수 있겠는가? 한국사회에도 똑같은 패턴을 가지고 보수집권당이 한결같이 사용하는 전술이 있는데, 서민의 복지를 이야기하거나 정당한 배분과 같이 평등을 말하면 여지없이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는 것과 같다. 빨갱이에 동조하면 반역이 되고마는 희한한 왜곡전술인데 권력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가장 천박하고 사악한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동물농장은 권력의 탐욕, 사악함, 타락의 과정을 말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경쟁자를 숙청하고 추방하는 방법, 반대세력을 굴복시키는 방법, 추방된 정적을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법, 권력을 부의 축적수단으로 이용하는 방법, 특권화하고 계급화하는 수단과 과정 등 인간사회의 평등한 공동체의 구축이란 이처럼 어렵고 도달하는데 고통스러운 장애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랄 수도 있다. 소설에는 시종일관 시니컬한, 상황의 변화에 냉담함 혹은 무관심을 지속하는‘벤저민 영감’이란 당나귀가 있다. 이 자는 인간인 존스의 농장시절이나, 돼지 나폴레온의 농장시절이나 “굶주림과 고통과 실망은 변하지 않는 삶의 법칙”이라고 단순한 체제의 변화만으로는 시민 생활의 긍정적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네발달린 짐승인 돼지가 이윽고는 두발로 서서 인간의 흉내를 내기에 이르는데, 결국은 권력이 지향하는 것은 소유, 즉 물질을 향한, 그리고 차별을 통한 권위의 확보를 지향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소설의 결말은 인간사회에 하층계급이 있다면 동물농장에는 하층동물이 있으며, 더 열심히 일하면서 식량을 적게 배급받는 사회의 실현이라는 권력의 독재화, 전제화라는 권력이 부패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체제도 기만과 허위, 실패를 야기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해석을 한다면 소비에트공산주의의 위선과 실패를 고발했다고 하겠지만, 이젠 보다 폭넓은 읽기를 위한 독해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번역 판본에는 「문학과 정치」라는 김욱동교수의 동물농장과 조지오웰에 대한 해설이라 할 수 있는 평론이 80여 쪽 수록되어있어, 작가 오웰의 문학과 정치사상은 물론 소설 동물농장에 대한 심화된 읽기와 연구가 가능토록 지원되고 있다. 또한 소설의 본문에는 풍부하고 세심하게 주석들이 설명되고 있어 은유된 시대상과 결부하여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도록 되어있다. 이것이 자유로운 독서의 이해를 방해할 수 있음은 물론이지만, 이를 배경지식으로 참고한다면 초행길인 독서자에게는 유용한 안내자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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